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곰 김영진 그림책 5
김영진 글.그림 / 길벗어린이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편안함은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작가의 말 -

아무리해도 티안나는 집안 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잃어가던 엄마. 지친 일상 속에서 엄마가 곰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엄마(곰)가 피아노를 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전개 됩니다.

「피아노 치는 곰」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엄마가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인 「지원이와 병관이」시리즈와는 달리 아이들이 즐겁게 읽기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다만, 엄마 역시 가족의 한 사람으로 엄마 역시 먹고 싶은 것이 있고, 입고 싶은 옷이 있고, 되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주기에 다른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 책을 통해 아빠인 저 역시 아내의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이와 함께 읽으면서 ‘참 힘들겠구나‘하는 마음이 제게 드는 것을 보면, 아빠가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가족이 함께 ‘엄마‘를 생각하는 시간을 준다는 것은 이 책만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이 이야기의 결말은 「단군신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기에, 아이들은 안심하고 책을 덮을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이런 점을 종합했을 때「피아노 치는 곰」은주제는 다소 무겁지만, 엄마의 자리를 생각하게 하는 가족동화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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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2-22 2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2017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17-12-22 21:15   좋아요 2 | URL
^^: 감사합니다. 저 역시 서니데이님의 서재 달인 등극을 축하드려요^^

2017-12-22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2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0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3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4 0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깐도리 2017-12-23 17: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2017년 서재의 달인 축하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12-23 18: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깐도리님^^: 행복한 크리스마스 연휴와 새해 되세요. 저 역시 깐도리님 2017년 서재 달인 축하드립니다!

서니데이 2017-12-23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메리 크리스마스.^^

겨울호랑이 2017-12-23 20:01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연휴되세요!^^: 눈이 안와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못 되는 것 같네요.ㅜㅜ

후애(厚愛) 2017-12-23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7-12-23 22:19   좋아요 1 | URL
후애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연휴 되세요^^! 저도 후애님의 달인인증을 축하드립니다!

2017-12-23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12-23 22:22   좋아요 1 | URL
^^: 감사합니다. 평소 bookholic님의 독서 편지를 보며 많이 배웁니다. 특히 올해 태백산맥 필사본은 큰 감동이었습니다. 내년에도 bookholic님의 꾸준하고 잔잔한 글 기대합니다. 2017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우아한 관찰주의자 Visual Intelligence : Sharpen Your Perception, Change Your Life>는 미술사가인 에이미 E. 허먼(Amy E. Herman)이 쓴 '시각'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평소 우리가 시각적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고 있지 못하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전을 제시하는 <우아한 관찰주의자>를 통해 우리는 '보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저자는 책에서 평소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보지 않고 있는' 상태에 자주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무주의 맹시'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현상은 개인마다 관심정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1999년에 하버드의 심리학자 대니얼 사이먼스 Daniel Simons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Christopher Chabris는 우리가 두 눈을 뜨고 시야에 들어온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다. 이것은 "무주의 맹시 inattentional blindness"라는 현상이다.(p56)'


 [사진] 고릴라 실험(출처 : http://egloos.zum.com/kusomiso/v/2505303)


 사람마다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기' 때문에, 같은 것을 보더라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결국, 본다는 것은 '시각화된 정보를 해석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경험'의 요소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주관적인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객관적인 관찰'을 강조한다.


 '사람마다 사물을 다르게 보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이 점을 자주 잊고 오직 하나의 진실한 방법만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p71)... 남들과 똑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없다.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향부터 학습된 편향에 이르기까지 온갖 요소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지각은 우리가 관찰하고 수집한 정보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내면의 필터라고 볼 수 있다. 지각은 실재하는 대상을 채색하거나 흐리게 만들거나 변형해서 우리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지각 필터는 우리가 세상에서 접한 고유한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p72)'


 결국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 강조하는 것은 편견이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인 정보의 수용(객관적 관찰)이고 우리는 이를 통해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성공법칙으로 결론을 맺는다.


