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찾아서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 지음, 조구호.남진희 옮김 / 알렙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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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유토피아를 기다리는 존재다


,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

: 라틴아메리카의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찾아서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 지음

조구호·남진희 옮김 [알렙] (2026)





시간을 살아남아 이제는 고전이 된 유토피아15-16세기 르네상스 시기의 작가 토머스 모어의 작품이다. 그의 글을 읽지는 않아도 이 작품은 텍스트로서, 문학으로서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법조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청빈하고 공정한 재판관으로도 존경을 받았던 모어는, 헨리 8세의 권위에 맞서 옳지 않다고 믿었던 가치에 반대하고 비판하다 결국 참수되고 말았던 비운의 인물이다.


 

토머스 모어의 억울한죽음이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일까. 한때 라틴아메리카에 건설되었던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 한 문학 교수의 여행기에는 과거 유토피아 건설을 시도했고 결국 우울한 결말을 남기고 폐허가 되어버린 장소들이 즐비하다. , 그런 곳이 정말 있습니다의 저자 페데리코 구스만 루비오는 멕시코 출생의 문학가이자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학자이기도 하다. 또 단편소설과 연대기, 아동 및 청소년 문학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저자가 한때 라틴아메리카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대부분 폐허의 흔적만 남은 장소를 찾아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학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문학을 연구하며 또 스스로 문학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그에게 유토피아란 하나의 텍스트이자 문학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유토피아라는 문학의 힘에 깊이 매료되었던 사람이었을 것 같다. “유토피아는 문학을 현실로, 또 현신을 문학으로 바꾸려는 시도”(182)임을 이미 간파했던 사람이니 말이다.


 

이 책의 글은 여행기이면서 일종의 연대기이다. 다만 저자는 유목민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다’(149)는 바람을 내비치는데, 그저 떠돌기 위해 여행한다고 말한다. 그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일종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의심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내게 그의 여행은 우리에게 대상에 대한 명료한 판단과 구분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해되었다. 책 밖으로 나와 모호하고 복잡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단지 새로운 앎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나의 무지가 더욱 드러나는 계기로서의 여행 말이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모든 여행이 거대한 오해의 과정”(277)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여행자라면 여행한 장소에 대한 앎이 더욱 빈곤하게 느껴졌을 법하다. 그의 말처럼 여행에서 기록자는 늘 실패하기 때문이다. 저자에게 여향자란, 결국 여행에서 무지의 지에 도달하는 사람이다.

 


폐허가 유토피아에서 발견되는 특징들


저자는 과거 한때 유토피아가 시도되었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은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장소를 방문한다. 설립된 년도만 보더라도 1539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4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세상에 나왔으나 대부분은 사라진 이상향의 실험 장소들을 섭렵한다. 하지만 이상향에 대한 논의는 단지 이 시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류가 등장하여 누군가와 무리를 이루며 함께 살아온 이상, 유토피아는 언제나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인간이 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은 인간의 살아감이란 문제가 어느 곳, 어느 시대에서든 결코 녹녹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해보자면,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사회도 많은 이들에게는 지옥과 같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현실의 녹녹치 않음이야말로 위정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자신들의 유토피아가 지금의 이 지옥보다는 나을 것이라 설득하기 수월하게 해준 조건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먹고 살기 힘들었던 한인들이 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리고 떠나 목숨을 걸고 한반도를 넘어 북쪽으로 건너갔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모든 실패한 유토피아는 일종의 성공적인 재앙’(88)을 남겼다. 유토피아에 대한 실험은 대부분 실패했다. 유토피아 실험이 실패했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파라과이에 설립되었던 누에바 게르마니아처럼 지독히 인종차별적인 시선과 타 민족에 대한 아리아족의 우월감, 그리고 현지 원주민의 문화에 대한 몰이해, 현지 자연 환경에 대한 무지와 같은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유토피아를 지지하던 이들이 지닌 타자에 대한 도덕적·신체적·문화적 우월성으로 무장한 강력한 배타성은 결국 스스로 섬이 되고 밀림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곳은 없다는 의미를 지닌 유토피아의 시간성 역시 특징적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오븐에서 갓 꺼낸 빵 속에 있다’(88)는 표현처럼, 아직 손을 대고 시식을 하기 전의 빵에만 존재하는 관념 그 자체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미 사람의 손길이 닿고,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인간이 모이면 유토피아는 이미 서서히 사라져가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유토피아는 언제나 신화적인 과거를 되찾으려 하는 동시에, 아득한 미래에 닿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가속화한다는 이중적인 시간성”(193)을 띠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시간의 순서와 무관하게, 오로지 과거에 대한 향수에 붙들려 과거를 소급하거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데만 몰두하는 영화 속의 인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유토피아의 시간성은 시대착오적이며 자기분열적일 수밖에 없을 터다.


