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생활사박물관 : 선사생활관>은 선사시대(prehistoric age)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과 문화사적인 고찰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책이다. 선사시대부터 최근의 남북한 생활상까지 총 12권에 걸친 시리즈물의 한 편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보다 생생하게 선사(先史)시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좋은 리뷰들이 많기에 책의 구성이나, 내용에 대한 우수성은 별도의 언급없이 넘어가도록 하자. 대신, 이번 페이퍼 속에서는 선사 시대의 '여가 leisure' 또는 '놀이 play'와 이의 현대적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루 일과의 끝, 긴 노동과 노동 사이의 여가에 벌이는 이 같은 유희와 축제를 통틀어 "놀이"라고 부르자. "일" 다음에 찾아오는 "놀이"는 인간 생활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놀이는 단지 "일이 아닌 것"이 아니라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더욱 멋지게 해내기 위한 숨고르기이다.(p16)... 인간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여가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창조적이고 풍부한 인간으로 거듭날 기회를 더 갖는다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는 어찌보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자유로운 여가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p17)' <한국생활사박물관 : 선사생활관>


 <선사생활관>에서는 선사시대 생활을 크게 '노동'과 '놀이'로 구분한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면서, 고기잡이, 농경과 목축 등 식량획득 방법이 다양해짐에 따라 인간은 점차 삶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여유를 가지게 된 인간은 '놀이'를 통해 자신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꾸게 된다. '여가'가 주는 정신적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전쟁의 목표는 평화이고 노동의 목표는 여가이므로, 개인이나 국가나 여가 선용에 필요한 탁월함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가 선용과 마음의 계발에 필요한 탁월함 중 어떤 것은 여가를 선용할 때 작동하고, 다른 것은 노동할 때 작동한다... 속담에 따르면, 노예에게는 여가가 없고, 용감하게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는 공격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용기와 끈기는 노동에, 철학(philosophia)은 여가에, 절제와 정의감은 노동과 여가 모두에 필요한데, 여가를 즐기며 평화롭게 사는 자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1334a11~23)'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 <정치학 Politika>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노동의 목표는 여가이기 때문에, 결국 '노동'과 '놀이'로 크게 구분된 선사시대 인류의 삶은 '놀이'를 추구한 삶이라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씨족공동체 생활을 했던 선사시대 인류에게 여가의 상당부분은 '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선사시대 인류의 모습을 미진한 단계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요한 하위징아는 말한다. 놀이가 단순한 유희(play)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지한 기반이었음을 우리는 <호모 루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류학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원시 부족의 사회 생활이 아곤적/대립적 공동체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원시 부족의 정신세계가 이런 심오한 2원론과 일치한다. 우리는 그것의 흔적을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원시 부족은 프라트리아(phratriai)라고 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절반으로 나뉘어졌다.(p119)... 계절의 대(大) 축제 때 만나서 노래와 춤을 교대로 수행하는 의례적 형태로 구애를 하는 축제에서 서로 절반씩 나누어진 두 부족이나 남성과 여성의 그룹은 경쟁의 정신을 발휘하며 놀이를 하게 된다.(p120)... "겨울 축제 동안에 춤과 노래의 토너먼트에서 남자들의 모임 혹은 형제회(兄弟會)에 스며든 경쟁의 정신이 국가와 제도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었다.(p122)'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5)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놀이'가 인간 사회의 모습이 제도적으로 바뀌는 첫 걸음이었음을 우리는 <호모 루덴스>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전 시대보다 체계화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놀이'에서 즐거움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지만, 현대의 '주5일'근무 체계에서 '2일'의 주말 휴식을 기다리는 우리 모습 속에서 '놀이'와 '여유'를 추구하는 선조들의 DNA를 발견하게 된다. 석기 시대를 우리는 주로 '야만'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다. 자연의 산물 이상을 거의 생산하지 못하던 이 시대가 문명(文明)이전의 미개한 사회라는 우리의 선입견의 기원은 19세기로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모건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야만은 주로 자연이 만들어 놓은 산물 Naturprodukte을 획득하던 시기이며, 인간이 만든 생산물 Kunsprodukte은 자연의 산물을 획득하기 위한 보조 도구였다. 미개는 목축과 농경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시기인데, 인간이 활동을 통해서 자연의 산물 생산을 증대하는 방법을 습득하던 시기다. 문명은 자연의 산물을 그 이상으로 가공하기를 습득하던 시기로서 본질적인 의미에서 공업과 기술의 시기다(p47)'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 ~ 1895)<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19세기 진화론의 영향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사상의 흐름 속에서 신석기 시대는 어두운 과거에 불과했다. 과거가 어두울수록 현재의 진보는 더욱 빛이 나기에 과거는 부정당했고, 어두운 시대로 규정당했다. 유럽의 중세가 그러했듯이, 선사시대 역시 그렇게 인식되어왔다. 그렇지만, <한국생활사박물관 : 선사생활관>을 통해서 우리는 야만의 모습 대신 여유 속에서 삶을 발전시켜나간 선조들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과거의 생활 모습이,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의 생활 양식이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한국생활사 박물관> 시리즈는 의미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PS. 에스키모의 분쟁 해결 방식을 서술한 다음의 문장에서 랩 배틀(rap battle)을 연상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어떤 에스키모가 누군가에게 불평할 것이 있으면 그는 그 상대방에게 드럼 시합을 하자고 도전한다.(덴마크 어 Trommesang). 그러면 씨족이나 부족은 화려한 옷을 떨쳐입고 즐거운 기분으로 축제의 대회에 모여든다. 두 명의 소송 당사자는 번갈아 가며 드럼(북)을 치면서 상대방을 향해 야비하고 상스러운 노래를 불러댄다. 그 내용은 주로 상대방의 비행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근거 있는 비난인지, 풍자적인 말인지, 관중을 웃기기 위한 말인지, 순전한 중상 비방인지는 따지지 않는다.(p173)'<호모 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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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5 2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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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5 2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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