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스만 침공과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를 만화화한 작품. 흐루쇼프와 케네디가 팔씨름을 하고 있다.)

 

경제 호황이 한참이던 1950년대 미국은 냉전이라는 구도에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경쟁을 이어나갔었다. 이러한 경쟁은 우주와 세계 정치 그리고 문화를 놓고도 이루어졌지만, 군사력 경쟁이 가장 위협적이고, 민중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과 소련 간의 군사력 경쟁에서 양측은 상당히 많은 재정을 군비를 확장하는데 지출했는데, 핵무기 개발은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긴장 및 불안감이 존재하던 1957년 미국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호(Sputnik)를 우주에 쏘아 올렸다는 소식이었다. 스푸트니크호 발사를 시작으로 양측은 우주 경쟁을 끊임없이 했는데,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과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소련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에서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이 분야에 있어선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우주경쟁이 있던 1961년 동과 서로 분단되었던 독일의 베를린에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는 일이 있자, 양측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는 자칫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했는데, 그게 바로 1962년에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다.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가 시작될 뻔했던 나라 쿠바는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소위 신대륙을 발견했다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를 찾은 이후부터 쿠바는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었다. 그러던 19세기 중후반 쿠바인들은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결과적으로 1898년에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서전쟁에서 스페인이 물러간 이후 미국은 쿠바에다 형식적으로 독립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쿠바의 독립을 보장하지는 못했던 것은 당연했고, 결과적으로 미제국의 경제적 지배로 이어졌다.

(쿠바 혁명 당시 시에라마에스트라를 중심으로 혁명 투쟁을 했던 혁명 게릴라들)

 

이렇게 해서 쿠바는 제국주의 앞잡이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정권에 이르기까지 50년 동안 미제국의 간섭과 통제를 받았었다. 쿠바 경제의 중심인 사탕수수에서 나오는 자본은 당연히 미제국의 자본가들을 배불리는데 사용되었고, 쿠바의 노동자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착취하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던 1956년 대략 82명의 혁명가들을 태운 보트 그란마 호가 쿠바에 상륙했다. 그 상륙작전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다. 상륙했을 당시 바티스타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았던 그들중 살아남은 일부는 쿠바의 밀림속으로 들어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혁명기지를 건설했고, 1958년 여름에 대략 200명 이상의 게릴라군을 확보했다. 그렇게 하여 쿠바에서 혁명투쟁을 하던 그들은 1959년 1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여 800명의 게릴라로 바티스타 괴뢰군을 격퇴하고 쿠바를 장악했다.

(수도 아바나에서 연설하는 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체게바라)

바티스타 정권 타도 이후 등장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혁명정부는 외세의 지배를 거부하고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세우려 했다. 당시 그들은 미국에게 빼앗긴 경제 주권을 되찾고자 국가의 주요산업을 국유화했고, 극심한 빈부 격차를 줄이고 소외된 민중의 삶을 개선시키고자 했다. 즉 그들은 쿠바의 부를 학교와 병원, 복지를 늘리는 데 활용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적 개혁 및 정책들을 실행에 옮기자 미국의 아이젠 하워 정부는 쿠바에게 경제적 제제 및 방해공작을 일삼았다. 1959년 10월 쿠바에 대한 불법 공습을 개시했던 미국의 아이젠 하워 정부는 1960년 3월부터 쿠바 침공을 위한 반공 게릴라를 양성했다.

(콜오브듀티 블랙옵스에서 나온 피그스만 침공 당시 미군의 비행장 폭격)

(피그스만 침공 당시 포로로 붙잡힌 CIA 군대)

