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을 미덕(美德)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수치심은 마음가짐보다는 감정과 더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치심은 불명예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으로 정의되며, 그 효력은 위험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유발되는 것과 흡사하다.... 사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훌륭한 사람의 특징은 아니다. 나쁜 짓을 했을 때 느끼는 것이 수치심이라면 그전에 나쁜 짓이라면 하지 말았어야 한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하찮은 사람의 특징이다. 하찮은 사람은 수치스러운 짓을 할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치스러운 짓을 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는 마음가짐이라고 해서 스스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1128b 10 ~ 28)'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 ~ BC 322)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ka Nikomacheia>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치는 하찮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感情)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으며, 훌륭한 사람은 수치를 느끼지 않도록 그런 행동을 애초에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치는 '부정적 감정'의 하나일 뿐이다. 


이에 반해 거의 동시대를 살아간 중국의 맹자(孟子, BC372? ~ BC289?)는 사단(四端) 중 하나에서 부끄러움을 언급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는 상반된 주장을 편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측은지심(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無羞惡之心 非人也 수오지심(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無辭讓之心 非人也 사양지심(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無是非之心 非人也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羞는 恥己不善也요, 惡는 憎人之不善也라.  羞는 자신의 不善을 부끄러워함이요, 惡은 남의 不善을 미워하는 것이다.' 주희(朱熹, AD 1130 ~ 1200) <맹자집주 孟子集註> 公孫丑上


 이러한 '수치심'에 대한 상반된 의견에 대해 미셸 퓌에슈(Michel Puech) 교수는 수치심을 두 사람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저자에 따르면 수치심 자체는 고통스러운 감정이지만,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으로, 감정 자체보다 그 의미에 주목하는 입장이다.


 '수치심은 강렬하고도 고통스러운 감정일 수 있다. 다른 모든 고통과 마찬가지로, 수치심  또한 그 원인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면 그 피해를 최소화하고, 거기서 해방될 수 있다.(p11)'


 미셸 퓌에슈 교수는 <수치심 La honte>에서 수치심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수치심을 신호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교훈을 얻는다면,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감정만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남들 앞에서 부끄러울 일이 있다고 해도, 정말 어려운 일은 남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수치심을 들여다보고 그 감정을 모른 척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자기 안의 수치심을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데, 수치심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일도 좀 수월해질 것이다.(p21)


 '수치심이 일종의 고통이라면, 이 감정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닐까? 고통을 신호로 보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자연계에서도 통증이라는 신체적 고통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경고 신호이기 때문이다.(p74)'


 '수치심이란 일종의 실망감이다. 실망감이란 살다보면 누구나 겪는 감정이고, 그러니 담담한 마음으로, 지나치게 호들갑떨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구나 매일 조금씩 실망하고,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만, 이런 자질구레한 실망들은 오히려 삶의 자극제, 자신이 바라는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p78)'


 단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넘어서 우리 자신을 성찰(省察)하는 거울로서 수치심을 활용한다면 우리는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 ~ 1875)의 유명한 동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저 멋진 새들에게 날아갈 테야. 그럼 나처럼 못생긴 새가 감히 가까이 왔다고 죽이려 하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오리들에게 쪼이고 닭들에게 맞고 모이 주는 처녀에게 발로 채이고 겨울에 굶주려 죽는 것보다 차라리 저 새들에게 죽는 편이 나아." 못생긴 새끼 오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물 속으로 날아 들어가 아름다운 백조들을 향해 헤엄쳐 갔다... 가엾은 못생긴 새끼 오리는 서글프게 이렇게 말하고는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맑은 물 위에 비친 모습은 못생기고 볼품없는 진회색의 오리가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 마리의 백조가 아닌가! 애초부터 그의 참모습은 백조였기 때문에 오리에게서 태어난 것쯤은 아무런 허물도 아니었다.(p254)' <안데르센 동화전집> 中 <못 생긴 새끼 오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고개를 숙여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면, 못 생긴 오리는 결코 자신이 '아름다운 백조'임을 알지 못했으리라. 그런 면에서 '수치심'을 유발한 작용인(作用因)에 주목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보다는 변화의 계기로 삼자는 미셸 퓌에슈 교수의 말이 더 의미있게 다가오게 된다.



