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아이가 있다보니 한동안 영화관에 갈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니 가족이 함께 영화관에 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기준은 아이 눈에 맞춰야겠지요. 덕분에 많은 애니메이션을 영화관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최근 본 애니메이션은 <부니베어>, <넛잡2>, <수퍼배드3> 그리고 오늘 본 <<래빗 스쿨> 등이 있습니다. 만화 영화를 보는 동안 동심으로 돌아가 평안하고 좋은 시간을 가졌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물론, 아내와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면서 팝콘과 음료수를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는 면에서는 분명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다만. 영화에 대해 개인적으로 느꼈던 불편했던 부분이 있어 이를 정리해 봅니다. 먼저 영화를 안보신 분들을 위해 해당 영화들의 영화 예고편을 첨부합니다. 이들 영화들은 중국 자본이 투입된 영화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화 <부니베어>와 <넛잡2>의 공통된 주제는 '환경파괴'에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에 <부니베어>는 동양 전통 사상인 '효(孝)'를 접목시켜 부모님을 위한 명절 선물을 마련하려는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넛잡2>는 무분별한 도시 개발을 야생동물의 입장을 빌려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지요. "자연보호"가 환경 오염 해결이 심각한 현대의 과제라는 것에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고, 이러한 측면에서 이들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중국 자본이 투입된 애니메이션에서 환경 문제를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기적으로 어느 정도의 '의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성은 제19차 공산당 전당대회 내용 중 일부를 언급한 기사 내용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래 URL은 해당 기사의 내용입니다. 


http://kr.ce.cn/sy/gd/201710/19/t20171019_2513683.shtml


최근 생태문명체제 개혁을 집권2기 주요 과제로 언급한 기사 내용 속에서 저는 앞서 본  두 개의 애니메이션이 떠올랐습니다. 환경 파괴에서 환경 보호로 가자는 이러한 움직임이 문제될 것이 없다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헐리우드 자본에서 사용되는 '자유(freedom)' 와 '독립(independence)'라는 이념이 과도하게 사용되는 것에 대한 피로감이 느끼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를 다룬 영화부터 현대사를 다룬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에 '자유'가 남발되는 현실 속에서 향후에는 '중국 자본'의 영향력 하에서 '환경보호' 가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진]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주인공 윌리엄 월레스의 죽음 장면(출처 : http://officen.kr/wegood/viewcontent.do?id=21&contentID=46&tab=company&boardType=welfare)


 이러한 최근 제작된 영화의 공통된 주제의식 '환경보호' 속의 정치적 의도성에 대한 의심 외에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여러가지를 느끼게 됩니다.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측면이나 컴퓨터 그래픽 등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작품의 내용 전개 면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개연성이 부족하다거나, 흐름이 끊기는 한계점 또한 발견됩니다.(예를 들어 갑자기 캐릭터들이 쿵푸를 한다거나, 태극권을 뜬금없이 하는 등의 내용이 작품마다 묻어나오는데, 이러한 요소는 극중 몰입을 상당히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는 중국이 2001년 WTO에 가입한 이후 20여년이 지나 G2의 한 축이 된 현재 기술적인 부분은 선진국 수준에 올라선 변화된 현실을 반영함과 동시에,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 ~ 1976)으로 인한 중국 인문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한계점도 동시에 노출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향후 중국이 풀어나가야할 과제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고 보니, 어린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너무 나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최근 중국자본이 헐리우드와 세계 영화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영화 중 중국배우들의 등장과 중국 배경이 이제는 낯설지 않은 현실이 되버렸습니다. 이처럼 과도하게 '중국 PPL'이 현실화 되다보니, 영화에 몰입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불만에 중국의 '생태문명건설'이 미국의 '자유' 처럼 또다른 문화 제국주의(文化 帝國主義)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더해지면서 앞뒤없이 글을 올려 봅니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중국의 현대사도 조만간 정리해 볼까하는 과제도 부여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칩니다.


