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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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하고 경직된 질서의 세계에서 연대의 세계로
<모로 박사의 딸>
실비아 모레노 가르시아 지음
김은서 옮김 [황금가지] (2025)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외딴섬 야샥툰에는 외부 세계가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었다. 한 인간이 창조해낸‘동물 인간’들이었다. 이 동물 인간들은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에서 멕시코로 건너온 전직 외과의사 모로 박사가 창조한 생명체들이다. 그는 나폴레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만큼 견고한 남성적 세계의 부산물이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의 이 남자는 SF의 대가 H.G. 웰스가 《모로 박사의 섬》이라는 작품에서 창조한 인물이다. 웰스는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던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로부터 생물학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웰스의 원작이 19세기 말에 나왔기에 진화론의 자장 안에서 집필된 소설인 것도 짐작해볼 수 있다.

 
이번에 읽은 《모로 박사의 딸》은 웰스의 원작 《모로 박사의 섬》을 토대로 후대의 작가가 다른 시선에서 쓴 작품이다.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와 연구소의 관리인 몽고메리 로턴이라는 젊은 남자의 시선이 번갈아가며 교차하고 있다. 마치 두 사람 각각의 우주가 서로 교차하며 ‘실재’라고 하는 새로운 직조물을 만들어가는 현장에 함께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다윈이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출간한 이후인 1871년과 1877년에 맞추어져 있다. 공간적 배경도 웰스의 원작과 달리 멕시코의 한 장소인데, 멕시코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유카탄 반도는 우주에서 날아온 소행성이 충돌하여 공룡(파충류) 대멸종을 가져왔다고 여겨지는 지구적 사건의 ‘그라운드제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하다. 세상과 동떨어진 섬 야샥툰의 깊은 숲속에,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 같은 저택을 떠올려보라. 조만간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은가.

 
소설은 야샥툰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에르난도 리잘데와 젊은 몽고메리 로턴이라는 29살의 청년이 섬에 찾아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몽고메리는 야샥툰에서 모로 박사의 저택을 관리하는 책임자(마요르도모)로 오게 된 것인데, 실상은 리잘데에게 술과 도박으로 큰 빚을 지고 벶을 갚기 위해 온 것이다.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외딴섬 야샥툰의 깊은 숲속에서 프랑스인인 모로 박사와 영국인 몽고메리의 이질적인 조합부터가 심상치 않다. 몽고메리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15세에 출가하여 배를 타며 자신의 삶을 추스르던 기계공이기도 했다. 서로 맞지 않는 결혼을 한 까닭에 아내와 별거중인 상태로 정처 없이 방황하던 중이었다. 점점 더 많은 돈을 원했던 아내는 남편의 무능력을 깨닫고 몰래 달아났기 때문이다.

 
모로 박사의 저택 거실에는 유독 시선을 끄는 물건 하나가 있었다. 바로 프랑스제 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외딴섬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밀기계다. 야샥툰의 어디에도 이 기계가 알려주는 시간에 연루되어 있을 법하지 않다. 시계는 오로지 이 고립된 문명 세계의 파편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것이었다. 소설에서 정밀시계의 이미지는 소설 전반을 관통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는 새로 온 몽고메리에게 ‘natura non facit saltus(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알려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시계는 이 장면과 연결되는 듯하다. 시간을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관념이라 말할 수 있다. 곧 정밀 시계는 인위적이고 공고한 질서를 상징하는 오브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시간적 배경인 1871년, 그리고 멕시코 지역의 집단 농장과 같은 환경을 고려하면 제국주의의 견고한 유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한편 몽고메리의 하나뿐인 누나 엘리자베스는 로턴이 결혼한 후 자신의 불행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엘리자베스는 ‘살해당했다’는 표현이 보인다. 당대 여성들의 지위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여성들은 판자에 꼼작 못 하게 핀으로 고정시킨 나비 같은 신세였다.”(44)라는 작가의 시선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모로 박사의 거실에 있는 시계는 구시대, 가부장적 질서 위에 구축되어 있는 견고한 세계, 제국주의 시대의 불문율을 떠올리게 하는 사물이다. 그리고 모로 박사는 바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이처럼 자연을 바라보고 대하는 부분에서, 모로 박사는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 규칙을 강요하여 왕국을 통제하려는 예언자이자 신의 지위에 있다. 그가 창조한 동물 인간은 불완전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는 합리와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셈이다. 반면 모로 박사의 저택에서 오래 일해 온 가정부 라모나는 모로 박사의 시선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를 비롯하여 다른 동물 인간들을 애정으로 돌본다. 자연의 모든 존재를 애니미즘적인 관점,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모든 사물에도 신성함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녀에게는 신적 질서를 믿는 마음이 있다. 물론 모로 박사의 ‘신’과 라모나의 ‘신’이 같은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녀의 보살핌 때문이었는지, 모로 박사의 딸 카를로타는 “정글에 있는 돌과 꽃과 짐승 하나하나에 모두 신이 실재한다는 사실”(485)을 받아들이고 있다.

