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과 3인칭에서 2인칭으로, 그리고 비()인칭/무인칭/()인칭으로 바꾸어 말하려 해도, 여전히 전지적 시점이란 살아있다. 이제 무()인칭이 아니라 0인칭을 생각한다. ()인칭의 발견이다.]


사회란 말을 떠올릴 때마다 무()인칭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개인의 합을 초월하는 '사회'는 다자多者를 품을 수 있도록 무인칭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회는 권력의 원천으로서, 발전의 법칙으로서 일자一者의 말을 한다. 이익사회 속에서 수많은 개체들의 난립으로 보이지만, 실은 기존 사회 속으로 재결합할 여러 통로(사회적 관계)가 증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더 나아가 국가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다. 사회는 이름 없음에서 시작하지만, 끝내 이름을 부여하는 장소가 되어왔다. 무인칭은 실패의 장소다. 자연이며 인간이며 사물인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서 공인칭이라는 비어 있음을 요청해 본다.


왜 탈인간, 포스트휴먼을 상상하겠는가. 근대가 만든 인간상이 무참히 깨져가고 신선한 관점으로 이동이 필요한 학자들의 상품이기도 하겠으나,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근본 불안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로 발생되는 실천력을 사회-역사에 새겨넣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실패했고 근본적으로 이탈해 있다. 사회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대개 불분명한 사랑 속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계몽의 이상이었던 <성숙한 인간 사회>는 냉소 속에서 모욕을 견딜 운명이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어쩌면 도덕적이고 본질적인 명령이, 통일된 디딤판을 갖지 못하게 되었음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의 판단으로, 10분 만에 수백 명의 생명을 구하기라도 한 것처럼 뽐내듯 말한다. 이란에 폭격될 무기가 모두 파괴되어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는 상태라도 되었다면, 트럼프의 그 위선에 박수를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트럼프의 뻔뻔함과 파렴치함으로 인해 보호되는 사회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방법' 에 대해서는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고, 세계는 불만족이 아니라, 끔찍함으로 연결되는 <지금여기>의 곤란은 '()/() 인간'을 생각하게 한다는 말이다. 과학자에게서도, 형이상학자에게서도, 심지어 종말론자들에게서도 이 흐름이 빗겨가지 않는다. 이 글은 인간적인 것들을 빗겨가는, 아주 작은 상상을 해보려는 시도의 출발이다.


몇 가지 공인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본다

- 불안과 고통을 삭제시키려는 <'인간적'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 결핍을 채우려고 <발생을 가속화시키지 않는다>. 

- 쾌락의 활용에 <조직적 양식>이 형성되지 않는다


몇 가지 가능한 조건을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우선 '놀이하는 인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놀이하는 주체는 0인칭의,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지난 해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의 저자가 강연하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우리는 왜 타인을 미워하는가」라는 제목이었다.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라는 동화를 통해, 줄리엣 미첼이 말하는 동기간 관계가 인간조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부모 곰과 아기 곰이 살던 집에 골디락스가 나타나 아기 곰의 스프와 의자와 침대를 뺏어간다. 아기 곰에게 골디락스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타인”이 되었는데, 골디락스는 곰의 집에 침입한 이방인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여자동기 sister이라는 것이다