 '사실을 수집할 때는 관찰한 내용이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이 되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 차이가 작을 수 있어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말 그대로 사실과 허구의 차이다. 객관적 관찰은 경험이나 수학적 사실에 기초한다. 주관적 관찰은 가정이나 의견, 감정이나 가치관에 기초한다.(p117)'


'모든 것을 관찰하고 흡수하며 주변과 내면의 가능성을 발견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우리 자신의 삶에서 성공의 가능성을 찾을 것이다. 관찰이란 단순히 대상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정신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이미 여정은 시작된 것이다.(p47)'


 <우아한 관찰주의자>는 그 과정에서 여러 미술 작품을 제시하면서, 작품을 감상할 기회도 제공한다. 미술사가인 작가의 시선을 통해 우리 일반인들이 미술작품을 볼 때 놓치기 쉬운 몇 가지 지점을 확인하게 된다. 르네 마그리트(Rene Francois Ghislain Magritte, 1898 ~ 1967),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 ~ 1564),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 등 여러 예술가의 작품이 제시되며 내용이 전개되기에 매우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책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책의 결론(객관적인 관찰이 중요하고, 객관적 관찰이 너의 인생을 바꿀 것이고, 너는 성공확률을 높일 수 있다)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반론을 위해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의 내용을 살펴보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 ~ 1753)는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 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을 통해 시각 능력의 제약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83. 시각 능력의 두 가지 결함


 시각 능력의 직접적인 대상을 고려하면 이 능력은 두 가지 결함 때문에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첫째, 시각적 능력은 한정된 수의 시각적 최소량만을 한눈에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너머로 전망을 확장할 수 없다. 둘째, 우리 시각은 그 시야가 좁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혼란스럽다는 결함이 있다.(p128)'


  '본다'는 행위 자체는 인간의 수정체를 통해 외부 자극을 인지하는 행위다. 때문에, 육제적 제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정보 자체가 이미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는 수학적으로 정량화(定量化)할 수 있는 '객관적 관찰'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정량화 이전에 시각정보가 왜곡된다면, 객관적 관찰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설사 객관적 관찰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제 우리는 '해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49. 엄격히 말해서 우리는 결코 동일한 것을 보고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물을 면민하고 정확하게 본다면 우리는 결코 동일한 대상을 보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은 별개이다.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해도, 우리는 동일한 사물이 다양한 연장을 갖는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참된 결과는 시각 대상과 촉각 대상이 별개의 두 사물이라는 것이다... 시각 관념의 결합은 언제나 그것과 연관되는 촉각 관념의 결합과 동일한 이름을 가지므로 그 난점이 적지 않게 증가한 것처럼 보인다. 이 난점은 필연적으로 언어 사용과 목적에서 발생한다.(p95)'


  버클리에 따르면 우리가 동일한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정보를 인식할 때 복합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시각, 청각, 촉각으로 인지될 수 있는 대상이 다름에도 우리는 이를 혼동하게 된다. 특히, 시각과 촉각은 혼동하기 쉬우며 버클리는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원인을 '언어(言語)'에서 찾고 있다. 논리의 비약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느끼는 자극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수집된 정보를 '언어'를 통해 풀어간다는 면에서 시각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버클리의 주장 역시 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요약하면, 우리의 '본다'라는 인식 행위에서 일차적으로 신체적 제약으로 인해 제한된 정보가 수집되며, 수집된 정보를 해석하고 재생하는 과정에서도 언어 등 여러 요인에 의해서 차이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객관적 관찰은 처음부터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여기에 해석 자체가 시각, 청각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어려움은 더 커질 것이다. 결국, 객관적 관찰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주관적인 관찰'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닐런지.


