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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찾아서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 지음, 조구호.남진희 옮김 / 알렙 / 2026년 4월
평점 :

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존재다
《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찾아서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 지음
조구호·남진희 옮김 [알렙] (2026)
시간을 살아남아 이제는 고전이 된 《유토피아》는 15-16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토머스 모어의 작품이다. 그의 글을 읽지는 않아도 이 작품은 텍스트로서, 문학으로서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법조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청빈하고 공정한 재판관으로도 존경을 받았던 모어는, 헨리 8세의 권위에 맞서 옳지 않다고 믿었던 가치에 반대하고 비판하다 결국 참수되고 말았던 비운의 인물이다.
토머스 모어의 ‘억울한’ 죽음이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일까. 한때 라틴아메리카에 건설되었던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 한 문학 교수의 여행기에는 과거 유토피아 건설을 시도했고 결국 우울한 결말을 남기고 폐허가 되어버린 장소들이 즐비하다. 《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의 저자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는 멕시코 출생의 문학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학자이기도 하다. 또 단편소설과 연대기, 아동 및 청소년 문학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저자가 한때 라틴아메리카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대부분 폐허의 흔적만 남은 장소를 찾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학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문학을 연구하며 또 스스로 문학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유토피아란 ‘하나의 텍스트’이자 ‘문학’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유토피아’라는 문학의 힘에 깊이 매료되었던 사람이었을 것 같다. “유토피아는 문학을 현실로, 또 현신을 문학으로 바꾸려는 시도”(182)임을 이미 간파했던 사람이니 말이다.
이 책의 글은 여행기이면서 일종의 연대기이다. 다만 저자는 ‘유목민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다’(149)는 바람을 내비치는데, 그저 떠돌기 위해 여행한다고 말한다. 그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일종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의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내게 그의 여행은 우리에게 대상에 대한 명료한 판단과 구분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해되었다. 책 밖으로 나와 모호하고 복잡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단지 새로운 앎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나의 무지가 더욱 드러나는 계기로서의 여행 말이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모든 여행이 거대한 오해의 과정”(277)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여행자라면 여행한 장소에 대한 앎이 더욱 빈곤하게 느껴졌을 법하다. 그의 말처럼 여행에서 기록자는 늘 실패하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여향자란, 결국 여행에서 ‘무지의 지’에 도달하는 사람이다.
폐허가 유토피아에서 발견되는 특징들
저자는 과거 한때 유토피아가 시도되었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장소를 방문한다. 설립된 년도만 보더라도 1539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4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세상에 나왔으나 대부분은 사라진 이상향의 실험 장소들을 섭렵한다. 하지만 이상향에 대한 논의는 단지 이 시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류가 등장하여 누군가와 무리를 이루며 함께 살아온 이상, 유토피아는 언제나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이 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은 인간의 ‘살아감’이란 문제가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든 결코 녹녹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해보자면,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회도 많은 이들에게는 ‘지옥과 같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현실의 녹녹치 않음’이야말로 위정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유토피아가 ‘지금의 이 지옥보다는 나을 것’이라 설득하기 수월하게 해준 조건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먹고 살기 힘들었던 한인들이 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떠나 목숨을 걸고 한반도를 넘어 북쪽으로 건너갔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실패한 유토피아는 일종의 성공적인 재앙’(88)을 남겼다. 유토피아에 대한 실험은 대부분 실패했다. 유토피아 실험이 실패했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파라과이에 설립되었던 누에바 게르마니아처럼 지독히 인종차별적인 시선과 타 민족에 대한 아리아족의 우월감, 그리고 현지 원주민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 현지 자연 환경에 대한 무지와 같은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유토피아를 지지하던 이들이 지닌 타자에 대한 도덕적·신체적·문화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강력한 배타성은 결국 스스로 섬이 되고 밀림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곳은 없다”는 의미를 지닌 유토피아의 시간성 역시 특징적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오븐에서 갓 꺼낸 빵 속에 있다’(88)는 표현처럼, 아직 손을 대고 시식을 하기 전의 빵에만 존재하는 관념 그 자체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미 사람의 손길이 닿고,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인간이 모이면 유토피아는 이미 서서히 사라져가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유토피아는 “언제나 신화적인 과거를 되찾으려 하는 동시에, 아득한 미래에 닿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가속화한다는 이중적인 시간성”(193)을 띠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시간의 순서와 무관하게, 오로지 과거에 대한 향수에 붙들려 과거를 소급하거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데만 몰두하는 영화 속의 인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유토피아의 시간성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일 수밖에 없을 터다.
