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순전히 주관적인 성격을 이해하며, 또 세상에서 이름이 동일한 자와 구별되는 추가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창조 유형과, 이 추가적인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 대부분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도 극소수인 듯하다.(p8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프루스트(Valentin Louis Georges Eugene 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에서는 화자와 스완과 스완 부인 오데트의 딸인 질베르트의 사랑이야기가 이어진다. 대부분의 첫사랑 이야기가 그렇듯 작품에서의 사랑 역시 이별로 끝나게 된다. 화자의 구애(求愛)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질베르트. 그 과정에서 식어가는 사랑을 작품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 1915 ~ 1980)의 <사랑의 단상 :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속의 짧은 글을 따라 첫사랑에 담긴 사랑의 요소를 살펴보려 한다.


1. 마술 Magie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문화권에 속해 있던 점치는 일이나 조그만 비밀 의식, 기도 행위는 그의 삶의 일부를 이룬다.(p238) <사랑의 단상> 中


 우리의 여러 대조적인 삶과 상황에서 사랑과 관계되는 사건에 대한 최선의 태도는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은 피할 수 없는 뜻밖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합리적인 법칙이 아니라 오히려 마법의 법칙에 지배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p13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2. 욕망 : 당신의 욕망이 어디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금 금지하기만 하면 된다(금지 없이는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라면)....내가 금지로서는 현존하지만(금지 없이는 좋은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또 그 욕망이 형성되면 내가 그를 방해할지도 모르므로 멀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p200) <사랑의 단상> 中


 아마도 이런 완벽한 일치감 속에,  현실이 우리가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것에 덧붙고 겹쳐질 때, 마치 동등한 두 형상이 포개져 하나를 이루듯이, 그 현실은 우리가 꿈꾸던 것을 완전히 가리고 그 꿈과 혼동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 욕망의 모든 지점에 우리 손이 가 닿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느끼는 기쁨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오히려 우리는 손댈 수 없는 것의 매력을 간직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 상념은 과거 상태를 새로운 상태와 대조하기 위해 재구성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념이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잃어버렸으니까.(p19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3.  기다림 Attente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p64)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는 여인을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진심이 아니라면,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말 또한 진심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견딜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짧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어느 날엔가는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p33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4. 고뇌 Angoisse 이런저런 우발적인 일로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위험, 상처, 버려짐, 돌변 등에 대한 두려움으로 격해지는 것. 고뇌라는 이름으로 그가 표현하는 감정.(p53) <사랑의 단상> 中


 내게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이미 지나갔을 것이다. 그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은 이미 지나갔을 것이다. 그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며, 그러므로 그녀와 나를 다시 만나 그토록 줄어든 고통을 위로해 준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며, 이 순간에는 아직 존재하지만 그때는 이미 없어졌을 그 고통, 따라서 그 고통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일련의 타협이나 화해, 재회의 동기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다.(p28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5. 파국 Catastrophe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상황을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결정적인 막다른 골목이나 함정으로 느껴 자신이 완전한 파멸 상태에 이르렀다고 여기는 격렬한 위기(p79) <사랑의 단상> 中


 친구인 질베르트가 내게 그토록 많은 고통을 안겨 준 그날부터 새해가 오면 보내기로 결심했던 그 편지에서 나는 우리의 오랜 우정은 끝나는 해와 더불어 사라졌으며, 이제 원한과 실망도 다 잊었고, 1월 1일부터 우리가 쌓으려는 것은 새로운 우정, 그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을 견고하고도 경이로운 우정으로서, 질베르트가 이런 우정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라며, 우리 우정을 손상하는 어떤 작은 위험이라도 생길 경우에는 나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을 맹세하지만, 그녀 쪽에서도 그 즉시 제때 내게 알려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p11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6. 페이딩 Fading 사랑하는 이의 수수께끼 같은 무관심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것도, 또는 세상 사람이나 그의 적수, 다른 누구를 위해 말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가 온갖 접촉에서 물러난 것처럼 보이는 고통스런 시련.(p162) <사랑의 단상> 中