 

유토피아는 결국 인간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


앞에서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기획했던 이들의 설득에 쉽게 넘어가곤 했던 이유를 말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건 인간의 삶이라는 조건이 결코 녹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으레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건이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모든 사건 앞에서 살아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과거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늘 지옥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굳이 치안도 불안정한 폐허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도 한 때 존재했던 사회의 꿈과 악몽을 좀 더 알고 싶어서였으리라. 저자는 어느 사회의 꿈과 악몽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라 여긴 듯하다. 이 작업은 과거나 미래에 집작하는 유토피아의 시간성에 틈을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비로소 현재에 좀 더 머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 폐허가 된 유토피아를 들여다보는 일은 창립자로 대표되는 당대 인간들의 욕망을 만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유토피아 건설의 전망과 수행 과정, 그리고 실패 혹은 재난의 잔해 위에 반복해서 세워지는 인류 존재의 원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인류학자가 인간은 문화에 중독된 존재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란, 유토피아라고 하는 문화적 관념에 중독되어 있는 존재는 아닐까. 어쩌면 이것이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시대와 상관없이 그런 곳은 없는어딘가를 늘 꿈꾸어온 까닭일 터다.

 


작가는 대개 폐허로만 남은 유토피아의 흔적을 답사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현대적인 유토피아, ‘성스러운 믿음이라는 의미의 산타 페를 주목해 본다. 에스파냐 식민 세력이 신앙을 전파하며 멕시코의 이 지역을 점령했던 것처럼, 20세기 말에 기획된 유토피아적 도시는 여전히 인류 존재의 원리로서의 유토피아를 증거한다. 도시로서 산타 페는 신에 대한 믿음, ‘신이 죽은 시대를 대체하는 믿음이 이제 자본과 신자유주의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믿음이라는 문화적 기호는 이제 단지 새로운 기호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모든 이들의 혐오 지역이었을 법한 쓰레기 매립지 위에 세워진 이 신자유주 유토피아는 수평으로 확장되고, 수직으로 자라나며 기존의 도시들과는 다른 하나의 섬과 같은 곳이 되었다. 도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고 배타적인 섬이 되기를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신흥 현대 도시 산타 페는 유토피아의 이중적인 시간성을 잘 보여주는 기획이면서 여전히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장소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산타 페는 저자가 책을 시작하며 한 말, ‘유토피아는 언제나 존재했다는 말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현대적인 단서가 된다. 이에 유토피아는 줄곧 혼돈과도 같은 현실 문제에 대한 책임과 마주보기의 실패 혹은 회피를 전제해온 듯하다. 지금 내 발 아래의 현실과 충돌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늘 현실 밖을 상상하며 꿈을 꾸는 존재다. 그렇기에 저자는 유토피아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문학이라 말하지 않았는가. 문학의 상상력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폭력적/비폭력적인지, 본래부터 선한지 혹은 악한지와 무관하게 허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인간의 초상을 그대로 비추어주는 것이 유토피아일 것이다. 이제 인간은 세상에 등장했을 때부터 현실이라는 악몽과 이상향이라는 꿈을 늘 꾸어온 존재로 보였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욕망을 비추어주는 거울이었다.

 


내가 이 점을 특히 강렬하게 느꼈던 대목은, 아마존의 밀림 한복판에 건설되었던 고무 플랜테이션 도시 포드란지아에 대한 글에서였다. 밀림 속의 폐허로 남아 있는 이 공장 터 주변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포드란지아를 기획하고 수행했던 이들의 신념을 여전히 내면화하고 있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이 지역 주민 대다수는 오히려 열대림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곳의 어느 가게에서 저자에게 탄산수를 건네주던 여종업이 우리는 여전히 포드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35)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의미에서 그 종업원과 연결됨을 느꼈다. 인간이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나 죽기까지 이 지루함의 공백을, 미치지 않고 살아나가려면 유토피아 같이 기댈 곳이 있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결국 인간은 결코 유토피아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시대와 장소를 떠나 유토피아를 향하게 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에게 유토피아는 면 과거에 존재했으며, 미래에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지금도 여전히 포드를, 유토피아를 기다린다.





