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치명적인 파괴를 가져왔고, 전후 분단모순을 극대화했다. 한국전쟁은 1953727일 휴전협정으로 끝이 났다. 말 그대로 휴전이란, 전쟁을 잠깐 쉬는 것으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종결은 1945년부터 시작된 분단 모순을 극대화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1948년 정부수립 이래로부터 반복적으로 북진통일을 주장해오던 이승만 정권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그리고 휴전회담 이후 자유당 독재정치를 공고히 하면서도 정복주의적 통일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이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과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도 이승만 정권과 다르지 않게 북을 적대시하는 반공주의적 정책을 따라왔다. 따라서 반공주의라는 시대사적인 트라우마 및 부작용이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학자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정부가 제시한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다면 목숨을 걸어야 하거나,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한 각오를 해야 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으로 민주화를 이룩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30년의 지적·사상적 암흑기는 민중에게 한국전쟁을 국가가 제시한 시각에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미약하게나마 부여했다. 특히나 1980년대 극심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안티테제로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은 실제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제를 두고 역사를 바라보기도 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War)’은 운동권에게 있어 한국전쟁을 정부가 제시한 관점과는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1987년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에도 친일세력으로부터 시작된 반공주의라는 망령은 민중 대다수를 지배하고 있었다. 1990년 전 빨치산 출신인 이태라는 인물이 자신의 빨치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남부군이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지만, 보수세력들의 극심한 저항과 항의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인식되어 왔고, 대중의 주류적 흐름 또한 대한민국 피해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국사회에서 우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주제중 하나고, 다른 한편에선 역사를 인식하는 관점에 차질이 생기는데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주제다. 그러나 한국전쟁 또한 얼마든지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역사학자 EH카의 주장대로 역사란 현재와 과거 끝없는 대화이기 때문에 기존 주류사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전쟁이 어떻게 해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재로 해석할 수 있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은 국가에 따라 다양하다. 우선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한 북한은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으로 인식하는 의미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은 북의 대중매체나 자료들에서 자주 사용된다. 그에 비해 오히려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경우는 “1950625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전쟁이라 하여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대체로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물론 현재는 한국전쟁이라는 표현도 쓰긴 하지만,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반면에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에 개입을 했던 미국과 중국 또한 명칭이 다르다. 195010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군사적 개입을 감행했던 중국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명칭은 지금도 중국에서 한국전쟁을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한국전쟁이 지금까지 미국이 치른 전쟁에 비해 잊혀졌다 하여 소위 잊혀진 전쟁(Forgotton War)’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의미에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개입한 미국은 이 전쟁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따서 부르는 의미가 존재한다. 이런 미국의 인식은 201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워싱턴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에서 연설을 했던 버락 오바마의 한국전쟁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승리라는 발언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2016년 임기 마지막에 베트남에 가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오바마의 발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바마의 발언이 보여주듯이 이런 발언은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 남한은 세계 경제력 10위의 강대국에 올랐지만,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하여 최빈국이자 최악의 독재국가로 전락했다는 생각에서 발현됐다. 이와같은 관점이 1990년대 미국을 향해 대화와 수교를 요구했던 김일성의 시도를 듣지 않게 만들었고, 1994년 한반도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으며, 20029.11 테러라는 충격과 공포를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부시의 소위 악의 축(Axis of Evil)’발언과 북에 대한 경제재제로 이어졌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우월주의에 심취한 사상과 생각이 점철된 폭력성을 간과한다면, 한반도의 위기는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런 반공주의적 관점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런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바로 북한 핵무장의 맥락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에서 인식하는 한국전쟁의 시각은 대체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분명 내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과 서방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이 해석했다. 후버 연구소 출신의 영국인 우파 학자 로버트 서비스는 자신의 저서 스탈린 강철권력에서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칫하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책임은 많은 부분 스탈린에게 있었다. 그가 만일 김일성에게 재정 지원을 하지 않고 무장도 시키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그렇게 치열한 내전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스탈린 강철권력 p.937~938)라고 할 정도다. 로버트서비스가 자신의 책에다 쓴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 또한 한국전쟁을 그렇게 본다. 미국학자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은 “1950년 스탈린과 김일성이 시작했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625일 버튼을 눌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반공주의 학자 애덤 울람은 1990년대까지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라고 불렀을 정도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미국과 서방에서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어 왔던 것이다.

