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정기 구독으로 받은 <비판 인문학 100년사>. 1900년 니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20세기를 지나 2000년 이후 21세기 초반까지 인문 사상사의 주요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서구 근대화의 꽃이 활짝 피었던 시기이자 동시에 극심한 정치/경제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였던 20세기. <비판 인문학 100년사>는 각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들의 주요 사상과 저서들을 훑어 준다는 면에서 장점을 갖는다.


 이미 책을 읽었던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주관적인 감정과 의견 등에 더해 책의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의의를 알려준다는 점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 여겨진다. 지도에서 위도와 경도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반면, 이는 해당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약 250페이지에 20세기의 주요 사상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빠듯하기에, 깊이 있는 사상 설명은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때문에, 인문학 입문자들에게는 입문 안내서의 의의를 갖지 않을까 여겨진다. 


 책에는 어떻게 사상들이 소개되어 있을까. 마침 얼마 전 읽은 <수용소 군도>에 대한 내용이 책에 담겨 있어 해당 내용을 옮겨본다. 

 

 1974년 프랑스에서는 러시아 체제에 저항했던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가 출간됐다. 이 책에서 솔제니친은 소비에트연방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책은 서구세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프랑스에서 굉장히 큰 방향을 일으킨 것은 몇십 년 전부터 대다수 프랑스 지식인층이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해왔으며, 역사적으로 구현된 형태인 소비에트연방을 어느 정도 인정해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이 책의 성공은 정치참여 및 사상 면에서, 즉 전체주의라는 정치체제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회학 이론에 대한 급격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전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현상은 서로 연결됐지만, 그 본질은 달랐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부르주아들의 위선으로 치부됐던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주제가 제일선으로 되돌아왔다._성일권, <비평 인문학 100년사>, p189


 위의 내용처럼 서술되기에 책을 읽은 이들은 책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 알게 되어 깊이를 더할 수 있겠지만, 읽지 않은 이들은 책을 통해 내용적으로는 크게 얻는 바가 없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대신 좋은 책 안내서로서 기능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비평 인문학 100년사>는 독자별로 다른 느낌을 줄 책이라 생각된다.


 소련 체제의 베일 속 진실이 밝혀지면서 지식인들의 공산당 편향은 점차 종말을 맞이한다. 1956년에 발표된 흐루쇼프의 '20세기 소련 공산당 대회' 보고서는 과거에는 파시즘과 제국주의 간의 갈등이라고 회피했던 사건들에 비판적 시각을 부여하면서 스탈린의 전횡을 만천하에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6년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에 더는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1년에 탈당한 에드가 모랭은 1959년에 <자기비판>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같은 지식인들의 공산당 외면은 프라하의 봄 이후 솔제니친 효과로 더욱 심화됐다._성일권, <비평 인문학 100년사>, p120


  개인적으로 <비평 인문학 100년사>를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사상가가 있다면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1952 ~ )다. <역사의 종언>을 통해 자본주의와 미국 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한 것으로 알고 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에는 종래의 입장을 번복하고 미국의 쇠퇴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마치 전기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 ~ 1951)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다르듯, 후쿠야마의 사상도 달라졌기에 그의 최근 저서를 담아둔다.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보고, "역사는 종언했다"고 말했다.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1992)>. 그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하고 인류사회의 궁극적인 체제로서 정착하는 최후의 이데올로기라고 단정했다. 1990년대 이후 세계는 빠른 속도로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어 갔다.._성일권, <비평 인문학 100년사>, p223


