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형태의 죽음 의례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죽어가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불어넣는다. 이것이야말로 그 의례의 실제적 기능이다. 이와 별도로 현재 죽어간다는 것은 상당히 무정형적 상황에 놓여 있으며 사회적 지형도에서 빈자리로 표시된다. _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P36


  연의의 첫영성체 교리를 계기로 성(聖) 금요일 미사를 다녀왔다. 가톨릭 전례에서는 부활절(Easter Sunday) 직전 3일을 각각 성목요일(Maundy Thursday), 성금요일(Good Friday), 성토요일(Holy Saturday)로 보내고 있으며, 각각의 요일과 요일 사이는 '수난', '죽음' ,' 부활'이라는 사건에 대응한다. 그 중에서도 금요일은 수난의 정점, 죽음의 요일에 해당한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 1897 ~ 1990)의 말처럼 미사 전례를 통해 신자들은 수난과 죽음을 재현하고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성금요일 미사 복음 중 절정은 예수의 죽음이다. 4대 복음서에 기술된 예수가 남긴 마지막 말은 서로 다르다. 때문에, 복음서마다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은 조금은 원망하는 듯한 분위기가 든다면, -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마르 15:35) - 루카 복음에서는 죽음 너머의 생명의 분위기가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 요한 복음에서는 죽음 자체로 완성이라는 느낌을 개인적으로 받게된다 -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 


 세월호 8주기를 앞두고 맞이한 성금요일에 개인적으로 <요한복음>의 내용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죽음의 순간 아버지에게 호소하는 공관복음과는 달리, 죽음이라는 사건을 직시하는 모습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잊을 수 없다는 개인적인 생각때문일까. 잘 모르겠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싶다. 해결되지 않았기에 그들을 잊어서는 안되며, 그들의 빈자리를 아직 채울 수 없다는 생각도 함께 한다.


. 2014년 세월호가 침몰 후 2016년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며 촛불을 들었건만, 그로부터 5년이 지나도록 선체 인양 이외에 달라진 것은 없는 상황. 이제 다시 깊은 밤이 시작되기에 8주기를 맞이해서 더 깊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이제 시작될 밤이 얼마나 깊은 어둠이며, 얼마나 길게 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잠들지 않고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남은 유족들이 온전하게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를 치유받을 때까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세월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2) 


 죽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기나긴 꿈 속으로 떠나가고 세상은 사라진다. 두려운 것은 죽어가는 고통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산자의 상실감이다... 죽음은 한 인간의 종말이다. 남는 것은 그 혹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 즉 산 자가 가진 기억들이다. _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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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6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16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i74 2022-04-16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도하는 마음 미안한 마음 ㅠ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기억하기 잊지 않기 깨어있기. 기억하겠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22-04-16 08:52   좋아요 2 | URL
세월호는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던 배가 눈앞에서 침몰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가 있더 여겨집니다. 큰 재난 상황에서 사건 당시 사실보도도 원인규명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제대로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현대사의 모든 문제가 응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로마 제국 쇠퇴의 첫 번째 징후이자 원인으로 꼽히는 오만방자한 근위병의 수도 앞서 언급한 1만 5000명을 넘지 않았다. 근위대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창설되었는데, 이 영리한 황제는 자신이 찬탈한 통치권을 그럴듯하게 채색해 주는 것은 법률이지만, 그것을 유지해 주는 것은 군사력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하고 원로원을 위협하고 반란을 방지하거나 초기에 진압할 목적으로 강력한 근위대를 주도면밀하게 형성해 나갔다. _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1> , p118


