겨울은 언제부터 나에게 슬픔이 되었을까? 겨울에 태어난 나로선 겨울은 나에게 생일이 다가오는 계절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겨울은 나에게 슬픔의 계절이 되었다. 2월 어느 목요일, 이날은 나에게 매우 슬픈 날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 금요일이 더 슬픈 날일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이제 3년째이다. 3년 상이란 옛날 말이 있다. 지금이야 근대문화에 따라 3일장만 하지만, 과거 조선시대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3년 동안 움막을 짓고 거기서 추모하던 것이 사대부의 도리였다. 분명 나는 사대부의 후손으로 사대부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이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세상이나, 부모 아래 자식 있고, 자식 위에 부모가 있는 게 법이다. 그 법이란 사회법이 아니라 자연법이란 인간사회를 넘어 우리 전체 세상에서 보는 관점이다. 겨울은 나에게 슬픔만 주는 계절이라고 했다. 이번 겨울은 나에게 너무 참혹했다.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물론 나이가 100, 생신 기념을 하고. 작년 201910100돌 행사를 했다. 그리고 201911월 말에 세상을 떠났다. 2019121일 발인을 했다. 2019년의 겨울계절이 되던 121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외할아버지는 1919년에 태어나신 분이다. 그때는 31 운동이 일어난 해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가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 외할아버지는 키가 작고 왜소하나, 매우 몸이 튼튼했다. 나이가 80이 넘을 때 20대인 나와 팔씨름을 하면 내가 언제나 지고 만다. 그 정도로 몸이 튼튼했다. 할아버지가 20대 시절, 일제가 우리를 어둠으로 가둘 때, 태평양전쟁이 터졌다. 할아버지는 강제로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을 당했고, 어디서 고생했는지 모르지만,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주변 친척과 이웃에게 그 이야기를 엄마가 들었다고 한다. 심한 노동과 구타 속에 여기 있다간 결국 죽겠다고 생각해서 할아버지는 탈출을 했고, 결국 살아남았다.

 

주민등록증으로 53년생이나, 실제 생일이 51년생인 엄마는 할아버지와 추억이 많은 분이다. 격담이나 인생이야기를 하면 외할아버지가 했던 이야기를 자주 한다. 외할아버지가 탈출하지 않았다면 엄마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터이다. 뉴스나 인터넷에서 징용당한 분이나, 특히 군함도 이야기가 나오면 외할아버지가 생각날 때가 많았다. 국가에서 매년 80만 원 정도 보상금을 받았던 것 같았다. 일본정부가 노동의 대가를 주지 않으니 배상금일 리가 없으니 말이다. 최근에 No-Japan 운동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던 사람이 외할아버지였다.

 

그렇게 일제에 의해 착취당하고 고통 받았으니 말이다. 이제 그분이 세상을 떠났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아픔이 잊어지기 전에 친구의 기일을 맞이했다. 바보 같은 녀석이었고, 남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조차 생각을 못하던 친구였다.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되었다. 시간이 빠른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이 너무 무심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버지 납골당에 찾아가고, 친구가 묻힌 수목장에 올라갔다. 정권이 바뀌어도 아직 노동자의 슬픔은 계속 되었고, 정권이 바뀌면 더더욱 큰 일이 터질 것 같은 세상이었다. 싸늘한 한파가 찾아오던 그 추운 겨울날 대학동기와 외롭게 둘이서 친구의 유골이 든 무덤에서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1월이 되자, 또 다른 슬픔이 찾아왔다. 경기도 요양병원에서 치매로 입원하던 작은할머니가 타계했다. 친가 쪽으로 어른 중에 마지막 어른이고, 어릴 적 내 기억에 남은 분들이 이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작은할머니는 돌아가기 전 치매엘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기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을 떠났다. 많이 슬픈 것까지는 아니나, 외할아버지 49제로 폐가로 남은 외갓집에 들린 후, 시골 친구에 들렸다. 그때 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잠든 묘소에 참배했다. 그곳을 가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아주 어릴 적애 형이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뜨거운 물로 인해 팔에 지우지지 않은 화상을 당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 화상자국은 지워지지 않은 형의 상징이다. 형이 화상을 당한 후 시골에 왔는데, 작은할머니가 어머니를 무척이나 야단을 쳤다고 한다. 아기를 어떻게 관리했기에 그런 흉터를 남겼냐고 말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애기, 그때 산소에 들려 성묘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3번째 제사를 맞이했다. 평생 고생하고 불우하게 사신 분이다. 노동착취, 인간소외, 가난이 무엇인지 나에게 지독하게 한을 남긴 사람이다.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모습을 세상에 대한 증오만 가득했다.

 

아버지가 떠나도 그때의 슬픔과 증오는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생일이 분명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인데, 왠지 모르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슬픔으로 가득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아직도 마음을 정리할 수 없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내 생일을 축하한다고 처갓집에 갔을 때 모두가 좋아해주었지만, 옆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떠나간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언제나 후회를 하는 동물이다. 지금 나는 언제나 후회하고 있다. 그때 만일 그랬다면 아버지가 더 살 수 있을 것인데, 그때 조금 더 알았다면 외할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던 한을 세상 밖으로 풀어갈 수 있었을 것인데, 인간은 후회하는 동물인 것 같다. 지금도 아버지 일만 생각하면 내 마음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고, 일본 아베정권이 하는 행동을 보면 외할아버지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온다. 왜 역사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끊임없이 계속 현재와 대화하는 것일까? 그것은 E.H. Carr가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인간은 매우 개인적 영역에서 사는 존재이다. 자기가 활동하고 접할 수 있는 공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설사 미디어가 자신이 접하고. 혹은 선택하여 포커스에 맞추는 게 인간이다. 인간이 객관적 존재일 수 있는 것은 수치로 명확하게 제시할 수밖에 없을 때라고 여긴다. 역사는 년도로 매기고, 호응 및 거부감도 %로 매기지 않은가? 주관적으로 살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 가는 데로 행동한다. 자기가 느낀 그 가치관이 자신의 삶에서 지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타인의 삶을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이 그런 비극적 삶을 당하지 않았다면, 드라마란 그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TV속의 드라마의 이야기보다 더 기구한 게 어느 한 개인의 삶이 아니던가? 아니면 그 개인의 삶조차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배제되는 것인가? 내 삶의 드라마는 누구나 겪을만한 일이지만,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물론 아닌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슬픔을 타인이 객관적 볼 때, 슬픈 일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나는 그 감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슬픈 일이라고 여긴 것과 슬픈 일이라고 생각만 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다.