미첼은 『동기간-성과 폭력』을 통해, 오이디푸스의 삼각구조가 말하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 주목하지 않고, 측면에서 옆 사람의 자리를 확보해줄 수 있는 동기간, 친구간, 측면관계의 생성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동기간인 아기 곰과 골디락스는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수평적/측면적 생활터전을 발생시킬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아기 곰의 증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차이를 존중만 해서는 안되고, 차이와 동일성을 동시에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놀이연구가 이상호의 말을 인용하며, 아이들이 규칙이 있는 놀이를 통해서 문화의 기본, 황금율을 배울 때, 허약한 체력과 소심성, 정서불안 등을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청소년 문제가 “놀이 왜곡과 부재”라는 진단 아래 놀이가 아이들 자신을 변화시키고 함께 노는 사람을 변화시키며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강연자가 미첼을 강조하는 것은 부모자녀 관계가 커다랗고 수직적인 차이인 반면, 형제자매 관계는 작은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 작은 차이(일상적인 것들)에서 미움과 증오의 트라우마가 생성되기 쉽기에 증오가 없는 사회를 위해서는 자발적인 놀이문화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미첼의 『동기간-성과 폭력』에서 중요한 점은 모자관계와 사회화 과정에 필요한 문화적 토대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위치를 확보할 기반으로서의 '여성의 자리', 페미니즘의 정치적 지형이다. '동기간' 보다 '성과 폭력'에 집중하게 된다는 말이다. 줄리엣 미첼은 여성운동의 원로이며 마르크스와 정신분석을 결합해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사회주의 정신분석가이다. 미첼이 페미니즘을 연구하며 동기간에 집중한 것은 남녀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에 두어야 그 이후의 여성주의가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내 생각과는 별개로 미첼이 사회적 형제애를 내세워, 증오로 얼룩진 측면관계를 복원하려 한 점을 강조하고, 놀이를 통해 그 가능성을 짚어준 점은 우리가 곱씹어야 할 중요한 사회적 의제다.


쌩퉁맞지만, 그 무난한 주장 위에서 미끄러지는 하나의 지점으로 인해, 그 강의는 지루해지고 말았다. 강의 말미에 요즘 아이들이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에 미친듯이 반응한다고 냉소적으로 언급하며, 왜 그런 것들에 집착하는지 안타깝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현상들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볼수록, 그 무의미함이야말로 의도이면서 의도가 아니며, 사회적 구속도 자기구속도 아니지 않은가. 우적거리며 음식물 씹는 소리, 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 쓱삭쓱삭 필기하는 소리 … 규율이면서 규율이 아니기도 한, 신체적이면서 정신적인 것이며, 언어도 아니고 기호도 아닐 뿐더러 생성도 아닌 그 효과음들이야말로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자들이 누리기 좋은 최대한의 쾌락이며, 저항이 아닐까.


그렇다면 저자가 크고 단단한 것들로 사유를 확장해가려고 동화나 놀이 같은 작고 사소한 것들을 이용하는 것일까. 작은 것들이 빛나던 전통이 사라진 세계의 결과는 어둠을 잃은 세상이라는 도식이 전부일까. 애써 그 주장을 밝게 끌어올려, 내 방식대로 해석해보자면, 이익사회로 들어서면서 공동체가 가능했던 공동사회가 사라졌고, 타인의 자리-옆자리 관계가 불가능해졌지만, 평등과 자유, 황금율 같은 향유해야 할 이념들을 부르고 안착시킬 문화를 차근차근 가꿔 나가야 한다. 저자가 가진 폭넓은 적용력과 개념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돋보이는데도 굉장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보편성, 황금율, 개념, 관념 … 놀이하고, 다양성을 확장하고,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적 자유에 매몰되던 세계를 공적 자유를 꿈꾸는 세계로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는 논리에는, 미안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90년대 학생운동이 '생활 소모임'운동으로 전환되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다함께 전통놀이와 사물놀이를 즐기고, 꾸준히 학습하고, 생활 모범을 통해 동력을 확보해 가는 수평적 소모임들 말이다. 놀이하는 학교, 모험하는 사회는 생기있는 마을 공동체를 상상하기에 더없이 좋다. 그러나 이 시대가 어두운 것은 놀이터에서 유리조각을 줍던 페스탈로찌가 사라져서도 아니고, 동기간 형제애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도 아니고, 놀이 문화 때문도 아니다.


놀이 이론은 <사회적인 구속>이며 <자기결박>이 되어야 하는가에 의문을 던져본다. '놀이'의 영역이 어디까지일까.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포켓몬 고」같은 증강현실 게임도 놀이일까. 예를 들자면 위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저자는 대중문화의 상상력이란 오락이지 문화가 아니라고 단언했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등을 전쟁 • 모험과 일상을 분리시킨다고 비판적으로 본 점으로 미루면,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놀이를 두고, 아래 표와 같은 대치상황이 벌어졌으나, 여기에 하나의 칸을 만들어 덧붙인다. 이동연이 지적하는 '서드라이프' 정도가 되겠다.


