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마오쩌둥 1~2 - 전2권 문제적 인간 13
필립 쇼트 지음, 양현수 옮김 / 교양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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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토를 자랑하는 나라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다. 14억 인구를 자랑하는 나라 중국은 현재 중국 공산당이 다스리는 정치체제다. 중국 공산당이 14억 인구 전부를 다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다수 중국인민들은 그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편이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놀러 가면 관광지로 꼭 들리게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천안문이다. 천안문에는 한 인물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 인물이 바로 현대 중국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은 다방면에서 평가해볼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선 비판의 대상의 되기도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중국은 마오쩌둥 사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이 공7 3으로 평가 내린 것처럼, 부정적인 평가보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베이징 천안문 광장 쪽에는 아직도 마오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그의 묘가 있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그를 참배하기 위해 먼 곳에서부터 그곳을 방문한다. 또한 현재 중국의 지폐는 1위안부터 100위안까지 마오쩌둥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그 외에도 마오쩌둥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높이 평가하는 모습들이 중국 곳곳에 드러나 있다.

 

반면 서방세계나 대한민국에서 내리는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중국이나 중국인들이 내리는 평가하고는 상당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한국에서 기억되는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공식적으로 한국의 적대국인 침략자 북한을 도운 공산주의 두목정도로 보는 평가가 많은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서방에서 내리는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내리는 부정적인 평가와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그래도 스탈린과는 달리 마오쩌둥은 서방학계에서 혁명가적인 입장은 제법 인정받는 편이다.

 

마오쩌둥에 대해 평가할 때,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들은 학계에서 상당히 많은 편이지만, 대표적으로 두 가지 사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1950년대 소련과의 갈등 속에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단행했던 이른바 대약진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 중반부터 대략 2~3년 동안 강력하기 전개되었던 문화대혁명이다. 아무래도 이 두 가지 사례가 보편적인 측면에서 마오쩌둥이 강하게 비판받는 이유일 것이다. 대약진 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대기근 사태는 참으로 끔찍했고, 최소 2,000만 명 이상의 아사자가 속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공산당이나 마오쩌둥이 기근을 고의적으로 이용하거나 일으키고 민중을 학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저지른 실책 또한 명백했다. 1960년대의 문화 대혁명은 최소 100만에서 150만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대부분 경우 공개처형에 의한 것이 아닌 자살이었다. 물론 마오쩌둥이나 중국 공산당이 사살을 명령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분명히 마오쩌둥은 과오가 있었다. 1950년대의 대약진 운동의 경우 고의적인 학살은 아니었지만, 문화 대혁명의 경우 필요한 측면이 있었을지라도 많은 실책과 과오들 특히 마오쩌둥이 개인적인 이기심에서 벌어진 부분들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홍위병들에게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심지어 중국의 동맹국인 북한의 김일성도 홍위병에게 반동으로 비판받는 아이러니가 벌어질 정도였다. 그런 한계점이나 과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마오쩌둥을 잊지 않고, 그를 전사회적인 영역에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의 근현대사와 밀접해 있다.

 

한국 사람들이 깊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중국의 근현대사는 말 그대로 외세의 침탈과 피로 물들은 역사다. 1842년의 아편전쟁부터 시작된 외세의 침탈과 서구 열강의 지배 및 착취는 거대한 나라였던 중국의 힘을 약화시켰다. 서구 열강은 20세기 초까지 중국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중국 대륙에서 일으킨 전쟁 또한 그런 맥락에서 전개된 침략이었다. 즉 그렇게 뜯기던 중국을 하나로 뭉쳐 통일시키고, 중국을 더 이상 서구 열강에게 뜯기지 않는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따라서 중국 사람들이 이 위대한 조타수(중국 사람들의 표현을 빌림)’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래로 중국은 더 이상 서구열강에게 침탈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말이다. 오히려 중국은 서구 열강이 대등한 위치에서 판단하는 자리까지 올라갔다. 대표적으로 중소 국경분쟁 당시 중국을 들 수 있다. 1969년 진바오섬(러시아어로는 다민스키섬)을 둘러싸고 시작된 중국과 소련의 국경충돌은 자칫하면 양측 사회주의 국가 간에 전면전으로 확대될 뻔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은 소련을 상대하고자 중국의 편을 드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동맹국인 북베트남을 침략하여 잔혹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70년대 초에 시작된 데탕트에서 미국이 파트너로써 선택한 나라는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의 동맹국 북베트남에게 침략을 자행하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72년 미국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대통령이 되었다.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중국과 수교를 맺고, 양국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고자 했다. 이러한 대화의 문을 미국이 중국에게 열고자 한 모습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위치에 있는 미국이 중국을 어떠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 평가를 내렸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미국이 중국에게 이러한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부터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무시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점을 생각해볼 때, 마오쩌둥 통치 시기 중국이 어떠한 위치에 올랐는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이번에 내가 읽은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는 상당히 흥미로운 마오 전기였다.

