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요안나 콘세이요 지음, 백수린 옮김 / 목요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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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요안나 콘세이요(Joanna Concejo) 지음 | 백수린 옮김 | [목요일]

 


여름의 끝(La fin de l'été)을 추억하는 애도의 기록

 

아내를 따라 그림책을 보다보니 그림책에 대한 나의 편견을 깨닫게 된다. 최근에 어른을 위한 동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란 문구를 종종 접했지만, 여전히 내가 스스로 찾아 읽고 느끼고 판단하지는 못했다. 그림책은 대체로 텍스트가 적어서 금방 읽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온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아동용 그램책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림책의 독자에는 제한이 없다. 이번에 읽은 그림책은 까치밥나무 열매가 읽을 때라는 제목의 책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의 책이었다.

 

요안나 콘세이요. 작가 소개에 따르면 그녀는 1971년 폴란드에서 출생한 일러스트레이터로, 현재 프랑스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그림책 관련 행사 및 도서전으로도 유명한 볼로냐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2004)로 선정되었고,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2018)한 이력이 보인다. 이제는 그림책과 관련하여 볼로냐를 비롯한 해외 무대에서 점점 더 많은 국내 작가들의 소식을 접하기에 이 상의 위상에 대해 대강은 알고 있다. 짧게 소개된 작가의 이력만으로도 콘세이요의 다른 작업들이 궁금해진다.

 

처음 책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책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책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편견을 최대한 줄이고, 겉에 표현된 이미지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겉표지를 펼치면 소녀로 보이는 인물 그림이 나온다. 어딘가에 걸터앉아 손에는 열쇠로 보이는 물건 하나를 쥐고 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그림 속 들판에 숨어 있던 새들이 놀라 달아나듯 새들이 날아오르는 장면이 보인다.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듯, 들판은 풍요로운 느낌 보다는 황량한 겨울 들판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 페이지에 보이는 것은 정면을 응시하는 것 같은 소녀의 모습이다. 가는 펜과 색연필로 그린 스케치들이 계속 이어지며 화면을 구성한다.

 

그림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마치 누군가의 빛바랜 사진 앨범을 넘기면서 구경하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작가의 작업들은 언젠가 그녀가 응시하고, 감각하여 각인된 기억들을 소환하여 이미지로 정착해둔 스냅 사진처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정면을 응시하는 듯 하는 소녀의 스케치는 오래 전 부모님이 들고 있던 필름 카메라 렌즈를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책을 읽으면 곧 등장하는 푸른 앙리는 작가의 아버지로 보인다. 소녀의 모습은 앙리가 카메라 프레임을 통해 바라본 어린 시절의 작가일 듯하다. 책에 그려진 그림들은 접착용 테잎으로 붙여둔 사진처럼 구성되어 있다.

 

커튼 달린 창틀, 컵을 잡고 있는 손, 얼굴 표정을 그리지 않은 소녀의 두상들... 이런 단편적인 그림들은 모두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보인다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명징하며 지극히 사진적이기도 하다. 또 고요하고 아름답다. 그래서였을까, 콘세이요의 스케치는 책을 펼칠 때마다 새로움을 준다. 작가의 소소한 스케치들이 새로운 기억을 소환한다.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책을 더 읽으면 작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은 일흔 살 즈음으로 보인다. 아마도 지난 늦여름일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그림책 작업은 이제 중년이 된 딸(작가)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담아 낸 것이리라. 아마도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전형적인 아버지였을 것 같다. 서로가 소통이 많지 않던 부녀 관계. 이제는 프랑스에 정착하여 작업을 하는 작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시골집에 와서 아버지가 살던 공간과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림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추억이 묻어나고, 죽음이라는 절대 법칙에 대한 자각이 느껴진다고 하면 나만의 착각일까. 지난 글에서 처음 읽었던 그림책처럼 공교롭게도 이번 책을 관통하는 주제도 죽음이다.

 

일요일의 역사가라는 별명이 있는 프랑스의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에서 예술사적 관점으로 죽음을 이야기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들이 삶에 집착한 간접적인 증거로서 정물화를 언급한다. 특히 중세인들은 죽음이라는 소멸 현상을 정물화를 통해 삶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북부 유럽어권에서 정물화를 ‘still life'라고 표현하고, 더구나 라틴어 권에서는 ’nature morte’, 죽은 자연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했다. 게다가 모든 문학 작품에는 사랑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등장한다. 그림책이라고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림책이 어린이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님은 그림책이 다루는 주제를 보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책에서도 삶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삐삐롱 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언급했던 것처럼, 적절하고 타당한 방식으로 전달한다면, 아이들도 죽음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인식하고 나름대로 소화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그림책을 읽어내는 일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 메시지를 찾아내는 보물찾기 놀이와 같단 생각을 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그림책 읽기란, 그림을 통해 작가의 손이 지나간 흔적을 들여다보고, 저자의 기억과 상상을 더듬어 따라가는 일이다.