 

영화에서 슬픈 장면은 생각만 하고 그대로 끝날 일이지만, 여기는 것은 그 자체가 관객에게 하나의 가치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은 그저 생각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생각의 동물로 살아가기에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고,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어느 순간 망각의 선율로 젖어든다. 하지만 슬픔을 여기는 것은 다를 것 같다. 내 친구가 억울하게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나도 나는 매년 그 친구의 무덤에 국화와 맥주를 바친다. 4년이 지나도 그렇다. 인간은 생각 중에서 논리로만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논리란 생각보다 그 이상의 가치관이 숨을 쉬기 때문이다. 인간 본연적 존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무의식이 있기에 그렇다고 본다.

 

문득 글을 적기 전에 나는 국회의원 선거를 생각했다. 415, 그러나 나는 다시 생각했다. 세월호 어린 친구들이 세상을 떠난 날을 말이다. 416일을 말이다. 415일은 왠지 모르게 논리적으로 달력 속에 휴일 또는 투표 날이나, 416일은 조금 다른 느낌이 난다. 기분이 더럽고 화가 나고, 정말 뭔가 몰라도 내 속에 그 무엇을 토해내고 싶은 마음이다. 내 외할아버지는 일제에 의해 고통을 당했고, 내 친구는 자본주의 시장의 어두운 논리에 의해 죽음에 대한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고, 한 평생 노예처럼 일한 아버지는 암 때문에 너무 힘들게 불쌍하게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작은할머니의 죽음이라고 억울하지 않을 것 같을까? 작은할아버지도 징용에 끌려가고, 그 후유증으로 불편하게 사셨다. 큰할아버지도 징용에 다녀온 후 해방 다음해 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상은 이렇게 불우하게 사신 분들을 조롱하고 외면하고 억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즐겁게 살고 싶다. 웃으면서 재미있게 살고 있다. 삶에서 모든 일상이 그렇지 않으나, 적어도 올해 1번 이상은 정말 폭소를 터뜨리고 싶다. 415일 그날이 온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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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6 06: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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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6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한민국 정치와 역사 속에서 20세기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파란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1세기란 100년에서 조선이란 국가가 멸망하여 타국의 지배를 받고, 그 식민지 아래 설움을 받던 그 국가의 민족은 어느 순간 해방을 맞이하고, 얼마 후 동족끼리 서로 죽이는 비극을 맞이했다.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마을과 도로 그리고 같은 민족이란 역사적 동질감마저 파괴했다. 그리고 공화국이란 미명 아래 각종 사건과 사고가 터진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이던 대한민국은 오늘날에는 선진국 대열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군사정권, 독재정권에 대한 희비가 엇갈린다. 정책적 요소에서 자유주의 진영이라고 해도 실제 국가경제 시스템은 국가자본주의에 가까웠다. 정부가 대기업을 위주로 경제개발을 앞세우고, 그 아래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내세웠다. 기계에 의한 생산력보단 단순 기계에 노동인력을 이용한 공장들이 많았다. 그 유명한 전태일이 남긴 기록을 본다면, 당시 국민에 대한 인권은 국가권력에 의해 조롱당하고, 특히나 노동인권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경제를 살린 점에서 그가 세운 업적은 어느 인정할 수 있어도, 거기에 희생된 사람에 대한 예우는 처참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을 국민에게서 나오나, 그 국민을 강압적으로 납치하여 고문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큰 오점이다. 장점만 혹은 단점만을 강조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경제가 성장한 수준만큼 국민에게 조금 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권리를 나누어주고, 노동자에겐 조금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본권을 보장해주었다면 후대의 평가는 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독재자란 칭호는 역사에서 지울 수가 없다.

 

최근 국회에서 현 정부가 독재라고 했다. 과거의 독재는 좋은 독재고, 지금의 독재는 나쁜 독재라고 한다. 사람을 납치하여 때리고 죽이고, 그 가족까지 사찰하는 게 좋은 독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코미디가 따로 없을 것이다. 독재자란 영원할 수 없다. 독재자 자신도 인간이고, 그 독재자가 다른 독재자를 육성하여 다시 독재가 이어지지 않은 이상 쉽게 독재는 지속되기란 어렵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보여준 독재자의 죽음은 바로 그러한 이유이다. 독재자는 18년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했다. 하지만 독재자 자신은 여전히 자신이 이 국가 위에 존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것이 문제였다. 자신이 모든 존재 위에 있다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들에 대한 시선이 그만큼 바뀌기 때문이다. <남산의 부장들>은 실제 역사를 토대로 만들어진 소설을 다시 각색한 작품이다. 이름은 다른 식으로 바꾸어 제시했지만, 각각 맡은 배역에 대한 인물에 대한 은유성은 필요 없을 정도이다. 여기서 문제적 인간 중앙정보부 김부장의 행동이다. 왜 그는 자신이 그동안 모신 상관, 그리고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었을까? 영화에서 인간이 권력을 가지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보여준다.

 

대통령 자신은 변화의 흐름을 모른다. 단지 주변이 변화했다고 여긴다. 김부장이 왜 그리 행동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대통령이 사단장일 때, 중앙정보부 김부장, 김부장 선임자인 박부장은 연대장급인 대령이었고, 경호실 곽실장은 김부장이 대령일 때 후임인 중령이었다. 다들 육군사관학교 선후배 관계였고, 같은 부대 선임과 후임이었다. 군대 기수보다 더 엄격하고 강력한 사관학교 출신자였으니, 선배기수의 명령이 곧 자신의 사명이었다.