 이러한 이유로 <우아한 관찰주의자>를 통해 객관적 관찰에 힘쓰기보다는 내용 전개를 위해 제시된 예술 작품(회화, 조각, 사진)을 보고 작품의 감상 포인트를 발견하는 것이 보다 뜻깊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PS. 요즘 이웃분들께서 책선물을 많이 보내주셔서 많이 행복하게 페이퍼 과제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아한 관찰주의자> 역시 가까이 지내는 이웃분께서 보내주셔서 기쁘게 읽었습니다. 이웃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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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0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0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12-20 2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 고릴라 실험 동영상 봤는데, 그때 전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정말 신기하더라구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7-12-20 22:37   좋아요 1 | URL
^^: 저 역시 깨닫지 못 했었습니다. 나름 집중력이 좋다고 위안을 삼았습니다만 ㅋㅋ

AgalmA 2017-12-21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관찰주의자> 역시 재밌죠^^? 생물학적으로도 우리 눈은 맹점이라는 치명적 허점이 있죠. 이걸 생각한다면 우린 늘 자신의 시각에 대해 자신하기보다 의심하고 겸손할 필요가 있죠.

겨울호랑이 2017-12-21 21:41   좋아요 1 | URL
^^: 그렇습니다. AgalmA님 말씀처럼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자신하기보다 잘못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야할 것 같아요
 

 얼마 전 이웃분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책을 선물해 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읽던 중 시간 時間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이번 페이퍼에서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 봅니다.

 

'그리스어에는 "시간"을 뜻하는 단어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크로노스 Chronos"와  "카이로스 Kairos"가 바로 그 것이지요. "크로노스"는 자신의 자녀를 다 먹어 치웠던 원시 시대의 신神을 가르킵니다. 따라서 "크로노스"는 우리를 집어삼키는 시간, 곧 우리가 쫓기듯 보내는 시간, 이런저런 일을 더 빨리 처리하도록 재촉받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촉하다"라는 뜻을 지닌 독일어 단어 "헷첸 hetzen"은 "미워하다"라는 뜻을 지닌 독일어 단어 "하센 hassen"에서 왔습니다. 이런저런 일을 기한 내에 처리하도록 자신을 재촉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행위로, "크로노스"는 곧 자기 증오의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유쾌한 시간을 가리키는 "카이로스"가 있습니다.(p76)... 다른 한 편으로, "카이로스"는 "꼭 알맞은 순간"을 뜻합니다.  카이로스는 앞머리에 머리카락이 풍성하기에 제때라면 쉽게 붙잡을 수 있지만 뒤통수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기에 지나간 뒤에는 잡을 수가 없지요. 이 비유를 통해 그리스인들은 기회를 제 때 잡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 했습니다.(p78)


 여기에 다른 책에 나타난 시간에 대한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 봅니다.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p37)



[사진] 크로노스 (출처 : https://www.1st-art-gallery.com/Franz-Ignaz-Gunther/Franz-Ignaz-Gunther-oil-paintings.html)


[사진] 카이로스(출처 : 중앙시사매거진)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의 저자 안셀름 그륀(Anselm Grun, 1945 ~ )신부는 크로노스를 '증오의 시간'으로, 카이로스를 '유쾌한 시간'으로 해석한 반면,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의 저자 김승중(金承中) 교수는 크로노스를 '객관적인 시간'으로, 카이로스를 '주관적인 시간'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같은 듯 조금은 다른 시간에 대한 관점이지만, 두 저자 모두 카이로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시간을 "카이로스"로 경험할지 "크로노스"로 경험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고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제정신을 차리고 전적으로 현존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 곧 유쾌한 시간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자신을 끊임없이 압박할 때는 "크로노스" 곧 자신을 집어삼키는 불편한 시간을 경험하지요.(p78)... 지금 이 순간에 전적으로 현존함은 시간을 "카이로스"로 경험하기 위한 전제 조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전제 조건으로 "건강한 생활  리듬"과 "유익한 의식儀式"을 들 수 있습니다.(p79)'


