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곤 목에 방울 달기












                                                                                            김봉곤의 이름을 기억하기란 쉬웠다. 코미디언 김형곤과 이름이 비슷할 뿐 아니라 외모도 비슷했으니 말이다. 그의 단편소설 << 그런 생활 >> 을 도서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소설을 문학동네 출판사 판, 창작과비평 출판사 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사 판 가운데 어느 책을 읽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하여튼...... 읽었다 !  


도서관에서 고른 수많은 책에서 이 단편을 선택한 이유는 읽기 쉬운 문장으로 구성된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이라는 곳이 시간적 제한이 걸린 곳이기도 하거니와 개인적으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지 않으면 똥을 싸고 나서 밑을 안 닦고 나온 느낌이 들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에는 주로 단편 위주로 휘뚜루마뚜루 읽게 된다. 이 작품을 처음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 날것 " 이었다.  좋게 말하면 재료 본연의 맛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사자가 사슴의 목덜미를 뜯어낼 때 나는 맛이었다. 접시 위에 핏물이 줄줄 흐르는 살덩이 앞에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것은 재료인가 요리인가 !    


문학이란 " 날것을 익힌 것으로 요리하는 과정 " 이라고 믿는 내게 이 작품은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쓴1), 퇴고 없이 내놓은 초고처럼 보였다. 러프 컷( : 촬영을 막 끝내고 아직 편집하지 않은 필름)을 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  명색이 문학동네 편집자인 김봉곤이 편집 과정 없이 내놓은 러프 컷을 보면서 나는 터프하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러프 컷을 파이널 컷으로 인정하여 그것을 그대로 극장에 거는 감독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초고를 퇴고 없이 내놓은 용기는 만용'처럼 보였다. 이 작품이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수상하다. 


뭐,   김봉곤이 문학동네 편집자'라는 사실을 콕 짚어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주류 문학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 중에 문학동네에 뺨따귀 날릴 사람 누가 있을까(더군다나 < 그런 생활 > 은 문학동네,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이라는 메이저 3대 출판사와 밀접한 관련이 된 작품이다)?  호기롭게 뺨따귀 날렸다가는 개뼉따귀로 몽둥이 찜질 당하기 좋으니 아가리 닥치고 있는 중이다. 김봉곤 논란에서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작가는 김초엽이 유일하다(장류진도 합류한 모양이다). 


작년에 소설가 윤이형이 이상문학상의 불공정 관행(수상작 저작권을 3년간 양도하고 작가 개인 단편집에 실을 때도 표제작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주최 측 문학사상사 요구)에 항의하며 절필 선언을 했을 때 많은 동료 작가들이 뜨거운 동료애를 보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거칠게 말하자면 문인들은 남의 밥그릇(c누나는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는 후문)에는 관심이 없지만 나의 밥그릇(수상작 저작권 양도 문제)에는 졸라 예민한 것이다. 하긴 권희철과 신형철이라는 쌍철 보유국인 문학동네를 건드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이 작품이 훌륭하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띵언 제조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 좋은 음식이란 먹어서 좋은 것에 앞서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은 생각만 해도 좋은 음식이 아닐 뿐더러 먹기 좋은 음식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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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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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야,  오함마 갖그 와라잉 :












김봉곤의 그렇고 그런 생활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을 " 그렇고 그런 생활 소설 " 정도로 읽어서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내놓을 촌평도 " 그저 그렇고 그런 단편소설 " 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파스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쓴다고 말했는데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이자 한국 문단의 떠오르는 샛별에게 충고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문학은 날것을 요리해서 익힌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믿는 내게 이 작품은 " 솔직하다 " 는 감상보다는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아서 " 번잡하다 " 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기록한 20자평은 아하, 그저 그렇고 그랬던 그 소설 !   