 

1970년대와 80년대 중국에서 BBC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필립 쇼트는 국내에 출간된 <폴포트 평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중국에서 살았던 쇼트는 1999년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 전기를 출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8년 뒤 쇼트는 개정판을 냈다. 이 개정판은 1999년 이후 나온 마오쩌둥에 대한 새로운 연구 자료와 문서들을 추가했고, 기존의 내용을 더 가다듬었다. 따라서 쇼트는 책에서 방대한 자료들을 잘 소화해냈다. 책에 주석으로 달린 자료들을 상세히 보면 수많은 자료를 이용하고 참고한 그의 노력이 돋보인다.

 

2017년에 국내에서 <마오쩌둥 평전>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알렉산더 판초프의 마오 전기 또한 방대한 자료, 특히 러시아 측의 방대한 문서들을 바탕으로 최신의 정보들을 담아냈다. 아마도 이것이 판초프의 마오쩌둥 전기가 가지고 있는 장점일 것이다.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는 그것을 충분히 뛰어넘는 수준의 방대한 자료들을 참고하고 이용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책에 달린 주석들에 매우 꼼꼼하게 박힌 내용들은 독자로 하여금 여러 자료들을 교차검증할 수 있도록 상세한 배려를 해주었다. 물론 판초프의 책도 방대한 자료를 담은 마오쩌둥 전기라는 점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료이지만, 이번에 쇼트의 마오 전기를 읽으면서 그것을 뛰어넘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에서 적잖게 돋보이는 점은 바로 필립 쇼트가 혁명가 시절의 마오쩌둥을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혁명가 시절 마오쩌둥에 대한 필립 쇼트의 평가는 기존의 서방학자들에 비해 상당히 두드러지는 편이다. 일단 쇼트가 보는 마오쩌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중국의 혁명가로선 매우 뛰어난 인물이지만, 이후 권력자로써도 무자비했던 인물이다. 쇼트의 책을 읽다보면 마오쩌둥이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이상을 가지고 혁명에 투신하는 과정들은 상당히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혁명 이후 중국의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에 대한 쇼트의 평가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물론 쇼트는 일부 반공주의적 혹은 반중주의적 우익 학자들이 저지르는 편향된 오류는 저지르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면 익학자 프랭크 디쾨터는 대약진 운동의 아사자가 4,500만 명 이상이 된다고 주장했고, 기근의 원인을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모습에서 찾았던 것에 반해 저자 필립 쇼트는 마오쩌둥 집권기 일어난 대약진 운동의 원인을 정책적 실책에서 찾고 있으며, 아사자가 4,500만 명이라는 수치가 매우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여러 자료들을 통해 교차검증한 아사자 수치를 내놓는다. 즉 이러한 점에서 필립 쇼트는 다른 반공주의적 혹은 반중주의적 학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을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에 대해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쇼트는 마오쩌둥에 대해 접근할 때,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쇼트가 언급하는 스탈린에 대한 수준은 솔작하게 말하자면, 자칭 자유주의자들의 관점과 전혀 다르지 않다. 물론 필립 쇼트는 중국 전문가이기에 소련이나 스탈린에 대해서 그러한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소련에 대한 그의 시각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쇼트는 마오쩌둥에 대해 접근하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이나 개인권력 강화라는 점에 주목하며 유사성을 찾는다.

