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무늬 북즐 시선 3
강미옥 지음 / 투데이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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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무늬 1> <바람의 무늬 2> p14/ p15

<모래톱은 숨쉬고 싶다> p53

모래에 새겨진 바람의 흔적 저 편에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인다. 그 옆 사진에서는 물결인듯 모래인듯 바람이 만들고 지나간 자국 위를 오리가 걷는다. 또는 헤엄쳐간다.

비슷한 배경의 바람이 만들어낸 무늬지만, 먼저 사진에서는 거센 바람의 힘에 꺾인 생명의 잔해가 처량하게 다가오는 반면, 둘 째 사진에서는 바람을 뚫고 나가는 생명의 도약을 느끼게 된다. 쉴 새없이 바뀌는 바람이고, 그에 따라 모래/물결에 새겨지는 무늬는 끊임없이 변화하겠지만, 사진에서 담지 못한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본다면 바람이 만들어 낸 거대한 프랙탈(fractal) 구조를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조각과 전체의 자기 유사성처럼 순간과 영원은 결국 같은 모습이 아닐까.

순간의 바람이 만들어낸 변화를 <바람의 무늬>가 표현한다면, <모래톱은 숨 쉬고 싶다>는 파도가 만들어낸 모래에 남겨진 자국이다. 하루에 두 번 반복되는 밀물과 썰물이 새긴 모래 위의 흔적은 보다 정형적이고 예측 가능한 약속이다. 그래서일까. 모래톱 위의 자국이 직선인 것은 다소 고지식하게 느껴진다.

바람은 자신의 흔적을 외부에 새긴다면, 물은 자신의 내부에서 흔적을 꺼내 보여준다. 여러 면에서 대비될 수 있는 바람과 물을 담은 두 장의 사진에서 우리가 공통점을 찾는다면, 황혼(黃昏)을 떠올리게 하는 ‘지는 해(석양)‘때문이 아닐까.

여러 장의 사진과 시(詩)가 함께 한 강미옥 시인의 작품에서도 이들 세장의 사진과 시에 잠시 머물며 삶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어수선한 시기,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선물을 주신 이웃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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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9 16: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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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9 16: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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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 포도밭 근처에 배나무가 있었는데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기는 했지만 모양이나 맛으로나 탐낼만한 과일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아주 못된 아이놈들은 놀이에 미쳐 늦게까지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으슥한 밤에 그 나무를 흔들어 터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는 태짐이 될 만큼 몽땅 싸갔는데 그 배로 저희가 한바탕 먹고 놀자는 것이 아니라 돼지들한테 던져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저한테 풍족하게 있고 훨씬 더 좋은 것이 있는데도 그것을 훔쳤는데, 도둑질을 하면서까지 제가 탐내던 것을 향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도둑질과 그 죄악을 향유하기 위해서 그 짓을 했습니다.(p96)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中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AD 354 - 386 )는 <고백록 Confessiones>에서 어릴적 배를 훔쳤던 죄(罪)를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사람의 무절제한 경향으로 인해 죄가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고백록>에서 되돌아보고 있다. 그에게 어릴 적 '도둑질'은 과거 잘못에 대한 고백이자, 자신의 삶과 사상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고백록>은 아우구스티누스 인생의 고백성사(告解聖事)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순간 그 마음이 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던가!  그저 악인이 되고 싶었고 제 악의 惡意의 원인은 악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악의가 추잡했고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p96)... 비록 최하로나마 선하기는 하지만 이것들 때문에 더 상위와 최고의 선이 저버림을 받을 적에, 주 저희 하느님, 당신께서, 또 당신의 진리와 당신의 율법이 저버림을 받을 적에 죄가 범해집니다.(p97)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中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통해 어린 시절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살펴볼 수 있었다면,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 - 1778)의 <고백록 Les Confessions >을 통해서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변명을 확인할 수 있다.