[사진] 영화 <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X-Men : Days of Future Past>에 출연한 판빙빙

 (출처 : http://playwares.com/freeboard/4183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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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7-11-25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의 현대사 리뷰 기대합니다. ^^
근데 판빙빙은 넘 예뻐요. ㅋㅋ

겨울호랑이 2017-11-25 22:13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는 판빙빙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아직까지 「천녀유혼」의 왕조현이 제일 예뻤다는 생각이 듭니다. ㅋ 너무 오래전인가요 ㅋㅋ

이하라 2017-11-25 2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퍼히어로물들과 주먹왕 랄프라는 애니와 해피피트 1편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의 매체들이 대중을 특히나 아이들에게 편향된 관점을 세뇌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다만 이젠 그 수위가 문제제기를 하는 쪽이 더 문제라고 몰릴 정도이니. 쉽게 타파할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선 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17-11-25 23:5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수퍼히어로물들은 분명 그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와 DC의 ‘수퍼맨‘, ‘원더우먼‘은 옷차림부터 미국을 상징해서, ‘미국=정의‘라는 패러다임을 심어주는 것 같습니다... 이하라님 말씀에도 어느 누구도 이런 구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작품의 세계관을 말하니 그 폐해가 심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네요...

이하라 2017-11-26 08:51   좋아요 2 | URL
미국=정의라는 패러다임도 문제지만 어벤져스 시리즈 중 울트론 이나 엑스맨아포칼립스의 경우 이 세계의 문제를 제기하는 편이 더한 문제를 가져오는 존재라는 편향을 보여주지요. 주먹왕랄프의 경우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는 쪽을 악으로 그려서 아이들에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하는 체제순응적인 존재가 되기를 세뇌하고 있습니다. 해피피트1 역시도 문제는 근본부터가 다른 탁월한 존재들이 해결해 줄테니까 자신의 개성과 잠재력을 기르는 것이 나은 삶의 길이다는 세뇌가 이어집니다. 이러한 관념적 폭격들이 보통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11-26 00:22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이하라님께서 말씀하신 작품을 다 못봤지만, 말씀하신 문제점이 작품에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하신 부분에 유념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7-11-26 0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6 0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6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약 미국에서 축구가 대중적으로 인기 많은 스포츠이고, 미국 리그가 유럽 리그처럼 발전했으면, 중국은 ‘황사 머니‘를 쓰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 중국의 행보는 ‘스포츠 제국주의‘에 가까워요.

겨울호랑이 2017-11-26 10:18   좋아요 0 | URL
그런 점도 있군요.. 제가 스포츠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그 부분은 생각하지 못했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2017-11-26 2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7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생활사박물관 : 선사생활관>은 선사시대(prehistoric age)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과 문화사적인 고찰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책이다. 선사시대부터 최근의 남북한 생활상까지 총 12권에 걸친 시리즈물의 한 편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보다 생생하게 선사(先史)시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좋은 리뷰들이 많기에 책의 구성이나, 내용에 대한 우수성은 별도의 언급없이 넘어가도록 하자. 대신, 이번 페이퍼 속에서는 선사 시대의 '여가 leisure' 또는 '놀이 play'와 이의 현대적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루 일과의 끝, 긴 노동과 노동 사이의 여가에 벌이는 이 같은 유희와 축제를 통틀어 "놀이"라고 부르자. "일" 다음에 찾아오는 "놀이"는 인간 생활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놀이는 단지 "일이 아닌 것"이 아니라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더욱 멋지게 해내기 위한 숨고르기이다.(p16)... 인간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여가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창조적이고 풍부한 인간으로 거듭날 기회를 더 갖는다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는 어찌보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자유로운 여가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p17)' <한국생활사박물관 : 선사생활관>