한국의 현대 소설, 정확히 기술하자면 한국의 순문학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유는 " 그들만의 리그 " 라는 반감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소설은 < 잰더 트러블 > 은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 계급 트러블 > 은 실종되었다.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는 삽질의 정석은 온데간데없고 잰더와 계급은 서로 따로 놀고 있다. 나는 현대 한국 문학이 깊게 파는 것인지 아니면 넓게 파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분명한 것은 넓게 파기 위해서 깊게 파고들지는 못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논란에서 중요한 것은 C누나와 김봉곤의 잰더 갈등(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특정 계급의 플랫폼 독점에 있다. 김봉곤은 현재 문학동네 출판사 편집자'다. 그러니까 편집자이자 작가인 셈이다. 문제는 김봉곤이 수상한 젊은작가상이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재정한 문학상이라는 데 있다.  문학동네는 문학동네에서 편집 노동자로 일하는 직원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선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내 백일장 대회로 전락한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고 가재는 게 편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노골적인 이해 충돌 방지 위반'이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닐까 ? 


한국 문단은 뻔뻔하게도 이 점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 민화의 윤리적 강박성과 정치적 투쟁성을 적용하면 독자를 빙다리 핫바지로 보는 태도'다. 한국 민화 협회장 아귀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 소설 쓰고 있네. 미친새끼가..... 소설 재미 없으면 손모가지 날아가 붕게. 아그야, 모하냐. 싸게싸게 오함마 갖그 와라잉 ! " 나는 이 문제를 놓고 문학평론가들이 유감을 표명한 적을 본 적이 없고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논란을 다룬 그 어느 기사도 이 점을 부각한 언론사가 없다는 점에 의아하다.  문학동네가 문학동네 직원을 자랑스러운 문학인으로 선정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자랑스런 대한민국 시민상을 재정해서 이낙연을 대한민국 시민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내가 알고 있는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작가만 해도 김서윤, 정세랑, 김민정, 정영수가 있다). 이제는 출판사가 플랫폼의 소유주가 되어서 유저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국 문단은 페어플레이 정신이 실종된 집단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좋은 작품이 탄생할 리 없다. 



■ 덧대기

단편의 미학은 " 압축미 " 에 있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이 압도적인 이유도 정교한 압축에 있다. 그래서 좋은 단편은 웅크린 스프링과 같아서 다 읽고 나면 긴장에서 오는 좋은 스트레스와 그 긴장이 해소될 때 발생하는 사유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김봉곤의 단편은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그의 단편에는 긴장도 없고 해소도 없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늘어뜨린 느낌이다. 파스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짧게 쓸 시간이 부족해서 길게 쓴다잉 ! "  파스칼의 명제는 이 세상 모든 편집자의 기본 상식이 아닐까 ?  더군다나 명색이 편집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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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없는 문장의 끝   :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1)










                                                                                               남자는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잘났다고 믿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못났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성차에 따른 차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거쳐 학습된 결과'다.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세뇌된 결과'에 가깝다. 