 심지어 냉전 붕괴 후, "역사가 미국식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승리로 귀결된다"고 주장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마저 이번엔 중국을 편들고 있다. 그는 2011년과 2014년 잇따라 펴낸 <정치 질서의 기원 The Origins of Political Order>과 <정치질서와 정치쇠퇴 Political Order and Political Decay>라는 두 권의 책에서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밝힌다. 일찍이 폴 케네디(Paul Kennedy)는 <강대국의 흥망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에서 1980년대 미국의 쇠퇴 대신 1990년대 일본의 부상을 예상했지만, IT혁명으로 미국의 쇠퇴가 연기되면서 일본의 자리를 중국이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 정치 질서의 세 가지 기본 요소는 국가와 법치, 민주 책임제다. 이상적인 경우는 이 삼자가 평형을 이룰 때다. 그리고 정치질서 건설에서 우선순위는 강력한 정부를 구성하는 게 첫 번째고 이어 법치, 그리고 마지막이 민주 책임제다. 법치와 민주 책임제가 정부 권력을 견제헤야 하지만 국가각 능력을 상실하면 이는 재앙이다. 시리아/이라크에서처럼 사회는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중국의 성공은 강한 정부 구축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반면 정부 권력이 약화된 미국은 현재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_성일권, <비평 인문학 100년사>,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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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my 2021-02-26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말>로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후에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는 솔직함도 보여 주었지요.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그 점은 대단한거 같아요. 그건 비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고요. 언급하신 책 <비판 인문학 100년사> 목차를 보니 흥미롭네요.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2-26 13:02   좋아요 0 | URL
자신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알려준 주장이나 책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런 면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비트겐슈타인 모두 대단한 석학이라 생각됩니다. noomy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

scott 2021-03-05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
추카~추카~
오늘 태어난 개굴군 🐸 놓고 가여 ㅋㅋ

겨울호랑이 2021-03-05 21: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cott님, 코로나19로 예년같이 않은 요즘이라 이번 해에는 경칩이 더 반갑습니다.^^:)
 

˝그 친구의 그런 면은 참 좋구나. 그런데 엄마가 볼 때는 이런 면은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아. 그것을 네가 고쳐줄 수는 없겠지만 영향을 받으면 안 될 것 같다.˝

˝네가 한 곡 들려주면 엄마, 아빠는 정말 행복할 텐데.... 다음에 마음의 준비가 되면 들려주렴.˝

˝우리 아들, 정리하는 능력은 좀 약하네. 잘하는 게 더 많으니까 큰 문제는 아니지만 정리정돈이 너무 안 되는 것 같아. 고칠 수 있는 건 고쳐볼까?˝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에서는 아이들을 혼내는 대화가 아닌 가르치는 대화가 제시된다. 부모의 의도는 짧고 간단하게 표현하는 대신, 아이들의 입장과 생각을 긍정하고, 기다려주며 결국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대화법.

아이의 행동이 적절하지 않아 바르게 잡아야 할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담아 말에 실어 보내고, 대신 부정적인 ‘화‘를 걸러내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은 아이가 크는 것과 함께 성장함을 느끼지만, 이 과정을 통해 부모 또한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것은 아닌지를. 그리고, 부모로서 대화법 뿐 아니라 자식으로서 나의 대화법은 문제가 없는지도 미루어 돌아보게 된다...

