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와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등 서브컬처 콘텐츠는 매우 쉽게 접근하고, 어렵지 않은 내용으로 대중에게 전달된다. 게다가 가격이 크지도 않으며, 대중매체에서 자주 볼 수 있으므로, 서브컬처 수용자들은 큰 제약을 받지 않고 접할 수 있다. 물론 나이로 인해 성인등급이 제한되더라도 쉽게 그런 제약을 무시하고 즐기는 경우가 많다(필자 역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성인용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을 했다). 그래서 서브컬처 수용자들이 대부분 10~20대 청소년과 청년층이 다수 존재하고, 2020년대로 이전하면서 1990년대 일본문화 개방정책에 따라 만화애니메이션을 접한 그 당시의 10~20대 사람들도 30대와 40대에 이르러도 계속 서브컬처 콘텐츠를 즐긴다.
1990년대와 2020년대를 바라보면 서브컬처 콘텐츠 흐름이 상당히 바뀌었다. 소재와 주제는 2020년대가 더 풍부하지만, 작가정신이나 예술론적인 요소는 1990년대가 더 높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경제적 조건, 사회적 여건 등이 교배되어 그렇다. 그런데 내가 최근에 바라보는 작품 중에서 생각이 드는 점은 성적인 묘사와 야설적 요소는 1990년대가 더 강하다는 점이다. 작화나 애니메이션 영상기술은 2020년대가 뛰어나지만, 오히려 그때가 더 외설적 요소가 강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은 나온다. 아마도 1990년대 작품들은 사람의 손으로 작화기술을 내보였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
디지털 장비와 컴퓨터 성능, 프로그램의 진화는 애니메이션 제작 자체를 변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손으로 작화가 만들어진 것과 기계와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진 관능미는 다소 차이 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감정을 사람 손으로 종이에 그런 것과 컴퓨터로 그리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감정과 기분을 이끌어내는 아날로그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서사라는 이야기이며, 서사를 표현하는데 있어 사람의 손과 전자장비는 다소 차이점은 있다.
그래서 2020년대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은 1990년대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고, 그런 사고방식으로 새롭게 탄생한 작품이 안노 히데아키의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이다. 물론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나온 기본적 인물과 서사를 바탕으로 크게 비틀어 버렸지만, 당시와 지금의 에반게리온은 내용과 전개 그리고 작화까지도 모조리 다른 셈이다. 시대적 흐름과 사회적 여건은 인간사회로 반영되고,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런 흐름이 반영된다. 동일 작품을 동일한 감독이 만들어도 변화하듯이 서로 다른 작품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느 동일한 소재와 장르를 이용해 만들어도 달라진다.
위에서 내거 1990년대 미소녀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을 한 점을 제시하듯이 1990년대 미연시 관련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에서 남자주인공이 주도적으로 움직인다. 히로인이라는 여성들은 수동적 존재이고, 다소 말괄량이 속성을 지닌 히로인도 주인공과 결정적 상황이 되면 상당히 순애적인 인물이 된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가고 2020년대 들어서는 남자주인공이 점차 소심하고 소극적인 인물이 대다수 보이고, 심지어는 선비 같은 자세로 하렘 작품 남자주인공의 역할을 거부하는 캐릭터도 나온다. 히로인들이 소극적 여성상에서 적극적으로 변하고, 상대 경쟁자인 여성에 대해서도 매우 강렬하게 대치한다.
물론 기존의 흐름을 반영한 작품도 있지만, 사회적 흐름과 경제적 여건에서 변화가 도래한 것이다. 기존 남성권력 중심사회에서 점차 양성평등적인 가치관이 변화한 점이 크며, 기존 생계유지를 아버지 혼자서 책임지는 구조에서 부모 모두 일을 하는 사회로 변했다. 심지어 자녀가 일정 나이가 되면 부모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인 신분에서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자녀가 사회에 나와 취업을 해도 부모는 집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계속 일을 한다. 경제적으로 양성평등은 왔지만, 경제적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
아버지가 혼자 벌어 생계유지가 가능한 시기와 온 가족이 일을 해도 도시에 집을 구하기가 어려운 시대이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세대가 받는 임금으로 대도시권역 물론 중도시권역 아파트 구매는 물론이고 전세조차 어렵다. 부모 아래 분가하면 취업 새내기 대부분은 원룸에서 기거하거나, 부모님 또는 친척 집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원룸보다 가족, 친척 집에서 기거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나 혼기가 어느 정도 다가오면 결혼이란 압박이 들어오고, 그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는 결혼하거나 집을 나와 혼자 자취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제적 구조와 사회적 여건 등은 젊은 세대에게 큰 부담이 되고, 그것은 결혼의 포기와 지연, 더 나아가 저출산의 위험으로 이어진다. 출산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안정된 급여가 필요하고, 일정한 주거공간이 필요하다. 전세 비용이 증가하고, 물가는 오르는데, 임신과 출산을 하게 되면 여성은 거의 최소 1년 이상을 수익을 포기해야 한다. 최근 육아지원정책이 많이 좋아졌다해도 여성이 버는 1달 수익에 평균 반에 반조차 미치지 못하고, 자녀 1명당 들어가는 금액은 출산 전후와 비교하여 남성 1인 월급(세후 350만원 기준) 10% 정도가 육아비용(분유, 옷, 기저귀, 예방접종, 유모차, 보험, 기존 공과금에 납부되는 전기세, 물세, 도시가스비용 추가 비용 등)에 소요된다.
