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밥벌이에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는 일, 의견을 나누는 일이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자유'에 묻어있는 어떤 추상적이고 비규범적이고 비물질적인 것들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예를 들어 블로그에 글을 쓸 때나 게시물을 볼 때 무급 노동을 하지 말자고도 했다. 기업이 제공하는 공간의 단순 이용자가 아니라 기업과 함께 하나의 생산기계로 기능하고 있다는 말이다. 밥벌이의 중심에 글쓰기를 놓고, 게시물 읽기를 놓고, 공동생산하고 있는 전체 상품으로서 기업의 형태를 조망해야 한다고 말이다.


지금 나는 즉흥적으로 쓰고 있지만, 오래된 생각인데, 얼토당토 않은 헛짓거리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오랜 세월 교양 교육을 통해 학습하게 되는 반성적 사고가 활발한 분이라면, 이런 주장을 속물적으로 볼 수도 있으리라. 인터넷이 제공하는 열린 학습기회는 공적 연출이 더해지면서 더 풍요로워지고 있고, 다양한 채널은 24/365 체계로 지구 반대편마저 비춰주고 있다. 사회관계의 한계를 우주적으로 확장시킬 공간을 제공하는 소셜네트워크, 심지어 광고수입을 올릴 수 있는 너튜브 등을 두고서, 아나로그적-고전적 비판이 아니라, 밥벌이를 중심으로 한 경제구조를 비판한다면 욕심이 지나쳐 보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 그런 어리석음을 안고서라도, 나의 경험과 감정을 이용해 하나의 작은 실천(생산물)을 내놓으려 한다. 


이용자가 자질과 능력을 부각시키면, 카리스마가 있거나, 캐릭터가 진정성이 있다면 인터넷은 노다지라고 선전하는 말은, 각 이용자들을 분리시킨다. 덤풀 속에 보물찾기를 하듯이, 원시인이 채취 활동을 하듯이, 꿈을 찾아 떠돌도록 안내할 뿐이다. 생산의 총화는 기업이 담당한다. 기업은 이용의 틀을 주고, 부유할 자유를 준다. 또 기업은 이용자의 실적을 따져 그 노력을 인정하기도 한다. 눈과 귀를 열어놓고 이용자를 반긴다. 하지만, 이용자가 열심히 읽고 소비한다고 기업과 뭔가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지 못한다. 기업이 예정한 바대로 부유하는 처지가 된다. 운이 좋다면 부유하는 다른 이용자와의 결속된 감정을 가질 수는 있다. 이용자는 '기업이라는 큰 상품생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대체 이런 관행이 왜 문제가 되는가.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이용자는 인터넷 기반 대기업들이 마련한 그릇에 부유하고 있다. 그릇이 커다랗게 될수록 부유물이 발생시킨 효과는 커지고, 그릇의 상품성을 유지시킨다. 이때 가치가 확장되는 생산물은 이용자의 글도 아니고 이용자의 읽기도 아니다. 이용자 자신은 더더욱 아니다. 그릇의 소유권을 갖는 '기업이라는 상품성'은 그들이 만든 그릇이나 이용자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가치확대를 다른 영역에서 구현한다. 공통의 공간도, 공유하는 사물도, 결속된 감정도 없이,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노동을 하고 있는 무급노동자 개인과 거대 기업만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기업들은, 정치의 성공이 더 많은 표를 끌어모으는 것에 있듯이, 더 많은 이용자를 모은 덕분에 천문학적인 부가가치를 올리고 있다. 


이용자들에게 분쟁이 일어나 양분되기도 할 때 심리적 고통이 발생하게 되는 것과는 달리, 바로 그런 순간 그릇의 상품성은 더 커지고, 새로 유입된 부유자들로 호황을 누리기도 한다. 전혀 다른 운명을 갖게 된다. 저렴하게 공급되는 대량의 이용자들의 노동력과 에너지를 업은 디지털 그룹들에게 '기업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 사회적 책임을 따져야 할 때 소비자로서 그 비판을 추동하는 일은 아주 많은 한계를 갖게 된다. 한 명의 이용자는 소비계약을 맺은 상태라서, 생산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철저히 생산물의 배치에 있어 힘을 갖지 못한다. 


이용자의 이익을 보호하자는 뜻은 아니다. 생산관계에 있어서의 위치를 이동시키고, 기업이라는 브랜드(사물이든 인격이든)를, 생산물을 사회 속에 위치시키는 일에 함께 관여하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용자의 글쓰기는 그릇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글쓰는 노동뿐만 아니라 글을 읽는 노동도 있다. 그러니까 이용 계약이 아니라 생산 계약이 필요하다. 그것은 저작권 개념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고용 계약이 아니라 생산 계약이 되어야 한다. 사용 계약이 아니라 생산 계약이 되어야 한다. 소비자 보호규약이 아니라 생산자 협약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 단서를 시작으로《사회자본과 생산계약》에 대해 주장하려 한다. 오래도록 생각했다고 해서 더 발전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부족하고 지루하지만, 조금씩 완성해보려고 한다. 자본, 노동, 가족 등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고, 사회, 생산관계, 사목권력, 구조와 개체, 자연과 사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여러 사람의 노동으로 완성되길 바란다, 욕심을 부리니 조금은 자유로워진 듯하다. 