 랑시에르 양의 하녀가 빗들을 가지러 돌아왔을 때, 빗 하나가 한쪽 빗살들이 몽땅 부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이러한 손상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내게 묻고 나는 그 빗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p37)... 내 가련한 외사촌도 나 못지않은 중죄가 씌워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한데 묶여 같은 벌을 받게 되었다. 그 벌은 끔찍했다.(p38) <장 자크 루소 고백록1> 中


 나는 내색하지 않고 탐을 내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며 속이고 거짓말하며 마침내는 훔치는 짓까지 배우게 되었다. 훔친다는 것은 이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갑작스런 욕망인데, 그 이후부터는 그 버릇을 완전히 고칠 수 없었다... 선량한 감정이 나쁜 길로 빠지면 바로 그 감정으로 인해 아이들은 악을 향해 첫발을 내딛게 된다.(p59) <장 자크 루소 고백록1> 中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 부당하게 체벌을 당하며 추궁을 당한 어린 시절의 루소는 이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었으며 이후 거짓말과 도둑질을 배우며 나쁜 길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자신을 변명한다,  루소는 자신이 나쁜 길에 빠졌다는 사실의 원인을 불우했던 어린 시절로 돌리고, 이는 루소에게 일종의 방어기제(防禦機制)로 작용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한 번의 잘못이 계기로 작용했다면, 루소에게 도둑질과 거짓말하는 습관이 성찰의 계기가 되기까지 1728년 베르첼리스 부인 댁에서 리본을 훔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내가 수중에 넣을 수 있는 다른 더 좋은 것들도 많았지만, 오직 그 리본만이 탐이 나서 그것을 훔쳤다. 그리고 그것 별로 감추어두지 않아서, 사람들은 곧 내가 그것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당황하여 우물거리다가 마침내 얼굴을 붉히면서 그것을 내게 준 사람은 마리옹이라고 말했다.(p138)... 아!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양심의 가책으로도 견딜 수 없는 판에, 그녀를 나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양심의 가책은 어떨지 그것은 여러분들이 판단하시라... 그 가책은 이날까지 경감되지 않고 내 양심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어, 어떤 의미로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소망이 내가 고백록을 쓰고자 하는 결심에 큰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p140) <장 자크 루소 고백록1> 中


 루소는 자신의 잘못을 하녀 마리옹에게 덮어씌우고 이 일을 통해 둘 다 해고당한다. 자신의 거짓말로 부당함을 당한 마리옹의 모습을 보고나서야 루소는 깊이 반성하게 되었음을 <고백록>에서 밝힌다. 루소의 경우 시간은 조금 더 걸렸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 모두 어린 시절의 잘못과 성찰이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소의 경우에는 그러한 계기가 하나 더 추가 되는데, 바랑부인(Madame de Warens)과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첫날부터 우리 사이에는 비할 데 없이 달콤한 친밀한 관계가 맺어졌고, 이러한 친밀도는 그녀의 남은 생애 동안 변치 않고 지속되었다. '프티 Petit'가 내 이름이고, '마망 maman'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프티'와 '마망'으로 남았다. 심지어 세월이 흘러 우리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때도 그랬다.(p170) <장 자크 루소 고백록1> 中


 생후 9일만에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에 대한 애정에 목말랐던 루소가 정작 자신의 다섯 아이를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는 사실은 상당한 아이러니지만, 바랑 부인과의 관계 속에서 모성(母性)에 목말랐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때문에, 그가 후에 바랑 부인과 갖게 된 육체 관계는 그에게 근친상간의 죄의식을 심어 주었고, 이는 또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여러분은 우리가 결국에는 다른 종류의 관계를 갖지 않았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기다리시라. 한꺼번에 전부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p171)... 나는 처음으로 한 여인,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한 여인의 품에 안긴 나 자신을 보았다. 과연 나는 행복했던가? 아니다. 나는 쾌락을 맛보았을 뿐이다.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그 쾌락의 매력에 독약처럼 스며들었다. 나는 마치 근친상간이라도 범한 것 같았다.(p307) <장 자크 루소 고백록1> 中