 

[책속으로]

[1] "유토피아는 관념이 실현된 곳과 관념 자체가 동일시되고 혼동을 일으키는 환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하나의 텍스트로 있었다. 예컨대 유토피아는 환상적인 이야기와 정치적인 선언 가운데 위치한 문학 장르이기도 하다." - P11

[2] "한 사회가 지닌 꿈과 악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회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 P12

[3] "모든 유토피아는 창립자들의 도덕적·신체적·정신적 혹은 문화적 우월성에 기반한 배타성을 띤다. 이는 어느 폐쇄적인 종파가 지닌 면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 P17

[4] "그런데 빵집 이름이 왜 포드인가요?"
"우리는 여전히 포드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아마존 밀림 속 포드란지아 인근의 가게 여종업원과의 대화 - P35

[5] "사랑해 본적이 없는 사람만이 사랑이 지루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 인종차별적인 유토피아(누에바 게르마니아)를 실험하고자 했던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엘리자베트 니체 부부의 묘비명을 본 저자의 단상. - P137

[6] "누에바 게르마니아는 밀림 한가운데에 농업 공동체를 건설하면서 지역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지 않아 실패했다. (...) 유대인이 없는 아리아 사회를 유럽 밖에 건설하겠다는 꿈은 1890년 파라과이의 누에바 게르마니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 유토피아 실험이 4년 만에 실패한 이유 - P141

[7] "나는 내 생각들에 바람을 쒸어 주고 싶다. 생각과 함께 걷고, 생각을 뒤쫓고, 그러다 생각을 잃어버리고도 싶다. 손에 쥐었다가 놓치기도 해야 계속 길을 갈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유목민적인 에세이를 쓰고 싶다."
- 저자의 글쓰기 지향점 - P149

[8] "나는 그저 떠돌기 위해 여행하고 있다. 무언가를 그리거나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계를 흐리게 하기 위해서다. 무심하면서도 집요하게. 나는 의심하기 위해 여행한다. (...) 여행은 의심을 강화하기 위해, 그 의심이 마음껏 자라날 공간을 내어주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그 의심들과 하나로 얽히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 여행의 이유 - P153

[9] "이 땅에는 온갖 광신자를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 P167

[10]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들 - <멋진 신세계>부터 <1984년>까지, 그리고 그밖의 수많은 작품들 - 과 유토피아들은 본질적이면서 숨 막히는 특징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바로 부동성이다. 두 세계 모두 변화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가능성조차 고려되지 않는 궁극의 사회를 그린다." - P168

[11] "지상에 펼쳐진 지옥 앞에서, 사람들은 그 어떤 것이든 - 심지어 가장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까지도 - 이 지옥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기 때문이다." - P177

[12] "유토피아는 그 무엇보다도 문학이다. 바로 여기에서 유토피아의 무시무시한 힘이 나온다. 유토피아는 문학을 현실로, 또 현실을 문학으로 바꾸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 P182

[13] "유토피아는 언제나 신화적인 과거를 되찾으려 하는 동시에, 아득한 미래에 닿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가속한다는 이중적인 시간성을 띠게 된다." - P193

[14] "본질적으로, 19세기 라틴아메리카 독립 국가의 탄생에는 유토피아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 P222

[15] "모든 여행은 거대한 오해의 과정이기에 우리는 그로부터 비롯된 오류와 혼란으로 점철된 이미지 몇 개를 간직하게 될 거다. (...) 어떻게 하면 한 나라를 오롯이 알 수 있을까? (...) 나는 실패한 기록자이자 허황한 관광객이었다. (...) 그리고 나는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 P277

[16] "멕시코에서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이 지역(산타 페)은 국가가 선물한 땅의 쓰레기장 위에 세워졌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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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서점 책방연희에서 2026 서울형책방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작품으로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유명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블레이드 러너 2049>(2021)의 원작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야기 거리가 풍성할 수 있지만 워낙 널리 알려진 나머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마침 비가 제법 오던 주말 아침이어서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싶었는데요, 빗길을 뚫고 멀리 제주에서 온 분도 계셔서 반갑고 감사했습니다. 모임 2시간 동안 길게 느끼지 않고 재미있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이번 읽기는 작품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느슨하고 불완전한 읽기 모임이었죠. 그럼에도 소설의 배경과 작가에 대해 먼저 알아보고, 이어서 보이트-캄프 검사 장면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 검사는 안드로이드(합성 세포이지만 인간처럼 만든 유기체)가 감정 이입(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특징을 이용하여 만들어졌구요. 안드로이드를 은퇴시키는 현상금 사냥꾼 릭 데카드가 안드로이드를 찾아내는 데 쓰던 테스트였죠.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한 인물은 특수인(specials) J.R. 이지도어였습니다. 그는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부작용에 지능도 떨어지는 인간, 인류 대부분이 화성으로 이주할 때 배제된 존재였죠. 문제는 그가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가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차별받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점입니다. 혹시나 데가드가 이지도어를 안드로이드로 판정했다면, 이지도어는 은퇴(사살)’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반대로 공감능력이 월등히 개선된 안드로이드가 이 테스트를 거뜬히 통과한다면, 우리는 이들을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이런 관점에서 이번에 저는 이지도어에 주목해보고자 했습니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낙인도 모자라, 낙진이 세상을 덮고 있던 지구에서 결혼과 자녀를 낳는 것도 금지된 인물말입니다. 그는 특수인이라는 미명(?) 하에 실제로는 치킨헤드라 불리며 차별당하고 타자화되어버린 존재였죠. 심지어 안드로이드들은 현상금 사냥꾼으로부터 달아나고자 그를 이용하려 했죠. 반면 이지도어는 정체 모를 안드로이드들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도와주려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지도어는 화성으로 갈 수 있었던 선택된인간과 은퇴할 운명인안드로이드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 혹은 이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로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언젠가 이 소설을 다시 읽을 때 이지도어의 존재에 주목하여 읽어보면 조금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지도어는 공감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누구보다 공감할 줄 아는 인간이었으니까요. 이런 생각을 사회로 확장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다수가 소수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죠. 사회 속의 소수를 포용하고 환대할 수 없는 사회는, 인위적인 경계 짓기의 효용성을 넘어 결국 서로를 타자화하고 나아가 인간성 상실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필립 K. 딕이 우려하던 바였지요.