 <선사생활관>에서는 선사시대 생활을 크게 '노동'과 '놀이'로 구분한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면서, 고기잡이, 농경과 목축 등 식량획득 방법이 다양해짐에 따라 인간은 점차 삶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여유를 가지게 된 인간은 '놀이'를 통해 자신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꾸게 된다. '여가'가 주는 정신적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전쟁의 목표는 평화이고 노동의 목표는 여가이므로, 개인이나 국가나 여가 선용에 필요한 탁월함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가 선용과 마음의 계발에 필요한 탁월함 중 어떤 것은 여가를 선용할 때 작동하고, 다른 것은 노동할 때 작동한다... 속담에 따르면, 노예에게는 여가가 없고, 용감하게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는 공격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용기와 끈기는 노동에, 철학(philosophia)은 여가에, 절제와 정의감은 노동과 여가 모두에 필요한데, 여가를 즐기며 평화롭게 사는 자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1334a11~23)'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 <정치학 Politika>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노동의 목표는 여가이기 때문에, 결국 '노동'과 '놀이'로 크게 구분된 선사시대 인류의 삶은 '놀이'를 추구한 삶이라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씨족공동체 생활을 했던 선사시대 인류에게 여가의 상당부분은 '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선사시대 인류의 모습을 미진한 단계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요한 하위징아는 말한다. 놀이가 단순한 유희(play)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지한 기반이었음을 우리는 <호모 루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류학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원시 부족의 사회 생활이 아곤적/대립적 공동체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원시 부족의 정신세계가 이런 심오한 2원론과 일치한다. 우리는 그것의 흔적을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원시 부족은 프라트리아(phratriai)라고 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절반으로 나뉘어졌다.(p119)... 계절의 대(大) 축제 때 만나서 노래와 춤을 교대로 수행하는 의례적 형태로 구애를 하는 축제에서 서로 절반씩 나누어진 두 부족이나 남성과 여성의 그룹은 경쟁의 정신을 발휘하며 놀이를 하게 된다.(p120)... "겨울 축제 동안에 춤과 노래의 토너먼트에서 남자들의 모임 혹은 형제회(兄弟會)에 스며든 경쟁의 정신이 국가와 제도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었다.(p122)'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5)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놀이'가 인간 사회의 모습이 제도적으로 바뀌는 첫 걸음이었음을 우리는 <호모 루덴스>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전 시대보다 체계화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놀이'에서 즐거움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지만, 현대의 '주5일'근무 체계에서 '2일'의 주말 휴식을 기다리는 우리 모습 속에서 '놀이'와 '여유'를 추구하는 선조들의 DNA를 발견하게 된다. 석기 시대를 우리는 주로 '야만'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다. 자연의 산물 이상을 거의 생산하지 못하던 이 시대가 문명(文明)이전의 미개한 사회라는 우리의 선입견의 기원은 19세기로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모건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야만은 주로 자연이 만들어 놓은 산물 Naturprodukte을 획득하던 시기이며, 인간이 만든 생산물 Kunsprodukte은 자연의 산물을 획득하기 위한 보조 도구였다. 미개는 목축과 농경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시기인데, 인간이 활동을 통해서 자연의 산물 생산을 증대하는 방법을 습득하던 시기다. 문명은 자연의 산물을 그 이상으로 가공하기를 습득하던 시기로서 본질적인 의미에서 공업과 기술의 시기다(p47)'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 ~ 1895)<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19세기 진화론의 영향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사상의 흐름 속에서 신석기 시대는 어두운 과거에 불과했다. 과거가 어두울수록 현재의 진보는 더욱 빛이 나기에 과거는 부정당했고, 어두운 시대로 규정당했다. 유럽의 중세가 그러했듯이, 선사시대 역시 그렇게 인식되어왔다. 그렇지만, <한국생활사박물관 : 선사생활관>을 통해서 우리는 야만의 모습 대신 여유 속에서 삶을 발전시켜나간 선조들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과거의 생활 모습이,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의 생활 양식이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한국생활사 박물관> 시리즈는 의미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PS. 에스키모의 분쟁 해결 방식을 서술한 다음의 문장에서 랩 배틀(rap battle)을 연상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어떤 에스키모가 누군가에게 불평할 것이 있으면 그는 그 상대방에게 드럼 시합을 하자고 도전한다.(덴마크 어 Trommesang). 그러면 씨족이나 부족은 화려한 옷을 떨쳐입고 즐거운 기분으로 축제의 대회에 모여든다. 두 명의 소송 당사자는 번갈아 가며 드럼(북)을 치면서 상대방을 향해 야비하고 상스러운 노래를 불러댄다. 그 내용은 주로 상대방의 비행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근거 있는 비난인지, 풍자적인 말인지, 관중을 웃기기 위한 말인지, 순전한 중상 비방인지는 따지지 않는다.(p173)'<호모 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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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5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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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5 2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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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눈>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p91)



지금 창 밖으로 많은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원래 눈을 좋아해서, 어른이 된 지금도 눈이 오면 마음이 설레이네요.