 

하지만 쇼트가 개인독재 강화라는 스탈린의 대숙청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문서고가 개방이 되면서 계급투쟁적인 측면이 수정주의적 사학자들에 의해 조명 받았으며, 명분이 있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따라서 대숙청에 대한 쇼트의 접근은 나이브하다. 또한 스탈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대숙청과 굴라그 노동수용소를 합치면 1,200만에서 1,500만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상당히 과장된 수치이다.(이것은 소련사 수정주의 연구자들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이나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도 다소 아쉬운 점들도 있다. 쇼트는 현재 중국인들이 마오쩌둥 시대 이전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많이 강조한다. 출판이나 표현 등과 같은 일종에 서구의 기준을 들면서 말이다. 더 나아가 쇼트는 개정판 후기에서 중국은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민주적인 국가였던 적이 없다,” 혹은 서방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 낸 것은 중국이 단기간에 이루어 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식의 서술들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거슬리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표현에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다른 보편적인 체제들 보다 낫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 쇼트는 자유주의적 성향이 다소 드러난다.

 

예를들면 쇼트는 자유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그로인한 자본주의적인 성장을 얘기하는데, 그로인해 나타난 부정부패나 빈부격차, 사회주의 복지의 쇠퇴 등에 대한 비판은 매우 약하다. 아니 오히려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변했다고 강조한다. 물론 개혁개방을 거치며 중국이 급속도의 경제성장과 부를 창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인해 극심해진 부정부패나 빈부격차 등과 같은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분명히 마오쩌둥 시절과는 비교과 되지 않을 정도로 심해졌다. 이것이 개혁개방의 핵심이다.

 

또한 쇼트는 마오쩌둥 시절 양질은 아니지만 제법 공평하게 제공되었던 무상의료 무상복지등의 향수의 영향력은 다소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양질은 아니지만 마오시절 중국의 무상의료는 적어도 미국보다 일반 인민들에게 더 좋은 보편적인 의료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것은 리영희 선생이 쓴 <8억인과의 대화>에 잘 나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은 단순히 자유라는 단어로만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기에 비판적으로 지적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맥락으로 현재 러시아인 70%가 이오시프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필립 쇼트는 기존에 나온 반공주의적 혹은 반중주의적 학자들의 서술들에 비하면 상당히 객관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객관성은 바로 중국 국민당에 대한 접근에서 돋보인다. 최근 들어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 작업들이 주목을 받는 추세이다. 물론 장제스에 대해 일정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학술적인 차원에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는 아이러니 하게도 현대 중국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제스 재평가의 문제는 일부 학자들이 지도자 장제스를 지나치게 미화적 혹은 옹호적인 관점을 취한다는 점에 있다. 필립 쇼트는 국민당군이 저지른 만행이나 악행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자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쇼트의 그러한 서술들은 제1차 국공내전이나 대장정, 중일전쟁, 신사군 사건 그리고 제2차 국공내전등에 대한 주제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쇼트는 장제스 정권이 제2차 국공내전에서 패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장제스 정부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점점 신뢰를 잃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난 뒤 국민당 뜨내기들은 충칭에서 도시로 몰려와서 도시의 행정 기관을 차지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살아남은 도시의 상류층을 적대시했다. 그러던 중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중간계급 사람들은 공산당을 비판하기보다 장제스가 평화 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악인 것은 공개 처형과 비밀경찰로 유지되던 일당 독재, 자유주의적 반대자들에 대한 암살, 전쟁 수행을 위한 화폐 남발이 야기한 극심한 물가상승과 실질 수입의 감소, 정당한 영업 행위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만연한 부정부패였으며, 이는 국민당 핵심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국민당 정부의 폐해가 자라난 뿌리에는 장제스가 세운 체제가 있었다. 그 체제는 너무도 약하고 파벌 싸움이 심해서 체제 자체를 인민들에게 강제할 힘이 없었으며, 너무도 부패하고 공공의 복지를 등한시한 탓에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낼 수가 없었다.”

