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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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국내 초역 작품이니 더 기억에 남을 듯 하네요. 오래기다렸는데 멋진 장정으로 만나게 되었네요. 근데... 좀 두껍습니다 ^^;; 잘 읽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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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전쟁 1939-1945 - 편지와 일기에 담긴 2차대전, 전쟁범죄와 폭격, 그리고 내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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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받았습니다~! 잔혹한 전쟁을 이끌었던 집단 아래에서 전쟁에 침여해야 했던 독일인들의 내밀한 생각들에 조금 더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독일인들의 생각을 쫓아가지만, 같음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을 보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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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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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비이성을 만날 때,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



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2024)

 




매니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벵하민 라바투트의 전작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때 받은 인상을 다시 소환해보자면, 전작은 완전히 SF는 아니라도 테드 창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 단편집이었다.


 

특히 라바투트의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테드 창의 단편집 당신의 인생 이야기에 실린 단편 영으로 나누면을 떠올리게 했다. 테드 창의 영으로 나누면은 천재 수학자가 수학의 세계에서 만난 지적 파국의 순간을, 부부관계라는 인간사와 오버랩시키며 해법이 없는 두 세계 속 비이성의 영역을 마치 평행우주처럼 다루었다. 내가 좋아하는 단편이기도하다. 이와 유사하게 라바투트는 그의 단편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에서 천재 물리학자가 물리학의 세계에서 만난 지적 파국의 순간을 다루었던 것이다.


 

이 두 단편 작품은 각각 수학과 물리학에서의 특이점(singular point)’라는 문제를 다룬다는 소재적인 공통점이 있다. 이 특이점이 지니는 공통적인 속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정의내리기 불가능함(hard to define)’일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기 힘든, 자연의 근본적인 틈새를 알아본 천재 과학자의 지적 위기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국면은 매니악에서 등장하는 천재적인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나 수학자 존 폰 노이만에게도 찾아왔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던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야심만만했던 천재 폰 노이만은 한때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고 통제하고자 꿈꾸었다. 무엇보다 수학으로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길 열망했던 것이다. 이는 그의 첫 소설집부터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큰 주제이기도 하다. 번뜩이는 지성으로 우주를 이해하려 했던 현대의 이카루스들이 지적 파국의 순간 어떤 고뇌와 행동을 하게 될지 고민했다. 안타깝게도 세계의 모든 현상을 수학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노이만의 열망은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로 그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만다. 물론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넓고 깊게 이 세계에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 놀라운 일이다. 이 뜨거운 지성에 관한 숨은 역사가 바로 라바투트의 두 번째 팩션 매니악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저자는 처음 만나보는 스타일로 자신이 고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의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게 되었다.


 

다만 이번 장편소설 매니악은 테드 창의 스타일(내가 느낀 판단으로)을 훌쩍 넘어 자신만의 목소리로 한 발 더 나아갔다는 인상을 주었다. 벵하민 라바투트라는 작가를 모르고 지나갔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저자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야기할 때 많이 소환되는 오펜하이머나 리처드 파인먼, 엔리코 페르미와 같은 물리학자 보다 조금은 덜 주목받았던 존 폰 노이만에 주목했다. 그는 거의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던, 내폭형 원자폭탄(플루토늄을 사용)을 현실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원자폭탄 개발 이후 진행된 수소 폭탄 개발, 컴퓨터 이론을 토대를 놓았고, DNA구조의 발견보다 10년도 전에 자기 복제의 기본 메커니즘을 정확히 설명해내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저자는 이번 작품에서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적인 인물들(특히 존 폰 노이만)을 깊이 탐구했다. 읽는 내내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독서경험이었다.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알고 있던 과학사의 에피소드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저자가 자료조사를 얼마나 치열하게 하며 이야기를 구성해나갔을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에피소드를 읽고, 그동안 크게 관심을 갖거나 잘 알지도 못했던 AI기술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AI알고리즘 마스터에 이르는 인류 이성의 발전과 인공지능 현실이, 파울 에렌페스트와 같은 작고 오래된 특이점과 같은 사건들부터 주목하며, 이 사건들이 결국은 모두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들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바라보면 가느다란 한 줄기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다만 이세돌-알파고 대국 사건에 기반한 이야기는, 바둑과 같은 두뇌 게임이자 유희이기도 한 인간의 활동에서 인간의 심리/마음이 빠질 때 다다를 수 있는 장면을 미리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사고 실험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오로지 서구적인 이성의 정복만이 남게 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첨단 기술에 무지한 독자의 우려일뿐일지도 모르겠다.