이 말 뒤에 수많은 말을 붙이고 싶을 거예요. 그래도 ‘안 되는거야‘까지만 말해주세요. 아이가 얌전히 말을 듣지 않아도, 울며 떼를 써도 딱 거기에서 끝내세요. 문제 상황에서는 말을 많이 할수록 백전백패입니다. 주고받는 말이 많을 수록 자극이 더 강해지기 때문이에요. 간결하게 한 가지 메시지만 전달하는것이 좋습니다. 머릿속에서 ‘혼낸다‘라는 표현을 지워버리세요. ‘혼낸다‘ 라는표현이 없어도 아이를 키우는 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 표현이 없다고 버릇 없는 아이가 되지 않아요. ‘혼낸다‘라는 표현 대신 ‘가르치다‘라는 표현을 쓰면 됩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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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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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인 전통에서는 문화라는 개념(이하에서는 이 일반적인 형태속에 언제나 문명이란 개념도 함께 포함된다)이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즉 고전 라틴어에서 문화는 농경 활동을 가리켰으나 점차 한 집단 내에서의 제의적이거나 지적인 활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p12) 중세에도 이 개념은 부분적으로 전수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시빌리타스 civilitas'리는 공동체적/정치적 요소가 더욱 보강되었다. 근대 전기 前期에는 특히 교양과 학문의 영역에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현대적으로 포괄적인 개념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독일어에서는 전통적인 표현인 '문화 kultur'가 계속 쓰였고, 프랑스어와 영어에서는 '문명 civilisation'이라는 새 조어가 사용되었다. 두 개념 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해 행하는 활동 전체를 가리켰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개명된 인간의 모습, 개척된 자연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화 생산품의 모습으로 나타난 모든 결과물들을 가리키게 되었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13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 Zivilisation / Kultur>는 문명(文明, civilization)과 문화(文化, culture)의 시대적 변천에 대해 다룬다. '경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 말들이 처음에 가지는 긍정적 이미지는 이후 의미 확장에 따라 부정적인 뜻도 함축하게 된다. 이후 독일어 '문화(kultur)'는 근대의 긍정적 이미지와 결합되며 형이상학적이고, 긍정적인 어휘로 발전한 반면, '문명 zivilsation'은 부정적 의미를 가져가면서 뜻이 분화되기에 이른다.

문화는 현대를 움직이는 주요 개념군에 속하며, 특히 '역사'와 '진보'라는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문화는 이 개념들의 운동적 성격에 참여했고 동시에 이 운동의 원동력들 중 하나가 되었다. 즉 문화와 문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발전 과정이 되고 말았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14

'문화'와 '문명'은 19세기에는 일차적으로 -민족적 색채도 띤 - 유럽적 자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포괄적인 세계사적 진보운동의 선두에 다 함꼐 서 있다는 의식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정, 즉 '문명화'라는 요소는 약화되고 '문명화된 상태'라는 요소가 강화된다.(p150)... '문화'와 '문명'은 국가와 사회, 경제와 기술, 학문과 예술, 법, 종교, 도덕등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며, 둘 다 각각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와도 관계된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151

(독일어에서) 문화 개념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자주 민족주의적 맥락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물론 그것은 소위 비독일적 문명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부각시키려는 것도, 독일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민족적 목표를 위해 동원하려는 목적에서였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169

제2차 세계대전의 물질적 결과는 유럽이 제2급 세력으로 하강한 것이었다. 진보하는 것으로 믿어지던 인류 발전의 최첨단에 서 있다는 확신 그리고 자신의 문화 내지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다. 회의와 비판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모든 언어에서의 온갖 부정적인 측면들이 점점 더 문명 개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반면, 문화 개념은 정신적인 것과의 밀접한 여관 덕분에 근본적으로 '하나의 이상'이라는 특징을 유지하거나 이제야 비로소 획득했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204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의 첫 권은 이렇게 문명과 문화를 분석한다. 독일어에서는 별다른 의미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문명 civilization'이 유럽의 제국주의 선두주자인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독창적으로 사용되고, 양 차 세계대전 이후 쇠퇴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보다 우월한 문명에 대한 인식은 '문명'이라는 단어에 함축되었고, '계몽', '진보', '이성'의 긍정적 이미지가 이 안에 녹아들어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civilization이라는 단어는 다분히 제국주의의 산물임을 깨닫게 된다. 상대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이 약했던 독일에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는 zivilisation이 가져가는 것을 보면서 언어는 시대의 산물임도 더불어 확인한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에서 문명과 문화를 다룬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근대 이후 급격한 의미 변화가 일어난 개념어들의 역사를 살피는데 이들 두 단어처럼 극명하게 명암이 갈린 단어들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단어들의 엇갈린 운명으로부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근대의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 이어지는 개념어는 문화와 결합된 '진보 Fortschritt'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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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7 0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명의 개념이 문화와 분화되고 제국주의의 용어로 전화해가는 과정이 흥미롭네요. 오늘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

겨울호랑이 2021-02-17 07: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바람돌이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
 
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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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구조에 대한 해경 지휘라인에 대한 1심 판결 결과가 무죄로 나왔다. 재판부의 판단은 해경 지휘부의 결정이 당시 상황을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민간 선주들과 협력을 잘 했다면, 모든 사람은 아니어도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처벌이 과거 결과를 되돌려 놓을 수는 없겠지만, 책임 인정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 유감으로 남는다. 때문에, 2심 재판을 더 지켜보게 된다...

