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의 정치학





한국인은 " 한국인의 정 " 을 한국인 고유의 정서라고 자랑하지만 < 정 > 이라는 단어는 한자어다. 한자어 情을 대체할 수 있는 순우리말은 없다. < 한 > 도 마찬가지다.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恨 또한 한자어'다. 한국 고유의 정서라면서도 정작 우리는 한국 고유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순우리말이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단어는 무엇을까 ? 내가 보기에는 < 눈치 > 같다. 눈치는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가 좀 힘들다. 눈치라는 감각의 5할을 차지하는 것은 낌새다. 이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세계 언어가 있을까. 눈치는 sence와도 결이 다르고 tact와는 미묘하게 결이 다르다. 이 단어들에는 낌새라는 야리꾸리하고 시금털털한 냄새가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왜 눈치가 발달했을까.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은 한국인 친구가 부모와 통화할 때 신기한 경험을 한다고 한다. 어_로 시작해서 어_로 끝난다는 것. " 어... 어 ? 어 ~ 어. 어어어. 어 ?? 어.. 어, 어 !!!!!!!!!!!! 어, 어어, 어, 어어 ! "

통역하자면 " 안녕, 왜 전화했어 ? 뭐라고 ? 그래, 그래, 무슨 뜻인지 알아. 그래서 ? 뭐 !!!!!!!!!! 맙소사. 시발. 아 미치겠네. 그래, 알았어. 알았다니까. 미치겠다, 증말. 응응. 그래 전화 끊어. " 외국인은 모르지만 한국인은 친구가 사용한 어' 가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다. 첫 번째 어는 기뻐서, 두 번째 어는 슬퍼서, 세 번째 어는 칭찬의 의미로, 네 번째 어는 놀라서, 다섯 번째 어는 당황해서, 여섯 번째 어는 초조해서, 일곱 번째 어는 다급해서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시시때때 달라지는 것을 언어학에서 고맥락 언어( (High-Context )라고 한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을 화용론이라고 부른다.

한국인은 어_로 시작해서 어_로 끝나는 친구의 통화를 보면서 1) 말 자체보다는 그 말이 오가는 상황, 분위기, 인간관계, 표정, 눈빛, 태도, 시간, 장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어_의 뜻을 이해한다. 눈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한국인이 다른 사람보다 눈치가 발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어의 특성에 적응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반대로 영어권 언어는 저맥락 언어다. 영어권 언어는 주어도, 목적어도, 행위자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명시하기에 굳이 맥락을 살필 필요가 없다. 명확함은 영어권 언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한국인보다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

영어권 언어가 " 자기중심적 사고 언어 " 라면 한국어는 " 타자중심적 사고 언어 " 다. 여기서 타자의 계급이 중요하다. 눈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약자의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쪽은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인간 유형이고, 다른 한쪽은 권력형 인간 유형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 앞에서 굳이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최근의 한국 정치를 보면 눈치를 보는 이와 눈치를 보지 않는 이가 명확히 구분이 된다. 이재명은 눈치를 많이 보는 반면에 유시민은 거리낌이 없다. 유시민은 이재명을 향해 권력자 행세를 한다며 입에 거품 물며 쌍욕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유시민이야말로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을 구별하지 않고 배설하는 권력자'다. 유시민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인간은 눈치를 챙겨야 한다 !

1) 한국인은 " 대화를 듣기 " 보다는 " 대화를 본다 ". 서양인들이 대화를 귀로 들으면서 의미를 파악하는 반면에 한국인은 대화를 눈으로 봐야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드라마 천국이자 강국인 이유는 드라마라는 장르가 대화를 눈으로 보는 데 최적화된 장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대사를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한국 시청자들은 대사가 오가는 상황, 분위기, 표정, 눈빛, 태도, 장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의미를 파악하는 데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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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외 출연 / 킹미디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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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ll me this pen ! "

"자살해서 보험금으로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자살하면 나오는 보상금이 8억인데 그걸로는 빚을 못 갚더라고요. 죽지도 못하고 일만 하고 있습니다." 10년 전, 방송에서 청담동 주식부자로 소개되었던 이희진 주식 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한 말이다.