인구의 감소는 당연히 애니메이션에서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고, 그런 방식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느냐 아니면 간접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직접적인 소재로 사용한 작품으로 <종말의 하렘>이다. 겉보기에 상당히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여성이 소수의 남성 누군가에게 배치하여 어떻게든 매칭(성행위)되어 임신을 하도록 유도한다. 전 세계에 남은 남성이 5명, 남은 여성은 수십억명인데, 인공수정을 해도 불가능하고, 직접적으로 남녀가 물리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권력의 확보는 생존 남성을 누가 차지하고 어떻게 관리하느냐이다. 인간의 수명은 70~80세가 평균이라면, 저 작품 기준으로 60년만 지나도 세계인구는 억 단위에서 천 또는 만 단위 이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작품에서 MK(Man-Kill) 바이러스는 예방접종도 불가하고 항생제도 없다. 걸리면 모조리 죽는 질병이다. 유전자 Y염색체만 가진 자는 모두 죽는다면 바이러스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이런 맥락을 보면 단순한 인구감소에서 왜 여성이 아닌 남성을 택하는가? 문화인류학자 마빈해리스의 도서를 참고하면 원시부족은 부족은 자원을 이용하여 생존하기 위해서 인구조절을 한다. 이때 하는 방식이 여아살해이다. 여성이 임신하여 자녀를 만들 수 있기에 여아를 죽이면 인구통제가 가능하고, 여기에 반해 남성이 여성에 비해 인구비율이 높지만, 남성 원시부족은 전투적인 기질이 강해 타 부족과 전쟁에서 사망하는 경우가 많고, 야생이 세계에 살기에 사냥 또는 영역관리 시 맹수의 습격도 받는다. 또한 자기 부족 내 다툼(여기엔 여성을 아내로 삼기 위한 영역싸움)으로 죽기도 한다.
인간이 동물적 세계에서 문화사회로 넘어와도 미개한 공간에서 나왔을 뿐이지, 미개한 인간의 무의식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ego라는 자아에서 Libido를 포함한 무의식 세계를 버리면 그것 역시 인간이 아닌 로봇에 불과하다. 인간이 무의식 세계에 있기에 기본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폭력적인 것은 곧 인간이기 그런 것이다. 단지 이성의 영역에서 사회적 규칙을 따르기에 충돌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야만의 세계에서 원주민들은 다르다. 이들은 자연적 조건에서 남성의 수를 줄인다고, 현대의 문명인은 문화적 조건에서 남성의 수를 줄여간다. 음주 및 흡연, 교통사고, 안전사고 등은 남성의 사망비율을 높이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환경오염도 큰 문제점을 반영한다. 최근에 들어 평균 남성의 정액에서 Y염색체를 가진 정자 수가 점차 줄어가는 것이다.
환경호르몬과 각종 환경오염물질이 인간의 생리적 조건을 변화하고, 특히 남아를 출산하게 하는 유전자 조건이 약해진다. 과거 한국에서 태아의 성별 감식으로 여아를 억울하게 낙태했지만, 최근에 그런 풍조는 없어지는 올바른 형태가 되었다. 최근에는 비율이 비슷하게 나오지만, 환경파괴가 지속되면 그 올바른 균형이 깨질 가능성이 높다. <종말의 하렘>은 실제 환경생태학적 연구결과를 참고하여 만든 작품인 셈이다. <종말의 하렘>에서 MK는 Man-Kill Virus지만, 환경과 관련된 영역에서 바라보면 MK는 EDCs 즉 “내분비계 교란 물질(Endocrine Disrupting Chemicals)”이다. 먼 미래 지구환경이 계속 파괴되어 가면 남성인구는 점차 소멸하고, 기술문명이 발전한 선진국일수록 그 피해가 더 심해진다.