 
앞서 밝혔듯이 소설의 배경은 다윈의 진화론이 세상에빛을 본 이후의 1871년이다. 모로 박사가 다윈의 ‘범생설’에 입각하여 생명의 시작이 ‘제뮬’이라는 입자로부터 비롯된다고 믿는 것은, 아직 유전체의 존재가 발견되기 전이니 일견 합리적인 가정으로 보인다. 모로 박사는 “우리 눈에는 볼 수 없지만 제뮬은 거기 존재한다네.”(47)라는 신념을 거듭 밝힌다. ‘자연에 도약이란 없다’라는 인식이 역사적·문화적 불문율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사는 여러 동물의 제뮬을 섞어 동물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는 당대의 믿음을 깨고‘자연의 도약’을 손수 만들어내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애초에 ‘동물 인간’을 만든 이유는, 고용주의 이익을(임금 줄이기) 위해서였으므로, 기존의 제국주의/식민주의 시대에 활약(?)했던 값싼 노동력(이를테면 흑인들)을 대체할만한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다만 모로 박사는 동물의 ‘제뮬’을 이용한 생명공학적 방법으로 접근한 것일 뿐이다.


거실의 정밀 시계는 절대적인 시간•공간의 세계처럼 마치 불변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힌다. 하지만 모로 박사가 구축한 왕국은 리잘데의 아들 에두아르도와 사촌 이시드로의 방문 이후 조금씩 금이가는 모양새다. 리잘데의 아들이 카를로타에게 반하기 때문. 일주일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본격적으로 ‘동물 인간’의 존재를 마주하게 된 에두아르도 일행은 카를로타에게 프로포즈하는 에두아르도와 카를로티의 승낙, 그리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 리잘데의 개입으로 야샥툰 세계의 운명은 급격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섬과 ‘동물 인간’을 소유하고자 하는 리잘데와, 카를로타와 결혼하고 자신의 독립을 바라는 에두아르도, 이를 시기하면서도 보수적인 종교인의 시선을 드러내며 결혼을 막고 ‘동물 인간’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네는 이시드로의 충동이 야샥툰의 몰락을 견인하고 있다.


소설의 구체적인 결말을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인물들이 충돌의 과정에서 모로 박사의 거실에서 변함없이 작동하던 정밀 시계가 몽고메리와 에두아르도가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파괴되기에 이른다. 리잘데의 그릇된 욕망과 그에 장단을 응하며 자연의 질서를 거스른 모로 박사의 세계는 이로써 몰락을 맞는다. 이 소설에서는 어느 독자도 프랑스제 정밀시계의 상징성을 주목하게 될 듯하다. 결국 야샥툰에 구축된 모로 박사의 세계와 질서는 파괴되기에 이른다. 작가는 동물 인간 두 명과 리잘데 가문 사람들에게도 죽음을 선고했다. 그러면 작가는 소설 속 세계의 몰락을 통해 어떤 결말을 원했을까? 몽고메리와 카를로타의 결합이 아닌, 우정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동물 인간인 루페와 카치토와 카를로타와 더 단단한 우정의 연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몽고메리 로턴의 말 중에서 다음의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지구상에 완벽한 장소는 없어. 어디를 가든 나는 인간의 잔인함과 과도함을 봤어. 그게 바로 내가 야샥툰에 와서 여기 머물게 된 이유야. 야샥툰은 적어도 행복과 비슷한 뭔가를 줬거든. 나는 야샥툰에서 괴물을 본 적은 없어.”(396) 이 대목을 보면 인간의 세계에서 상처입고 잘 지내지 못했던 몽고메리가 오히려 외양이 ‘이상한’ 동물 인간과 함께 지낼 때 안식을 찾았다는 말이다. 그는 오히려 ’괴물‘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잔인함일 수 있음을 역설하는 듯하다.


