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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온 판사가 방영되고 있어. 이상하지? 지옥에서 파견된 판사라니 마치 대기업이 하청에 하청을 주고 다시 하청이 비정규직을 고용해야만 '생산시스템'을 유지하는 거와 비슷하잖아. 판사는 잘 생긴 얼굴에 저돌적인 기운을 지녔어. 지옥에서 온 악마라고 하지만 이미 피고인들에게는 지옥문을 여는 판사일 수도 있어. 이 드라마는 지금까지의 법정 드라마와 조금 결이 달라. 그러니 진범을 잡고, 억울함을 해소하는 일이 중심이 아니지. 사람을 해한 자는 그대로 당해야 정당하다는 사건 종결에 대한 내용이야. 무척 잔인하게 판사의 행동에 집중하는 걸 보니 아마도 결론은 반대로 가겠지.


이상한 점은 악마가 눈물을 흘리게 되면 '인간화'가 된 거라고 지옥세계가 믿는다는 거야. 감정을 가진 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악마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다른 종류의 사탄이 있대. 웃고 떠들고 슬픈 척을 할 수는 있지만, 눈물 한 방울은 사탄에게 저주받고 지옥으로 다시 끌려가게 된다네. 

오래 전 알라딘 서재에 영화감상을 하나 썼는데, 지옥으로 끌려가는 은행원에 대한 이야기였어. 공들여 썼지만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 중요한 점은 천국이건 지옥이건 감시도 처벌도 직접 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예전부터 믿고 있다는 거야. 내 생각으로 감시와 처벌은 지식의 문제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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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는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고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익히 알려진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란 공동체 안에서 몫과 자리가 어떻게 경계설정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랑시에르는 변화를 일으키는 동인을 설명하면서 엘리트가 각인시키는 지식의 문제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어쩌면 그들이 설정한 경계선을 무력화시키고서 자신의 상황을 뒤바꿔야 한다는 혁명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랑시에르 이론은 지금 여기에서 반드시 건너야 할 화두를 품고 있다.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평등을 자기 자신에게 제시하는 증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노동자들이 평등해질 수 있으려면 소수자의 지위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럼으로써 공통공간 속에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평등은 자신의 삶을 다르게 만들 열망에서 시작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고, 감각을 열고 시민으로 나가는 급진적 정치가 가능할 구성의 조건 아래 발생한다. 

랑시에르가 인간을 시민으로 세우는 과정이야말로 몫 없는 자들의 몫을 요구하는 정치라고 말한다. 정치적 포함과 배제의 관계를 문제시하고 기존 비판이론이 갖고 있는 함정들을 찾아낸다. 랑시에르의 다음 언급을 보자면 그 대강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비판은 대중의 역능을 믿지 못한다. 비판은 숨겨질 것이 없이 적나라한 현실을 기만이라고 우긴다. 비판은 진정한 비판의 자질을 가진 특별한 주체를 배경함으로써 부정의 주체의 이름인 '아무나 anybody를 부인한다. 비판은 부정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지정함으로써 즉 부정의 역사적 객관성을 맹신함으로써 부정의 근본적인 우연성, 부정의 시간인 아무 때나 anytime를 질식시킨다."

'아무나, 아무 때나'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은 잘 짜여진 지식과 기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랑시에르에게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자신의 자리를 찾고 쟁취해서 구축한 지위를 어떻게 공백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정치는 신체감각을 나눔으로 개인에게 특수한 지위를 배분하고 있는 체계다. 예술이 감각을 다루므로 픽션의 세계는 정치를 보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치의 핵심일 수도 있다. .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1990년에 나온 이후 몇 십 년이 지난 이후 픽션의 가장자리를 언급하는 랑시에르의 의도는 무엇일까. 픽션이 뭔가. 눈을 들어 보이는 거의 모든 것들이 픽션이고, 픽션의 효과다. 픽션으로 합리화한 것들은 무엇이었고, 픽션이 절대 될 수 없는 것은 또 무엇인가. 정치적인 것에서 픽션으로 바뀌는 것에 집중할 수도 있으나, '가장자리'가 문제다. 픽션이 되거나 되지 못하는 경계가 있나, 있다면 어떻게 있는가. 합리성은 픽션에서도 유효한가. 

