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메르 18일>은 워낙에 잘 알려진 역사가 반복된다는 문구로 자주 불려나온다. 그런데 '반복'이라고 말하지만 동일하게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다시 돌아오는 역사란 무엇일까. 이상한 문법인데 또 자연스럽다. 무엇이 반복인지 어떻게 반복인지 반복해 묻게 된다.
"영원한 재출발의 철학자" 마르크스는 "잘 팠다, 늙은 두더지여!"를 외치면서 끝없이 새로 시작하고자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무력해지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마르크스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마르크스'의 생명이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십 년 전의 내가 그랬듯이- 자본주의라는 무대는 사라지지 않을거고, 그래서 마르크스 변증법도 소멸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조언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십 년 후 내가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믿는 편인데- 마르크스는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에서 잠들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을 담론의 질서 위에 올려놓으면서, 국가도 정치도 경제도 심지어 인간도 계속 갱신되어야 할 대자적 무엇에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마르크스가 다룬 특별한 서사로서 '혁명주체'는 역사와 사회 앞에서 성숙한 계급 구성원으로서 분열 모순을 극복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통해 혁명적 국가를 구상한 사회개혁가였는가.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비관적 역사 과정에서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들을 냉소적으로 채색하는 현실주의 연구자에 가깝다. 이런 생각 덕분에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은 하나의 궤로 읽혀지기를 거부한다. 그는 역사 기억을 무대 위로 옮겨 온 후 온갖 셰익스피어적 배우들을 동원한 인간극을 반복한다. 마르크스는 영웅의 역할을 수행한 보나파르트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시대 정세 속에서 사회적 관계들에 집중한다.
P. 158 역사적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마르크스는 '투쟁'이라고 답했다. 마르크스 당대의 현실을 볼 때 그 투쟁은 노동계급의 해방을 통한 자유를 향해 있었을 것이다. 유럽 내 혁명가들에게 공산주의란 하나의 국가정치체가 아니었다. 국제 연대는 그렇게 아슬아슬한 형태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마르크스와 투쟁가들의 혁명전은 짧았고 무참했다. 브뤼메르 18일을 쓰게 된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미리 말하고 싶었을까. 저 무수한 나폴레옹들이 싸워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싸움을 투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을까.
1871년 노동자 자치정부를 이끌고 끝까지 코뮌을 지키려다 살해당한 파리코뮌의 노동자들은 '투쟁-존재'를 실제로 증명한다. <프랑스 내전>에서 이러한 마르크스의 관점이 투명해 보인다. 투쟁-존재는 희망사항이 아니라 현실존재였다. 그런데 무수한 나폴레옹들이나 그를 지지했던 농민들은 어떤가. 자본주의적 부패를 끌어가는, 전쟁을 도구삼아 권력을 쟁탈하려는 세력들은 어떤가. 그들이 자신들을 위한 필연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다면 주장한다면 그들은 어째서 투쟁-존재가 아닐 수 있는가. 마르크스 입장에서 투쟁은 역사를 만드는 일이며, 그것은 추상적 인류애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투쟁-존재는 역사를 세우는 실천 주체이다. 이 주체들은 인간 본질로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무엇을 찾으려면 자기자신을 찾으려는 무대가 필요하게 된다.
더불어 '두더지'는 어떻게 투쟁-존재가 될 수 있는가. 무조건 실천하는 주체를 우선시 할 수도 없다는 숙고의 표현으로 사용된다. 말없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두더지의 전진이야말로 투쟁-존재의 반성적 실천의 모습이다. 예니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도 두더지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고 한다.
“모든 곳에서 지진의 신호가 보이고 사원과 상점이라는 기단 위에 서 있는 사회의 와해 신호가 도처에서 보이지 않니? 나는 시대의 두더지(Der Maulwurf Zeit)가 더 이상 지하를 파지(wühlen) 않을 거라고 믿어.”
이 시대의 두더지들은 무수하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출현하지 않는 듯 보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