 

성경에는 자연을 정복하라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셈어든 히브리어든 원래 성경에 나온 표현을 정복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섬기다라 번역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비교문학 연구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다만 초기 서구 지배 세력은 이 번역어에서 정복이란 용어를 선택한 것뿐이다. 번역이란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 혹은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니 번역이라는 이 정치적행위는 하나의 역사적 초기 조건이 되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만들었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렇든 무수히 가능한 경로 중 하나인 시뮬레이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이성만을 앞세운 서구적 정복의 도도한 역사와 그 진행과정을 생생히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대의 과학자나 대중은 스티븐 호킹이 ‘AI는 극히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며 경고한 것을 비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이런 우려를 느끼고 우리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AI알고리즘이 근본적으로 지니는 결함 혹은 오류의 가능성을 말이다. 검은 타인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도구이지만, 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는 물건인 것이다. 다만 수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었던 현대판 파우스트에게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폰 노이만의 행적과 그가 남긴 유산을 검토해보면 말이다.

 


AI알고리즘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것들을 데이터삼아 학습하고 모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AI알고리즘은 없다. 이건 분명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 데이터의 성격에 대해 우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이 데이터라는 것이 과연 객관적이고 공평한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내가 던진 이 질문에도 가치를 묻는 표현이 들어가듯, 인간이 만든 데이터에 인간의 편견과 왜곡이 빠질 수 없을 테다. 그럼 이를 학습하는 알고리즘은 결국 어떻게 될까? 나도 답은 모른다.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네 번째 대국에서 망상에 빠졌던 것처럼, ‘정신줄을 놓게될 것인지 아니면 어떤 문턱을 넘어서 인간의 이해로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초이성의 존재가 나타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벵하민 라바투트의 이야기는 새로운 궁금증과 물음을 독자에게 던져주는 듯하다.


 

파울 에렌페스트는 어쩌면 지나친 공감능력과 연민의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유대인과 장애인을 학살하던 나치 시대에 장애아들을 먼저 죽이고 자살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폰 노이만은 시대를 앞서 태어난 AI 알고리즘과도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암으로 죽어가던 말년에 딸이 질문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련에 핵 공격을 먼저 단행해 수많은 이를 몰살할 방안을 태연히 고안했으면서, 자기 죽음을 대면할 때는 왜 평정심과 품격을 차리지 못하느냐”(283)고 묻는 딸에게 노이만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지”(283)라고. 그에겐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을지 모르나, 인간에 대한 존중, 곧 연민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은 AI알고리즘을 다루는 서구의 과학자들이 오로지 인간을 이기기 위해 바둑을 학습하는 AI를 만든 사례와 다를 바 없을 테다. 과연 인간은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나 역시 결론이 아니라 질문하는 것으로 감상을 마무리해본다. 어쩌면 아주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과학자가 비이성의 덫에 걸릴 때, 우리의 손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 곧 연민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연민 혹은 공감 능력을 습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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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신저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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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하루키가 있다면, 미국에는 매카시가 있었다

- 패신저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지음 | [문학동네] (2024)

 




코맥 매카시의 스텔라 마리스에 이어 패신저를 읽었다. 이 이야기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텔라 마리스에서는 수학 천재인 얼리샤 웨스턴이 정신병원에서 담당 의사와 나눈 대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한편 패신저는 얼리샤의 오빠인 보비 웨스턴과 먼서 사망한 얼리샤 웨스턴 두 명의 이야기가 시간차를 두고 교대하는 형식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보비 웨스턴의 이야기는 현재, 얼리샤의 이야기는 과거를 대표하며 이 두 남매의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왕복운동하며 진행된다. 마치 빛이 전기장과 자기장이 교차하며 나아가듯, 두 남매의 서로 다른 현실이 과거와 현재라는 씨실과 날실이 직조하며 구성되어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특히 패신저는 쉽지 않은 소설이지만 초반에는 추리소설처럼 긴장감이 느껴져 몰입하며 읽어나갈 수 있었다.