 약 50년의 기간 동안 25명의 황제가 옹립된 군인 황제 시대(軍人皇帝時代, Military Anarchy, CE 235~284). <로마제국 쇠망사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 1794)은 로마제국의 쇠퇴 원인의 처음을 근위대에서 찾는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황제의 권위를 보호하는 근위대. 황제는 근위대의 보호 아래 자신의 권한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근위대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제공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황제-근위대'의 밀월관계는 끝나게 되었고, 3세기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Marcus Aurelius Severus Alexander Augustus, 207~235)에 이르러서는 근위대 뿐 아니라 지방군단마저 권력에 도취되기에 이른다. 군단의 추대없이는 황제가 될 수 없는 상황. 이는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명분없는 황제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군대에게 전적으로 의지했을 때 어떠한 혼란이 오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전제 군주에게 봉사하는 막강한 근위대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지만, 종종 왕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황제들은 이런 방식으로 근위대를 궁정과 원로원까지 진출시킴으로써 그들이 황제의 힘과 시민 정부의 허약성을 깨닫게 만들었다. 근위대는 황제의 약점과 악행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경멸하게 됨으로써, 명확한 실체가 없이 가상적으로 형성되는 권력에 대해 적당한 거리감과 신비감이 있을 때만 유지되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잃었다. _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1> , p119


 세베루스 황제는 감사의 뜻에서, 혹은 잘못된 정책 탓에, 혹은 필요에 의해서 군대의 규율을 느슨하게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의 허영심은 금반지를 끼는 영예를 받게 되자 더 높아졌고, 할 일 없는 병영에서 처와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용되자 더욱 안일한 생활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곧 힘든 군대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응당 해야 할 복종도 견딜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변질되었다. _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1> , p141


 윤석열 당선인이 자신의 측근 한동훈 검사장을 초대 법무부장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비판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 로마 제국의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와 그 배경을 떠올리게 된다. '로마법'이 유명했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지배는 군사력으로 해야 했던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 BCE 63~ CE 14)도 할 수 없었던 '법 기술자'에 의존하는 권력의 시대. 검찰 권력이 태동된 6공화국에서 검찰은 돌격대장이었다면, 이제 그 돌격대장이 정권 그 자체가 되었다는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그(율리아누스)가 두려워할 이유는 충분했다. 세계의 황제 자리에 앉았지만 그에게는 친구는 고사하고 아첨꾼도 한 명 없었다. 근위대조차도 자신들이 손수 추대한 황제를 수치스럽게 여겼다. 시민들은 모두 그의 즉위를 재앙이자 로마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생각했다.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아 몸을 사려야 했던 귀족들은 속마음을 숨기고 황제의 꾸며낸 정중함에 만족과 의무가 혼합된 거짓 미소로 응답했다. _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1> , p122


 노태우 정권 시절은 검찰 출신들의 전성기였다. 5공 시절부터 정치검사와 정치군인들이 서로 어울리는 것을 '육법당'이라고 비꼬았는데, 6월항쟁 이후 군 출신들이 누리던 권력을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안기부장 서동권, 청와대 비서실장 정해창 등 경북고를 나온 검찰 출신들이 차지했다. 검찰사상 최악의 사건이라 할 1991년의 유서대필 사건은 바로 이런 구도에서 발생했다. 과거에는 정권 핵심이나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을 검찰이 법률적으로 뒤치다꺼리를 해주었다면 이제는 검찰이 전면에 나서서 정권의 위기를 돌파했다. _ 한홍구, <사법부> , p412/454


 

관련기사 : [사설]법무에 논란 많은 한동훈 지명… ‘檢공화국’ 비판 왜 자초하나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20413/112869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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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4-15 12: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깊이 공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15 12:11   좋아요 2 | URL
transient-guest님, 공감에 감사합니다...

초란공 2022-04-15 12: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돌격대장이 권력 그 자체‘란 말씀이 앞으로의 5년을 특징짓는 말인듯 싶습니다. 안철수측은 (이미 예견되는 일이었지만) 본인이 팽당할 것이라는 걸 본인만 몰랐을 것 같구요.

