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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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인 전통에서는 문화라는 개념(이하에서는 이 일반적인 형태속에 언제나 문명이란 개념도 함께 포함된다)이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즉 고전 라틴어에서 문화는 농경 활동을 가리켰으나 점차 한 집단 내에서의 제의적이거나 지적인 활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p12) 중세에도 이 개념은 부분적으로 전수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시빌리타스 civilitas'리는 공동체적/정치적 요소가 더욱 보강되었다. 근대 전기 前期에는 특히 교양과 학문의 영역에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현대적으로 포괄적인 개념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독일어에서는 전통적인 표현인 '문화 kultur'가 계속 쓰였고, 프랑스어와 영어에서는 '문명 civilisation'이라는 새 조어가 사용되었다. 두 개념 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해 행하는 활동 전체를 가리켰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개명된 인간의 모습, 개척된 자연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화 생산품의 모습으로 나타난 모든 결과물들을 가리키게 되었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13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 Zivilisation / Kultur>는 문명(文明, civilization)과 문화(文化, culture)의 시대적 변천에 대해 다룬다. '경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 말들이 처음에 가지는 긍정적 이미지는 이후 의미 확장에 따라 부정적인 뜻도 함축하게 된다. 이후 독일어 '문화(kultur)'는 근대의 긍정적 이미지와 결합되며 형이상학적이고, 긍정적인 어휘로 발전한 반면, '문명 zivilsation'은 부정적 의미를 가져가면서 뜻이 분화되기에 이른다.

문화는 현대를 움직이는 주요 개념군에 속하며, 특히 '역사'와 '진보'라는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문화는 이 개념들의 운동적 성격에 참여했고 동시에 이 운동의 원동력들 중 하나가 되었다. 즉 문화와 문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발전 과정이 되고 말았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14

'문화'와 '문명'은 19세기에는 일차적으로 -민족적 색채도 띤 - 유럽적 자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포괄적인 세계사적 진보운동의 선두에 다 함꼐 서 있다는 의식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정, 즉 '문명화'라는 요소는 약화되고 '문명화된 상태'라는 요소가 강화된다.(p150)... '문화'와 '문명'은 국가와 사회, 경제와 기술, 학문과 예술, 법, 종교, 도덕등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며, 둘 다 각각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와도 관계된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151

(독일어에서) 문화 개념은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자주 민족주의적 맥락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물론 그것은 소위 비독일적 문명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부각시키려는 것도, 독일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민족적 목표를 위해 동원하려는 목적에서였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169

제2차 세계대전의 물질적 결과는 유럽이 제2급 세력으로 하강한 것이었다. 진보하는 것으로 믿어지던 인류 발전의 최첨단에 서 있다는 확신 그리고 자신의 문화 내지 문명을 전 세계에 전파시킬 수 있다는 희망은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다. 회의와 비판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모든 언어에서의 온갖 부정적인 측면들이 점점 더 문명 개념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반면, 문화 개념은 정신적인 것과의 밀접한 여관 덕분에 근본적으로 '하나의 이상'이라는 특징을 유지하거나 이제야 비로소 획득했다._코젤렉, <코젤렉 개념사 사전 1>, p204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의 첫 권은 이렇게 문명과 문화를 분석한다. 독일어에서는 별다른 의미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문명 civilization'이 유럽의 제국주의 선두주자인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독창적으로 사용되고, 양 차 세계대전 이후 쇠퇴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보다 우월한 문명에 대한 인식은 '문명'이라는 단어에 함축되었고, '계몽', '진보', '이성'의 긍정적 이미지가 이 안에 녹아들어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civilization이라는 단어는 다분히 제국주의의 산물임을 깨닫게 된다. 상대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이 약했던 독일에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는 zivilisation이 가져가는 것을 보면서 언어는 시대의 산물임도 더불어 확인한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에서 문명과 문화를 다룬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근대 이후 급격한 의미 변화가 일어난 개념어들의 역사를 살피는데 이들 두 단어처럼 극명하게 명암이 갈린 단어들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단어들의 엇갈린 운명으로부터 우리는 자연스럽게 근대의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 이어지는 개념어는 문화와 결합된 '진보 Fortschritt'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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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7 0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명의 개념이 문화와 분화되고 제국주의의 용어로 전화해가는 과정이 흥미롭네요. 오늘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

겨울호랑이 2021-02-17 07: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바람돌이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