 

코맥 매카시는 과작의 작가라고 한다. 게다가 대중 앞에 자주 나서지도 않는단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평가할 단서는 작품 속에 있다. 작가의 유작이라는 이 두 작품을 읽으며 나는 밀란 쿤데라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들을 자주 떠올렸다. 이들의 작품에서 받았던 인상이나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카시의 작품과 어딘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까닭이다특히 수많은 다중 세계 가운데, 얼리샤와 보비의 세계가 교차하며 이야기가 진행하는 듯한 형식은 하루키의 최근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와 라는 화자의 현실이 교대로 나아가는 1부의 형식마저 떠올리게 했다. 물론 형식뿐만 아니라 좀더 차근차근 찾아보면 매카시의 작품을 닮은 작품들을 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접한 좁은 문학작품의 범주 내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짧은 독서 경험이나마 하루키나 쿤데라의 작품들과 비교하여 생각해보면, 이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죽음 같은 상실을 경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누군가 이런 경험 없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 묻는다면 뚜렷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실의 경험은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할 테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가들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때론 이들이 겪은 상실에도 제때에 애도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들은 살았던 시대의 역사나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크건 작건 배경이 되는 역사 속 사건들에 직·간접적으로 깊은 내상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고보면 애초에 문학이란 것은, 이런 사람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러한 관심은 자연스레 작가의 사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쿤데라는 68혁명과 러시아의 체코 침공 시기에 개인들이 겪은 고통과 슬픔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처럼 동시대의 세계사적 상황을 일본에서 목격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직조해낸다. 특히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전체주의의 흔적을 유지하고 심지어 이를 다시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던 일본 사회 속의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으로부터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패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전쟁들을 통해 재기하기에 이른다. 특히 한국 전쟁과 베트남전에서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의 대리자로 자처하며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것이 일본 경제가 세계의 경제 대국으로 초고속 성장하게 된 배경인 셈이다. 이것은 극우 성향의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전쟁이 또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일본 사회가 타국의 전쟁을 발판삼아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에 개개인들은 이 성장에 발맞추어 행복감을 느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개인들은 점차 소외되어 갔고, 심지어 국가주도 사업의 부속품이 되어 희생당하기도 했다. 그 결과 살아남은 이들은 상실의 경험을 안고 더 고립되거나 표류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이런 개개인의 상실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하루키가 대학 신입생 당시 겪었던 전공투 사건이 그에게는 이후의 세계관을 결정할만큼 커다란 사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루키 세대의 상실과 좌절을 직접 체험한 청년으로서 그가 이를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삼은 것이 이해가 된다. 하루키의 소설은 국가가 주도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고도성장의 시대에 고립되고 상처를 입은 채 표류하던 개인들의 삶에 주목한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들이 받은 시대의 상처로 고통 받으면서 치유해나가는 과정 혹은 이들이 탈출구를 찾고자 방황하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스키너박스로 대표되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60년대 세계인들의 무의식에 미친 영향은 미로에서 출구를 찾는 실험쥐들을 연상하게 하는 하루키의 초기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작가가 40년이라는 오랜 시간동안 깊은 우물 속의 어딘가에숨겨 놓았다가 꺼내온 것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도 상처받은 인물들의 출구 찾기 여정을 또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매카시의 작품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20세기에 세계 제일의 경제 및 군사 대국으로 급부상한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전무후무한 거대 국가프로젝트와 이어지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 이와 동시에 시작되는 냉전시대와 맞물린 세계 공멸의 위기. 이제 미국은 적국뿐만 아니라 자국민들까지 실존적 위험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국가라는 괴물은 개인들의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때론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보비 웨스턴과 얼리샤의 아버지 역시 이런 미국의 행보에서 선두에 섰던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에서는 웨스턴의 아버지를 언급할 때, 끊임없이 아버지의 업보, 혹은 아버지들의 죄를 언급한다. 나치 독일에 투하하려던 원자폭탄은 갑작스러운 독일의 패망과 항복으로 그 사용 명분을 잃고 만다. 미국은 대신 원자폭탄을 일본에 떨어뜨리고 본격적인 냉전 구도를 설계하며 세계 패권을 쥐고자 했다. 이렇듯 미국이 중심이 되어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은, 서구 백인 문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과 반성의 시각이 작가의 시선에서 줄곧 느껴진다.


 