목차를 보니 과학의 문턱이 보인다. 문도 아니고 문턱이다. 근대적 합리성에 상상적인 자리는 어떻게 있는가. 픽션의 시대는 민주주의의 시대일 수 있는가.


나는 지금 랑시에르의 언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옮겨 나르고 있는데, 이럴 때 정치적 주체의 가능성은 어떨까/ 

여러 생각들이 떠돌지만 분명한 문제 지점은 하나다.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자리를 이미 차지한 자들이 누구냐는 점이다. 

우선 <픽션의 가장자리> 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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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가 정치신학의 서문에서 '중성' 권력을 말할 때 갈등 상황에 놓인 독자를 발견하게 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정치신학에 대한 새로운 적용 사례가 다수 생겨났다.  15~19세기에 이르는 시기의 '대표', 바로크철학의 神에 유비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17세기 군주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19세기 '중성' 권력, 그리고 '집행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순수 조치-행정국가의 표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정치신학적 사유의 풍요로움을 보여 주는 수많은 사례들이다.


1중성 권력은 17세기 종교 내전을 종식시킴으로써 확립된 주권국가를 말하며, 여기서 '중성'이란 주권국가가 신 • 구교를 포함한 영토 내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우위를 지키는 일을 뜻한다.-옮긴이

2조치-행정국가는 행정 분쟁을 행정재판소를 통해 해결함으로써 행정권이 사법권에 의해 제한받지 않고 행정부의 독자적 권한이 큰 국가를 뜻한다.-옮긴이"

세속화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서 최근 몇 세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슈미트는 주장한다. 형이상학적 - 신학적 - 인간적 - 경제적인 문제에 연결된 세속화는 본래성을 상실한 채 떠돈다. 슈미트에게 중요한 점은 다만, 어떠한 비정치적 결정도 언제나 하나의 정치적 결정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신학도 비정치적 신학은 없다는 것이다. 신학은 정치신학인가. 정치학은 정치신학인가.


법학자 칼 슈미트의 이론화 작업은 나치즘의 질서를 수립하는 데 일조했다고 알려졌다. 나는 슈미트를 읽을 때마다 늘 이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언제였더라. 어떤 분께서 진지하게 충고 하셨다. 그냥 슈미트 그대로 읽으라고. 그런 염려는 오독의 끝을 보여준다고 말이다. 더구나 학인이 가져야 할 기본 태도도 결여된 거라고 하셨다. 그 날카로운 지적 뒤에는 여러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면전에서는 알았다고만 했다. 순간 그는 '계급성'을 확보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아마도 저 인용 글에 나오는 중성 권력은 계급의 기원에 밀접하게 연결된다.


이번 가을) 슈미트, 미키 기요시, 제임스 스콧, 벤야민, 하이데거를 건너가며 헤겔과 함께 정치신학을 읽어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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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11-24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원님의 독서생활을 응원합니다.
 

1.

두 번은 읽은 책 <중동태의 세계>를 번역하신 박성관 선생님이 지난 봄 먼 길을 떠나셨다.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흥미로운 사유를 세상 두루두루, 여러 존재들과 나누고 싶으셨던 분이라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박성관 선생은 이번 개정판 마지막에 별도의 장 [5년 뒤 저자가 보내는 편지]을 추가하여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질문 자체를 바꾸자고 한다.

“이 세상 삶에서 어떠어떠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 없다. 중요한 것은, 나는 뭘 하고 싶은가, 어떻게 살 때 나는 기쁘고 행복한가? 이다.”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윤리적 물음이라는 것이다.

저자를 개정판으로 이끈 두 번째 이유는 다윈의 핵심 사상에 곧장 직결된다. 박성관 선생은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 적자생존이나 생존경쟁이 아니라 '자연선택'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생물의 자유를 선언하다> 책소개 중에서)















2.

당신과 만날 수 있는 건 내가 검사기 때문이죠. 평생 마주칠 일 없습니다.” 어떤 드라마 대사인데, 내용이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투는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렇게 속물적일 수가 없다.