이 사건의 포인트는 민간 선주들도 애들을 살릴 수 있었다는 겁니다. 해경이 처신만 잘했다면 많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섬의 모든 선주들이 다 무전기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사고가 났다는 것을 다 들었어요. 그래서 섬에 있던 모든 배들이 세월호로 집결했거든요. 문제는 뭐냐면 애들을 구하려면 민간 선주들이 끌고 온 배에 두 사람은 타고 있어야 해요. 한 사람이 세월호에 올라가 애들을 구하는 동안 배가 떠나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걸 '닻거지'라고 하는데 닻을 내려서 배가 안 밀려나가게 당겨야 합니다. 혼자 아이들을 구하면 배가 가버리기 때문에 구할 수가 없어요. 전부 다 사고소식만 듣고 최고 속도로 달려가보니까 모두 혼자 타고 있는 상황이어서 세월호에 올라갈 수가 없었던 겁니다... 배에는 전부 '앙카'라는 게 있어요. 그걸로 유리창을 깨면 그 방 아이들은 다 살아서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민간 선주들 전부가 하나같이 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섬에 내려갔을 때 선주들이 나를 보자마자 하는 첫마디가 "해경 개새끼, 죽일 놈의 새끼들, 저 새끼들이 안 구했어" 였어요. _4.16 세월호 참사 기록 위원회 작가단, <금요일엔 돌아오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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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2-16 1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 보고 정말 할말이 없더라구요. 무죄라니.... 그 많은 생명들을 눈 앞에서 구하지 않고 그냥 두었는데 무죄라니요 ㅠㅠ

겨울호랑이 2021-02-16 12:42   좋아요 1 | URL
네...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에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번 판결로 상명하복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풍조가 퍼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공직사회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이라는 점에서 참 안타깝습니다...

페넬로페 2021-02-16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그런지 세월호는 저에게 남다르게 더 마음이 아파요~~
저 판결소식에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너무 상심이 클 것 같아요^^
너무 화가 납니다**

겨울호랑이 2021-02-16 16:00   좋아요 2 | URL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사건에 분노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월호가 제대로 마무리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언제든 그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다른 의미일테니까요...
 

 죽을 때에는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전의 마음의 준비가 무서운 것이다. 그는 이미 그 두려움, 괴로움, 가련함을 <지나서>, 이미 슬픔을 뛰어넘어, 자기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승복하고, 지금은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육체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의 <수용소 군도 5>에서는 비참한 군도생활의 끝이 그려진다. 극한 상황에 몰린 이들의 탈주와 이들에 대한 엄한 처벌 그리고 반란. 죽음을 각오한 후에야 비로소 탈옥을 할 준비가 된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우리는 광산 갱도의 마지막 끝, 막장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나는 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밑바닥으로 내려가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공통된, 돌멩이가 많은 바닥에 단단하게 발을 디디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인격은 그 시기에 완성되어 갔으며, 그 이후에 내 인생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때 익숙해진 시선과 습관에 충실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그렇지만, <수용소 군도 5>에서 저자 솔제니친은 수용소에 수감된 이들 뿐 아니라 이들을 감시하는 경비병들 역시 같은 밑바닥에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벗어날 희망을 갖지 못한 버림받은 땅에 놓여진 이들은 분명히 같은 처지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다. 때문에, 이들은 반목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이 각자의 사회적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 계급이 '주인 계급'이라는 기반 위에 서 있다면, 다른 계급은 '노예 계급'이라는 기반에 있어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