얼리샤와 보비의 할머니는 웨스턴의 집안에 저주가 들었다고 우려한다. 암을 고치러 멕시코까지 갔던 남매의 물리학자 아버지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홀로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보비는 아버지가 묻힌 곳을 결국 찾지 못한다. 영원한 상실. 이는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패신저의 시작이 얼리샤의 자살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 그리고 오빠 보비가 동생의 죽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것 역시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었던 보비와 얼리샤 남매 아버지의 업보가 집안의 저주가 되어 전해지고 있다고 여길 만 하지 않은가. 이제 남은 사람은 보비 하나 뿐이다. 그는 가까운 두 사람을 잃는 상실을 겪으면서도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채 슬픔에 잠식되어 버린 듯하다. 상실의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웨스턴 집안이 겪는 불행(상실의 슬픔)은 백인들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 같아 보인다. 백인 가문의 자녀인 얼리샤와 웨스턴은 집안의 저주라고 여겨진 상실의 고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특히 전도유망하던 보비 웨스턴이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다가 심해잠수부가 되는 설정에도 주목해볼만 하다. 물질세계의 질서에 주목하는 물리학이 아니라 깊은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직업을 택한 보비. 이 설정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우물과 비교해볼만하다. 무의식의 세계를 암시하는 우물 아래 무의식의 세계와 깊은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보비의 상황이 유사한 심리학적 설정이라 간주할 수도 있지 않은가. 보비는 깊은 바다로 잠수하면서 자기 내면의 깊은 속에 자리 잡은 무의식에 가 닿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다 속에 잠긴 비행기에서 블랙박스와 한 명의 행방불명된 승객은 어쩌면 보비가 알아낼 수 없는 상실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저히 찾지 못하는 아버지의 묫자리처럼 말이다. 이런 이유로 보비 웨스턴은 아버지의 죽음에 합당한 애도를 영원히 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얼리샤도 결국 비슷한 상황인 셈이다.

 


하루키 소설의 인물들 역시 하나같이 제대로 애도할 기회마저 잃어버린 존재들이다. 애도는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면서도 자신과 분리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애도할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깊은 내상을 입은 채 살아간다. 일상적인 삶은 불가능에 가깝다. 슬픔에 압도되어 허우적대기도 하는 것이다. 하루키나 쿤데라처럼 매카시 역시 애도하지 못하고 치유되지 못한 인간들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조금 달리 볼 여지도 있겠다. 이런 상황은 백인들이 느끼는 죄의식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독자에 따라서는 일본인들처럼 희생자 코스프레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문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작가는 한 백인 가족이 입은 상처와 슬픔에 주목하고 있으나, 예컨대 원폭 피해자들의 상실과 슬픔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시선은 백인들에 대한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시선이 드러나긴 하지만 한편으론 불완전하고 제한적인 관점이라고 볼 여지도 있겠다. 혹은 내가 문학을 이야기할 때 너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문제는 다른 독자와의 토론을 통해서 더 이야기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한편 보비의 부모 한 명만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은 유대인에 대한 (앵글로색슨) 백인들의 혐오와 비난을 어느 정도 차단하려는 장치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대인은 오랜 역사를 통틀어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어온 것을 감안하면 말이다. 죄의식을 느끼는 인간은 또 다른 희생양을 찾기 마련이다. 코로나-19 시기에 아시아인이 서구사회에서 공격과 비난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 대부분이 유대인인 상황에서 보비의 부모 중 한 명만 유대인으로 설정한 것은 매카시의 사려 깊고 치밀하게 고려한 결과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튼 하루키나 쿤데라의 작품들처럼 매카시도 거대한 역사 속에서 상처받고 표류하는 사람들이 치유되어가는 과정 혹은 가능성을 살짝 열어두긴 하는 것 같다. 물론 답을 주고 있지는 않지만, 인물들이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출구를 찾는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패신저스텔라 마리스를 읽는 동안 종종 하루키를 떠올렸던 것이다. 일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면, 미국에 코맥 매카시가 있었다고 말이다.


 

책을 덮으면서 기억에 남는 문구 하나는, 죽은 친구 존 셰던이 웨스턴을 찾아와 건네는 한 마디, “가볍게 여행해”(717)였다. 아마도 이 말의 앞에 생략되어 있는 단어가 바로 나그네처럼이 아닐까 싶었다. 이 말이 의외로 작은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정영목 번역가는 코맥 매카시가 말을 많이 하는 작가가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매카시는 우리가 자신과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고, 최대한 서로를 보살펴주도록 무언의 당부를 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부터라고 말이다. 나아가 우리에게 닥친, 불가피한 상실에 대해 애도하며 조금씩은 앞으로 나가는 일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내게 이야기해주는 듯했다. 그 자체가 삶이라고 말이다. 인간이란 엄청난 능력을 지닌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현실에선 무척이나 나약한 존재들이다. 가만히 보면 우리의 삶이란 얼마나 취약한지 것인지 놀라곤 한다. 하루아침에 우리의 삶은 세계가 뒤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누군가 불치병 선고를 받는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회적 안전망 속에 대비를 든든히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런 불시의 습격은 이에 대한 대비를 얼마나 잘 했는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삶을 갉아먹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도스토옙스키처럼 취약한 인간 존재를 향한 인간적인 관심과 연민, 공감의 시선을, 하루키뿐만 아니라 매카시에서도 발견한 것은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므로 한도 끝도 없이 무거울 수 있는 인간의 삶이지만, 내일부터는 조금 가볍게 산책도 해보는 삶을 살아가보고 싶어진다