 




내 시선은 다시 앙리가 살던 집의 찬장에 머문다. 안개처럼 반투명해보이는 유리문이 있는 찬장 아래에 피클을 담는 병이 보인다. 이 병에는 앙리가 숲에서 가져와 넣어 둔 까치밥나무 잎이 들어 있다. 까치밥나무 열매는 여름에 익는다고 한다. 아마도 앙리는 이걸 병에 넣어 둔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매일같이 산책하던 오솔길을 나섰을 것이다. 주머니에는 매일 확인하는 우편함 열쇠를 넣은 채로 말이다. 우편함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앙리는 입김이 날 정도로 쌀쌀해진 어느 날 익숙한 오솔길을 나섰을 것이다. 집 앞에는 돌아올게요라는 메모를 남긴 채로. 하지만 이 산책이 앙리가 세상에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였을 것 같다. 그렇게 앙리는 푸른 안개가 낀 어느 날 산책길에서 벤치에 앉아 깃털처럼 가벼워졌을것 같단 생각을 해본다.

 

이런 자세한 정황은 책을 보고 내가 상상해본 내용이다. 책에 표현된 시선을 따라가면서 작가의 추억을 들여다 볼 뿐이다. 저자는 앨범을 보고 외부를 관찰하는 것 같지만 그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묻혀 있던 작가의 기억, 곧 내면의 풍경이다. 딸은 아마도 무뚝뚝한 아버지와 다정하게 대화해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가물했을 것이다. 작가는 그림 작업을 하면서, 먼저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 지내던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듯하다. 작가는 부모님의 결혼사진과 어렸을 때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카메라 렌즈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았을 아버지의 시선을 느끼지 않았을까. 새롭게 다가오는 자각이다. 작가의 시선은 이제 지난 여름 아버지가 담아 두었을 까치밥나무 잎에 머문다. 꽃무늬 벽지가 있는 한 쪽 벽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옷이 그대로 걸려 있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했던 시절, 웃음소리와 눈물이 그대로 배어있을 것만 같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앙리는 여름이 끝날 무렵, 푸른 안개가 낀 어느 날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런 까닭에 까치밥나무 열매는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물이면서, 소멸하는 자연을 대변하는 사물이 된다. 앙리가 즐겨 산책하던 풍경은 이제 작가의 추억 속, 여름의 끝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배경을 상상해보다 책의 표지를 보니, 푸른색으로 그려진 앙리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진다. 책의 겉표지를 넘길 때 보았던 소녀(아마도 어린 작가의 모습)의 손에 든 열쇠는 아마도 아버지의 우편함 열쇠가 아니었을까. 우편함 열쇠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여는 열쇠일 수도 있겠다. 혹은 소통이 별로 없던 딸의 편지가 와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림책을 이렇게 읽어도 되나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독자의 상상을 제한해주는 텍스트가 거의 없는 그림책을 읽는 일은 보다 더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림책은 언어를 떠나 공통의 정서에 호소할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해석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림책을 읽어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에 나는 그림책 읽기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보니 그림책에는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고 다르게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그림책은 그만큼 풍부한 자유도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각각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특이점처럼 느껴진다. 묻혀 있던 무수한 기억들이 공존하는 지점인 동시에 새로운 상상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는 전환점으로서 말이다.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면, ‘지난 여름의 끝을 추억하던 작가가 아버지에게 전하는 한마디가 담겨있다. 빨간 까치밥나무 열매가 읽을 때 즈음, 아마도 푸른 안개와 함께 풍경 속으로 사라졌을 법한 작가의 아버지에게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는 인생에 여전히 미숙했고(우리 모두 그렇지 않은가), 특히 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몰랐던모든 아버지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자 애도의 메시지다.

 




 같은 책을 읽고 쓴 옆지기의 리뷰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https://blog.aladin.co.kr/734094286/12424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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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2]

 

 

지난 글에서는 파울 첼란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따라가 보았다. 오늘은 다른 작가의 글에서 우연히발견한 파울 첼란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독일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폴란드 유대인으로서 20세기 전반이라는, 인류사의 유례없는 굴곡을 살아낸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말년에 그가 남긴 회고록 나의 인생 Mein Leben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우연히 다시 그의 회고록을 넘기다가 라니츠키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언급한 대목을 발견했다. 사실 우연히 파울 첼란의 전집이 나온 것과 비슷한 시기에 라니츠키의 회고록을 읽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시의 발견을 출발점으로 삼아 첼란의 삶을 좀 더 이해해볼 수 있을까 했던 것이 이번 기획(?)의 동기다.

 

라니츠키의 회고록 중에서 나의 눈길을 붙들었던 대목은 이렇다.

 

이튿날 토지아(결혼 전의 아내)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땅에 묻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얼마 후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 나오는 공중 무덤뿐일 것이다. 유대인의 자살이 아직은 생소하던 때라 묘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나의 인생, 178)

 