아침에 쌓인 눈을 보는 것도 좋지만, 새벽에 소리없이 내리는 눈을 보는 느낌은 그와는 또다른 느낌이 들게 됩니다. 마치 일출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르는 새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먼저 본듯한 묘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내일 출근길 걱정은 한편으로 미루고 잠시 집 밖 풍경을 즐겨봅니다. 저는 따뜻한 루이보스 보리차를 마시면서 하루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밤새 내리는 눈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아래 노래가 생각이 나서 올려봅니다. 이웃분들 모두 편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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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3 2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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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4 07: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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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4 0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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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4 07: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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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4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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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4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11-24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전에도 눈이 많이 내렸고 지금도 보풀보풀 날리고 있습니다.
새벽에 눈오는 것을 보면서 저는 영낙없이 남편과 아이 출근, 등교 걱정부터 하고 있었네요 ^^
좋은 하루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7-11-24 08:23   좋아요 1 | URL
^^: 그렇군요. 저도 아침이 되니 조심스럽게 눈길을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출근을 했습니다. hnie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2017-11-26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6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던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오늘 페이스북에 친구가 올린 글을 봤습니다. 학군단 동기였던 친구가 지난 일기를 꺼내 보던 중 옛 생각이 나서 올린 글이었습니다. <후보생 노트>라고 적힌 것을 보면 하계 훈련 들어갔을 때 적은 글이라 생각됩니다. 약 20년 전 훈련 받을 때 양말 안 빌려준 것이 무척 서운했던 듯 합니다. 군사 훈련을 받는 상황에서 작은 것에도 서로 마음 상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에 지금은 웃음이 나옵니다. 동시에, 웃으며 답글로 사과의 글을 올렸습니다.

당시상황이 내무검사 직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급품의 물량을 맞춰야하는 상황이라 양말을 못 빌려준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지금 생각하면 작은 일이지만, 일기를 보면 저도 친구도 당시에는 많이 어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같이 올린 사진 속에서 젊은 시절 친구들과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사진 찍을 때는 일상이었겠지만, 지금은 참 소중한 순간이었겠요. 2017년에 바라본 1996년이 소중한 날인 것과 마찬가지로, 2037년 어느 날에 2017년 11월 20일을 돌아본다면 이 날 역시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추운 겨울 날입니다. 이웃분들 모두 건강하게 하루 잘 마무리하세요^^:

ps. 사진 속에서 가장 왼쪽 청년이 저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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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0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0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1-20 1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친구분 입장에서는 심기 불편한 상황이겠지만, 지금은 끈끈한 인연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추억이 되었군요. ^^

겨울호랑이 2017-11-20 20:19   좋아요 1 | URL
^^: 네 지금 보니 작은 것 하나에 참 아옹다옹 살았다는 생각이 드네요.ㅋ

2017-11-20 2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0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4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11-24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부 잘하게 생기셨습니다ㅋㅎ! 요즘은 양말 좀 느셨습니까ㅋ

겨울호랑이 2017-11-24 07:01   좋아요 0 | URL
^^ ㅋ 공부도 못하면서 모범생처럼 생긴 스타일이 바로 저런 스타일이지요 ㅋㅋ 일반 양말은 제법 있는데, 산타 할아버지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양말은 없네요 ㅋㅋ

순오기 2017-11-28 0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미지 사진을 보고 여자분이라 생각했던 듯... 범생이셨군요!^^

겨울호랑이 2017-11-28 06:57   좋아요 1 | URL
^^: 이미지 사진은 딸아이 입니다. 외모만 범생이었답니다 ㅋ 순오기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나와같다면 2017-11-28 1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너무 훤칠한거 아니예요..?
훤칠한 외모.. 인문학적 교양.. 따뜻한 마음.. 차가운 지성.. 배려와 공감
도대체 부족한게 뭐예요..?