먼저 에바 일루즈의 『감정자본주의』에서 다음의 문단에 주목하자. 


자아 합리화 및 자아 상품화가 따로 있고 자아가 스스로를 구성*계발하고 타인들과 토의*소통하는 능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 감정을 자본의 새로운 형식으로 만들어온 논리와, 회사 내 관계를 좀더 책임있는 관계로 만들어온 논리는 동일한 논리다. 또한 여성으로 하여금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평등한 지위를 요구하게 만들어온 문화구성체와, 친밀한 유대를 냉정한 어떤 것, 합리화된 어떤 것, 조야한 공리주의에 민감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온 문화구성체는 동일한 문화구성체다. 끝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정신의 어두운 구석을 엿보게 만들고 우리에게 감정적 "문식성"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지식체계와, 관게를 양화 가능하고 대체 가능한 사물로 만드는 데 기여해온 지식체계는 동일한 지식체계이다. 사실 "자아실현"이라는 개념 자체가, 한편으로는 심리적 정치적 '행복에의 약속'을 담고 있었고, 또 지금도 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느 심리학을 권위주의적 지식체계로 배치하고 시장 레퍼토리들을 사적 영역으로 침투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감정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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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나는 '상업적 계약'으로 연동된 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물었다. 많은 창작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상업적 상품임을 숨기지 않는다. 상품은 리콜이나 불만을 신고할 창구가 있는 반면, 작품은 그렇지 않다. 국가는 상품 제조의 책임기준을 관리할 집행기구를 두었지만, 문화 상품를 위해서는 부가가치를 늘리도록 조력할 진흥기관들을 두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공산품, 농산물과는 다른 운명을 갖고 있는 상품이 창작품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어 있는 글쓰기/창작물들이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커뮤니티 게시물 등은 우리 삶에 어떻게 들어와 있는가.    


자유라는 말에 담을 수 있는 많은 지향들을 뒤로 물리고 단순하게 접근한다. '구애됨이 없음'은 완전한 인간이거나 비-인간적인 어떤 상태를 의미하므로 될수록 쓰지 말아야겠지만, 이 글은 '밥벌이에 구애됨이 없는 글쓰기는 어떻게 자유로운가 정도에 서 있다. 


며칠 전, 알라딘 서재에서 <기생충이 바이러스를 삼킨 날>이라는 글을 보았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는 어느 일간지의 기사를 그대로 옮겨온 줄 알았다. 바이러스를 삼킨 날이라니 얼마나 무신경한가. 그런 느낌이 들었던 데에는 바로 그 전 날 한겨레21에서  "남편을 '바이러스' 취급했다"는 가족의 울분을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4년 전 메르스 사태 당시에 벌어진 일이나 현재도 코로나 19로 진행형이며, 앞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일이기에 어느 문제 못지않게 공론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감염자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인간적 배려를 잊도록 강제당한 유가족이 던지는 묵직한 소송으로 마음이 무거워진 탓이 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 글의 내용은, 왕좌에 오른 감독이 만들어온 영화적 맥락 그리고 한국문학 누구도 담아내지 못했던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풀어낸 <기생충>이 세계적인 영화인들에게 인정받은 일에 대한 칭찬 등이었다. 제목이 갖는 의미를 최대한 확대해서 보자면, 영화 <기생충>이 풀어낸 계급, 정의, 분배 등과 관련한 적나라한 현실이 바이러스처럼 파고든 계급이기주의나 자본주의의 병폐를 고발하고 있다, 혹은 미국 중심 문화 구도를 <기생충>이 잠식해 버렸다 ... 아니면 바이러스 공포를 <기생충>영화의 수상소식이 삼켜버렸다.


그 글은 블로그에 쓰인 '개인적'인 의견인데 정색을 할 수도 없다. 만약 알라딘이 서재에 올라오는 글쓰기 노동에 담긴 가치를 인정하고 원고료를 지불했거나, 그 글을 읽는 독자의 읽는 노동도 인정해서 밥벌이와 상관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도록 했다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여하튼 나는 어떤 의견을 표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라딘 서재에서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고 일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나는 한겨레21의 기사에 댓글을 달지 않고 닫는 것처럼, 이 <기생충~> 글에도 뭔가를 말할 수 없었다. 여기는 뭘 하는 곳일까. 발간된 책에 대한 '저자와 독자'의 공간일까, '독자와 독자를 연결하는' 소통 공간일까, 저명한 독서가들로부터 얻는 고급한 상품평을 습득하는 곳일까. 