다시 이 부분을 읽어보니 무척이나 생소하다. ‘공중 무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을 미화할 의도는 없다. 다만 모든 자살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믿는다. 이 메시지의 앞에는 세상을 향한’, 혹은 사회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행동함으로써 언어로 이야기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여기에 인용한 대목은 나치의 위협과 굴욕적인 대우를 받던 폴란드 망명 시절 이웃집에 살던 랑나스씨가 자살한 사건을 언급한 부분이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랑나스씨의 딸을 위로해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랑나스씨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인연은 결혼으로, 그리고 정말로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게 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지나는 역사의 굴곡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침 전영애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적 있는 죽음의 푸가(민음사, 2011)를 먼저 구하게 되어, 공중 무덤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시를 찾아보았다. 이 시는 1952년에 출판된 첼란의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실린 죽음의 푸가라는 제목의 시다. 그리고 이 시는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이 시집에서 가장 유명해진 시라고 한다. 참고로 시인의 집에서 전영애 교수는 이 시집이 1953년에 출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97), 큰 문제는 아니겠으나, 출판연도가 1952년인지 아니면 1953년인지 정확한 것으로 수정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집은 이미 첼란이 파리에 정착한 1948년에 적은 부수로 출판한 시들을 재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의 푸가는 그다지 길진 않은 시지만, 번역자의 저자권 문제도 있으므로 여기에서 전문을 인용하지는 않는다. 이번 글에서는 시에 대한 소개와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  (죽음의 푸가민음사, 전영애 옮김, 2011, 40-41)

 

내가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시인이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너무나 어두운 얘기만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시를 상상해보기 위해 아버지를 화장하던 날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던 검은 연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에 나를 낳아 준 존재가 매여 있다는 느낌, 더듬을 수 있는 형체가 사라져버렸다는 황망함이란 대체불가 한 것이었다. 그렇게 비쩍 마른 한 몸도 편안히 누울 수 없었을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매일 가스실로 향하는 행렬과 굴뚝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를 목격해야 했을 테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매일의 의식처럼 이들의 재를 들이마셔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동포들의 재를 들이마셨던 수용소 생존자들이 하나 같이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과 같은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한 적도 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의식을, 경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첼란의 시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쓴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는 글을 읽었던 기억으로 이어졌다. 식인 부족의 문화를 연구하기도 했던 그는 서양인들이 이 부족들을 미개인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편견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야만적인 자신의 문화를 돌아보았다. 식인 행위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부모나 지인을 태운 재를 마심으로써 이들을 자신의 내부에 모시는의식에 더 가깝다.


고고학자 강인욱의 책 테라 인코그니타에서도 식인 행위의 첫 번째 배경을 사랑의 발로라고 언급했다. 떠나간 가족, 친구를 보내는 환송 의식의 하나로 그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먹음으로써 죽은 사람이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 한다고 믿는 사랑의 발로”(63)라는 해석이다. 물론 첼란이 경험했던 비통하고 비인간적인 경험과 레비-스트로스의 관점, 그리고 일반적인 식인 행위의 시각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첼란이 살아남의 자의 죽음을 증언하는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가 나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겠다. 곧 다른 동기에서지만, 타인의 재가 내 몸 안에 들어온다는 것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청년 파울 첼란의 무대로 돌아온다. 지난 글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년 시인 첼란과 미래의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럽을 관통했던 역사를 기록했다. 193811, 독일에서는 나치가 유대인의 건물을 파괴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폭력을 자행했던 수정의 밤사건이 발생했다. 조국에서 유대인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길이 막힌 파울 첼란이 프랑스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위해 프랑스로 가던 시점에, 라니츠키의 가족은 불과 며칠 전에 독일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했다


폴란드로 쫓겨 간 라니츠키의 가족은 나치군인들이 자행하는 폭력적인 위협을 경험한다. 라니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군은 할례를 받는 유대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남자들의 바지를 내리게 했고, 여자들에겐 관공서 바닥을 닦을 때, 이들이 입던 속옷을 벗어 걸레로 사용하게 했다. 어느 날 독일군에 호출된 라이츠키 형제는 우리는 유대인 개새끼들이다. 우리는 더러운 유대인이다.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구호를 수도 없이 복창해야 했다. 우리는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인간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이야기하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경험은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망가져버린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살아가는 동안에는 상황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로 연기하는 것일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결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여기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신체 전체를 통해 각인되니까. 그리고 의식은 신체와 분리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그저 몸과 하나를 이루는 몸의 일부이면서 몸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존자들의 경험과 기억이야말로 비가역적 법칙을 따른다. 이런 행위를 강압에 의해 따라야 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이를 강요했던 이들까지도 말이다. 이들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려면 이들이 남긴 증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이라면 가해자의 입장을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가 남긴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증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 정권의 전쟁 물자 생산을 총괄한 군수장관이었기에, 나치의 범죄 행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일부의 비판처럼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책인지는 읽어보면서 판단해볼 일이다. 최소한 리영희 선생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달은 정황이 있으니,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번엔 다른 작품에서 파울 첼란의 시를 살펴보려 한다. 그의 시 죽음의 푸가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이 시를 분명히 읽었음직한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장편소설 시간 時間에서 그 정황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의 면모를 그려내었다. 공교롭게도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던 시기(193712- 19382) 역시 독일에서 발생했던 수정의 밤’(193811)과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가해국(일본)의 작가가 피해국(중국) 장교의 시선으로 썼다는 점이다. 그는 난징 대학살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가며 가해국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여기에 첼란의 시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이다.

 

검은 점 하나로 응축된 검은 세발솥이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 세발솥은 옛사람들이 우주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우주를 데우기 위해서 수탄(獸炭)을 썼다고 한다. 세 개의 두꺼운 다리 옆에 시체 두 구가 너부러져 있다. 시체 두 구를 숯으로 해서 우주가 데워지고 있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난징을 상징하는 듯이.

