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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다 가블레르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평점 :

존재 양식의 선구적인 탐구 작업
<헤다 가블레르 Hedda Gabler>
헨리크 입센 지음
조태준 옮김 [지만지드라마] (2019)
희곡이라는 장르는 조금씩 알아갈수록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다. 희곡을 읽어보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고, 특정 작품을 따로 찾아 읽으려고 하던 장르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되면 읽어보려 했다. 헨리크 입센은 국내에서 특히 <인형의 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이지만, 그의 다른 작품을 주목하여 따로 읽었던 것은 아니었다. 큰 관심이 없을 때 읽어서 그런지 스토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극중 인물인‘헤다 가블레르’는 장군의 딸(귀족/상류층)이다. 그녀는 29살이고, 공부에 뜻을 둔 중산층 출신의 30대 초반의 샌님과 결혼하여 이제 6개월의 기나긴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사랑’은 흔히 길어야 2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헤다가 애초에 사랑 없이 선택한 결혼은 사회적 굴레에 갇힌, 동시에 상류층이라도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던 여성의 권태와 불만, 그리고 이 굴레 너머의 삶을 갈망하나 이로부터 유발되는 불안을 조명한다.
입센이 창조한 헤다는 하나의 사회적 징후로 볼 수 있다. 욕망을 갖는다는 것은, 생에 대한 의지를 갖는 모든 유기체의 ‘존재 양식’일 텐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녀에게 결혼을 통해 선택의 여지가 줄어든 삶은 그녀의 일상을 더욱 힘들게 했을 법하다. 인간은, 나아가 모든 생명체는 태양의 잉여 에너지로 비롯되었다. 무질서함을 향해가는 물질세계에서 그 질서를 역행하는 아주 특별한 우주의 파편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언가를‘욕망한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숙명을 고려할 때,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헤다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다만 그녀는 무언가를 언제나 갈망하나, 그 대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듯하다. 이 ‘욕망의 실체 없음’이 헤다에게는 가장 큰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모습에 대해 헤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인간, 모든 존재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곧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질문의 방식을 다르게 시도해야 할 듯하다. 헤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대의 여성에게 사회가 제약하는/가두어 놓은 현실에는 책임이 없는가? 어쩌면 우리는 한 여성이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 주목하고, 그 이유를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단순히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넘어서, 이 맥락과 결부된 ‘인간의 조건’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할 듯하다.
그것이 (남성 중심의) 사회적 관습일수도 있고, 보다 폭넓게는 이분법적인, 양성적 사고에서 비롯된 공동체의 공고한 규범들일 수도 있겠다. 현재 지구에 80억 명의 인구가 있다면, 80억만큼의 다양한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다. 각자 어떠한 정체성으로 살아가든, 그저 나름의 존재 양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생물학적/존재론적 다양성을 지닌 존재를 이분법적인 사회 제도에 욱여넣는 일에는 저항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한 인간의 고유함은 수많은 스펙트럼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당당한 존재로서 인정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고유한 존재로서의 헤다는, 당대 사회에서 ‘기대되는 여성상‘의 틀에 맞지 않는 인물일 뿐이다. 문제는 이 사회적 기대/기준을 벗어나는 경우, 사회/공동체는 개개인에게‘불안’을 심어준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박인 셈인데, 이‘의도된 불안’이야말로 (남성적) 사회를 공고히 하는 데 은밀히 활용되어 온 유지 전략이자, 체스판 위의 규칙이 아닐까.
따라서 헤다의 자살은—자신의 미학적 기준에 의하면, 관자놀이에 정확히 총구를 겨누는 일—이런 의미에서 충격적이다. 역자는 자살에 대한 헤다의‘미학적인 기준’을 언급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헤다가 추구한 자살 방식이 하나의 의식(ritual)으로 해석해 보았다. 방아쇠를 당겨 맞는 미학적인 죽음, 그리고 옛 연인의 귀중한 원고를 불에 태워 소멸시키는 행위가 일종의 정화의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의식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논리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헤다의 행위에는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곧‘투명성’이 부족하다. 나는 이 점이 우리가 ‘의식/의례’라고 부르는 인간의 행동 양식에 부합한다고 느꼈다.
헤다 자신은, 비록 자신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몰랐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출구를 찾고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번번이‘불안’이 유발하는‘두려움’때문에 다시 굴레 안으로 되돌아와야 했지만 말이다. 옛 연인과의 결합을 바라면서도, 타인의 시선,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하나의 기호이자 메시지이기도 하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했을 때, 그녀는 세상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헤다의 자살은 예수가 사랑이 부재한 공동체에 가져온 ‘평화’가 아니라 ‘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건 단순한 항변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인간 조건/사회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행동을 단순히 미화하거나, ‘남성의 문제’라고만 단정짓기 전에, 이 문제는 공동체 전체, 모두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듯하다. 고질적인 이분법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입센이 생의 말년, 작가로서 완숙한 시기에 쓴 희곡 <헤다 가블레르>에서 제시하는 인물은 지극히 입체적이고 현대적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듯하다. ‘남자가 여성의 심리를 이렇게나 탐구하여 묘사해 놓은 것이 놀랍다’고 말이다. 절반은 동의하지만, 이것 역시 ‘남자’라는 존재를 하나의 단일한 범주로 ‘욱여넣는’ 오류가 아닐까. 입센이 헤다를 비롯하여,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처럼, 작품에서 주목하고 그려낸 여성들은, 그가 자기 안의 ‘여성성’을, 혹은 자기 안의‘다양성’을 발견하고 탐구해 온 발자국을 보여주는 듯하다. 발자국의 주인이 어떤 보폭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결코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이해에도 본질적인 ‘불확정성’은 존재하는 셈이다. 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비로소 타자를 향하는 시선을 좀 더 소박한 마음으로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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