놀이하는 인간은 사유가 정지된 인간이다

놀지 않는 사람은 병든 사람이다

상징계 진입에 실패하고

인생에 아무런 쓸모도 없이 게임에 몰두한다

자극이 부족한 삶이 내적 동기부여를 빈곤하게 한다

놀이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보상물이다


「서드라이프란 무엇인가; 기술혁명 시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관하여」, 이동연

온라인 게임 등은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가상공간 안에서 생생한 현장감을 즐기게 하지만, 그 자체가 현실공간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융합하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상공간이 실제 현실 안으로 들어와 개인의 감각을 활성화시키고, 놀이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포켓몬 고'는 이러한 현상의 아주 단순하고 초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서드라이프 Third Life라고 명명하고 싶다.


~ 서드라이프의 시대에는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의 공간 안으로 들어와 그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특이점을 생산한다. 기술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소멸시켜 새로운 감각의 순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특이점』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은 ~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른바 아서 C. 클라크의 세 번째 법칙을 떠올린다. 조엔 롤링의 해리포터 이야기 ~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포터의 모든 마법은 내가 책에서 소개할 기술들을 통해 틀림없이 실현될 것이다. 퀴디치 경기, 사람이나 물건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은 완전한 가상현실 뿐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나노 기계 장치를 통해서 실현가능하다.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 혹은 로봇틱스에 의한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 환경의 탄생이다.



생물학적 인간을 뛰어넘는, 기술과 존재가 뒤섞이는 새로운 인류를 예측하는데 게임이나 대중문화가 차지하는 역할은 적지 않다. 포켓몬을 포획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6개월 동안 87km를 걸었다. 감각을 이용하고 가상현실에 집중하며 더불어 증강현실에서 살아간다. 게임은 놀이가 가진 특성을 포함해 발전해 가는 중이고, 여전히 놀이처럼 현실과 가상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 하는 하나의 산업이고 문화다.


다시 0인칭의 가능성을 놀이에서 보는 문제를 생각한다. 이어지는 부분은 다음 글에서 만나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가면과 욕망』,『천 개의 고원』,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참고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글은 영화 《기생충》을 텍스트로 접근한 후기입니다. 세 가족이 2자 관계를 벗어나길 거부하며 만들어낸 반전의 공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글입니다. 온갖 영화적 설정에 대한 해석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영화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진부함에 대해 생각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요령껏 대처하길 바랍니다.]


근대국가의 명운은 전문가 양성체계에 얼마나 힘을 쏟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과학주의에 근거한 이론이 미래가 되고, 실천이 이론의 과거가 되는 청사진에 의해 조정되고 강제되었다. 시간 당 노동량을 측정했고, 학교와 공장에도 속도는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었다. 사회적 압력이 절실히 요청되던 시대였다. 그 와중에서도 인간은 감각을 통해 예외를 발견하고, 삶에서 놓쳐버린 그 밖의 것들을 상상할 여지를 만들어내곤 했다. 알려지지 않는 현실에 조명을 켜기도 하면서, 뭔지 허구로 보이지만 실체인 것들을 전경화시켜 예술로 만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예술처럼 발원하며, 스스로를 밝히고는 이내 사라지고 했다.


어느날 고개를 들어보니 전문가로서의 예술가 집단이 등장하고, 예술은 이론적 배경 없이 이해하기 힘든, 지적 작업이 필수적인 상태가 되어 있었다. 고급 예술은 미술관, 예술의 전당에 있고, 대중 오락은 텔레비전, 만화책에 있다. 비율과 조화의 예술은 예리한 비평가의 견해가 첨부된 보증서에 의해 마침표를 찍었다. 미학이 멀어질수록 예술은 모호해지고 더 가치가 치솟는다. 예술인들은 기묘한 처지가 된 듯 싶다. 예술가 냄새란 말하자면 편견을 편견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이지 싶다.