에필로그에 이르면, 카를로타와 루페가 사건을 ‘처리’하고 유산을 상속받으며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는다. 보통 서사의 구조 같으면 몽고메리와 카를로타는 서로에 대한 우정과 신뢰를 통해 연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몽고메리가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카를로타의 동생뻘인 동물 인간 ‘루페’와는 결속력이 강해짐을 느끼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찾게 된 듯하다. 웰스의 원작리 신적 질서에 도전한 인간의 경솔함과 무모함을 경고했다면, 작가 실비아의 작품은 분명히 희망적이다. 인간-비인간의 돌봄과 우정의가치와 중요성,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이라는 씨앗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를 다른 관점에서 새롭게 쓴 시도는 분명 독자의 판단을 유보하게 하고 다면적인 시각을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 독자에게는 서사의 윤리성을 함께 생각하게 해주는 독서 경험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로박사의딸 #실비아모레노가르시아 #김은서번역가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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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 가블레르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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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양식의 선구적인 탐구 작업

<헤다 가블레르 Hedda Gabler>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지만지드라마] (2019)




 

희곡이라는 장르는 조금씩 알아갈수록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다. 희곡을 읽어보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고, 특정 작품을 따로 찾아 읽으려고 하던 장르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되면 읽어보려 했다. 헨리크 입센은 국내에서 특히 <인형의 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그의 다른 작품을 주목하여 따로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큰 관심이 없을 때 읽어서 그런지 스토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극중 인물인헤다 가블레르는 장군의 딸(귀족/상류층)이다. 그녀는 29살이고, 공부에 뜻을 둔 중산층 출신의 30대 초반의 샌님과 결혼하여 이제 6개월의 기나긴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사랑은 흔히 길어야 2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헤다가 애초에 사랑 없이 선택한 결혼은 사회적 굴레에 갇힌, 동시에 상류층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던 여성의 권태와 불만, 그리고 이 굴레 너머의 삶을 갈망하나 이로부터 유발되는 불안을 조명한다.

 


입센이 창조한 헤다는 하나의 사회적 징후로 볼 수 있다.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생에 대한 의지를 갖는 모든 유기체의 존재 양식일 텐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녀에게 결혼을 통해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 삶은 그녀의 일상을 더욱 힘들게 했을 법하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태양의 잉여 에너지로 비롯되었다. 무질서함을 향해가는 물질세계에서 그 질서를 역행하는 아주 특별한 우주의 파편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언가를욕망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숙명을 고려할 때,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헤다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다만 그녀는 무언가를 언제나 갈망하나, 그 대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듯하다. 욕망의 실체 없음이 헤다에게는 가장 큰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모습에 대해 헤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인간, 모든 존재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곧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질문의 방식을 다르게 시도해야 할 듯하다. 헤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대의 여성에게 사회가 제약하는/가두어 놓은 현실에는 책임이 없는가? 어쩌면 우리는 한 여성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 주목하고, 그 이유를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단순히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넘어서, 이 맥락과 결부된 인간의 조건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할 듯하다.


