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오르페와 백인 조르바











모든 단어에는 기본값이 정해져 있습니다. " 의사 ㅡ " 라는 단어의 기본값은 무엇일까요 ? 남성입니다. 이 단어에는 의사'는 남성이다 는 전제가 깔려 있죠. 남자 의사를 두고 남의사'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반면에 여자가 의사인 경우에는 < 여의사 >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표준 국어 사전에 등재된 단어죠. < 여기자 >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 남기자 > 라는 단어 들어보셨습니까 ? 젊었을 때 여기자로 활동했던 사람이 나중에 소설가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되돌아온 응답은 < 여류 작가 > 였습니다, 응 ?


늙은 여자라는 뜻을 가진 < 노파 > 라는 말도 꽤 웃깁니다. 노인이라는 단어는 가치 중립적이어서 모든 성별에 사용할 수 있지만 애써 노파라는 특수 상황을 만듭니다. 모든 디폴트가 남성에 맞춰진 것은 아닙니다. < 무당 > 의 기본값은 여자'이지요. 여자가 주로 무당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남자가 무당이 되면 " 남무당 " 이 될까요 ?  그럴 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남성 무당을 < 박수무당 > 이라고 하죠. 박수가 무슨 뜻일까요 ?  박수의 어원은 몽골어로 박시'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나열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단어를 만든 주체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차이를 부각하려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차별입니다. 마르셸 까뮈 감독이 연출한 << 흑인 오르페 Orfeu Negro, 1959 >>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훌륭한 영화죠. 그런데 영화 제목이 이상합니다. 굳이 오르페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오르페가 백인이었다면 영화 제목이 << 백인 오르페 >> 가 되었을까요 ? 매우 이상한 강조법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그리스인 백인 조르바'라고 하지 않잖아요. 두 여성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한 명은 백인이고 다른 한 명은 흑인입니다.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에게 묻습니다. 


" 너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뭐가 보이니 ? " 백인 여성이 대답합니다. " 여자가 보이지 ! " 그러자 흑인 여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 여자 > 가 아니라 < 흑인 여자 > 가 보여. 너에게 피부 색깔은 보이지 않아. 너는 그것을 보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거든. 그것이 바로 특권이 작동하는 방식이거든.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지. " 그렇다면 남자는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볼 때 무엇을 볼까요 ?  남자는 거울을 볼 때 " 인간 " 을 봅니다. 


제가 이 자리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그 특권을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특권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차별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차별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차이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특권을 가진 사람은 차별이 보이지 않죠.  보편성이라는 말도 사실은 굉장히 폭력적인 개념입니다.  보편성의 핵심은 다수이고 다수는 주류를 형성합니다.  사회적 디폴트 값이라는 것도 사실은 보편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인지 영하팽뢴과인지 하는 사람이 영화 << 캐롤 >> 을 본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제가 느끼기엔, 테레즈한테는 동성애적인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라 캐롤이 필요한 겁니다. 근데 하필이면 캐롤이 여자였을 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동성애를 다루는 영화에서는 상대방이 여자라는 게 핵심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성애적인 정체성에서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라는 것이 그 사람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최근에 개봉을 앞두고 있는 < 대니쉬걸 > 같은 바로 그 영화가 그런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  이동진은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뭐가 보일까요 ? 당연히 휴먼이 보일 겁니다. 


네에, 그레이트 휴먼이 보일 거예요.  이동진은 캐롤을 여성이라는 소수성을 가진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냥 단순히 보편적 인간으로 바라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성애적 사랑을 보편적 사랑으로 전환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보편적 기본값이거든요. 이 영화는 이됭진 영하팽뢴가의 주장과는 달리 캐롤이 여성이어야지만 성립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상업 영화는 이성애 중심 서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동성애를 다루는 소수의 영화가 인디 영화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동진은 그 꼴조차 보기가 싫었던 모양입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고 소수에 대한 이해도 부족한 인간이 영하팽론과랍시고 설치고 다니는 꼴을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차별도 없고 그레이트 휴먼만 존나 넘치는 세상이 보입니다. 아름답죠. 참, 아름다운 세상이에요. 니미 조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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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1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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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1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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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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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2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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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2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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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8 2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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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소리도 없이
홍의정 감독, 유아인 외 출연 / SM LDG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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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도 없이1)










초희는 몇 짤 ? 네에, 11살입니다. 어린 남동생도 있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이라는 4인 가족입니다. 경제적 상황도 나쁘지 않은 모양입니다. 실수가 아니라면 유괴범이 가난한 집 아이를 납치할 리는 없으니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 납치되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이 영화는 아버지가 인질범에게 복수를 하는, 그렇고 그런 << 테이큰 >> 유형의 아버지 복수극'일까요 ?  이 영화의 묘미는 장르적 클리셰를 비틀어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좌회전 깜빡이 켜 놓고 우회전 하는 경우죠. 