지난 주 내내 온라인 어디로 도망다녀도 이 영화 얘기를 피하기 어려웠다. 다른 때라면 방콕하던 습속으로 상관없이 지나갈 수 있었겠지만, 요즘 관심사인 대너리스, 화이트워커, 아리아를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발걸음이었다. 영화가 다른 예술과 달리, 상영이 끝난 후에야 결합하는 관객까지를 포함시킨 작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영화《기생충》은 시작점에 있다고 하겠다. 감독 스스로 반전에 경악할 관객을 상상하고 있다는 점, 각본 • 미술 • 음악 • 배우 등 여러 제작자가 참여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 수많은 설정 장치 들이 미리 주어져야 가능하다는 점 등으로 보자면 그렇게 무리한 생각도 아니다.


관람객들의 후기가 웅변하는 대상은 영화적 설정이고 배역의 현실성이며, 감독의 세계관이었는데 마치 미학을 가슴에 품고, 비평가를 등에 지고, 관객-자본을 문 밖에 둔 채, 작은 노트 패드로 세계를 이해하는 감독의 쌍둥이 형제들 같아 보였다. 이렇게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이 형성되는 것일까.


감독이 의도한 절묘한 반전에 소름끼쳐하고, 디테일한 설정에 설득 당한 채 흥분을 쏟아내는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서걱거리는 현실 한 자락을 그대로 꺼내 주는 배우들의 연기로, 눈동자 가득 눈물을 채웠을 관객들의 동력은 너무나 인간적인 현상이지 않은가. 그들이 폭넓게 참여하며 형성한 말들이 모래사장에 새겨놓은 얼굴(하트 heart)처럼 밀려오는 물살에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인간이다. 감독이나 배우에게, 닿지도 않을, 응원과 도발을 끊임없이 보내는 어리석음이 있기에 한없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 혹은 마케터 • 평론가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감독도 여지없이 이 인간적인 행렬에 함께 할 것이다. 하지만 상품은 사용자와 제작자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전문가는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다. 전문가 아래 연구자들이 있고 그 아래 연구자 지망생이 있다. 그리고 대중이 있다. 마지막으로 쪼그라들어 대중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헤매는 나같은 방랑자가 있다. (이런 지형학적 도식은 얼마나 진부한가.)


진부한 것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성차별적 현실과는 별개로 언제까지라도 모성애는 죽지 않을 것이며, 정치적 현실은 늘 대의라고 포장하는 수사적 힘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몸부림치며 찾아다니는 '포스트휴먼'은 그 진부함들에 대한 문학적 상상으로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 한계의 영원성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는 내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인간적인 것들, 진부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일이 쉽지 않은 까닭은, 세계가 세계화될수록 개인이 겪는 '세계라는 문제'는 미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도 9.11이라는 커다란 비극 이후 비인간적이고 냉혹하게 보복을 감행하며 미국민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테러에 대한 불안은 상시적인 대응체제를 요구했고, 그 대책은 바로 일상 속에서도 진행되어야 했다. 테러의 냄새는 바로 미국 내에서 미국민들 사이 어디에서도 출현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감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구 정반대 쪽 거리를 몇 초 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시야는 광범위해졌지만, 정작 이 첨단문명 장치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먹고 놀고 시험 공부하고 친구와 수다를 나누는 일이다. (아이고, 자꾸 샛길로 빠져나가

는데) 여하튼 비교적 쉽게 경제적 분할과 계급적 배치가 수직적 적층 구조로 드러나던 근대와 달리, 현대는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여러 문제들이 횡적인 분할 속에서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수직적 계급 현실이 엄연함에도 그 문제 영역들은 진부해 보인다.


다시 요약해 보자면, 횡적인 분할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들이고, 상징과 상상의 엉겨붙음이고, 가치의 교란이다. 최근 80~90년대를 회고하는 많은 영화가 그렸던 풍경이 레트로 문화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면서 유행을 이끌어었던 것도, 횡적 분할에 대한 위로이며 결코 세계라는 문제와 대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떠나가버린 세대를 안전하게 대면할 수 있는 시간으로, 잠시 커피 한 잔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어떤 균열을 시간의 힘으로, 눈물의 동의로 밀어버렸기에, 추억영화가 던지기 쉬운 진부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 《기생충》은 반지하를 빈곤의 장소화로 묘사하고, 언덕 위 저택을 부딪힘이 발생하는 권력의 공간으로 정형화했을 뿐만 아니라, 80년대 운동권 서사까지 끌고들어와 억압적 장치로 배치했다. 영화에 짙게 깔린 구조적 결핍이나 판에 박힌 인과론적 형식이 관객에게 케케묵은 답답함을 안겨줬을텐데, 관객은 진부함을 느끼지 않는듯 보인다. 왜 그럴까.