[1]
(657-659) [존 셰던이 웨스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글]
"스콰이어에게,
이 편지는 존슨시티 참전용사 병원에서 보내는 건데 좋은 소식은 아니야. 말을 탄 자가 내 문에 백묵으로 표시를 한 것 같아서 이 편지가 너한테 닿았을 때면 - 닿는다는 가정하에 - 나는 이 필멸의 똬리를 벗어버리는 중일지도 몰라."(657)
- 존 셰던이 웨스턴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글
- P657

[2]
"어디든 우리가 내리는 곳이 늘 기차의 목적지였어. 나는 공부를 많이 했지만 배운 건 거의 없어. 그래도 최소한 친근한 얼굴 하나 정도는 합리적인 바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침대 옆에 내가 지옥에 가기를 빌지 않는 누군가가 있는 거. 시간이 더 있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고 우리가 영원히 포기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그것은 처음에 생각하던 그게 절대 아니라는 게 거의 확실해. 됐어. 나는 이 생이 특별히 살기 좋다거나 자비롭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조금이라도 이해한 적이 없어. 내세가 있다면 - 없기를 정말 간절히 빌지만 - 노래는 하지 않기를 바랄뿐이야."(658)
- P658

[3]
"담대하라, 스콰이어. 이건 초기 기독교인들의 지속적인 권고였는데 적어도 이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어. 네 역사가 불필요하게 쓰라리다고 내가 늘 생각했다는 건 알았겠지. 고난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고 견뎌야 해. 하지만 불행은 선택이야. 네 우정에 감사해. 이십 년 동안 비판의 말 한마디가 기억나지 않으니 이것만으로도 너에게 깊은 축복이 있기를. 우리가 만에 하나 다시 만난다면 그곳에 술 빠는 데 비슷한 게 있어서 내가 너한테 한잔 살 수 있기를 바라. 아마도 너한테 그 동네 구경을 시켜주겠지. 맞춤 가운을 입은 키가 크고 좀 건달기가 있는 녀석을 찾아오라고."(659)
- P659

[4]
"웨스턴은 자기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손.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나한테 물은 적이 없어. 나와 상의한 적이 없어.
- 너 자신의 인생에 발언권이 없구나.
-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모든 게 사라진다면 내가 자유롭게 식료품점에 갈 수 있든 아니든 무슨 차이가 있겠어?
-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럴 거고.
- 그래.
-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680)
- P680

[5]
"그는 이비사의 문구점에서 줄이 쳐진 작은 공책을 한 권 사왔다. 곧 누레져 바스러질 싸구려 펄프 종이. 그는 공책을 꺼내 안에 연필로 썼다. 내 앞에는 시간이 없었고 내 뒤에도 없을 것이다."(688)
- P688

[6]
"그는 칼라사비나의 보데가 마당에서 자전거를 챙겨 망태기를 손잡이에 걸고 산하비에르와 라몰라의 곶으로 향하는 길로 나섰다. 길가 어둠 속에서 들판 가득한 새 밀이 부드럽게 허공을 베고 있다. 위로 소나무숲을 뚫고 올라간다. 자전거를 민다. 세상에서 홀로."(689)

[7]
"다가올 몇 년 동안 그는 해변을 거의 매일 걷게 된다. 가끔 밤에 해초가 밀려와 그린 선 위의 마른 모래에 누워 옛 뱃사람들처럼 별을 살핀다. 혹시 그도 자신의 항로를 그릴 방법을 알 수 있을까 해서. 또는 그 검고 영원하고 광대한 공간 위로 별들이 천천히 기어가는 모습에서 지상의 어떤 일이 유리한지 읽어낼 수 있을까 해서. 그는 건너편 해안을 따라 한 줄로 늘어선 피게레타스의 불빛들을 볼 수 있는 곳까지 건너나갔다. 검은 바다가 찰싹인다. 그는 바짓자락을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런 밤의 캐롤라이나 해안. 여관 건물과 진입로를 따라 빛나는 불빛들. 그녀가 밤 인사로 입을 맞출 때 뺨에 느껴지던 숨결. 마음속의 공포."(692)

[8]
"여기 이야기가 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동안 우주에 홀로 서 있는 모든 인간 가운데 마지막 인간. 하나의 슬픔으로 모든 것을 슬퍼하는 인간. 한때 그의 영혼이었던 것이 소진되고 남은 애처로운 찌꺼기에서는 이 마지막날들을 안내해줄 신 비슷한 존재라도 만들 재료는 전혀 찾지 못할 것이다."(693)