이렇게 하여 미국과 쿠바의 긴장관계는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1961년 3월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F케네디는 그해 4월 17일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쿠바 망명자들로 구성된 1400명의 병사를 쿠바의 피그스 만 해안에 상륙시켰다. 그들을 상륙시킴과 동시에 미국은 쿠바 비행장을 폭격했다. 그러나 미국의 침공을 대비했던 피델 카스트로 정권은 침략을 무찔렀다.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군은 망명자로 구성된 CIA 부대의 병사 114명을 사살하고 1189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그러나 케네디는 쿠바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침공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 공산주의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1961년 11월 케네디는 소위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를 실행하여 쿠바를 겁박하는 작전을 전개했었다. 1962년 4월에는 미군 4만 명이 “카리브해의 한 섬에 대한 상륙작전”을 목표로 2주간 군사훈련을 실시했었다. 그해 5월에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훈련이 두 차례나 있었고, 케네디 정부는 그해 여름과 가을에 걸쳐 쿠바 침공을 위한 비상 계획을 강화했다. 1962년 10월에는 카리브해의 한 섬에 해병 7500명을 상륙시켜 현지 정부를 전복시키는 가상 침공훈련을 전개했다.

(쿠바 지도)

(쿠바 미사일 기지 사진.)

미국의 쿠바 침공을 격퇴하고 난 이후 피델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관계를 확장했다. 다음해인 1962년 10월 소련의 수상 니키다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는 쿠바에다 핵폭탄이 정착된 ICBM을 설치했다.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미국의 U2 정찰기가 쿠바에서 충격적인 사진들을 찍어 보내왔는데, 분석 결과 사진에 포착된 것은 소련의 SS4 중거리탄도미사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미국과 소련이 제3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10월 22일 미국은 데프콘 3를 발령했고, 10월 24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데프콘 2까지 발령했으며 소련 지역 목표물들에 대한 타격 준비를 마치기 까지 했다. 또한 케네디는 소련에 대한 자신의 최후통첩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쿠바 ‘고립책’의 일환으로 해상 봉쇄 명령을 내렸고, 쿠바 침공을 위한 총공격 태세에 돌입했다. 심지어 핵무기를 탑재한 B-52 폭격기까지 발신시켰었다.

(쿠바 미사일 위험도를 보여주는 관련 지도)

(미국의 쿠바 봉쇄를 나타낸 그림)

(쿠바를 봉쇄했던 미국 군함들)

 

그러자 소련의 니키다 흐루쇼프는 “미국이 우선 쿠바를 다시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다음으로 터키에 있는 미국의 미사일을 철수한다면 소련도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라고 응답했다. 비록 존F케네디가 “터키에 있는 미국의 미사일을 철수한다는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케네디가 첫 번째 요구안을 받아들이자 1962년 10월 26일 소련의 니키다 흐루쇼프는 쿠바의 주권을 존중하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쿠바에 있는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13일간 지속되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않고 끝이 났다.

(케네디와 흐루쇼프)


미국의 역사 교과서나 소위 자유주의 역사 교과서에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마치 소련과 쿠바가 전쟁을 일으키려 하며 위협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더 많은 위협을 가하고, 협박을 표출했던 주체는 소련이 아닌 미국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소련보다 군사력에서 압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초 소련이 4기의 ICBM을 가지고 있었을 때, 미국은 대략 45기의 ICBM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기 소련이 192대의 중폭격기를 가지고 있었을 때, 미국은 1500대 이상이나 된는 중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이 약 2만 5000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을 때, 소련은 그것에 1/10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13일 간의 핵전쟁 위기가 끝난 이후에도 미국은 데프콘 2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소련의 흐루쇼프를 향해 “미국이 소련보다 우위에 있다는 경고”를 지속적으로 보냈다. 그렇게 해서 위기는 1962년 11월 20일에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0시 1분 전. 이 책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책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은 자신들이 군사적으로 소련을 압도한다는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힘의 논리’라는 것에 심취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소련과 쿠바를 위협했고, 그 과정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미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에도 쿠바를 상대로 각종 경제 제재를 가해왔다. 이것또한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로 맞서는 미제국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던 같은 시기 지구 반대편에선 패배를 향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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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ger Close: The Battle of Long Tan, Now a Major Motion Picture (Paperback)
Bob Grandin / Allen & Unwin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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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탄 대전투를 감상하며

어제 아침 보고싶었던 영화 한편을 감상했다. 그 영화는 베트남 전쟁 당시 호주군을 주연으로 한 영화로 전투에서 승리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 영화가 바로 <댄저 클로즈: 롱탄 대전투>다.

