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무치도 유만수


현대에 와서 영웅은 슈퍼맨이나 베트맨처럼 힘센 사람을 대표하지만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은 헤라클레스가 아니다. 헤라클레스는 그냥 힘이 센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 헤라클레스는 여자에 미쳐서, 나중에는 광기에 사로잡혀 자식들을 죽인 난봉꾼이다. 왕년은 휘황찬란했으나 말년은 정신 착란 했던 클래스.....


오히려 그리스 비극 서사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는 오이디푸스다. 자기 서사의 실패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스스로 눈알을 도려낸 그야말로 비극적 영웅이다. 오이디푸스의 잘못된 행위는 온전히 그의 잘못이 아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운명 앞에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순응했을 뿐이다. 그는 신이 두는 체스판 위의 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선택과 행위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는다. 그는 어쩔 수가 없다 _ 라는 변명 대신 스스로 눈을 도려냄으로써 자신에게 내려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어쩔 수 없다는 프레임은 반드시 어쩔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영화 속에서 만수는 최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최악( 세 번의 살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만 이병헌의 동네 목욕탕 동굴 보이스로 발화된 독백 속에서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최선과 최악 사이에 놓여진 무수한 차선(책)이다. 인간의 욕망은 누구나 다 최선책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현실은 무수한 차선책 중에서 하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어릴 적 꿈은 대통령이었지만 성인이 되면 9급 공무원 시험 합격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수는 차선을 선택(어쩔)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악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최악의 인간이다.


오이디푸스의 한국어 이름이 명백한 오대수( : 올드보이)와 유만분수1에서 이름을 따온 것처럼 보이는 유만수( : 어쩔수가없다)는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다. 오이디푸스의 오(이)대(푸)수는 신탁에 의해 정해진 운명을 따른다. 그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신이 정한 길을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근친상간은 그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신의 잔인한 놀이 탓이다. 반면에 유만(분)수는 정리 해고라는 신탁( : 정리해고는 신자유주의의 신탁이다)을 거스르는 캐릭터다. 그에게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자 하는 강력한 자유의지가 있지만 그 자유의지가 잘못된 방향으로 폭주한다.


그의 행위는 전형적인 후안무치도 유(만)분수요, 적반하장도 유(만)분수다. 그는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최악을 선택함으로써 최선을 다시 획득한다. 형식적으로는 악인의 최종 승리로 끝이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는 것은 죄의 전이다. 가족은 남편 혹은 아버지의 죄를 목격한다. 정원에 심은 사과나무가 사체의 양분을 토대로 무럭무럭 자라날 때마다 가족은 은폐된 죄의 공모자라는 인식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 경찰 신문 조사에서 흔히 하는 변명 중 하나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라고 한다. 후안무치도 유만수다.



                                  

1)  有萬分數 : 유(만)분수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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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은 그 나라를 대표한다. 요즘은 어떤 작품들이 실려 있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피천득의 < 인연 > 과 이효석의 < 낙엽을 태우며1) > 가 대표작이었다. 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된 작품들이기도 하다. 내가 아직도 (피천득에게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같은 ㅡ ) 아사코라는 일본 여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렸을 때에는 몰랐지만 지금 다시 읽어 보면 한심해서 웃으면서 코 파게 된다. 오고가다 우연히 세 번 만난 여인에 대한 추억을 담은 < 인연 > 은 마치 싸구려 하이틴 로맨스 소설 같아서 웃음이 났다. 와, 우연히 세 번 만난 게 인연이라면 박찬욱 감독과 나는 BL 소설의 주인공이어야 한다. 나 또한 극장에서 박찬욱 감독을 우연히 세 번 만났으니깐 말이다. 에세이가 아무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쓰는 장르라고는 하나 사유보다 사연이 앞서면 그것은 라디오 청취자 사연 소개 글에 불과하다. 이런 작품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에세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그래도 이 작품은 이효석의 < 낙엽을 태우며 > 에 비하면 양반이다. 읽다 보면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작가는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태우기 위해 갈퀴로 긁어모은다. 날마다 하는 일이란다. "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 라는 문장을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집 마당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낙엽 타는 냄새를 통해서 갓 볶은 원두 커피를 낭만적으루다가 이야기한다, 진짜루. "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ㅡ " 그 당시 커피 한 잔 값이 하급 공무원 한 달 월급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귀족적 일상의 전시다. 한국인이 원두 커피의 맛을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20세기 인간 이효석은 이미 검은 유혹의 향에 환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던한 일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침대 생활을 하는 그는 겨울이 오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 생각에 즐거워 하고, 눈이 내리면 스키를 탈 계획을 세운다. 너무 럭셔리한 생활이어서 글 말미에 모히토 가서 몰디브 한 잔 하는 에피소드가 나오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기에 그의 소비 취향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효석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비난하고 싶으니깐 말이다. 이 글이 작성된 시기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다. 대한 독립을 위해서 수많은 백성이 만세를 불렀다가 고초를 겪고 독립군이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에 의해 도륙당하던 시절, 이효석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럭셔리한 삶을 플렉스한다. 망국의 백성들아, 들어는 봤냐 ? 코오오피 ~

