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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의 시대 - 진단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수잰 오설리번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11월
평점 :

과잉 진단의 문제와 당사자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 《진단의 시대》
: 진단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수잰 오설리번(Suzanne O'Sullivan) 지음
이한음 옮김 [까치] (2025)
최근 집안 어르신 한 분이 임플란트 시술을 받으셨다. 여기까지는 어르신의 연세를 고려할 때 부실해진 치아를 보완하는 의료 행위로서 수긍할 수 있는 팩트일 수 있다. 다만, 나의 의문은 어르신의 연세가 95세라는 점이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임플란트는 모든 이에게 적용할 수 있는 치료 시술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아무리 치아가 불편하다고 해도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임플란트 밖에 없었을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으나 95세가 된 노인에게 임플란트를 권한 의사는 어떤 근거로 시술을 제안하고 시행했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또 다른 기억도 떠오른다. 이미 몇 년 전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뉴스에서 OECD국가 중 유독 우리나라 산모들에게 적용되는 제왕절개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통계를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왕절개는 개복 절차로 전신 마취까지 해야 하는 상당히 큰 의료 시술이다. 자연 분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료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제왕절개 수술로 인한 출산은 산모의 회복도 자연 분만보다 몇 배 느리기도 하고, 따라서 산모의 회복에 필요한 의료 절차나 비용도 그만큼 더 많이 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출산 과정에서 유독 한국인만 산모가 제왕절개를 해야만 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 아닐 텐데,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제왕절개는 누구를 위한 의료 행위인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풍자 문학의 대가라고 불리기도 했던 조너선 스위프트가 신랄한 독설과 문제의식을 드러낸 자신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 이렇게 말하는 대목을 만났다. “의사에게 있어서 가장 탁월한 능력은 진단하는 기술이다.”(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325) 풍자의 대가인 그가 이 문장을 쓴 맥락은, 일부 의사들이 자신의 무지를 가리고자 의사의 권위를 내세우는 위선을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나아가 정치가나 국왕 역시 이 비판의 대상에 넣고자 했다. 과거에 환자의 질병이 악화되면, 사기꾼 의사는 환자가 곧 사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함으로써 그 예언이 이루어지거나, 예상 외로 환자가 회복하면 자신이 병을 치료하는 약품을 적절히 사용했다고 말하는 행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신경과 전문의이자 작가인 수잰 오설리번의 《진단의 시대》를 읽으며 진단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앞의 두 사례와 더불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물론 저자 수잰이 스위프트과 같은 독설과 풍자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 두 저자 모두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제도적, 구조적 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들여다보았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수잰 오설리번과 조너선 스위프트는 모두 아일랜드의 더블린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흥미를 잃지 않게 해주었다.
진단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는, 환자가 지닌 병의 상태를 의사가 판단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의학에서 진단이 갖는 의미는 좀 더 복잡해 보인다. 저자가 말하는 ‘진단’은 병의 정체를 밝히고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넘어선다. 의사가 내리는 진단 행위는, 환자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선이나 삶의 의미에까지도 영향을 주는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곧 오늘날 자격을 갖춘 의사의 진단이란,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단이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행위라는 점을 한 가지 사례로 따져보자. 자폐증의 경우다. 지구상의 모든 ‘자폐증’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정도의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자폐 진단을 받은 이들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데 반하여, 사회는 명확한 기준으로 이들을 ‘범주화’하길 요구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과연 누가, 어떻게 이 ‘기준’을 정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나아가 의학의 발달로 이 기준이 매우 합리적으로 규정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에도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뿐만아니라 자폐로 진단을 받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구별 짓기, 바로 ‘낙인 효과’도 의도치 않게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자폐 경계성’ 아이들에 대한 주변인의 시선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진단 범주에 포함된 아이의 정체성과 심리적 상태, 자존감, 행복감 등에 오래 지속되는 영향을 남길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ADHD 진단이나 우울증 진단에도 이와 같은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례 모두 ‘진단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진단’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 전체를 통해 유지되는 관점은, 진단 행위에 좀 더 신중해야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그는 현대 의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진단 행위’가 정도를 벗어남, 곧 과잉 진단, 과잉 의료 행위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나는 앞서 언급한 집안 어르신의 임플란트 시술 행위나 우리나라 제왕절개 시술의 유독 높은 비율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자폐증 진단이나 ADHD 진단에서 해당 진단 범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은, 바로 이 기준 정하기, 혹은 경계 짓기의 모호함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보완하고자 ‘스펙트럼’이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했을지 모르나,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증상을 가진 이들을 몇 가지 범주로 단순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오염 물질이나 공해의 증가, 스트레스의 증가 등이 자폐나 ADHD 진단 결과의 증가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거의 폭발적인 증가라고 여겨질 정도의 즉각적인 큰 변동을 초래하는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저자는 오히려 진단 기준, 혹은 경계 위치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보는 듯하다. 현대 사회에서 자폐증 진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통계는, 새로운 진단 기준/범위의 설정으로 인해 폭넓은 증상의 차이가 단순화되고 새로운 진단 범주로 편입되면서 발생하는 결과라고 해석될 수 있겠다. 저자는 이 지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들여다본 셈이다.