사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호주와 뉴질랜드는 베트남 전쟁 당시 전투 병력을 파병했던 국가 중 하나다. 호주 또한 미국이 만들어낸 도미노 이론을 철썩같이 믿었고, 그런 반공적 믿음은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이어졌다. 호주는 미국과 한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그들은 주로 남베트남의 남부에서 작전을 전개했었고, 영화에서 나오는 롱탄 대전투 또한 수도 사이공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영화에 대해 얘기하자면, 영화를 제작한 측에서 전투 재현 및 고증에 충실하고자한 모습이 많이 보였다. 등장하는 인물들 거의다 실존인물이고, 항공기, 대포, 네이팜 폭탄, APC 장갑차등 등장시킬 수 있는 장비는 최대한 등장시켰다. 비록 12세 이상 관람이다 보니 잔혹한 장면은 없었지만, 위워 솔져스 그 이상으로 전투씬이 훌륭했다.

무엇보다 영화상에 있는 호주군들은 혼자서 몰려오는 적들을 죽이는 느낌이 아니라 병사 하나 하나가 서로 협력하며 공격을 차례 차례 방어하며 버티는 느낌이었다. 예를들면 탄약 확인해가며 조준사격으로 한발씩 쏜다든지, 베트콩들이 무조건 적으로만 죽지는 않는다는지 하는 것이 바로 그러했다. 이런점은 역사 고증은 무시하고 전투에 대한 과장 및 왜곡으로 얼룩진 봉오동이나 장사리하고는 질적으로 다른것이 느껴졌다.(물론 딱 한번 베트콩이 독일제 Stg 44를 사용하는게 포착되었지만, 대다수가 AK-47을 사용했으니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고증은 좋았지만 이 영화는 매우 치명적인 결점 및 비판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호주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미화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배경이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으로 일어난 제국주의적 전쟁 범죄였다. 그리고 침략국은 패배했다. 그런 패배한 전쟁과 명분조차 없던 전쟁을 단순히 애국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영화 제작자들의 의도가 참으로 좋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영화상에서 호주군 병사들이 베트콩으로 부터 포격을 받고 난 뒤 이런 대사를 한다.

호주군1: 적은 또 언제 공격해올까요?

호주군2: 어제 그 공격은 우리 간을 보기 위한 테스트였어! 즉 우리 기지를 점령하기 위해 그랬던 것지.

호주군2: 너 디엔비엔푸 전투 들어봤어?

호주군1: 아뇨 들어본적 없어요.

호주군2: 알지 않는게 좋을거야!

디엔비엔푸 전투에 대해 알지 않는 것이 좋다고 얘기하는 장면에서 이 영화가 베트남 전쟁의 본질적 문제는 아예 숨기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만큼 이 영화는 반공적 시각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영화상에서 병사들은 ˝역사가 우리를 기억하겠지?˝ 따위의 소리를 한다.

1966년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이 싸웠던 이 전투에서 호주군 18명이 전사했고, 베트콩은 200명 이상이 전사했다. 그 이유는 호주군이 전투기 대포 APC 장갑차등 동원할 수 있는 화력은 최대한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서 호주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고, 남베트남 민중의 민심을 얻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영화를 볼 때 생각해야할 부분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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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전쟁 반대 집회를 참여하며.

오늘 광화문에서 열리는 이란 전쟁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2020년 새해가 무섭게 중동 분쟁은 긴장감이 최고도까지 상승했는데, 이는 트럼프가 이란의 군사령관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란과 미국사이의 긴장 및 중동지역의 긴장감은 급격히 상승했다.

과거에도 미국은 그러한 정치공작을 일삼았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었고, 리비아의 국가 지도자 카다피를 암살하기 위해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으며, 베네수엘라에서 반동 쿠데타를 획책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이란을 위협하며 중동의 평화를 깨뜨렸다. 자칫하면 미국과 이란간의 전면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단계까지 오게됐다.