 현재 내가 하는 것뿐 아니라 그에 따른 미래의 결과까지 명철히 성찰해 본 끝에 내가 계속해서 열중했던 것은 내 마음속에서 질베르트를 사랑하던 자아를 오래도록 잔인하게 죽이는 일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더 이상 질베르트를 사랑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도 그 점을 후회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는 그녀가 나를 만나려고 시도해도 그녀가 오늘 하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헛된 일이 될 거 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p32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7. 부재 Absence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무대화하는 언어의 에피소드는, 그 부재의 이유나 기간은 어떠하든 부재를 모두 버려짐의 시련으로 변형시키려는 경향이 있다.(p30) <사랑의 단상> 中


 우리는 이런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미 사랑은 우리 마음을 떠나고 없다. 사실 사랑에는 지속적인 고통이 따르는 법이라 기쁨이 이 고통을 완화하고 잠재적인 것으로 만들며 유예하기도 하지만, 매 순간 언제라도 우리가 바랐던 것을 얻지 못하면 이 기쁨은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끔찍한 고통으로 바뀐다.(p27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8. 이 망각으로부터 나는 아주 빨리 깨어난다. 서둘러서 어떤 기억을, 혼란을 재구성해 본다. 하나의 단어가 육체로부터 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 준다. 즉 갈망하다(soupirer)란 단어가,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현존을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사랑의 부재에서의 나는 서글프게도 누렇게 메마르고 오그라든, 떨어진 이미지이다.(p33)<사랑의 단상> 中


 우리의 기억이란 상대적으로 우리가 듣는 동안 마주치는 인상들의 복잡성에 비하면 아주 미미해서, 잠을 자며 수많은 걸 생각하고는 즉시 잊어버리는 인간의 기억만큼이나, 또는 이제 막 들은 것을 조금 후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반쯤은 어린애로 돌아간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짧기 때문이다.(p18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9. 소유의 의지 Vouloir-Saisir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관계의 어려움이, 사랑하는 이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전유(專有)하려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이후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소유의 의지'를 포기하기로 결심한다.(p331) <사랑의 단상> 中