 



'인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운에 따라 생겨난다. 기회가 생길 때 그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하고, 그에 따라 승부가 판결난다는 것이다. 운이 없으면 기회가 안 생기고, 기회가 생겨도 잡지 않으면 무의미하지 않은가? 튀케 tyche(운명, 행운 good luck)가 인간의 힘으로는 조정할 수 없는 우연적 현상이라면, 카이로스는 반대로 인간의 능력과 노력을 상징한다. 즉 오직 카이로스만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결정권을 부여한다.(p43)'


 카이로스를 '기회', '꼭 알맞은 순간' 또는 '유쾌한 시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 삶이 기회 幾回 의 계속이고, 이에 대한 선택이 유쾌한 경험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작 우리들 자신은 미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매 순간의 경험이 유쾌한 경험이 아닌 힘든 경험으로 다가오기는 합니다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17년도 불과 열흘 정도  남겨두고 있는 2017년 12월 19일입니다. 일년 전에 아무 일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2017년 12월 20일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치뤄야 했을 것입니다. 2017년 12월 20일을 '아무 일도 없던 일'로 만든 것은 우리가 '카이로스'를 잡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일년 전의 선택이 바로 지금의 시간을 바꿨다고 볼 때  카이로스는 우리 삶의 크로노스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어주면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2017년이라는 크로노스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 우리에게 아쉬움을 주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지금 해야할 일을 하면서, 현존 現存을 통해 카이로스를 붙잡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017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 <딱! 알맞게 살아가는 법>을 통해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기에 맞춰 좋은 책을 선물해 주신 이웃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합니다. 


PS. 그리고, 지금 제 카이로스는 늦은 밥을 먹을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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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9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9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0 1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선거일’이었다면 몇 달 동안 선거 전쟁 때문에 엄청 시끌벅적했을 거예요. 조기 선거가 치러지길 잘했어요. 이번 연말은 차분하게 지낼 수 있게 됐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12-20 14:40   좋아요 1 | URL
네 ^^: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정권교체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페크pek0501 2017-12-20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력 2017년 12월 20일에 빨간 색으로 되어 있는 걸 보고 가짜 정보를 주는 달력이 되었도다, 그랬어요. ㅋ

겨울호랑이 2017-12-20 14:41   좋아요 0 | URL
^^: 이런 가짜 정보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와같다면 2017-12-21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이예요

진정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이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아이를 위해 가습기를 틀었던 어머니, 작은 상자 속 아기를 떠나 보낸 부모들, 아찔한 곳에 올라가 작업하던 아버지를 배웅한 가족들.

그리고.. 그 배에 올랐던 사람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남겨진 모두가 너무나 절실하게 바랐고, 또한 너무나 참담하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이 말은 그래서 누구나 함부로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와같다면 2017-12-21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오늘의 사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참으로 억울한 모든 이들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쯤은 주시기를..

겨울호랑이 2017-12-21 17:02   좋아요 1 | URL
어제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을 못봤는데, 나와같다면님 말씀을 듣고 동영상을 보니 제 글의 내용과 통하는 면이 있네요... 탄핵 결정 전 인쇄된 이전 달력을 통해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래서 억울함과 안타까움이 풀어질 수 있다라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따라서 종묘와 사직은 모두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를 시행하던 공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p14)‘

‘종묘 제사는 국왕이 자신의 선조인 역대 국왕과 왕비에 대한 ˝효˝를 실천하는 통로였다. 따라서 종묘는 제사를 통해 효 윤리가 실현되었던 유교적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직은 유교 문화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농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p15)... 사직은 전통시대 국가에서 농업이 갖는 중요성과 경제적 민생 안정을 위한 국왕의 책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p16)‘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대표하는 역사적 공간인 ‘종묘‘와 ‘사직‘의 의미, 제사 절차, 역사적 사건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종묘와 사직이 조선 왕조에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개인적인 의견으로 이 공간의 의미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와 연계시킬 수 있을 듯하다. 왕을 중심으로 ‘수신‘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경연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면, ‘제가‘의 공간은 ‘종묘‘, ‘치국‘의 공간은 ‘사직‘으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이는 조선이 ‘효‘와 ‘농업‘을 중시한 유교국가임을 고려한다면 가능한 주장이라 생각된다.