현재 미국과 이란간의 긴장관계가 높기에, 자칫하면 중동에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거기다 한국또한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을 논의하고 있다.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현재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것에 맞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및 반동행위를 규탄하고,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반대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난 오늘 열린 이란과의 전쟁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지난번 이석기 동지 석방 요구 집회때도 느꼈던 일이지만, 이번에도 우리의 전쟁 반대 집회를 방해하는 세력들은 압도적인 규모로 우리를 포위하여 온갖 추잡한 욕설들을 내뱉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로지 친미만 내세우는 그들은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교훈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욕할 수 밖에 없다.

미제국주의의 깡패짓으로 현재 중동이 위태롭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제국주의의 이란 때리기 행위와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반대해야 한다. No War With 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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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15일 일본 제국주의가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합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의 격렬한 경쟁이 전개되었는데, 양측 모두 먼저 일본군의 점령지역에 들어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적이 가지고 있던 대량의 무기와 군사 장비를 접수하려 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 당시 해방구를 넓혀나갔던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전쟁이 끝났을 무렵 대략 100만 명의 정규군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1930년대 대장정 당시 병력이 2만 명 안팎이었던 공산당을 고려했을 때, 세력을 많이 확장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국으로 와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며 공산당과 회담하는 정책을 펼쳤었다. 194511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군인인 조지 C. 마셜 장군(George C. Marshall)을 중국 주재 대통령 특사를 임명하여 장제스에게 공산당과의 화해 및 중재하도록 했다. 조지 마셜 장군은 194512월 중순 양당 대표 모두가 중재를 받아들이게 했는데, 이 세 가지 목표에는 내전 중지, 정치협상회의 개최 및 연합정부 수립 논의 그리고 국공 양당의 군대를 하나의 국가 군대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 모두 서로를 불신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1946년 초에 중국 공산당보다 5배나 많은 군사를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규모의 차이는 국민당으로 하여금 공산당군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가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이 너무나도 달랐다. 이러한 갈등 및 차이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19464월 만주에서 소련군이 철군한 이후 중국 공산당이 만주지역을 접수하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67월부터 국민당 정부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구 공산당의 거점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면서,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1946년 중엽 중국 국민당군의 총병력은 대략 430만이었던 데에 비해 공산당군은 120만 안팎이었다. 수적으로 공산당보다 3.5배가 많았던 국민당군은 19467월부터 12월까지, 공산당이 수중하의 165개의 도시와 174000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빼앗았다. 19473월에는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의 중심지인 연안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인민대중의 민심을 잘 사로잡았던 중국 공산당은 19476월에 이르러 병력이 대략 195만 명까지 증가했고, 그 해 하반기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허난과 허베이에서 국민당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당군이 점차 불리해진 데에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민심을 얻지못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미국의 물자지원을 받고, 수적으로도 공산당보다 많았던 국민당군은 점령한 지역에서 민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점령지역에서의 국민당군은 민중을 대사으로 약탈을 일삼았고, 관료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체우기 위해 부패를 일삼았다. 그에 반해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군은 민중 사이에서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을 설득하고, 존중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따라서 국공내전에서 민중은 국민당이 아닌 공산당을 지지했던 것이었다.

  

1948년에 들어오면서 군사적인 정세는 확실히 내전의 초기단계와 비교했을 때 공산당측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었다. 비록 그때까지도 국민당군이 수적으로는 우세를 유지했지만, 19466월 기준으로 국민당의 총병력이 360만이었던 데에 반해, 공산당의 총병력이 280만 명이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공산당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전 시기 국민당군의 큰 손실은 만주에서 발생했다. 1947년 크리스마스 이후 3개월 동안 린뱌오의 중국 공산당 부대는 국민당의 정예부대에게 15만 명의 손실을 입혔다. 1948년 중반에 중국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을 겹겹이 포위했고, 10만 명의 국민당군을 섬멸한 이후 19481014일에 진저우를 점령하고, 18일에는 창춘을 빼앗았으며, 112일에는 선양을 점령했다. 만주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장제스에게 47만 이상의 최정예부대에게 손실을 입게했고, 국민당군의 사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만주에서 린뱌오가 이끄는 부대가 국민당군을 섬멸하는 것과 동시에 천이가 이끄는 또다른 중국 공산당군은 공세를 전개했다. 천이가 이끄는 공산당군은 1948926일 지냔 대전이 있은 후 산둥을 점령했다. 이에 장제스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탱크와 주포, 장갑차를 갖춘 40만 명의 기계화 부대를 배치하여 난징으로 통하는 관문을 보위했지만, 194810월 회해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국민당군 2개 사단 전체가 반기를 들었고, 탱크와 장갑차는 폭우와 눈바람으로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1111일부터 22일까지 10만 명의 국민당군이 섬멸되었다. 그 결과 19481215일 쉬저우까지 함락되었다. 또한 1948117일 유백승과 덩샤오핑이 지휘하는 군대는 소위 화해전역을 개시하여 약 10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 그리고 쉬저우를 점령했다. 19481224일 중국 공산당의 군대는 장가구를 점령했고, 다음해 14일에는 천진을 131일에는 베이징을 각각 점령했다.