겨울호랑이 2022-04-15 12:40   좋아요 3 | URL
네... 제 생각이 틀리길 바라봅니다만... 오늘 오전에 안철수와 당선인 긴급 회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뭔가 단단히 잡힌 듯 합니다...

레삭매냐 2022-04-15 13: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엇을 해도 항상 상상초월
이라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
네요.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말이죠.

자신들이 캠코더라는 말로
비판하던 시절은 깡그리 잊어
버렸나 봅니다. 기대가 없어서
그런지 그냥 그런가 보다 싶네
요.

겨울호랑이 2022-04-15 13:19   좋아요 3 | URL
정말 취임도 하기 전인데, 벌써 임기 중후반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요... 하는 일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런 일이 계속 되다보면 둔감해지는 것이 더 걱정이 됩니다. 이슈로 이슈를 덮는다고 하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전홍좌가 철전을 주조하여 장사(將士)들에게 녹(祿)을 보태주는 문제를 논의하니 그의 동생인 아내도우후(牙內都虞候) 전홍억(錢弘億)이 간하였다. "철전을 주조하는 것에는 여덟 가지의 해로움이 있습니다. 새로운 전(錢)이 이미 시행되고 나면 구전(舊錢, 동전)이 모두 이웃 국가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이 첫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할 수 있으나 다른 나라에서 사용할 수 없다면 상고(商賈)들이 다니지 않아서 많은 물건들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 둘째입니다. 동(銅)이 금지된 것이 지극히 엄격한데도 백성들이 오히려 몰래 주조하는데 하물며 집에는 솥과 가마가 있고 들에는 가래와 쟁기가 있으므로 법을 위반하는 것이 반드시 많게 될 것이니, 셋째입니다. 민인(?人)들이 철전을 주조하였다가 혼란스러워지고 도망하였으니 본받기에 부족하니, 넷째입니다. 국가재용(國家財用)이 다행히 풍요로운데도 스스로 공핍(空乏)함을 보이는 것이니, 다섯째입니다. 녹봉으로 내려주는 것은 일정한데, 아무런 연고 없이 그것을 보태어주어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여섯 번째입니다. 법이 변하여 폐단이 생겼다 하여 갑자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일곱째입니다. 전(錢)이란 것은 국성(國姓)인데 이를 바꾸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여덟째입니다." 전홍좌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거란에서는 한림승지(翰林承旨)·이부상서인 장려(張礪)가 거란주에게 말하였다. "지금 대요(大遼)는 이미 천하를 얻었으니 중국의 장상(將相)은 의당 중국 사람을 기용하여 그것으로 삼아야 하고 북방 사람이나 좌우에 있는 가까이하고 익히 아는 사람을 기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정령(政令)이 어그러지고 잃는다면 인심은 복종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이를 얻는다고 하여도 오히려 장차 이를 잃을 것입니다." 거란주가 좇지 않았다.

애초에, 고려왕(高麗王) 왕건(王建)이 군사를 사용하여 이웃 나라를 집어삼키고 멸망시켜서 자못 강대하였는데, 호승(胡僧)인 말라(襪?)를 통하여 고조에게 말하였다.
"발해는 우리와 혼인관계에 있는데 그 왕이 거란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청컨대 조정과 더불어 그들을 쳐서 빼앗기를 바랍니다."

고조가 회보하지 않았다. 황제는 거란과 더불어 원수가 되자, 말라가 다시 이를 말하였다. 황제는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방을 어지럽혀서 그들의 군대 기세를 분산시키고자 하였는데, 마침 왕건이 죽자 아들인 왕무(王武)21가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를 호칭하고 표문을 올려 상사(喪事)를 보고하였으며, 11월 무술일(5일)에 왕무를 대의군사(大義軍使)·고려왕으로 삼고 통사사인(通事舍人) 곽인우(郭仁遇)를 파견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뜻을 알려서 거란을 치도록 하였다. 곽인우가 그 나라에 도착하자 그들의 군대가 극도로 미약하고 지난번 말라의 말은 다만 왕건이 과장하고 속여서 말한 것일 뿐 실제로는 감히 거란과 더불어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을 보았다. 곽인우가 돌아오자 왕무는 다시 다른 이유를 가지고 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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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는 변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잉태하며, 시대적 흐름과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다른 궤적을 그리며 발전해야 한다. 하지만 물량주의에 의한 단기 집중개발 방식과 표준화에 의한 획일적 평등주의가 지속되면서 주택의 가치는 쉽게 수치화하고 계량화할 수 있게 바뀌었다.

