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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읽자>가 도서관에 들어왔다. 참 어이없는 게 출간하자마자 두 차례 희망도서 신청을 했었는데 모두 거절당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 군데 도서관에 들어온거다. 어떻게 된 일일까? 나처럼 희망도서 신청한 이들이 계속 증가하자 도서관이 협상한 걸까. 아니면 누군가 -조정권력이 있는 사람의- 이 도서는 구비해야 한다는 지시가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나는 <자본을 읽자>를 대출해 왔다. 그리고 여기저기 포스트잇을 붙여가면서 읽고 있다. 


아주 가능성이 낮은 일이지만 '좌파에 헌신'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시대의 부름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가끔 좌파란 누구인가를 생각하다가 밥때를 놓치고 라면을 끓인다. 지금 저 조그만 냄비에 라면이 끓고 있다. 밖에서 들려오는 지글지글한 빗소리는 정념을 더해준다. 좌파란 라면과 빗소리와 굶주린 독자를 안도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더 솔직해지자면 많은 이들이 좌파보다는 좌파 이론가에 더 매혹된다. 좌파(이론가)는 위대한 지향성을 현장에 이식해 정세를 주도할 준비가 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좌파에겐 여러 번 기회가 있었다. 그 계기가 좌파와 이론가를 하나로 묶어주기도 했었다.


좌파 독자들은 이론가들이 대중의 인식론적 편향을 바로잡고, 잠자고 있는 혁명 열기를 밝혀내는 일을 하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잠재성, 절대정신을 깨울 관념과 테제들에 기꺼이 스며들고자 책을 집어드는 좌파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첩첩산중에서 수십 년 수행성을 획득한 후, 드디어 시장으로 내려온 짜라투스트라처럼 동시대성의 혼탁함을 가뿐히 비껴갈 구도를 펼칠 현자의 모습이 좌파와 좌파 이론가들의 통합된 이미지였을 것이다. 니체가 시대의 망치를 들고도 쓰러질 수밖에 없었듯이 좌파*이론가들에게도 사태로 진입하는 일은 극도로 어려웠다. 


좌파라서 얻게 된 가난이나 핍박이 훈장이던 시절은 갔다. 우파 이론가들에게 헌신 불가능성이 확실했듯이, 좌파 이론가 역시 불가능한 헌신이 당연시 되고 있다. 좌파는 존재들의 헌신으로 숨을 쉬고 있고, 예전과 다른 이름이 되었다. 좌파와 이론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좌파 이론가는 하나가 아니었다. 좌파-존재 또한 당연하게도 하나일 수 없다. 좌파 독자는 그보다 더 많은 양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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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랜드에 있는 앨리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너나 없이 활발하고 어린이'다운' 소녀를 떠올린다. 그런데 루이스 캐롤이 누구를 모델로 이야기를 썼는지를 들여다보면 조금 달라진 감각을 갖게 된다. 루이스 캐롤은 자신의 본명을 라틴어로 재해석하면서 만든 이름이고, 앨리스는 자신이 근무하던 직장 상사인 수학과 학과장의 둘째 딸을 그려낸 인물이다. 캐롤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 앨리스는 빅토리아시대에는 흔하디 흔한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캐롤에 의해 표현된 앨리스는 학대자의 시선 아래 노출된 가엾은 인물이 아니다. 앨리스를 그리는 캐롤의 전개에는 탁한 욕망의 관점이라고 하기에는 또 다른 차원의 시선들이 있다. 앨리스는 하트 여왕이 목을 치라는 명령을 내릴 때 조차 강압에 맞서는 용기를 가진다. 시대는 순진무구한 덕목으로 치장된 소녀상을 요구하지만,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앨리스는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표현하는 인물이 된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캐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원더랜드에서 마지막 하얀 기사의 등장은 예정되어 있었다.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돕고자 한다. 아니 구원하고자 한다. 앨리스가 여행 중 제일 먼저 떠올리는 장면이 하얀 기사의 부드럽고 친절한 미소였다는 사실은 뭔가 시사적이다. 그러나 캐롤은 수학자답게 혹은 현실주의자답게, 앨리스를 하얀 기사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지 못한다. 캐롤은 거꾸로 가는 세상에서 모험을 해야 할 앨리스를 위한 이야기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알 수 있을까. 어떤 세상에 서 있음이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한 장치라도 되는 듯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문학이라는 세계가 어떻게 삶을 흔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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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코레트 2025-07-2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쓴 글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아챌 감각이 동시대성인지 반시대성인지 헷갈리고
싸구려 글이 갖는 효용이 싸구려 커피만큼 있다면
 

<브뤼메르 18일>은 워낙에 잘 알려진 역사가 반복된다는 문구로 자주 불려나온다. 그런데 '반복'이라고 말하지만 동일하게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다시 돌아오는 역사란 무엇일까. 이상한 문법인데 또 자연스럽다. 무엇이 반복인지 어떻게 반복인지 반복해 묻게 된다.


