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 <<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 에 부쳐  :




 



 ​언니가 돌아왔다​


                                                                                                     언니가 돌아왔다, 4년 만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 우국 >> 을 표절한 << 무국 >> 으로 문단을 초고추장化시킨 신경숙이 돌아온 것이다. 시~ 원한 소고기 무국, 한 뚝배기 하실래예 ? 

신경숙은 출판사 창비를 통해 중편 <<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 를 발표하며 " 젊은 날 한순간의 방심으로 제 글쓰기에 중대한 실수가 발생했고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중략)... 작가로서의 알량한 자부심이 그걸 인정하는 것을 더디게 만들었다"고 사과했다. 또한 그는 "읽고 쓰는 인간으로 살며 제 누추해진 책상을 지킬 것 " 이라며 " 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니 차근차근 글을 쓰고 또 써서 과분한 기대와 관심, 많은 실망과 염려에 대한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겠다 " 고 작품 활동 재개를 알렸다. 소설의 모티브는 작년 10월에 병환으로 사망한 허수경 시인'이 모델로 보인다.

소설 속 여성 주인공 < 나 > 는 타국에서 사망한 친구를 추억하며 독일로 떠나는 과정을 담은 내용이라고 한다. 문득, 궁금한 것 두 가지.  왜 하필 허수경 추모작인가, 왜 하필 소설 속 주인공은 소설가인가 ?  신경숙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이 작품은 소설을 빙자한 입장문'이다. 그러니까 장황하게 나열한 중편 분량의 입장문인 셈이다. 허수경 시인을 모델로 했다는 것은 문단에 애도를 표현함으로써 문단과의 화해를 도모한 것처럼 보인다. 눈에 띄는 것은 표절을 애써 " 글쓰기에 중대한 실수 " 라고 표현한 대목'이다. 실수라는 것은 고의는 없었으나 본의 아니게 표절이 되어 문단에 폐를 끼쳤다는 소리이다.

어디서 많이 본 애티튜드'이다. 어디서...... 봤더라 ?!   그렇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변명이랍시고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심신 미약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신경숙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 마나 한 심신 미약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를 어쩌나.....     지금까지 이런 사과는 없었다. 이것은 사과인가, 배인가, 바나나인가 ?  문학을 자신의 변명을 합리화하기 위한 소통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경숙은 꽤나 정치적이다. 신경숙 문학이 이명박근혜 정권 때 화룡점정과 화양연화를 동시에 꽃 피우며 한국문학 원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으나 대충 짐작하자면 : 애들아, 나 그동안 마음고생 졸라 심했어, 엉엉. 뭐, 이런 것이 아닐까 ? 징징거린다고 독자가 당신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란 생각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 작품에 대한 남진우의 날카로운 비평이 기대된다.  당신의 소설 제목을 빗대어 조롱하자면 " 창비에 실린 것을 독자는 알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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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5-24 16: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당연히도 영영 절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복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표절, 베껴쓰기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방심, 실수, 망각과 같은 단어로 눙치려고 하는 것을 보니 진심과 반성을 담아서 사과문을 썼는지 의심이 드네요. 게다가 복귀의 장이 다른 데도 아니라, 신경숙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창비의 최고 어른인 백낙청의 잡지이니 탄식이 나올 뿐입니다.
설령 백낙청의 뜻(신경숙의 전격 복귀)이 그러했다 해도 잡지의 실무와 방향성을 담당하는 편집위원들이 이를 마땅히 제고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말로는 매번 노동과 민중과 혁명과 투쟁을 말하면서 어째서 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비판하는 수구/적폐세력들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5-24 17:44   좋아요 0 | URL
저는 신경숙의 변을 읽고 나서 번개처럼 떠오른 이가 신형철이었씁니다. 신경숙 표절 논란ㅇ에 대한 신형철의 입장문에는 ˝ 표절 ˝ 이라는 단어가 단 한 개도 나오지 않습니다. 에둘러서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이죠. 신경숙도 마찬가지. 방심, 실수, 망각 따위의 표현으로 표절을 달리 표현하지 않습니까. 계산적인 거죠...