《기생충》에서 두드러진 단어인 '기생충''냄새'는 손쉬운 전이가 가능한 개념이다. 주홍글씨가 되어 어디에든 기생할 수 있다. 비난의 은유로 사용하는 벌레 충蟲의 대상은 너나없이 누구도 될 수 있지만, 모순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더 빈번하게 발견되곤 한다. 그렇다면 주홍글씨는 사실 내용이 없는 말이다. 이 내용없는 말에 '냄새'라는 자연적인 사실성을 덧대어 응축시킨 덕분에 《기생충》은 현실성을 부여받는다.


솔직히 이 영화의 광고를 보고 먼저 떠오른 짐작으로는, 그레고리 잠자처럼 인간 정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뒤집어써야할 존재의 껍데기와 그것을 벗게 되었을 때야 드러날 역설적 상황을 그리지 않았을까 했었다. 하지만 텍스트로 알게 된 이 드라마의 뼈대는 이렇다.


아무도 변호하지 않는 몰락한 80년대 운동권이 지하실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열정만 가득해 여러 사업을 전전하다 끝내 몰락한 사업가는 스스럼없이 지상에서 반지하로 급기야 지하실로 침잠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상상력은 유일하게 문광(의 선택)에만 허용되고, 나머지는 수학문제를 풀어가듯 정해진 순서대로 조립되길 기다리며 대기중인 레고 인형들이다.


없는 데 있는 듯 속임수를 써서 환기시키려는《기생충》의 기생충은 유령인가. 누가 기생충인가. 어떤 꾸밈말에 지나지 않는가. 흘러다니는 오해로 빚은 말이라면 영화 속에서 어떻게 환기가 되었는가. '오해를 심화시키려고 얹어놓은 '냄새'는 비열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지점에서 어떤 충격을 받아야 할까. '냄새'는 인종문제에서부터 슬럼가 사회문제로 더구나 문화자본으로서 취향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실체들을 담고 있다. 향초, 향수, 방향제, 섬유유연제, 아로마향이 담배 냄새, 노인 냄새, 땀냄새, 입냄새 등과 대척점에서 갈등의 도구로 이용되는 현실에서, 새삼스레 가난 냄새와 사랑 냄새는 숨길 수 없다는 주장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너무 사실적이어서 그런가. 구조의 진부함이 냄새라는 환상적 적대와 뭉쳐 사라져 버렸다.


이미 말한 바 다시 강조하자면 반칙은 반갑지 않다. 냄새나는 지형적 위치로 끌려가 되살려낸 가부장적 질서가《기생충》중심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세 가족의 지탱점으로 작용하는 가부장적 질서가 다양한 양상으로 이 범죄 드라마를 더 모호하게 하며 진부함을 가린다. 노사갈등이 노노갈등으로 이동하더니, 노노갈등의 양상이 노노적대까지 오고 있는 듯하다. 냄새 자본은 경제적, 문화적 분할을 상징하는 기표가 되었지만, 범죄는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을 섣불리 묶지 않고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가난해서 냄새가 나고 무시당해서 폭주하는 기생충이라니. 이런 작위적 연결이 마치 그럴듯한 예술로 둔갑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계급에 전형적 인물을 인쇄하는 일이 계급현실을 직시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짧은 글을 쓰면서, 열 번도 넘게 자조어린 반성을 했다. 누가 염치 없는 사람인가. 누가 부당 이득을 원하는 사람인가. 누가 단물을 빨아먹는가를 분석하고 색출해내는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하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맞지 않을 수도 있어. 이런 … 쓸데없는 자기해석은 이 시대를 살아가며 덤으로 얻은 신경증일 것이다. 계산에 밝고 교양이 있어 적당히 이익을 나눌 줄 아는 시민이 되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싶지도 않다.


