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니체에게 양심이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양심이 침식당한 결과다. 자유롭던 인간이 지닌 양심과 사회에 합류한 인간이 갖게된 양심의 가책은 모두 인간이 동물에서 탈피하면서 얻게 된 것들이다. 너무 잘 알려진 바, 니체는 양심의 가책을 넘으라고 한다.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구별하라고 한다. 길들이기의 도덕에서 벗어나와 힘에의 의지를 믿는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아니라 창조하는 자연의 힘에서 존재를 회복하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니체를 떠올릴 때는 그럴 때가 아니다. 기존의 도덕들을, 이 세계가 내게 던져 준 선악판단을 넘어서려고 할 때가 아니다. 흔적도 없는 도덕을 붙들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다. 파괴되고 경멸이 가득한 세상에서, 폭력이 범벅이 된 생활세계를 목격하게 될 때, 지금 이 혼란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각일 수 있는지를 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시대를 제대로 살지 못해서 수없이 많은 밤을 양심의 가책을 안고 지샜다. 지금 이 세계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다면 무엇에 의해 그럴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내가 아프고 병든 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니체에게 물었다. 어떻게 나만 그 세계에서 온전히 빠져나올 수 있느냐고 버텼다.  


2.

평생이 사춘기다. 모든 살아 있는 형상들은 자기-자신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자연의 필연적 경향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이냐. 나, 이놈, 정신차리라. 내게 자연을 거스르는 거대한 힘이라도 있는 게냐.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렇다면 뭔가. 방랑하도록 태어난 게 아니냐. 생명이란, 원체, 완전체 같은 거하고는 거리가 먼 게 아닌가 말이다. 허허. 나는 앞으로도 계속 헤매고 울렁거리며 훌쩍거리겠지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란 말이렷다. 잠깐만 기다리게. 성미가 급한 탓에 천지분간을 못하는 게구나. 내가 그리 흔들린다 하여 세상도 그럴 거라 믿는 게냐. 내가 헛된 일을 하는 동안 누군가는 또 장한 일을 허는 거겠거니 해볼 수도 있것지. 거봐라. 우쩌다 그런 걸 생각허는 날은 아마도 더 심한 풍랑에 빠지겄지. 아니여. 내 안에 내재하는 목적이 있다허면 말이다, 왜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지를 생각하며 더 울적해질 게 아니여. 그러면 이렇게 방향을 틀어야허것지. 지금 내게 이짝저짝 가르는 말들이 필요한 게 아니구나 해야허지. 자연에 목적이 있다허면 인간이 알 수 없는 거고, 자연이 확연히 드러나는 자체라면 내가 허우적대더라도 그렇거니 해야허지. 


그렇지, 그래. 그러허더라도 '너'를 생각하는 순간 그런 건 까마득히 사라지는 거여. 너가 아파하고 너가 힘들어하는 얼굴이라면 말이여. 자연이 그러하니 세상이 이러하니 그렇거니 해야허지 할 수가 없어지는 거지. 그럴 때면 '나'로 시작헌 회오리가 태풍처럼 몰아치는 거여. 허허. 이제 뭔 생각을 해야 허는지 짐작이 가지. 나 ,회오리도 너, 태풍도 좋지 않어. 나와 너와 세상과 자연이 죄다 각자로 나타날 수가 없는거잖어. 나는 너이고 이런 게 아니여. 나이고 너이고 세상이고 자연이여. 나따로 너따로 세상따로 자연따로 그런 거는 해로워. 


가려진 해를 보며 진짜 해를 보고 싶다 허는거지. 해를 잘 알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생각허는거지. 해를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 잘 모르는 건 아닐거여. 해를 따로 생각헐게 아니란 말이여. 유일하게 해가 중심일 때가 있기는 허지. 어스름하게 올라오는 아침해를 두고 다함께 맞이하는거 그런거 말이여. 나에겐 너뿐이여 허면서 얼싸안고 해맞이를 하는 거 그런거 아니여. 나는 여기에서 너는 그곳에서 세상은 저기에서 자연은 사방에서. 말없이, 주고받고 그런 것도 없이, 그런게 함께한다는 거지. 