 


주어진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이지도어가 인용한 영국 시인 존 던의 인간은 누구도 섬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작품 전체에서 던지는 질문,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은 이 영국 시인의 문장 앞에서 특히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이어서 참가자분들은 이 작품이 1968년에 발표되었지만, AI가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온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해주셨습니다. 비 오는 주말 아침에 함께 생각하고 좋은 의견을 나누어주신 참가자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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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빌헬름 슈미트 지음, 강민경 옮김 / FIKA(피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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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그네타기: 상실의 슬픔에 잠식당하지 않고 삶을 사는 기술

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

 

빌헬름 슈미트 지음

강민경 옮김 [피카] (2026)

 





사람이 태어난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진실이 하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함께 시간을 겪어온 가족 구성원의 상실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부모, 배우자나 자녀, 혹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지켜보는 남은 이들의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는 죽음을 통한 상실감을 시간이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실감과 슬픔이 내게는 시간이 지나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다. 이제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라는 기대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슬픔을 기억하는 빈도가 조금은 줄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올라오는 슬픔의 강도는 시간이 지나도 약해지는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어쩌면 사람마다 슬픔을 느끼는 방식이나 양상은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상실감과 슬픔이 너무나 큰 나머지 여기에 잠식되어 다시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복귀가 어려울 지경인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아니 사실, 사라진 대상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한, 결코 예전 같을 수는 없는 셈이다.

 


삶으로 다시 날아오르기의 저자 빌헬름 슈미트는 독일의 철학자다.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평생을 함께 했던 아내가 어느 날 식도암 판정을 받고 먼저 떠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아내의 마지막 까지 곁을 지키고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그네타기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직접적인 삶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기에 어려운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게는 상실감과 슬픔에 잠식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삶이라는 그네에 태우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한 글이면서 삶을 마주하는 기술에 가깝다. 배우자를 생각하면서 썼을 한 문장 한 문장이 얼마나 힘겨웠을까도 생각해본다. 하지만 글쓰기란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애도하는 의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게는 시간이 다 해결해줄 것이라는 식의 모호하고 조금의 도움도 안 되는 훈수를 두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삶의 엄정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부정적 순간을 우리 삶에서 배제할 방법은 없다.’(94)는 것을 분명히 해둔다. 대신 우리가 그네를 타던 것처럼 삶이라는 흔들림에 몸을 맡겨보라’(121)고 말한다. 내게는 흔들림에 몸을 맡기는 기술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상실의 슬픔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저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삶을 축제처럼 즐기는 일’(161)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느 중산층 지식인의 표피적인 수사학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내가 살면서 바라는 바였기도 하다천상병 시인의 글귀처럼, 이 삶을 소풍처럼 살다 가는 삶말이다내가 속으로 생각해오던 표현을 저자가 공감하고 글로써 화답해준 느낌을 받았다. 저자가 줄곧 언급하는 그네타기 비유처럼, 누구나 삶에서 상승과 하강을 겪게 마련이다. 저자는 이 진실을 단순하고 모호하게 바라보거나 회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담백하게 삶의 모습들을 지켜볼 수 있게 해준 것은 그만의 글쓰기 시간이었을 테다.

 


저자는 우리가 삶을 축제처럼 즐길 수 있으려면 필요한 것이 회복탄력성이라 말하는 듯하다. 우리가 삶이라는 통로를 지나갈 때 이 회복탄력성, 곧 삶에 대한 유연성을 기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감각의 즐거움을 환기하고 삶을 축제처럼 즐길 수 있다고 말이다. 이 회복탄력성이야말로 삶에서의 쉼과 수행 사이를 반복하는 삶의 리듬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본다. 상실의 슬픔에 압도당하지 않고 잠시 숨을 고를 여유를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충고가 모든 이들에게 해당하지는 않을 수는 있을 텐데, 분명한 것은 삶이라는 그네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이 쉼과 수행사이를 오갈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저자는 배우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읽고 또 읽어본다.