또한, 조선은 중국 황제를 모시는 왕의 나라였기에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는 점 역시 고려한다면 결국 종묘와 사직은 조선의 국가이념이 구체적으로 구현된 ‘정치적 공간‘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처럼 우리가 조선의 역사적 공간으로서 종묘와 사직의 중요성에 대해 동의한다면, 구체적으로 「종묘와 사직」을 통해서 조선을 떠받친 두 기둥에 대해 보다 관심을 가지고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종묘와 사직에 대해 여러 그림과 표를 통해 잘 정리하고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기에, 평소 종묘와 사직에 관심있는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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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 장준하의 항일대장정
장준하 지음 / 돌베개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창세기 28장 10 ~ 15절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개" 이야기는 내가 결혼 일주일 만에 남기고 떠난 내 아내에게 일군 日軍 탈출의 경우 그 암호로 약속하였던 말이다. 마침내 나는 그 암호를 사용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고 하였다... 그 후 나는 "돌베개"를 베고 중원 6천 리를 걸으며 잠을 잤고 지새웠고 꿈을 꾸기도 하였다. 나의 중원 땅 2년은 바로 나의 "돌베개"였다. 아니, 그것이 나의 축복 받는 "돌베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p7)' 


 <돌베개>는 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였던 장준하(張俊河, 1918~ 1975) 선생의 삶 중에서 1944 ~1945년간의 일을 다룬 기록이다. 이 시기를 통해 일본군의 징용을 피해 광복군에 합류한 후 시안(西安)에서 OSS 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 작전을 기다리다 광복(光復)을 맞이할 때까지 삶의 여정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야곱은 브에르 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러 해가 지자 거기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창세 28 : 10 ~ 12)'


 <창세기>에서 야곱은 그의 형 에사우의 축복을 가로채고 어머니 라헬의 고향 하란으로 자신의 외삼촌을 찾아 떠나게 된다. 하란으로 가는 도중 베텔이라는 곳에서 지친 야곱은 잠시 잠을 청하고 꿈을 꾼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던 저자는 그러한 야곱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느끼지 않았을까.


 '내가 이 광야에서 벨 베개는 돌베개임을, 벌써 일군을 탈출하기 전 마지막 편지로 아내에게 말하였고 또 각오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베어야 할 나의 돌베개는 어느 지점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고행은 어디서부터 정작 시작되어 어디까지 가야할 것인가.(p91)'



[지도] <돌베개>에서 저자의 주요 경로


 항일 대장정(抗日 大長征)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쉬저우(徐州)에서 충칭(重慶)으로, 다시 시안(西安)으로 2년 동안 이어지는 그의 여정 속에서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 '돌베개'라는 말이 주문(呪文)처럼 이어지고 있다. 지쳐 쓰러질 듯한 상황속에서 저자를 버티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는 글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나의 희생으로 우리의 다음 대는 또다시 이런 고생에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대를 남기는 것보다 훨씬 보람된 나의 일생을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으리라.(p226)'


  '내가 자원한 것은 국내 공작이었다. 국내 공작의 목표는 결국 나의 죽음이다. 내가 나의 죽음을 지불하면 내 능력껏 그 대가가 조국을 위해서 결제될 것이다. 나의 각오는 한 장의 정수표다... 한반도에 대한 연합군의 공략은 일본의 본토 사수의 결의를 꺾자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공략을 돕기 위해 경무기로 무장된 우리가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우선은 첩보활동, 다음 단계로 정보 송신, 그리고 최종으로 유격대 조직 및 군사시설 파괴공작을 수행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p289)'