 인간은 불행해지면 도덕적인 존재가 된다.(p353)... 우리 마음이 지속적으로 다른 존재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한, 끊임없이 파괴될 위험에 처한 것은 단지 우리 행복만이 아니며, 그 행복이 사라지고 우리가 괴로워하고 그 괴로움을 잠재웠을 때, 그때 행복과 마찬가지로 우리 평온함 역시 기만적이며 덧없기 때문이다. 나는 마침내 이런 평온함을 되찾았다.(p35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10. 기호 Signes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거나, 혹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을 때면, 어떤 확실한 기호 체계도 수중에 갖지 못한다.(p305)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지 않을 때라야 우리는 그 사람의 움직임을 고정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에겐 언제나 실패한 사진만이 있다. 나는 질베르트가 내 눈앞에 자신의 모습들을 펼쳐 보였던 그 성스러운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그녀 모습이 정말로 어땠는지 생각나지 않았다.(p11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의 이야기에 대칭되는 <사랑의 단상> 용어들을 묶어 보았으나 사실 정확하게 맞물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의 사랑이야기가 진행형이 아닌 완료형이기 때문이며, 이미 이별로 끝난 질베르트와의 사랑 이야기안에 화자의 여러 감정이 녹아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화자는 이처럼 힘들게 사랑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은 잊기로 결심하고, 첫사랑 질베르트를 잊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한다. 양쪽 저울에 욕망을 달아 객관적으로 판단하려고 애쓰는 모습과 다른 사랑으로 첫사랑을 덮으려 하는 모습안에서 우리는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성격이나 기질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는 나이에 따라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 삶은 나뉘며, 또 저울에 배분되듯 양쪽 접시에 고스란히 놓인다. 한쪽 접시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욕망, 사랑하지만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자만심을 품으면 우리를 지겨워할지도 모르므로 약간은 혼자 내버려 두는 편이 보다 현명한 처신이라고 생각되어 지나치게 겸손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욕망이 놓여있다.(p27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우리는 질베르트와 전혀 관계없는 이런 상념들을 부양하고 키워야 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 감정이 약해지고 그저 하나의 추억이 되고 나면, 새로운 요소가 우리 마음에 들어와 그 감정과 싸워서 점점 더 영혼의 자리를 빼앗고 드디어는 영혼의 모든 자리를 차지한다. 난 이것이 사랑을 죽이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p35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에서. 첫사랑의 아픔에 힘들어하는 화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지나간 첫사랑의 설레임과 아픔을 동시에 전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화자가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있기에 더 생생하게 전달된다. 오래 전 그날 너무도 설레었고 많이 아팠던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PS.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작품 속에서 감각(感覺)의 기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냄새와 맛이 불러오는 기쁨과 희망의 감정은 '잃어버린 시간' 이 아닌 화자의 '현재라는 시간'에서 피어나는 시간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내가 프랑수아즈를 기다리던 입구의 눅눅하고 오래된 벽에서 서늘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질베르트를 통해 전해 들은 스완의 말들이 이제 막 내 마음속에 생기게 한 걱정들을 이내 가볍게 해 주면서 내 마음을 기쁨으로 채웠는데, 붙잡거나 소유할 수 없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그런 기쁨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내가 기댈 수 있는 단단한 기쁨, 감미롭고도 평온한 기쁨, 지속적이며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진리로 가득한 기쁨으로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p12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中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p9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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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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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베르트와의 사랑 그리고 이별. 바그너의 「로엔그린」이 흐르고, 고통은 잃어버린 시간 너머에 남겨졌으며, 사랑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주위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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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처음 경험하는 1학년 아이들을 위한 학교 생활 안내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대처 방안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잘 만들어진 책을 보며 조금은 책의 내용과 벗어난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이 책에서처럼 개인적인 문제만 있는 것일까. 혹시, 아이들이 제대로 학습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는 없는 것일까.

1학년 과정에서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1학년 국어 시간에는 ㄱ, ㄴ, ㄷ, ... 부터 시작하지만 수학시간에는 서술형 지문으로 문제를 제시하여 아이들이 빠른 속도로 문장을 읽게하는 현실. 제대로 통일된 교과 과정을 제공하지 못하는 교육부처와 학교가 아이들의 학습 의욕을 꺾고, 교육 정상화 대신 선행 학습을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이 겪는 학교 생활의 어려움은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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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1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1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2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2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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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쉬와 엔키두의 우정.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고민.

신들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에게는 필멸의 삶을 배정했고, 자신들은 불멸의 삶을 가져갔지요.(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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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4-21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는 배신자 얘기인 것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4-21 18:57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을 듣고 보니, 엔키두에게서 배신자의 원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류 최초의 배신자 이야기도 될 것 같습니다^^:)
 
예수 평전 - ‘진리’라 불리던 사악한 사제가 예수였을까?
조철수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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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엣세네 공동체 사람들에게서 '진리'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을 사제가 교만하게 되어 공동체를 떠났다는 말이다. 마음이 교만한 것은 공동체의 가르침에 준하지 않고 자신의 성경해석을 주장한다는 뜻이다.(p127)... '진리'라는 그 사악한 사제는 엣세네 공동체의 재판이 아니라 그들의 사악한 재판에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그가 선동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선동자는 죽어가면서 공포에 질려 있었으며 그의 살에 상처를 받아 시체가 되었다는 해석이다.(p128)  <예수평전> 中


 <예수 평전>의 저자 조철수의 관점은 새롭다. 일반적으로 인간 예수의 생애는 바리사이(Pharisees) 파와 많은 갈등을 일으킨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는 사건 후 사두가이(Sadducees)파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어, 결국 로마인들에게 넘겨진 후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예수 평전>에서는 예수와 갈등을 일으키는 주된 집단은 에세네 파(Essenoi)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아닌, 에세네 파의 구원자(Messias)인 예수. <예수 평전>에서 그려지는 예수의 모습이다. 