포스트잇 2019-05-24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한당 보는 듯했습니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5-24 17:46   좋아요 0 | URL
굉장히 정치적이지 않나요 ? 전 신경숙이란 작가야말로 굉장히 정치적 인간이란 생각이 듭니다. 정치하시면 잘 하실 듯... 뭐, 소설에서는 난 정치란 관심없어. 흥흥흥... 이런 멘트 많이 날리시지만 누가 봐도 정치적임..

깊이에의강요 2019-05-25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냈군요~ㅎ
예전 곰발님 포스트 중
신경숙과 공지영에 관한 글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몹시 동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5-25 14:39   좋아요 0 | URL
적당히 동의해줘도 좋은데
몹시 동의를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
 



돈, 2019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 갈등(葛藤 ㅣ 칡 갈, 등나무 등) " 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서로 상반되는 괴리'가 발생할 때 내면 갈등이 발생하고 개인 대 조직이 갈등할 때에는 내부 갈등이 발생한다. 

주인공과 갈등하는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고부 갈등,  노사 갈등,  계급 갈등,  세대 갈등,  남녀 갈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갈등의 종류가 무엇인가에 따라 드라마의 성격도 어느 정도 결정된다.   관객은 주인공이 이 갈등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흥미를 느낀다.  그러니까 장르 불문하고 칡과 등(나무)이 제대로 얽혀야 좋은 희극과 비극이 탄생한다.  이것은 극작법의 ABC.  그런데 드라마에 갈등 요소가 없으면 죽도 밥도 아닌 MBC가 된다는 것은 뻔한 사실이란 말이시.   영화 << 돈, 2019 >>  에는 " 갈등 " 이라는 핵심 요소가 빠져 있다.  이 영화는 갈등은 없고 해소'만 거창하다.

번호표(유지태 분)의 범죄 제안에 증권사 신입 주식 브로커 조일현(류준열 분)은 고민도 없고 갈등도 없이 두꺼비가 파리를 잡아채듯이 악마의 유혹을 덥석 문다. 그런데 조일현의 " 망설임 없는 조력 " 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가 처음부터 "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비호감 캐릭터 " 였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지만 조일현이라는 캐릭터의 초기 설정은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착한 소시민 캐릭터'라는 데 있다. 그에게는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죄를 지어야 하는 " 간절한 결핍 " 이 부재하고,  또 마찬가지로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 간절한 야망 " 도 보이지 않는다.

간절한 욕망의 파이(π) 가 작다 보니 갈등이 선명하지 못하고,  갈등이 선명하지 않으니 전결(기/승/전/결'에서) 부분에서는 설득력을 잃는다.  지하철역에서 돈 뿌리는 장면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해소한다기보다는 헛웃음만 나오게 한다. 그리고 조일현이 번호표에게 느닷없이 던지는 훈계의 말'은 설득력 제로'이다. 평범한 소시민이 과시적 소비와 만나게 되었을 때의 판타지에 집중했으면서 갑자기 계롱산 산신령처럼 뒷짐 지고 훈계질'이라니......         강렬한 오르가슴을 얻기 위해서는 공을 들인 전희가 필요한데 이 영화에는 애국가 타임라인 섹스를 선보이고는 황홀하지 ?

라고 되묻는 교회 오빠의 성스러운 근자감을 떠올리게 만든다. 충고 한 마디 하자면 : 섹스,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예 ?                 영화는 생각 없이 보기에는 그럭저럭 재미있다. 하지만 조금만이라도 생각을 하고 본다면 그럭저럭 우럭하다.









이 영화에서 소비되는 여성 이미지는 남성이 욕망을 성취한 후 얻을 수 있는 성과물이다. 배우 원진아가 연기한 박시은 대리'는 하루종일 섹시하다. 이마에 나 섹시함 ? 어때요. 졸라 섹시함 ??!  이란 표 딱지를 붙이고 있다. 남성의 원기 회복용 캐릭터는 몸은 섹시한데 교양은 난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화는 이 여자의 육감을 집요하게 부각한다. 여성 감독이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에 박수를 보낸다. 한심하다, 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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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학을 떼는가 ?




 

                                                                                                       혼자 밤길을 걷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낯선 사람과 단둘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골목길을 걷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학생일 때에는 " 방과 후 옥상  " 이 위험 지대'였다면, 지금은 " 골목길 접어들 때 " 가 위험하다.