 

영화에서 군사혁명을 일으킨 그날을 회상한다. 한강대교를 넘어가는 그 시점에 다리 너머 방위대 병사들이 기관총을 발사했다. 직접 총알은 맞지 않으나 그 총알이 마치 옆에 스쳐가는 듯했다. 목숨을 걸고 한강대교를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 영화 속에 김부장은 패배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충성을 다해 사단장이었던 대통령을 보좌한다. 그런 그가 왜 총을 내밀었는가? 우리는 김부장 본인이 아니므로, 실제 그 느낌을 알 수 없다. 영화의 모티브가 되던 김재규 부장과 그 주변 사람들이 남긴 증언과 기록만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선 그런 김재규 부장의 심리를 현대적 감각으로 살린 작품이다. 영화는 파격적인 영상보다는 미장센적 요소에 많은 것을 의미한다. 화면 구도, 심리적 상태를 소품과 빗물까지 이용한다. 화면 구도 내에는 몽타주적인 요소도 있다. 어렵게 몽타주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영상편집으로 의미부여가 아니라 단어적 요소나 사물의 배치로서 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왜 김부장이 총을 쐈을까? 영화 시나리오에서 배경적 조건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이란 국가는 북한과의 긴장관계가 있으며,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란 강대국에 의한 외교적 갈등이 있었다.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미국 CIA가 대통령을 교체하기 위한 설이 말이다. 영화에서 그런 요소가 보인다. 미국에서 대통령은 2선까지 가능하지만, 한국에서 3선을 넘어 영구 독재까지 가능하게 하려 했다. 한국이 미국의 우방이고, 군사적으로 통제를 받는 국가라면,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정치권의 의중을 잘 따르지 않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미국 대사관은 미국 정치권과 CIA의 흐름을 김부장에게 끊임없이 전달한다. 소설과 영화적 발상일 수 있겠지만, 국민에 대한 독재정치를 청산하지 않으면 미국이 한국정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청와대가 도청당하고, 중앙정보부 박부장은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불리한 증언과 기록물을 남긴다. 김부장은 박부장의 동기이고, 김부장에 의해 박부장의 책은 회수해온다. 하지만 왜 박부장은 자신이 그동안 충성한 사람에게 배신의 칼날을 들이댄 것인가? 위에서 말하듯이 독재자가 통치하는 국가가 그 자신만의 세상인지 아니면 본인 자신만 아니라 그 이상의 독재정치의 연속성을 이어가는지가 관건이다. 중앙정보부장은 대한민국 권력 넘버2였다. 서열 2위가 바로 중앙정보부장이다. 막강한 권력, 마음만 먹으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국가조직상 대통령이 최고 수장이라면 다음은 국무총리이지만, 총리란 그저 행정업무만 맡은 관료에 불과했고, 사실상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정국을 지배한 셈이다. 독재자는 권력만 집착하는 게 아니다. 여자와 재물에도 큰 욕심을 부렸다. 박부장이 김부장에게 말한 것 중에 하나가 대통령의 비밀 비자금이 있는데, 이 돈을 중앙정보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충성을 다해 모셨는데, 충성을 다한 자를 믿는 게 아니고, 제삼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독재자인 대통령은 부하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피곤한 상황을 부하에게 해결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모두 그 부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를 잡았으니 사냥개를 이제 필요 없다. 그러니 당연히 잡혀먹는 게 권력이란 순리였다. 영화에서 술자리가 자주 나온다. 대통령은 비싼 양주보단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어 마시는 막사를 좋아했다. 김부장과 같이 술을 마시며, 일본어 그때가 좋았다(その時期かった)”고 말하자 김부장 역시 그때가 좋았습니다(その時期かったです).”라고 대답한다. 권력을 추구하던 사단장이던 대통령이 옛날이 좋았다는 점은 과거의 김부장은 좋았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막사를 나누던 모습에서 경호실 곽실장은 그렇지 않았다.

 

비 오는 날 경호실장과 막사를 마시던 대통령은 김부장에 대해 심한 험담을 한다. 게다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어떻게든 처리하려고 하는 발언을 한다. 문제는 이 대화를 옆에서 몰래 김부장이 도청하고 있었다. 비를 맞고 몰래 올라간 그의 머리를 빗물로 흠뻑 젖었고, 대통령이 자신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그의 안경 빗물이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비통해한다. 영화에서 김부장과 곽실장은 계속 충돌을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곽실장 편을 든다.

 

김부장은 시대가 변했고, 게다가 미국의 개입을 확인한 상태에서 현재 상태로 정치를 이끌면 분명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 여겼다. 여기에 반해 곽실장은 시대의 변화는 필요 없고, 미국이 뭐라 하든지 현재 상황에 충실하면 된다고 여겼다. 도청사건을 두고 곽실장은 탱크를 청와대 앞으로 배치하게 하나, 김부장은 이것을 두고 크게 반발한다. 이 일로 청와대 주변에 사는 노인들이 크게 놀라 병환이 났다는 보고도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변하지 않는다. 김부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 대통령을 위해 친구인 박부장을 살해하니, 대통령은 그를 두고 친구마저 죽이는 인간도살자로 취급한다.

 

영화에서 김부장은 혁명을 무엇을 위해 일으켰고, 그 혁명에 왜 자신들이 동참했는지에 대해 묻는다. 박부장의 책에서도 대통령은 혁명을 시작한 자이나, 혁명을 망친 사람이라고 한다. 혁명이란 의미는 헤게모니의 전도이다. 어려운 말을 쉽게 풀이하면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 피지배자가 저항하여 그것을 전복하고 새롭게 정치적 권력을 쟁취하는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 군사혁명에서 혁명의 가치를 가난에 찌든 국가를 부유하게 해보자, 혹은 부패한 정치를 청렴하게 하자라고 하는 여러 가지 슬로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재자로 군림하여 스스로 부패하고, 민주주의 국가 주인이야 할 국민이 피지배계급으로 계속 억압한다면 김부장 스스로가 생각한 혁명이란 단어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 박부장은 김부장에게 정치보단 작가에 어울린다고 했다. 힘으로 억압하기보단 문화적으로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을만한 사람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렇게 하기에는 어려웠다. 김부장이 처음 로비스트를 만나면서 그녀에게 가족 이야기를 한다. 협조적으로 대해주지 않으면 고국에 있는 가족들의 신변에 큰 문제가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국내 산업화가 발전하면서 대통령과 경호실장은 TV 이야기를 한다. 경호실장은 국내 기술력이 좋아졌으니 칼라TV가 나와 대통령의 모습을 제대로 국민에게 보여주는 게 좋다고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아직까지 흑백TV가 더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칼라TV는 다양한 색으로 보여주므로, 다양한 사상과 가치관이 전파될 수 있으나, 흑백TV는 흑과 백이란 2가지로 구분된다. 즉 이분법적 가치관에 따라 자신을 따르는 자는 백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모조리 흑이 된다. 하얀색이 흑색이 들어오면 오염되기 때문에 제거한다. 이게 바로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부마항쟁이 계속 증폭되고, 국민은 반독재 운동으로 이어간다. 그런 시기에 대통령은 총으로써 국민을 지배하려 한다. 그리고 김부장은 초심과 변한 대통령에게 권총을 들이댄다.