 '진리'라고 불리는 사악한 사제가 속임으로 공동체를 설립한다고 해석하는 엣세네 해석자의 관점을 예수의 전기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엣세네의 성경해석자들은 예수가 사악한 사제며 거짓 메시아임을 성경에서 입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하바국서에서 그 실마리를 잡아 예수가 유다의 입맞춤으로 붙잡히게 된 과정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을 때까지를 해석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p136) <예수평전> 中


 <예수 평전>은 에세네 파와 '진리'라는 이름의 사제가 만든 에세네 공동체의 분열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예수가 '진리'를 강조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가 에세네 파 출신의 사제임을 주장하면서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탈무드, 미드라쉬와 에세네 파의 전승 기록을 통해 해석한다.



[그림] 에세네 생명의 나무(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139682025918538049/)


 예수 당시의 이야기로 생각해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가 자신을 '에메트(진리)'라고 부르는 점이다. 복음서에 전해진 한 이야기에서 이런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여러분이 내 말에 서 있으면 여러분은 진리(에메트)안에 내 제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여러분을 (속박에서) 풀어줄 것입니다.(요한 8 : 31 ~ 32) <예수평전> 中


 예수는 '진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고 바리새와 사두개뿐 아니라 엣세네와 성경해석에 있어 서로 다른 견해로 자주 논쟁을 했다. 엣세네의 성경해석자는 하바국서를 해석하며 '진리'라고 불리는 사제를 주목하고 그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엣세네 공동체는 자신들을 유다 지파의 자손들이라고 불렀다. 엣세네 사람들은 토라를 공부하는 노고와 엣세네 창시자인 '의로운 교사'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구원 받을 것이라는 해석이다.(p126) <예수평전> 中


 저자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이 사실은 '토라에 대한 지식'의 은유적 표현임을 밝힌다. 본문에서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율법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랍비의 모습이다. 다만, 폐쇄적인 에세네 파의 해석을 비판하고 개방성을 강조하는 차이만 있을뿐, 책속의 예수는 유명한 랍비 아키바(Akiva, AD 50 ~ AD135)의 수준으로 그려졌다.


 밀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식을 뜻한다. 초기 유대교 현자들은 이러한 지식은 토라 공부를 함으로써 습득할 수 있다고 말했다.(p633)...  밀 빵을 먹어보지도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학교에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학교에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은 토라에 무뢰한이 될 수밖에 없다.(p634) <예수평전> 中


 '생명의 물'은 토라의 가르침이다. 사해문헌에 나오는 '생명수의 우물'과 비슷한 표현이다. 초기 랍비 유대교의 문헌에도 생명의 물은 토라(하느님의 가르침)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낱말로 사용된다. 예수가 말하는 생명의 물도 토라를 뜻하지만 그 토라는 바리새나 엣세네처럼 모세오경뿐 아니라 모세오경에 대한 성경해석을 포함한다.(p267)... 초기 유대교 문헌에서 빵은 종종 토라를 은유하는 낱말로 사용된다. 사람들에게 빵을 먹였다는 이야기는 토라를 가르쳤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p281) <예수평전> 中


 나아가, 책은 예수가 강조한 많은 내용이 남을 위하는 사랑이 아닌, 고도로 계산된 내용임을 당대의 문헌을 통해 논증한다. 마치, 노자(老子)의 '무위(無爲)'가 목적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예수의 가르침이 사실은 당대 시대에서 볼 때 가장 현명한 처신이었음을 저자는 밝힌다. 


