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새입니까? -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
아르노 네바슈 지음, 박재연 옮김 / 바람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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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인류의 모습

- 이것이 새입니까?

 


아르노 네바슈 글·그림 | 박재연 옮김 [바람북스] (2024)

 



영화 <록키> 시리즈 중에서 유명한 장면이 몇 가지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장면은 록키가 긴 계단을 올라 계단 아래에 있는 풍경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번쩍 드는 장면이 아닐까. 그리스 신전을 닮은 건물에서 마치 승리의 여신 니케로부터 받은 승리의 신탁을 만끽하는 듯한 그 장면 말이다. 이 장면이 촬영된 곳은 필라델피아의 한 미술관이었다. 이 미술관을 떠올린 이유는, 젊은 시절 이 미술관에서 우연히 만났던 한 작품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15년도 더 된 내 기억을 다시 열어 준 계기는 이것이 새입니까?라는 책이 마련해주었다. 이 책은 루마니아의 조각가 콩스탕탱 브랑쿠시가 연루된 재판을 주제로 한다. 그의 추상적인 조각 작품이 미국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책의 부제인 브랑쿠시와 세기의 재판이 일러주듯, 이 재판에서는 브랑쿠시가 제작한 한 작품이 수입될 때 발생한 과세 문제가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 문제의 본질은, 당대에 어느 작품을 혹은 무엇을 예술로 볼 것인가를 판단하는 문제와 본질적으로 닿아 있었다. 예술 작품을 수입하는 경우는 면세가 되지만, 일반 수입 제품이라면 판매 가격의 40%가 세금으로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읽던 중 갑자기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떠올렸던 이유는, 아무런 정보나 기대없이 방문했던 미술관에서 브랑쿠시의 작품 하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미술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키스 Kiss>라는 제목의 작품. 이 밋밋하고 네모난 조각품과의 만남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이었다. 미술관을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던 내가 알 정도로 브랑쿠시의 <키스>라는 작품은 유명한 작품이다. 어쩌면 미술 필기 시험을 준비할 때 교과서에서 보고 인상 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브랑쿠시의 작품은 높이가 내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아담했다. 게다가 작품이 바닥에 바로 설치되어 있어서 대개는 시선을 수평선 언저리 혹은 그 위를 향하게 되는 공간에서 이 조각이 그리 눈에 띄지도 않았던 셈이다. 하지만 문외한의 눈에도 교과서에서 보았던 이 소박한 조각상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돌조각에 새겨진 요철만으로도 이렇듯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추억과 정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이런 찰나가 미술관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작품과 감상자가 만나 상호작용하는 접점의 순간들이 아닌가 싶다.

 


바로 이 조각상의 주인공인 콩스탕탱 브랑쿠시가 그래픽 노블 형식의 이것이 새입니까?에서 되살아났다. 당대의 예술 담론 공간에서 화제이자 관심 인물이 되었던 재판이 소개가 되고 있다. 이 세기의 재판에서 논의의 중심이 된 그의 작품은 미국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브랑쿠시로부터 구매한 <공간 속의 새 Bird in Space>라는 작품이었다. 스타이켄이 이 작품에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미국의 세관이 이 작품에 세금 4000달러를 청구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해당 금액에 대한 관세율이 40%라고 나오니까, 이 재판이 있던 1926년 당시에 거의 1만 달러에 해당하는 대금을 지불하고, 추가로 4000달러(지금도 큰 돈이지만 100년 전인 당시에는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타이켄은 예술 작품으로 구매했기 때문에 당연히 면세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이 물건을 예술로 볼 것인가, 금속으로 제조된 일반 상품으로 볼 것인가를 따지는 재판이 되었다.

 