(시간 時間, 박현덕 옮김, 글항아리, 73-74)

 

일본군이 수 개월간 유린한 난징의 모습을 시내로 나간 화자가 관찰하는 대목이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떠올렸다. 그 이유는 홋타 요시에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이 1955년이라는 시점과, 1918년생인 그가 30년대 말 혹은 40년대 초에 게이오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는 것을 바탕으로 상상해볼 뿐이다. 나아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 죽음의 푸가가 실린 시집 양귀비와 기억1952년 혹은 1953년에 출판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미 1948년에 자비로 소량 출판한 책에 실려 있었기에 추정해보는 것이다. 요시에는 대학시절(30년대 말, 40년대 초) 이미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당대의 시인들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보았을 법하다. 물론 첼란은 파리라는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요시에가 첼란의 시를 읽었는지 여부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첼란이 세상에 내놓은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요시에가 읽었다면, 그리고 첼란의 부모와 지인을 죽인 자들의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그 정황을 요시에가 인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 선체험으로 요시에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말이다. 나는 그 가능성에 주목하고 상상해보고자 했다. 요시에가 시간 時間을 씀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신변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을 이러한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첼란의 언어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반성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첼란(1920년생)과 라이히라니츠키(1920년생)과 동년배인 요시에(1918년생)가 겪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함께 바라볼 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마지막 길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은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수한 그의 삶을 닮았다. 시인은 투병을 시작하고, 가족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으로, 센 강 근처의 집을 얻어 따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04월 어느 날 그는 파리 센 강에 투신한다. 투병 중이던 그의 방에는 카프카의 책이 펼쳐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독 속에서 병마와 싸웠을 그는 당신이 나를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버림받은 느낌이고 외롭습니다”(시인의 집, 69)라는 카프카의 구절에 밑줄을 쳐놓았단다. 언젠가 파리에 가게 된다면 시인이 보았을 거리와 파리 식물원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았으면 한다. 그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시인의 집, 89)이라던 시인의 시선을 떠올릴 수는 있을 테니까.

 

추가로 파울 첼란의 삶과 작업에 보다 가까이 가기 전에 두 가지 작품에 주목해본다. 하나는 첼란의 후기 시집 숨결돌림 숨결수정이라는 시에 관심이 간다. 이 시는 아내 지젤의 판화작업과 나란히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 공동작업이라고 한다. “이 공동작업은 아름다운 부부애의 예로 꼽힌다”(93)라는 전영애 교수의 말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시인과 화가 부부가 만들어낸 판화 시화집이 나온다면 꼭 소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나온 파울 첼란 전집 2권에는 숨전환(1967)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것 같다.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집에서 언급한 시집 숨결돌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숨결수정이라는 시가 파울 첼란 전집 2권에서는 어떤 제목으로 소개가 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또 주목해보고 싶은 첼란의 작업 하나는 독일 시인 잉에보르크 바하만(1926-1973)과 파울 첼란이 주고받은 편지 묶음 마음 시간 Herrzeit이다.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제목은 첼란이 바흐만에게 써준 스물세 편의 시 중 쾰른, 암 호프라는 시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시는 파울 첼란 전집 1권에 실려 있다. 쾰른, 암 호프는 두 사람이 쾰른에서 재회했을 때 첼란이 써준 시다. 시인의 말년에 두 사람은 시를 매개로 하여 많은 교감을 나누고 사랑했던 사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전후 독일 문인들의 모임인 47그룹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룹에는 독일 문학계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모여 있었다. ‘47그룹은 첼란과 바흐만을 비롯하여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까지 참여하던 모임이었다.


시를 떠나 두 시인의 배경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이질적인 조건을 지닌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첼란은 나치에 의해 부모를 잃고,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가 모국어인 까닭에 독일어로 시를 써야 했던 시인이었다. 국적을 잃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첼란과는 달리, 바흐만은 골수 나치 당원의 딸이었으며 독일 문단과 문화계의 주목을 받기까지 했던 시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오로지 시를 매개로 교감을 나누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도 대조적이다. 첼란은 센 강에 투신했고, 바흐만은 로마의 집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길지 않은 이 시인들의 삶 후기에 이루어졌던 작업들을 이 작품으로 접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 함께 언급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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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1)

 

 

작년(2020) 말에파울 첼란 전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시 전집은 1920년에 출생한 첼란의 탄생 100주년, 사후 5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으로 나오게 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시인 허수경의 유고 번역작업이기도 하여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가 그의 시를 읽어본 것은 없다. , 한두 편은 있을 것이다.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가 독일어권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써내려간 시인의 집에 인용된 시 몇 구절과 만난 인연은 있다.

 

시는 언제나 읽어보고자 하면 번번이 높은 장벽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전문 번역자에게도 매우 난해하다고 알려진 첼란의 시에 굳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시인의 집을 통해 알게 된 시인의 삶을 조금 들여다보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삶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여러 번 읽어보았던 책이지만, 다시 파울 첼란이 살던 집과 자취를 찾아간 대목을 읽어보니 처음 읽는 것 같이 새롭다. 언젠가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파울 첼란 전집을 읽어보길 바라며, 충동적(?)으로 첼란의 삶을 가능한 한 조사하고 기억해두고 싶었다. 오늘은 전영애 교수의 시인의 집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앞서 지나 간 첼란의 흔적을 밟아 따라가 보고자 한다.

