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포육실에서 나오게 된 오랑우탄과 침팬지의 적응기를 본다. 침팬지는 인공포육실에서의 사용하던 이불을 껴안고 나간다. '인공'이 붙어서일까. 분리와 방사는 성장의 한 부분인데 왜 짠하게 여겨질까. 인공포육실의 보살핌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잊지 않는 오랑우탄과 침팬지에게 '인공'의 의미는 인간에게처럼 가여움이 아닐 것이라 믿고 있다.


인공감미료를 넣자 우~하는 야유가 터져 나온다. 바로 전에 뭉터기로 넣은 고기와 여러 채소에는 환호성을 보내던 것과 전혀 다른 반응이다. 요리에는 인공감미료의 첨가 여부가 일종의 경계선이 되어가나 보다. 


무엇이 인공인가. 

"사이보그는 과학만능주의나 과학결정주의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이보그는 무엇이 자연이고 무엇이 비자연적 인공인지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사이보그는 동물과 기게의 합동적 혈연관계를 주장하고 본질적 정체성을 부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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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이례적이게도 '주민자치회'의 역할이 커지고 있는 느낌이다. <00동 주민자치회>라는 홍보용 안내문이 자주 보인다. 주민자치회가 집행하는 일들은 행정기구와 지역구 의회의 결합형태가 될 수 있을까. 아렌트의 중요한 논제 중 하나는 인간의 복수성을 실현하려는 평의회제도의 안정적 구축이었다. 그런데 주민자치회가 그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주민자치회가 공적 영역에 포함되는 모든 사람들을 가시적 존재로 비춰주는 빛을 가질 수 있냐는 점이다. 서로 말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주민자치회의 위치가 애매하다. 공공업무에 참여해 누구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면 주민자치회는 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정치인과 시민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주민자치회는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인가? 모르겠다.


플라톤은 지배 계급에게 사유 재산과 가족 제도를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소수의 수호자 계급이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피지배 계급인 생산자 계급이 누리는 것을 갖지 못한 지배계급은 어떻게 통치대상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철학과 정치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뿌리 깊은 적대감에 관해 성찰하게 되었다. 그러한 성찰은 공동체의 관행과 철학의 가르침이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는 지적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 성찰은 철학에 헌신하는 삶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위태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치 공동체의 진정한 범죄라는 인식으로 확대된다. 따라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철학자들에게 통치의 의무를 부담시키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철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자에게 안전한 세계는 철인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로 판명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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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나누다, 대화하다는 뜻의 디알레게스타이라는 어원에서도 드러나듯이, 변증술은 기본적으로 철학적 대화를 이끄는 앎 또는 기술이다. 변증술은 대체로 대화 상대방이 주장하거나 용인하는 전제들이 어떤 귀결들을 갖게 되는가를 탐색하는 작업을 통해 구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흔히 제논이 창시했다고 하지만, 변증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작점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술(멜렝코스)이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술이 대화 상대방이 가진 전제들의 일관성을 검토하는 다분히 부정적인 방식의 것이라면, 플라톤은 이를 더욱 긍정적인 방식의 협동적인 탐구로 발전시키려 했고, 그런 와중에 변증술은 철학방법론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플라톤의 중 • 후기 저작에서 변증술은 통상 형상들의 위계에 대한 개념적 논구를 가리키며, 이는 모음과 나눔의 방법으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엄밀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논증과 달리,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또는 흔히 받아들여지는 전제들(엔독사)에서 출발하는 논구 방식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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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대상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는가? 대화를 진행하던 사르티에가 부르디외에게 이렇게 말한다. 늙어가면서 점점 순응하는 이론을 생산하고 있고, 몇몇 분석에서는 스스로 굴복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며 거칠게 말한다. 간혹 이런 장면들을 보면, 인터뷰는 대화를 나누는 이상적인 방법 중 하나가 아닌가 싶어진다. 물어야 할 것이 난처한 것이라도 사르티에는 자신을 실어서 묻는 게 아니다. 부르디외 역시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이 세간의 비난에 대해 자기표현을 하게 된다. 이 대화에는 애초에 패자가 없다. 이럴 경우 대화는 나누어지게 된다. 인터뷰는 부르디외의 탁월성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게 된다. 


112쪽)

사르티에 ; 


  최근에는 선생님의 작업에서 조금은 예상치 못한 경향이 나타납니다. 특히 플로베르, 마네에 관한 작업에서, 그리고 문학 장, 회화 장, 미학 장의 구체적인 형성에 관한 연구에서 이런 경향이 나타납니다. 해당 연구들에서는 개인성이 훨씬 더 강조되고 매우 고상한 대상이 연구의 전면에 등장하니다. 이런 방향 전환은 전통적으로 사회학에 속한 것, 특히 선생님이 수행하신 작업들, 예컨대 지루한 계량화, 복잡한 통계치, 하찮은 것들에 관한 관심에서 스스로 거리를 두는 행동이 아닌지요? 이는 기존의 인정 체계, 정당화 방식에 순응하는 일이 아닐까요? 구별짓기에 관한 책에서 선생님은 특별하지 않은 대상, 이를테면 아주 평범한 취향이나 음식 소비 등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한데 그랬던 분이 이제는 가장 큰 정당성을 갖춘 대상(즉 고상한 소재)을 향해 갑니다. 이는 기존의 정당한 대상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작업 전체에 정당성을 주입하려는 일종의 술책 아닌가요? 이제 선생님은 작업의 '탁월성'이 아니라 대상의 탁월성'을 선택하고 계시는데, 이는 결국 선생님 자신이 제시하신 몇몇 분석에 스스로 굴복하는 행 '동이 아닐까요?