몇 년 전 아내와 이혼한 그는 지금도 빚을 갚느라 다리도 제대로 못 뻗고 고시원 쪽방에서 쪽잠을 자고 있다고 한다. 이희진의 말빨에 속아서 노후 자금을 모두 탕진한 피해자들은 지금도 쪽방촌에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희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 그는 출소 후 걸그룹 출신 연습생 여자와 결혼하여 250억짜리 청담동 펜트하우스에서 신혼을 즐기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게 사는 직업군이 바로 사기꾼이다. 그는 출소 후 프로 골퍼 자격증도 획득하여 골프 지도자 자격도 갖췄다. 그의 일상을 포착한 인스타 이미지는 온통 골프와 시계와 스포츠카가 전부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머릿속에는 물음표 백만 개가 생성되어 집 나간 개처럼 여기저기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이희진 재산은 피해자의 피해 보상을 위해 국가가 몰수한 것이 아니냐고요. 천만에, 그럴 리가 ! 네버, 앱쏘루뜰리, 언빌리버블, 나무아미타블. 나랏말쌈이듕국과달라서로사맛디아니.......... 사기꾼들에게는 법망을 피할 수 있는 차명이라는 이름의 저수지가 있지 않은가. 이희진은 잘 살고 있다. 맞은 놈이 다리 뻗고 자는 시대는 끝났다.



마틴 스콜세이즈 감독이 연출한 블랙코미디 <<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2014 >> 의 주인공 주식 브로커 조던 벨포트(실존 인물이다)는 영락없이 이희진을 닮았다. 감독은 사기꾼인 조던 벨포드라는 인물에 집중하기보다는 미국 월가의 생태계에 집중한다. 이곳은 징글징글한 욕망의 정글이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조롱하고 싶었던 대상은 인물이 아니라 미국 월가의 생태계와 인간의 집단적 욕망이다. 황금만능과 신앙에 가까운 속물근성을 신랄하게 조롱하는 영화답게 영화는 온통 황금색(옐로)이다. 인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황금에 눈이 멀어 얼굴이 누렇게 떠 있다.

배우들의 약 빤 연기와 도파민 터지는 연출은 몰입도를 높인다. 나도 모르게 마틴과 레오의 브로맨스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스콜세이즈 영화 중 가장 웃긴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FBI 요원으로 나오는 배우 카일 챈들러의 착한 얼굴은 감동적이다. 욕망의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올랐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실존 인물 조던 벨포드는 어떻게 되었을까 ? 가짜 주식을 팔던 벨포드는 출소 후 동기부여 강사가 되어 대중의 진짜 욕망을 팔며 다시 활활 비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몰락을 상품(월가의 늑대들에게 속지 않는 법)으로 판매하며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하면 망합니다잉 ~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냐면 ㅡ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자기 계발 강사가 되어 청중 앞에서 동기부여라는 상품을 판다. 그 장면은 마치 복음주의 교회 부흥회 같다. 그는 양복 속주머니에서 볼펜 한 자루를 꺼내 강의 수강생에게 건네며 이렇게 묻는다. " 나에게 이 볼펜을 팔아 보세요. " 이를 바라보는 수강생들의 눈빛은 신앙인에 가깝다. 그가 양복 속(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볼펜 한 자루가 아니다. 욕망이다. 성공하고 싶은, 반짝반짝 빛나는, 동기부여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눈이 멀어 누렇게 뜬 그 욕망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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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무치도 유만수


현대에 와서 영웅은 슈퍼맨이나 베트맨처럼 힘센 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은 헤라클레스가 아니다. 헤라클레스는 그냥 힘이 센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 헤라클레스는 여자에 미쳐서, 나중에는 광기에 사로잡혀 자식들을 죽인 난봉꾼이다. 왕년은 휘황찬란했으나 말년은 정신 착란 했던 클래스.....


오히려 그리스 비극 서사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는 오이디푸스다. 자기 서사의 실패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스스로 눈알을 도려낸 그야말로 비극적 영웅이다. 오이디푸스의 잘못된 행위는 온전히 그의 잘못이 아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운명 앞에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순응했을 뿐이다. 그는 신이 두는 체스판 위의 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선택과 행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는다. 그는 어쩔 수가 없다 _ 라는 변명 대신 스스로 눈을 도려냄으로써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다는 프레임은 반드시 어쩔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영화 속에서 만수는 최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최악( 세 번의 살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만 이병헌의 동네 목욕탕 동굴 보이스로 발화된 독백 속에서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최선과 최악 사이에 놓여진 무수한 차선(책)이다. 인간의 욕망은 누구나 다 최선책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현실은 무수한 차선책 중에서 하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어릴 적 꿈은 대통령이었지만 성인이 되면 9급 공무원 시험 합격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수는 차선을 선택(어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악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인간이다.