[9]
"아버지. 절대적인 흙으로부터 악의 태양을 창조했고 사람들은 그 빛에 의지하여 서로의 몸에서 자신의 종말을 알리는 어떤 무시무시한 전조를 보듯 옷과 살 너머의 뼈를 보았다.
그는 멕시코 북부 쥐의 땅에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다녔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696)

[10]
"그는 곶을 다라 걸어나갔다. 멀리서 천둥이 상자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어두운 수평선을 가로질러 굴러갔다. 특이한 날씨. 번개는 여위고 빠르다. 땅 가운데 바다. 서양의 요람. 연약한 촛불이 어둠 속에서 비슬거린다. 모든 역사는 자기 소멸을 위한 리허설."(697)

[11]
"왜 그 사람을 묻지 못하는 거야? 그 사람 두 손이 그렇게 붉어? 아버지들은 늘 용서받아. 결국은 용서를 받아. 여자들이 이 세상을 질질 끌고 이런 참상을 통과해 왔다면 그 여자들한테는 현상금이 걸려 있을 거야."(700)

[12]
"한순간의 회상에 다 담을 수 있는 오랜 세월의 방랑. 텅 빈 극장은 너도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모든 게 텅 비어 있는 거야. 이건 과거라는 비워진 세계의 은유야. 어쨌든 새 소식을 찾아서 올 법한 곳으로는 보이지 않지."(710)

[13]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바닥은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선택할 여지가 적다고 생각하게 됐어. 그리고 걷는 내내 우리가 거의 알지도 못했던 과거가 수상쩍은 투자금처럼 우리 삶 속으로 다시 굴러들어오지. 이 시대의 역사는 정리되려면 오래 걸릴 거야, 스콰이어. 하지만 우리의 이해에 공통의 용골이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결함이 있다는 거야. 그게 우리의 핵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거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혐오한다고 생각하는군.
-우리에 대한 응분의 벌로는 부족하진, 물론. 하지만 맞아."(714)

[14]
"내가 이따금 신랄하게 굴긴 했지만 네가 사별을 그런 높은 위치로 끌고 가는 방식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늘 감탄스러웠어. 슬픔을 그것이 슬퍼하는 것을 초월하는 지위로 들어올리는 것. 아니, 스콰이어. 내 말을 끝까지 들어. 그게 상실이라는 관념이야. 그 관념이 모든 상실 가능한 것들의 무리를 포괄해. 그건 우리의 원초적 공포이고,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마음대로 뭐든 갖다붙이지. 그게 우리 삶에 침입하는 게 아니야. 그건 늘 거기 있었어. 네 방종을 기다리며, 네 양보를 기다리며. 그래도 나는 여전히 너를 싸게 팔아버렸다는 느낌이 들어."(715)

[15]
"하지만 잘 들어, 스콰이어. 어떤 것의 내용이 불확실할 때는 형식이 상황을 더 좌지우지할 수가 없어. 모든 현실은 상실이고 모든 상실은 영원해. 다른 종류는 없어. 게다가 우리가 탐구하는 현실은 우선 우리 자신을 포함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우리가 뭐야? 십 퍼센트의 생물과 구십 퍼센트의 밤소문nightrumor이지."(716)

[16]
"-너한테 다른 말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 스콰이어. 어떤 투쟁을 준비하는 것은 대체로 자신의 짐을 벗는 일이야. 싸움에 과거를 지니고 가는 건 곧 죽음으로 달려가는 거야. 내핍은 마음을 고양하고 비전에 초점을 맞추지. 가볍게 여행해. 몇 가지 생각이면 충분해. 외로움에 대한 모든 치료책은 그걸 미루는 것에 불과해. 그리고 치료책이란 것이 아예 없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어. 물이 잔잔하기를 바라, 스콰이어. 늘 그걸 바랐어."(717)

[17]
"해변에서 동전 하나를 발견했다. 수백 년 동안 씻겨서 맨들맨들하게 닳고 일그러진 구리 원반. 그는 동전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 외딴곳에 남은 사라진 세계들의 잔재. 북쪽 먼 바다의 암초들 사이에 있는 배의 뼈들처럼. 사람의 뼈들처럼."(720)