 

 <고백록>에서는 루소의 짧은 이야기 외에는 다루어지 지지 않았지마, 개인적으로는 <고백록>에서의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자세히 다룬다면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 1946 -)의 <연애의 기억 The Only Story>에서처럼 나오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의 <고백록>에서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일생에 미친 영향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반면, 톨스토이(Lev Nikolayevitch Tolstoy, 1826 -1910)의 <나의 참회>는 조금 다른 고백이야기다. 톨스토이는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던 시기에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 끝에 민중의 생활이 참된 생활이라는 것과 신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내가 영혼의 밑바닥에서 내 생활이 의미가 있다고 몰래 빋고 있을 때는, 이것을 들여다보고 즐기는 것이 참으로 좋았다. 그 무렵에는 거울에 비치는 여러 가지 광신의 희롱, 인생에서의 희극적인 빛과 비극적인 빛, 감상적인 빛과 미적(美的)인 빛, 무서운 빛 등등의 희롱이 내 마음을 달래 주었다. 그러나 인생이 무의미하고 무서운 것임을 아는 순간, 거울 속에서 본 빛의 희롱은 이제 나를 즐겁게 해 주지 않는다.(p630) <나의 참회> 中


  우리들의 행위, 이론, 학문, 예술이 내 앞에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나타났다. 나는 그 모두가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다는 것, 이런 것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대신 이마에 땀 흘리고 부지런히 일하는 민중 전체의 생활, 스스로의 생활을 창조하고 있는 인류의 생활이 참된 의미를 갖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참된 생활이라는 것, 이런 생활에 주어지고 있는 의미가 참된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것을 받아들였다.(p664)... 원인이란 세계에서 시간과 공간과 같은 사색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한다면 거기에는 원인이 있고, 또 여러 원인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 만물의 원인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p668) <나의 참회> 中


 아우구스티누스, 루소, 톨스토이의 고백과 참회를 통해 죄의식과 허무(虛無)의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지하고 어렵고 힘든 시기에 겪은 지우고 싶고, 피하고 싶은 경험이 가져온 변화의 계기. 그것이 진정한 시련의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이는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 - 1987)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에서 말한 자기 내면으로 내려가 자기 정화에 이르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시련의 참된 의미에 대해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어떤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든지, 고의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자기 정신의 미궁이라는 미로로 내려가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상징적인 것들에 둘려싸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이 집중될) 때인 것이다. 굳이 현대적인 의미의 어휘를 쓰자면,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p133)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中


PS. 연상의 여인과의 관계는 루소-바랑 부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 - 1849)과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 - 1876),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과 폰 메크 부인(adezhda Filaretovna von Meck, 1831 - 1894)의 관계 역시 연상 여인의 후원과 사랑을 받은 예술가 이야기에 해당한다. 차이코프스키의 경우에는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에 해당하지만. 어쩌면 유럽 사회의 이런 관계가 적지 않았기에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을 때 별다른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닐런지 넘겨 짚어본다.