유토피아는 결국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
앞에서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기획했던 이들의 설득에 쉽게 넘어가곤 했던 이유를 말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건 인간의 삶이라는 조건이 결코 녹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으레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건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모든 사건 앞에서 살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과거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늘 지옥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굳이 치안도 불안정한 폐허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도 한 때 존재했던 사회의 ‘꿈과 악몽’을 좀 더 알고 싶어서였으리라. 저자는 어느 사회의 꿈과 악몽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라 여긴 듯하다. 이 작업은 과거나 미래에 집작하는 유토피아의 시간성에 틈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비로소 현재에 좀 더 머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들여다보는 일은 창립자로 대표되는 당대 인간들의 욕망을 만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유토피아 건설의 전망과 수행 과정, 그리고 실패 혹은 재난의 잔해 위에 반복해서 세워지는 인류 존재의 원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인류학자가 ‘인간은 문화에 중독된 존재’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란, 유토피아라고 하는 ‘문화적 관념’에 중독되어 있는 존재는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시대와 상관없이 ‘그런 곳은 없는’ 어딘가를 늘 꿈꾸어온 까닭일 터다.
작가는 대개 폐허로만 남은 유토피아의 흔적을 답사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현대적인 유토피아, ‘성스러운 믿음’이라는 의미의 산타 페를 주목해 본다. 에스파냐 식민 세력이 신앙을 전파하며 멕시코의 이 지역을 점령했던 것처럼, 20세기 말에 기획된 유토피아적 도시는 여전히 인류 존재의 원리로서의 유토피아를 증거한다. 도시로서 산타 페는 신에 대한 믿음, ‘신이 죽은 시대’를 대체하는 믿음이 이제 자본과 신자유주의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믿음이라는 ‘문화적 기호’는 이제 단지 새로운 기호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모든 이들의 혐오 지역이었을 법한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이 신자유주 유토피아는 수평으로 확장되고, 수직으로 자라나며 기존의 도시들과는 다른 하나의 섬과 같은 곳이 되었다. 도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고 배타적인 섬이 되기를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신흥 현대 도시 산타 페는 유토피아의 이중적인 시간성을 잘 보여주는 기획이면서 여전히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장소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산타 페는 저자가 책을 시작하며 한 말, ‘유토피아는 언제나 존재했다’는 말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현대적인 단서가 된다. 이에 유토피아는 줄곧 혼돈과도 같은 현실 문제에 대한 책임과 마주보기의 실패 혹은 회피를 전제해온 듯하다. 지금 내 발 아래의 현실과 충돌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늘 현실 밖을 상상하며 꿈을 꾸는 존재다. 그렇기에 저자는 유토피아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문학’이라 말하지 않았는가. 문학의 상상력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폭력적/비폭력적인지, 본래부터 선한지 혹은 악한지와 무관하게 허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인간의 초상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것이 유토피아일 것이다. 이제 인간은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현실이라는 악몽과 이상향이라는 꿈을 늘 꾸어온 존재로 보였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욕망을 비추어주는 거울이었다.
내가 이 점을 특히 강렬하게 느꼈던 대목은, 아마존의 밀림 한복판에 건설되었던 고무 플랜테이션 도시 포드란지아에 대한 글에서였다. 밀림 속의 폐허로 남아 있는 이 공장 터 주변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포드란지아를 기획하고 수행했던 이들의 신념을 여전히 내면화하고 있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이 지역 주민 대다수는 오히려 열대림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곳의 어느 가게에서 저자에게 탄산수를 건네주던 여종업이 “우리는 여전히 포드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35)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의미에서 그 종업원과 연결됨을 느꼈다. 인간이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 죽기까지 이 지루함의 공백을, 미치지 않고 살아나가려면 유토피아 같이 기댈 곳이 있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결국 인간은 결코 유토피아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시대와 장소를 떠나 유토피아를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 유토피아는 면 과거에 존재했으며, 미래에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지금도 여전히 포드를, 유토피아를 기다린다.