 

그것이 (남성 중심의) 사회적 관습일수도 있고, 보다 폭넓게는 이분법적인, 양성적 사고에서 비롯된 공동체의 공고한 규범들일 수도 있겠다. 현재 지구에 80억 명의 인구가 있다면, 80억만큼의 다양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다. 각자 어떠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든, 그저 나름의 존재 양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생물학적/존재론적 다양성을 지닌 존재를 이분법적인 사회 제도에 욱여넣는 일에는 저항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고유함은 수많은 스펙트럼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당당한 존재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고유한 존재로서의 헤다는, 당대 사회에서 기대되는 여성상의 틀에 맞지 않는 인물일 뿐이다. 문제는 이 사회적 기대/기준을 벗어나는 경우, 사회/공동체는 개개인에게불안을 심어준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박인 셈인데, 의도된 불안이야말로 (남성적) 사회를 공고히 하는 데 은밀히 활용되어 온 유지 전략이자, 체스판 위의 규칙이 아닐까.

 


따라서 헤다의 자살은자신의 미학적 기준에 의하면, 관자놀이에 정확히 총구를 겨누는 일이런 의미에서 충격적이다. 역자는 자살에 대한 헤다의미학적인 기준을 언급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헤다가 추구한 자살 방식이 하나의 의식(ritual)으로 해석해 보았다. 방아쇠를 당겨 맞는 미학적인 죽음, 그리고 옛 연인의 귀중한 원고를 불에 태워 소멸시키는 행위가 일종의 정화의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논리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헤다의 행위에는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투명성이 부족하다. 나는 이 점이 우리가 의식/의례라고 부르는 인간의 행동 양식에 부합한다고 느꼈다.


 

헤다 자신은, 비록 자신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몰랐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출구를 찾고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번번이불안이 유발하는두려움때문에 다시 굴레 안으로 되돌아와야 했지만 말이다. 옛 연인과의 결합을 바라면서도, 타인의 시선,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하나의 기호이자 메시지이기도 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했을 때, 그녀는 세상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헤다의 자살은 예수가 사랑이 부재한 공동체에 가져온 평화가 아니라 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건 단순한 항변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조건/사회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행동을 단순히 미화하거나, ‘남성의 문제라고만 단정짓기 전에, 이 문제는 공동체 전체, 모두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듯하다. 고질적인 이분법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입센이 생의 말년, 작가로서 완숙한 시기에 쓴 희곡 <헤다 가블레르>에서 제시하는 인물은 지극히 입체적이고 현대적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듯하다. ‘남자가 여성의 심리를 이렇게나 탐구하여 묘사해 놓은 것이 놀랍다고 말이다. 절반은 동의하지만, 이것 역시 남자라는 존재를 하나의 단일한 범주로 욱여넣는오류가 아닐까. 입센이 헤다를 비롯하여,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처럼, 작품에서 주목하고 그려낸 여성들은, 그가 자기 안의 여성성, 혹은 자기 안의다양성을 발견하고 탐구해 온 발자국을 보여주는 듯하다. 발자국의 주인이 어떤 보폭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결코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이해에도 본질적인 불확정성은 존재하는 셈이다.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비로소 타자를 향하는 시선을 좀 더 소박한 마음으로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헤다가블레르 #헨리크입센 #희곡 #지만지드라마 #조태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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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면 눈 냄새가 난다 위고의 그림책
사라 스트리츠베리 지음, 사라 룬드베리 그림, 안미란 옮김 / 위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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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덤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어느 순간, 훅하고 들어오는 그런 그리움의 감정이 있다. 추운 겨울 날 내쉴 때 보이는 입김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그런 감정들... 쉼호흡을 크게 하고 붙들고만 싶은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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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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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실재는 없다 - 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원제: The Rigor of Angels)


윌리엄 에긴턴 지음 | 김한영 옮김 [까치] (2025)

   



종종 한 권의 책을 읽고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단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천사들의 엄격함을 읽고 나서 입가에 맴도는 단어는 백일몽이라는 단어다. 인류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세 사람-칸트,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을 중심으로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했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독서였다. 저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세 사람을 어떻게 주목하고 연결짓게 되었을까 놀랍다. 이 책에는 근대 철학의 원형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문학가이면서 실재와 영원성에 대해서도 깊이 사색했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그리고 양자 역학의 토대를 세우는데 기여함으로써 현대 물리학의 역사를 새로 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등장한다.