 예수가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을 주라고 말하는 배경을 '솔로몬의 재판'과 비교해서 읽어볼 수 있다. 속옷을 훔쳐갔다고 고소했지만 그것을 입증할 증거나 증인을 찾지 못한 경우에 재판관은 그 속옷을 반으로 잘라 나누어 가지라고 판결을 낸다면 그 속옷은 속옷의 가치가 없어진다...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자기 겉옷을 준다고 한다면 재판관은 누가 양심적이며 그 속옷의 주인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p363) <예수평전> 中


 본문을 읽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평전(評傳)'이라는 말처럼 여기에 묘사된 예수의 모습은 인간 예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신약성서 내용만을 근거로 예수의 삶을 복원해 나간다. 당대 다른 역사적 기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전승된 복음서(gospel)를 탈무드와 미드라쉬 해석을 통해 재조명한다는 것이 인간 에수의 삶을 바라보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책에서 밝힌 것은 인간 예수의 모습이 아닌  복음서 사가들의 관점과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출발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영지주의(gnosis)로 향하게 된다. 출발이 '예수가 에세네 파 출신의 사제였다'는 가정에서 출발되기 때문에, 결국 예수와 에세네 파의 대립은 '빛'과 '어둠'의 대립으로 치환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예수 사후 로마 제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던 예수 운동(또는 초기 기독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단순히 교리 해석상의 차이가 아닌, 예수 가르침 안에 무엇이 당대인들에게 다가왔던 것일까?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아쉽게도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어려웠다.


 엣세네 문헌에서 '빛과 어둠'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단락에서 빛의 자식들이 어둠을 물리치는 힘은 '하느님의 진리'에 있다... 요한복음서나 고린도후서, 요한계시록 등에서 읽어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엣세네의 언어에 익숙한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진리'라고 부르는 점은 '진리'의 핵심이 어둠을 물리치는 힘/권능에 있다는 엣세네의 규례와 비교해 볼 수 있다.(p739) <예수평전> 中


 이와 같이 이 책은 인간 예수의 삶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는 책이지만, 인간 예수와 예수 공동체의 사회적 영향에 대해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 한계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또, <신약성서> 중 복음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이에 대한 해석을 하는 모습에서는 '신앙고백'이라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영지주의 복음서와 같은 결론에 이른 느낌을 받게되어 조금은 혼란스럽다. 위와 같은 부분은 아쉽지만, 독창적인 저자의 시도와 당대 사회의 모습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나름의 소득이라 생각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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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9-04-2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수는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못알고 있는 예알못들이 문제라 봅니다. 퀴어축제때 우리에게 무차별 폭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그들 말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1 10:57   좋아요 1 | URL
Nam Gi Kim님의 말씀을 들으니, ‘예수는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사랑하고 존경할 수 없다‘던 마하트마 간디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 역시 기독교(가톨릭) 신자인만큼 다른 이들에 대한 배타적인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부분에서 정말 초기 교회가 지향했던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더 고민해야겠지요. 마침 오늘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부활절‘입니다. 성탄절보다 더 의미가 있는 오늘, 부활의 의미에 대해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9-04-21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1 1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9-04-21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 님의 이 글을 읽어보니 제가 요즘 읽고 있는 『로마제국 쇠망사』 생각이 납니다.

여느 역사책과는 다르게, 『로마제국 쇠망사』에는 ‘초기 기독교의 발전 과정‘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오랜 역사를 지닌 유대인 민족종교와 신흥 그리스도교 사이에 있었던 ‘교리 갈등‘ 때문에 파생된 다양한 분파들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다루고 있더군요. 나사렛파, 에비온파, 그노시스파,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몬타누스파, 노바티아누스파, 에세네파 등등 문외한인 저로서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종파들도 참 많더군요.

이뿐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교부, 호교가, 사제들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락탄티우스, 유스티누스 등등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서 굉장히 자주 언급하는데, 제가 ‘로마의 역사‘를 읽고 있는지 ‘교회사‘를 읽고 있는지 착각이 들 정도로 상세히 다루고 있어서 놀랍더군요. 관심이 있으시면 그 부분(제1권 15장 및 16장, 541쪽 ∼691쪽)을 한번 참고하셔도 유익하리라 믿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1 20:1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oren님. <로마제국 쇠망사>를 축약본으로만 접했는데, oren님 말씀을 듣고 보니 완역본 정주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를 탄압하는 주체에서 제국의 종교로 바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쇠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여겨집니다. 로마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복수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전체를 포용하는 세계 종교로서 기독교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역사학자인 기번의 답변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