*이 그림은 <제목 없음 43>입니다. 금지를 금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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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초대장>

미국에 사는 갑부가 4천억 달러를 투자해서 미래 도시를 만든다고 한다. 도시 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한 미래도시라고 한다. 5백 만명을 거주시킬 계획이며, 헨리 조지 방식의 토지소유제까지 도입한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겠다. 15분 이내에 직장도 학교도 시장도 문화센터도 갖춘 도시는 온갖 첨단 설비에 의해 운영된단다.갑부는 거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낸다. 또 다른 갑부인 머스크는 화성 프로젝트 X를 설명한다. 미소를 띤 얼굴과 정중한 태도로 화성에서의 미래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한다. 


이 공개된 초대장은 사실 공수표여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초대장을 공개하면서 여유롭다. 미래도시와 화성 이주를 향한 열망이 지구의 대안이기라도 하듯이 당당하다. 그렇다. 이 두 개의 사업은 말하자면, 공개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봉합경제의 한 양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에 연결될 수 없겠지만, 마치 이들의 비지니스가 지구의 운명을 개척하는 선구안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투자를 유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구에 절망한 사람들은 화성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상상할 것이며, 인간에 절망한 사람들은 미래도시 프로젝트에 열광할 수도 있겠다. 


<두 개의 법안>

텍사스에 낙태금지법이 있다고 한다. 반면 일리노이주에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한 남성을 고소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한다. 당사자가 아니라도 성범죄자나 가정폭력범을 고소하도록 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법이란다. 벌금이 만 달러부터 매겨지는데, 절반은 텍사스에서 낙태를 하지 못해 일리노이주로 오는 여성들의 낙태 수술을 지원한다고 한다. 


이 대립하는 법안은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을 의미한다. 자기결정권이 자유와 만나는 곳에 어떤 진실이 있다고 확신한다. 낙태를 하지 않겠다는 일도, 낙태를 하겠다는 일도 자기구성의 윤리에 닿아 있다. 낙태를 막느냐 허용하느냐에만 몰입한다면 영영 '문제'로만 남게 될 수도 있겠다.   


< 두 개의 시간>

눈이 아파서 머리가 어지러워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듣게 된 정보를 끄적인다. 공들여 누군가 써 놓은 글을 읽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일단 나를 고양시키는 일이다. 글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접촉하는 일은 자신을 중단시키고 작은 분기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목적이 분명한 독서라도, 읽기에 빠져 있다가 간혹 정신을 차리게 되면, 자신과 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 사소하고 담백한 행동이 삶의 고양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왜 삶을 고양시켜야 하는지 의문에 빠지곤 한다. 


책을 '읽기'가 아니라 책을 '쓰기;가 문제다. 읽기에는 해가 덜하다. 쓰기에는 독이 있다. 어떤 독은 그래, 누군가에게 약이 되기도 하겠다. 그러나 그때의 약이란 하나의 비평이므로 '읽기'를 떠난 상태다. 좋은 독을 생산한 저자가 인기를 얻는다기 보다는, 비평 무대에 오른 글이 약의 가능성을 두드리는 것이다. 비평은 다른 종류의 '쓰기'다. 쓰기의 독과 비평의 약 사이에서 인과는 개인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래도 독이다. 그래서 쓰려는 자는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만들어진 독이 어디로 가겠는가. 인기 없는 글을 쓰는 사람은 실은 독이 아주 미량이라 독도, 약도 아니라는 뜻이다. 글을 쓰고 더 쓸쓸해질 때면 이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해독중이라고. 만들어진 독이 저절로 해독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이다.