나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땅에서 왔어.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갈 테지. 당신은 거기서 나를 언제든, 영원히 찾을 수 있어.”(181)


남편은 아내의 글에 다시 아내를 찾을 수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금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술을 연습할 힘을 얻은 듯하다. 이 책은 저자인 남편이 아내와 다시 만나기 전에 남은 생을 온전히 즐기고 가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이었구나 싶다






[책속으로]

[1] "모든 물방울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돌아온다." - P14

[2] "삶은 그네타기다."(27)

"그네타기는 응용된 변증법과 같다."(25) - P25

[3] "금욕주의는 언제나 ‘올바른 정도만’ 실천하는 것" - P45

[4] "올바른 정도란 ‘충분하다’는 뜻이다." - P47

[5] "중요한 건 삶을 축제처럼 즐기는 일이다." - P161

[6] "나는 더 정확하게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한한 광대함 속에 아내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 P181

[7] "아내는 죽기 전에 나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땅에서 왔어.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갈 테지. 당신은 거기서 나를 언제든, 영원히 찾을 수 있어."

"나는 이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정말로 아내를 언제든 찾을 수 있다는 안도가 들었다. 그 덕분에 나는 인생을 즐기는 작은 기술을 다시 연습할 수 있다. 그네를 타며."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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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유전자


정우현 지음


5장 범죄 유전자

 



홍대 독립서점 책방연희에서 이번 달에 진행한 과학책 읽기 모임 사이언스 믹서에서는 정우현 교수님의 나쁜 유전자5범죄 유전자를 함께 읽었습니다. 이번 장은 범죄자는 유전자로 결정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과학이 어떻게 답변해 왔으며, 사회가 어떻게 수용해 왔는지에 관한 짧은 역사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네요.

 


이번 장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인간이란 스스로의 호기심만큼이나 세계에 대한 무지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인간은 주변 환경에서 발견되는 모든 대상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함으로써 불완전함에도 세계에 대한 이해를 더해온 셈이죠. 나쁜 유전자에서 되풀이하여 확인할 수 있듯이, 과학은 나쁜 유전자라는 관념이 실체 없는 것임을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런 관념에 대해 지배층과 언론에 의해 왜곡된 시선을 관철해온 결과의 부작용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20세기의 역사만 들여다보아도 금방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나쁜 유전자는 그 자체로 모호하고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쯤 되면 인간이란 이름은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순덩어리 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지인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벽에 붙어 있는 수배자 명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명단에 공개된 인물들의 사진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머그샷이 없다보니 그저 평범해 보이는 살인자부터 눈빛이 무서워 보이는 사기범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제 눈에 비친 인물들의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실 대부분은 그저 평범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도 유럽에서는 두개골에 범죄의 본성을 지닌 부위가 있다는 믿음이 공기처럼 퍼져있었던 모양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가 오랜 시간 집필한 루공-마카르 총서의 대표작인 <목로주점>이나 <제르미날>과 같은 작품만 보더라도 인간의 빈곤 문제가 알코올 중독과 폭력성과 더불어 되물림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는 범죄자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며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결정론적인 믿음이 너무나 확고한 나머지 사형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은 영국에서 다윈의 사촌형인 프랜시스 골턴의 우생학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우생학이 꽃핀 곳은 미국이었죠. 우생학은 보다 많은 지배층의 지지를 받으며 법제화되고 이른바 열등한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 개선한다, 혹은 대를 잇지 못하도록 불임시술을 하는 등의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곧 다윈의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미묘하게 굴절된 시선을 통해 현실에서 실천되며 특정 인구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탄탄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무솔리니가 제정한 인종법과 같은 구체적인 탄압의 장치가 마련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세계의 역사는 독일에서 채택되어 인류사에서 참혹한 재앙을 낳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의 선조격인 이 견해는 단순히 이웃을 견제하고 고발하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었죠. 이른바 타고난 악마는 결코 교화될 수 없다는 믿음이 수치화, 혹은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구실과 얽혔을 때 인류 공동체에 어떤 재앙을 야기했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빈 서판과 같다는 견해도 존재했습니다. ‘인간에게 적절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어떤 행동이든 원하는 대로 빚어낼 수 있다는 극단적인 견해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죠. ‘내게 건강한 아기 12명만 데려다 달라. 나는 이들을 변호사, 의사, 심지어 범죄자로 길러낼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한 행동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존 왓슨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적절한 환경(조건)과 교육이라면 새로운 인류도 창조할 정도의 자신감이 아닌가요. 특히 행동주의 심리학을 이야기할 때 들 수 있는 사례는, ‘파블로프의 개실험이나 보상을 통해 특정 행동의 빈도를 늘리는 실험이었던 스키너 박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940-50년대에 특히 유행했던 전기 충격 요법은 이른바 정신질환자에게 많이 시도되었던 방법입니다. 이 시술은 특히 인간의 기계적측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정인이 가진 정신 질환은 뇌를 (전기 충격을 통해 하드디스크를 포맷하듯) 백지화한 후 새롭게 교육을 하여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셈이죠.