"영원한 재출발의 철학자" 마르크스는 "잘 팠다, 늙은 두더지여!"를 외치면서 끝없이 새로 시작하고자 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무력해지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마르크스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마르크스'의 생명이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십 년 전의 내가 그랬듯이- 자본주의라는 무대는 사라지지 않을거고, 그래서 마르크스 변증법도 소멸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조언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십 년 후 내가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믿는 편인데- 마르크스는 새롭게 시작되는 세계에서 잠들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계급을 담론의 질서 위에 올려놓으면서, 국가도 정치도 경제도 심지어 인간도 계속 갱신되어야 할 대자적 무엇에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마르크스가 다룬 특별한 서사로서 '혁명주체'는 역사와 사회 앞에서 성숙한 계급 구성원으로서 분열 모순을 극복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통해 혁명적 국가를 구상한 사회개혁가였는가.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비관적 역사 과정에서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들을 냉소적으로 채색하는 현실주의 연구자에 가깝다. 이런 생각 덕분에 <루이 보나파르트 브뤼메르 18일>은 하나의 궤로 읽혀지기를 거부한다. 그는 역사 기억을 무대 위로 옮겨 온 후 온갖 셰익스피어적 배우들을 동원한 인간극을 반복한다. 마르크스는 영웅의 역할을 수행한 보나파르트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시대 정세 속에서 사회적 관계들에 집중한다


P. 158 역사적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마르크스는 '투쟁'이라고 답했다. 마르크스 당대의 현실을 볼 때 그 투쟁은 노동계급의 해방을 통한 자유를 향해 있었을 것이다. 유럽 내 혁명가들에게 공산주의란 하나의 국가정치체가 아니었다. 국제 연대는 그렇게 아슬아슬한 형태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마르크스와 투쟁가들의 혁명전은 짧았고 무참했다. 브뤼메르 18일을 쓰게 된 마르크스는 역사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가 아닐 수도 있음을 미리 말하고 싶었을까. 저 무수한 나폴레옹들이 싸워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싸움을 투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을까. 


1871년 노동자 자치정부를 이끌고 끝까지 코뮌을 지키려다 살해당한 파리코뮌의 노동자들은 '투쟁-존재'를 실제로 증명한다. <프랑스 내전>에서 이러한 마르크스의 관점이 투명해 보인다. 투쟁-존재는 희망사항이 아니라 현실존재였다. 그런데 무수한 나폴레옹들이나 그를 지지했던 농민들은 어떤가. 자본주의적 부패를 끌어가는, 전쟁을 도구삼아 권력을 쟁탈하려는 세력들은 어떤가. 그들이 자신들을 위한 필연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다면 주장한다면 그들은 어째서 투쟁-존재가 아닐 수 있는가. 마르크스 입장에서 투쟁은 역사를 만드는 일이며, 그것은 추상적 인류애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투쟁-존재는 역사를 세우는 실천 주체이다. 이 주체들은 인간 본질로서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무엇을 찾으려면 자기자신을 찾으려는 무대가 필요하게 된다. 


더불어 '두더지'는 어떻게 투쟁-존재가 될 수 있는가. 무조건 실천하는 주체를 우선시 할 수도 없다는 숙고의 표현으로 사용된다. 말없이 땅을 파고 들어가는 두더지의 전진이야말로 투쟁-존재의 반성적 실천의 모습이다. 예니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도 두더지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고 한다.  


“모든 곳에서 지진의 신호가 보이고 사원과 상점이라는 기단 위에 서 있는 사회의 와해 신호가 도처에서 보이지 않니? 나는 시대의 두더지(Der Maulwurf Zeit)가 더 이상 지하를 파지(wühlen) 않을 거라고 믿어.”


이 시대의 두더지들은 무수하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출현하지 않는 듯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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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새벽>을 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예약자 5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늘 크고작은 놀람을 안겨주는 저술가이므로 별난 일이 아니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처럼 '독서'를 주저하는 시대에 예약자 5인은 와~하게 만든다. 그레이버가 유명 연구자라서? 아니면 새로운 계몽이 도래할 시대에 머무를 자리를 지시하는 예고편일 수 있어서? 


