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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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작가의 의도와 의미를 찾으려 하는 우리의 관습에 장렬한 똥침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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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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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상상력이 비추어 준 인간의 초상

-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2012)

 



아마도 걸리버 여행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소인국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도배된 어린이용 도서 이후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본 독자는, 나를 포함하여 매우 드물 것 같다. 이 책의 전체적인 인상을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1장과 2장은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을 만나 거주민들과 교류하며 여러 가지 대비를 보여준다. 특히 걸리버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가 처한 위상에 따라 다른 행동 양식을 보여준다. 걸리버가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기를 반복한다. 그는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 4(소인국거인국-라퓨타-휴이넘 왕국)에 순서대로 도달하는데, 그가 이곳에서 겪는 167개월의 여정을 보여준다.


 

걸리버가 처음 방문하는 소인국에서 그가 처음 상대하는 작은 인간은 중년의 고위 관리다. 걸리버는 이방인임에도 이곳에서 자신이 지닌 신체적 우월함을 적극 활용한다. 불이 난 궁전 위에서 거대한 폭포수 같은 소변을 누어 화재를 진압하는가 하면, 이웃하는 섬과의 전쟁에 개입하여 상대국의 전함을 한 손에 끌고 옴으로서 전쟁을 종식하는 일에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위치에서 왕국을 보호하는 선한 신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하지만 걸리버의 지위는 거인국에서 정반대로 뒤바뀐다. 돌봄을 받고 보호받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우월감을 느끼는 거인들 앞에서 작고 무기력해 보이는 존재가 이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이며 주목을 받고, 급기야는 많은 거인들 앞에서 전시되기도 한다. 마치 아프리카의 코이산족(문명 세계에서 부시맨이라는 경멸적인 별칭으로도 불리는) 몇 명이 유럽인들 앞에서 거의 나체 상태로 전시되었던 역사적 사례를 떠올리게 한다. 1700년대에 유럽의 남성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을 내세워서 그를 상대화해보고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도는 상당히 신선한 실험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그는 거인국에서 주인집 딸의 돌봄을 받고, 나중에는 여왕에게 기쁨을 주며 돌봄을 받는 피보호자의 신분으로 지내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거인국 브롭딩낵에서 언제나 돌봄을 제공하는 존재는 여성으로 전형화되어 있다.


 

한걸음 나아가 인상적인 장면은 걸리버가 보여주는 남성성의 부재다. 예를 들어 짓궂은 거인 여자 하인이 자신의 가슴 위에 걸리버를 올려놓고 희롱한다던가, 걸리버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갈아 있는 행위는, 그의 존재 자체를 투명인간처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자 하인을 보는 걸리버가 불쾌감을 강하게 느끼는 장면을 보고 혹자는 걸리버의 창조자조너선 스위프트가 성불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 모양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 반응을 보인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의 행위 몇 가지로 작가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기에는 다소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이 견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표피적인 특징이라는 결론에 가깝다.


 