그의 에세이에서 발견하게 되는 서구 제국의 단어들 : 커피, 백화점, 크리스마스 트리, 목욕실, 스키1)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효석과 동시대인이었던 김광균 시인이 낙엽을 "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 라는 표현으로 시대적 절망을 표현한 것과는 달리 이효석은 낙엽을 마르셀 프르스트의 마들렌 과자로 소비하고 있다. 그는 시대의 비극 앞에서 추억의 낙엽을 타고 소확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럭셔리한 생활을 자랑하는 철딱서니없는 셀럽 같다. 어쩌면 그는 낙엽을 태웠다기보다는 양심을 태운 것이 아닐까 ?

​1)

"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전등으로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볼까 하고 계획도 해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 ㅡ 낙엽을 태우며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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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1 1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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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1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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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결심 - 내 삶의 언어로 존엄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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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하루 루틴은 화장실에서 국어사전을 펼쳐 보는 일이다. 이 생활을 6,7년 하다 보니 이제는 단어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게 되었다. < 외롭다 > 와 < 고독하다 > 는 사전적 의미로 같은 말에 가깝지만 내게는 다른 의미다. 전자는 " 끈적이는 액체적 감성 " 에 가깝고 후자는 " 딱딱한 고체적 촉감 " 에 가깝다. 외로움은 듣는 이의 신파적 감성에 호소하는 경향이 높은 반면에 고독은 차가운 촉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높다. 외로움은 뜨겁고 고독은 차갑다. 외로움은 자기 감정 통제에 실패했(기에 타인에게 기대려는 마음의) 증명이고 고독은 자기 감정을 적절하게 다스린 결과'다. 고독은 독립적이다.

천명관이 << 고래 >> 에서 고독을 벽돌에 비유했을 때( 박완서가 << 그 남자네 집 >> 에서 아름다운 시절을 구슬에 비유했을 때와 마찬가지로ㅡ ) 나는 직감적으로 이 작품이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편소설 전체 분량에 비하면 적확한 단어를 사용한 이 문장 하나는 사소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때로는 절대적일 때가 있다. 이화열의 << 고요한 결심 >> 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질문은 왜 " 조용한 결심 " 이 아니라 " 고요한 결심 " 1)인가 _ 라는 의문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찾고 싶었던 것은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언어의 온도였다.

작가의 시어머니는 조력사를 희망한다. 작가는 시어머니의 결정에 대하여 " 말기암도 중증질환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 결정은 큰 충격이었다. " 고 고백한다. 결심의 주체도, 그 결심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가족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기에 이른다. 늙어간다는 것은 안개에 갇힌 풍경 같은 것. 생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내려놓으면 비로소 보이는 법. 시인 최승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터널은 끝에 가서야 환해진다고 말이다. 그녀의 고요한 결심에는 자기 존엄을 위한, 긴 터널을 통과한 끝에 보이는, 오랜 시간의 경과가 내포되어 있다.