[18]
"그에게는 그녀의 사진이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자신이 그녀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떤 모르는 사람이 어느 먼지 낀 가게에서 발견한 학교 앨범에서 그녀의 사진과 우연히 마주치면 그녀의 아름다움에 그 자리에서 발을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 페이지로 돌아갈지도. 그 눈을 다시 들여다볼지도. 오래된 동시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세계. 그녀가 채석장을 떠난 뒤 그는 혼자 앉아 있었고 마침내 깡통에 든 작은 불들이 펄럭거리다 하나씩 꺼졌다. 그러자 오직 전원지대의 어둠, 그 정적. 멀리 고속도로에서 트럭이 희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721)

[19]
"그는 램프 불빛에 의지해 작고 검은 책에 글을 썼다. 자비는 홀로 있는 사람의 영역이다. 집단적 증오가 있고 집단적 슬픔이 있다. 집단적 복수와 심지어 집단적 자살도. 하지만 집단적 용서는 없다. 오직 네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물을 붓고 이름을 지어준다. 아이를 우리 마음이 아니라 우리 손아귀에 고정한다. 남자들의 딸들은 어두컴컴한 옷장 안에 앉아 면도칼로 팔에 메시지를 새기고 잠은 그들 삶의 일부가 아니다."(729)

[20]
"그는 팔꿈치 옆 램프의 심지를 올리고 상자에서 공책을 꺼내 펼쳤다. 그러다 멈추었다. 오래 그렇게 앉아 있었다. 결국, 그녀는 말한 적이 있었다. 모방할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그리고 그게 특권의 마지막 박탈이 될 거야. 그게 다가올 세계야. 어떤 다른 세계가 아니라. 유일한 대안은 콘크리트로 검게 타들어간 사람들의 그 기괴한 형태가 주는 놀라움뿐이야.
무덤에서 무덤으로 뻗어 있는 인간의 시대들. 점판암에 새긴 회계. 피, 어둠. 나무판 위에서 죽은 아이들 씻기기. 형태와 수를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한 화석 자국들을 간직한 세계의 돌 척층물. 내 아버지의 현대판 암면 조각과 벌거벗은 채 울부짖는 길 위의 사람들."(724)

[21]
"마침내 그는 몸을 기울여 유리 등피 쪽으로 손을 오므려서 불을 불어 끄고 어둠 속에 드러누웠다. 죽는 날 그녀의 얼굴을 볼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지상의 마지막 이교도가, 그 아름다움을 어둠 속으로 데려가기를 바랄 수 있었다. 짚자리에 누워 미지의 언어로 작게 노래하면서."(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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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13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쿤데라와 하루키, 코맥 매카시를 한 쾌에 엮으시다니
묵직하고도 얻어 갈 것이 많은 리뷰네요.
한동안 멀리했던 하루키를 다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AI와 살아가기 위한 기초 지식 - AI 개념부터 위험성과 잠재력, 미래 직업까지 AI 세상에서 똑똑하게 살아가는 법
타비타 골드스타우브 지음, 김소정 옮김 / 해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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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기술은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거울

- AI와 살아가기 위한 기초 지식

 


타비타 골드스타우브 지음 | 김소정 옮김 | [해나무] (2024)

 




AI와 살아가기 위한 기초 지식을 읽으면서 간간이 새롭게 깨닫게 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AI에 대해 독자에게 이야기해주는 저자 타비타 골드스타우브가 공학도가 아니라 어렸을 때 게임에 심취했던 평범한 여학생이었지만, 이내 AI 기술과 영향력을 잘 이해하고 이를 사업으로 만든 스타트업 기업가가 된 인물이다. 또 한 가지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백인)남성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기술·공학의 세계에서 성평등의 입장을 분명히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한쪽으로 치우쳐버린 운동장 전체를 다시 평편하게 만들려면 꽤나 오랜 시일이 걸릴 것 같다.


 

한 가지 놀라웠던 부분은 AI의 기반이 되는 연구분야에서도 이미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활약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과학사에 꽤나 관심을 갖고 읽어왔다고 자부하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천재 수학자이자 컴퓨터 이론의 선구자로 여겨진 존 폰 노이만이 부인과 공동 연구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이 책을 통해 이 사실을 처음 접했다. 그만큼 한쪽 세계의 진실은 아주 두터운 장막으로 가려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천재적인 수학자로 나오는 조앤 클라크도 실제보다는 튜링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유로 크게 부각되었던 캐릭터는 아니었다. 또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 천재적인 계산능력을 보유했던 흑인 여성들이 NASA에서 연구하기 위해 포트란을 독학하고, NASA의 전산원을 이끌기까지의 이야기는 상당히 짜릿한 쾌감마저 주었던 기억이 났다. 인종과 성차별이라는 두터운 벽과 맞서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낸 흑인 여성 연구원들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었던 이야기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듯 AI와 관련하여 일반 독자가 알아야 할 사실들을 알려주면서도, 동시에 크게 기여했고, 지금도 기여하고 있는 여성 과학자들을 소개하거나 함께 나눈 대화를 제시한다. 저자의 관심사와 입장이 아주 분명한 AI소개 책인 셈이다.