지금의 상식으로 볼 때 법원에서 어느 작품이 예술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상황은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이 재판에서 제기된 물음은 언젠가는 우리가 마주하게 될 상황이기도 했다. 예술의 역사를 좀 단순히 되돌아보면, 예술 사조는 기존의 것에 대한 개선에서 나아가 비판과 반동의 움직임을 통해 그 정의가 끊임없이 변하고 외연이 확장되어 온 것이 아닌가. 브랑쿠시의 재판은 당시에 이미 현대 미술사에 큰 전환을 가져왔던 마르셀 뒤샹의 작품 <Fountain>(1917)이 등장한지 9년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그러니 브랑쿠시 작품에 대한 재판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아직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새로 등장한 결과물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어떻게 평가해야할지를 마주하게 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것이 새입니까?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우선 브랑쿠시와 작품을 구입한 스타이켄 측이 법정에서 해당 작품이 지닌 닮음의 정도독창성을 입증하기를 요구받았다는 점이다. 판사들은 공간 속의 새라는 제목에서 이 작품이 와 얼마나 닮았는지를 여러 창작자들을 불러 묻고 답변을 듣고자 했다. 물론 이 문제만으로도 이 문제는 결국에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아주 섬세하게 어느 새의 모습을 닮게 조작한 작품을 먼저 떠올려보자. 그리고 같은 새를 대상으로 새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조각 작품으로부터 점점 지워나가면 어떻게 될까? 추상성이 점차 증가하면 어느 순간에는 브랑쿠시의 작품처럼 새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전혀 닮지 않은 결과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대상과 얼마나 닮아야 예술작품인가?’라는 질문도 제기될 수 있을 텐데, 이 문제는 역설적으로 절대적이고 특정한 기준이 존재할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게 된다. 예술이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실천된 전통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 창작자들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미메시스(모방)’의 전통이야말로 인류에게 오래 전해진 예술작품에 대한 기준이 되었다. 그러므로 대상을 실제와 닮게(완벽할 수는 없지만 불완전하게나마) 형상을 그려낼 수 있다면, 그 기술만으로도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 셈이다. 제욱시스라는 그리스 화가가 벽에 그린 포도나무에 새들이 진짜인줄 알고 내렸다가 벽에 부딪쳐 죽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재판에서 변호사 측(스타이켄)에게 요구된 답변은, 해당 제품이 과연 유일무이한 원본인지를 입증해달라는 요구였다. 재판부는 브랑쿠시 작품의 독창성을 입증하기를 요구했던 셈이다. 복제될 수 없는 화가 고유의 색깔이 담겨있는 작품이 훌륭한 예술의 전제조건이었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금속 공예 장인들도 브랑쿠시의 금속 조각 작품을 거의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복제해낼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장인의 복제품과 브랑쿠시의 작품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무엇이 브랑쿠시의 작업물을 예술로 만들어주는 것일까? 이 질문이 당시 재판이 해결해야 했던 질문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이쯤에서 이것이 새입니까?를 읽으며 함께 읽었던 책 한권을 떠올려 보자. 아서 단토의 <무엇이 예술인가 What Art Is>이란 제목의 책이다. 단토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비평가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도를 받았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읽기 쉽지 않았던 단토의 책에서 기억나는 내용을 가져와 보면, 그는 예술의 정체를 구현된 의미로 판별하는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다시 말해 예술의 정의는, 예술가(창작자)의 의도가 어떻게 물성화(구체화)되었는가를 파악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이해되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작품처럼, 상점에서 파는 제품으로서의 소변기와 뒤샹이 사인을 하여 눕혀 놓은 작품 은 외관상 구별이 불가능하다. 기성품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토가 평가하는 뒤샹의 공적은 그가 우리에게 대상을 보는 다른 방식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뒤샹의 후원과 격려를 받은(따라서 예술품 수집가 페기 구겐하임의 관심과 지원을 받았을 법한데) 브랑쿠시의 작품이 일으킨 예술의 정의에 대한 일련의 재판과 대중 앞에서의 담론 형성 과정은 당대 사회의 동시대인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예술의 정체성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 같다. 이것이 새입니까?를 읽으며 놀랐던 또 다른 한 가지는, 브랑쿠시의 작품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판결하기 위해 밟아간 공부 혹은 탐색의 과정들, 그리고 마침내 이 작품을 예술이라고 판결을 내리는 과정이었다. 물론 현재의 관점에서 당시의 판결 기준을 살펴보면 예술로 인정할만한 기준에 제약이 많고 부실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를테면, 복제품이 두 개를 초과하지 않는다는 조건부 원본의 제약이나, 예술 작품의 조건이 전문 예술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어야 한다는 조건, 그리고 단순 기계 공정을 통한 제작이 아니라 수작업으로 제작해야 한다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지엽적인 조건들인 셈이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판사가 브랑쿠시의 작업물을 예술 작품으로 인정하는 판결로 이어진 결과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본 법정은 이 물품이 면세 대상임을 판결합니다.”(117)라는 결말이 정말 놀라웠다. 이 장면은 한 사회가 성숙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요건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사례로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내게는 이러한 과정이 인식과 지평을 넓혀가는 사회적 리터러시의 문제로서 읽힌 대목이었다.