 1836년 가을, 쇼팽은 리스트의 애인인 다구(Marie d'Agoult) 백작 부인의 살롱에서 리스트로부터 조르주 상드(1804 - 1876)을 소개받는다. 남장을 하고 잎담배를 피우는 등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더 잘 알려진 그녀는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쇼팽은 그런 점 때문에 처음에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상드 쪽에서는 연하인 쇼팽의 인간성과 음악에 매료되어 버린 듯하다.(p22)... 상드와 쇼팽의 관계는, 남녀 간의 사랑은 처음 얼마간뿐이었고 그 후에는 오히려 누나와 동생, 때로는 어머니와 아들의 애정과 같은 것이었다고도 한다. 상드는 쇼팽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배려를 다했다. 이러는 동안 쇼팽은 원숙기이 걸작들을 만들어내는데, 보다 폭넓은 구성법, 동기 발전 서법에 따른 논리성, 한층 자유롭고 대담한 화성 어법, 폴리포니적 서법의 사용, 환성적 분위기 등이 결합되는 후기의 작품이 추구되어 간다.(p23) <쇼팽> 中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예술에 심취하였던 사람(그보다 9세 연상)인데, 기묘하게도 정식으로는 한번도 대면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로만 교제하였다. 미망인은 매년 6,000루블을 제공하여, 차이코프스키의 창작 활동을 지원했다. 이 연금이 그를 교직의 번거로움에서 해방시키고 작곡에 몰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것은 빠뜨릴 수 없다. 편지를 보면 서로의 이성에 대한 사랑도 느낄 수 있는데, 예술가와 그 보호자로서 차이코프스키는 깊이 감사하면서도 어느 정도 그 원조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p14) <차이코프스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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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 2014-2018 황현산의 트위터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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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은 무엇보다도 순수 수학이 공간 및 그것의 관계들의 인식과 관련해 빛나는 예를 보여 주듯이, 그로부터 여러 종합적 인식들을 선험적으로 길어낼 수 있는 두 인식 원천이다.(p258) -「순수이성비판」-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는 시간적으로는 2014 - 2018 년, 공간적으로는 트위터의 140 글자 라는 한정된 시공간에 펼쳐진 황현산 교수의 종합적 인식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짧은 문장들이 주제별 선을 이루고, 선들이 모여 한 문학가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SNS 매체인 트위터의 특성상 시간이 지난 뒤에 읽은 글에는 막 끓인 커피와 같은 향은 찾기 어렵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안의 마들렌 과자와 같이 지난 시간을 우리에게 일깨움에는 부족함이 없다. 좋은 경험을 선물해 주신 이웃분께 감사함을 전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ps.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백낙청 회화록을 떠올리게 한다. SNS 와 대담이라는 다른 수단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두 지식인의 인식. 이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별도의 페이퍼로 다룰 예정이라는 기약없는 예고를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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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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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에는 두 가지 범주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숨은 것을 다루는 이야기와, 드러난 것을 노출시키고 보여 주는 이야기. 나는  그 둘을 내향적 범주와 외향적 범주라고 부른다. 둘 중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좀 더 예리하게 다룰 수 있는 범주는 어느 쪽일까? 나는 첫번째라고 믿는다... 삶 속의 말은, 문학 속의 말과 달리, 끊임없이 방해를 받기 때문에, 하나로 이어진 맥락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p92) <벤투의 스케치북> 中


  존 버거(John Berger, 1926 ~ 2017)의 <벤투의 스케치북 Bento's Sketchbook>에는 여러 관련 없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자신의 이야기와 주변 인물의 이야기. 이들의 이야기를 묶는 주제는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 ~ 1677)의 철학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Ethica>의 구절과 드로잉, 버거의 이야기로 구성된 서로 다른 이야기 속에서 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를 찾는다면 무엇이 될까. 이번 리뷰에서는 이에 대해 풀어가고자 한다.


 춤은 행복하고, 반복되고, 느긋하고, 힘이 넘치고, 환각에 빠뜨린다. 결혼식에서의 춤에 대해서도 똑같은 형용사들을 쓸 수 있지만, 두 춤의 움직임은 깊이 다르다. 차이가 뭘까. 결혼식의 여자들에게, 춤은 자신들 안에 숨겨둔 무언가를 향해 관심을 돌리는 기회가 되고, 남자들은 그렇게 숨어 있는 무언가의 앞에서, 혹은 그 주위에서 춤을 춘다. 내(內, into)=안쪽으로, 향(向, vertere)=돌리다. 생일잔치에 온 손님들에게 음악의 비트와 울림은, 자신들의 활력을 모인 사람들에게 드러내며 과시하고 싶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그들 각각은 큰마음 먹고 자신들의 다가감을 나타냈던 것이다. 외(外, extro)=바깥으로, 향(向, vertere)=돌리다.(p75) <벤투의 스케치북> 中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존 버거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내향적인 것과 외향적인 것의 대비를 표현한다. 이러한 대비는 춤과 슈퍼마켓에서 이루어진다. 내향적인 결혼식장에서의 댄스와 외향적인 생일잔치에서의 댄스. 같은 춤이지만, 이들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방향성(方向性)에 있다. 관심을 밖으로 돌리는가, 아니면 안으로 향하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대형슈퍼마켓과 길거리 시장의 차이를 어디에서 발견하고 있을까.