창복(유재명 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초희 아버지는 납치범의 실수로 3대 독자인 막내아들 대신 딸이 납치된 것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가부장 중에서도 진짜 가부장이죠.  그는 딸의 몸값이 너무 비싸다며 인질범과 가격을 놓고 흥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초희가 인질범에게서 풀려나는 일도 차일피일 미루어지지요.  납치 사건에서 시간이야말로 납치된 아이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골든 타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버지는 납치된 딸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볼 때 아버지는 딸에 대하여 그닥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초희는 어떤 아이일까요 ?  인질로 잡힌 아이는 눈치가 빠릅니다. 눈치가 빠르다기보다는 눈치를 본다는 표현이 적확할 겁니다. 초희는 평소에 어른의 눈치를 보는 것에 익숙한 아이입니다. 눈치를 < 보다 > 라는 사동사는 눈치가 < 보이다 > 는 피동사의 결과입니다. 눈치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눈치를 봅니까 ?  그렇다면 피동사의 주체는 누구죠 ?  당연히 그 주체는 부모일 겁니다. " 눈치가 없는 아이 ㅡ " 가 사랑받는 아이일 수는 있으나 " 눈치를 보는 아이 ㅡ " 가 사랑을 받는 아이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희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입니다. 


초희는 인질범의 마음에 쏙 들도록 " 예쁜 짓 " 을 하죠.  예쁜 짓 ?!  예쁜 짓을 나열해 봅시다  :  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고 문주(유아인의 어린 여동생)를 보살핍니다. 이 모든 행동은 진심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연극에 가깝죠. 이 연극은 소꿉놀이와 유사합니다. 역할 놀이'를 하는 것이죠. 초희는 어머니 역할이고 태인은 아버지 역할입니다. 그리고 문주는 가짜 딸이죠. 초희는 밥상을 차려놓습니다. 문주가 제일 먼저 음식에 손을 대려고 하자 초희는 문주에게 밥상머리 교육을 합니다. " 오빠가 먼저 먹고 나서 먹자 ! " 우리가 이 장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여성 차별의 교육화'입니다. 


딸보다 아들이 귀한 대접을 받는 가정에서 자란 딸은 성차를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차일피일 연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딸이라는 잰더에게 부여되는 예쁜 짓의 정체죠.  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는 태인이 중심이 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초희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 별주부전 > 이 아니라 < 토끼전 > 인 것이죠.  이 영화에 대한 수많은 논평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태인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이해합니다.  길티플레져 ?  참, 이상하지요. 별주부전에서 악당은 토끼를 납치한 별주부인데 우리는 오히려 토끼를 얄미운 캐릭터로 인식하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어느 쪽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해석은 180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프레임이자 이데올로기입니다. < 별주부전 > 에서 우리가 별주부에게 동조하는 이유는 가부장 사회에 길들여진 가해자(이거나 가해자의 서사에 익숙한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가해자 중심 서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면 토끼가 얄미운 녀석이 되죠.  이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태인은 순수를 잃지 않은 어른으로 묘사되고 초희는 영악한 아이로 묘사가 됩니다. 초희가 배반한 것은 우정이 아니라 가부장의 통념입니다. 아이는 우여곡절 끝에 용궁을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밝지 않습니다2). 아이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죠. 이 영화는 놀라울 만한, 번개처럼 느닷없이 출몰한 훌륭한 데뷔작'입니다. 놓치면 후회합니다. 