 

 

영화의 연장선이나 보안사령관은 그 모습을 잘 이해했다. 박대통령은 주변 사람을 제대로 믿지 못해 살해당했다면, 보안사령관은 그 반대로 주변 사람에게 잘해주었다. 국민에게 큰 독재자였으나, 적어도 주변 사람에게 독재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2사람의 차이점은 마지막 임기였다. 전자는 국민을 탱크로 밀어버리려 했다면, 후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이 있었지만, 역시 CIA의 개입이 있었다는 여러 가지 설도 있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우리나라 국가의 기밀정보도 접근이 어려운데, 타국의 기밀은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부장은 사냥을 마친 후 잡혀 먹힌 개라면, 김부장은 사냥을 마친 후 도리어 물어뜯긴 개라는 점이다.

  

 권력이란 거대한 신기루에 현혹되어 자신의 주변 사람을 믿지 않은 대가는 배신이다. 영화는 김재규란 인물을 김규평이란 인물로 재해석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늘 느끼는 바는 인간은 왜 배신하는가?라는 점이다. 첩보원이나 정보원들은 자신의 상관에게 철저히 충성한다. 실제로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 부하들은 각각 자신들의 상관에게 충성을 다 한다. 죽음의 길임을 알면서도 위험이 도사린 것도 알면서도 충성을 다 한다. 그들이 목숨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자신의 상관이 자신들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박부장에게 했던 말은 김부장에게도 하고, 곽실장에게도 했다. 경호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의 2인자 다툼으로 보였겠지만, 사실 대통령에겐 누가 먼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지 순번만 정해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자질 중에 가장 큰 실수는 국민을 믿으려 하지 않은 점이다. 야당 총수를 대화로 풀어나가지 못한 채 오히려 정치적 압박만 가했고, 국민들에겐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총을 내밀었다. 만일 국민에게 손을 내밀고 야당 총수에게 대화로 해결하려 했다면 김부장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을까?

  

역사란 만약이란 단어가 없다. 단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반성하여 깨닫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답이라고 알려준다. E.H.Carr<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것처럼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한다. 신군부 집권 이후 김규평으로 묘사된 김재규 부장은 경호실장과 알력 다툼, 거기에 대통령이 자신에게 대하는 행동에 대한 불만으로 인하 살인사건을 일으켰다고 재판에서 판결된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변론 겸 유언은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고, 오히려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형을 선고하기를 원했다.

  

미디어에서 보인 그는 속이 좁아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인간이라면, 역사의 증언과 현재의 시각에서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 인간으로 보인다. 남에게 그 어떤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살인이란 죄를 짊어진 것처럼 말이다. 어떻게든 타인을 살해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 하지만 살해된 자가 많은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라면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미국이란 국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다시 생각했다. 군부독재나 쿠데타에서 CIA가 모를 리가 없고, 신군부가 정권을 잡을 때도 CIA의 묵인을 받았다. 하지만 독재정권이 지속되자 CIA가 압력을 가하고, 미국 하원에서도 큰 문제를 제기한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국이나, 그 우방은 역시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독재정권이 미국 정부에 이익이 된다면 미국의 편이 되겠지만, 때에 따라 미국의 우방이기에 반인권적 행위는 미국이란 민주주의 국가 측근 동맹국으로 가지는 위상을 깎아내린다. 명분과 실리에서 그 실리가 국가 내 국민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그 권력층에게 주는 것인지에 따라 명분의 가치가 변모된다. 김부장은 대통령에게 권총을 겨누며 이렇게 말한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결국 명분이 없는 정치는 대국적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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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8 08: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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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8 1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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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웨이 해전, 그것은 20세기 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미드웨이 해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쟁(戰爭)에서 일어나는 행위에서 전투(戰鬪)는 전쟁의 그 흐름 속에 하나이다. 전투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꿀 수도 있고, 혹은 그냥 그대로 스쳐가는 수도 있다. 전투 과정에서 일어나는 전략전술이 전쟁의 흐름에서 크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이 왜군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첫 전투 승리인 옥포해전, 한산도대첩, 명량해전이다. 그것은 조선이란 국가가 이때까지 계속 패배하다가 처음으로 옥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한산도대첩으로 해상권을 제압하며, 정유재란 이후 명량해전에서 전쟁의 기세를 바꾼 점이다.

 

육상전투와 다르게 해상전투에서 거둔 승리란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육군이 해상에서 싸울 수 없고, 공군이 해상에 투입해도 장기적으로 공중작전을 수행하기가 어렵다. 해상전투의 전략적인 가치는 해상이란 공간이 육상처럼 지지 공간이 있는 게 아니고, 공중처럼 비상할 수 없다. 해전의 가치란 바로 이런 특성이 존재한다. 게다가 보급적인 요소도 중요하다. 공중 수송기로 보급할 수 있는 물량과 전투력은 매우 한정적이나, 해상 선박으로 이동하는 병력과 물자는 매우 크다. 해상이 봉쇄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전투력 배치나 보급 노선이 끊기는 것이다.

 

영화 <미드웨이>, 사실 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패망의 길로 가게 되었는지 잘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영화이다. 20세기 위대한 영화 중에 <도라도라도라>라는 작품이 있다. 일본군이 미군이 주둔한 진주만 습격을 다룬 영화이다. 진주만 전투의 패배로 미군은 2차 세계대전을 참전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일본에 대한 동맹을 지키는 것처럼 보여도 속내는 다를 것이라 여겼다. 그 이유는 앵글로색슨 계통 그리고 백인 우월적 가치를 지닌 미국이란 국가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이 2차 대전의 불길에 고통을 받는데, 정치권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단지 전투 과정에서 첩보와 전략은 서로 다른 쪽으로 볼 수 있다고 여긴다. 미국 영화를 보면 2차 대전 시 적국 국가에 대한 적대심이 묘하게 숨어 있고, 진주만이란 치욕에 대해 은근히 신경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주만에서 폭격이 일어난 이유는 일본의 군수물자와 관련하여 제일 중요한 석유가 문제였다. 석유를 정제하면 등유, 경유, 휘발유, 제트유 등이 구분된다.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에너지의 공급은 석탄이 기반했다면 그 힘을 더 살린 것은 석유이다. 자동차와 비행기가 나오고, 대형 선박이 바다를 누빈다. 하지만 그 힘은 석유에서 정제된 각종 오일들이다. 미국이 2차 대전 중에 밀약 동맹을 맺은 일본에게 전쟁의 원동력이 되는 기름을 제한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군대에서 전쟁 상황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보급과 관련된 군수 전략은 매우 중요하다. 군수작전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전쟁은 패배한다. 총알이 공급되지 적에게 대항할 수 없고. 식량이 없다면 병력은 금방 무력화된다. 기름이 없다면 항공기와 탱크는 움직이지 못한다. 근대 이전의 전쟁은 총과 칼이 중심이 되어 인간이 직접 무기를 지니고 싸우지만, 근대화 이후 전쟁은 도구의 기능과 활용이 승패의 좌우가 된다. 21세기는 그 이상으로 전자 전파로 통한 첨단화로 전쟁의 승기를 좌우한다.