철저히 외부와 단절되며, 주거단지 하나가 완결된 공동생활의 단위가 되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공적 재원의 투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아파트단지 입주자는 자신들의 돈으로 단지 내의 모든 생활 편의시설과 어린이놀이터, 운동시설 등 외부공간을 구입해야 한다. 모든 것을 입주자의 비용으로 마련했으니 입주자들이 단지를 사유화하고 적극적으로 방어하려는 태도를 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점이 아파트단지의 공간적 폐쇄성을 야기하는 주된 원인이다. 여기에 무리지음과 서열화가 겹쳐 작동함으로써 사회공간적 통합이라는 원리와 가치가 훼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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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 일상생활의구조 -상 까치글방 97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불투명한 영역, 흔히 기록이 불충분하여 관찰하기 힘든 영역이 시장 밑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는 기본 활동의 영역이다. 지표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폭넓은 영역을 나는, 더 알맞은 이름이 없어서, "물질생활(la vie materielle)" 혹은 "물질문명(la civilisation materielle)"이라고 명명하였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3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 1-1>는 투명한 시장경제의 하부층인 일상생활의 구조인 '물질문명'을 다룬다. 그가 분석하는 15~18세기의 특징은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로 규정지을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같은 시기 세계 전지역에서 동일하게 같은 규모로 발생하고 있었다는 것이 브로델의 분석이다.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물질 생활은 거의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느리게 변화해온 고대 사회와 경제의 연장이다. 그 과정에서 이것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 오래된 사회와 경제 위에 필연적으로 그 무게를 짐지우는 상부사회(une societe superieure)를 조금씩 형성해갔다. 그리고 언제나 상부와 하부는 함께 공존하되 그 각각이 가지는 크기의 비율이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공존해왔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9


 1300년부터 1800년까지 500년 동안 인구는 연평균 1.73퍼밀(천분율, 1/1,000) 정도의 비율로 증가했다. 이 장구한 시간 동안 인구가 아마도 두 배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구학적인 전진 앞에서는 경제 위기도, 재앙이나 대규모 사망도 무력했다. 의심할 바 없이 이것이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 세계사의 핵심적인 사실이다. 그것은 생활수준의 차원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이 전체의 압력에 적응해야 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39


 무엇이 이러한 세계적인 단일성을 가능케 했는가? 그것은 극심한 파괴 뒤에 이어진 빠른 회복 덕분이었다. 질병은 많은 생명을 앗아갔지만, 모든 생명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낮은 수준의 인구증가율이었지만, 꾸준히 인구는 증가되었고(몇몇 예외적인 상황은 있었지만), 이러한 상황은 농업으로 유지되었던 15~18세기의 전세계에 '팽창'의 압력으로 전세계인들의 생활 전반에 작용했다.