                                      


1)  < 소리도 없이 > 무슨 뜻일까요 ?  영화 속 태인(유아인)은 듣기와 읽기가 가능하지만 말은 하지 못한다는 설정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자면 " 구순기 고착 " 인 캐릭터입니다. 유아인은 누가 봐도 어른이 아니라 아이'입니다. 몸만 어른일 뿐이지요(반면에 눈치 백 단 아이는 일찍 철이 든 어른 같습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유형을 구순기라고 말하고 라캉은 이것을 " 상상계 " 라고 명명합니다. 상상계란 언어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말을 배우고 언어에 대한 감각을 익히기 전이죠. 그래서 제목이 < 소리도 없이 >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 말도 없이 > 죠. 이 작품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대립을 다룬 영화입니다. 상징계에 속한 아이는 상상계에 머무르는 어른을 속이고 무사히 학교로 귀환하죠.


2) 초희는 집이 아니라 학교로 귀환합니다. 대부분의 유괴 영화에서 납치된 아이들은 결국에는 집으로 귀환하는 결말을 가졌는데 왜 이 영화에서 초희는 집이 아니라 학교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끝이 날까요 ?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언어)에 진입하는 행위는 " 아버지의 말과 법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남성 중심적 사고에 기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남성적인 것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여성적인 것은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죠. 한자를 보세요. 부수가 女인 한자치고 좋은 의미를 가진 한자는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남성 명사와 여성 명사로 구분되는 언어를 가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배운다는 것부터가 이미 잰더 차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학교는 그 시작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초희는 남자 동생 대신 실수로 납치된 누나'입니다. 초희의 아버지는 딸의 몸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거래를 차일피일 미루죠. 사실상, 방치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에 납치된 아이가 남자 아이였다면 몸값을 가지고 흥정을 할까요 ? 우여곡절 끝에 아이는 살아서 학교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죠. 이 영화는 납치된 여자 아이의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푸코에 의하면 학교는 아버지의 법을 강제로 가르치는 훈육 장치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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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Roddy Piper - They Live (화성인 지구 정복) (4K Ultra HD)(한글무자막)
Various Artists / Shout Factory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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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봅시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행간을 읽는 것입니다.  행간이란  :  행과 행 사이'이니,  " 행간을 읽는다는 것 ㅡ " 은 작가가 행과 행 사이에 숨겨놓은 문장을 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은 바로 행간을 읽는 능력에 달렸습니다.  행간을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책을 보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글을 모르는 아이도 책을 볼(seeingㅡ) 수는 있으니까요. 그런데 말이 쉽지, 보이지 않는 문장을 읽는다는 것이 어디 쉽나요.  그래서 우리는 해석할 수 있는 권리를 평론가에게 위임합니다. 


삐딱한 서정의 대가 존 카펜터 감독이 1988년에 만든 B급 영화 << 화성인 지구 정복 THEY LIVE, 1988 >> 에는 보이지 않는 문장(행간)을 읽을 수 있는 색안경이 등장합니다. 이 안경을 쓰면 광고와 미디어에 노출된 메시지의 진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 In God We Trust(우리는 주 하느님을 믿습니다) " 라는 문장이 새겨진 1달러 지폐를 색안경을 쓰고 보면 " THIS IS YOUR GOD  화폐는 너의 신이다 " 로 보입니다. 색안경을 쓰는 순간, 1달러 지폐에 새겨진 구절이 전혀 새로운 의미로 읽히게 됩니다. 잡지를 펼쳐 봅니다. " 권력에 대해 의문을 갖지 마라. 생각 없이 웃고 즐겨라 ! " 