 

먼저 파울 첼란은 루마니아의 끝자락인 부코비나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192011). ‘너도밤나무숲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는 부코비나에서 성장했단다. 하지만 가혹한 역사는 식물을 유난히 사랑하던 유대인 청년을 가만히 놔주지 않았다. 나치에 끌려간 부모는 그가 23세일 때 목숨을 잃었다. 그가 18세 일 때(1938) 의대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루마니아에서는 이미 유대인에 대한 엄격한 정원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 있는 의대로 진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던 중 독일을 지나게 되는데, 그 다음날이 바로 나치가 유대인들의 건물을 급습하여 파괴를 일삼았던 수정의 밤(1938119)’이었다고 한다. 수정의 밤이란 이름은 깨져버린 수많은 유리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밤의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던 광경에서 나온 명명이라고 알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정의 밤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 훗날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또 다른 유대인 청년이 독일에서 추방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독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가족이 추방당해 폴란드로 갔던 것이다. 게다가 라니츠키는 파울 첼란과 동갑인 1920년 생이었다.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하던 시기,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프랑스가 있는 서부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다시 폴란드가 있는 동부로 이주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떠올려보게 된다. 수정의 밤 이후 나치는 10,000명에 가까운 유대인을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부헨발트라는 이름 역시 너도밤나무숲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순간, 같은 의미를 지닌 부코비나에서 출생한 첼란의 삶이 교차한다. 그에게 이 나무의 의미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짐작해볼 뿐이다.

 

나치의 손에 부모를 잃고, 노동수용소에서 우연히살아남은 시인은 전후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19487월부터 파리의 센 강에 몸을 던졌던 19704월 까지 22년 간 이곳에서 국적 없는 유대인이자 철저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독일에는 평생 한 번도 살아 본 적도 없지만, 독일어가 모국어였던 시인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이들의 언어를 모국어로 해야 했던, 뒤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수용소에서 잃고, 부모를 죽인 이들의 문학을 이들의 언어로 평생 글을 써야 했던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삶이 다시 소환되는 지점이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거대한 운명의 물결을 누군들 거스를 수 있었을까? 라이히라니츠키는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첼란과 라이히라니츠키의 운명을 일별해보니 이들과는 또 다른 대척점에 있는 한 유대인의 삶을 떠올린다. 바로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다. 그는 무엇보다 질소고정법으로 공기에서 질소를 얻고, 이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합성비료를 만드는 데에 하버의 발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하버는 이 공로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친구이기도 하며 역시 유대인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버가 살충제 개발을 한다는 명목으로 청산염 개발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과학저술가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금지된 지식에 따르면, 이 청산염은 세포의 신진대사를 방해해서 신체 내부 질식’(175)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나치가 대량 학살에 사용했던 치큰론베라는 독가스의 원리를 하버가 만들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독가스가 자신의 형제자매를 학살하는데 사용되었던 모순적인 역사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


다시 첼란의 파리로 되돌아온다. 전영애 교수는 시인의 자취를 따라간 기록에서, 시인의 시선을 상상하며 시인이 보았을 법한 풍경을 바라본다. 교수는 주소 몇 개와 지도 한 장만을 가지고 시인이 살았던 집들과, 걸었음직한 장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이라는 첼란의 문구를 기억하는 교수는 시인이 바라봤음직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발견한다. 문득 시집 한 권과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 헤매던 전영해 교수의 시 읽기가 궁금해졌다. 나도 시를 읽는 방법과 관련하여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해서다. 전영애 교수는 파울 첼란을 읽는 일로 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며, ‘(첼란의 시가) 쉽게 읽히지 않지만 소중히 읽을 수밖에 없는 시라고 말한다. 시인의 집을 펼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교수는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이 또다시 새로운 이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66) 한 줄 한 줄 시를 읽어나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유독 시와 거리가 먼 유형의 사람이지만, 시인의 삶과 이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다보면, 이들은 자신의 작업물을 발견하고 따라가는 이들에게 초라하고 작은 삶을 소중히 하라는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지닌 이들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다음 글에는 여러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첼란의 흔적으로 이어가보려고 한다. ‘역사와 언어에 대한 회의를 표현했다고 하는 첼란의 언어를 일부나마 들여다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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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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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그림책 읽기를 시작하며

 



아내와 함께 그림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림 공부를 한 아내와 이공계 전공인 나는 책에 대해 서로 취향이 많이 다르다. 그림책 읽기는 그 접점으로서 같은 책을 각자가 어떻게 읽었는지를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듯하여 내가 아내에게 제안해본 것이다. 요새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도 많이 나온다고 하니까. 난 그림책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아내가 읽고 싶어 하는 책을 받아서 읽고, 각자가 책에 관해서 써보기로 했다. 여기에 규칙이 하나 있다면, 글을 다 쓰기 전까진 상대방의 글을 읽지 않는 것이다.