3. 한국전쟁의 기원

 

위에 상술한 것처럼 미국과 서방 그리고 한국이 인식한 한국전쟁은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1950625일 북한군이 대대적으로 진격한 시점부터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관점은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은 것과 미국과 소련의 38선 분단을 예시로 들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의 한반도 상황이나 그 이전의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놓여있던 상황은 항상 생략되면서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되기 마련이다.

 

1980년대 한국 운동권에 큰 영향을 준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전면적인 전쟁이 시작된 날인 1950625일부터 보지 않고, 일제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한국전쟁이 이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얘기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선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이력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친일파들에 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1912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기부터 소규모 독립군대를 조직해 중국 공산당과 더불어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1933년 둥닝 전투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이 도시에 전에 없이 대규모로 공세를 퍼부었고, 김일성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 스중헝을 구하며 그 일대에서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피바람이 불었던 민생단 사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김일성은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기 1달 전인 19376월 김일성 부대는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 치하의 보천보 지역을 습격하여 유격전을 벌이다 후퇴했고, 이후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 수십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김일성의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착수했고, 김일성과 그의 부대들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섰다. 그러던 1940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부대는 홍기하 지역에서 대략 100~120명 이상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고,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번지던 그해 말 쯤에 소련으로 넘어가 이후 소련군 제88여단에 소속된다. 그러나 남아있던 잔존 항일 유격대는 1942년까지 작전을 전개했고, 1945년 소련 연해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동료들은 소련의 푸가초프 함을 타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기반을 다졌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과 그의 만주 빨치산 부대 동지들의 삶이었고, 그들이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는데, 이러한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인 출신들로 만든 부대가 활동했었다. 이들이 바로 간도 특설대였다. 당시 간도특설대에는 대한민국에서 소위 명장 내지는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의 지휘관 백선엽도 있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들 중에는 일본이 김일성을 추적하여 죽이기 위해 이용했던 군 장교 김석원도 있었다. 당시 그의 일본 이름은 가네야마 샤쿠겐으로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본군 대좌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독립군을 토벌하러 나섰던 이들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군의 핵심이 되었고, 대한민국 군부를 장악한 이들은 한국전쟁에서도 독립운동을 했던 김일성과 항일연군 출신의 장성들이 지휘하는 군대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말하는 한국전쟁의 가려진 진실이었다. 국내에서 주장된 김일성 가짜설은 김일성이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처럼 숨어 지내던 시절이 있어서 지어진 음모론일 뿐 이를 증명할 구체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으며, 심지어 박정희 정권 시기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마저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김일성이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맞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또한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이 접수하게 된 한반도 이남은 민중의 불만이 들끓었다. 1944년부터 일제의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해방 후 자신의 조직이었던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하여 새나라 건설을 위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미군정은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윈회와 그가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과거 조선 총독부의 행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친일 세력들을 이용했다. 이는 19458월 대일선전포고 이래로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며 제국주의 군대를 무찔렀던 소련군의 군정 통치하고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거기다 미군정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를 도왔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은 친일세력인 한민당과 결탁하여 사회의 더 나은 사회와 임금인상 그리고 친일파 청산을 바라던 민중을 상대로 빨갱이 척결에 나섰다. 심지어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도 이승만 세력의 공격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남한 사회에서 전국적인 노동자 투쟁을 벌이던 세력들은 결국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진압당했다. 194843일에 시작된 제주 4.3 봉기는 미군정과 우익세력의 잔인함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제주4.3 봉기와 이에 반대하여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일으켰던 여순 민중항쟁은 미군정과 우익 세력들에 의해 아주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민간인 학살을 야기했으며, 이 봉기를 진압한 이들은 채병덕과 같은 친일세력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라는 게 1930년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해방 이후 민중들의 투쟁과 미군정의 폭압 통치로 인해 민중들이 이들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1950년 북한에서 일으켰다고 알려진 한국전쟁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과 이들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이승만 친일 친미 제국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4. 민간인 학살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에는 미국과 한국정부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도 있다. 위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며 예시로 든 제주 4.3 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은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초래했다. 4.3 항쟁에서 학살 당한 민간인은 최소 3만 명에서 45000명에 해당되는데, 이들 중 최소 80% 이상이 진압을 감행했던 친일 출신의 우익 경찰들과 이북의 친일 지주 출신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의 저지른 짓이었다. 이들이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 노인 아이었고, 1살 내지는 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매우 많았다.