 

여기서 주목해보는 것은 현실에 개입하고 나아가 통제하려는 인간의 충동입니다. 이런 관점은 <신기관>등을 저술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른바 자연을 조작하고 변형하여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감말입니다. 나아가 이런 관점은 자연의 조건을 실험실 안으로 가져와 조작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관점이 지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 극단으로 치달았을 때 우리는 나치 독일 내과의사 요제프 멩겔레의 생체(인체) 실험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을 듯합니다. 인간이 야기한 이런 재앙은 차별과 배제의 대상을 실험용으로 보고 인간이 개입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만들어낸 결과와 그리 동떨어져 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시선이 사전에 저지되었더라면 40만 명이 수용소에서 생체 실험으로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물학/유전자에 의한 영향력을 이야기할 때 유전자의 힘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읽은 5장에서는 유전자가 환경과 맺는 상호작용이 훨씬 중요하다는 입장에서 서술합니다. 이른바 유전 vs. 환경논쟁에서 유전자는 환경의 영향 없이 논의 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특정 형질을 유발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라도 환경과 조건에 따라 그 형질이 발현될 수 있는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절대 다수의 유전자는 다면발형성’, 곧 하나의 유전자가 다양한 표현형에 영향을 주는 멀티 플레이 유전자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멘델의 유전 법칙에서 나오는, 하나의 유전자가 그대로 하나의 또렷한 형질 발현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말이죠. 여기에 우리는 아직도 어느 특정 형질에 어떤 유전자가 관여하는지에 대해 극히 일부만 알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할 것 같네요. 따라서 특정 형질을 유발한다고 알려진 유전자가 장차 유해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정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이 유전자가 관여하는 다른 형질 발현 과정에 교란을 일으킬지 모르기에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유전보다 환경에 더 방점을 두는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핑커가 지닌 견해의 기반은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이 책의 주요 논지인 인간의 폭력성이 점차 감소해왔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 핑커는 환경적 측면, 그러니까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진전, 교육의 역할 등을 꼽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매우 빈약/취약해 보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인류의 역사 무대에서 대량 학살을 비롯한 인간의 범죄나 폭력성이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 번이라도 대량 학살이 발생한다면 이 주장은 폐기될 수밖에요. 개인적으로는 핑커가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성이 감소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통계자료를 사용한 방식이 설득력이 매우 약해보인다는 점입니다. 물론 정우현 교수도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비판합니다.


 

폭력을 주로 전쟁과 살인에 의한 사망자 수로 다소 편협하게 제한해 정의함으로써 통계적 착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과거 특정 시대의 폭력을 지나치게 과장했고, 반대로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현대의 수많은 참상은 애써 축소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테러, 내전, 국가폭력 등이 여전히 심각하다는 사실은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빈곤이 결국 범죄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으며, 인신매매, 성범죄, 사이버 폭력, 언어폭력, 환경 파괴 등 수치화하기 어려운, 그러나 대량의 물리적 폭력 못지않게 큰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들을 (아마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도 문제다. 그의 책은 마치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이를 입증할 만한 통계자료만 선별해 제시한 것처럼 보인다.”(235-236)


 


제가 놀랐던 점은 많은 매체나 독자들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호평 일색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에서 납득이 가지 않거나 불만스러웠던 점들을 이처럼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비판한 글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던 것이죠. 단지 내 생각과 맞아서만이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학자가 자신의 책에 적용한 논리가 일개 독자도 납득시킬 수 없는, 문제적인 논리임을 그동안 아무도 지적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대한 리뷰/독후기를 남긴 사람들은 왜 이런 점들을 지적하고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듯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학자들이 모여 핑커의 책에 담겨 있는 그의 역사관/인간관에 대한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에 실었기 때문이죠. 정리해보자면, 핑커의 역사관도 유전 보다는 환경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상황에 있지만, 자신의 주장에 도움이 되는 통계자료만을 취사선택함과 동시에, 중요한 사례의 누락을 학자적인 양심에서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히 비판의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지난 세기에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무너진 상황에서, 핑커의 계몽주의적 이성에 대한 낙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아무튼 핑커의 책과 관련한 사항은 이렇습니다.