오이디푸스의 한국어 이름이 명백한 오대수( : 올드보이)와 유만분수1에서 이름을 따온 것처럼 보이는 유만수( : 어쩔수가없다)는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다. 오이디푸스의 오(이)대(푸)수는 신탁에 의해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 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신이 정한 길을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은 그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신의 잔인한 놀이 탓이다. 반면에 유만(분)수는 정리 해고라는 신탁( : 정리해고는 신자유주의의 신탁이다)을 거스르는 캐릭터다. 그에게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자 하는 강력한 자유의지가 있지만 그 자유의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폭주한다.


그의 행위는 전형적인 후안무치도 유(만)분수요, 적반하장도 유(만)분수다. 그는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선택함으로써 최선을 다시 획득한다. 형식적으로는 악인의 최종 승리로 끝이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는 것은 죄의 전이다. 가족은 남편 혹은 아버지의 죄를 목격한다. 정원에 심은 사과나무가 사체의 양분을 토대로 무럭무럭 자라날 때마다 가족은 은폐된 죄의 공모자라는 인식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 경찰 신문 조사에서 흔히 하는 변명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라고 한다. 후안무치도 유만수다.



                                  

1)  有萬分數 : 유(만)분수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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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은 그 나라를 대표한다. 요즘은 어떤 작품들이 실려 있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피천득의 < 인연 > 과 이효석의 < 낙엽을 태우며1) > 가 대표작이었다. 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된 작품들이기도 하다. 내가 아직도 (피천득에게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같은 ㅡ ) 아사코라는 일본 여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렸을 때에는 몰랐지만 지금 다시 읽어 보면 한심해서 웃으면서 코 파게 된다. 오고가다 우연히 세 번 만난 여인에 대한 추억을 담은 < 인연 > 은 마치 싸구려 하이틴 로맨스 소설 같아서 웃음이 났다. 와, 우연히 세 번 만난 게 인연이라면 박찬욱 감독과 나는 BL 소설의 주인공이어야 한다. 나 또한 극장에서 박찬욱 감독을 우연히 세 번 만났으니깐 말이다. 에세이가 아무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쓰는 장르라고는 하나 사유보다 사연이 앞서면 그것은 라디오 청취자 사연 소개 글에 불과하다. 이런 작품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에세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그래도 이 작품은 이효석의 < 낙엽을 태우며 > 에 비하면 양반이다. 읽다 보면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작가는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태우기 위해 갈퀴로 긁어모은다. 날마다 하는 일이란다. "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 라는 문장을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집 마당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낙엽 타는 냄새를 통해서 갓 볶은 원두 커피를 낭만적으루다가 이야기한다, 진짜루. "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ㅡ " 그 당시 커피 한 잔 값이 하급 공무원 한 달 월급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귀족적 일상의 전시다. 한국인이 원두 커피의 맛을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20세기 인간 이효석은 이미 검은 유혹의 향에 환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던한 일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침대 생활을 하는 그는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 생각에 즐거워 하고, 눈이 내리면 스키를 탈 계획을 세운다. 너무 럭셔리한 생활이어서 글 말미에 모히토 가서 몰디브 한 잔 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기에 그의 소비 취향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효석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비난하고 싶으니깐 말이다. 이 글이 작성된 시기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다. 대한 독립을 위해서 수많은 백성이 만세를 불렀다가 고초를 겪고 독립군이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에 의해 도륙당하던 시절, 이효석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럭셔리한 삶을 플렉스한다. 망국의 백성들아, 들어는 봤냐 ? 코오오피 ~

그의 에세이에서 발견하게 되는 서구 제국의 단어들 : 커피, 백화점, 크리스마스 트리, 목욕실, 스키1)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효석과 동시대인이었던 김광균 시인이 낙엽을 "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라는 표현으로 시대적 절망을 표현한 것과는 달리 이효석은 낙엽을 마르셀 프르스트의 마들렌 과자로 소비하고 있다. 그는 시대의 비극 앞에서 추억의 낙엽을 타고 소확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럭셔리한 생활을 자랑하는 철딱서니없는 셀럽 같다. 어쩌면 그는 낙엽을 태웠다기보다는 양심을 태운 것이 아닐까 ?