 

제주4.3 항쟁의 진압을 반대하여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여순민중항쟁 또한 최소 수천 명에서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여수와 순천에서 해방구를 형성하여 지주와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인민재판을 했던 좌익 성향의 게릴라들과는 달리, 봉기를 진압하러 온 토벌군인들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여순민중항쟁에서 진압군으로 나섰던 인물 중에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파푸아뉴기니와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투를 치렀던 김종원이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그는 체포한 민간인들을 모아놓고 일본도로 민간인들의 목을 배는 것을 즐겼으며, 이런 일본군 출신의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는 진압군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학살당한 이들 대부분은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이었다.

 

이런 잔인한 민간인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도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특히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국민보도연맹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학살의 대명사가 됐다. 전쟁 초기 인민군이 신속하게 진격을 하자, 후퇴하던 한국군은 보도연맹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보도연맹원들 대다수가 그저 쌀이나 보리 조금 더 준다는 이유로 가입하거나, 가입하면 어떤 경제적인 혜택을 기대하고 어려운 삶을 자력으로 극복하고자 가입했던 인물들이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엄연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승인으로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 명에서 50만 명이 학살당했고, 많게는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민간인 학살은 1950915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진격하면서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서울을 수복하고 난 이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고, 지리산에 고립된 빨치산들을 토벌하면서도 일어났다. 1951년에 일어났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보면 이 또한 학살당한 이들 대다수가 여성, 노인, 아이라는 점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전쟁 초기 북한의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저지른 학살은 인민재판과 같은 형식이었고, 주로 지주나 자본가 친일파들 그리고 남한 군경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쉽게 말해 인민군은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도한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한국전쟁 시기 좌익과 우익의 학살을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인민군의 학살은 전체 사례에서 1/6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에서 초기에 신속히 군사개입을 감행한 미국도 민간인 학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68316일 베트남의 미라이라는 마을에선 30명의 미군이 504명의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는데, 1950726일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 마을에선 미군 제1 기병사단에 의해 3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또한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우익 군경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을 전혀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좌익 소탕한다는 것을 옹호하며 이를 전적으로 도왔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전쟁범죄는 역시 무차별 폭격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초기에 개입했을 때부터 제공권을 장악했는데, 폭격 또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드레스덴이나 도쿄 폭격 같이 대규모의 융단 폭격은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석기시대라는 단어를 쓰기 좋아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폭격 방식으로 인하여 한국전쟁에선 무수히 많은 남북한 민간인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의 난민이 생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 전역에서 미군이 사용한 폭탄의 양은 50만 톤이고, 그 중 16~20만 톤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데 사용됐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3년 동안 전쟁에서 사용한 폭탄의 양은 635000톤이었다. 이것은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의 양까지 합치면 총 665000톤이 된다.

 

미군의 폭격은 비단 북한만을 대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북한의 피해가 가장 커서 수도 평양은 쑥대밭이 되었고, 원산은 달이 표면으로 변했다. 심지어 미군의 B-29 폭격기는 북한 뿐만 아니라,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에게도 행해졌다. 중국의 단동이나 심양같은 곳도 미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또한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남한에서도 일어났다. 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때, 미군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땅 전체를 대상으로 폭격을 감행했다. 1951년 한국전쟁이 다시 38선 부근에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도 미군은 남한에서 폭격임무를 수행했다. 이 폭격 임무는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미군은 북한과 남한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세균전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선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리지웨이 장군의 프랑스 입국을 거부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민간인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웠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5. 결론: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명칭, 인식하는 관점, 전쟁의 기원, 민간인 학살까지 살펴보았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한국 현대사적 흐름을 보았을 때,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사실 남한 정부가 정부 수립 초기에 임정 독립운동가들과 남로당 출신이었다가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으로 전향한 조봉암을 초기 내각에 구성하긴 했지만, 사회에서의 큰 권력은 미군정과 결탁하여 살아남은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문화계와 군, 대한민국 행정을 장악했다. 이승만 본인이 독립운동가였을지는 몰라도(이것도 매우 논란이 많지만), 그의 정권은 친일파 정권이나 다름없었다.