자신의 인식 수준을 참된 방향으로 끌어가려는 도덕적 국면을 만들어야 한다. 나라는 동굴을 개방시켜서 편견을 조정하는 자발성을 소박하게 경험해야 한다. 그런 의지를 티끌만큼도 갖지 않은 읽기는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고, 고립을 자초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달래고 달래도 그럴 수 없다 한다. 왜 자신의 삶을 고양되거나 파괴될, 무시무시한 무대 위에 올려놓아야 하느냐고, 울분이 솟는다. 여기에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읽기의 시간과 쓰기의 시간.  나는 영영 주체적 삶을 살 수 없거나, '주체'는 '나'라는 생명활동이 일어나는 이 몸과 연관이 없다 하겠다.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87>입니다.  트러블드 워터 속에서-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랫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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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한껏 부풀려진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야생의 삶을 결코 잊지 못하는 존재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그냥 동물로 인식하고 싶어한다. 『노루인간』의 다음 구절을 보자. "열일곱 살이 되자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숲에서 보내기로 작정했어. 그리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치르는 날에 반항심은 절정에 달했어." 저자는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홈스쿨링을 해야 했던, 사회부적응으로 문제를 겪는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생활세계에서도 인간의 굴레가 족쇄처럼 주어져 있다고 느꼈다. 그러던 저자는 숲이 자신을 맞이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노루와 같은 동물들과 섞여 살면서 비로소 "나를 사물의 질서 속에 있는 나의 진정한 자리로 되돌려 주었"다고 고백한다.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책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동물의 관계를 구축한 저자의 경험은 탈자본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영감이 될 수 있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수사슴과 정면으로 마주쳤어. 늦여름에 사슴이 빽빽 우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과감하게 다가간 적은 없었어. 열 살 짜리 소년에게 한밤중에 들리는 거친 울음소리는 너무나 위협적이었어.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나는 겁이 나서 돌처럼 굳어버렸어. 내 앞 1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육중한 몸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진동하면서 내는 그 생물이 발산하는 힘에 압도당하고 말았어.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던지 그 소리가 수백 미터 주위에서도 들릴 지경이었어. 돌연 그가 나를 향하더니 쉰 목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어.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암사슴들이 그보다는 조금 낮지만 강력한 소리로 화답하기 시작했어.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덜 떨렸어. 하이파이 시스템의 저주파처럼 말이야. 마침내 수사슴이 방향을 바꾸었어. 나도 뒤돌아섰어. 그 수사슴 때문에 거기 갔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이었어. 숲의 우여곡절이 두 존재를 만나게 했듯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어. 얼마 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 그 수사슴이 내 짧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교훈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동물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 했어. 야생이 세계는 초심자에게는 문을 열지 않아. "(『노루인간』)


그렇다면 이 책의 소개말에서  "우리는 자연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연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자.  늑대를 개로 길들이듯이 노루를 길들이지 않고, 자신의 몸을 노루에 맞춰 길들임으로써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나무랄 데가 없는 해석같기도 하다. 또 인류세로 접어든 인간의 반성과도 같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자연에 대한 뭔가 초월적인 믿음으로도 들린다. 저자가 노루와 함께 했던 7년의 생활에 대해서는 상상력 말고는 달리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왜 그곳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더듬거리며 이해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모아놓은 다음의 말들도 읽어본다.  "무례한 인간의 행동, 숲의 삶을 더 큰 관점에서 생각, 우리 행성 지구의 미래에 대한 존중이라는 기쁨과 걱정, 종種 간의 사려 깊은 동거의 의미 ..." 등은 "도토리를 주워 먹고, 이슬을 받아 물을 마시고, 노루처럼 낮에 쪽잠을 자고, 감기약으로 담쟁이덩굴과 소나무 싹으로 치료를 하며, 노루를 따라 하루 5킬로 정도 이동하며 생활한 7년"동안에도 인간의 <그것들>을 버릴 수 없었음이 아닐까.



절반의 인간, 절반의 노루가 아니다. 노루였던 인간의 고백에서 소외된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낯설음도 없어 보인다. 이토록 이색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저자의 경험을 기꺼이 껴안기 꺼려지는 이유는 아마도 노동하는 인간과 노루의 노동의 간격에 닿아 있다.  인간소외의 문제를 고민하던 마르크스가 자연법을 뛰어넘을 때 중시했던 노동개념을 꺼내들어온다. 노루인간과 기계인간은 노동의 소외를 제거할 수 있을까. 


