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정기 구독으로 받은 <비판 인문학 100년사>. 1900년 니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20세기를 지나 2000년 이후 21세기 초반까지 인문 사상사의 주요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서구 근대화의 꽃이 활짝 피었던 시기이자 동시에 극심한 정치/경제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였던 20세기. <비판 인문학 100년사>는 각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들의 주요 사상과 저서들을 훑어 준다는 면에서 장점을 갖는다.
이미 책을 읽었던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주관적인 감정과 의견 등에 더해 책의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의의를 알려준다는 점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 여겨진다. 지도에서 위도와 경도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반면, 이는 해당 내용에 대해 알지 못하는 독자들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약 250페이지에 20세기의 주요 사상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빠듯하기에, 깊이 있는 사상 설명은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때문에, 인문학 입문자들에게는 입문 안내서의 의의를 갖지 않을까 여겨진다.
책에는 어떻게 사상들이 소개되어 있을까. 마침 얼마 전 읽은 <수용소 군도>에 대한 내용이 책에 담겨 있어 해당 내용을 옮겨본다.
1974년 프랑스에서는 러시아 체제에 저항했던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가 출간됐다. 이 책에서 솔제니친은 소비에트연방의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이 책은 서구세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프랑스에서 굉장히 큰 방향을 일으킨 것은 몇십 년 전부터 대다수 프랑스 지식인층이 마르크스주의에 동조해왔으며, 역사적으로 구현된 형태인 소비에트연방을 어느 정도 인정해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이 책의 성공은 정치참여 및 사상 면에서, 즉 전체주의라는 정치체제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회학 이론에 대한 급격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전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현상은 서로 연결됐지만, 그 본질은 달랐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부르주아들의 위선으로 치부됐던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주제가 제일선으로 되돌아왔다._성일권, <비평 인문학 100년사>, p189
위의 내용처럼 서술되기에 책을 읽은 이들은 책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 알게 되어 깊이를 더할 수 있겠지만, 읽지 않은 이들은 책을 통해 내용적으로는 크게 얻는 바가 없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대신 좋은 책 안내서로서 기능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이유로 <비평 인문학 100년사>는 독자별로 다른 느낌을 줄 책이라 생각된다.
소련 체제의 베일 속 진실이 밝혀지면서 지식인들의 공산당 편향은 점차 종말을 맞이한다. 1956년에 발표된 흐루쇼프의 '20세기 소련 공산당 대회' 보고서는 과거에는 파시즘과 제국주의 간의 갈등이라고 회피했던 사건들에 비판적 시각을 부여하면서 스탈린의 전횡을 만천하에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6년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에 더는 동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1년에 탈당한 에드가 모랭은 1959년에 <자기비판>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같은 지식인들의 공산당 외면은 프라하의 봄 이후 솔제니친 효과로 더욱 심화됐다._성일권, <비평 인문학 100년사>, p120
개인적으로 <비평 인문학 100년사>를 통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사상가가 있다면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 1952 ~ )다. <역사의 종언>을 통해 자본주의와 미국 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한 것으로 알고 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에는 종래의 입장을 번복하고 미국의 쇠퇴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마치 전기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 ~ 1951)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다르듯, 후쿠야마의 사상도 달라졌기에 그의 최근 저서를 담아둔다.
미국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90년대 초반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 붕괴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보고, "역사는 종언했다"고 말했다.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1992)>. 그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하고 인류사회의 궁극적인 체제로서 정착하는 최후의 이데올로기라고 단정했다. 1990년대 이후 세계는 빠른 속도로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로 바뀌어 갔다.._성일권, <비평 인문학 100년사>, p223
심지어 냉전 붕괴 후, "역사가 미국식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승리로 귀결된다"고 주장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마저 이번엔 중국을 편들고 있다. 그는 2011년과 2014년 잇따라 펴낸 <정치 질서의 기원 The Origins of Political Order>과 <정치질서와 정치쇠퇴 Political Order and Political Decay>라는 두 권의 책에서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밝힌다. 일찍이 폴 케네디(Paul Kennedy)는 <강대국의 흥망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에서 1980년대 미국의 쇠퇴 대신 1990년대 일본의 부상을 예상했지만, IT혁명으로 미국의 쇠퇴가 연기되면서 일본의 자리를 중국이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대 정치 질서의 세 가지 기본 요소는 국가와 법치, 민주 책임제다. 이상적인 경우는 이 삼자가 평형을 이룰 때다. 그리고 정치질서 건설에서 우선순위는 강력한 정부를 구성하는 게 첫 번째고 이어 법치, 그리고 마지막이 민주 책임제다. 법치와 민주 책임제가 정부 권력을 견제헤야 하지만 국가각 능력을 상실하면 이는 재앙이다. 시리아/이라크에서처럼 사회는 대혼란에 빠지고 만다. 중국의 성공은 강한 정부 구축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반면 정부 권력이 약화된 미국은 현재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_성일권, <비평 인문학 100년사>,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