살아 있는 자만이 오로지 죽을 수 있기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_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_라는 질문으로 반드시 되돌아온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저마다 자신의 언어를 갖는다고 말하는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면서 고요하다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인간이 자신에게조차 소외되는 이유는, 멈추고 존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침묵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답으로 차 있다. 이겨내는 것보다 느긋해지는 것. 나이가 들면서 소리에 둔해지더라도 고요를 들을 줄 아는 것.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고요함 속에 머물러 본 적 있던가. 창문 너머로 펼쳐진 구름바다를 본다. 이 생은 무엇을 남길지가 아니라, 얼마나 가볍게 떠날 수 있는지를 묻는 여정 같다. " ㅡ 197

이 문장에 밑줄을 긋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서운할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서운하기보다는 서러워 한다. 문장 하나하나 구슬 같다. 신파조의 간증 서사(2 에 빠지지 않는 것은 이 책의 탁월한 업적이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세상 풍파에 몸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본다. 깃털처럼 가벼운 영혼은 흔들리지 않는다.


1)

■ < 조용하다 > 는 단어의 풍경은 이렇다 : 학교 수업 종이 땡땡 울렸지만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이때 무섭기로 소문 난 호랑이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온다. 화가 난 선생님이 소리친다. " 조용히 해 ! " 정적에 휩싸인 교실. 이때 교실은 고요한 것이 아니라 조용한 것이다. 이처럼 < 조용하다 > 라는 단어는 인위적이며 청각적이다.

■ < 고요하다 > 는 단어의 풍경은 이렇다 : 투명한 유리컵에 흙탕물을 담으면 온통 흙빛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부유물이 바닥에 가라앉으면서 투명한 물색으로 변한다. 뿌연 시야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투명하고 청명하게 보이는 풍경의 감성이 " 고요 " 다. < 고요하다 > 라는 단어는 자연적이며 시각적이다. 교실은 조용한 것이고 바다는 고요한 것이다.

2) 에세이가 실패하는 지점은 사유보다 사연이 앞서기 때문이다. 사유 없는 경험의 나열은 에세이의 품격을 떨어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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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랜드 작품집 : MOVIE ARTBOOK
김태용.김대식 지음 / 김영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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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났다 :

영화 << 원더랜드, 2024 >> 는 말 그대로 놀라운 영화'다. 이 영화는 공상과학이라는 외피를 둘렀을 뿐 유사 러브 액츄어리'다. 보는 내내 지루해서 정지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계속 고민하면서 보았다. 참다 참다 참다가는 결국 참치가 될 것만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혀서 결국 마지막 5분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인내심의 한계라기보다는 항의의 표시였다. 공상과학 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공상과 과학이지 멜로가 아니다. 멜로는 공상과 과학이라는 설정이 만든, 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는 역할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숟가락이 만찬의 주인공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영화는 크게 딥러닝 기술로 복원된 탕웨이(에피소드)와 박보검(에피소드)이 중심인 메인 플롯과 주변부의 서브 플롯이 첨가된 옴니버스 형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영화가 재현하고 있는 장소다. 죽은 자를 딥러닝으로 복원한 아바타 탕웨이와 박보검이 머무는 장소는 사막과 우주다. 문제는 인물과 장소가 맺는 관계 설정이 농밀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 탕웨이는 직업과 상관 없이 어릴 적 장래 희망이 고고학자였다는 이유로 가상 현실에서는 사막에서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가 된다. 박보검은 더욱 황당하다. 비행기 승무원이었던 박보검은 우주비행사가 되어 있다. 장소에 대한 애착이 없다 보니 인물과 장소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서로 융합하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사막과 우주라는 공간은 철학적 사유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보다는 이발소 벽에 걸린 그림처럼 예쁜 장식으로만 활용되고 있다. 스펙타클하기는커녕 입체감 없이 납작하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공간에 대한 고독과 경외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풍경만 이국적인 관광 엽서 같다. 공간이 입체감이 없다 보니 그 공간을 점유한 캐릭터가 납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캐릭터가 납작해지는 순간, 그 영화는 망하게 된다. 이 영화를 싸구려 이발소 그림 혹은 500원짜리 관광 엽서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에는 배우들의 빛나는 외모도 큰 몫을 차지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생명력은 시들시들하다. 특히, 공유가 연기한 캐릭터는 관객이 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게 만드는 1등 공신이다.