 

미드웨이 해전은 그런 역사적 과정에서 본다면 근대화 이후 전쟁이다. 잠수정이 등장하고, 고정익 항공기 성능과 그나마 파일럿의 조종술이 전투의 흐름을 바꾼다. 영화 <미드웨이>는 제목 그대로 미드웨이 해전을 다룬 작품이다.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전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탑승한 모항, 그리고 사령관 명령에 따라 적을 타격하는 전투기이다. 공군이 창설되기 전 전투기 조종사는 해군이 더 우세한 것 같다. 현재 제트엔진을 탑재한 전투기가 일반 활주로에서 이착륙하기 위해선 6000ft가 필요하나, 해군은 항공모항에서 이착륙하므로 그보다 짧다. 과주로가 없기에 전투기 바퀴를 걸어 브레이크를 거는 방법이 있지만, 그 상황에서 이착륙할 수 있는 것은 조종사의 역량이다.

 

영화 <미드웨이>는 말한다. 진주만 습격 이후 미 해군이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전함은 거의 없고, 전투기도 그만큼 받쳐주지 않으며, 게다가 병력과 물량이 일본군이 우세했다. 질 것 같은 해상전투였고, 해상전투에서 패배하면 일본군은 태평양을 지나 미국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다. 결국 20세기 중반의 전투는 해상전투가 모든 것을 좌우한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처럼 열도로 이루어진 국가는 해군력이 뒤받쳐주지 않으면 타격할 수 없다. 미드웨이 해전은 바로 해군력의 운용이 어떻게 전투의 흐름을 바꾸지는 알려주는 작품이다.

 

항공모함 1척에 소요되는 비용도 어마 하나, 그 안에 움직이는 병력과 군수물자 역시 어마하다. 항공모함 1척 파괴는 국방력에 막강한 손실이고, 전투의 승패까지 좌우한다. 육상전투의 패배는 물러서면 되나, 바다에서는 물러서기가 어렵다. 처음 미군이 진주만에서 겪은 참패의 원인은 바로 정보장교를 신임하지 않아서이다. 과거 일본 내 미국 외교관으로 복무하던 레이튼 소령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 처음 레이튼 소령이 초급장교이던 시절을 보면 이 영화에 대해 문득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평화를 누구나 원하고,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나, 과연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그 유명한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각본과 감독을 맡았기 때문이다. 공군 출신 대통령이 직접 전투기를 몰고 외계인에게 대항한다는 설정부터 이미 미국 제일의 할리우드 영화제작자이기 때문이다. 본 작품인 <미드웨이>는 전형적인 Narrative적 요소를 잘 반영한 작품이다. 평화로운 세계에 강력한 적의 출현이란 서사적 시작에서 절대적 위기에 봉착하고, 그 결정은 미드웨이 해전의 난투극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결국 평화의 쟁취이다. 아니 더 말하자면 일본군을 응징해야 한다는 서사적 귀결이다.

 

영화 평이나 혹은 관객들은 이런 말을 한다. 미드웨이 전투에서 승리했기에 대한민국이 광복을 했다. 하지만 세계사에서 당시 전장의 흐름을 잘 봐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소비에트가 막강한 국가로 부상하고, 동유럽 대부분 소비에트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독일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비에트를 침공하여 소비에트는 결국 2차 세계대전에 큰 축으로 움직인다. 자유경제 진영인 미국으로 어떻게 보면 소비에트 연방의 확장을 저지할 명분이 없고, 그 명분은 진주만 습격이다. 전투와 전쟁은 다른 시선과 관점이다.

 

전투는 당장의 문제지만, 전쟁은 그 이후의 상황까지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보장교 레이튼의 판단력은 정확하고, 워싱턴의 판단은 정확하지 못한다는 모습이 나오나, 그것만으로 전쟁의 전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어렵다. 이 영화 보기 전에 <포드 V 페라리>를 보았다. 포드 2세는 자신의 공장을 바라보며, 2차 대전의 승리를 이끈 것은 자신이 소유한 공장의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영화에서 페라리는 이탈리아 회사 메이커이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3개 연합국에 대항한 국가가 미국인데, 사실 미국은 일본만 아니라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까지 상대했다.

 

내 개인적으로 진주만 습격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란 명분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 아닌가 한다. 전략에서 군수물자의 중요도를 안다면 굳이 미국이 일본에게 군수물자 보급까지 방해할 이유는 없다. 독일 U-보트는 영국 군함만 아니라 민간 함선의 두려움이었다. 민간 함선의 물품이 결국 군수물자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군수전략에 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영화 <미드웨이>는 미드웨이 해전을 표면적인 요소만 보여준다. 그 전투에서 활약한 조종사, 지휘관 수많은 장병들,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 보이는 문명의 흐름은 고운 시선으로 보기가 어렵다.

 

영화에서 감독이 <인디펜던스 데이>를 만든 것처럼 이 영화는 미국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적국인 일본은 항공기 수도 많고 조금 더 신형이고, 게다가 미군은 항공모함 수도 적고 조종사도 많이 부족하다. 여기에 지휘관은 병으로 인해 교체되어 매우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우리가 이긴 이유는 레이튼과 그가 지휘하는 암호해독 병력, 두려움에 지지 않고 출격하는 조종사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본군이란 적이 매우 훌륭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적의 해군사령관은 매우 전략적으로 뛰어나고, 전함이 가라앉을 때 자신이 책임지며 젊은 사관들을 퇴선 시켜 미래를 걱정한다.