남자는 " 부풀리기 - 모방 " 교육을 통해 남성다움을 배우고,  여자는 " 축소하기 - 모방 " 교육을 통해 여성다움을 배운다. < 쩍벌남 > 과 < 다꼬녀 > 도 결국은 부풀리기 모방 교육과 축소하기 모방 교육의 과잉 결과인 셈이다( 남자들이 헬스 운동에 전념하고 여자는 다이어트 운동에 열심인 이유도 사회적 요구에 순응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남성-몸은 팽창해야 미학적 가치를 얻고 여성은 여성-몸을 축소해야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당연히 여성은 남성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남성은 잘못을 저질러도 당당한 편이다.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그 도끼병이 심하다. 그들은 성적 매력을 상실한 나이인데도 여전히 자신이 젊은 여성에게 매력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안희정이 그런 부류의 남성'이다. 박원순의 자살 사건을 두고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쌍팔련도에서나 사용했을 법한 " 채홍사 " 와 " 관노 " 라는 단어가 타임라인을 장악하고 있다. 한쪽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들어 상대방이 박원순을 가해자라고 단정하는 일에 대해 화랠 내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 중심주의 입장에서 박원순에 대한 애도 행위가 2차 가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어느 쪽에 손을 들어야 할까 ?   내가 보기엔 둘 다 맞고, 동시에 둘 다 틀리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한다는 것은 반헌법적 태도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피해자 경험의 독점적 해석과 무조건적 지지하는 것 또한 중립적 판단 위반이다(예 : 10대 청소년 두 명이 학원 교사를 성폭행으로 고소한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재판 과정에서 10대 청소년의 위증이 밝혀졌다)하지만 무죄 추정의 원칙은 쌍방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성립할 뿐이지  명확한 증거(물증 혹은 자백) 앞에서는 다툼이 무의미하다. 박원순의 자살은 박원순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피해를 호소한 고소인의 주장이 맞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증거가 되었다.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는,  일종의 자백 없는 자백처럼 보인다.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주어도 아니도 술어도 아니고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마침표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했다 한들 마침표가 없는 문장은 완성된 문장이 아니다. 박원순이 작성한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가 쓴 문장에서 빠진 것은 마침표'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완성된 문장이 될 수 없다. 애도는 끝났고, 이제는 자비 없이 말하련다. 박원순의 문장은 잘못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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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동훈,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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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리부트 - 코로나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
김미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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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자기계발서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추운 겨울이 지나면 일상을 되찾을 줄 알았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리는 법이니깐 말이다. 마스크 때문에 자신이 내뱉은 날숨을 다시 들숨으로 마셔야 하는 상황에서도 묵묵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_ 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봄날은 가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지만 전세계 확진자 수는 감소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상시적 일상이 되었다. 접촉(off)은 죄악이 되었고 이제는 접속(on)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좋든 싫든 20세기는 히틀러가 만든 세계'였듯이,  좋든 싫든 21세기는 코로나가 만든 세계가 되었다.  코로나가 만든 새시대는 그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보니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 예측 " 이 아니라 " 예방 " 이다. 전자가 공격적 태세라면 후자는 방어적 태세 전환이라 할 수 있다. 


김미경의 << 김미경의 리부트 >> 는 놀랍게도 코로나 이후를 예측하고 그에 따른 해결책을 내놓는다(라고 책 선전을 하고 있다). 세계의 석학들도 모두 한결같이 코로나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섣부른 예단을 내놓는 것을 경계하는 마당에 저자는 어떤 근거로 세계를 진단하고 예측하며 그 값을 제시하는 것일까 ?  " 위기는 곧 기회 " 라는 자기계발서의 닳고닳은 신소리를 마치 미래를 꿰뚫는 선견 따위로 포장하는 이 책의 가치는 얼마일까 ? 코로나로 인하여 오프 라인 강연이 취소되는 바람에 (강의 수익이 0원이 되어서) 책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는 100만 유튜버 김미경의 결의가 뻔뻔해 보이는 이유는 세계의 비참을 돈벌이로 활용한다는 데 있다. 


코로나라는 거대한 비극을 이용하여 돈벌이(자기계발서)에 사용하는 방식은 세월호 사건을 재난 모험극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 감독의 도덕적 해이'와 무엇이 다를까 ?  동기 부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도록 만드는 " 긍정의 과잉 " 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 농담 >> 에서 이렇게 말했다. 낙관주의는 민중의 아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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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책방 2020-07-06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합 1위군요..ㅠㅠ

곰곰생각하는발 2020-07-06 21:1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수다맨 2020-07-08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서 목차만 읽었는데 절로 한숨이 나오는군요. 차라리 어느 사교邪敎 교주의 경전을 일독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 책에도 진실이라고는 별로 없지만 적어도 구라(!)를 그럴듯하게 가공하려는 집필자의 정성이라도 조금은 있지요.
저렇게 뻔하디뻔한 내용을 책으로 내놓은 것을 보니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과히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7-10 16:31   좋아요 0 | URL
이런 책을 왜 읽는지 이해가 안 가는 1인. < 해빙 > 이란 책도 읽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뻔한 이야기여서 왜 이런 책을 읽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밥상의 말 - 파리에서, 밥을 짓다 글을 지었다
목수정 지음 / 책밥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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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이 노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집요하게 지적하는 목수정의 여성 노동 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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