색안경 쓴 주인공은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등장하는 건물 옥외 광고판을 봅니다. 그 광고의 행간은 "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라 ! " 라는 문장이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  상품을 생산해서 자본을 축적하는 자본가에게 있어서 인구 증가는 곧 소비자의 증가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이므로 장사꾼 입장에서 보면 인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진딧물 많다고 투덜대는 개미는 없으니까요. 엘리트 정치인들이 애 많이 낳는 것이 애국이라고 발언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죠. 영화 속 주인공은 색안경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영화의 박력은 바로 여기에 있죠. 우리는 흔히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주관적 선입관(편견)을 가지고 평가하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편애야말로 가장 건강한 정치적 애티튜드라 믿는, 마찬가지로 편견을 가져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고 믿기에, 저는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색안경은 진실을 왜곡하는 도구가 아니라 진실을 보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이 영화는 B급 영화라는 이유로 평론가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은 작품이지만 80년대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 이 영화보다 훌륭한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모론자는 세상을 음모론적 시선으로 세계를 이해합니다. 그리고 구조주의자는 세계를 구조주의적 시각으로 이해하고,  페미니스트는 세계를 젠더 갈등의 역사로 이해하죠.  사실, 따지고 보면 이데올로기야말로 색안경인 셈입니다. 지금까지 역사 발전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발견과 함께 했습니다.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의 색안경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색안경의 등장으로 인해 박살이 났죠. 저는 범성론이라는 이름의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 색안경을 쓰면 곳곳에 암약하고 있는 " 자지 " 가 보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혐오의 언어들 : 김치녀, 맘충, 조선족, 똥꼬충'이라는 낱말이 박힌 문장이 등장하면 저는 빌리 더 키드처럼 잽싸게 안경집에서 범성론이라는 이름의 색안경을 쓰고 그 혐오의 문장 밑에 흐르는 행간을 읽습니다. 혐오 언어를 생산한 주체가 누구인가를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미혼인 여성이 김치녀라는 단어를 생산할 리 없고, 아이를 가진 엄마가 맘충을 생산할 리 없으며,  중국 동포와 동성애자가 조선족 괴담과 똥꼬충을 확대 재생산할 리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안경을 쓰고 보면 김치녀, 맘충, 조선족, 똥꼬충이라는 단어는 사라지고 얼라들의 히마리 없는 자지'가 보입니다.  


혐오 언어를 생산하는 공장은 이성애 중심의 남근중심사회가 발원지입니다. 남근중심사회를 저잣거리 입말로 번역하자면 좆 같은 사회죠.  여러분, 제 잘못이 아닙니다. 이 안경을 쓰면 그렇게 보인다니까요 ?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각각 일장일단이 있겠습니다만, 색안경을 벗고 사느니 차라리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지 않을까요 ?  오늘도 저는 색안경을 썼습니다. 책을 읽습니다. 현대인의 불안이라는 문장을 읽다가 피식 웃습니다.  색안경을 쓰고 보면 현대인의 불알로 보이거든요. 크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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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8-22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곰발님이 가지신 색안경이 부럽고 구매하고 싶어지네요!ㅎ 저는 블루라이트 차단정도만되는 투명안경을 벗지 못하고 있나봐요!ㅎ 시원한 휴일되십시요!

곰곰생각하는발 2021-09-27 11:23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ㅎㅎ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라고 말하기에는 추석 연휴가 지났죠 ? ㅎㅎ

겨울호랑이 2021-09-27 11: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각자 자신의 눈이 다른만큼 시력도 다르고 자신에게 맞는 안경도 다른 것은 당연하다 생각됩니다. 한가지 색으로 보여지는 것보다 여러 색으로 보이는 것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1-09-27 11:2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한 가지 색만 보고 한 가지 생각만 한다는 것은 꽤 끔찍한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잘 지내셨지요 ? ㅎㅎ
 
트루먼 쇼 Screen Play 10
이형식 지음 / 스크린영어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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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은 왜 속았을까 ?











집(가족)과 바람은 서로 부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집구석은 좋은 의미가 아니죠. 바람 난 남편과 바람 난 아내도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죠. 춤바람이나 치맛바람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바람이 잘 통하는 집만큼 좋은 집도 없습니다.  제가 옛날에 살던 집이 그런 집이었습니다. 언덕배기 바람길이 관통하는 곳에 자리를 잡은 집은 여름에도 시원했습니다. 심지어 앞문과 뒷문을 열어놓으면 바람의 힘만으로도 전원이 뽑힌 선풍기 프로펠러를 돌리기도 했습니다( 진짜 레알 실화임). 


바람이 잘 통하니 집안 냄새 걱정이 없고 장마철에는 습기가 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빗자루 역할을 하기도 했죠. 바람이 먼지를 한쪽으로 쓸어버리는 겁니다. 또한 김치는 얼마나 맛있게 익는지요.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시원한 집입니다. 실외 온도는 30도를 훨씬 웃돌지만 실내는 26도 이상 오르지 않더군요.  집이 시원하다는 것은 바람이 잘 통한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  마, 이게 사람 사는 집구석 아이가. 아이고, 시원타. 센풍기(에어컨) 없이도 이리 시원타 ~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제가 체크한 실내 온도는 에어컨 리모컨 표시창에 뜬 알림 표시였는데 그것은 현재 온도가 아니라 설정 온도였던 것입니다. 