이 골목에 미친놈 한 명 정도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상대방보다 앞서서 걷는 경우에는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귀를 쫑긋 세우기 마련이다. 아무래도 앞서서 걷는 것보다는 뒤서서 걷는 것이 마음 편하다. 하물며 여성들은 오죽하랴. 이 경우에 내가 앞서서 걷는다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내가 여성의 뒤를 따르면 긴장감이 발생한다. 샛길이라도 있으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에둘러 가겠지만 외길이면 그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상대방을 앞질러 가겠다고 걸음을 재촉하다가는 이상한 상황극이 연출될 수도 있다. 이럴 때, 나는 혼자 쏘가리(속앓이) 하다가 나중에는 가오리가 된다. 옛 문어체로 말하련다. 주여, 이 길을 어찌 가오리 ~ 

내가 이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샛길로 빠질 수 없는 외길이면) 걸음을 멈추고 딴청을 피우는 것이다. 앞서가는 사람에게 안전거리를 확보해 주려는 속셈이다. 이때의 상황극을 심리학적으로 요약하자면 : 남자는 불편하고 여자는 불안하다. 이 줄거리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단순하게 불편과 불안만 놓고 보자면 우선순위로 먼저 해결(해소) 되어야 할 상황은 불편이 아니라 불안'이다. 타인의 불안(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일종의 예의'이다. 그런데 한국 남자들은 여성의 편리 때문에 자신이 불편을 겪는다고 아우성이다.

문제는 그 불편(不便)을 불평(등)不平等의 결과라고 착각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불편 / 不便과 불평 / 不平을 혼동한 결과이다. 이솝우화 << 여우와 학의 식사 초대 >> 1)는 불편과 불평의 차이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우화에서 " 평평한 접시 " 는 여우에게는 편리한 그릇이지만 학에게는 불편한 그릇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평한 접시가 불평등(차별)의 결과는 아니다. 여우는 생각이 짧았을 뿐이다. 모지란 놈 ~   하지만 학이 내놓은 호리병은 차별 대우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학은 여우가 호리병 속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복수심에 고의로 음식을 호리병에 담아 주었기 때문이다.

학은 (경험을 통해서) 서로의 차이를 간파했지만 애써 그 차이를 복수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여우를 차별(불평)한 꼴이 된다. 여우는 생각이 짧은 친구이지만 학은 간사한 녀석이다. 나쁜 새끼.  그래서 " 학을 뗀다 " 라는 속담이 탄생한 것이다.  뭐, 믿거나 말거나 !   최근에 발생한 < 대림동 경찰관 폭행 사건 > 이 여성 경찰관 혐오로 확장되는 현상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학을 떼게 된다.  남자인 내가 남자인 당신에게 묻고 싶다. 네 불알이 그렇게 소중하니 ?











​                                           
  
1)  여우와 학의 식사 초대       :      어느 날 여우가 이웃에 사는 학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여우는 맛있는 음식을 평평한 접시에 담아왔습니다. 여우는 맛있게 음식을 먹었지만 학은 부리가 길고 뾰족하기 때문에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후 이번에는 학이 여우를 초대하였습니다. 학은 목이 긴 병에 음식을 내놓았습니다. 학은 맛있게 음식을 먹었지만 여우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기대에 비워놓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습니다. 학은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지난번에 네가 나에게 맛있는 저녁식사를 대접했을 때 제대로 고마움을 표시하지 못해서 오늘 그 보답을 하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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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



 


                                                                                                  입이 없으면 손으로 말한다. 수화(手話)는 입(口話) 대신 손으로 말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 그러니까 손은 입이라는 사물의 본성에 가장 가까운 물성.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 손 = 입 > 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에 당신이 문학적 관용과 낭만적 포용을 허용한다면 < 손 ≒ 입 > 이라는 공식을 만들 수는 있다.  < 손짓 > 은 손으로 만든 문장이라는 점에서 손이야말로 문인이 가장 사랑하는 신체 부위'란 생각이 든다.  소리는 삼키고 의미는 드러난다(기표는 사라지고 기의는 전달된다). 그래서 손이라는 사물의 본성이 투사된 단어-들은 내향성을 띤다는 점에서 내성적(內省ㅡ)이다. 또한 내성(內聲ㅡ)이다. 예를 들면 손편지나 손수건은 접고 접어서 부피를 줄이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내향성'을 띠고, 손수레는 수레에 비해 수동성(手動性)을 강조한다.