보다 보면 : 동서식품 카누 광고의 영화 버전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가 등장하는 영화 속 한 장면을 캡쳐 해서 카누 로고를 붙이면 영락없이 동서식품 광고다. 그는 영화에서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찍고 자빠졌다(박보검-수지 커플은 의류 CF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배우의 잘못인가, 감독의 잘못인가 ? 당연히 감독의 능력 부족 탓이다. 지금까지 내가 침에 입이 마르도록(의도적 오기다) 투덜댔던 단점들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진짜진짜 문제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구구절절한 사연(산 자의 사연만 해도 구구절절한데 죽은 자마저 한마디 거드니 구구절절X2인 영화라 할 수 있다)에도 불구하고 사연만 둥둥 떠다닐 뿐 인간에 대한 서사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인간 없는 서사는 곧 서사 없는 잔상만 남는 영화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공유는 영화에 등장하여 카누 광고나 찍고 자빠졌고, 탕웨이는 낙타가 보이는 사막에서 의미 없이 흙만 파고 자빠졌고, 박보검은 중력 없는 공간에서 어화둥둥 떠다니기만 한다. 두 쌍의 메인 플롯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인물의 서브 플롯은 겉돈다기보다는 헛돈다. 공유만 헛발질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유미와 최우식이 소개하는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 영화의 카메오가 아닌 서브 플롯의 주연인데 카메오처럼 소비된다. << 원더랜드 >> 는 AI가 만든 가상 세계를 다룬 영화이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AI가 이 영화를 만든다면 인간이 만든 이 영화보다 잘 만들 수 있을까 ? 후자의 경우에 전 재산 500원을 걸겠다.

■ 덧대어 투덜대기

이 영화를 다룬 언론 기사를 읽다가 빵 터졌다. 다음과 같다. " 연출과 더불어 탕웨이 등 주요 출연진의 절제된 열연은 '원더랜드'의 완성도를 더욱 끌어올려, 구닥다리 신파 멜로 대신 시적인 느낌을 지닌 유럽산 SF수작의 길로 이끈다. 특히 탕웨이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파트너 없이 홀로 연기하다시피 하는데, 그럼에도 박보검-수지 커플을 능가하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 기자는 왜 이 영화를 두고 시적인 느낌을 지닌 유럽산 SF 수작이라고 표현했을까 ? 그것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한국이라는 지역의 정체성보다는 이국적인 이질성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어, 영어, 한국어가 뒤섞여 있고 공간도 사막과 우주다. 한국 영화이기는 한데 한국인으로서 느낄 만한 공감은 없다. 공간에 대한 이해도 낮다. 사막과 우주를 체험한 한국인이 얼마나 있겠나. 좋게 말하자면 세계의 보편성에 근접한 영화라고 표현할 수는 있으나 나쁘게 말하자면 뜬구름 위에서 뒷짐 진 산신령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영화다. 시골로 낙향해서 텃밭 가꾸며 사는 것 같은 정유미의 부모는 숟가락과 젓가락 대신 수저와 포크로 파스타를 맛있게 먹는다. 식탁 위에는 바게트와 와인 잔에 담긴 포도주가 놓여 있다. 생각해 보니 이 영화에서는 식사를 하는 장면이 몇몇 등장하는데 한식인 밥과 찌개가 나오는 장면은 한 장면도 없다. 공상 과학 영화에 쌀밥에 된장 찌개가 등장하면 예쁜 화면을 망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묻고 싶다. 감독님, 쌀밥이 그렇게 부끄러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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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 - 빈곤과 불평등의 세기를 끝내기 위한 탈성장의 정치경제학
제이슨 히켈 지음, 김승진 옮김, 홍기빈 해제 / 아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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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은 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가 _ 라는 의문은 이미 오래된 질문이다. 서점에 가면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현상을 분석한 책은 쌓이고 쌓였다. 이 현상은 특정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 현상이다. 대한민국도 예의는 아니다. OECD 노인 빈곤율 압도적 1위(40. 4% : 2위 라트비아는 25%)를 차지한 대한민국 고령층이 국민의힘 핵심 지지층이라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종의 반계급 투표인 셈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원전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 원전은 주로 경상도에 배치되어 있는데 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경상도 사람들이 많다. 이것도 일종의 계급투표 위반이다.