오히려 그가 밝힌 바는 없지만, 동성애적 성향 같은 퀴어한 성향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말이 지배하는 휴이넘 왕국에서 인간을 닮은 야만적인 야후들중 한 암컷 야후가 강에서 목욕하는 걸리버를 덮치려고 했을 때, 지극히 혐오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나, 휴이넘의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인 영국에 돌아왔을 때 동료 인간을 혐오하고 심지어 아내를 야만적이고 냄새나며 더러운 존재로 경원시하는 장면을 보면 말이다.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모습이나 행위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걸리버의 몇 가지 모습만으로 저자를 성불구라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좀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에서 더 들여다볼 때 걸리버가 보여주는 행동은, 성적불쾌감을 주는 대상이 남성이나 여성의 구분이 없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불쾌감을 주는 주체가 남성만도 아니며, 이는 특정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우월적인 지위 아래 이루어지는 역학 관계라는 것, 나아가 인권에 관한 문제라 파악할 수도 있겠다. 이쯤 되면 소인국의 세계는 남성적인 규범과 질서의 수호자로서 걸리버를, 거인국에서는 제한적이나마 여성적 규범과 미덕이 두드러지는 세계의 수혜자로서 걸리버를 발견할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 작가 스위프트는 걸리버가 처하게 되는 환경의 스케일을 달리함으로써 세계를 파악하는 감각과 인식의 경계 넘기를 시도한 셈이다. 이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상대화하는 실험을 해본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소설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걸리버가 확연히 다른 왕국 네 곳을 여행하고 다시 복귀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한 기회로든 자연의 거대한 힘에 의해서든, 걸리버는 새로운 왕국에 갈 때마다 그곳의 언어를 빠르게 배우며 소통에 성공하고야 만다. 18세기임에도 보기 드문 현지 적응 능력이다. 이 점이 너무나 매끄럽다고 느껴지긴 한다. 또한 그의 자세는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디딜 때 나는 문명화된 유럽 국가에서 왔다는 자의식을 놓지는 않는 듯하다. 소인국에서는 소인들과 그 왕국에 대한 우월감으로 활약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거인국에서는 보살핌을 받으며 다소 무력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이성으로 이룩된 문명국에서 왔음을 끝없이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열심인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내가 여기서 주목한 지점은, 걸리버가 어느 왕국을 가더라도 그 지역의 공동체에 뿌리내리고 있는 나름의 악습을 발견한다는 점이다. ‘악습의 종류는 다르지만 말이다. 심지어 그가 휴이넘의 왕국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치 인간 혐오자가 되어 돌아온 듯하다. 인간 존재 자체를 악에 물들기 쉬운존재로 규정하며 꽤나 냉소적인 인간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걸리버가 이런 관점과 태도를 유지하는 한, 그가 n번의 여행을 더 하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결국엔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이 의문이었다. 소설에 소개된 네 군데의 왕국은 어쩌면 인간의 다른 모습을 비춰주는 일종의 거울일 수 있기에, 그가 수많은 여행을 더 하고 돌아온다 해도 나는 그가 어김없이 인간의 부정적인 면모와 악습을 더 많이 발견할 것만 같다. 따라서 걸리버가 수많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워온다 한들, 개인의 내면이 자기 종족인 인간에 대한 혐오와 멸시, 냉소로 채워진 인물이 무엇을 새로 배우거나 건설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 문제는 걸리버 자신이 발을 딛고 선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 자신의 내부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인간에 대한 혐오와 냉소를 거두고 작은 희망을 되찾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테다. 또 어떤 사회의 규범이 그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과 충돌할 경우, 그 규범의 존재 가치를 재평가하고 수정해 나가거나 새로운 규범까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겠다.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만족시키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걸리버가 동료 인간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잘 이해하고 포용하여 인간애를 되찾을 수 있다면 소설의 마지막에서 말하듯 영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의 악덕에 가득한 사회를,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이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375)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악덕이 가득해 보이는 세계에 살면서도 이따금 희망이 닿는 지점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





[책속으로]

[1] "적어도 덕성을 지닌 사람이 잘 몰라서 실수를 하게 될 경우에도, 악덕한 기질이 가지고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적당히 처리하거나 변호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의 행위처럼 사회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69, 제1부 릴리퍼트 기행) - P69

[2] "이 일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친절한 독자들은 용서를 해주기 바란다. (...) 매사를 깊이 사고하려는 현명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야말로 자신의 사고와 상상력을 깊고 풍부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인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여행을 비롯한 여러 여행기를 세상에 내보내는 이유다."(116,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16

[3] "왕은 로열 서브린 호의 돛만큼 커다란, 하얀색의 왕홀을 가지고 뒤에 기립해 있는 대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인간의 위대함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와 같이 작은 벌레도 그것을 흉내 낼 수 있다니 말이다."(132,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32

[4] "그대의 이야기와 내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종합해 보았을 때, 그대의 민족 대부분이 세상의 표면에 기어 다니게 된 생물 중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167, 거인국 국왕이 걸리버에게 한 말) - P167