 

무엇보다 이 세 사람이 이 책에 모여 연결될 수 있었던 단초는 철학자 칸트가 제공했다. 칸트의 사상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저자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감각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인간의 감각은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창구이자 세계로 통하는 채널이다. 달리 말하면, 세계를 파악하는 데 제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감각이다.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 소환한 사상가 세 사람은 바로 실재의 본질을 탐구한 이들이다. 이들에게 실재, 존재에 의해 감각되어 재구성된 이미지라고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실재란, 측정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고, 칸트 역시 바라보는 존재(주체)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이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언급에서 이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 한 가지는, 저자가 보르헤스나 하이젠베르크가 모두 칸트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주목했다는 점, 그리고 이를 생생한 인물의 모습으로 되살려 놓은 부분이다. 실재의 모습을 파악하는 문제에 있어 현대 물리학의 역사 일부를 생생하게 들여다본 느낌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이라는 토대 위에서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라는 하이젠베르크의 입장은 상식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이, ‘실재하는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인가? 결국 이 문제는 존재와 우주의 근거를 설명하는 본질과 이어져 있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질문이 단순히 철학과 문학의 영역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문제를 관통하고 있었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인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은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을 마련해주었다. 그렇다면 칸트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 인간이 파악한 실재란 같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동시대인에게도 이 실재란 같을 수 없지 않겠는가. 나아가 각 존재에 의해 구성된 실재는 각 주체가 세계로부터 추출한 극히 작은 이미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때 파악된 실재는 결코 실재와 동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대한 에피소드는, 주체에 의해 파악된 실재의 이미지가 실제의 실재와 동일한 경우 그 주체는 자유를 잃고 그 실재에 구속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이 놀라운 능력과 반대로, 자신이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여 의미를 추출하는 일은 잘하지 못했다. 결국 완벽한 기억혹은 완벽한 재현이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는 내부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구조화하는 기능이 필요할 듯하다. 결국 주체가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로부터 흡수한 정보를 통합하고 의미를 추출하는 추상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양자 역학의 토대를 놓은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행렬 역학으로 양자 역학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화의 방법이었다. 그는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 지식이나 현상에 대해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는 영역이 하이젠베르크가 생각했던 중간 지대에 가까운 것 같다. 하이젠베르크는 핵이나 전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정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견해와 다르고 때론 논쟁도 벌였던 닐스 보어, 이보다 더 큰 견해차를 지니고 대립했던 아인슈타인과도 중간 지대를 유지한 점에 주목해 본다. 지대는 그와 이 영역 내에서 공존했던 이들에게 서로의 논리를 다듬고 재점검하는 기회를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중간 지대는 견해차에 따른 상대방을 배제하기만 하는 우리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대는 서로 이질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이는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에 책에 등장하는 여러 사상가가 언급한실재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큰 틀에서 주체가 파악하는실재는 각 주체만큼이나 다양한실재가 존재한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하이젠베르크의중간 지대는 단지 학문적이고 심도 있는 대화를 위해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 혹은 의식 있는 주체에게 필수적인 요건 혹은 덕목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서로의 관계가 경직되고 메말라가는 지금, 기후 정의와 같이 시급한 인류 공동의 문제를 직시하는 데에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라 생각한다.


 

전후 하이젠베르크의 신변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동료 과학자이면서 나치에 의해 부모님 모두 희생당한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구드스미스와 하이젠베르크의 인연이 책의 대미를 장식한다. 구드스미스가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거둔 것은, 어쩌면 저자가 말한대로 자신을 위한 조치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구드스미스 자신이 하이젠베르크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스스로에게 관대해진 것은 아닐까 싶다. 다르게 말하면 타자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이 세상의 실재는 객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이젠베르크에게는 그만의 실재가 존재할 수 있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부분은 나의 생각이지만, 타자를 완벽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실재의 개념을 마찬가지로 적용하면 납득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담긴 세 사상가의 실재에 대한 주장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칸트의 사상이 보르헤스와 하이젠베르크에 영향을 주었고, 실재를 파악할 때 실재의 본질이 이를 바라보는 이, 곧 주체에 달려 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우리 각자는 세계라는 이미지가 통과하는 다른 렌즈를 지닌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이 책은 실재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현대 물리학사의 한 단면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보른을 포함한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집단과 슈뢰딩거 아인슈타인의 논쟁은 일단 현대 물리학계의 실험을 통해 하이젠베르크가 제안한 해석에 손을 들어주었지만 말이다. 또한 이 책은자유의지라는, 사상사의 오랜 주제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생각해볼만 하다. 무엇보다 서로 무관해 보이기까지 한 세 명의 지식인들을 실재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저자의 통찰과 안목을 경험할 수 있었던 독서였다.