 

막상 그림책을 받고서 읽어보니 난 그림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텍스트는 거의 없는 데다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단순히 부담 없이 금방 읽고 함께 무언가를 써보고자 했던 나의 바람은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다. 그림책의 텍스트는 어디로 나아갈지 방황하는 나의 생각을 붙들고 제안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떻게 그림을 읽어내야 할지가 나의 관심사였다. 안 그래도 공감능력(?)이 부족한 내가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일까 고민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없던 일로 되돌리기도 멋쩍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일이든 마음의 부담을 많이 안고서 즐길 수는 없는 일이다. 요새는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안내 프로그램도 있다고 하던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프로그램에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래서 나 혼자 시행착오를 해가며 꾸역꾸역 시작해보기로 한다. 난 아무래도 뭔가를 시작했다가 꽤 시간이 지나서야 내게 부족한 것들을 파악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인 듯하다. 나도 역시 타인의 경험과 지혜를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지 않거나 둔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이 점이 스스로도 안타깝다. 하지만 그게 나인걸 어쩌겠나. 그러니 아내와 그림책 읽기도 그저 나의 엉뚱한 생각으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시작하게 되었다. 아내가 뭔가 재미있어 보이니까, 그리고 그 즐거움을 나만 모르고 지나가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러니 부담 없이 그림책을 읽어 가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붙들어 기록해보기로 한다.


자 그럼 이제 시작!”

 

 


할머니의 팡도르

(원제: I Pani d'Oro della Vecchina, 2012)

안나마리아 고치(Annamaria Gozzi)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Violeta Lopiz) 그림

정원정박서영 옮김 | [오후의소묘]

 


음식을 매개로 운명과 밀당 하는 할머니

 


책장을 넘기면서 눈에 들어오는 빨간색의 패턴과 할머니, 그리고 검은 색의 형체 없는 존재는 궁금증부터 일으킨다. 빨강과 검은 색의 색연필이 대부분인 이 그림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이다. 아무리 어른들도 보는 그림책이라고 하지만, ‘죽음이란 주제는 으레 달갑지 않다. 아무런 기대 없이 책을 펼친 문외한으로서는 다소 당황스럽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닌, 우리를 규정하는 자연의 엄연한 진실이라면, 우리가 기피할 이유는 없다. 대신 저자와 그림 작가가 이 형이상학적인 진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표현했을까가 궁금해지는 책이다.

 

빨간 두건을 한 할머니는 코와 볼은, 할머니의 집과 마찬가지로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주름과 가늘어진 입술을 지니게 된 할머니는 겨울이 되면 매년 해오던 크리스마스 빵과 쿠키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때 집 밖에 표현된 검은 색의 저승사자(사신)은 할머니를 데려오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온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집이 붉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메마른 나무와 사신이 검은 색으로 표현된 것이 대조적이다. 온기를 지닌 존재, 생명은 붉은 색으로, 엄연한 진실, 곧 죽음은 검은 색으로 표현한 것이겠다. 할머니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과일과 계피, 그리고 꿀이 가득 들어간 크리스마스 빵을 만드느라 사신이 곁에 가가와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사신의 임무는 응당 사람을 저승의 세계로 데려가는 일이다. 따라오라는 사신의 말에 할머니는 아이들을 위해 크리스마스 빵을 완성하고 싶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대신 자신이 빵에 넣을 소를 만들던 주걱을 사신의 입에 넣어 준다. 이런 식으로 사신과 할머니 사이의 밀당이 일주일간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할머니는 사신이 집을 방문할 때마다 따뜻하게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자신이 만들고 있던 빵이며 쿠키를 맛보여 준다.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 인상 깊다. 특히 추상적인 죽음을 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검은 덩어리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이 사신은 할머니를 언제든 삼켜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려는 듯 언제나 커다란 입을 벌린 모습을 하고 있다.

 

북부 이탈리아 출신인 작가 안나마리아 고치는 신화와 전설, 민속 전통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수집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책의 이야기에 모티브를 제공한 것도 이탈리아 전통과 디저트에 얽힌 전설이라고 한다. 나는 가끔 우리가 삶과 죽음을 마치 별개인 듯 분리하는 시대를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집에서 돌아가셨던 할머니와 달리 이제 우리는 집에서 맞는 죽음이 거의 금기시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에는 할머니 세대의 삶과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은 보다 가까웠던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할머니 역시 자신의 죽음을 단지 두려워 미룬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일주일 정도를 미루었을 뿐이다. 죽음을 의연하고 담담하게 맞이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삶에 대한 작가의 지혜를 발견한다. 어쩌면 금빛 팡도르는 이승에서 그녀의 삶을 규정한 전통과 기억이 빚어낸 할머니의 분신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되어 할머니는 자신이 만든 빵과 쿠키를 아이들과 사신이 함께 어우러져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는 자신이 갈 시간임을 받아들인다. “이제 갈 시간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의 바램 하나를 더 생각해 내었다. 나도 언젠가 떠날 시간이 되었을 때 의연하고 담담할 수 있기를 말이다.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전통과 집단의 기억은 할머니가 자신의 찰다 속에 숨겨 놓은 레시피처럼, 온기를 가지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금 책을 들춰 보았더니 한 그림에 눈길이 멈춘다. 할머니는 사신과 마주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접시에 담아 사신에게 건네는 장면이다. 빵 하나를 맛본 사신은 자신의 임무를 잠시 잊고 아름다운 맛이군요라고 감탄한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의 엄연한 진실을 그리면서도, 삶에 대한 비결 하나를 한 문장으로 남겨 놓은 듯하다. 바로 이 문장이다. 바로 매 순간을 살면서 삶에 감탄하는 일이 바로 삶의 비결이 아닌가 하고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오늘 처음 그림책에 대해 무언가를 끄적거리면서 발견한 것 하나다. 다음에는 아내가 어떤 책을 들고 올지 궁금하다.