더구나 계급을 동물화하거나 악마성을 끄집어내는 매개로 '냄새'라는 감각을 이용해 빈곤계급과 구시대 운동권과 실패한 자영업자를 엮어내는 기술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기생충들의 접전을 묘사한 이 영화는 욕심을 초과하는 농담이거나 문화자본가의 전략 상품이다.



 "유령은 항상 그 거기에 있다. 비록 그것들이 실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록 그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록 그것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입을 열자마자, "거기에"를 다시 사고하게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9-06-1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최근 글이 있군요. 전 아직 기생충을 안 본 상태여서 글을 패스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보고 나면 와서 읽으려고요...
 

모자母子는 서로에게 다정할 수 없었다. (아니 느낌대로 말하자면 냉혹한 훈육과 무관심-배척의 평행선 위에 있었다) 그리고 삶이 어둑해져 왔을 때, 마냥 무정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늙은 아들은 혜자할머니의 진심을 뒤늦게 인정하면서 통곡한다. 뒤이어 행복한 결말이 온다. 돌덩이 같던 늙은 아들의 가슴에 훈풍이 불고 가족은 행복해보인다. 온기를 느낄 수 없었던 부부관계는 이혼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무엇보다 늙은 아들은 내일을 계획하는 열정을 보인다. 혜자할머니는 늙은 아들 부부와 함께 요양원을 떠나 복사꽃이 피는 담장 속 아늑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행복의 열쇠는 늙은 아들의 회심이다. 그는 '어떤 순간'에 이제까지 유지해왔던 모든 분노와 방황을 내려놓는데, 이런 결단은 언제나 경이감을 준다. 우리가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이 장면은 상투적이어서 경건하다. 삶에 대한 투쟁이 마치 냉담했던 어머니의 입에서 널 진심으로 아낀다는 말 한마디를 듣는 일에서 끝나는 것처럼, 희망을 갖는 일은 일상을 건져올리는 그곳에서 시작한다. 어머니의 다정한 독백이 아니라, 늙은 아들의 자기구원에서 눈이 부신 날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제 <눈이 부시게> 마지막 회를 보았다. 모든 회차를 보지 못했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했지만, 초반 줄거리가 시간여행자의 모험에 맞춰져 있었다면, 후반은 '기억의 구성과 자기자신'으로 급변하는 전개에 실망과 환호가 엮여 있을 거라 짐작한다.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혜자할머니는 주변의 모든 이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기쁨을 나누고, 고통 속에 있던 그들을 구원하는데, 이것은 치매를 겪고 있는 노인의 꿈이었다. 현실 속의 혜자할머니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했던 효녀도 아니고 애인의 운명을 전환시킨 해방군도 아니었다. 공안정국에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사고로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가족이 와해되던 순간을 홀로 견뎌야 했던 '한 여자'였다. 

드라마 속에는 빈곤한 화해와 용서가 넘쳤다. 어떤 이는 미봉해 버린 용서의 서사에 노여워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가족의 기원을 되묻기도 할 것이다. 내 관심은 '죽어감'에 집중되어 있었다. 혜자할머니는 신체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던 환자였다. 치매노인의 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푸코의 언급이 떠올랐다.

고대의 개념들 속에는 노년, 생의 마지막 순간, 죽음에 대한 과도한 가치 부여가 발견되는데 이는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죽게 되는 순간, 혹은 체험할 것이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노년이 되었을 때, 자신의 전 생애를 조각해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을 때 그 추억의 강렬한 빛으로 인해 타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목표가 되는 바고 또 바로 그 순간 개인은 자기 자신을 실제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186쪽)

푸코가 자기 자신을 '만들어야 하는 예술작품'이었다고 말하면서 자아도 주체도 아닌 지점에 (老)인간을 서게 했을 때 상상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혜자할머니는 꿈을 꿨고 그 속에서는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잃어가는 기억과 새로 만들어지는 꿈은 혜자할머니의 죽어감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일까. 