이와 다르게 간접적인 소재로 다뤄지는 작품으로 최근 <부부 이상, 연인 미만>이 있다. 일본 어느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남녀가 같이 거주하면서 유사 부부생활을 해야 한다. 이때 부부생활이 원만하면 좋은 평가를 받게 되고 여기에 따른 혜택이 주어진다. 물론 돌발상황이 발생할 경우 감시카메라(학생의 개인 인권 침해가 심각하고 사생활의 침해되는)가 통제할 수 있지만, 왜 학교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단순 로맨스 장르로 연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관리 시스템에서 교육기관으로 학교가 남녀간의 연애를 조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일본도 한국과 비슷하게 출산률이 저조하게 낮다. 물론 한국보다 심각하지 않으나, 일본 역시 한국과 비슷하게 인구감소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인구의 감소는 시장규모와 경제영역 더 나아가 공적영역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한국처럼 징병제가 시행되는 국가에서 병력모집에도 큰 치명상으로 작용한다.
한국도 노령사회에 대한 문제가 있다면, 일본 역시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인구문제를 조금 더 현실적 관점에서 국가에서 해결하는 것을 소재로 만든 작품으로 <사랑과 거짓말>이란 작품이 있다. 작품에서 태어난 남녀의 성향과 취향, 사회적 경제적 조건, 유전자적 정보 등을 적용하여 결혼 매칭상대를 국가에서 정해주고, 학생들은 국가의 일방적 방침에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사랑과 거짓말>은 심각한 사회적 구조라도 내용은 연애 로맨스 장르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지만 국가가 개인적 영역에서 연애까지 통제하는 것은 거의 독재 통치와 비슷한 형태이다. 중국에서 1가구 1자녀 정책이 있었고, 1명 이상 더 출산할 경우 세금을 매긴다. 그래서 둘째부터 호적에 올리지 않아, 둘째부터 국가의 통제에 닿지 않아 교육과 보건 쪽으로 취약한 조건에 놓이게 된다.
<부부 이상, 연인 미만>과 <사랑과 거짓말>은 남여간의 로맨스를 두근두근한 상황과 다소 아찔하고 우스운 상황을 많이 연출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회적 구조는 매우 무서운 현실이다. <종말의 하렘>은 겉으로 보기엔 야한 것만 충실히 재현한 것처럼 보이나, 상당히 공상과학적인 요소를 담은 작품이다. 건강하고 이성에 호기심이 많은 남성이라면 자신의 주변에 수많은 미녀를 두고 마음대로 안을 수 있다면 천국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세계가 정말 있고, 거기에 인구정책에 따라 사육당하고, 자기의 자녀조차 볼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종말의 하렘>에서 생식능력이 사라진 남성은 필요 없는 존재이다. 물론 최근 인류의 영양 공급능력이 우수하고, 각종 의학적 보조적 장치가 들어와도 인간의 몸은 정해진 수명이 있다. 자신의 수명이 다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무엇을 생각할까? 당연히 자신의 자녀들을 떠오른다. 자신의 자녀를 만들어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천륜의 연을 빼앗은 것과 같다.
국가에 의해 출산이 통제되면, 그 사회는 출산의 조건에 따라 정치적 권력이 부여되고, 그 권력을 독점하면 독재자가 등장한다. 물론 생식기능에서 남성이 필요 없을 경우 그 사회에서 모든 남성은 말살된다. 현대사회에서 남성이 모두 말살되면 당연히 인류는 100년 이내 지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겠지만, 동성끼리 출산이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동성애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그것을 원하지 않은 자에겐 폭력에 가깝다. 물론 시대와 사회가 세월에 따라 크게 변화하여 인간의 인식과 가치관이 바뀌면 다른 현상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도 생물학적으로 동물이다. 영혼을 가질 수 있더라도 인간이 동물이란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동물과 다른 점은 널리 통용되듯이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만, 이성 그 자체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망한다. 결국 경제적으로 빈부격차나 젊은 세대의 비혼 급증도 결국 이성적 판단이다. 이기심이 이성적 판단이 기준이 되었으니 우리 사회나 일본 사회나 그런 것이고, 위와 같은 작품들도 그런 인간들의 사회상을 반영하듯이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