 

적이지만 악으로 규정하기보단 매우 강하고 힘든 적으로 묘사하다. 영화를 보면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군국주의적 요소를 상당히 미화시킨 것만 보인다. 육군항공대가 일본을 폭격하고, 그 폭격지점인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곳이다. 여기에 큰 충격을 받은 일본군 수뇌의 모습에서 그들의 군국주의는 왠지 모르게 광기에 빠진 것으로 생각하기보단 진정한 군인정신이 소유한 불굴의 사나이처럼 묘사한다. 그런 점은 마지막까지 보여준다. 일본은 적이지만, 미군에게 가장 큰 적이고, 가장 대등한 존재라고 말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 전투기가 일본항공모함을 침몰시킨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은 80년 전에 일어난 전투이나, 지금 일본 정치인들이나 자위대 고급 참모들의 생각 방식은 80년 전과 별반 차이 없다는 점이다.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일본군은 절대적 악의 축인 적이 아닌 그저 대등하고 싸울 맛이 나는 적대국으로 묘사한 것이 상당히 불쾌하다. 미군이 오키나와에서 전투를 펼칠 때 포로나 섬에서 거주하는 민간인을 방패 삼거나 그들의 목숨을 이용하여 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에서 이 영화는 그런 요소를 완전히 배제했다.

 

육군 폭격기 부대가 일본 영토에서 폭격을 시도할 때 일본인들은 그저 천황의 안위만 걱정했지, 그 폭격에서 고통받을 일본 민중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영화 자체가 전쟁영웅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기에 그런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 물론 육군 폭격 부대 중령이 대륙에서 도망갈 때 일본군 폭격 부대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대해 문제를 삼지만, 사실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그 문제는 매우 작은 부분이다. 영화는 CG효과와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었기에 전투 과정은 흥미롭게 그린다. 하지만 그 이면에 가려진 담론은 조금 고민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미일 보장 조약 60주년으로 다시 새롭게 그 조약을 기리는 미국과 일본의 모습을 보았다. 일본은 과거 미국에 도전하여 큰 참패를 당했지만, 그 교훈에서 받아서인지 미국에 대해 크게 반항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미국을 의존한다. 미국에 패배했지만, 영화 <미드웨이>에서 일본은 전쟁과 전투에서 패배할지언정 자신의 자존감은 오히려 지키고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영화로되, 그 영화에서 보이는 상황적 연출은 영화만의 세계가 아니라 감독과 감독이 느끼는 세상이 반영된 공간이다. 일본 군함들은 침몰해도 일본 군국주의적 마인드는 침몰하지 못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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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0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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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0 1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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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0 16: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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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백두산>에서 E.O.D 처리반이란 단어가 나와 순간 놀랐다. 왜냐하면 군에 복무할 때 실제 E.O.D 처리반 군대 선임하고 같이 훈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8월 광복절이 지나면 을지훈련을 연례행사처럼 진행했다. 을지훈련에서 초기 정찰반이란 그룹이 있는데, 각종 특기병과들이 모여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데, 문제는 복장이다. 더운 여름인데 모두 전투복에 전투화 입고 다니기도 힘드나, 거기에 우리는 화생방보호의를 착용하고 돌아다닌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이때 같이 있던 특기병과 중에 E.O.D 처리반이 있었다. 폭발물 해체 전문그룹, 내가 복무하던 곳은 공군비행장이었다. 국내 공군비행장 중 반 정도는 민간공항과 같이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폭발물 처리는 실제 전시 상황이 아니더라도 테러나 비상상태에서도 운영하는 조직이다. 영화 <백두산>에서 E.O.D 처리반이 등장은 곧 폭발물을 제거하는 팀을 등장하니, 백두산의 화산 폭발을 제어해야 하는 팀도 E.O.D 처리반이어야 한다는 설정도 나름 설득력이 있다. 영화 <백두산>에서 백두산의 존재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영화에서 백두산은 단순히 화산활동을 그동안 하지 않던 휴화산이 다시 활화산으로 변동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다. 지금도 백두산 지하부에 마그마가 존재하고, 과거 기록을 봐도 화산활동이 일어난 것으로 나온다. 제주도나 울릉도 역시 화산에 의해 만들어진 섬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가 해양 대륙 지각부에서 충돌하는 부위에 다소 떨어진 점이 참으로 다행으로 여긴다. 해양 대륙 지각부에서 환태평양 지진대 쪽이 심상치 않은 현상이 발견된다. 지진현상은 지각의 변동에 의해 지각끼리 충돌하거나 또는 지각이 단절되면서 일어난다. 또한 지하 마그마의 움직임에 따른 화산활동에 따라 발생된다. 백두산 천지호의 칼데라를 본다면 엄청난 규모의 화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산활동이 일어나면 지진이 일어나고, 지진에 따라 구조물이 붕괴되면 댐이나 제방이 붕괴되어 홍수까지 일어난다. 또한 지진이 해상부와 연접하면 해일도 일어난다.

 

백두산은 화산활동이 완전히 멈추지 않은 위험한 곳을 의미한다. 다른 의미로는 백두산은 중국과 북한 경계부에 있다. 백두산은 중국으로 경유하여 관광지로 갈 수 있다.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점에서 영화 <백두산>에서 외교적 문제도 보여준다. 한국 청와대와 합참본부의 의도는 백두산 갱도에 대규모 폭발을 일으켜 백두산 내 화산 용액을 갱도 아래 빈 공간에 메우는 방법을 이용하려 했다. 하지만 만일 백두산 쪽에 큰 폭발이 일어나면 중국과의 외교마찰이 일어난다. 그것도 북한이 아닌 한국 정부에서 단독 결정이라면 더 심각한 외교문제가 된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일으킬 이유도 없고, 미국은 그저 한국이 외교적 군사적 우방이지 한국 내 어떤 문제가 있어도 큰 문제는 없다. 단지 동아시아 전략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데 필요한 우방국이다. 사드가 국내에 설치된 이유는 과거와 다르게 현재 미국의 입장에서 극동아시아 전략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견제가 필수이다.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 괌 기지에 미군이 대규모 주둔하고 있으나, 1차 방어선으로 보면 한국이 제일 중요한 전략요충지이다. 사드 배치에서 북한 미사일 견제라고 하나 사실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견제라는 실리도 있다.