~ 사람들이 작업을 가하고 또 미학적 가치들에 따라 공들여 만들려고 시도한 자기라는 대상은 숨겨졌다거나 소외됐다거나 무언가에 의해 왜곡됐다거나 재발현해야 할 어떤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는 예술작품입니다. 자기는 만들어야 하고 말하자면 자기 앞에 놓인 예술 작품입니다. 그리고 고유의 자기는 자신의 생의 종말에 즉 죽는 순간에 도달하게 됩니다. (185쪽)

그러니까 자신을 왜곡된 상태에서 발현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소외된 존재라고 사유하는 일이야말로 자기소외가 될 수도 있겠다. 고유의 자기를 지나 자기창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은 파레시아와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일까. 혜자할머니는 꿈을 통해 자기창조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이야말로 혜자할머니의 자기소외일까. 


내 병은 '죽을 것 같음'을 생생하게 느껴야 한다는 공포 자체였다. 죽을 것 같음은 신체를 거쳐서 나온 '움직이는 말'이었다. 나는 종일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음과 싸워야 했는데, 명백히 그것은 '살고 싶음'이 아니었다. 죽을 것 같음과 '죽어감'은 멀리 떨어져 있다. '죽어감' 속에서 발견하게 될 눈부신 장면과 죽을 것 같음의 공포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지난해 푸코의 『살의 고백』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는 뉴스를 들고 난 후부터,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그 내용을 수소문하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살이 던지는 말들을 듣고 나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그 희망은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것이 아니다) 



"눈 쓸어요 … 우리 아들 학교 가야 하는데 … 아들은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눈길을 쓸고 있던 혜자할머니는 아들에게 말을 건네지만 치매로 인한 기억장애로 그가 아들인 줄 모른다. 늙은 아들 울컥 마음을 푼다. 그리고 혜자할머니가 듣고 싶었을 말을 골라 건넨다.  "아드님 한 번도 안 넘어졌대요. " "정말이에요? … 울지마요, 왜 자꾸 울어. "  이 장면은 <눈이 부시게>의  주요한 지점이다. 늙은 아들은 혜자할머니의 말 한 마디에 드러난 진실에 감동하고 모든 것을 덮는 눈덩이 마냥  “엄마였어, 평생 내 앞의 눈을 쓸어준게, 엄마였어”를 내뱉고 비명을 지르며 운다.  뒤이어 뛰어온 아내가 "당신이 이렇게 부드러운 얼굴로 어머니를 보는 거 처음이네," 한다.


모자의 행복은 혜자할머니가 늙은 아들을 식별하지 못했을 때,  타인에게 건네는 다정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아들이 아닌 낯선 존재에게는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들도 자신을 몰라 보는 노인에게는 온화한 눈빛을 보낼 수 있었다. 서로를 가족으로 엮이지 않을 때에야 드러날 수 있는 타인의 얼굴이라고나 할까. 혜자할머니의 눈부신 날은 자신에 대한 모호한 사랑이 가득하다. 


이렇게 잡다한 말들을 쏟고 있지만 나는 내내 늙은 아들이 마주한 것은 '죽어감'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죽어감은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누워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리고 다시 보았는데 이미 지나가 버렸고, 찰나의 호기심은 병증에 쉽게 굴복했다. 울렁거림이 무슨 자랑거리도 아니고 중요 주석이 될 것도 아닌데, 내가 화이트워커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어떤 서늘함을 설명하려면 내 병증을 곁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면 그 드라마를 볼 일도 없었을 것이고, 또 봤더라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금씩 좋아진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여름부터 울렁거림이 심해져서 좀 비참했었다. 새로운 증상이 추가된 것이라, 하루가 태극의 분할선처럼 울렁거림과 '울렁거림을 기다림'으로 양분되었다. 그것은 손발이 묶인 것처럼 움직임에 강한 제동을 걸었고, 쓸모 없고 좀더 무가치해진 인생을 조롱하듯, 공포에서 울렁으로 바뀐 증상이 버거웠다. 

이 울렁증이 사라지면 밖으로 나가봍테다 다짐해도 막상 덮쳐오는 우울을 막을 힘은 없었다. 종일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리다가 화이트워커를 보게 된 것이다. 대지는 하얀 얼음으로 덮이고 태양빛은 흔적도 없는데, 말 위에 앉아 마법사의 지팡이를 들고 파랗게 불타는 눈빛을 보내고 있던 화이트워커는 필시 다시 짚어봐야 할 문제적 존재였다. 