[책속으로]
[1] "유토피아는 관념이 실현된 곳과 관념 자체가 동일시되고 혼동을 일으키는 환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하나의 텍스트로 있었다. 예컨대 유토피아는 환상적인 이야기와 정치적인 선언 가운데 위치한 문학 장르이기도 하다." - P11
[2] "한 사회가 지닌 꿈과 악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 P12
[3] "모든 유토피아는 창립자들의 도덕적·신체적·정신적 혹은 문화적 우월성에 기반한 배타성을 띤다. 이는 어느 폐쇄적인 종파가 지닌 면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 P17
[4] "그런데 빵집 이름이 왜 포드인가요?" "우리는 여전히 포드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아마존 밀림 속 포드란지아 인근의 가게 여종업원과의 대화 - P35
[5] "사랑해 본적이 없는 사람만이 사랑이 지루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인종차별적인 유토피아(누에바 게르마니아)를 실험하고자 했던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엘리자베트 니체 부부의 묘비명을 본 저자의 단상. - P137
[6] "누에바 게르마니아는 밀림 한가운데에 농업 공동체를 건설하면서 지역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지 않아 실패했다. (...) 유대인이 없는 아리아 사회를 유럽 밖에 건설하겠다는 꿈은 1890년 파라과이의 누에바 게르마니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 유토피아 실험이 4년 만에 실패한 이유 - P141
[7] "나는 내 생각들에 바람을 쒸어 주고 싶다. 생각과 함께 걷고, 생각을 뒤쫓고, 그러다 생각을 잃어버리고도 싶다. 손에 쥐었다가 놓치기도 해야 계속 길을 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유목민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다." - 저자의 글쓰기 지향점 - P149
[8] "나는 그저 떠돌기 위해 여행하고 있다. 무언가를 그리거나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계를 흐리게 하기 위해서다. 무심하면서도 집요하게. 나는 의심하기 위해 여행한다. (...) 여행은 의심을 강화하기 위해, 그 의심이 마음껏 자라날 공간을 내어주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그 의심들과 하나로 얽히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 여행의 이유 - P153
[9] "이 땅에는 온갖 광신자를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 P167
[10]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들 - <멋진 신세계>부터 <1984년>까지,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작품들 - 과 유토피아들은 본질적이면서 숨 막히는 특징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바로 부동성이다. 두 세계 모두 변화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가능성조차 고려되지 않는 궁극의 사회를 그린다." - P168
[11] "지상에 펼쳐진 지옥 앞에서, 사람들은 그 어떤 것이든 - 심지어 가장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까지도 - 이 지옥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기 때문이다." - P177
[12] "유토피아는 그 무엇보다도 문학이다. 바로 여기에서 유토피아의 무시무시한 힘이 나온다. 유토피아는 문학을 현실로, 또 현실을 문학으로 바꾸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 P182
[13] "유토피아는 언제나 신화적인 과거를 되찾으려 하는 동시에, 아득한 미래에 닿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가속한다는 이중적인 시간성을 띠게 된다." - P193
[14] "본질적으로, 19세기 라틴아메리카 독립 국가의 탄생에는 유토피아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 P222
[15] "모든 여행은 거대한 오해의 과정이기에 우리는 그로부터 비롯된 오류와 혼란으로 점철된 이미지 몇 개를 간직하게 될 거다. (...) 어떻게 하면 한 나라를 오롯이 알 수 있을까? (...) 나는 실패한 기록자이자 허황한 관광객이었다. (...) 그리고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 P277
[16] "멕시코에서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이 지역(산타 페)은 국가가 선물한 땅의 쓰레기장 위에 세워졌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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