 

 



[참고] 아내가 이 책에 대해 쓴 글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알라딘서재][할머니의 팡도르] 

 삶이 만들어 내는 달콤하고 진한 생의 맛 (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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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지식 - 역사의 이정표가 된 진실의 개척자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이승희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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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지식

역사의 이정표가 된 진실의 개척자들

에른스트 페터 피셔(Ernst Peter Fischer지음 이승희 옮김 | [다산초당]

 

 

지식은 금지가 아니라 통제되어야 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괴테의 파우스트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구약 성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이 모든 캐릭터의 공통점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나는 이들이 앎 또는 지식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점이라고 답하겠다물론 이 관점은 과학저술가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금지된 지식에서 제시한 것을 기반으로 종합해본 것이다저자는 오디세우스가 지식에 중독된 자이며,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싶어 하여항해를 통해 모든 경계를 넘어서고 싶어 하는 인물이라 말한다파우스트는 이 세상의 온갖 지식을 섭렵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결국 악마와 계약을 맺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넘기면서까지 감각적 삶에 대한 호기심을 추구하려 한다또 저자는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를 지식과 진실을 향한 인간의 욕망’(302)을 드러내는 인물로 해석한다신탁이 예언한 금지된 지식을 얻자어머니이자 아내는 자살하고오이디푸스 자신은 핀으로 눈을 찌른다구약 성서에서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금단의 열매를 먹는다그 결과 분별을 얻는 대신 에덴에서 영원히 추방당한다.

 

이처럼 문화사에서 묘사되는 인간의 공통적인 특징은 지식에 목말라 한다는 점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 추구가 모든 인간의 본성이다’(9)라고 언급했는데고대인들도 이미 알고자하는 충동호기심을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이 본능이 얼마나 강렬한지는 문학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이야기 문학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천일야화를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화자인 셰에라자드 공주는 인간의 강한 호기심을 이용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제한하고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지켜낸다이 이야기를 지어낸 이들은 분명히 호기심이라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이들은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 속의 이야기와 작품의 구성에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저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바로 이 인간의 본능적인 호기심앎에 대한 욕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특히 인간이 만들어낸 지식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금지되어 왔는지를 폭넓은 사례를 통해 제시한다저자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식의 위상에 대해 먼저 검토를 한다저자는 지식이 무엇인지 묻는데그에 따르면 지식이란 인간에게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대상’(21)이다나아가 지식과 정보’, ‘데이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한다정보는 이해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곧 1차적으로 우리에게 접수된 것으로신체에 감지된 감각 정보를 떠올릴 수 있겠다이에 반해데이터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다이렇게 데이터정보지식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위계구조를 갖는데지식을 의미 있게 사용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따라서 지혜는 단지 인지 작용이 대상에 개입된 것을 넘어 어떤 가치를 내포하게 된다한편 지식에는 인간의 인지작용이 개입하기 때문에 각각의 인식 주체에 따라 지식 도출과정과 그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따라서 인간이 타인과 겪게 되는 충돌과 불화는 어떤 면에서는 앎에 대한 강한 호기심뿐만 아니라 앎에 이르는 과정그리고 앎에 대한 태도가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에 따르면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지식과 성의 긴밀한 유착관계다뱀의 유혹을 통해 이브가 획득한 금지된 지식은 금지된 사랑’ 곧 성적 결합을 의미한다철학자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에서 사회 권력이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규정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57)한다그는 인류사에서 지식과 성에 권력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을 보여주었다이렇게 권력이 지식과 성에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은 우리의 문화를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한편 서양 사회에서 이러한 특징을 예비했던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닐까한다그는 어느 시기에 계시를 받고 회개한 후,고백록을 쓴다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방탕했던 젊은 시절을 반성하는데중요한 것은 그가 원죄’ 개념을 생각하고 종교 철학에 도입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이 개념은 곧바로 지식에 대한 금지로 이어지게 되었다피셔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인간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억누르고 금지했던 인물로 평가한다그의 원죄 개념이 종교라는 권위와 결합하여 도출한 금지된 지식은 인류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무엇보다 유럽 지식인의 관점에서 지식 금지의 역사를 방대하게 다룬다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국내에 큰 영향력을 지니는 미국문화 중심 사례가 아니라 유럽 중심의 사례들을 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한국인 독자로서 비교적 신선하게 다가왔다또한 저자는 구체적이고 수많은 지식 금지의 사례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금지된 지식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이미 우리는 전 세계가 팬데믹에 영향을 받는 모습을 목격했다이 과정에서 우리는 왜곡되고 비밀스럽게 유지된 정보가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경험했다발병 초기에 (COVID-19의 시작이 정말로 중국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중국 정부 당국이 환자들에 대한 정보를 숨기기만 급급했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또 국내 모 종교집단의 방역지침 무시와 비협조정보의 은폐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도 분명히 보았다저자는 정보지식 사회에서 지식의 은폐가 권력에 의해 이루어질 때 사생활의 권리가 어려움에 처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예를 들면저자는 정보 권력에 의해 개발된 알고리즘으로 인간이 감시받게 될 때를 제시한다손글씨나 얼굴 분석만으로도 해당 사람의 성별이나 성적 지향을 알아내는 사례는 독자를 왠지 오싹하게 만든다이제 우리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보다 더 공개되고 투명해질수록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은폐된 지식이 공개되어 왜곡되어온 진실을 바로잡고삶을 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갈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지식의 투명성이 모든 경우좋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최종적인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할 때 제안된 근거 기록에 대한 열람 금지 기간이 지나 공개되었을 때저자는 실망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수상자를 결정한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무지와 오판을 알게 된 저자는 오히려 투명성이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모든 마술에 대해 비밀스러운 진실을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술사의 침묵을 바란다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저자가 지식에 대해 갖는 양가적인 태도다다시 말해저자는 지식을 금지하기 전에 지식을 책임감 있게 대하는 일”(244)이 중요하다고 말한다아울러 고객을 착취하고 이들의 정보를 대가 없이 빼앗는’ 정보 권력 페이스북의 사례와 인간유전자 정보와 유전자 편집 기술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다결국 저자가 지식에 대해 갖는 태도는 (지식이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364)는 입장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결국 저자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항은인간의 지식을 향한 충동은 기본적인 본능이라는 점이다따라서 인간의 호기심을 인정하고이를 강제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이런 본능은 유전자 조작이나 권력으로도 금지시킬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저자의 관점은 인간이 지혜를 모아 이런 지식에 대해 제한적으로 공개해야 한다는 입장에 더 가깝다금지되지 않은 것은 인간을 급속히 지루하게 만든다하지만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한 시인의 말처럼 인간은 진실을 향한 열망과 환상에서 느끼는 기쁨으로 충분하다’(311)고 느끼는 역설적인 존재인지 모른다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금지된 지식과 관련한 과거 사례를 검토하여점점 강력해지는 정보 권력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나아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삶의 조건을 우리가 다시 인식하길 요구하고우리의 호기심그리고 지식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를 갖추길 바란다그래야 비로소 지식 그 자체가 또다시 만들어내는 비밀에 인간은 계속해서 호기심과 감탄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리뷰의 마무리는 이 책에서 줄곧 언급 된 파우스트의 한 구절로 마무리해본다.