 


저자는 AI분야가 자신의 모든 열정의 근원인 듯 이야기하면서도, AI기술이 인간에게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사실 책을 읽으며 다시금 깨닫는 점인데, 우리는 이미 AI기술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다. 동시에 저자가 언급한 위험과 언제든 가까이 있기도 하다. 결국은 인간이 이러한 기술 그 자체와 본성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AI기술이 결국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거울이란 생각에 가 닿는다. 기존에 생성된 텍스트에 의존하여 학습하는 경우, 이미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문서들이 가득한 이 세계에서 기계가 학습하여 내놓는 견해는 이미 이러한 차별적인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이치다. 여전히 AI가 내놓는 결과물은 인간의 편견과 착오로부터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지나치게 AI기술에 대해 우려를 하거나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서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AI 기술 그 자체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 그 자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깊은 심연 속에 꽁꽁 숨어 있는 어두운 본성에 회의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과학자, 공학자들이 좋은 의도로 연구를 하고 결과물을 내놓더라도, 기업가나 정치인들이 이를 공공의 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은 무용지물이 아닌가. 그리고 나의 이 우려는 인간의 역사 이래 꾸준히 우리 자신을 어김없이 공격해왔다.


AI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 요소가운데 내 기억에 남는 것 하나는, 얼굴 인식 소프트웨어와 관련한 것이었다. 누구나 한번 쯤 셀피 앱을 사용해보았을 테다. 이 앱으로 재미있는 표정이 담긴 자신의 사진을 가상 공간과 인터넷에 올리게 되면, 얼굴 인식 소프트웨어는 이 이미지들을 학습하고 훈련하여 신원 확인에도 사용될 수 있는 셈이었다. 저자는 이 기술을 법 집행 기관에 판매했다는 기사를 언급했는데, IBM도 사용자들의 분명한 허락을 구하지 않고 플리커에 올라온 사진을 이용하여 얼굴 인식 앱을 훈련한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말하자면 AI기술은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길거리에서 보이는 이의 신원과 그 밖의 사생활을 알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겁부터 낼 필요는 없다는 주장에는 수긍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실현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 이런 상황이 사생활 침해의 문제에서만 끝날 것 같진 않다. 이런 현실에서 건강 정보와 같은 개인정보가 보험이나 취업, 진학 등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AI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이를 전파하고자 하는 저자가 이러한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 어쩌면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입장은 오히려 우리가 어떠한 기술을 다루고 있으며, 어떤 위험성과 이로운 점이 있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통제해야한다는 입장에 더 가깝다. 여기에 이 과정에서 저자는 다양하게 AI기술을 고민하는 과학자, 공학자, 커뮤니케이터, 작가 등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여러 여성 지식인들이 기대하는 '부드러운 기술에도 불구하고 사실 나는 여전히 우려스럽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기술과 지성의 결과물들을 현실에서 가능하게 하는 주체가 기업인과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된 노동과 반복 작업을 줄이고자 훌륭한 도구를 발명하고 개선해왔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00년 전에 일주일 걸려야 할 수 있었던 이들이 이제는 단 한 시간에 해결이 되기도 한다. 그럼 인류는 이 일주일에 가까운 잉여 시간을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쓸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다. 우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단축한 시간만큼 노동자는 더 많은 일을 하여 생산성을 높일 것을 끊임없이 강요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좁은 소견에 따르면 인간이 개발한 좋은 기술들은 대부분 인간의 행복 증진을 위해 사용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 가장 큰,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3차 기술 혁명이든, 4차 기술 혁명이든 그 국면이 매번 바뀐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결국 우리 인간에게 놓여 있다. AI기술 역시 결국은 급변하는 기술문명 시대에 인간은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는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화두가 아닐까 싶다. AI기술과 관련한 논의가 과학자와 공학자들만의 것이 아닌 까닭이다. AI 관련하여 철학자를 비롯한 인문학자들이 활발하게 연구에 참여하고 고민하는 이유가 바로 이 본질적인 문제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결국 AI는 인간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처우하며 살아갈 것인가의 철학을 반드시 수반해야한다는 명제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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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07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차별적인 AI의 등장이 우려되긴 하네요.ㅠㅠ 어차피 인공지능ai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