그레이버는 <부채 ...>에서 자유노동을 통한 인간 존엄을 가치 이론으로 설명했다. (상당히 보수적으로 느껴지기도 한) 명예에 기반한 인간 경제론은 화폐가 만든 비인간화된 부채 경제가 어떤 폭력을 토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대조적으로 추적한다. 그러면서 "전적인 선물 경제나 전적인 상품 경제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다시 모스에게로 되돌아간 그레이버는 비판이론이 황량한 세계, 파괴된, 찌그러진 세계만을 비춰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레이버가 전개하는 인류학적 비판이론은 이분법을 넘어선 (무한한) 사회적 관계의 확장에 닿는다.


* 그레이버의 책 정도는 어렵지 않게 구매하고, 작은 서재방에서 불어오는 새소리를 벗삼아 책장을 넘기며 새로운 비판이론을 창작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러러면 얼마나 벌어야 할까. 단칸 월세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에 인문서들의 책값이 두렵다. <자본을 읽자>는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이 거절되더라. 이 시대는 온갖 것들이 경연하고, 수많은 가능성들이 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지만, 내가 취할 수 있는 생활은 그런 것들을 대부분 허용하지 않는다. 현대 비판이론은 그레이버의 <불쉿잡>의 지적처럼 노동 가치가 복원될 수 있는 밧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상황은 가뭄으로 말라 생기를 품을 수 없는 대지처럼 건조하다. 얼마전 성원권과 환대를 주장하던 베스트셀러 작가가 부정선거를 주장한 글을 올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론의 쓸모가 무엇인가를 더 회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자리가 있으리라 믿는 한 줌의 숨이 아직은 붙어있다. 낮술 한 잔과 그레이버의 <모든 것의 새벽>에 몇 마디 주절거린다. 장식 없이 살아도 괜찮은 세상을 희망한다.



"P. 339

이런 식으로 볼 때 ‘농경의 기원’은 경제적인 변천이라기보다는 미디어 혁명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또한 텃밭 농사에서 건축, 수학, 열역학에 이르는, 그리고 종교에서 젠더 역할의 재규정에 이르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회적 혁명이기도 하다. 이 신세계에서 누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여성의 작업과 지식이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서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전체 과정은 환경적 재앙이나 인구통계학적 위기 상황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라 매우 여유 있고 장난스럽기까지 했고 대규모의 폭력적 갈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들은 모두 근본적인 불평등이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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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피노키오와 자라지 않는 세상에서 무럭무럭 커지는 aaa, 자기증식 드라이브를 썼었다. 당시 썼던 글을 찾아내 캡쳐도구를 사용해서 자기증식을 해봤다. 피노키오는 꼭두각시 인형이지만 역경을 이겨내 훌륭한 소년이 된다. 목수인 제페토가 정성으로 빚은 까닭에 때로는 아담의 은유로 받아들여지기 한다. 인간 소년이 되기 위해 배우고 익힌 사회적 약속은 피노키오를 진짜-사실이 되도록 한다.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자란다. 증식한다. 나는 늘 자기증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무릎을 치곤 했다. 하얀 거짓말, 분홍 거짓말, 검은 거짓말 등 많은 거짓말은 선함과 약함의 구속과 충돌지점을 표시할 뿐 도덕적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아감벤이 <피노키오의 모험>의 인형은 사람도, 가면도 아닌 '어떻게'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피노키를 통해 인간다움의 의미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기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생명철학자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을 통해 알려진 정치철학자다. 피노키오가 마지막에 내뱉은 말을 자꾸 되풀이한다. “꼭두각시였을 때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 


소개말 중에서) "더 나아가 아감벤은 말한다. 동화이길 거부하지만 동화스러운 이 이야기는 하이브리드 문학의 전형이라고. 세상에 ‘내던져진’ 나무토막이 그 본성에 어긋나는 근대 질서와 규약, 제도를 거부하고, 꿈속의 꿈 이야기로 마무리되면서, 인간성에 대해 되묻는다고. 언제나 놀라운 메시지를 던지는 사상가 아감벤은 이번 책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문학적’으로 통찰한다.

아감벤은 인간 내면에 야생성, 동물성, 인간성이 있는데 섞여 있지 않고 접촉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이 야생으로부터 동물로, 그리고 현재 모습의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피노키오가 그렇듯 변한 적이 없다고 역설한다. 그런 의미에서 꼭두각시가 인간이 된 적은 없는, 둘이 분리된 채 끝나는 피노키오 서사는, 인간을 정의하는 근대성이라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거나 혹은 오작동 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언제나 그렇듯 ‘생명철학자’ 아감벤만이 전할 수 있는 놀랍고 충격적인 메시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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