 

출처 : 마오쩌둥 2 p.115~116

 

에드거 스노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과 알렉산더 판초프의 저작 <마오쩌둥 평전>과 더불어 3번째로 읽은 마오쩌둥의 전기지만,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이 흥미롭게 읽힌 것은 아무래도 국민당에 대한 균형 있는 서술들을 잘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책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부분 중 하나를 뽑자면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3년간 진행된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한 이유에 대한 서술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쇼트 또한 사회주의 중국이 국공내전기 혁명투쟁을 도왔던 북한의 은혜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책에 나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의 이야기를 의심한 마오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북한의 공격 개시를 정말로 승인했는지 확인했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사실을 확인해주면서도 마오가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암시했다. 스탈린의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함께내려야 함이 마땅하다.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결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10만 명이 중극 병사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김일성이 자신의 땅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수 있겠는가? 북한은 중국의 동의를 받아냈다.”

 

출처 : 마오쩌둥 2 p.137~138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는 상당히 많은 자료를 이용하고 참고한 책이다. 또한 장제스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도 매우 잘 드러나 있으며, 이를 통해 상당히 균형 있는 시각을 견지하려는 저자의 노력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성향이 다소 돋보이는 저자의 한계도 있다. 비록 단점이 없진 않지만, 기존에 서방 사학자들이 출간한 중국 근현대사 관련한 책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분명히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다. 책의 분량이 두껍기에 읽는 데 다소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일단 나는 두꺼운 책이 읽을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다소 선호하는 부분이 있다. 마오쩌둥에 대해 관심 있는 이라면 이 책을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 얘기하자면, 책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개정판 후기 2’는 서방 사학자들이 다룬 중국 근현대사 관련 혹은 마오쩌둥 관련 서적들에 대한 필립 쇼트의 학술적인 평가가 들어가 있다. 상당히 가치가 있는 자료다. 또한 기존의 서방 사학자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마오쩌둥과 중국 근현대사를 접근해 왔는지도 같이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장에선 서방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장융과 존 핼리데이 공저 <마오>와 프랭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 그중에서더 대약진 운동을 다룬 <마오의 대기근>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과 체계적인 분석을 담고 있다. 전자를 읽어본 이들이라면, 이 개정판 후기 2를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중국 혁명가로서의 마오쩌둥과 중국 최고 권력자 혹은 지도자로서의 마오쩌둥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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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우 2021-02-27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벽돌 책 두 권을 구할 재량이 없기에 바로 구할 수 있는 도서관에서 판초프 본을 빌려서 읽어보려 합니다 ㅋㅋ 우선 중국사 공부 좀 더 하고

NamGiKim 2021-02-27 00:53   좋아요 0 | URL
판초프는 2018년 초에 읽었습니다. 주로 러시아 문서들이 인용된게 장점입니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의 저자이자 미국사 전공자인 콜롬비아 대학 교수인 앨런 브링클리가 책에서 집필한 내용입니다.)

 

1953727, 한국의 판문점에서 교섭 당사자는 마침내 휴전 동의서에 서명했다. 두 적대 세력은 각자의 군대를, 전쟁 이전의 남북한 경계선인 38선을 따라 현 전선에서 1.5마일씩 후퇴시켜야 했다. 한국을 평화적으로 재통일할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1954년에 제네바 회담이 열렸지만, 사실 그 회담에서는 어떠한 합의도 끌어내지 못했으며, 휴전선은 양국 간에 명백하고도 영구적인 경계선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거의 동시에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길고도 쓰디슨 전쟁에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1945년 이후 프랑스는 한때 식민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게 포기해야만 했던 베트남에서 예전의 권위를 되찾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반대하는 호찌민(Ho Chi Minh)의 강력한 민족주의 세력은 독립 투쟁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호찌민은 대서양헌장의 반식민지적 수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연설에 기초하여, 1945년에 미국의 지원을 희망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증 일본과 싸울 때 미국의 정보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호찌민을 무시하고 미국의 가장 중요한 냉전 우방 중의 하나인 프랑스를 지원했다.