 


이번 모임에 읽은 범죄 유전자를 정리해보면, 유전자는 단독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유전자가 환경, 곧 특정 상황과 맥락 아래에 놓여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쉬운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환경의 영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죠. 맥락, 바로 그 유전자가 놓인 맥락 혹은 환경이 어떤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학은 언제든 새로운 발견과 사실에 의해 기존의 것이 수정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가능성을 지닌 유연한 존재로서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저자의 말이 이번 장인 범죄 유전자를 읽으면서 인상에 남았습니다.


 

이번 여름인 7-8월에는 과학책 읽기 모임이 방학에 들어갑니다. 9월 모임에서는 동성애 유전자에 대한 내용을 다룰 예정입니다. 아주 이야기 거리가 풍성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나쁜 유전자의 참고문헌에 나오는 책 한권 씩 골라서 읽어 오시면 더 좋겠네요. 9월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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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가족에 관한 글쓰기 - 가족 가면 벗기기
양혜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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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노는 마당이 필요하다


박완서 가족에 관한 글쓰기

: 가족 가면 벗기기

 

양혜원 지음 [책읽는고양이] (2026)

 




가족이란 어휘처럼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을까. 박완서 연구자, 여성학 연구자, 번역가,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활동을 해온 양혜원 작가의 글을 읽으며 처음 든 생각이었다. 저자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한 편씩 읽으며 작가의 출발점이자 글쓰기의 모태가 된 가족에 대한 글과 시선에 주목한다.

 


전쟁이나 시대의 불운과 같은 불가항력이 불시에 가져다주는 불행과 고통 다음으로 깊은 고통과 시련을 던져주는 것이 가족은 아닐까. 그만큼 제도로서의 가족은 인생사에서 개개인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원천이기도 하다. ‘노력하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인내하고 양보해라와 같은 말은 집안 어른들의 덕담이나 결혼식 주례사에서 늘 듣는 말이 아니던가. 이러한 덕목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삶에 자신을 던져 넣어야 했던 부모님 세대 혹은 그 이전의 여성들은 대부분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현실에서의 삶은 늘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한 가족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저자는 이 불완전한 가족 신화의 이면을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본다. 이 책은 가족이라는 자장 속에 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한편으로 후배 작가/독자로서 박완서 작가의 노는 마당을 다시 방문하고 그의 글을 읽어온 기록이다.


 

애초에 가족이란 제도는 왜 생겼을까, 의문이 들다가도 고라니와 같은 다른 동물들을 떠올려본다. 태어난 지 몇 시간 만에 일어서서 걸어 다니고 곧이어 뛰어다닐 수 있는 고라니 새끼들과 달리, 너무나 미숙한 존재로 태어나는 인간은 보살핌을 제공하는 안식처가 오랜 기간 필요했다. 굳이 억지로라는 수식어를 붙이려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이 걸리는 육아를 책임지는 최소한의 공동체로서 가족은 어쨌거나 필요할 수밖에. 하지만 가족의 구별짓기를 위한 필요는 어쩌면 더 큰 공동체의 출현, 그리고 이 작은 공동체의 연합을 연결하기 위한 행정적 필요가 어느 시기에는발명되어야 했을 법하다. 제로도로서의 가족이 탄생한 시기가 있지 않았을까.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제도가 지닌 문제점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제도 이전의 본질적인 기능을 일부러 무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지금껏 외로움이란 감정에 강한 편이라고 스스로 평가를 내리곤 했지만, 웬걸,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참으로 고독한 존재구나 싶다. 심지어 어떤 날은 아직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심각한 외로움이 불쑥 찾아올까봐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이라는 글자에 담긴 의미만큼이나 서로에게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에게 울타리로서의 가족이 온전히 기능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으련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가보다.


 

제도 그 자체로 많은 문제를 양산하기도 하는 가족을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인간은 지극히 문화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스스로 만들어 낸 모든 인공적인양식(문화)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중독되는 존재다. 문화는 결코 혼자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말 그대로 인간은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온 존재가 아닌가. 박완서 작가의 작품 중에서처럼 볼품없이 늙어버린 남편의 모습에 극한 혐오감을 느끼는 부인처럼, 선택에 의해 구성되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공간을 점유하는 현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은 쳐다보기도 싫어진 구성원을 돌보아야한다는 의무에 얽매여 지옥이 되기도 하니까. 가족이란 제도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인간은 한편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할 수 있는 존재다. 모기 물린 자국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앙상한 남편의 정강이에도 손을 뻗어 쓰다듬어 보기도 하는 존재다. 저자는 모순적인 가족에 대해 쓴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따라가면서, 가부장의 사회적 의무에 얽매인 인간의 초상을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도 읽어낸다.