겨울호랑이 2017-11-28 20:12   좋아요 1 | URL
이런... 나와같다면님께서 너무 좋게 봐주셔서 몸둘 바 모르겠네요.. 저도 ‘훤칠한 외모 ~ 배려와 공감‘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ㅋㅋ 감사합니다.

2017-11-29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9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치심을 미덕(美德)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수치심은 마음가짐보다는 감정과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치심은 불명예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으로 정의되며, 그 효력은 위험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유발되는 것과 흡사하다.... 사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훌륭한 사람의 특징은 아니다. 나쁜 짓을 했을 때 느끼는 것이 수치심이라면 그전에 나쁜 짓이라면 하지 말았어야 한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하찮은 사람의 특징이다. 하찮은 사람은 수치스러운 짓을 할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는 마음가짐이라고 해서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1128b 10 ~ 28)'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 ~ BC 322)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ka Nikomacheia>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치는 하찮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感情)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으며, 훌륭한 사람은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그런 행동을 애초에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치는 '부정적 감정'의 하나일 뿐이다. 


이에 반해 거의 동시대를 살아간 중국의 맹자(孟子, BC372? ~ BC289?)는 사단(四端) 중 하나에서 부끄러움을 언급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는 상반된 주장을 편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측은지심(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無羞惡之心 非人也 수오지심(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無辭讓之心 非人也 사양지심(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無是非之心 非人也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羞는 恥己不善也요, 惡는 憎人之不善也라.  羞는 자신의 不善을 부끄러워함이요, 惡은 남의 不善을 미워하는 것이다.' 주희(朱熹, AD 1130 ~ 1200) <맹자집주 孟子集註> 公孫丑上


 이러한 '수치심'에 대한 상반된 의견에 대해 미셸 퓌에슈(Michel Puech) 교수는 수치심을 두 사람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저자에 따르면 수치심 자체는 고통스러운 감정이지만,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감정 자체보다 그 의미에 주목하는 입장이다.


 '수치심은 강렬하고도 고통스러운 감정일 수 있다. 다른 모든 고통과 마찬가지로, 수치심  또한 그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면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 거기서 해방될 수 있다.(p11)'


 미셸 퓌에슈 교수는 <수치심 La honte>에서 수치심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수치심을 신호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면,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감정만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남들 앞에서 부끄러울 일이 있다고 해도, 정말 어려운 일은 남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수치심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을 모른 척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자기 안의 수치심을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데, 수치심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일도 좀 수월해질 것이다.(p21)


 '수치심이 일종의 고통이라면, 이 감정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닐까? 고통을 신호로 보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자연계에서도 통증이라는 신체적 고통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경고 신호이기 때문이다.(p74)'


 '수치심이란 일종의 실망감이다. 실망감이란 살다보면 누구나 겪는 감정이고, 그러니 담담한 마음으로, 지나치게 호들갑떨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구나 매일 조금씩 실망하고,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만, 이런 자질구레한 실망들은 오히려 삶의 자극제, 자신이 바라는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p78)'


 단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넘어서 우리 자신을 성찰(省察)하는 거울로서 수치심을 활용한다면 우리는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 1875)의 유명한 동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저 멋진 새들에게 날아갈 테야. 그럼 나처럼 못생긴 새가 감히 가까이 왔다고 죽이려 하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오리들에게 쪼이고 닭들에게 맞고 모이 주는 처녀에게 발로 채이고 겨울에 굶주려 죽는 것보다 차라리 저 새들에게 죽는 편이 나아." 못생긴 새끼 오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물 속으로 날아 들어가 아름다운 백조들을 향해 헤엄쳐 갔다... 가엾은 못생긴 새끼 오리는 서글프게 이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맑은 물 위에 비친 모습은 못생기고 볼품없는 진회색의 오리가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백조가 아닌가! 애초부터 그의 참모습은 백조였기 때문에 오리에게서 태어난 것쯤은 아무런 허물도 아니었다.(p254)' <안데르센 동화전집> 中 <못 생긴 새끼 오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고개를 숙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못 생긴 오리는 결코 자신이 '아름다운 백조'임을 알지 못했으리라. 그런 면에서 '수치심'을 유발한 작용인(作用因)에 주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보다는 변화의 계기로 삼자는 미셸 퓌에슈 교수의 말이 더 의미있게 다가오게 된다.