 

호찌민은 1954년까지 공산주의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50년 이래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벌이는 성과 없는 전투의 비용 대부분을 지불하고 있었다. 1954년 초, 12,000명의 프랑스 군대는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라는 부락에서 위험스런 포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미국이 개입해야만 프랑스 군대가 완전히 괴멸당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아이젠 하워는 국무 장관 덜레스, 부통령 닉슨, 그 외 여러 사람이 강력히 권하는데도 의화나 미국의 여타 우방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베트남에서 미군의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를 거절했다.

 

미국의 원조가 없게 되자, 프랑스의 디엔비엔푸 요새는 마침내 195457일에 붕괴되었다. 그해 여름, 한국에서의 협정을 고려하던 제네바 회담에서, 프랑스는 재빨리 갈등의 조정에 동의했다. 미국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었던, 19547월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 협정은 17도선을 따라 베트남을 잠정적으로 분단시키는 것이었다. 북쪽은 호찌민이, 남쪽은 친서방 체제가 지배하게 되었다.

 

민주 선거는 1956년에 베트남을 통일할 토대가 되었다. 그 협정은 프랑스의 베트남 개입이 끝나고 베트남에서 미국이라는 존재가 확대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 정권을 세우는 데 협력했으며, 정권의 우두머리로 소수 세력인 가톨릭교도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세웠다. 패배를 예상한 디엠은 1956년 선거를 허용하지 않았다. 북쪽에서 어떤 공격을 가해 와도 미국이 군사원조를 풍족히 제공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디엠은 선거를 거부하면서도 안전하다고 느꼈다.

 

출처: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 p.374~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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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내전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최악의 내전이자국제분쟁이었다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민간인 학살인종청소부녀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 등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치들이 저질렀던 만행들이 이 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일어났다유고슬라비아의 영웅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한 이후 국가가 사분오열된 유고슬라비아는 종족분쟁과 소수민족 대립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태였다.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는 참으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그러나 이 추악하고 잔혹한 내전에 이른바 NATO군의 이름으로 군대와 대규모의 항공력을 투입했던 나라가 있다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그것은 이 추악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생각보다 안 알려졌다는 점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 이전에 미국이 개입했던 또 다른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도데체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그 자체 보단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개입을 중심으로 보고자 한다.

(1990년대 당시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었던 유고슬라비아의 상황)

 

지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현재의 세르비아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슬로베니아보스니아를 합친 6개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공산주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4년간의 파르티잔(빨치산투쟁을 전개했었다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킨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되었다냉전 초기 스탈린과 대립하던 티토는 동유럽 국가 중에 유일하게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고이른바 자주노선을 택하면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했었다심지어 사회주의권에서 해외여행의 자율화를 최초로 성공시킨 나라였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점차 힘을 잃게 되었고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연방이 해체가 되었고티토 사후 표출된 민족갈등 그리고 종족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다물론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지고 연방국가로 나뉘게 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인구 구성이 중국의 한족(중국 인구의 94% 이상)이나 베트남의 비엣족(킨족베트남 인구의 87%이상)과는 달리 가장 많은 종족이 40% 안팎이었던 점도 많이 작용했다.(이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소수민족과 다수종족의 인구 비율과 비슷하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던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측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도 힘든 학살과 범죄 그리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당시 미국은 평화유지군(사실상 NATO)의 일원으로 대략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다이것은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갔던 미지상군을 뜻한다. 1993년 4월 미국과 NATO 소속의 항공기들은 이른바 작전명 디나이플라이트(Deny Flight)로 알려지게 되는 작전에서 보스니아에 비행금지구역을 강제로 적용했다그리고 그해 8월엔 사라예보(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그 도시가 맞다.)를 포위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실시하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평화 유지군으로 파견된 미군)

 

1994년 4월 미군 항공기들은 세르비아측의 목표물들에 산발적인 항공기 타격을 가했지만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1995년 8월 28일 세르비아측에서 사라예보 시장에 박격포 공격을 가하자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이른바 딜리버럿포스 작전(Operation Deliberate Force)을 나섰다이 작전은 17일간 전개되었다. 400대 이상의 나토군 항공기가 항시 대기했고, 5개국 18개 비행장과 최대 3척의 항공모함에서 3,500회 이상의 비행이 이루어졌으며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NATO(사실상 미군이라 봐야함항공기는 1,026발의 폭탄과 미사일을 48개의 표적에 발사했다.