 

해방 이후 여론조사에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사실에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가 반민중적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던 이들이 일반 양민에서 민간인이 되가는 과정은 베트남 전쟁에서 일반적인 민간인이 베트콩에 가입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이나 수색과 섬멸 작전으로 가족은 잃은 이들이 베트콩에 가입했듯이, 한국전쟁 시기 양민에서 빨치산에서 활동하게 된 이들 대다수가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반민중세력에게 가족을 잃거나 극심한 탄압을 받아, 복수심을 가지고 혁명군에 가입을 했던 이들이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의 탄압을 받으면서 펜으로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은 그 시기 전환시대의 논리를 집필하여 미국의 침략전쟁이던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1776년 건국 이래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인 베트남 전쟁은 현재 미국에서도 정통성을 북베트남과 호치민 정권에게 대도록 주고 있고, 대체로 전쟁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플 메탈 자켓, 74일생 등의 영화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

 

주제를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전쟁으로 돌리면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점이 한몫 하지만, 미국 언론에서 얘기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상당히 대한민국 우익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크게 다를 거 없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사실에서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과 서방세계에 민족해방전쟁으로 기억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북한의 지도부는 항일 빨치산에 두고 있었다. 굳이 당시 북한정권의 균형을 이루었던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과 연안파 그리고 소련파까지 합치면, 만주항일 빨치산과, 일제시기 경성 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국내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 중국 공산당과 연합했던 독립운동 세력 그리고 소련의 붉은 군대의 일원으로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던 반파시즘 세력까지, 항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일본에서 신속히 투입한 스미스 부대가 맞닥뜨린 인민군 부대는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받은 조선족 사단이었다. 이 조선족 사단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큰 공로를 세웠던 혁명 군대였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브루스 커밍스의 시각이 틀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수구세력들에 의해 미화되고, 반공주의적으로 해석되는 주제다. 그래서 이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민감하고 심한 반감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브루스 커밍스를 포함하여 한국전쟁을 다르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관점 또한 근거가 매우 타당하고, 기존의 반공주의적 해석을 얼마든지 뒤집고 남을 정도로 실증주의적 사관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은 분명히 반민중적 정권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었다. 현재 남과 북의 상황이 어떻든 역사는 정직한 것이다. 약산 김원봉 서훈이 논란이 되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 공개적으로 말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겠지만, 나중에 시대가 변했을 때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따라서 역사의 진실과 정직함을 추구한다면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이 부정당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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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뉴라이트 세력을 포함한 친미 극우세력들이 찬양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인물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 3명을 뽑자면, 3명은 각각 대한민국과 미국 그리고 영국출신이다. 한명은 건국의 아버지로 미화시키는 최악의 학살자 이승만이고, 다른 한명은 1980년대 미국 사회를 반공주의화 시킨 영화배우 출신의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며, 또 다른 한명은 조선일보를 포함한 어용매체들이 영국병을 고친 위대한 여인으로 평가하는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2013년 당시 영국 총리었던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은 마가렛 대처가 그냥 나라를 이끌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나라를 구원했다라고 하며 찬양했다. 당시 박근혜 정권에 놓여있던 한국의 극우언론들 또한 대처를 찬양해대기 시작했다. 특히나 박근혜를 숭배하던 한국의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영국병을 치유했다”, “영국을 구했다더나아가 노조를 파괴하고 운동을 탄압한 대처의 위대한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심지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근혜는 예전부터 한국의 대처가 되겠다라고 자처해 왔었다. 그러나 영국의 극우보수주의자들과 한국의 극우보수주의자들이 찬양하는 인물인 마가렛 대처는 참으로 사악하고도 잔인한 통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다.

 

대처는 집권 기간 동안 영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했다. 1930년대 경제대공황으로 매장되었던 자유시장주의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했고, 임금을 낮추고, 노동 강도를 높이고, 공공지출을 줄이고, 노동조합을 탄압했다. 1980년대 영국에서 광원들의 파업이 일어났을 때, 이들을 고립시켜 이들의 투쟁을 패배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광산 마을 주민들은 1년 내내 고립된 싸움을 계속하다 패배했다. 대처는 아일랜드에서 더러운 전쟁을 계속했다. 아일랜드공화국군 수감자들이 양심수 지위 인정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 양보는 전혀하지 않고 그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대처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더불어 1980년대 신자유주의을 개척했다. 대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파업을 강력한 물리적 힘과 고립을 통해 탄압하려 했고, 소수의 부유층들을 위한 정책을 선호했으며, 그 혜택은 결국 극소수의 상류층들에게만 돌아갔다.