"더욱이 자연과의 상호 작용은 너무나 긴밀하고 실존적으로 내밀해서, 우리는 자연을 인간 신체의 “비유기적” 확장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노동할 때 자연은 인간적 보철prosthesis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볼 때, 마르크스는 인간들에 관한 최근의 논쟁, 즉 기술을 사용해서 사이보그가 되는 인간들에 관한 논쟁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자연과 관계할 때 이용하는 기계들은 우리의 살만큼이나 우리 신체의 일부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살은 단지 '웨트웨어wetware의 일종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노동 개념은 아주 급격히 확장된 인간 개념, 즉 자연 전체를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로 통합할 정도로 확장된 인간 개념을 낳는다. 우리 자신의 활동에서 낯설어지면서, 우리는 또한 우리 노동이 포괄하는 더욱 확장된 형태의 인간으로부터도 낯설어진다[소외된다]." (『하우투리드 마르크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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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초원님에게 생스투유~ 책 담아갑니다

초원 2021-11-16 12:18   좋아요 1 | URL
이런 한갓진 곳까지 걸음 해주셨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며칠 전 프레이야 님이 올려주신 만요슈, 잘 읽었답니다.
책의 기운을 널리 전하시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이번 주는 따뜻하네요.
고맙습니다.
 

1.

시장과 '조직'은 자본주의 사회를 근거짓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시장의 가능성들이란 …  오늘 아침의 저 푸르고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만끽하는 모든 생물들에게 닿았던, 자유의 향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조직으로부터 시장'이라는 생산양식이 짙게 응축된 봉합경제에서는, 그 편향성으로, 뭉게 구름이 뛰노는 저 하늘마저 즐길 수 없도록 노동자를 몰아대고 있다. 


'신봉건주의'적 틀로 해석하게 될 때야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회의 양상에 주목하길 바랐다. 봉합경제에서는 대결해야 할 지점이 뚜렷하다. 시장을 비판할 게 아니라 '조직'에 주목해야 했다. 누구도 홀로 시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 명의 자본가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 창의적 아이디어를 마구 쏟아내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날만큼 댓가가 주어질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한 명의 노동자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을 쉬지 않고 노동운동을 하더라도 그 영향은 그렇게 커지지 않는다. 한 명의 학자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을 계급론과 노동가치설을 연구해 보고서를 써내더라도 그 실재는 크게 진동하지 않는다. 주체를 예속적 위치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핏대를 세울 게 아니라, 개체들의 놀이터, 쉼터, 일터, 공터를 돋워야 했다. 체계나 제도, 질서 등의 무생물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생물에 주목해야 했다. 위계질서로 고착된 조직은 '조직'이라 부를 수 없다. 주체를 세울 수 있는 곳은 노동자, 한 사람의 내면이 아니라, '조직'이다. 조직의 주체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역사는 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조직'들의 출현으로 전도된다. 이것이 하나의 계급이다. 


현대 신봉건주의에 상존하는 계급이 있다면 당연히 '시민'이다. 산업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에 부르주아는  여러 굴절을 겪으면서 와해되었다. 부르주아지라고 부를 계급은 이미 제도적으로 체계로 흡수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유연한 '조직'이었다. 부르주아지는 한 명의 부르주아가 변절하느냐에 합류하느냐에 따라 흔들리지 않았다. 그랬다면 계급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조직'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노동이 그들의 생존지위를 흔들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누구나 노동자다. 아이가 태양에게 묻는다. 어제도 그제도 어디갔어요? 하루종일 비만 내렸어요. 태양은 답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느 순간 알게 될 게다.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노동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노동을 어떤 위치에 놓던지 간에 항상성을 갖는 노동자의 위치는 인류 성립의 본질이다. 노동자가 일터로 가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그곳은 일터가 아니라 전쟁터다. 노동자는 적극적으로 생산계약에 참여해야 한다. 그 계약은 근무시간과 보수에 한정하는 고용계약이 아니다. 모든 생산은 사회적 생산이므로, 계약은 총체성을 지녀야 한다. 


2.

하나의 문제틀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 수십 번 대지가 붉으락푸르락 변해가고 있었는데, 아직도 끄적거리고 웅얼거리고 더듬더듬 짚기만 한다. 지지부진 하다가 간혹 참조할 흥미로운 책이나 자료를 발견하게 되면 다시 뽀드락지 올라오듯 서술 욕구가 솟아난다. 지난 달 『불쉿 잡』 목차를 보다가도 그랬다. 세상의 쓸모 여부로 직업을 바라보는 일이 탐탁치 않지만, 경험적이며 실증적인 온갖 자료들을 하나의 문제틀로 만들어 가는 작업은 여전히 힘을 만든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하려고 했더니 이미 누군가 대출중이었다. 예약을 걸어 놓고 기다리다가 며칠 전 대출해 왔다. 눈대중으로 읽었고 어떤 부분은 착실하게 짚어가며 다시 읽으려 한다. 역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답게 1장에 “마피아 행동 대원은 왜 불쉿 직업이 아닐까?”다. 불쉿 직업이 종사자에게 어떤 고통을 유발하고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여러 번 반복되는 사실 중 하나는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을 불쉿이라고 여기면서 정신적 폭력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레이버가 던진 이 문제의식을 한 자락 잡고서 불쉿 직업과 노동 존엄성과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봐야겠다. 그런데 불쉿 직업의 확장이 자본주의의 위기인지 부흥인지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책을 기다렸던 이유인 7장의 “경영 봉건제도하의 정치와 문화는 '원망의 균형'으로 유지된다”의 한 단락이다. 