[5]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영국의 독자들은 그의 인품에 대해 낮게 평가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큰 사람들의 이러한 결함이 무지의 소치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물질문명이 이룩한 것처럼 정치를 하나의 과학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171,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71

[6] "많은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거인)도 인류 전체가 겪고 있는 똑같은 악습으로 인해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귀족은 권력을 위해, 시민들은 자유를 위해, 왕은 절대적인 지배력을 위해 서로 다투어 왔다."(174, 제2부 브롭딩낵 기행) - P174

[7] "그들을 서로 비교해보니, 로마의 원로원은 영웅과 반신반인의 모임처럼 보였으며, 오늘날의 국회는 봇짐장수, 소매치기, 강도, 깡패들의 집단처럼 보였다."(249,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49

[8]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인가에 대해 나는 가끔씩 생각하고는 했다. 스트럴드블럭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행운이 온다면, 영원한 생명과 죽음 사이의 차이점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가 가장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은 불사신들이다."(266-267,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66

[9] "죽지 않는 생명을 얻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최대의 적으로 여기면서 하루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하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도망을 치게 마련이다."(269, 제3부 라퓨타 기행-글럽덥드립) - P269

[10] "혈연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싸우고 싶은 욕망은 커지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는 궁핍하고, 부유한 나라는 교만하다. 교만과 궁핍이 부딪히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군인은 가장 명예스러운 직책으로 간주된다. 군인이란 그를 결코 공격한 적이 없는, 그와 같은 종족을 가능한 많이 죽이도록 고용된 야후이기 때문이다."(315,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15

[11] "나는 돈 때문에 어릴 때부터 하얀 것을 검다고, 검은 것을 하얗다고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예나 다름없다."(318,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18

[12] "나는 주인을 따라서 모든 허위나 기만에 대해 완전한 혐오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결심했다."(329) - P329

[13] "정부와 법률 체계는 막대한 결함을 지니고 있는 이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331,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31

[14] "호수나 샘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나는 한 마리의 야후에 불과한 자신에 대해 증오와 혐오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 자신의 모습보다는 차라리 야후들의 모습을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참을 수 없었다."(353, 제4부 브롭딩낵 기행) - P353

[15] "훌륭한 이성을 지니며 살고 있는 휴이넘은 자신들의 좋은 덕성에 대해 교만스러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튼튼한 다리와 팔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다리나 팔이 잘린다면 슬픈 일이지만, 어떠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다리와 팔이 건강하다고 해서 교만한 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영국에서 살고 있는 야후들의 악덕이 가득한 사회를,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이 여행기를 쓰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도덕함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날 생각조차 하지 않기를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경고한다."(375, 마지막 문장)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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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 15주기에 받은 리영희 선생의 유산'

<나와 리영희>


리영희재단 기획 [창비] (2025)





오늘(2025년 12월 05일)은 고 리영희 선생의 15주기라 한다. 마침 오늘 리영희 선생과 만나고 시간을 함께 했던 인연들이 기억하는 선생에 대한 글을 모은 <나와 리영희>가 도착했다.



내가 선생에 대해 알게 된 시기는 몇 년 되지 않았다. 선생이 남긴 글들을 우연히 접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기억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전환시대의 논리>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내게 '리영희 선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진실'이라는 단어다. 그가 생전에 아마도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표현이, '나는 오로지 진실만을 쫓겠다'라는 말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이 단어만큼 왜곡도 많고, 논란이 많으며 때로는 과소평가되는 단어가 있을까 싶다. 그런 개념이 바로 '진실'이라는 것인데, 선생이 오직 이 '진실'만을 위해 살았고, 또 그렇게 하겠다고 천명했던 선생의 신념을 되새겨보는 날이다.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의 동료/지인/후학들을 비롯한 인연 32명이 기억하는 리영희 선생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선생이 평생 추구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또 얼마만큼의 무게감을 지녔던 것일까 궁금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찾아야할 답이겠다. 