진단은 이처럼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에 달려 있다. 전문가라도 결국 사람의 판단과 결정에 의존하는 까닭이다. 특히 과잉 의료, 과잉 진단의 결과는 간단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누군가가 과잉 진단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고 해보자.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는 추가 과정, 곧 한 개인에게는 추가 검사와 우울증 진단에 따른 약물 처방과 치료 과정이 개입하게 된다. 당사자의 입장에선 어떤가. 진단을 받은 당사자는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을 얻게 될 수 있고, 기존에는 의식하지 못하거나 심하지 않았던 불안 증세로 더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도 ‘우울증 환자’에게 적용되는 의료 행위에 대한 보험 처리, 약물에 대한 보험 사항이 추가로 검토되고 시행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지 않았다면, 진단에 따라오는 일련의 의료 행위나 당사자 혹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불필요했을 것이란 의미다. 따라서 저자가 반대로‘과소 진단’으로도 진단을 받은 이의 고통과 불편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진단하는 행위 그 자체는 의사의 전문 행위이면서도 주관적인 성격을 내포하는, 복잡하고 책임감을 요하는 행위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저자는 의료계의 과잉 진단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의료계의 노력과 진단에 대한 새로운 시선도 필요해 보인다. 진단을 받은 당사자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자주 눈길이 갔던 지점은, 당사자 입장의 관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진단이 가져오는 ‘낙인’효과에 대한 점이다. 최근 어느 유명 과학커뮤니케이터가 방송에서 인간의 유전 형질과 관련한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된 사례가 있다. 그는 ‘쌍커풀’이 대립 형질 가운데 ‘우성’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모양인데, 여기에 생물학자들의 거센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쌍커풀이 ‘우성’이라는 지식은 현재 중학교 3학년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대목이라 틀린 정보는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나의 짧은 지식을 동원하여 이해한 바로는, 이 문제에 몇 가지 사회·문화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몇 가지 특정 대립 형질이 비교적 뚜렷하여 ‘우성과 열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언급된 교과서적 지식이 지니는 맥락이 조금 미묘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하게 생물학적 관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유전자의 형질을 지시하는 개념이지만, 이 표현이 자칫하면 왜곡되어 소비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우성과 열성’이 대중의 인식으로는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방송 매체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공영 방송에서 ‘우월한 유전자’라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고 있지 않은가. 이 표현은 사회 속에서 혐오와 차별에 이용되고 소비될 여지가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이 인식이 우생학적 사고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문제는 쌍커풀과 같은 인간의 대립 형질이 ‘비교적 뚜렷’하다고 해도, 멘델이 완두콩으로 한 실험 사례처럼 특정 형질의 발현 기작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멘델이 완두콩에서 비교한 대립 형질은 하나의 유전자가 특정 형질을 발현할 정도로 단순한 사례다. 반면 인간의 대립 형질의 경우, 어느 유전자 하나가 쌍커풀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인간의 형질은 대개 수많은 유전자가 개입하여 발현되는, 꽤나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드러난다는 점이다. 쌍커풀이 우성과 열성이라는 매끄럽고 단정적인 판결을 내리기에 여전히 모호한 지점이 있다. 그러므로 생물학자들의 비판을 받은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발언이 현재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기에 완전히 틀린 지식은 아닐더라도, 이러한 유전자 발현의 우열의 문제, 경계 짓기의 문제가 언제나 매끄럽고 분명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쌍커풀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존재가 ‘열등’하게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이렇게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식은, 특히 교과서 저자들이 주의를 기울여 앞으로 다듬어가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쌍커풀의 ‘생물학적’ 우성/열성 판단은 인류 사회의 오랜 이분법적 논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른바 ‘정상/비정상’의 문제와도 잘 결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저자가 사례를 든 ‘자폐증’, ‘ADHD', '우울증’, ‘암’ 진단 같은 문제 역시 의사/전문가의 진단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진단 범주에 포함된 당사자의 경우, 이들은 진단 이후 사회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문명이 고도로 발전함으로써 진단의 범주에 들어간 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료의 발달, 진단 도구의 발달과 고도화로 이전에 규정된 ‘정상 범주’가 협소해지며 상대적으로 과잉 진단이 증가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에 이 당사자를 바라보는 비-당사자의 인식과 태도가 중요해진다. 나와 다른 특징을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 역시 관용과 배려의 시선에서 더 깊어져야 할 일이다. 또한 어느 진단 범주에 포함된 당사자는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진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존재로서 관심을 갖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이 당사자들은 의사의 진단 선언에 수동적으로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불안하고 어려운 순간을 직접 경험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공동체는 진단 당사자들의 곁에서 이들의 경험과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혼자가 아님을 알도록 응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