 

예술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들을 되돌아 볼 때, 브랑쿠시의 재판과 아서 단토가 언급한 뒤샹및 앤디 워홀의 작업을 통해 한 가지 더 배운 점은 예술의 범주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는대상만을 예술의 범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름답지 않은 대상, 심지어 추하거나 역겨워 보이는 대상도 예술의 범주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통찰에 대해 동의할만한 여지가 있다면, 그건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시도하고 만들어 온 대상들을 예술로 여길 수 있도록 경험과 사유의 폭을 확장시켜온 과정에 힘입은바 클 것 것이다. 이런 모습이라면 이후의 예술 역시 기존의 전통이 마주하거나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시각을 예술이 계속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해, 예술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라는 것이다. 혹은 인간의 맹점을 새롭게 발견하여 비추어주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현대 미술을 개념 미술이라고 말하게 된 것은, ‘해석의 대상으로 삼았던 작품 감상에서 이제는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새로운 사유/개념을 발견하는 경험으로의 나아감을 이르는 말일 테다. 이 과정은 결코 직관적으로 다가오거나 이해되는 과정은 분명히 아니다. 현대 예술은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 관람자가 예술을 접할 때 단토가 언급한 작품에 구현된 의도를 곧바로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 의도에 다가가는 과정에 예술의 본령이 있지 않을까. 작품에 투영된 예술가의 의도에 조응하는 감상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행위로서 말이다. 따라서 관람자로서의 우리는 더욱 구현된 의미의 모호함과 마주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브랑쿠시의 재판은 후손들에게 우리의 맹점을 발견하고 새롭게 바라보도록 길을 열어준 사건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Bird in Space' (콩스탕탱 브랑쿠시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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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
전영애 지음, 최경은 정리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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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살린다: 앎에서 삶으로 향하는 공부

- 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

 

전영애 지음 | 최경은 정리 [문학동네] (2024)

 



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이하 괴테 할머니)을 읽는다. 책을 통해 저자인 괴테 할머니전영애 교수의 발자취를 여러 방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러 발자취 가운데 언제나 만나게 되는 모습이 있다. 무엇보다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간절함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괴테 할머니를 이해하려면 그의 배움과 앎에 대한 간절함에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은 결핍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며,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우선 저자는 한결같은 간절함으로 평생 공부해 왔다. 그에게 공부란 무엇이었을까? 짐작컨대 공부가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책을 통한 지식을 얻는 행위보다 넓은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괴테 할머니는, 공부란 결국 삶을 대하는 자세 같은 것”(22)이었노라 말한다. 진실로 살아있다는 것은 곧 부단히 공부하는 일이라는 말로 들렸다. 이 행위가 모여 한 개인에게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으며, 그가 마주하게 된 세계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던 셈이다.


 

뿐만아니라 저자가 실천해 온 삶의 태도는 괴테에 빚진 바가 크다. 괴테가 삶을 대했던 태도는 저자가 실천해온 삶의 행보마다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괴테 할머니의 소개에 따르면, 괴테는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열어 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괴테 할머니는 이렇게 일러준다. 놀라며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려 있음을 인간이 지닌 최상의 부분으로 보는 것이지요. 괴테는 이를 파우스트가 가진 추동력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29) 괴테가 얼마나 열린 인간이었는지는, 그가 관심을 갖고 평생 공부한 분야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괴테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분야만 해도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학, 회화, 색채론, 식물학, 광물학 등이다. 무엇보다 괴테의 삶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호기심이란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워하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괴테는 여기에서 나아가 자신의 결핍을 자각한 상태로 둔 적이 없었던 것같다. 자신의 결핍을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차이일지 모르지만, 무엇보다 평생 자신의 부족함을 부단히 극복해 갔던 초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였다면 모든 걸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며 자기합리화를 했을 법한데 말이다.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여우의 신포도와 같은 상황으로 곧잘 돌아가곤 하는 나의 습관을 돌아보게 한다. 이는 우리가 늘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괴테 할머니는 나의 마음을 이미 들여다보셨는지, 괴테의 말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준비하지 않고, 기다려내지 않고, 쟁취하지 않았던 좋은 것과 마주친 일은 나의 인생행로에는 없습니다.”(49)


 

괴테는 이미 청년 시절부터 그냥 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고, 그 인내와 기다림의 가치를 일찍 이해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다. 내 독서 감상이 다소 자기계발서 같은 교훈 찾기가 되어버린 감이 있지만, 괴테라는 인물의 태도와 행보를 볼 때마다 항상 배울만한 점을 찾을 수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나의 삶은 언제나 결핍투성이였지만, 대부분 기다려내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일깨워준다.


 

견뎌내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극복해 내는 일’, 괴테의 태도는 나의 삶뿐만 아니라 책읽기도 되돌아보게 한다. 책을 막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시기에는 읽은 책이 너무 없어서 그저 많이 읽어보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책만많이 읽는다고 그 사람이 건전한 상식과 윤리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었다고 말한 명사들 중에 어떠한 형태의 권위나 권력의 논리에 동조하거나 심지어 혐오에 앞장선 이들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책읽기란 자신의 결핍(타인에게 보여지는 욕망)을 메워주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어떤 자격처럼 여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본래텍스트는 그 자체로 엘리트주의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에게 애초에 자연스러운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텍스트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하나의 권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텍스트에 익숙한 능력은 돈과 다를 바 없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이른바 책읽기혹은 독서행위를 통해 축적된 지식이 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권위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독서 혹은 독서를 통한 지식이 이른바 물신화된 사례를 여러 차례 보고 있다.