요즘 입시교육에 아는 바가 없는 나로서도 이 말이 사실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초등학생이 국어로 해리포터를 읽고, 중학생이 선수학습으로 몇 년을 먼저 뛰어다니는 덕분에 소규모의 학군지는 그들 방식의 폐쇄적 리그가 형성되어 있다는 게 거칠고 불투명한 교육적 현실이다. 그렇다. '대치동 아이들'은 의대나 법대를 목표로 구축된 생활세계에서 몇십 년을 지내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세계에서 성공한 의사-판검사 앞에는 말 그대로 생면부지인 인류가 앉아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이 대사가 현실이라면 이 현상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벤야민은 꿈을 집합적이고 역사적인 체엄이라고 했다. 사회가 만들어낸 소망 시스템이 꿈의 리얼리티를 추동한다. 꿈은 벤야민 논의에서 흥미로운 지점이고, 어쩌면 현대교육은 <벤야민 꿈>의 무게를 삭제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세대들의 삶에서도 관철되고 있는 하나의 단계적 과정으로서의 각성, 잠이 이러한 과정의 최초의 단계이다. 어떤 세대의 유년기의 경험은 꿈의 경험과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유년기의 경험의 역사적 형태가 꿈의 형상이다. 어느 시대든 이러한 꿈을 향한 측면, 즉 어린아이 같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전 세기에 이러한 측면은 아케이드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의 교육이 전통 속에서, 즉 종교적인 가르침 속에서 그러한 꿈을 해석해준 데 반해 오늘날의 교육은 아이들의 기분전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프루스트가 하나의 전례가 없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속한 세대가 집단적 기억을 위한 신체적, 자연적 보조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이전 세대보다 더 가여운 상태로 방치된 채 고독하고 산만하며, 병적인 방식으로만 아이들의 세계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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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2024-08-30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사적인 체엄이 아니라 체험이 맞다.
 

다쓰루, 타츠루 이름이 간간히 들려온다. 몇 권은 읽었고 몇 권은 잊었다. 타츠루의 레비나스론이 유행이었고, 자본론이 뒤를 잇는다. 타츠루 다작 시대를 시간 들여 비평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여러 갈래로 뻗어 있다. 어쨌든 신간 소개를 읽다가 타츠루의 <되살아나는 자본론>을 본다.


165쪽) ‘쇠사슬’ 외에는 잃어버릴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인데요. 실은 쇠사슬 이외에도 잃어버릴 것이 있었습니다. ‘아이’입니다. 아무리 비참한 사회적 조건에 놓여도, 아무리 빈곤 속에 살아도 인간은 아이를 낳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의심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 ‘한 번도 의심의 대상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말하는 ‘대홍수’가 아닐까요. 즉 아이를 낳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등장입니다. 너무나도 심한 수탈의 결과, 노동자가 생물학적으로 재생산조차 할 수 없게 된 것. 너무 수탈을 많이 해서 급기야 수탈할 자원 그 자체가 고갈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에 있어 ‘대홍수’에 해당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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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8-28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사야할 거 같다! 초원님 안녕?

초원 2024-08-29 09:46   좋아요 1 | URL
오, 공쟝쟝님 어떻게 지내시나요?

또 만나 반가워요.

공쟝쟝님 타츠루 읽어보셨겠지요. 누군가를 책으로 만난다는 건 크고작은 오해를 미리 안고 가는 거라서
추천하고 그런 시도는 못해요. 타츠루의 ˝아이를 낳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등장˝이라는 표현도 애매하죠.
그래요. 그러니까 공쟝쟝님이 읽고 후기도 남겨줘요.

공쟝쟝 2024-08-29 17:48   좋아요 1 | URL
우치다 선생~ 작년부터 틈틈 챙겨서 읽고 있어요. 오해는 제가 감당할테니 저 같은 교양대중(이라쓰고 천재라고 셀프 번역)이 읽기 좋은 책들 종종 올려주세요. [그러니까 책을 링크를 하셔야지 화제의 서재에 초원님서재가 뜹니다] 줄글 노노. 책 링크 꼭.

또 놀러 올게요!

초원 2024-08-29 22:24   좋아요 1 | URL
공쟝쟝님, 천재라는 소개 멋져요. 맞다고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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