 우리를 가둔 자들도 우리처럼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특수 수용소의 규율은 완전한 격리를 시키는 것이다. 즉, 누군가에게 호소할 수도 없고, 아무도 여기서는 석방되지 않고, 아무도 여기서는 도망치지 못한다... 어찌하여 이렇게 순종하게 되었는가? 이런 수용소는 따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지배받는 측도, 지배하는 측도 교정 노동 수용소에서 와서, 전자는 몇십 년의 노예의 전통을 짊어지고, 후자는 몇십 년의 주인의 전통을 짋어지고 왔기 때문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결국, 문제는 정치적 자유가 아니다. 그래, 바로 그렇다! 인류가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내용이 없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는 정치 기구를 가진 사회를 만들려는 것도 아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에 있는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이제 우리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가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말한 '노예 도덕'과 '주인 도덕'을 수용소 질서에 가져올 수 있겠다. 위력에 의해 강제로 수감된 이들이 갖는 '힘에의 열망'과 능동적인 힘에 의해 위협받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동(Reaktion)에 의해 생겨난 르상티망(Ressentiment)의 모습은 니체의 도식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강자(경비병)=악인'으로 간주하지만, 강자인 경비병들에게 복종함으로서 겨우 살 수 있었던 노예(죄수)들이 여기에서 벗어나 개인적으로는 탈옥, 후에는 집단 항명 등을 통해 거부하는 모습은 글자그대로 '노예의 반란'이다. 그렇지만, 결국 진압된 항명과 구질서로의 회귀는 말 그대로 역사 속에서 '선과 악 Gut und Bose'의 반복의 전형으로 보여진다. 결국, 죄수들의 르상티망은 자신들을 선(善)으로 규정하고, 선이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서 절망하게 된다.


 인간이 정서나 감정 없이 사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것을 일단 악이라고 보게 되면, 그 속에 있는 선마저도 좀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끝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작은 있는가? 우리의 인생에 광명이란 있을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억압받는 사람들은 <선으로 악을 근절할 수는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그렇다면, 세상에서 버려진 땅 수용소 군도에도 나타난 '주인 - 노예'계급의 갈등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주인에게는 스스로 '좋음'이라는 우월 의식을, 노예에게는 '아니다'라는 부정의 답을 끌어내는 이 힘을 솔제니친은 '체제'에서 발견한다. 체제로부터 '반동'으로 낙인 찍힌 이들은 말 그대로 노예(죄수)로 강등되니, 수용소에 있는 이들에게 체제는 말 그대로 하늘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수용소의 천명(天命)은 동양의 천명인 민본(民本)과는 분명히 다르다.


  만일 경비대의 <장교>가 죄수들에게 어떤 친절을 베풀려고 한다면, 그는 그 친절을 병사들 앞에서, 그리고 병사들을 통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죄수들에 대하여 적의를 품고 있는 가운데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또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를 밀고 했을 것이다. 이것이 체제라는 것이다!...  이 체제의 힘은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과 직접 이야기를 할 수 없고, 반드시 장교나 정치 지도원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데에 있다. 이 청년들의 힘은 그들의 무지에 있다. 수용소의 힘은 이 청년들에 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수용소의 '체제'는 개인과 개인을 고립시키고, 새로운 정보를 차단하며, 명령을 주입함으로써 수용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개인과 개인이, 개인과 집단이 의견을 나누며 교류를 하게 된다면, '여론'이 형성되고 꺾을 수 없는 힘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ebruary Revolution, 1917)으로 소련을 만든 이들 대부분이 시베리아 유형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솔제니친은 <수용소 군도> 곳곳에서 제정 시대보다 열악한 수용소 생활에 대해 언급한다.   