 

19489월부터 19491월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략 150만 명이나 되는 인력을 상실했다. 19491월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총톡직을 사임하고, 총통대리로 선임된 이종인은 화평교섭을 제안했다. 194941일부터 시작되었지만,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의 실질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국공화평협정 8개조를 제시함으로써 화평교섭의 조속한 결렬을 유도했다. 당연히 국민당은 이를 거부했고, 이를 거부한 1949420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역사적인 양자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정부의 심장인 난징과 상하이로 진격했다. 1949424일 난징이 함락되고, 527일에는 상하이가 점령되었다.

 

이렇게 국공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194910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현재의 중국이 건국되었다. 19495월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그해 12월에는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 지역을 해방했다. 장제스는 121050만의 국민당군을 이끌고 대만으로 도피하였고, 이로써 중국 혁명은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참고문헌

 

중국혁명사, 서진영 저, 한울 아카데미, 1992

근현대중국사-, 이매뉴얼 C. Y. 쉬 저, 조윤수 서정희 역, 까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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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경제성장 찬양하는 것들은 분명히 자본가 마인드가 맞다. 박정희식 경제성장은 단순히 재벌과 부자들을 위한 성장이었다. 민중의 복지는 개좆만큼 생각한게 박정희였다. 1930년대 FDR의 뉴딜보다도 못했다. 아무리봐도 무슨 박정희가 경제 살렸네 이 소리 하는것들은 생각하는 수준이 개돼지 수준이다.

단순히 경제성장 도표만 보고, 재벌이 진출한 것만 보며 그것이 최고의 경제 성장인냥 찬양하는 종자들은 복지는 왜 필요한지, 교육, 주거, 의료, 공공시설 등이 국가가 제공해야하는 것이 인권이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치 못한다. 아니 부자들이 성장하면 우리도 덩달아 잘 살것이라는 심각한 착각 밑 뇌망상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데 이것보다도 더 자본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 이승만이라는 작자는 미국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해!˝라고 해도, ㄴㄴ 그거는 사회주의에서나 하는거임 하며 안하던 인물이다. 정리하자면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경제 살렸네 우리를 잘살게 만들었네와 같은 소리는 우리가 받아야 했던 권리를 알지도 못한채 파블로프의 개마냥 읊어대는 미친소리다.

또한 최근 보면 주 52시간도 부족하다 지껄이는 저 자유한국당 쓰레기들만 보더라도 한국인들 복지 의식 수준이 아직도 저급한 수준을 받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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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20-01-13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정희 신화에 대해서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정희가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1970년대인데, 1970년대에 지속적으로 고속성장을 한 나라는 단 네나라입니다. 일본, 한국, 대만, 이스라엘.
1960년대 남미로 몰리던 자본이, 남미의 사회주의화로 1970년대 위 네나라로 몰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경제성장은 냉전 경쟁체제의 산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일 듯 합니다.

NamGiKim 2020-01-16 22:19   좋아요 1 | URL
한국은 지정학적 특수성이 있었다 봅니다. 한국 위에 북한과 중국 소련이 있으니 미국은 태평양 라인에서 반공국가를 만들어야 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한 많은 지원으로 이어졌죠. 그리고 사실 한국의 복지는 민주화 투쟁과 노동운동의 성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