[사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출처 : 위키백과)


 <수치심>의 연장선상에서 지난 1996년 11월 13일에 최종적으로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를 다시 생각해 본다. 당시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일제 식민 통치를 상징하는 건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여론의 힘에 의해 결국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철거와 관련해서 당시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철거를 주장하는 편에서는 일본을 상징하는 '날 일(日)'자 모양의 건물 구조와 나라의 혈(穴)을 끊어 놓기 위해 설치된 기초 말뚝 등의 문제등을 제기하였고, 철거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운 역사도 역사다.'라는 주장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문제에 관해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  '조선 총독부 건물을 과연 철거했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은 '그곳에 과연 조선 총독부 건물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로 접근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용이 다소 들더라도 자리를 옮겨 우리의 아픈 역사를 상기시켜,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조선 총독부 건물을 없애서 가장 득을 본 이들은 친일 세력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우리는 총독부 건물을 없애면서 우리의 수치심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을 깨뜨린 것은 아닌지... 청사 철거 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 잔재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수치심> 페이퍼를 마친다.


[깊이 읽기]  수치(羞恥, 부끄럼) [scham(독) honte(불) shame(영)]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 ~ 1948)는 일본의 문화와 서구의 문화를 비교하여 전자를 부끄럼의 문화, 후자를 죄의 문화로 파악했다... <수치와 수치 감정에 대하여>[SGW 10.65ff]에서 셀러는 이 현상을 인간의 독특한 실존양식에 결부시켜 생각한다. 셀러(Max Scheler, 1874 ~ 1928)에 의하면 신체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 정신적 인격이라는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 정신적 인격이라는 신체로부터 독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는 까닭에 인간은 수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 ~ 1980)는 <존재와 무>제3부 '대타존재'에서 타자와의 연관에서 수치를 다루는데, 수치란 타자 앞에서의 자기에 대한 수치라고 주장한다. 


PS. 모 정치인이 자신이 국정원 돈을 받았다면 할복하겠다고 밝혔는데, 그의 말 속에서 일본 극우 민족주의자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1925 ~ 1970)가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듯 하다. (다만, 할복명분의 스케일이 상당히 차이나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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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9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9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9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9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하라 2017-11-19 14: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수치심을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인가요? 하지만 애초에 수치스러울 일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있네요.

겨울호랑이 2017-11-19 19:28   좋아요 3 | URL
^^: 네 저도 이하라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평소에는 수치스러움을 유발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항상 유념해야겠지요. 다만, 그런 행동을 한 후에는 수치스러움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하기 보다 이를 기회로 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나와같다면 2017-11-19 2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미셸 퓌에슈 교수의 <수치심 La honte>을 저에게 필요한 적절한 시기에 잘 읽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속에 제일 많이 들린 소리는..
사도 바울의 ˝ I‘m not ashamed ..˝ 였어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겨울호랑이 2017-11-19 22:20   좋아요 3 | URL
^^: 미셸 퓌에슈 교수가 일상의 행위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이 시리즈는 곁에 두고 읽기 좋은 책들이라 생각됩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끄러움 역시 일상의 일부인 것 같아요. 부끄러움을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는 책 속의 말을 통해 작은 격려를 받게 됩니다. 나와같다면님께서도 아마 같은 느낌 받으신 것 같네요...^^:

2017-11-20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0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7-11-20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정치인 중에 할복 근처에 간 자도 없다는, 커터칼로 살짝 긁은 1인이 있었다나 뭐라나 김어준 어록이...

겨울호랑이 2017-11-20 13:50   좋아요 1 | URL
사람이 죽어서는 안되겠지만,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이들을 보면 정말 한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라쇼몽>에 나오는 사무라이 정도 수준 밖에 안되는 이들이라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