(코소보 내전 당시 투입된 미군)


(F-15 전투기,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에게 맹폭을 가했던 항공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보스니아에 개입하면서 RQ-1 프레데테 무인 항공기(UAV)도 실전에 투입했다알바니아의 자데르에 있는 부대가 보스니아로 날아가는 프레데테를 조종했고총 15회나 출격시켰다물론 이것이 효과가 크기 않았기에 미국은 공습을 지속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당시 미군의 교전 방식은 단순했다세르비아측을 섬멸하기 위해 들어간 미군은 세르비아측 저격수가 사격을 가하면 바로 공군기를 출동시켜 저격수가 있는 건물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다특히나 F-16혹은 F-18 공군기가 세르비아군 거점에다 무차별 맹폭을 가했었다아무튼 내전은 전황이 불리해진 세르비아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면서 종결되었다.

(B-2B 스텔스 폭격기, 한 대당 약 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자랑하는 이 스텔스기는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국이 투입했던 최강의 전력이었다. 심지어 이 기종은 유럽 인근이 아닌 미국 본토에서 출격하여 유고를 폭격하고 다시 미국 본토로 복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98내전이 다시 발발했다그 전쟁이 바로 코소보 내전이었다코소보 지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1999년 3월 24일부터 6월 10일까지 작전을 전개했다이 작전은 78일간 전개되었고총 829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으며, 3만 8,000회 이상의 비행을 실시했었다코소보 내전 동안 미군을 위시한 NATO군은 세르비아의 목표물에 2만 3,600발 이상의 폭탄을 사용했다미군의 첫 공격에만 미국 수상함 4척과 미국 잠수함 2영국 잠수함 1척이 나섰고, 214대의 미국 항공기와 130대의 연합군 항공기(밀리터리 전문가 이세환에 따르면 총 400대의 NATO 항공기)가 100여 발의 레이저 유도 폭탄을 투하했었다.

 

당시 미군이 투입한 항공기 종류는 다음과 같다전투기 F-16, 전투기 F-15, F-117, B-52, B-1B 그리고 B-2A였다특히나 스텔스 폭격기인 B-2A의 경우 폭격 작전에서 미국 본토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발진했다중간에 급유기로부터 기름을 지원받으며 유고슬라비아까지 가서 폭격임무를 마친 뒤 미국 본토로 귀국하는 기록을 보여주었다말 그대로 미국은 코소보 내전에서 매우 비싼 항공기를 투입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코소보 내전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던 밀로셰비치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면서 끝이났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약 3년간 진행된 보스니아 내전과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진행된 코소보 내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와 전쟁범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전쟁보다 추악하고도 잔인했다물론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나 신유고연방의 밀로셰비치 등이 저지른 악행들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전쟁범죄였다그러나 미국의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이 주장하듯이인종청소를 자행한 이들과는 별개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미국이 진행한 폭격 또한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망자를 만들었다.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의 맹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공중폭격 또한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 폭격처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나 사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또한 코소보 내전 당시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미국을 강력히 비판했었다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폭격에 대해 러시아인의 96%가 반인륜 범죄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조사에서는 81%거 미국의 정책을 반러시아적이라고 응답했을 정도였다대부분의 응답자들은 미국이 러시아 국경지역에 역으로 철의 장막을” 치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했다따라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벌어진 참상과 더불어 NATO군 형태로 개입하여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한 미국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참고문헌

 

궁극의 군대토머스 G. 맨켄김수빈(), 미지북스, 2018

 

미국 민중사 II하워드 진유강은(), 이후, 2008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역)들녘, 2015

 

좌파 세계사닐 포크너이윤정(), 엑스오북스, 2016

 

하워드 진아거인물과사상사, 2020

 

유고 내전 총합본샤를TV, 2020년 7월 21일자 유튜브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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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립 쇼트의 저작 마오쩌둥에 나오는 내용을 퍼온 겁니다. 읽던 도중 흥미롭게 읽어서 올려봅니다.)