부르디외 ;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제 변화가 노화, 그리고 사회적 공인과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할 테죠‥‥노화건 공인이건 간에 거기에는 학자들이 진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공통의 법칙이 있습니다. 노화는 결코 생물학적 현상이 아닙니다. 공인은 대체로 연구대상의 변화를 초래합니다. 즉 사람들은 어떤 장에서 더 큰 공인을 받을수록, 더 많은 야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학자들은 [명성을 얻게 되면] 두 번째 경력을 시작하는데, 대개는 철학자가 됩니다. 제 생각에 저는 그렇지 않아요. 제 경우는 제가 수행해 온 작업의 논리 그 자체로 인해 방금 말한 연구들에 이끌린 것이죠. 우리는 선생님이 언급한 목록에 하이데거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네, 플로베르, 하이데거는 우리가 굳이 '[문화생산자들 사이에] 순위를 매기려 든다면 가장 화가다운 화가, 가장 작가다운 작가, 가장 철학자다운 철학자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이런 대상을 연구하게 되었을까요? 제 작업이 추구한 평소의 논리 때문에, 이런 인물들을 연구한 셈이죠. 특히 저는 언제나 장의 발생과 발생 과정에 관해 이해하고자 했는데, 제 시각에서 플로베르와 마네는 근본적으로 장의 창설자라고 일컬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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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이 편지 구절을 보자. 편지글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저녁이 오면 나는 집에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네.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왕궁과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우아하게 성장을 하고는 나를 따뜻이 반겨 주는 고대인의 옛 궁전으로 들어가, 내가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이유이자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음식을 맛보면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던가를 물어본다네. … 하지만 단테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어떤 것을 듣고 이해하더라도 기억 속에 넣어 놓지 않으면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일세. 그래서 나는 그들과의 이야기에서 배운 것을 일일이 써놓았다가 그것으로 『군주국에 대하여』란 조그만 책자를 쓰게 되었다네." [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 중에서


마키아벨리가 모든 관직에서 축출된 일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메디치家의 적대 세력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 후 특사로 풀려나면서 피렌체 근교 농장에서 은둔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중요한 저작들을 쓰게 된다. 

이 편지글에서는 시골 농장에서의 마키아벨리의 생활이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념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마키아벨리를 보여준다. 위 문단의 앞 부분을 마저 읽어보자.


"숲을 나와서는 약수터에 들렀다가 나는 새를 잡는 곳으로 가지. 나는 책을 한 권씩 끼고 다니는데, 단테나 페트라르카,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아래의 시인들일세. 왜 티불루스나 오비디우스 같은 사람들 있잖은가. 난 그들의 감미로운 정념과 그들의 사랑을 읽고 느끼지. 그리고 나의 정념과 사랑도 되새겨보지. 그 다음에는 길로 나와 술집에 들르지. 그곳에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서, 그쪽 소식을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온갖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들의 잡다한 풍취와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게 된다네. 그러다보면 식사할 시간이 오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이 초라한 시골집과 보잘 것 없는 땅뙈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배를 채운다네. 식사를 한 뒤에는 다시 그 술집으로 가는데, 그곳에는 나를 반길 사람들이 있지. 보통은 푸주한 한 사람, 방앗간직 한 사람 그리고 가마 굽는 일을 하는 사람 둘이 바로 그들이라네. 나는 이들과 아무렇게나 어울려 딱딱 소리를 내며 카드놀이를 하지. 이 와중에서 수없이 오가는 말다툼과 욕설들, 그뿐인가, 돈 한 푼을 두고는 종종 드잡이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 고함 소리가 멀리 산카시아노에서도 들릴 정도라네. 이 기생충 같은 인간들 틈에 끼어, 나는 곰팡내 나는 머리를 씻고 내가 처한 이 불운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려 하지. 운의 여신은 나를 이처럼 짓밟고 있지만, 그래도 여신 스스로는 이를 부끄러워할라 생각하는 것으로 자위하면서 말일세.

저녁이 오면 나는 집에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네."

이 편지를 통해서 본 마키아벨리는 냉정한 분석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현실정치에 능란한 모사꾼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역사 속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적인 마키아벨리는 역사 속의 마키아벨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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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농부의 최종 목표는 치유 농장이라고 한다. 화가이면서 버섯농장의 농부인 청년이 소개되고 있다. 6차 산업 농업인이며 예술가. 농업이 6차 산업이라니... 언제 6차까지 간거야? 두 개의 직업을 갖는 일이 자연스럽다....대체 언제부터 직업란이 여러 개 필요한 시대가 된거야? 청년농부는 밝은 미소로 말한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을 그리고 싶어 잡초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잡초와 버섯.


윤구병 농부의 [잡초는 없다]에서는 잡초를 자세히 감각한다. 그러고보니 윤구병 농부도 직업이 두 개 아니 세 개가 되네. 철학자, 농부, 작가. 잡초는 자라고 난 후에야 스스로를 드러낸다. '자연스럽다'는 잡초와 같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는 것일까. 잡초는 언제 자라는가.


"하루는 동네 할머니에게 콩은 언제 심는지 물었다. 할머니의 답변은 교수 출신 농사꾼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왜냐면 그 대답은 책 속의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지혜여서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으응, 올콩은 감꽃 필 때 심고, 메주콩은 감꽃이 질 때 심는 거여." [잡초는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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