 

미국 입장서 한국보다 일본이 더 큰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영화 <강철비>를 보면 미국은 한국보다 일본을 우선시하는데, 실질적으로 미국의 입장서 보면 한미동맹보단 미일동맹이 효율적이다. 한국 내부 전시상황 및 그에 준하는 사태가 발생되면 미군 병력 투입보단 일본 자위대 투입이 훨씬 경제적으로 지리적으로 효율성이 높다. 주한미군 주둔비용으로 최근에 나온 보도처럼, 주한미군보다 주한 자위대 쪽이 미국 입장에서 비용 및 관리가 편하다. 지정학적으로 미국이 한국을 자국으로 통치해도 딱히 이득 볼 게 없다. 세계 2차 대전처럼 일본이 적국인 것도 아닌 점에서 동북아시아 전략에서 큰 문제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 <백두산>에서 미국은 합참 통제기구를 장악한다. 전시작전지휘권이 한국이 아닌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있기 때문이다. 한국 내 미국인을 다 본국으로 소환한 후 한국인이 백두산 재해로 인명피해를 봐도 문제는 없다. 재해가 있든지 없든지 항상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그 뜻은 동북아시아 긴장관계에서 자국의 손실이 없다면 한국의 상황은 큰 변수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화 <백두산>은 이런 미묘한 군사 및 외교적 관계를 합참 작전지휘권의 박탈에서 보여준다.

 

영화 <백두산>에서 백두산의 상징이 자연재해, 군사적 외교적 갈등이 있다면 다른 하나는 민족적 정서이다. 백두산(白頭山)이란 존재는 단군신화부터 이어져온 한국인, 더 나아가 북한만 아니라 전 세계 교포와 이민자까지 포함시킬 수 있는 민족의 상징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내려온 곳은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하는데, 그 산이 백두산으로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영화는 자연재해로 인한 문제는 군사적 외교적 갈등이 있는데, 이것이 결국 민족적 감수성이란 이름 아래 마무리는 되는 서사이다.

 

영화 초반에서 백두산 폭발로 인한 홍수와 지진이란 자연재해, 여기에 싱크 홀, 지반침하, 빌딩 및 구조물의 붕괴라는 재난상황으로 통제 불능의 한국을 보여준다. 국내 상황이 이 정도로 심각하면 북한은 훨씬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치적으로 백두산은 한국 수도 서울보다 북한 수도 평양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재난 통제가 어려운 부분에서 C-130H 2대가 야간비행을 하는데, 1대가 갑자기 추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C-130H는 제트항공엔진이 아닌 프로펠러 엔진이다. 제트항공엔진보다 덜 민감한 엔진임에도 불구하고 화산재가 엔진으로 유입되어 군용 수송기가 추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육상은 지진으로 통제가 어렵다면 항공은 화산재로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미군 병력과 장비들이 한국 E.O.D 처리반을 습격할 때 그들은 어떤 경로로 왔을까? 영화의 개연성이 이 장면에서 참 의문스럽다. 게다가 북한국은 수용소를 지키던 소수 병력만 있었다는 것도 설정이 빈약했다. 주거지 내 한국군이 움직여도 북한군이 출동하지 않은 점은 더 이상하다. 미군을 피해 마트로 숨어들 때 한국군 잔존 병력이 버스를 탈취하여 조대위와 리준평을 구출할 때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GPS 추적 장치를 다른 대원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영화는 재난상황에 군사적 대치에서 너무 억지스러운 상황을 반영했다. 러닝타임 120(광고시간은 제외하자)이 짧았던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리준평 역을 맡은 이병헌 씨의 연기에서 손재주를 통한 한국군 골탕 먹이기에서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듯하다. 영화에서 최대한 현실적 상황을 많이 반영하려 한 것은 사실이다. 리준평이 자신의 집에 와서 찾은 핸드폰은 중국 첩보 대원에게 연락하여 거기에 대한 이익을 원한 요소, 그가 이중 스파이로 보여주는 것도 나름 설득력이 있다. 리준평과 중국 첩보 대원의 통화내역을 듣고 미군이 출동하는 것도 좋다. 그런데 미군은 어디서 주둔하여 그 시간에 맞추어 출동했을까 이다. 육로와 항공로 화산활동으로 막혔다면, 해상은 해일이란 상황이 있을 수 있기에 무리수가 있어 보인다.

 

이런 설정과 구조에서 영화는 관객들을 시라니오에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 제목 <백두산>이 가진 민족적 정체성에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리준평은 예전에 제대로 돌보지 못한 딸을 찾고, 조대위는 이제 곧 태어날 아이에게 찾아가려 한다. 남북 간 대치하고 있고,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자식 앞에서 이길 부모 없다는 것처럼 서로 상대방의 자녀를 생각한다. 리준평이 자신이 죽더라도 딸을 조대위에게 부탁하고, 조대위의 아이 얼굴을 꼭 보라고 말한다. 한국인인 나조차 가족 일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인정한다.

 

화산 폭발시간이 예정시간보다 훨씬 앞 댕겨진 이유도 있으나, 리준평이 마음을 바꾼 것은 그도 아빠인데, 아빠가 될 사람이 아이 얼굴 보지 못한 채 죽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철저히 이기심에서 감정적 인간이 된 것이다. 물론 백두산 내 갱도를 폭발시키지 않으면 리준평의 딸은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리준평은 현재의 삶을 포기했지만 미래의 삶을 조대위에게 맡겼다. 조대위 집에서 리준평의 딸이 조대위의 가족 구성원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미 리준평이 본인의 집에 가서 딸의 행방을 묻는 상황에서 영화 결말은 다 결정된 셈이다.

 

남북 간 상황을 다룬 영화에서 <강철비>는 현재 상황을 유지하면서 비공식 라인으로 조금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자면, <백두산>은 큰 위기를 거친 후 공식적으로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자고 한다. 그래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나, 다소 환상이 심하게 반영된 작품이었다. 국가란 공적 영역에서는 서로 재건을 돕고, 사적 영역에서는 가족관계로 이어진다. 직접적으로 혈연관계는 아니나, 같은 민족이기에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보여준다. 영화에서 전시작전지휘권이 영화 <백두산>처럼 문제가 발생되면 한국인의 운명은 비관적으로 될 것이라 말한다. 물론 작전권 외에도 주한미군이 비밀리 진행하는 화학실험이나, 주한미군 장병이 일으키는 범죄 역시 문제는 많다.