최승자의 시 << 사랑하는 손 >> 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말 없이 진행한다는 점에서 수화의 풍경'이다.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주는 가여운 평화

           - 사랑하는 손, 최승자




이 시는 침묵의 힘'이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는다는 행위는 풀리지 않게 띠의 매듭을 묶는 행위와 같다. < 매듭 > 이 이음매 없이 매끄러운 것이 서로 엮여서 흉터처럼 부풀어오른다는 점(열 손가락에 걸리는 )에서 " 너의 손을 잡 " 는 것은 상흔이자 통증이다. 그것은 예견된 불행을 감지하는 불안한 증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사랑하는 손을 잡는다. 거기에는 가벼운 불행과 가여운 안식과 오르지 못하고 하강하는, 손바닥에 가라앉은 평화가 공존하는 세계이다. 시에서 < 비 / 雨 > 는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하늘에서 추락하는 이미지'를 내포한다. 손은 그것을 오롯이 받아내는 장소 topos 이다.

시에서의 하강은 릴케의 << 두이노의 비가 >> 을 연상케 한다. 시인은 이 불행한 하강을 강조하기 위해서 " 내리지... / 내려서... / 내리지... / 내려서... " 라는 시어'를 반복한다.  이 시에서 " 사랑 " 은 솜사탕처럼 달뜬 무중력의 풋풋한 사랑이 아니라  중력의 자장 안으로 포섭된 세계이다.  김영민의 사유를 빌리자면 < 사랑하는 손 > 에서 사랑이라는“ 연정은 지형(topos)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무너진다’는 것은, 마치 중력 하나가 모든 존재를 지배하는 어느 순간의 경험처럼, 모든 이치들이 열정의 무중력 공간 속에서 속절없이 해체ㅡ(사랑 그 환상의 물매, 김영민). ” 되어 재처럼 가라앉은 세계이다.

글자가 없던 시대에는 새끼줄을 매듭 지어 문자 대신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손을 잡는 행위는 가장 원시적인 사랑 고백이자 문장인 셈이다. 최승자 시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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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5-22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성 시인들과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 편인데 최승자 시인 만큼은 호감이 가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5-23 17:36   좋아요 0 | URL
최승자 초기 중기 시는 참 좋죠.... 짜릿할 만큼..
 

 

 

 

 

 

 

 

 

 

 

 

 

 

 

                                        


유  주  얼    서  스  펙  트    :










고릴라는 생각하지 마



                                                                                                     반전이 훌륭한 영화는 자칭 / 타칭 자신을 홈즈의 후예'라 믿었던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별 볼 일 없는 대낮에도 별 볼 일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반전 영화의 묘미이다. 영화 << 유주얼 서스펙트 >> 는 << 식스 센스 >> 와 함께 이 방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반전 영화'이다.

악당들이 모여서 한탕 할 계획을 꾸민다. 무려, 9100만 달러 탈취 모의'이다. 하지만 계획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재미가 없는 법. 일이 꼬일 대로 꼬인다. 공황 상태에 빠져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그들 앞에 코바야시(피트 포스틀스웨이트 분)라는 자가 나타나 5인의 일당에게 새로운 일을 시킨다. 버벌 일당이 반발하자 코바야시는 자신의 보스가 전설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지하 범죄 조직의 두목 카이저 소제(Keyser Söze)이고, 또 버벌 일당이 예전에 저질렀던 죄들이 모두 카이저 소제에게 피해를 줬다며 카이저 소제를 위해 일할 의무가 있다고 협박한다. 카이저 소제 ?!  화장실 변기 광택제임 ?                

코바야시의 입에서 카이저 소제'라는 이름이 발화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카이저 소제'에게 집중한다. 카이저 소제, 카이저 소제, 카이저 소제, 카이저 소제......  카이저 소제는 생각하지 마 !                               자칭 / 타칭 자신을 홈즈의 후예'라고 믿었던 나는 감독이 놓은 카이저 소제라는 이름의 덫에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럴수록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상상할수록 점점 커지는 음란 마귀처럼 말이다. 결국 관객은 함정에 빠지고 만다. 박근혜의 그 유명한 어록을 빌려 리바이벌하자면 : 나도 속고, 관객도 속고, 수사관도 속고, 국민도 속았습니다. 지금 대전은요 ?!