"경제의 금융화와 정보산업의 만개, 그리고 불쉿 직업의 확산 사이에는 원천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기존 자본주의 형태의 재측정이나 재조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과거의 것들과 깊은 단절을 가져왔다. 이렣게 말할 수도 있겠다. 불쉿 직업의 존재가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증식하는 한 가지 이유는 현재 시스템이 자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아니면 적어도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혹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 밀턴 프리드먼의 연구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자본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지대 추출 시스템rent extraction으로 변해간다.


이 시스템의 내적 논리, 마르크스주의자가 좋아하는 표현으로는 이 시스템의 “운동 법칙”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경제와 정치의 필수 조건들이 대체로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이것은 영주, 봉신, 가신의 끝없는 계층제를 만들어 내는 똑같은 성향을 드러내는 중세의 고전적 봉건제도와 닮았다. 다른 면에서는(특히 그 경영주의적 에토스는) 심오하게 다르다." (313~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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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는 머루밤이다. "門을 연다 머루빛밤한울에 송이버슷 내음새가 났다"에 가깝다. 검은밤이 아니라 머룻빛 밤이다. 새송이버섯은 알지만 송이버섯 냄새는 모른다. 그래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백석의 시는  머루 밤의 말방울 소리다. 소금을 나르는 당나귀가 서둘러 돌아오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머루 밤만 그득하다. 


여우난곬족族첫 머리는 명절날 엄매 아배 따라 큰집으로 가는 아이가 있다. 아이를 따라 개도 간다. 


"저녁술을놓은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달리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하고 숨국막질을하고 꼬리잡이를하고 가마타고시집가는노름 말타고장가가는노름을하고 이렇게 밤이어둡도록 북적하니논다"


「오리 망아지 토끼」에는, 아배 지게 위에 올라타 산으로 간 까닭에 토끼잡이라도 하려다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난 토끼가 아쉬워 울상을 하는 아이가 있다. 아배는 망아지 사달라 조르는 아이를 달래려 망아지더러 이리 오너라 한다.


"장날아츰에 앞행길로 엄지딸어지나가는망아지를내라고 나는 졸으면

아배는행길을향해서 크다란소리로

-매지야오나라

-매지야오나라"


아이는 자라고, 여승을 만나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을 함께 한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방 안에서 쫓겨난 거미 가족들을 염려하는 어른이 된다.

"거미새끼하나 방바닥에 날인것을 나는아모생각없시 문밖으로 쓸어벌인다

차디찬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쓸려나간곧에 큰거미가왔다

나는 가슴이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쓸어 문밖으로 벌이며

찬밖이라도 새끼있는데로가라고하며 설어워한다"


백석 詩의 아이는, "노란 싸릿잎이 한벌 깔린 토방에 햇칡방석을 깔고" "호박떡을 맛있게도 먹던" 아이는, 산새도 오리도 노루도 토끼도 놀던 아이는, 무섭고 아픈 기억을 넘어선 어른이 되어 있다. 마술이다. "어치라는 산새는 벌배 먹어 고읍다는 골에서 돌배 먹고 아픈 배를" "아이들은 띨배 먹고 나았다고 하였다"는 


가끔 문학은 쓰라린 무엇이 아닌가 싶어진다. 아름다운 동화로 읽으면 더없이 맑다. 낮에 놀던 태양이 밤에 다시 떠서 발밑을 밝혀내는 마술 같다. 그러다 그 세계 속 무엇 하나 내 것은 없구나 싶어지면 그만 가슴이 덜컹거린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된다. "잠자리 조을던 무너진 성터"에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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