 

또한 대처는 전쟁이라면 물불을 안가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1982년 식민지를 무력으로 되찾겠다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가지고, 포클랜드 전쟁(Falkland Islands War)을 일으켜 영국군 수백명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인 수백 수천명을 죽게 만들었다. 또한 대처는 199011월 자신이 총리자리에서 쫓겨나게 됐을 때에도, 미국이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걸프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이처럼 대처는 로널드 레이건처럼 침략전쟁이 필요하다면 마음껏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대처가 추구한 신자유주의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경제불황을 동반했다. 대처는 1989~1990년 인두세를 도입하여 백만장자와 빈민에게 세금을 똑같이 부과하려 했고, 신자유주의 시대 최초의 금융 거품 호황을 부추겼으며, 그게 결국 경제침체로 이어졌다. 대처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고, 이를 양극화시켰다.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는 제국주의적인 침략전쟁을 자행했고, 미국 레이건 정부와 더불어 반공주의를 강화했다. 또한 걸프전쟁에서도 아주 큰 욕심을 부렸다. 한국의 극우세력들이 미화하는 대처는 제국주의자였다. 2013년 대처가 사망했을 때,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이를 기뻐했다. 앞으로도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마가렛 대처는 리더십이 뛰어난 여인이 아닌 살인자이자 제국주의자로 기리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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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패스트푸드 회사 맥도날드에서 ‘1955 버거를 텔레비전과 유튜브 광고를 통해 홍보하기 시작했다. 광고를 보면 백인 남성이 1950년대 스타일의 클래식 카를 타고 가다가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에 들려 1955년 버거를 주문한다. 남성이 주문을 하자 갑자기 정전현상이 일어나더니 강력한 전파에 맞아 2019년 대한민국 서울로 순간 이동하여 1955년 버거를 먹게 된다. 버거를 먹은 남성은 와우! 미래의 1955년 버거네라는 대사를 치며 광고는 햄버거 신메뉴를 홍보하며 끝난다.

 

참으로 흥미로운 광고였다. 햄버거 이름에 1955년이라는 연도가 붙은 것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1955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맥도날드의 역사하고 크게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지난학기 미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맥도날드가 홍보한 1955 버거에 1955라는 연도가 붙는지 생각해보니 참으로 흥미로운 결론을 도출해볼 수 있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미국의 현대사를 알 필요가 있다. 우선 1955년은 미국이 가장 큰 호황을 누리던 1950년대다. 1950년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 대호황을 누렸고, 1920년대 미국을 능가하는 풍요와 번영을 누렸다. 영화 플레전트 빌(Pleasantville)’을 보면 당시의 풍요로움과 번영을 잘 알 수 있다.

 