 


 

#천사들의엄격함 #윌리엄에긴턴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철학책 #철학책추천

[1] "입자가 취한 경로는 입자를 관찰하는 우리의 행위, 바로 이것을 통해서만 생겨난다."(25, 하이젠베르크의 말)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노출된 자연이다."(115, 하이젠베르크의 말)
- P25

[2]"사실 영혼이나 의식은 시간에 걸쳐 존속하는 통일된 자아감이다. 영혼 또는 의식이란 세계를 지각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지각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바로 이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고, 또다시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다."(77, 칸트의 입장)
- P77

[3]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과학을 실행해야 하고, 어떻게 세계에 관한 정확한 판단을 형성해야 하는가를 항상 비판적으로 조율하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이성에 자연스럽게 끌려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우리 자신을 붙잡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79)
- P79

[4] "실제 운동은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80, 제논의 역설에 대한 헤겔의 반박)
- P80

[5] "모든 진영에게 열린 중간 지대가 필요하다."(89,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89

[6] "우리는 무엇을 관찰하기로 정했는가에 따라서 실재의 각기 다른 측면을 볼 수 있고 두 가지 측면은 서로를 보완하지만, 실재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124, 닐스 보어의 상보성)
- P124

[7] "우리의 근본적인 비결정론 가설은 실험과 일치합니다."(127, 코펜하겐 해석을 낳은 보른과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127

[8] "외부 세계는 추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연구는 아름답습니다."(146, 하이젠베르크가 1935년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P146

[9] "시간은 상실이다. 시간은 비통함이다. 시간은 영원함에 대한 욕망이다."(190, 보르헤스의 <알레프>에 나타난 시간에 대한 통찰)
- P190

[10] "확률적으로 모든 것이 생겨날 수 있으니 우주에는 정말 독창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211, 글쓰기 주제로 카발라를 택한 보르헤스의 말)
- P211

[11] "세계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는 유한하므로,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면 가능한
순열의 수가 소진되어 우주는 되풀이될 것이다."(212, 니체의 입장)

"니체의 초인은 똑같은 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우주적 부조리에 용감히 맞서거나,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똑같은 삶을 기꺼이 반복적으로 영원히 사는 존재였다."(212)
- P212

[12] "도서관은 하나의 구체이고, 그 구체는 한가운데가 어찌 되었든 육각형이며, 구체의 바깥 둘레에는 도달할 수 없다."(222)

"끝없이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도서관에서 길을 잃은 보르헤스에게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것이 중심이고, 그 둘레, 그 불가능하고 모든 것을 감싸는 점이자 기원은 어디에도 없거나, 적어도 도달할 수가 없다."(224)
- P222

[13] "일반 상대성 이론은 단순히 실험 자료를 해석한 것도 아니고, 더 정확한 법칙을 발견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실재를 완전히 새롭게 보는 방식이었다."(244)
- P244

[14] "숭고는 우리가 만든 세계 표상에 대하여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반작용이다."(282)

"숭고라는 미학적 감정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과 우연성에 둘러싸인 존재의 울타리를 벗어나 절대적인 어떤 것 – 광활한 우주,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의무 – 을 그려볼 수 있다는 깨달음에서 생겨난다."(286)
- P282

[15] "인간의 이해력은 무한하다.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들에 관해서까지도."(286,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286

[16] "자유의지는 형이상학적인 이식물이나 위대함에 대한 망상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기 쉬움에 대한 인정이다."(297)
- P297

[17] "그만 하면 됐네(Es ist gut)"(313, 칸트의 마지막 말)
- P313

[18] "시간과 세월의 담요에 감싸이기 전에 칸트는 이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생각한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흡수한 것으로부터 최소한의 것을 뽑아내고 추상하는 능력은 그 존재에게 자유를 그 세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행동 과정을 결정하고 선택을 판단하는 능력을, 더 나아가 필요성을 부여한다."(315)
- P315