 (대형슈퍼마켓에서) 우리 모두는 용의자이다. 우리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관찰당한다. 모두 물건을 집어들고, 수레를 밀고, 물건을 살피고, 코드를 입력하고, 조절하고, 야채 무게를 달고, 일정을 생각하고, 계산한다.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는 거대한 창고는, 절도(竊盜)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길거리 시장의 정반대다. 그곳에서 핵심은 흥정이다. 길거리 시장에서는, 모두가 최선의 거래를 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p110) <벤투의 스케치북> 中


 대형슈퍼마켓에서는 흥정이 필요치 않다. 모든 가격이 정액(定額)으로 결정되어 있기에, 소비자는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을 뿐이다. 시장에서는 인간적인 사정이 통용되지만, 대형마켓에서는 구매, 거절의 디지털화된 표현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슈퍼마켓은 '언어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존 버거는 일은 언어의 측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보통 우리는 언어를 정면에서 마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읽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언어의 측면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언어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옆에서 보면 언어가 종이처럼 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말들은, 커다란 풍경화 속 하나의 기둥처럼, 하나의 세로획 - 나(I) -으로 축소된다.(p41) <벤투의 스케치북> 中


 저자는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드로잉의 목적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과의 동행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저자 스스로 밖으로 표현하기보다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길을 드로잉을 통해 표현한다. 동시에, 사람은 이미지에 의해 점차 변용(變容)될 수 있음도 함께 말한다. 그렇다면, 변용되는 존 버거의 지향점은 어디일까.


[그림] 존 버거의 드로잉(출처 : https://www.theparisreview.org/blog/2011/11/22/john-berger-on-%E2%80%98bento%E2%80%99s-sketchbook%E2%80%99/)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p20) <벤투의 스케치북> 中


 사람은 그가 어떤 실제의 이미지에 의해 변용되는 동안에는,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것을 현존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것의 이미지가 어떤 과거나 미래의 것으로 상상하게 될 것이다.(p29) <벤투의 스케치북> 中


 <벤투의 스케치북> 초반에 존 버거는 스피노자와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벤투의 스케치북>은 이야기의 내향적 범주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보이지 않는 면을 언어의 옆면에서 발견하고 드로잉을 통해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불운하게 살아간 스피노자과 일치된 경험을 다룬 것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둘 - 벤투와 나 - 을 점점 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라보는 행동, 눈으로 질문하는 행동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내 생각에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끌어 가는 어딘가, 혹은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공유하기 때문이다.(p12) <벤투의 스케치북> 中 


 사실, 위와 같이 단정적으로 말하기에는 <벤투의 스케치북>에는 많은 인물과 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때문에, 리뷰의 내용도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책에는 스피노자의<에티카>와 관련한 많은 인용문이 나오지만,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치는 않다 여겨진다. 오히려, <에티카>의 논리, 수학적 구조에 익숙한 이들은 이 책에 담긴 존 버거의 따뜻한 시선을 온전하게 느끼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벤투의 스케치북>은 주변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사랑, 소소한 행복만 준비되어 있다면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평하면서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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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3: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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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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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무엇인가 2 - 사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김근식 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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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스러울 때, 세상 사람들이 두렵게 여겨질 때, 삶이 엉망이 되었을 때, 당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를 그만두고, 나와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도록 하자. 그러면 된다. 나머지는 될 대로 되도록 맡겨두면 된다.‘
그러한 삶의 방식을 시작하면서 홀연히 모든 어려움이 풀리고, 두렵거나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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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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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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