한 가지 실마리, 혹은 출발점으로 오랫동안 뉴욕 타임즈에서 서평가로 활동했던 일본계 미국인 미치고 가쿠타니를 소환해본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도 종종 '진실'을 추구하고자 했다. 내가 이해하는 가쿠타니의 '진실'은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진실'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균형추로 작용하는 '무게중심'에 가깝게 느껴진다. 한편 이 무게중심의 한 가운데에는 '인간'이 자리잡고 있었다. 



현대의 많은 저술가, 사상가들이 '진실이란 없다'는 입장을 취하며, 가쿠타니를 비판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를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가 줄곧 추구하던 진실이 내게는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말씀하시던 진실과 닿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늘 흔들리고 방황하는 존재일 테다. 진실을 향한 길 한가운데에서 늘 길을 잃고마는 우리 인간을 다시 붙들어주고 다시 이를 향하게 해주는 평형추와도 같은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지점은 앞으로 <나와 리영희>를 읽거나, 그의 저작을 읽게될 때 내가 염두에 두고 들여다볼 지점이기도 하다. 내게 주어진 과제와도 같다. 앞으로 나는 '어떤 진실'을 쫓을 것인가 하는 물음과도 같다. 



리영희 선생의 15주기 되는 날에, 그리고 암담했던 계엄의 밤이 이제 막 1년 지난 시점에, 꽤나 오래 책장에 놓여 있던 선생의 평전과 책 몇 권도 함께 꺼내어 본다. 우리는 지금 어떤 순간을 지나고 있는지하는 생각과 더불어 감회가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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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의 시대 - 진단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수잰 오설리번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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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진단의 문제와 당사자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필요하다

- 진단의 시대

: 진단은 어떻게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수잰 오설리번(Suzanne O'Sullivan) 지음

이한음 옮김 [까치] (2025)




 

최근 집안 어르신 한 분이 임플란트 시술을 받으셨다. 여기까지는 어르신의 연세를 고려할 때 부실해진 치아를 보완하는 의료 행위로서 수긍할 수 있는 팩트일 수 있다. 다만, 나의 의문은 어르신의 연세가 95세라는 점이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임플란트는 모든 이에게 적용할 수 있는 치료 시술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아무리 치아가 불편하다고 해도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이 임플란트 밖에 없었을까.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으나 95세가 된 노인에게 임플란트를 권한 의사는 어떤 근거로 시술을 제안하고 시행했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또 다른 기억도 떠오른다. 이미 몇 년 전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뉴스에서 OECD국가 중 유독 우리나라 산모들에게 적용되는 제왕절개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통계를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왕절개는 개복 절차로 전신 마취까지 해야 하는 상당히 큰 의료 시술이다. 자연 분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의료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제왕절개 수술로 인한 출산은 산모의 회복도 자연 분만보다 몇 배 느리기도 하고, 따라서 산모의 회복에 필요한 의료 절차나 비용도 그만큼 더 많이 들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출산 과정에서 유독 한국인만 산모가 제왕절개를 해야만 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 아닐 텐데,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제왕절개는 누구를 위한 의료 행위인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풍자 문학의 대가라고 불리기도 했던 조너선 스위프트가 신랄한 독설과 문제의식을 드러낸 자신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서 이렇게 말하는 대목을 만났다. “의사에게 있어서 가장 탁월한 능력은 진단하는 기술이다.”(신현철 옮김, 문학수첩, 325) 풍자의 대가인 그가 이 문장을 쓴 맥락은, 일부 의사들이 자신의 무지를 가리고자 의사의 권위를 내세우는 위선을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나아가 정치가나 국왕 역시 이 비판의 대상에 넣고자 했다. 과거에 환자의 질병이 악화되면, 사기꾼 의사는 환자가 곧 사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함으로써 그 예언이 이루어지거나, 예상 외로 환자가 회복하면 자신이 병을 치료하는 약품을 적절히 사용했다고 말하는 행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신경과 전문의이자 작가인 수잰 오설리번의 진단의 시대를 읽으며 진단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앞의 두 사례와 더불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었다. 물론 저자 수잰이 스위프트과 같은 독설과 풍자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 두 저자 모두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안고 있는 제도적, 구조적 문제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들여다보았다는 점에 주목해 본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수잰 오설리번과 조너선 스위프트는 모두 아일랜드의 더블린 출신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의 흥미를 잃지 않게 해주었다.