 

인간은 사회의 규범과 제도의 지배 아래 살아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에는 각각의 인간이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부여받고, 이 역할을 잘 해내도록 요구받는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박완서 작가의 작품 속 어느 남편처럼 부부의 정도 사라진지 오래된 터에 가족을 위한 역할에 얽매인 인간으로 살다가 생을 마치게 되는 가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품 속 인물에 대한 묘사 이긴 하지만, 작가가 남긴 작품은 대부분 본인이 겪은 일들이 작품에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여성들이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면 삶이 몇 배나 더 고달파지던 시대에 남편들 역시 가부장의 의무에 얽혀 평생을 살아갔던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의 삶이 이게 다인가, 싶기도 하다. 결혼은 일이기에, 현실이기에 더욱더 상대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순서가 뒤바뀐(?) 듯한 표현에 더 공감하게 되는 이유다.


 

한편 저자가 소개하는 작품 속의 한 남편은 부인의 혐오가 담긴 시선을 받으면서도 가부장의 의무에 집착한다. 아무리 공감력이 떨어지는 남자라 해도 혐오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감지하지 못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쩌면 이시대의 많은 남편은 이러한 사회적 역할에서만이 스스로의 쓸모와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반문해본다. 저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은 학습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28)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편 되기도 사회적 의무와 가정에서의 역할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워야할 일이다. 결국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남편과 부인 되기의 공간과 시간이 각자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면 남편들도 가족의 외부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야 문제가 많은 제도로서의 가족에 최소한 숨 쉴 틈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이 책에서 감지할 수 있는 박완서 작가의 가족에 대한 태도는, 가족이라는 제도의 모순을 또렷하게 감각해내면서도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세심하게 견지하는 모습 같은 것이다. 또한 의연하고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찰자에 가깝다. 어쩌면 박완서 작가에게 가족의 문제는, ‘철저한 개별성을 지닌 현상으로 보았던 죽음의 문제처럼, 지극히 개별적인 사정으로 이해되었을 법하다. 그렇기에 글쓰기라는 절차를 통해 결국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관점을 볼 수 있는 또다른 에피소드가 <저물녁의 황홀>에 등장하는 화초 할머니이야기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 어느 날 침투한 불청객이었다. 반면 화초 할머니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케빈 스페이시가 해낸 역할 뺨치는 연기로 가장의 임종을 지킴과 동시에 유산도 받고 이 가족으로부터 유유히 떠나는 인물이다. 그 과정의 장면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려져 보였던 것이다. 화초 할머니는 불완전하고 모순적 제도인 가족의 맹점 한 군데를 파고든다. 그녀의 역할은 모순적인 제도에 대한 통쾌한 업신여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저자의 인물 해석에도 공감이 갔다. 자녀나 본처가 생의 마지막까지 가장에게 주지 못한 역할을 화초 할머니가 연기를 하면서도 해냈다는 점 말이다.


 

더 나아가 화자의 친할머니와 화초 할머니 사이의 관계를 여성 사이의 연대와 인류애로 읽어낸 시선 역시 인상 깊다. 이런 마음은 어쩌면 우리 세대 이후에 더 발견하기 힘든 덕목으로 남을 것 같다. 누구는 화초 할머니 캐릭터 혹은 혼신의 힘을 다한 그녀의 연기를 비난할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비루한 연기나마, 결과적으로는 한 인간(할아버지)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던 화초 할머니야말로 유산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싶은 것이다. 아무리 눈속임 연기라고 해도, 연기란 그 역할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과 진정성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립된 한 인간의 마음과 처지를 들여다보는 저자의 마음을 나도 배우고 싶다.


 

저자는 박완서 연구자이면서 후배 작가로서 박완서 작가의 유산을 되짚어보고 다시 읽기를 했다. 이어지는 에필로그에서는 저자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방향을 들려준다. 특히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저자는 글이 서툴더라도 AI를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진실하게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요즘 이 AI 시대에 진실함이 없다면 글쓰기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차였다. 저자의 글쓰기 이야기를 듣게 되니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자신의 진실한 목소리를 발견하고 글로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AI는 이 과정을 초보 작가로부터 빼앗아가기 쉬운 까닭이다. 저자는 박완서 작가가 평생 피와 땀으로 쓴 글을 정성껏 읽으며 발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 책의 독자와 나누고자 한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은 박완서 작가를 다시 읽어내며 놀았던 저자의 또 다른 마당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작은 목소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가족과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 보다큰 이야기를 남겨준 박완서 작가를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겠다. 나 역시 서툴더라도 나의 목소리를 찾아내기까지 계속 읽고 쓸 수 있길 바란다. 저자처럼까지는 아니고, ‘이라도 흘릴 수 있는 나의노는 마당에서 말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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