화장실 변기 광택제 이름 같은 카이저 소제는 일종의 코끼리(조이 레이코프 <<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 이자 고릴라(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 보이지 않는 고릴라 >> ) 를 섞어 놓은 캐릭터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주제는 고릴라는 생각하지 마 _ 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은 심리학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독창적이며 흥미로운 실험으로 통한다.  실험 과제는 검은 옷을 입은 3명, 흰 옷를 입은 3명, 도합 여섯 명이 각각 팀을 이뤄 농구공을 패스하는 1분짜리 동영상을 보고 나서 흰 옷을 입은 팀의 패스 횟수만 세면 된다. 주의력이 필요하지만 그리 어려운 과제는 아니다.

패스 횟수는 총 16회 ! 그런데 실험을 주최한 교수는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 혹시 고릴라 보셨나요 ? " 실험 참가자 일동. 네에, 고릴라요 ????!!!!




동영상을 다시 보면 고릴라 한 마리가 농구장 중앙에서 가슴을 치며 춤을 추다가 사라진다. 못 볼래야 못 볼 수 없는 장면인데 실험에 참가한 사람 중에 절반은 고릴라를 전혀 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 주의력 착각 " 이다. 집중이 맹시를 낳는 것이다. 이 실험의 교훈은 명확하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영화 << 유주얼 서스펙트 >> 는 카이저 소제라는 이름의 고릴라가 등장한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수사관 동료 제프 라빈(댄 헤다야 분)이 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용의자를 심문했던 수사관 쿠얀(채즈 팰민터리)이 "사무실 참 엉망이네. 정리 좀 하지?"  라며 농담을 한다.

그러자 라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지금 보면 그렇겠지. 하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라고......"  얼큰한 순댓국 먹고 나서 식당 계산대에서 박하 사탕 씹을 때의 그 알싸함.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사무실 풍경들. 쿠얀 형사는 나, 좆된 거임 ?! 이런 표정으로 카메라 정면을 응시한다. 이 메시지는 그대로 관객에게 전이된다. 나도 그와 똑같은 생각과 표정으로 영화를 보았다. 하, 나도 좆된 거임 ?!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서 농구공이라는 몰입 요소가 고릴라를 볼 수 없게 만들었듯이, 영화에서는 카이저 소제라는 몰입 요소가 진짜 범인을 놓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청와대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 동의에 200만 명에 육박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심지어 북괴 소행이라거나 여론 조작이라고 믿는 눈치이다. 설마, 백년 정당 역사상 언제나 1등이었던 우리를 국민들이 그토록 미워하겠어 ?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마찬가지로 듣고 싶은 말만 귀에 들어온다. 자유한국당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자자하나 그들이 듣는 목소리는 태극기 집회에서의 환호성이다.  이 환호성에 몰두하다 보면 망하게 되는 것이다. 차브리스 교수의 말에 의하면 "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 고 한다.  그것이 바로 심리학 용어로 < 자신감 착각 > 이다. 즉, 자신감이라는 이름의 고릴라'이다.

그런데 실력이 없는 인간일수록 자신을 향한 과대평가가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유한국당의 꼴이 영락없이 그 꼴이다. 충고 한 마디 하자면 : 그러다가 언젠가 좆될 거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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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05-1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는 이명박 밑에서 수하 노릇을 하던 정두언이 말하기를 장외집회라는 것이 (여야를 막론하고) 상당한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군요. 국회나 청문회에 오면 입 아프고 골 아픈 일들이 숱하지만, 저런 종류의 집회에선 당 고위 간부들이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도 다수의 참가자들이 열성적인 호응을 보내주니 ‘그 기분‘에 도취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류의 집회가 정치인에게는 ‘어느 정도는 필요한 자극제‘인 동시에 ‘유해성이 상당한 환각제‘라는 것을 알아야 할 터인데, 현재 자한당은 환각제로서의 효과에만 탐닉하는 것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5-17 14:41   좋아요 0 | URL
한번 졸개는 영원한 졸개죠. 기껏 용트림해봐야 물개 정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