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홍좌가 철전을 주조하여 장사(將士)들에게 녹(祿)을 보태주는 문제를 논의하니 그의 동생인 아내도우후(牙內都虞候) 전홍억(錢弘億)이 간하였다. "철전을 주조하는 것에는 여덟 가지의 해로움이 있습니다. 새로운 전(錢)이 이미 시행되고 나면 구전(舊錢, 동전)이 모두 이웃 국가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이 첫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할 수 있으나 다른 나라에서 사용할 수 없다면 상고(商賈)들이 다니지 않아서 많은 물건들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 둘째입니다. 동(銅)이 금지된 것이 지극히 엄격한데도 백성들이 오히려 몰래 주조하는데 하물며 집에는 솥과 가마가 있고 들에는 가래와 쟁기가 있으므로 법을 위반하는 것이 반드시 많게 될 것이니, 셋째입니다. 민인(?人)들이 철전을 주조하였다가 혼란스러워지고 도망하였으니 본받기에 부족하니, 넷째입니다. 국가재용(國家財用)이 다행히 풍요로운데도 스스로 공핍(空乏)함을 보이는 것이니, 다섯째입니다. 녹봉으로 내려주는 것은 일정한데, 아무런 연고 없이 그것을 보태어주어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을 열어주는 것이 여섯 번째입니다. 법이 변하여 폐단이 생겼다 하여 갑자기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일곱째입니다. 전(錢)이란 것은 국성(國姓)인데 이를 바꾸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 여덟째입니다." 전홍좌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거란에서는 한림승지(翰林承旨)·이부상서인 장려(張礪)가 거란주에게 말하였다. "지금 대요(大遼)는 이미 천하를 얻었으니 중국의 장상(將相)은 의당 중국 사람을 기용하여 그것으로 삼아야 하고 북방 사람이나 좌우에 있는 가까이하고 익히 아는 사람을 기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정령(政令)이 어그러지고 잃는다면 인심은 복종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이를 얻는다고 하여도 오히려 장차 이를 잃을 것입니다." 거란주가 좇지 않았다.

애초에, 고려왕(高麗王) 왕건(王建)이 군사를 사용하여 이웃 나라를 집어삼키고 멸망시켜서 자못 강대하였는데, 호승(胡僧)인 말라(襪?)를 통하여 고조에게 말하였다.
"발해는 우리와 혼인관계에 있는데 그 왕이 거란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청컨대 조정과 더불어 그들을 쳐서 빼앗기를 바랍니다."

고조가 회보하지 않았다. 황제는 거란과 더불어 원수가 되자, 말라가 다시 이를 말하였다. 황제는 고려로 하여금 거란의 동쪽 변방을 어지럽혀서 그들의 군대 기세를 분산시키고자 하였는데, 마침 왕건이 죽자 아들인 왕무(王武)21가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를 호칭하고 표문을 올려 상사(喪事)를 보고하였으며, 11월 무술일(5일)에 왕무를 대의군사(大義軍使)·고려왕으로 삼고 통사사인(通事舍人) 곽인우(郭仁遇)를 파견하여 그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뜻을 알려서 거란을 치도록 하였다. 곽인우가 그 나라에 도착하자 그들의 군대가 극도로 미약하고 지난번 말라의 말은 다만 왕건이 과장하고 속여서 말한 것일 뿐 실제로는 감히 거란과 더불어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을 보았다. 곽인우가 돌아오자 왕무는 다시 다른 이유를 가지고 해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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