 

 결국, 수용소 내에서 빚어진 '주인 계급'과 '노예 계급'의 갈등이 더 첨예해진 것은 '무지'를 주입받은 이들은 별다른 죄책감 없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가지고 인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책무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면에서 히틀러의 극우와 스탈린의 극좌가 만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수용소 군도 5>를 통해 '선(善) - 악(惡)'의 문제를 잠시 생각하며, 이제 <수용소 군도 6>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자기의 양심을 남에게 맡긴 채 명령에 따라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20세기 최대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선악에 대해 스스로 가치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인쇄된 지령서나 상사의 구두 명령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선서! 떨리는 음성으로 되풀이하는 이 엄숙한 맹세, 그 의미는 악당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 이런 선서를 통해 아주 간단히 그들은 악당의 편이 되어 국민들을 탄압하게 된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끄림반도 전쟁은 - 그것은 러시아에서 가장 행운의 전쟁이다 - 농노의 해방과 알렉산드로 황제의 여러 개혁을 가져오게 했다! 그와 동시에 러시아에는 가장 위대한 힘, 즉 <여론>이 탄생했다... 여론! 사회학자들이 여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정부와 당의 견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자유롭게 표명되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 견해로서만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질서>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배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도적질을 하여 남을 짓밟고 살아가며, 죄수들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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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15 22: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훌륭한 페이퍼로 니체와 아렌트를 다시 한번 복기합니다. 수용소군도가 엄청나군요! 글의 내용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요즘 고민해 보았던게 악의 평범성의 범위 내지 비난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답이 쉽지는 않더라구요!ㅎ 6권까지 힘차게 정진하시길 응원합니다!ㅎ

겨울호랑이 2021-02-15 23:01   좋아요 4 | URL
작가 솔제니친의 말처럼 삶의 밑바닥까지 다녀온 이들에 관한 이야기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처참한 삶의 기록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분명 작품 안에 있음을 느낍니다. 때문에 <수용소 군도>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철학은 죽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실증하는 대작이라 여겨집니다. 막시무스님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02-16 0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수용소 군도의 사유의 깊이가 대단하네요. 저런 사유를 저렇게 엄청난 양의 페이지에 펼쳐놓는단 말입니까? 작가는 역시 위대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1-02-16 05:47   좋아요 2 | URL
분량도 많지만, 절박한 삶을 살아야 했던 서로 다른 이들의 인생은 하나하나가, 그리고 그들 전체가 철학의 실증으로 보입니다. 힘든 수용소 생활이었지만, 이로 인해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바람돌이님 말씀에 매우 공감합니다^^:)

scott 2021-02-16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예의 반란을 진압하며 권력에 위력과 정당성을 확립시킨 로마 제국 처럼 수용소 군도속 자리잡은 주인 계급과 노예계급 ,,,죽음의 끝자락에서도 글쓰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은 솔제니친 작가,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다시한번 더 역사를 상기 시켜보게 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님은 겨울 동면을 안하쉼 ^ㅎ^

겨울호랑이 2021-02-16 10:35   좋아요 1 | URL
scott님 말씀처럼 지배계급에 대한 복종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대다수의 다른 이들처럼 소극적인 분노 표출에 그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쓴 솔제니친은 이를 통해 진정한 초인으로 거듭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겨울잠을 자고 싶은데, 먹고 살다보니 봄이 가까이 와버렸네요.ㅋㅋ scott님께서 매일 들려주시는 음악 또한 봄이 왔음을 알려주니, 겨울잠 자기는 틀린 듯 합니다. scott님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2-16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 졸업하고 읽었던 기억이 나요
고등학생이였던 남동생이 허락없이 친구에게 빌려주고 아직도 못돌려받은책예요 ㅠ
아저씨가 되서도 그 친구는 누나책 아직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왜 안돌려주는지...
책장이 누렇게 바랬을텐데...ㅋ

겨울호랑이 2021-02-16 12:38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옛말에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제 책을 가져간 이를 그렇게 생각되지는... ㅋ 저도 돈을 빌려줘서 못 받으면 그러려니 하는데, 책을 못 받으면 잊히질 않더군요. 오랜 억류 생활로 수용소 생활을 겪고 있을 <수용소 군도>가 하루 빨리 그레이스님 품 안으로 돌아오길 바라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