 그렇지만, <돌베개> 속에 저자의 애국심(愛國心)만 표현된 것은 아니다. 저자는 힘든 중에도 자신의 주변을 살피며 당시 주변 정세를 예리하게 판단해간다. 또한 힘든 장정의 상황에서도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의 주인공 제갈량(諸葛亮, 181 ~ 234)의 사당을 찾아가기도 하고, 애국가(愛國歌)를 부르면서 통곡하는 저자의 모습이 표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속에서 저자의 사람됨과 당대의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후방도 아닌 전방지대에 사단장이라는 지휘관은 수십 명의 처첩을 거느리고 다니고, 박격포를 메고 가야 할 그 어깨엔 그 대신 지휘관의 처첩들의 가마가 올라앉는가 하면, 정규군의 모습이 아닌 이 미련한 중국국. 일군에게 밀리면서 또 홍군과 맞붙어 싸우며 떠다니는 유랑의 군대. 그런가 하면 일군은 점과 선만을 차지하고 타협도 해가면서 대륙을 들쑤셔놓는 그 약삭빠른 허세의 군대다. 이들의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얻는 공산군만이 진실로 공간과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p176)'


 '장제스군에게 막대한 양의 미제 신식무기가 공급되었어도 이 신무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정도의 한심한 병정들이었다. 그들의 무식은 신무기 활용을 해득하지 못했고, 분해, 결합과 같은 손질에서 병기 파괴 손실이 더 컸으며, 이들의 정신 상태에서는 중공군으로 넘겨주고 돈을 받는 일이 항다반사였다.(p211)'


  힘든 여정을 거쳐 충칭의 임정에 도착하지만, 분열된 임시정부의 모습 속에서 그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저자의 좌절감 역시 <돌베개> 속에서 가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6천 리의 대륙횡단 끝에 찾아온 충칭도 채 석 달이 못되어 다시 떠나버리게 되었다. 충칭에 더 머무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학과 모욕같이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수했던 기대와 불같던 정열과 끓던 정의감은 안개처럼 차차 꺼져버리고 오히려 실망과 허탈감으로 우리가 괴로워해야 했던, 그 짧지 않은 석달을 묻어두고 새로운 결심을 했다.... 슬픔이란 아주 간단한 철학이요, 순진한 감정이었다. 심해의 풍랑 속에서 찾아온 등대불이 꺼져버린 그 순간의 실망이라고나 할까. 일군을 탈출해 찾아와 몸 바칠 곳을 찾아 헤매다가 시안에서 시작되는 한미 합동작전을 위한 훈련을 받기 위해 떠나는 우리 일행 30여 명은... 감정 없는 슬픔을 가숨에 담고 새로운 투쟁을 찾아가는 혁명의 철학을 새겨야 했다.(p276)'


  광복을 위해 투쟁했지만, 청년 장준하가 준비했던 광복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투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돌베개>는 존경받는 정치인, 사회운동가로서 장준하 선생의 사상(思想)적 기반을 확인할 수 있는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돌베개>를 이웃분에게 선물받았기에 더욱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돌베개>를 선물해 주신 이웃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청년 '장준하의 꿈'을 함께 짐작해보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았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나는 네가 누워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네 후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고, 너는 서쪽과 동쪽 또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세 28 : 12 ~ 16)'


PS. 원래 이번 리뷰는 두 명의 군인을 비교해서 작성하려고 했습니다. '일본군->광복군'으로 자신의 이력을 만든 장준하 선생과 '만주군->일본군'으로 변신해 간 다른 인물인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를 비교해 보려 했습니다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먼저 리뷰를 올립니다. 나중에 여건이 되면 '두 군인(軍人)의 길'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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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7 1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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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7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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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1 0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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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1 0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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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1 0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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