 

진단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로는, 환자가 지닌 병의 상태를 의사가 판단하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의학에서 진단이 갖는 의미는 좀 더 복잡해 보인다. 저자가 말하는 진단은 병의 정체를 밝히고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넘어선다. 의사가 내리는 진단 행위는, 환자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선이나 삶의 의미에까지도 영향을 주는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곧 오늘날 자격을 갖춘 의사의 진단이란,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진단이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행위라는 점을 한 가지 사례로 따져보자. 자폐증의 경우다. 지구상의 모든 자폐증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정도의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자폐 진단을 받은 이들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데 반하여, 사회는 명확한 기준으로 이들을 범주화하길 요구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과연 누가, 어떻게 이 기준을 정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나아가 의학의 발달로 이 기준이 매우 합리적으로 규정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에도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뿐만아니라 자폐로 진단을 받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구별 짓기, 바로 낙인 효과도 의도치 않게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자폐 경계성아이들에 대한 주변인의 시선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진단 범주에 포함된 아이의 정체성과 심리적 상태, 자존감, 행복감 등에 오래 지속되는 영향을 남길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ADHD 진단이나 우울증 진단에도 이와 같은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례 모두 진단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저자는 진단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책 전체를 통해 유지되는 관점은, 진단 행위에 좀 더 신중해야한다는 입장에 가깝다. 그는 현대 의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진단 행위가 정도를 벗어남, 곧 과잉 진단, 과잉 의료 행위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나는 앞서 언급한 집안 어르신의 임플란트 시술 행위나 우리나라 제왕절개 시술의 유독 높은 비율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자폐증 진단이나 ADHD 진단에서 해당 진단 범주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은, 바로 이 기준 정하기, 혹은 경계 짓기의 모호함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보완하고자 스펙트럼이라는 아이디어를 도입했을지 모르나,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증상을 가진 이들을 몇 가지 범주로 단순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오염 물질이나 공해의 증가, 스트레스의 증가 등이 자폐나 ADHD 진단 결과의 증가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거의 폭발적인 증가라고 여겨질 정도의 즉각적인 큰 변동을 초래하는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저자는 오히려 진단 기준, 혹은 경계 위치의 변화에 기인한다고 보는 듯하다. 현대 사회에서 자폐증 진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통계는, 새로운 진단 기준/범위의 설정으로 인해 폭넓은 증상의 차이가 단순화되고 새로운 진단 범주로 편입되면서 발생하는 결과라고 해석될 수 있겠다. 저자는 이 지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들여다본 셈이다.


 