나는 저런 이유들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은 개인적 동기에서 알라딘에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나도 공들여 글을 쓰다보면 뭔지모를 공통의 공간 속에 거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도 했었다. 또 한때는 말을 하면 할수록 커지는 공허함이 글을 쓸 때는 없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었다. 비상업적, 비자본주의적인 것들이 많아질수록 자본주의적 적폐들이 사라질 거라는 배경이 깔려 있기도 했었다.  

 

이제 내 자신에게 묻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구구절절 쓰고 있지만, 요지는 이렇다. 밥벌이에 구애됨이 없이 글을 쓰는 일이 가능한가. 그 글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 <기생충>처럼 가려진 현실을 부각시키는 글을 쓰려면, 밥벌이로, 가장 많이 버는 밥벌이 자리에서 글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댓글도 달지 못하는 심약한 나 자신을 자책하기 보다는, 유명인의 위대함을 즐길 심미안을 갖지 못했음을 한탄하기 보다는 다음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알라딘이여, 서재의 글쓰기를 무급 노동으로 치부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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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브로긴 2020-02-1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글쓰기가 왜 노동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럼에도 앞으로도 글 많이 써주세요^^

초원 2020-02-17 20:5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고마운 말씀 남겨주셨네요.

문장의 앞부분에 답을 달아야 할까 생각하다,
설익은 생각으로 사령관 님을 피로하게 할 수는 없으니
우선 인사 먼저 나눕니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뜨뜻한 하루 보내셨기 바래요.

스타브로긴 2020-02-17 21:18   좋아요 0 | URL
다음 글 기대하겠습니다^^
저도 요새 알라딘 서재 드나들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초원님의 글을 읽어 반가웠습니다.
 

나는 에돌고 있는 알라디너다. 동료와 형성하는 공간 속에 있지 않고 혼자서 자유로운 척 흉내를 내고 있다. 알라딘에 글을 올리는 일을 누가 가로막지 않는다고 자유롭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내가 쓰고 내가 읽고 내가 표현한다고 자유로운 글쓰기가 아니다. 혼자 있다면 어떻게 자유가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금방 혼란스러워진다. 도대체 이 시대에 '자유'가 어떻게 가능하다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말할까.

 

대상을 품은 글쓰기는 어렵다. 목적을 쉬이 드러내는 글쓰기는 남사스럽다. 자신을 구제할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왜 글을 쓰는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자유로운 글쓰기는 오직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고 나누는 사람이 하나의 공간을 점유할 때나 가능해질 수 있다. 알라딘에 가입하면서 어떤 환상이 있었나보다. 동등한 독자들의 공간, 지배관계에 있지 않으면서, 말할() 권리를 갖는다. (이 때의 권리란 알라딘 허용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글을 게재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사용 여부에 대한 재량을 갖는다는 쪽에 가깝다.)

 

 

그런데 글을 게재한다고 무슨 공통감, 서로 발전을 위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발화가 많아야하고, 강력한 논리가 있어야 가능하고, 지속적인 글쓰기가 이어져야 한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다른 알라디너의 자유로운 글쓰기를 보장해줘야 가능한 공간이다. 나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날을 그렸었나보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가 없다. 글재주도 없다. 나는 결속의 띠 안에 머무를 자원을 갖지 못했다.

 

알라딘은 비지니스 모델로 서재를 운영하고 있는데, 왜 그런 환상을 갖고 있었을까. 알라딘은 매년 훈장을 달아주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권위를 부여한다. 상업적으로 만들어진 플랫폼 내에서 평등한 유저가 되어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먼저 알라딘 가입이라는 형식을 통과하면서, 나만의 아이디가 주어지면서, 내가 구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를 꾸밀 수 있으면서 뭔가 사회적 이성에 단꿈을 꾸었나보다.

웅장한 예술의 전당 하나쯤 갖지 않은 도시가 없다. 나는 그 시설을 이용해본 적이 없다. 미술관, 문학관, 과학관, 식물원, 국악원, 음악관, 유적지 등 무수한 공적 자원들에 접근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런 것을 즐기기에 내 생활은 너무 바깥에 있다. 오히려 알라딘이라는 상업사이트 - 가입과 동시에 얻는 말할 권리, 함께할 권리, 동일한 뭔가를 구성해낼 수 있는 가능한 공간-에 더 가까이 있다. 뒤섞여버린 세계는 공적 사회가 아니라 상업적 계약 사회다.

 

봄이 오고 있다. 2020년 봄맞이는 아주조금 다른 걸 시도해보자. 정보가 담긴 글을 쓰도록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글쓰기를 보장하는 방법을 골몰한다. 착취와 소외가 아니라 생산과 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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