대한민국의 원전 정책을 보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연상케 한다. 수도권에는 왜 원전이 없을까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원전 사고가 발생하면 위험하니까. 달리 말하자면 : 원전 사고가 나면 지방 사람들(부산,울산,경주,울진,영덕)도 위험하다. 목숨은 하나인데 그 목숨에 대한 귀천은 있다(수도권 시민은 지방 시민의 목숨보다 귀하다). 그렇다면 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역은 어디일까. 당연히 수도권이다. 전력 수요의 70%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위험 시설은 지방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그 혜택은 수도권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번쩍번쩍 빛나는 서울의 밤거리를 보라. 정작, 지방에서는 재정난을 이유로 도로의 밤 조명을 낮춰서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한다고 한다. 도대체 원전 정책은 누구를 위한 정책인가 ?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서구 열강은 황금알을 낳는 땅(식민지)에 군대와 무기를 투입하여 자원을 탈취했지만 지금은 군대 대신 개발 원조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국가에 머니(돈)를 빌려준다. 머니가 곧 무기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이 저개발 국가에 대한 개발 원조 자금이 무상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발 원조 자금은 상환 의무는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이자가 붙는다. 때론 원금보다 이자가 몇 배가 더 붙는 경우가 허,허허허허다하다. 전형적인 사채업자의 고리대금이다. 이것을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같은 국제 개발기구가 담당한다. 사시미칼을 들고 돈거래를 하면 사채업이고 회색양복이 서류가방을 든 신사가 돈거래를 하면 개발 원조'다.

채무국은 채권국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제일 먼저 국영화 기업을 민영화로 전환하라고 요구한다. 그다음은 노동 임금을 낮추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온갖 신자유주의 정책에 참여한다. 채권국이 채무국에게 가하는 내정 간섭이다. 예상 시나리오는 뻔하다. 글로벌 자본이 투입되어 국영 기업을 산다. 그리고 채무국의 저임금 정책은 채권국 투자자 이익을 극대화한다. 서구 열강 입장에서 보면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굳이 군대와 무기를 동원하여 식민지로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돈이 곧 무기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다. 한스 로슬링 같은 데마고그( :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장사꾼 )는 부자 나라의 개발 원조로

가난한 나라의 극빈층이 중위 소득으로 상향 조정되었다며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구라를 치지만 본질은 빈곤과 불평등의 격차가 나날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이슨 히켈은 << 격차 >> 라는 책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현재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라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좋은 책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불온한 책이라는 낙인이 찍힐 뿐이다. 오히려 나쁜 책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나쁜 쪽으로 ! 한스 로슬링의 << 팩트풀니스 >> 를 읽고 나면1) 우리는 어느새 신자유주의 자본가의 찬탈 행위를 세계의 구원으로 이해한다. 사시미칼을 버리고 회색 양복에 서류 가방을 든 사람들이 고리를 뜯는 일은 이제 원조, 구호,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고 있다. 97년 IMF 가 발생했을 때 세계은행이 대한민국에 요구했던 구조조정의 여파로 무수히 많은 한국인이 자살했던 기억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 << 격차 >> 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은행의 조건부 대출이 가진 기발한 점은 채권자에게 사실상 아무런 리스크를 부담시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세계은행은 월가에 채권을 판매해 은행과 민간 투자자들이 글로벌 남부 국가들의 부채를 살 수 있게 한다. 이 ‘혁신적인 부채 상품innovative debt products’(세계은행은 이렇게 부른다)은 안전하면서(보통 트리플A 등급이다) 동시에 15%에까지 달하는 큰 수익을 준다. 세계은행은 어떻게 해서 고수익을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었을까? 채무자에게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달도록 강제함으로써 세계은행은 채무국이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원천에서 최대한 돈을 끌어모아 부채 상환에 최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다른 지출을 줄이고 자산을 매각해서 그 돈으로 부채를 갚으라고 채무국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패 가능성이 없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채무국의 시장을 외국 투자자에게 개방하는 추가적인 이득도 있었다(격차, 히켈).