한 달 쯤 후에 다시 화이트워커를 찾아보면서 <화이트워커의 존재론과 근대성의 파편>이라는 다소 웃기는 글을 쓰기도 했다. 대충 기억하면, 하이데거는 트라클의 시에서 푸른 야수를 언급하는데 화이트워커는 그 거울 속이거나 거기서 튀어나온 존재고, 다면신이 근대의 절정에 선 존재라고 썼다. 대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가을이 되면서 연례행사처럼 문서를 상당 부분 삭제하는데 그때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헤매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이렇게 아픈 상태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글 쓸 자격이라도 주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뭐라도 끄적거리게 되니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처음 본 말이 있다. 우리 인생 최대의 선은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라고 현관에 써 있었는데, 거기에 덧붙여 <조금 덜 괴롭히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되풀이 말하곤 했다. 껍데기 밖에 없는 삶인데 유일하게 매달리는 글쓰기는 조금 덜 괴롭히기 위한 노력이라고 자조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인가 진지충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별 감정이 생기지 않았는데, 아마 내가 벌레나 괴물에 더 감정적인 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진지하다는 말이 냉소적으로 쓰일 때는 남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에만 골몰하는, 어찌보면 한없이 이기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자신이 아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양 군다는 말일테다. 어떤 면에서 정말 인간적이지 않은가. 

벌레와는 우정을 나누지 못하고 내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는다. 그런 대상인 것을 벌레는 알까. 벌레는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은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지만, 벌레나 괴물이라면 무관할 것이고 벌레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낙담할 것이다. 


지금부터 써보려고 하는 말들은 무용하고, 필시 알 길 없는 괴물의 감정일텐데, 벌레가 지나간 자리에 행적을 남기듯이 뭔가 남겨보려는 깜찍한 버둥거림이다. 

계획은 이렇다. 오래 전부터 주장했던 지점을 다시 짚어보고, <<세 번째 사람>>에 대해 덧붙여진 생각을 정리할 것이다. ( 나를 정당화하려는 추접한 욕망이 싫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쓴다.) 민주주의라거나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이런 패러다임으로 시대를 해석하는 경향을 '삶'에 비춰 비판하고 싶었다. 내게 이 시대는 <<신봉건>>이다. 新은 다른 버전의 봉건이라는 의미였고, 그 생각을 벼르고 별러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있었다. 십 년도 훌쩍 지난 일이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뜨아함과 실소였었다. 아마도 농담이거나 벌레의 행적을 들었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수록 나는 내 세계에 갇혀 지내게 되고, 그 생각을 교정할 길은 요원하다. 굳이 찾아보자면 덮었던 글을 다시 써야 할 이유는 있는 셈이다. 되짚어 가다보면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도 있겠다.

몇 가지 조정을 불가피하다. 예를 들어 근대의 '정점'에 선 인물로 명탐정 코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이트워커와 다면신을 불러와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축구장이 들어섰으면 좋겠다 싶은 빈 땅에 가림판이 세워졌다. 

교회가 들어온다고 알린다. 교회인들의 신앙은 배리가 없다. 

거울이나 이상화된 자아를 부정적으로 볼 때는 역전되는 상황을 발생시킬 수 없을 듯하다. 

모순 속에서 산다고 하는 사상가들이 배리가 없는 듯 보이는 일도 여지없다.

행복을 채운다 행복한 경험을 만든다.

불행의 의지를 연기한다 불행을 예방한다.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조상의 눈 아래에서- 한국의 친족, 신분 그리고 지역성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김우영.문옥표 옮김 / 너머북스 / 2018년 11월
45,000원 → 40,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2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2019년 02월 19일에 저장

재산권 사상의 흐름
김남두 / 천지 / 1993년 4월
8,000원 → 8,000원(0%할인) / 마일리지 400원(5% 적립)
2019년 02월 19일에 저장
품절

살아남은 로마, 비잔틴제국- 변화와 혁신의 천 년 역사
이노우에 고이치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7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2019년 02월 19일에 저장
품절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
장 스타로뱅스키 지음, 이충훈 옮김 / 아카넷 / 2012년 10월
40,000원 → 38,000원(5%할인) / 마일리지 2,000원(5% 적립)
2019년 02월 19일에 저장
절판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