 

 앙시앵 레짐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하면,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갑작스러운 재앙만큼이나 강력한 단기적 회복능력일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비록 느낄 수는 없지만 계속 보상이 이루어져서 결국 최종 승리를 거두게 된다. 썰물은 그 이전의 밀물이 가져왔던 것을 결코 모조리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힘들지만 놀라운 장기적 상승은 그렇게 많은 것들이 거기에 의존하게 될 수의 승리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17


 공간은 결국 언제나 제공되어 있었는데 왜 같은 시간에 "지리적 콩종크튀르(conjoncture geograpique)"가 작용했는가? 바로 이 동시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당시에 이미 효과적으로 작동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허약했던 국제경제만으로는 그토록 일반적이고 강력한 움직임을 책임지지는 못한다. 그것은 원인인 만큼 동시에 결과인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50


 15-18세기 동안의 세계는 80-90퍼센트의 사람들이 땅으로부터 얻어내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거대한 농업세계였다(p50)... 세계의 물질적인 통합성, 그리고 인류의 차원에서 생물학적 역사의 일반화의 가능성은 유럽의 신항로 발견, 산업혁명, 경제의 상호침투 이전에 이미 최초의 전(全)지구적인 단일성을 부여했을 수 있다... 기후는 대단히 복잡한 체계이며 그것이 식물, 동물, 사람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란 장소에 다라, 문화에 따라, 계절에 따라 굴곡이 심하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52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에서 의(衣), 식(食), 주(住)의 전반적인 생활상 전반에서 팽창의 압력을 이하의 단원에서 분석한다. 먼저 '식'. '밀', '쌀', '옥수수'라는 각 문명권의 주식(主食)은 사회구조를 결정한다. 유럽의 주식인 밀은 목축과 연관되어 발전했고, 동양의 쌀은 관개시설과 관련되어 사회구조를 형성하면서, 문명권의 차이를 설명하지만, 이들 모두 '생산지=소비지'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세계적인 수준에서 각 문명(브로델은 '문화'와 '문명'을 구분한다. '문화'는 '문명'이전의 상태다)이 처한 '콩종크튀르(국면)'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점을 브로델은 '의'와 '주' 그리고 '상품으로서의 식'에서 극복해낸다. 바로 '사치(luxury)'다.


 결국 지배적인 작물이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세계의 좁은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밀집한 인구, 완수된 문명 또는 완수중인 문명과 정확히 일치한다. 대규모의 사람들이 어떤 지배적 작물을 선택하면 그것이 그들의 생활양식에 뿌리를 내리고 그 결과 그 생활양식을 형성하며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속에 그것을 가두게 되지만, 그 반대방향의 것 역시 사실이다. 즉 그 어떤 지배적 작물의 성공을 확립시키고 허용하는 것은 지배적인 문명인 것이다. 밀, 벼, 옥수수, 감자 등의 재배는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변형되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236


  괭이를 사용하는 농민의 노동은 유럽의 농민이나 벼를 재배하는 아시아 농민의 노동보다도 더 생산적이지만 그 대신 이것으로는 인구가 밀집한 사회를 이룰 수는 없다. 이 원시적인 노동이 유리하도록 만든 것은 토양이나 기후가 아니라 거대한 휴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과 깨기 힘든 관습의 망을 구성하는 사회형태 덕분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239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에서는 '사치'를 통해 팽창을 할 수 있는 동인(動因)을 엿볼 수 있다. '남들과 다른 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 이러한 욕구는 매일 먹는 빵과 밥을 통해서는 결코 채울 수 없다.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필수품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구할 수 있는 귀중품인 차(茶)와 커피(coffee)를 마시고, 비단과 모피로 옷을 해 입으며, 한정된 주거 공간을 세련된 가구로 채우며 남들과 다름을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 이러한 마음은 여러 문화와 문명권에 여러 형태로 존재함을 브로델은 본문에서 세밀하게 실증한다. 