위의 ‘혁신적인 부채 상품 innovative debt products’ 이라는 표현을 정직하게 번역하자면 " 고리대금 사채업 상품 " 이다. 이 고리대금을 세계은행이 판매하고 있으니 세계은행이야말로 베니스의 상인인 셈이다. 샬록인가 ? 다윈은 << 비글호 항해기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 내가 자주 인용하는 문장이다.






1) << 팩트풀니스 >> 에서는 인구 증가 문제에 대해서 믿을 수 없는 주장을 한다. " 생존자(유아 사망률 감소 현상)가 늘어날수록 인구는 줄어듭니다아 ! " 이 문장을 읽고 나는 괴랄한 감탄사는 내뱉었다. " 뙇, 시베리아 오호츠크에서 고래끼리 싸우는데 독도새우 등 터지는 소리 하고 자빠졌다. " 그의 주장은 현대 의학의 발달로 유아 사망률이 감소하면 아이들이 증가한다는 소리. 그는 현대인들이 아이들을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하기 때문에 하나만 낳아 집중과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쌍팔련도 남조선 새마을 구호 같은 이 주장은 틀린 말이다. 아이들은 미래의 가임 인구'이므로 유아 사망률 감소는 인구 감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구 증가의 요인이다.


저자는 1960년대 이집트의 유아 사망률이 30%에서 오늘날은 2.3%로 낮아져서 이집트 부모들은 모든 자녀가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대가족을 꾸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저자가 좋아하는 통계로 확인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누구냐 ? 찾아보았다. 2000년에 7천만 명이었던 이집트 인구는 2024년에 1억 600만 명으로 가파르게, 초고속으로, 졸라 빠르게 증가하였다. 한스 로슬링이여, 이것에 대해서는 뭐라 하실 겁니껴 ? 또 다른 증거도 있다. 나이지리아 유아 사망률은 1980년대 나이지리아 유아 사망률보다 1/3 줄었지만 출산율은 미친듯이 치솟았다. 최근 UN 통계에 의하면 2017년 1억 9100만 명이었던 인구는 앞으로 2100년이 되면 8억 명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024년 현재 나이지리아 인구는 2억 2,915만 2,217명이다).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 진짜 주장 " 은 신자유주의 찬양이다. 부자 나라가 그동안 가난한 나라에게 많은 원조를 했기에 빈곤층은 감소했고, 불평등도 해소되었으며, 서구 중심의 개발 원조 정책이 환경을 악화시키지 않았다는 ㅡ 주장. 그래서 이 책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 투자 결정과 관련해서는 과거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순진한 시각을 버리고, 오늘날 최고의 투자 기회는 가나, 나이지리아, 케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프리카를 주로 언급했지만, 요즘 인도가 성장가능성이 높아보인다. 투자처를 미국, 한국에 국한하지 말자 (팩트풀니스, 361쪽) "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말 : 서구의 자본 사업가들이여 ! 저개발 국가인 아프리카 대륙에 투자하라 ! 국유화를 민영화로 만들고, 빈곤층 노동자에게 값싼 임금을 제공하고 자원을 헐값에 사들여라. 내 주장이 지나친 과대 망상이라고 ? 이 책에 대해 극단적 찬사를 쏟은 미국인 2명이 있다. 빌 게이츠는 모든 졸업생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고, 오바마는 2018년에 읽은 가장 감명 깊은 책으로 선정했다. 공교롭게도 한 명은 신자유주의 경제 권력의 우두머리이고, 다른 한 명은 정치 권력의 우두머리였다. 또한 빌 게이츠는 자선이라는 탈을 쓴 약탈자이고 오바마는 흑인의 탈을 쓴 백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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