 

이와 달리, 괴테 할머니가 소개하는 괴테의 모습에서 공부는 책읽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공부가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괴테의 공부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바로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그의 지향점이 아니었을까. 그에게는 이것이 인생의 우선순위였던 것 같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더라도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곳, 익숙하고 안락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보고 느끼며 살아봐야 겠다는 결심으로 마차에 올랐을 한 서른일곱의 괴테를 생각해 보았다. 삶의 관성을 과감히 물리친 청년 괴테의 모습을 말이다. 괴테 할머니는 괴테의 선택을 기존 규범으로부터의 떠남’(98)이라고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괴테 할머니에서 저자가 소개한 괴테의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표현을 꼽으라면, “리벤 벨렙트 Lieben belebt."(50)를 들 수 있겠다. 이 문장은 사랑이 살린다는 뜻이다. 두 단어로 이루어진 이 간결한 문장은 죽어 있는 것을 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괴테가 60여 년 간 손보았던 작품 파우스트는 결국 우리의 삶에 사랑이 남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표현은 80대의 괴테가 인간을 바라볼 때 느꼈던 마음가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때론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모를 내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대한 존재이기도 하다. 80대의 대문호가 인간을 바라본 시선에는 분명 사랑이 담겨 있었으리라. 괴테의 사랑이 살린다라는 표현은 한강 작가의 감동적인 노벨상 수락 연설을 또다시 떠오르게 해주었다. 대문호가 남기고 간 작품들을 관통하는 배움은 결국은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느꼈다. 한강의 연설을 듣다보면 그는 자신의 어느 작품에서든 기도하듯 사랑을 담고자 했던 작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 인간에게서 여전히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발견하다니 말이다. 괴테 할머니가 보여준 괴테의 삶은 모두 앎에 대한 간절함에서 출발한 공부가 결국 삶으로,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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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19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작년인가? TV에서 전영애 교수 다큐멘터리 본 적이 있는데 꽤 인상적이었죠.
자그마하신 분이 낮에는 땅을 일구고 밤에는 번역하시고.
항상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는데 궁금하더라구요.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나 싶어서.
 

알라딘 서재 관리팀에서 답변을 받았습니다.

제가 소설가 김진명 씨의 세금 체납 기사[경향신문 12월 17일자 신문]를 보고 

저자의 특정 서적에 100자평을 달아 놓았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저자분이 세금 체납액이 28억 9100만원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분은 먼저 세금부터 내셔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말입니다.


서재팀에서는 도서 자체에 대한 감상이나 서평의 성격에서 벗어나기에

컴뮤니티 이용 원칙에 따라 해당 상품페이지에서 보이지 않게 해두셨군요.


조심스럽게 답변해주신 내용 잘 이해하겠습니다.


작가의 세금 체납 문제로 과세당국에서 실명 공개가 결정되었다는 기사에서 보다시피 체납을 한 당사자의 문제이기에 저자의 도서를 판매하는 출판사의 판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학창시절 작가의 소설들을 나름 열심히 

읽었던 독자이기도 하며,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나 그밖의 사항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개인적인 악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지요. 


제가 100자평에 쓴 내용을 보시면 알겠지만, 작가 개인에 대한 인간적인 

비방이나 인신공격을 한 것도 아닙니다.

저의 의도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그저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하라는 

제안인 것입니다. 


출판사에선 600만부 이상의 밀리언 셀러인 국민작가로 홍보하지만, 

그만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의무도 다 해야하지 않을까요.

저는 세금을 체납한 사항에 대해 윤리적인 문제제기를 한 것 이니,

판매에 악영향을 줄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독서인으로서 특정 출판사에 대한 악감정은 더더욱 없지요. 

그러니 읽지도 않은 소설가의 책에 대해 별점 테러를 한 사항에 대해서는

출판사측에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따라서 본 글에도 소설가의 저작을 보여주는 도서에 대한 노출은 삼가도록 합니다. 


서재팀의 해당 100자평 삭제도 수긍하겠습니다. 

세금 체납은 작가 본인의 문제이니까요.


그저 작가 본인이 세금을 조속히 납부하면 될 일입니다. 

문단의 어른으로서 책임있는 행동을 기대하겠습니다.


이상 소설가 김진명씨의 세금 체납에 대해 100자평을 하고

특정 도서에 대한 100자평을 삭제한다는 알라딘 서재팀의 답변에 대한

일개 독자로의 입장입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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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어느 물고기의 이야기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 최재천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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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연어의 시간>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책에 <대구>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어서 언제 나오려나 했는데, 드디어 나왔군요!!!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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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전쟁 - 10만 부 기념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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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작가인 저자분이 세금 체납액이 28억9100만원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분은 먼저 세금부터 내셔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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