 

영화 시작에서 핵무기를 북한이 포기할 리도 없지만, 백두산 폭발이란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은 편이 좋다. 영화 <백두산>에서 백두산 폭발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이 마그마를 갱도로 흘려보내 외부로 분출시키지 않은 방법이다. 압력을 감소시켜 폭발시키지 않기 위해 대체공간을 제시하는 것은 분명 합리적인 방안이다. 만일 현실에서 실제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괜히 피해본다고 여길 것이고, 미국 입장에서도 굳이 할 이유가 있을까 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 개연적 상황을 따지자면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은 이해는 가지만, 그 과정과 전개과정이 매우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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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 - 꿈꿀수록 쓰라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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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원>이란 소설은 상당히 개연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는 좋은 것도 많으나, 그렇지 못한 것도 제법 많다. 어떤 사건에 내가 관련될 수 있으나, 만일 가족이 관여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부딪힌다. 소설 <염원>은 바로 그런 개연적 요소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우리는 TV나 인터넷으로 통해 범죄나 각종 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한다. 뉴스를 접하면서 그 일들이 나하고 전혀 상관없이 무관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남에게 일어난 불행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기만적 태도가 우리를 지배한다.     


남의 비극은 분명 그들에겐 아픈 일이나, 그래도 나에게 닥친 일은 아니다. 그저 미디어라는 정보에 노출되어 우리의 시간 속에 흘러가는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떤 범죄에 휘말리거나 사고에 얽매인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는데 말이죠.”라고 말이다. 물론 사건사고 피해 당사자가 본인이라면 어떻게든 혼자 감내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피해 당사자가 가족이고, 그중에서 자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염원>을 보면서 뜬금없이 세월호 사고에서 희생된 어린 학생들이 생각났다. <염원>에서 다다시군은 고등학생이고, 세월호 학생들도 고등학생이다. 제법 키는 성장하고 의지는 강하나 어른보다 몸과 마음이 작은 친구들이다. 하지만 꿈과 희망은 어른보다 더 웅장하고 거대하다. 그런 친구들이 세상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이대로 꺾이고 만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지만 다다시와 세월호의 아이들은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세월호 희생자는 완벽한 피해자이나, 소설 <염원>에서 다다시는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가즈토와 기요미, 그리고 미야비라는 세 명의 가족이 큰 아들 다다시의 실종에서 겪던 심적 변화와 주변의 환경 등은 분명 그 가족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온다. 당연한 일이나 사실 그 일들은 피해 당사자에게 당연한 일들이 아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개인이나, 범죄에 따른 책임문제는 그 가족과 사회 일원에게 같이 분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다시의 실종과 살인사건이 보도되면서 그렇게 화목하면서도 화목하지 않았던 평범한 가정은 파탄에 이른다.     


아들이 살인을 저지르면 그 자체가 삶의 파괴로 이어지고, 아들이 살인을 당하면 그 여파로 삶이 무너진다. 하지만 2가지 갈래에서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기대어할까? 아니면 주변 환경과 조건은 어떻게 만들어져 갈까? 작품에서 다다시가 살아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그 아이는 살인범이 되는 것이고, 만일 죽게 되면 살인 피해자가 되나 다다시는 남을 헤치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가족이 만일 그런 일에 처해지면 참으로 곤란하게 될 것이다. 다다시가 정말 사람을 죽인 것도 판명되지 않았는데, 실종자가 곧 살해용의 후보자란 점에서 세간의 차가움은 피할 수 없었다.     


집 현관에 계란을 던지고, 명패에 페인트를 칠한다. 사업과 관련하여 거래처가 끊기고, 주변에 같이 사업하던 사람들의 인맥까지 사라진다. 생계와 친구까지 없어진다. 인간관계 모두가 파탄 난다. 다다시란 인물은 전형적인 남자 고등학생 같다.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손해 봐도 참아주는 유형이다. 그래서 부모님의 간섭에도 그는 자신의 길을 간다. 또한 부모님의 기대감을 버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절제하는 모습도 나온다. 삶의 구원에서 절망의 순간은 이렇게도 희비가 엇갈린다.     


살인범이라도 세상 앞으로 같이 살아갈 건지, 아니면 죽음으로 통해 결백을 주장하던지 말이다. 물론 아들이 살아있으면 좋겠지만, 아들의 결백 역시 해명되는 것도 중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선택하기 어렵다. 만일 아들이 죽지 않았다면 가즈토의 인생은 사회적 매장당했을 것이고, 미야비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으며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 기요미는 가즈토와 미야비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가사 주부로 지내며 교정 일을 맡고 하고, 그 일은 회사와 미야비만의 비공개적으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업가 가즈토, 학생 미야비, 구원이란 형태는 최악의 상황으로 돌아왔다. 사업도 가족도 외면당한 가즈토에게 다다시의 죽음은 3 사람의 새 인생을 시작하게 해 준 원동력이었다. 이 원동력은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소설 <염원>은 스토리 적으로 결론은 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과정을 중시하는 소설이다. 결과론으로 모든 것을 성과로 보는 세상에서 과정의 성찰은 우리 삶에 필요한 요소이다. 내 생각에게 가즈토 가족을 괴롭히는 요소에서 주변 이웃의 집단 괴롭힘과 인간관계 단절보다는 언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 전화와 핸드폰이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 발신으로 가득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생활을 염탐한다. 하다못해 2층 딸의 방 안에까지 카메라가 주시하고 있다. 완벽한 감시, 그리고 말꼬리를 잡아 악의적인 보도로 나간다. 개를 데리고 밖에 산책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내보내 죄책감이 없는 부모로 묘사한다. 특종에 눈이 멀어 가족들을 마치 구경거리 조롱 대상으로 만든 언론을 보면서 가즈토 가족들은 더 힘든 시기를 보낸다. 그뿐만 아니라 범죄와의 문제는 단순히 조롱과 비난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징역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고, 상대방에 대한 배상책임도 어디까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남은 것은 오명과 어둠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구원이 다다시의 죽음이고, 그 죽음을 바라야 하는 것이 진정한 <염원>일지 아니면 살아오는 게 <염원>일지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성적으로 보면 다다시의 죽음이 많은 것들을 지켜준다. 하지만 우리는 머리보단 마음 안에 숨겨진 무의식 내지 감정에 더 많이 마음이 간다. 다다시처럼 가족이 살인사건에 얽혀 들어가면 우리는 분명 직접적으로 살인과 무관하고 별 탈 없이 살아 돌아오면 좋겠지만, 현실이 그게 아니라면 어떤 것을 택하고 만족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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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1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12-31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화애니비평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에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만화애니비평 2020-01-01 08:57   좋아요 1 | URL
언제 범띠가 오는 새해가 올까요?

어흥!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