 사치는 시대, 나라, 문명에 따라 여러 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거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도 시작도 없는 사회적인 코미디이다(p250)... 모든 사치는 낡아빠지게 되고 유행은 지나가게 된다는 것은 놀라울 것도 없는 교훈이다. 그러나 모든 사치는 타고 남은 재에서부터, 그 실패로부터 되살아난다. 사치는 사실 그 어느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사회적 수준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며, 이 수준차이는 매번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영원한 "계급투쟁"이다. 이 투쟁은 계급만이 아니라 문명의 투쟁이기도 하다. 문명은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부자들이 빈자들에 대해서 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문명간에 사치의 사회적 코미디를 행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상호적인지라, 짧은 거리간이든 먼 거리간이든 문명들은 어떤 흐름들을 만들어내고 가속화된 교환을 유도해낸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253


 사실 모든 문명은 사치스러운 음식과 일련의 "흥분제"를 필요로 한다. 12-13세기에는 향신료와 후추에 대해서 열광했고, 16세기에는 초기의 증류주에 대해서, 그 다음에는 차, 커피, 담배에 대해서 열광했다. 19-20세기에는 새로운 사치품으로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마약이 생겨나게 되었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369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쪽에는 대다수의 불변성이 있고 또 다른 한 쪽에 사치라는 움직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질생활의 모든 현실 - 음식, 음료, 주거, 의류,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행 - 은 그것들 사이를 한번에 결정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확고한 관계 또는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치와 궁핍을 구분하는 것은 일차적 구분에 불과하며, 단순하고, 그 자체로는 아직 충분히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470


 세계 문명권의 지배계급에 공통된 '사치'를 소비하는 풍조는 단순한 소비가 아니었다. 소비는 하나의 행위였고, 행위는 예식(禮式)이 되었으며, 이러한 형식은 언어를 통해 의식구조를 형성한다. 하부구조의 변동에 의한 상부구조의 결정. 바로 이 지점에서 브로델의 이론은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 1918~1990)가 미처 구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의 한계점에 한 줄기 빛을 던져주지 않았을까. 마음같아서는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말과 사물 Les mots et les choses> 또는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정리하고 싶지만, 일단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정주행한 후에 가는 것으로 하고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2>로 넘어가도록 하자...


 모든 현실이 강제적인 필요의 산물만은 아니다. 인간은 달리 어쩔 수 없으므로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지만, 그래도 그가 하는 것과는 다르게 먹고, 입고, 집을 짓고 살 수도 있다. 유행의 급변은 이것을 "통시적으로(diachronique)" 이야기하고, 현재와 과거의 매 순간의 세계의 대립은 이것을 "공시적으로(synchronique)" 이야기한다. 사실상 우리는 다만 사물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말"의 영역에 있다. 한 공기의 쌀밥이나 한조각의 빵을 먹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말의 노예가 되는데, 그때 거기에서 인간이 부여하고 암시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언어가 문제가 된다... 사치가 한 경제를 지탱해가고 진보시키는 좋은 수단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한 사회를 부양하고 매혹시키는 수단이다. 결국 상품과 상징과 환각과 환상과 지적 사고들의 이상한 조합인 문명이라는 것이 이 게임을 주도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여 물질생활의 심층에까지 까탈스럽게 복잡한 질서가 형성되며 여기에 경제, 사회, 문명이 가지는 함의, 경향, 무의식적 압력이 함께 작용하는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471


인구의 확대는 경우에 따라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인구가 늘어나게 되면 그 인구가 차지하는 공간과 그 인구가 누리는 부(富)와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해당 인구는 "문턱점(seuils crutiques ; critical threshold)"를 넘어서게 되고 그때마다 그 구조 전체가 새로이 문제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 게임은 간단하지도, 단선적이지도 않다. - P25

유럽에서는 기적의 농산물(옥수수, 감자)이 늦게야 자리잡았고 근대적인 집약농업도 서서히 확립되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늘 기근이 닥쳐와서 대륙 전체를 괴롭히고 황폐화시켰다. 1309-1318년 동안 연속적으로 찾아든 심각한 기근의 결과로 사람들이 겪었던 폐해만큼 비통한 관경은 없었으며, 그것은 이 세기 중반의 재앙(흑사병)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 P89