실제 실내 온도는 31도더군요.  아놔, 시바.  저는 그동안 실내가 한증막인 집구석에 살면서도 바람 잘 통하는 집에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생활했던 것입니다.  갑자기 원효 대사 이야기가 생각이 나더군요. 한밤중에 목이 말라 웅덩이에 고인 물을 맛있게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깨어나 보니 그 웅덩이에는 시체가 썩어 해골이 된 뼈다귀가 잠겨 있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실내 온도가 31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때부터 저는 삼복에 더위 먹은 개처럼 혓바닥을 늘어트리고는 헉헉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에어컨을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이리 더우면 몬 산다. 몬 살아.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시죠 ?  인간의 이성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합리적인 인간도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면 엉뚱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 상황적 강제(situational force) " 라고 합니다.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이 유명하죠.  스탠포드대 심리학과 교수였던 필립 짐바르도는 심리 실험에 지원한 대학생 18명을 상대로 교도소 역할 놀이를 진행합니다.  절반은 수감자가 되어 죄수 옷을 입고 절반은 교도관 복장을 하고 교도관 역할을 하는 것이죠.  말 그대로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같은 역할극 놀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교도관 역할을 맡은 대학생들이 갈수록 폭력적인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가짜 수감자 역할을 하는 이들은 가짜 교도관의 폭력에 별다른 저항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크리스티나 매슬렉 박사가 실험의 비윤리성과 폭력성이 과열되는 상황을 보고 실험 중단을 요구했고 2주 예정이었던 실험은 1주일 만에 끝났습니다.  이 실험이 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은 상황적 강제가 발생하는 순간, 인간은 얼마든지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흉악 범죄에 대하여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냐고 한탄하지만 당신의 장탄식은 틀렸습니다. 인간의 탈을 썼기에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블랙코미디 영화의 걸작 << 트루먼쇼 >> 에서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 분)은 성인이 될 때까지 방송국이 자신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요 ?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질문이 어렵지 않으니 답은 쉽죠. 방송국 세트와 시스템이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퀄리티를 가진 세트장과 정교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이라면 여러분들도 트루먼 버뱅크가 될 겁니다. 


그래도 트루먼은 나중에 진실을 알아차렸지만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무대 위의 트루먼이란 사실을 모르고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도 제 자신이 트루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죽을 확률이 존나 높은 족속이죠. 리모컨이 제시한 26도라는 가짜 알림에 속아서 등골에 뜨거운 땀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데에도 불구하고 마, 이게 사람 사는 집구석 아이가. 센풍기 없이도 이리 시원타 _ 이런 대사나 남발했으니 말이죠. 멍청한 녀석. 트루먼은 방송국이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구조를 구축했기에 속은 인물입니다. 시스템 구축 : 세트장, 배우, 컨트롤타워는 삼위일체가 되어 트루먼을 속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가 언급한 사례들은 다 " 시스템(구조적) 문제 ㅡ " 인 것입니다.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를 선택했지만 우리에게 정치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   보수는 사회 시스템보다는 개인의 역량에 촛점을 맞추고 진보는 개인보다는 구조의 문제를 개선하려는 쪽에 방점을 찍는 집단이라고 본다면 보수주의자는 방송국에게 속은 트루먼의 한심한 역량을 지적해야 합니다. 동의하시나요 ?  지금까지 윤석열과 최재형이 내뱉은 말을 종합하자면 그들은 방송국보다는 트루먼에게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국민의 삶을 왜 국가가 책임지냐. 국민의 삶은 국민이 책임져야 한다 _ 라는 최재형의 망언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반대로 진보주의자는 개인보다는 방송국 시스템(구조적 문제)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굳이 정치적 성향을 묻는다면) 진보주의자이자 구조주의자에 가깝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  교도소 실험을 주관했던 필립 짐바르도 심리학 교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 썩은 사과(약한 개인)가 아니라 썩은 상자(시스템)가 문제다 !!! " 이 글의 끝은 트루먼 버뱅크 씨의 마지막 인사로 마무리하겠습니다. 