[19] "(양자가 취하는 경로는) 우리의 관찰, 오로지 이것을 통해서만 생겨난다."(317,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 P317

[20] "원자는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물체도 아니다."(357, 하이젠베르크의 입장)

"양자 역학의 역설은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을 신의 눈으로 자연을 보는 관점에 일치시키려는 시도로부터 생겨났고, 그것은 애초에 우리의 관점이 아니었다."(357)
- P357

[21] "자유와 책임은 다르게 선택했을 경우를 상상할 줄 아는 존재의 필수적인 가정이자, 지금 이 삶을 여러 갈래의 길 중 내가 선택한 하나의 길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의도를 판단할 때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람의 생각에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볼 수가 없다. (...) 그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한 비밀을 안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했었을 행동, 해야만 했을 행동을 고려하는 것이다."(367)
- P367

[22] "사실,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구드스미스)가 내린 면죄는 하이젠베르크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368, 마지막 문장)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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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

야콥 폰 윅스퀼 지음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12)





동물행동학자 야콥 폰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12)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저자 윅스퀼은 에토니아 출신의 독일 생물학자로 현대적인 생태학을 제시한 과학자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생물학자로서 윅스퀼은 생명체가 주변 환경을 어떻게 인지하는지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1934년에 제안한 움벨트(umwelt)라는 용어는주변 세계’(um: 주위/주변 + welt: 세계)정도로 해석된다. 윅스퀼은 감각이 가능한 모든 생명체(짚신벌레, 아메바, 진드기 등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가 각 생물종의 감각기관에 의해 인지된 세계를 의도했다. 따라서 그의 움벨트는 불변하고 어느 생물종에게나 동일한 세계가 아니었다. 각 생물종의 고유한 감각기관에 의해 재구성된, 주관적인 세계의 존재를 인정한 셈이다. 곧 각 생물종에게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하나의 객관적인 세계/우주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모든 생물종에게는 각 개체에 의해 파악된 고유한주관적 세계가 존재하게 된다. 그의움벨트개념은 주관적인 세계이자 전체 우주의 일부라고도 볼 수 있다.


 

윅스퀼은 각 생물종에게서 형성된움벨트가 크게 두 가지 작용을 거쳐 순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이 관계의 과정을기능적 원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기능적 원환과정에는, 우선 외부 자극을 감각하고 이 자극을 수용하는 과정, 그리고 신경계를 통해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작동적) 과정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명체가 체온이나 체내의 이온농도를 조절하듯, 생명체의 생존 조건을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음의 피드백(되먹임)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는 영국의 과학 저술가 에드 용은 자신의 책 <이토록 굉장한 세계 An Immense World>에서 본격적으로 여러 동물의 감각에 대해 주목한다. 그가 처음부터 윅스퀼의 움벨트개념을 소개하는 점이 흥미롭다. 에드 용은 이 개념에 대응하는 자신의 용어로,‘감각거품(sensory bubble)이란 참신한 표현을 사용한다. 각 생물종이 고유하게 인지한 세계 영역을 은유한 표현으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윅스퀼의 사상은 세계를 이해하는 기존의 큰 틀인 기계론(mechanism)과 물활론(animism)의 관점을 벗어나며 동시에 인간중심적인 의인주의를 벗어나고자 했다. 큰 틀에서 움벨트개념은 모든 생명체가 나름의움벨트를 지니는 주체라는 인식에서 칸트주의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기존의 인간중심적/인간우월적인 시각을 탈피하여 모든 생명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인간의 대상까지 고려하여 확장하게 해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이 지점은 현재 모든 생물종이 무생물과 관계 맺고 서로 얽히는 존재로의 시각 전환 및 확장을 시도하는 현대의 철학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한다.