15-18세기에 사람들이 먹는 기본 음식은 주로 식물성 음식이었다. 이것은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아메리카나 블랙 아프리카에서는 자명한 진리였으며, 벼를 재배하는 아시아 문명권의 경우에는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명백한 사실이다. 극동지방에서 일찍이 인구가 크게 증가하게 된 것도 육식을 아주 조금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단지 칼로리 수치만을 기준으로 하여 경제적 결정을 한다면 똑같은 면적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목축보다 월등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곡물 경작은 목축보다도 10~20배나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다. - P135

유럽의 자본주의는 엄청난 양의 아메리카 산 가죽과 모피를 얻었으며, 이것은 조만간 먼 시베리아 삼림의 사냥꾼들과 모피를 얻었으며, 이것은 조만간 먼 시베리아 삼림의 사냥꾼들과 경쟁하게 될 것이었다. 우리는 수천년에 걸쳐 늘 다시 출발하는, 그리고 답보하는 인간의 모험이 하나이며, 공시성과 통시성이 함께 만난다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하게 된다. "농업혁명"은 기원전 8000~7000년 전의 오리엔트에서와 같은 몇몇 특권적인 곳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경험들은 끝없이 긴 똑같은 여로를 따라가지만, 그것은 수세기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 P247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은 브랜디, 럼 주, 아과 아르디엔테주(agua ardiente) 등은 유럽이 아메리카 문명에 제공한 독 묻은 선물이라는 점이다... 인디언들은 이렇게 해서 습관이 붙은 알콜 중독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멕시코 고원 문명의 경우 그들의 삶의 틀과 고래(古來)의 규제를 상실한 사람들은 거리낌없이 알콜의 유혹에 빠져들어갔는데 이것은 1600년 이후 엄청난 폐해를 입게 되었다. 뉴-스페인에서 용설란 주가 가져다주는 국가 수입이 은광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음을 생각해보라! 더구나 그것은 새로운 지배자들의 의도적인 정책이었던 것이다. - P351

부잣집에서 변화를 주고 싶은 욕구가 아무리 커도, 실내장식이나 가구는 결코 빨리 바뀌지는 못했다. 유행은 바뀌기는 했지만 아주 느렸다. 이는 새로운 변화에 필요한 비용이 어마어마했으며 더욱이 생산 가능성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p428)... 가구와 가구 사이의 게임에서는 사회가 심판이다. 그것은 종종 허영을 뜻한다. 식기장이 그런 식으로 부엌에서 생겨난 가구다. 이 식기장에는 몇줄의 선반이 열을 지어 있었는데 집주인의 지위에 따라 그 수가 정해지는 것이 에티켓이었다.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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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04-15 1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늘 <인종, 국민, 계급>이 출간된 것을 보았는데 판매지수가 상당히 높아서 놀랐습니다. 그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월러스틴이 브로델과 연결되는 사람이다보니, 겨울호랑이 님의 다음 독서목록이 무엇일 될까 궁금하네요.

겨울호랑이 2022-04-15 19:15   좋아요 2 | URL
세계체제와 관련한 월러스틴의 저작들이 타계 후에도 번역되어 저 또한 반갑습니다. 일단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마저 정리하고, 페리 앤더슨의 2저작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 <절대주의국가의 계보>와 브로델의 <지중해>를 정리할 계획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 또 어떤 책이 들어올지는 잘 모르게습니다만... 초원님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

초원 2022-04-17 08:52   좋아요 1 | URL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려요. 저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독서력을 가지셔서 그저 감탄합니다.

어제 하루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침묵하는 시간을 갖는 것뿐이었지만, 우리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댓글을 달고 있는 화면의 왼쪽에 겨울호랑이 님이 달아놓은 도서목록들을 보니 천천히 가더라도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겠구나 싶습니다.

일요일 오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2-04-17 10:36   좋아요 0 | URL
에고 아닙니다. 그저 호기심이 생겨 읽다보니 여러 책에 손이 갔네요.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기에 한없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초원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일요일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