[사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출처 : 위키백과)


 <수치심>의 연장선상에서 지난 1996년 11월 13일에 최종적으로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를 다시 생각해 본다. 당시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일제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여론의 힘에 의해 결국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철거와 관련해서 당시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철거를 주장하는 편에서는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자 모양의 건물 구조와 나라의 혈(穴)을 끊어 놓기 위해 설치된 기초 말뚝 등의 문제등을 제기하였고, 철거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운 역사도 역사다.'라는 주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문제에 관해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조선 총독부 건물을 과연 철거했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그곳에 과연 조선 총독부 건물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로 접근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용이 다소 들더라도 자리를 옮겨 우리의 아픈 역사를 상기시켜,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조선 총독부 건물을 없애서 가장 득을 본 이들은 친일 세력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우리는 총독부 건물을 없애면서 우리의 수치심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을 깨뜨린 것은 아닌지... 청사 철거 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 잔재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수치심> 페이퍼를 마친다.


[깊이 읽기]  수치(羞恥, 부끄럼) [scham(독) honte(불) shame(영)]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 ~ 1948)는 일본의 문화와 서구의 문화를 비교하여 전자를 부끄럼의 문화, 후자를 죄의 문화로 파악했다... <수치와 수치 감정에 대하여>[SGW 10.65ff]에서 셀러는 이 현상을 인간의 독특한 실존양식에 결부시켜 생각한다. 셀러(Max Scheler, 1874 ~ 1928)에 의하면 신체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 정신적 인격이라는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 정신적 인격이라는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 ~ 1980)는 <존재와 무>제3부 '대타존재'에서 타자와의 연관에서 수치를 다루는데, 수치란 타자 앞에서의 자기에 대한 수치라고 주장한다. 


PS. 모 정치인이 자신이 국정원 돈을 받았다면 할복하겠다고 밝혔는데, 그의 말 속에서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1925 ~ 1970)가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듯 하다. (다만, 할복명분의 스케일이 상당히 차이나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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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9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9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9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9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하라 2017-11-19 14: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수치심을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인가요? 하지만 애초에 수치스러울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네요.

겨울호랑이 2017-11-19 19:28   좋아요 3 | URL
^^: 네 저도 이하라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평소에는 수치스러움을 유발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항상 유념해야겠지요. 다만, 그런 행동을 한 후에는 수치스러움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기 보다 이를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나와같다면 2017-11-19 2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미셸 퓌에슈 교수의 <수치심 La honte>을 저에게 필요한 적절한 시기에 잘 읽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속에 제일 많이 들린 소리는..
사도 바울의 ˝ I‘m not ashamed ..˝ 였어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겨울호랑이 2017-11-19 22:20   좋아요 3 | URL
^^: 미셸 퓌에슈 교수가 일상의 행위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이 시리즈는 곁에 두고 읽기 좋은 책들이라 생각됩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끄러움 역시 일상의 일부인 것 같아요. 부끄러움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는 책 속의 말을 통해 작은 격려를 받게 됩니다. 나와같다면님께서도 아마 같은 느낌 받으신 것 같네요...^^:

2017-11-20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0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11-20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정치인 중에 할복 근처에 간 자도 없다는, 커터칼로 살짝 긁은 1인이 있었다나 뭐라나 김어준 어록이...

겨울호랑이 2017-11-20 13:50   좋아요 1 | URL
사람이 죽어서는 안되겠지만,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이들을 보면 정말 한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라쇼몽>에 나오는 사무라이 정도 수준 밖에 안되는 이들이라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