"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인사하죠 !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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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8-20 0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구조주의자인 것 같습니다. ㅎㅎ 곰곰님 글 너무 재밌어요 (재밌게 할려고 쓰신것 같진 않지만). 그리고 덕분에 상황적 강제라는 개념도 알게 되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21-08-22 10:56   좋아요 0 | URL
재미있으라고 쓴 글입니다.. ㅎㅎㅎㅎ
전 상황적 강제라는 말을 보스니아 내전을 통해 알았습니다. 아, 인간이 상황에 따라 괴물이 되는구나. 누구나 말이죠...
 
내 안으로 그대 속으로 시작시인선 385
김민서 지음 / 천년의시작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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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란 느리게 말하는 통증





소설이 " 구라의 세계 ㅡ " 라면 시는 " (자기) 성찰의 세계 ㅡ " 를 다룬다. 그렇기에 시인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고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 고백 > 이란 " 느리게 말하는 통증 " 에 가까워서 쉽게 읽히지 않는 시집은 나쁜 시집이 아니라 좋은 시집에 가깝다. 독자가 책을 펼치자마자, 손에서 책을 놓을 시간도 없이,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면 그것은 소설(가)에게 크나큰 미덕이 되겠지만 그 속도는 시(인)에게는 모독이 아닐까. 둘 중 하나다. 독자가 시를 오독했거나 시가 가짜이거나 !  차이 밍량은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_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이고 인류의 먼 미래를 걱정하는 영화는 나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그의 말을 적용하자면 좋은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폭로하고 나쁜 시는 세계의 내면을 폭로하는 척한다. 그렇기에 나는 자신의 내면은 숨긴 채 세계의 안위만 걱정하는 시인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김민서 시집 << 내 안으로 그대 속으로 >> 는 관통의 기술에 충실하다. 시 < 약식 회고록 > 에서 시인은 자신의 약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열둘 " 에 " 쌀을 씻기 시작 " 해서 " 스물둘 " 에 " 서울에서 가장 멀리 가는 밤 기차를 탔다 " 고 고백한 시인은 " 신문지를 재단해 호떡집 봉투를 붙였다 // 날마다 정치면에 실리던 대통령 얼굴 / 내 입에 풀칠하기 위해 / 그 얼굴에 날마다 풀칠을 했다 " 고 말한다. 그리고 " 오십 대 / 9센티미터 힐을 신었다 " 라고 마무리한다. 여기서 9센티미터 힐은 생에 대한 의지로 읽힌다. 우리가 이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나이듦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일 것이다. 그녀는 늦은 나이에 비로소 탱고에 눈을 뜬다. " 홑겹의 실크 드레스로 소름을 감추고 / 새빨간 스틸레토 힐을 신고 / 자정 근처 고비로 " 간 그녀는 " 반도네온의 심장을 딛고 / 바이올린의 선율을 따라 " 탱고를 춘다(고비의 탱고). 시 < 고비의 탱고 > 에서 " 고비 " 는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고비 사막을 지시하기도 하지만 절정, 곤경, 위기, 고개를 뜻하기도 한다. " 식혜 밥알처럼 " 각각의 개별자로 존재하는 사막의 모래에서는 뿌리를 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뿌리를 내린 삶을 선택할 것인가, 뿌리를 버리고 노마드의 삶을 살 것인가. 시인은 < 우산을 들고도 > 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 뿌리를 버리고 자유를 얻을까 / 색을 입고 생을 얻을까 " 이 시집을 다 읽고 나서 떠오른 책은 공교롭게도 << 그리스인 조르바 >> 였다. 그녀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이, 생활의 활력이, 춤추는 조르바를 닮은 것이다. 시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라는 장르는 시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비밀 일기를 폭로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 시인은 자신의 은밀한 비밀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 실패를 누설( 장미의 누설 ) "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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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8-10 13: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르바 마지막 장면인가요... 남자 둘이서 춤추던 장면... 멋지단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차이 밍랑은 자기를 구원하고자하는 사람 말고 세상을 구하겠노라 공언하는 이들이 빈껍데기라는 걸 분명히 인식하는 분이네요. 젊은 시절에 누구나 꿈꿔볼만한 치기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눈이 좀 어두워져 ㅋㅋ 그런지 ‘세상구하기‘ 철학이 이제는 의심스럽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21-08-12 14:25   좋아요 1 | URL
저는 거대 담론을 강박적으로 이야기하는 문학에 대해 늘 회의적입니다. 문학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이따위 자긍심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됴. 과대망상이 심하구나, 작가들이... 뭐, 이런 생각..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