 

그걸 인식한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어리석어서충만한 마음을 혼자 간직하지 못하고

몽매한 무리에게 자신이 느낀 것본 것을 발설했던 사람들,

그런 이들은 자고로 십자가에 매달리고 불태워졌지.

자아이보게밤이 깊었네,

이제는 그만해야겠네."

(파우스트 I, 정영애 역, 123)



"지식 추구가 모든 인간의 본성이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언급한 말- P9

"금지된 지식은 우리를 뜨겁게 만든다."
: 볼프 비어만의 말- P15

"지식을 향한 갈망은 성적인 호기심과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P65

"(태양 중심 체제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저주는) 맹목적인 배척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우주론에 담긴 종교적, 정치적 함의가 불러올 막연한 공포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역사가(미시사 전공)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언급 - P145

"핵시대에 확실한 안전 보장의 근본 전제는 개방성과 공개성뿐이다."
"(인류는) 대중적 이해와 비밀 정치 및 권력 정치의 추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1945년 이후 ‘원자력과 인간의 자유‘에 대해 숙고하고 한 말.- P171

"인간은 지금까지 지성(Verstand)에 붙잡혀 있었고, 그 도움으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성(Vernunft)을 생각해야 하며, 이성의 도움으로 지구 위에서 인류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 칼 야스퍼스의 말- P205

"지식이란 인간이 관찰 감각을 통해 모으고 시각적 인지를 통해 인식한 경험적 재료를 개념이나 생각과 연결한 다음, 이 연결을 자신의 관점으로 표현하여 외부에 전달하는 일을 뜻한다."- P207

"진정 중요한 건, 지식을 금지하기 전에 지식을 책임감 있게 대하는 일이다."- P244

"진실은 인간에게 요구될 수 있다."
: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1959년 연설 인사말(진실과 작가의 역할에 대한 언급)- P274

"칼 포퍼에 따르면, 과학은 잠정 지식만을 전달할 수 있고 또 다른 실험에서 반박당할 수 있다는 것을 늘 고려해야 한다. 이런 고려와 의심은 오로지 진실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활동이다."- P292

"금지되지 않은 것은 인간을 급속하게 지루하게 만든다."- P319

"국가의 정보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사생활의 권리‘는 어려움에 놓여 있다. 조세제도는 개인 정보에 대한 개입을 요구했다."- P328

"오늘날 절대적으로 사적인 것은 점점 더 공적인 것이 된다."- P348

"공적 영역 어디에나 존재하는 성의 편재성 때문에 사적 에로스는 사멸한다."
: 사회학자 라이너 그로네마이어의 언급- P355

"인간은 삶에 드리운 장막에 오히려 감탄해야 한다. 자신의 존재가 그에게 비밀을 준다. 인간은 이에 대해 진정으로, 계속해서 감탄할 수 있다."-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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