 

윅스퀼의 사상을 간단히 다시 정리해보면, 그는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한 생물(주로 동물에 해당)주변 세계와 맺는 관계, 그리고 이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미에 주목했다고 정리해볼 수 있다. 이에 따라 각 생물(동물) 주체의 지각(감각) 공간과 행위(동작) 공간으로 구성된 틀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했다. 이번 책읽기에서는 윅스퀼이 제시한 다양한 동물들의 주변 세계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고, 타자에 대한 이해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도 했다.


 

사실 윅스퀼이 제안한 용어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물루 밀러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책으로 언급한, <자연에 이름 붙이기>란 책에서였다. 이 책은 미국계 진화생물학자 캐럴 계숙 윤의 분류학에 관한 역사를 다룬 책이었다. 이 책의 초반부터 캐럴은 윅스퀼의 움벨트개념을 소개하며, 18세기 초의 카를 린나이우스가 <자연의 체계>를 발표하며 동식물에 관한 이명법을 정립한 이야기를 한다. 당시의 과학자들은 자연을 분류하고 이에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인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안의움벨트가 크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의 책에서는 린나이우스 이후 현대 분류학에 이르는 역사를 통해, 인간의 감각을 불신하고 배제해온 여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을 우리의 감각을 배제함으로써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심감을 얻은 동시에, 우리는 자연과의 단절을 격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캐럴은 윅스퀼이 90년 전에 모든 생물체를 하나의 주체로 인정했던 것처럼, 세계를 보는 틀이자 시선인 우리 안의 움벨트를 거부하고 배제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에서 다시 자연과의 연결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면 거의 90년 전에 한 생물학자가 제기한 개념을 우리가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은, 최근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로봇/AI/포스트휴먼과 관련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윅스퀼은 짚신벌레, 진드기 한 개체에도 주체의 지위를 부여했는데, 우리는 로봇이나 AI에게 주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현재의 상황에서는 없을 것 같다. 주체에게 기대되는 책임이라는 윤리적법률적 관점 또한 AI나 로봇에게 온전히 기대할 수는 없는 단계라고 이해한다. 이를테면, AI로 구동되는 자율주행 차량이 오작동을 일으켜 인명 사고를 내거나 운전자가 사망한 사례를 접하곤 한다. 이런 경우, 정확히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의 법적 문제를 판단하는 일도 무를 자르듯 간단명료하게 결론이 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인류가 처음 겪는 중이다.


 

한편 윅스퀼이 주로 동물의 감각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감각과 자극의 인지는 신체/을 통하지 않고서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달리 말하면, 신체를 지니지 않은 존재가 세계를 인식하고 체험할 수 있을까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로서는 AI나 로봇이 우리가 보는 외장이 아닌 진정한 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주체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앞으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AI나 이 능력을 장착한 로봇이 자신의 몸을 감각하고 인지할 수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겠다.


 

이번 책읽기에서는 각각의 독립된 주변 세계를 형성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과연 이해할 수 있을지, 곧 타자에 대한 이해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았다. 사실 이 논의의 명확한 결론보다는, ‘움벨트가 이러한 논의와 노력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함께 했더랬다. 한 참석자는 기존에 잘 알려진 서사를 다른 시선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쓴 소설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우리 인간종 가운데에서도 서로 얼마나 몰이해와 오해 속에서 살고 있는지 깨닫곤 한다. 아울러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반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체험치, 그러니까 경험적인 움벨트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말을 더한 의견도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번 책에서는 환경 세계의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시작한 장을 꺼내 이야기해 보기도 했다. 윅스퀼이 떡갈나무를 예로 든 부분이 나온다. 삼림 관리인이 이 나무를 바라볼 때 그에게는 이 나무가 목재나 땔감으로 보일 것이라 말한다. 반면 어느 여자아이에게는 떡갈나무가 요정이나 악령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고, 여우나 올빼미에게는 각각 뿌리 부분이나 줄기가 안식처를 제공하며보호라는 내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새들에게는 가지가 둥지를 지을 수 있는 안식처(보호)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 말한다. 이런 상황을 이해했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이 움벨트가 지니는 고유한 특징 혹은 제한을 염두에 두고 타자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타자를 이해하는 일이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타자와의 접점을 부지런히 마련하고, 우리 각자의 움벨트 영역을 타자의 그것에 대입해 보려는 노력이 따라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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