 

“1968820일 밤,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프라하의 봄을 압살하고 체코의 개혁파 공산 정부를 무너뜨렸다.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어디서든 사회주의 체제가 위협당할 때는 소비에트 블록의 모든 국가들에게 이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라고 불렸는데 공식적으로 유럽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가 보기에 이것은 소련이 중국을 침공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듬해 봄, 마오는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수년 동안 중국과 소련 국경선 부근에서 우발적으로 작은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하지만 196932일에 발생한 무력 충돌은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300명의 중국 병사가 흰색 위장복을 입고 어둠을 틈타 얼어붙은 우수리강을 건너 전바오섬에 도착했다. 이 섬의 러시아 이름은 다민스키섬이었다. 이 섬은 소련의 시베리아 지역 주요 도시인 하바롭스크에서 남쪽으로 240km 지점에 있었으며, 소련과 중국 간에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 중국 병사들은 각자 눈 속에 개인 참호를 파고 들어가 매복 공격을 준비했다.

 

다음 날 아침 중국은 이 섬을 향해 약간의 병사를 이동시켰다. 소련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중국군의 이동을 확인한 소련군은 정찰대를 보내 중국 병사들의 이동을 저지하게 했고, 그러자 잠복해 있던 중국 병사들이 일제히 발포했다. 소련은 보충 부대를 투입했고 중국 병사들은 결국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 측은 죽거나 부상당한 병력이 30명이 넘었다. 같은 장소에서 2주 뒤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규모가 더 컸고 소련은 60, 중국은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 번째 충돌은 317일에 발생했는데, 이 충돌은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이 충돌에서 소련은 전차와 대포까지 동원했다.

 

마오의 계획은 놀랄 만큼 단순했다. 만일 소련이 중국의 주적이 된다면, “나의 적은 적은 친구라는 원칙에 따라 미국이 중국의 잠재적 동맹이 될 것이다. 비록 현재 미국이 중국의 또 다른 동맹인 베트남과 중국 남부 국경선 근처에서 잔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지만, 어쨌든 마오의 계획은 그러했다.

 

전바오섬 충돌은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중국의 외교 정책 우선순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납득시키려는 중국의 장기적 노력의 첫걸음이었다. 마오의 의도를 몰랐던 소련은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여 중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히려 마오가 노리는 바대로 소련과 중국의 충돌이 더 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해 봄과 여름에 걸쳐 중소 국경 분쟁은 몇 배로 크게 증가했다. 모스크바는 바르샤바조약군의 개입할 수 있으며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강력하게 암시했다(이는 1958년 타이완 해협 사건 때 미국이 핵무기 공격을 내세워 위협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소련 정부는 몽골 지역에서 대규모로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국방 예산을 30% 늘렸다. 8월에는 민간 방위 계획이 베이징과 다른 주요 도시에서 시작되었고 수백만 명의 주민이 동원되어 방공호를 팠다. 핵 공격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드러낸 마오는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적절히 보인 다음, 9월에 저우언라이와 소련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Aleksei Kosygin)이 회담을 여는 데 동의했다. 이 회담은 마치 과거 중국이 오랑캐들을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시절을 상기시키듯, 베이징 공항에서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국경선을 현 상태로 유지하기로 하고, 국경 협상을 속개하며 더는 군사충돌이 없도록 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리하여 위기가 종식되었다.”

 

출처 : 마오쩌둥 2 p.418~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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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25일 새벽 440,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마오는 전쟁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6주 전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이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와서, 모스크바가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한, 군사 공격을 승인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항상 책략이 비상했던 스탈린은 북한의 군사 작전에 한 가지 전제를 달았다. 먼저 마오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만일 당신이 혼쭐이 나더라도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북한이 난관에 봉착할 경우 구원해줄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스탈린의 이 말을 중국에 알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전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응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 중국 정부는 타이완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이야기를 의심한 마오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북한의 공격 개시를 정말로 승인했는지 확인했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사실을 확인해주면서도 마오가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암시했다. 스탈린의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함께내려야 함이 마땅하다.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결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10만 명이 중극 병사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김일성이 자신의 땅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수 있겠는가? 북한은 중국의 동의를 받아냈다.

 

출처 : 마오쩌둥 2 p.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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