1950년대 미국의 풍요로움은 당시의 중산층 계급에서 나타났다. 미국의 중산층들은 넓은 마당을 가진 주택에서 살며 자동차를 최소 2~3대 이상이나 보유할 수 있었고,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마음껏 즐겼으며,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음식인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음료수 콜라를 즐겼다. 또한 텔레비전의 보급도 늘어 1957년에는 대략 4000만 대의 텔레비전이 미국인들에게 보급되었고, 그러한 풍요로움은 텔레비전을 통해 홍보됐다. 당시 미국 사람들이 즐겨먹던 햄버거는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적 풍요로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가 미국 부의 상징처럼 비쳐졌고, 특히나 한국전쟁 이후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이나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게는 이상적인 미국으로 비쳐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5버거는 과거 미국이 풍요로웠던 시기를 단편적으로 나마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 만든 맥도날드 광고에선 미국 중산층들이 타는 클래식 자동차를 탄 백인 남성이 햄버거를 주문하는 장면이 나왔고, 이를 통해 미국이 번영했을 시기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나마 보여줬다. 어떻게 보면 맥도날드의 광고는 그 시기의 풍요로움이 다시 한 번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950년대가 미국 보수층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사회로 비춰지는 시기이기에 이런 유추방법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한다. 햄버거를 통해 시대적인 의미를 생각해보니 참으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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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페친 여러분, 여러분이 보기에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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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5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글의 제목을 처음 본 순간 놀랄지도 모른다. 사회 개혁이냐 아니면 혁명이냐?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개혁에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또는 사회민주주의는 사회혁명, 즉 자신이 최종 목적으로 설정한 현존하는 질서의 전복을 사회개혁에 대립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사회 개혁을 위한, 또 기존의 기반 위에서 노동하는 대중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그리고 민주적 제도를 위한 일상적인 실천 투쟁은 사회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을 지도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회민주주의를 위하여 사회 개혁과 사회혁명 사이에는 분리될 수 없는 연관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은 수단이며, 사회혁명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두 계기 간의 대립은 베른슈타인의 이론에서 처음 나타난다. 그는 1896/97년에 <새로운 시대>에 발표한 논문 <사회주의의 여러 문제 Probleme des Sozialismus>에서, 그리고 특히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 Die Voraussetzungen des Sozialismus und die Aufgaben der Sozialdemokratie>라는 책에서 이러한 대립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전체 이론은 실천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의 최종 목표인 사회변혁을 포기하고, 반대로 사회 개혁을 계급투쟁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만들라는 충고로 귀결될 뿐이다. “최종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나에게는 항상 무이며, 운동이 전부이다라는 베른슈타인의 말은 가장 적절하고 날카롭게 그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는 유일한 결정적 요소이다. 즉 그것은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및 부르주아 급진주의와 구별하고, 또 전체 노동운동이 자본주의 질서를 교정하는 한가로운 수선 작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질서에 반대하여 이것을 지양하는 계급투쟁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유일한 결정적 요소이다. 따라서 베른슈타인이 제기하는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의 문제는 사회민주주의로서는 곧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다. 베른슈타인 및 그의 추종자들과 벌이는 논쟁에서 [이에 대해 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결정해야만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저러한 투쟁 방식이나 전술 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전체 실존에 관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의 이론을 피상적으로 고찰할 경우, 이러한 이야기는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베를슈타인은 가는 곳마다 사회민주주의와 그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 스스로 여러 차례에 걸쳐 거듭 분명하게 자신은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를 단지 다른 형태로 추구하고 있을 뿐이라고 되풀이하지 않는가? 또 현재 사회민주당의 실천을 거의 완전히 인정하고 있다고 확고하게 강조하지 않는가? 물론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이론과 정책의 발전에서 새로운 노선은 비록 내적인 핵심에 있어서 옛것과 완전히 반대될지라도, 옛것에 의지하여 만들어지고, 우선 기존의 형식에 적응하며, 기존의 언어로 말하는 법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로소 새로운 핵심은 과거의 껍데기를 뚫고 나오며, 새로운 노선은 자신의 형식과 언어를 발견한다.

 

과학적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 처음부터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본질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또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명백하고 철저하게 부인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금세기 인간 정신의 가장 거대한 산물인 마르크스 이론에 전쟁을 선포하려는 사람은 분명히 마르크스 이론에 무의식적으로 경의를 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바로 마르크스 이론의 추종자임을 선언하고, 마르크스 이론 안에서 이 이론을 극복하기 위한 발판을 추구하며, 이러한 투쟁이 마르크스 이론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베른슈타인의 이론에 숨겨진 핵심을 밝혀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 당의 광범위한 산업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위해 긴급하게 필요한 작업이다.

 

이론적 논쟁이 결국 학자들의 일이라는 주장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가장 저열한 모욕이며 악의에 찬 비방이다. 이미라살(Ferdinand Lassalle)이 말했듯이. 학문과 노동자라는 사회의 대립적 극단이 하나로 통합될 때 비로소 두 가지는 모든 문화적 장애를 자신의 무쇠 팔로 질식시켜버릴 것이다. 현대 노동운동의 전체 힘은 이론적 인식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노동자에게 [이 경우] 이중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운동에서 노동자와 이들의 영향력이기 때문이다. 즉 시장으로 운반되는 것은 바로 노동자 자신의 가죽이기 때문이다. 베른슈타인이 공식화한 당내의 기회주의 조류는 당에 침입한 소부르주아 요소에게 지배권을 주고 소부르주아 정신으로 당의 정책과 목표를 변형시키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일 뿐이다. 사회 개혁과 혁명의 문제, 최종 목표와 운동의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노동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이냐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냐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기회주의와 벌리은 이론적 논쟁을 가장 생생하고 철저하게 파악하는 것이 당내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관심사다. 이론적 인식이 단지 당에 있는 소수 학자들의 특권으로 머물러 있는 한, 당내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항상 길을 잘못 들 위험을 안고 있다. 다수의 노동자 대중 스스로 과학적 사회주의의 날카롭고 확실한 무기를 손에 넣을 때 비로소 모든 소부르주아 경향과 기회주의적 흐름은 사라지고 잊혀질 것이다. 그때 운동은 더 확실하고 굳건한 지반 위에 서게 된다.

 

다수의 대중이 그것을 실행할 것이다

 

1899418일 베를린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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