진단은 이처럼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에 달려 있다. 전문가라도 결국 사람의 판단과 결정에 의존하는 까닭이다. 특히 과잉 의료, 과잉 진단의 결과는 간단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누군가가 과잉 진단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고 해보자. 저자에 따르면 여기에는 추가 과정, 곧 한 개인에게는 추가 검사와 우울증 진단에 따른 약물 처방과 치료 과정이 개입하게 된다. 당사자의 입장에선 어떤가. 진단을 받은 당사자는 우울증 환자라는 낙인을 얻게 될 수 있고, 기존에는 의식하지 못하거나 심하지 않았던 불안 증세로 더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도 우울증 환자에게 적용되는 의료 행위에 대한 보험 처리, 약물에 대한 보험 사항이 추가로 검토되고 시행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지 않았다면, 진단에 따라오는 일련의 의료 행위나 당사자 혹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이 불필요했을 것이란 의미다. 따라서 저자가 반대로과소 진단으로도 진단을 받은 이의 고통과 불편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진단하는 행위 그 자체는 의사의 전문 행위이면서도 주관적인 성격을 내포하는, 복잡하고 책임감을 요하는 행위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저자는 의료계의 과잉 진단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의료계의 노력과 진단에 대한 새로운 시선도 필요해 보인다. 진단을 받은 당사자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자주 눈길이 갔던 지점은, 당사자 입장의 관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진단이 가져오는 낙인효과에 대한 점이다. 최근 어느 유명 과학커뮤니케이터가 방송에서 인간의 유전 형질과 관련한 지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된 사례가 있다. 그는 쌍커풀이 대립 형질 가운데 우성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모양인데, 여기에 생물학자들의 거센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쌍커풀이 우성이라는 지식은 현재 중학교 3학년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대목이라 틀린 정보는 아니라 할 수 있다. 다만 나의 짧은 지식을 동원하여 이해한 바로는, 이 문제에 몇 가지 사회·문화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 지점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몇 가지 특정 대립 형질이 비교적 뚜렷하여 우성과 열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언급된 교과서적 지식이 지니는 맥락이 조금 미묘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하게 생물학적 관점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유전자의 형질을 지시하는 개념이지만, 이 표현이 자칫하면 왜곡되어 소비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우성과 열성이 대중의 인식으로는 우월함과 열등함으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방송 매체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전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공영 방송에서 우월한 유전자라는 표현을 거리낌 없이 쓰고 있지 않은가. 이 표현은 사회 속에서 혐오와 차별에 이용되고 소비될 여지가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이 인식이 우생학적 사고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문제는 쌍커풀과 같은 인간의 대립 형질이 비교적 뚜렷하다고 해도, 멘델이 완두콩으로 한 실험 사례처럼 특정 형질의 발현 기작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멘델이 완두콩에서 비교한 대립 형질은 하나의 유전자가 특정 형질을 발현할 정도로 단순한 사례다. 반면 인간의 대립 형질의 경우, 어느 유전자 하나가 쌍커풀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인간의 형질은 대개 수많은 유전자가 개입하여 발현되는, 꽤나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드러난다는 점이다. 쌍커풀이 우성과 열성이라는 매끄럽고 단정적인 판결을 내리기에 여전히 모호한 지점이 있다. 그러므로 생물학자들의 비판을 받은 과학 커뮤니케이터의 발언이 현재 중학교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기에 완전히 틀린 지식은 아닐더라도, 이러한 유전자 발현의 우열의 문제, 경계 짓기의 문제가 언제나 매끄럽고 분명하게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할 일이다. 쌍커풀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존재가 열등하게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이렇게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식은, 특히 교과서 저자들이 주의를 기울여 앞으로 다듬어가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쌍커풀의 생물학적우성/열성 판단은 인류 사회의 오랜 이분법적 논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른바 정상/비정상의 문제와도 잘 결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저자가 사례를 든 자폐증’, ‘ADHD', '우울증’, ‘진단 같은 문제 역시 의사/전문가의 진단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진단 범주에 포함된 당사자의 경우, 이들은 진단 이후 사회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저자는 우리 인류의 문명이 고도로 발전함으로써 진단의 범주에 들어간 병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라기보다는, 의료의 발달, 진단 도구의 발달과 고도화로 이전에 규정된 정상 범주가 협소해지며 상대적으로 과잉 진단이 증가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에 이 당사자를 바라보는 비-당사자의 인식과 태도가 중요해진다. 나와 다른 특징을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 역시 관용과 배려의 시선에서 더 깊어져야 할 일이다. 또한 어느 진단 범주에 포함된 당사자는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진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존재로서 관심을 갖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이 당사자들은 의사의 진단 선언에 수동적으로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불안하고 어려운 순간을 직접 경험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사회와 공동체는 진단 당사자들의 곁에서 이들의 경험과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혼자가 아님을 알도록 응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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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음, 주성호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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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못하겠지만 또 샀군요. 꾸준히 다시 번역되고 재평가되며 재해석되는 책들이 나오겠지요. 또 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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