​1)

"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볼까 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 ㅡ 낙엽을 태우며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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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1 1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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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1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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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결심 - 내 삶의 언어로 존엄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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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하루 루틴은 화장실에서 국어사전을 펼쳐 보는 일이다. 이 생활을 6,7년 하다 보니 이제는 단어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게 되었다. < 외롭다 > 와 < 고독하다 > 는 사전적 의미로 같은 말에 가깝지만 내게는 다른 의미다. 전자는 " 끈적이는 액체적 감성 " 에 가깝고 후자는 " 딱딱한 고체적 촉감 " 에 가깝다. 외로움은 듣는 이의 신파적 감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높은 반면에 고독은 차가운 촉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높다. 외로움은 뜨겁고 고독은 차갑다. 외로움은 자기 감정 통제에 실패했(기에 타인에게 기대려는 마음의) 증명이고 고독은 자기 감정을 적절하게 다스린 결과'다. 고독은 독립적이다.

천명관이 << 고래 >> 에서 고독을 벽돌에 비유했을 때( 박완서가 << 그 남자네 집 >> 에서 아름다운 시절을 구슬에 비유했을 때와 마찬가지로ㅡ ) 나는 직감적으로 이 작품이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편소설 전체 분량에 비하면 적확한 단어를 사용한 이 문장 하나는 사소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때로는 절대적일 때가 있다. 이화열의 << 고요한 결심 >> 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질문은 왜 " 조용한 결심 " 이 아니라 " 고요한 결심 " 1)인가 _ 라는 의문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찾고 싶었던 것은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언어의 온도였다.

작가의 시어머니는 조력사를 희망한다. 작가는 시어머니의 결정에 대하여 " 말기암도 중증질환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결정은 큰 충격이었다. " 고 고백한다. 결심의 주체도, 그 결심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가족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기에 이른다. 늙어간다는 것은 안개에 갇힌 풍경 같은 것. 생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내려놓으면 비로소 보이는 법. 시인 최승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터널은 끝에 가서야 환해진다고 말이다. 그녀의 고요한 결심에는 자기 존엄을 위한, 긴 터널을 통과한 끝에 보이는, 오랜 시간의 경과가 내포되어 있다.

살아 있는 자만이 오로지 죽을 수 있기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_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_라는 질문으로 반드시 되돌아온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저마다 자신의 언어를 갖는다고 말하는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면서 고요하다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인간이 자신에게조차 소외되는 이유는, 멈추고 존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침묵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답으로 차 있다. 이겨내는 것보다 느긋해지는 것. 나이가 들면서 소리에 둔해지더라도 고요를 들을 줄 아는 것.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고요함 속에 머물러 본 적 있던가. 창문 너머로 펼쳐진 구름바다를 본다. 이 생은 무엇을 남길지가 아니라, 얼마나 가볍게 떠날 수 있는지를 묻는 여정 같다. " ㅡ 197

이 문장에 밑줄을 긋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서운할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서운하기보다는 서러워 한다. 문장 하나하나 구슬 같다. 신파조의 간증 서사(2 에 빠지지 않는 것은 이 책의 탁월한 업적이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세상 풍파에 몸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본다. 깃털처럼 가벼운 영혼은 흔들리지 않는다.


1)

■ < 조용하다 > 는 단어의 풍경은 이렇다 : 학교 수업 종이 땡땡 울렸지만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이때 무섭기로 소문 난 호랑이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온다. 화가 난 선생님이 소리친다. " 조용히 해 ! " 정적에 휩싸인 교실. 이때 교실은 고요한 것이 아니라 조용한 것이다. 이처럼 < 조용하다 > 라는 단어는 인위적이며 청각적이다.

■ < 고요하다 > 는 단어의 풍경은 이렇다 : 투명한 유리컵에 흙탕물을 담으면 온통 흙빛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부유물이 바닥에 가라앉으면서 투명한 물색으로 변한다. 뿌연 시야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투명하고 청명하게 보이는 풍경의 감성이 " 고요 " 다. < 고요하다 > 라는 단어는 자연적이며 시각적이다. 교실은 조용한 것이고 바다는 고요한 것이다.

2) 에세이가 실패하는 지점은 사유보다 사연이 앞서기 때문이다. 사유 없는 경험의 나열은 에세이의 품격을 떨어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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