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 코벨의 한국문화 2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옮김 / 글을읽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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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佛敎)는 백제가 신라, 고구려와 맞서 싸울 때 왜를 동맹국으로 가깝게 해두려는 일종의 유인책에서 왜국에 전파한 것이다. 실제로 660년 백제가 망하게 됐을 때 왜는 구원군과 선박을 보냈지만 그것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이때 10만 명의 백제 상류계급이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이들의 도래는 일본에서 불교미술이 꽃피는 계기가 됐다. 백제 불교건축과 예술을 통해 일본에 불교문명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p42)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은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 ~ 1996)박사의 <부여기마족과 왜(倭)>에 이은 두 번째 한국문화 관련 책으로, 불교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고대 백제(百濟)시대부터 고려(高麗), 조선(朝鮮)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미친 한국 문화의 영향을 미술사 관점에서 보여준다.


[사진] 고려불화(출처 : <대고려국보전> 호암갤러리)


 이 고려불화 <양유관세음도>는 '우타오쯔가 그린 당나라 것'으로 꼬리표를 달고 있을 때 봤던 것보다 지금이 더 찬란해 보였다... 관세음의 얼굴, 옷, 보석장식 등에 구사된 고난도의 기법은 그 시대에 유행했던 고려청자의 힘든 과정인 상감기법과도 통한다. 관세음이 걸치고 있는 사라의 투명함을 사실처럼 드러낸 것이나, 거미줄처럼 섬세한 흰 비단에 짜인 금빛 작은 무늬를 그려낸 솜씨는 정말 압도적인 것이었다.(p252)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일반인들은 접하기 힘든 일본에 소재한 작품,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감상할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일본에 남은 한국 미술>을 통해 인상적인 대목은 일본에 미친 한국의 영향을 여러 방면에서 다각도로 조명하려는 저자의 노력이다. 7세기 불교미술품인 호류지의 옥충주자(玉蟲廚子)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저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근거로 내세운다.



[사진] 호류지의 옥충주자(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06584658056795227/)


  마지막 3단계를 나타내는 아래쪽 그림은 석가모니가 굶주린 암호랑이와 그 새끼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주어 먹힘으로써 짐승에게도 보시를 하는 불교 계율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의 호랑이 그림은 이 짐승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솜씨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다!' 호랑이 비슷한 살쾡이조차도 일본에는 없었다. 이로써 일본인이 그렸을 가능성은 배제된다.(p116)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또한, 일본 신사를 지키고 있는 코마이누 상(像)을 통해 이들 개가 일본 원산이 아닌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품종임을 지적한 저자의 설명은 최근 이루어진 토종개의 유전자 분석 결과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이처럼, 책 전반에 걸쳐 단순한 사실 주장이 아닌 근거를 통해 일본에 미친 한국 문화 영향이 강조되기에 저자의 설명은 보다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일본의 모든 신사는 예외없이 두 마리 코마이누 高麗犬, 고구려 개가 지킨다. 코마 高麗라는 말은 고구려를 지칭해 흔히 쓰인다.(p29)... 코마이누는 시베리아 늑대와 개의 혼혈이다. 고구려의 두뇌들이 그런 새 육종을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늑대를 개의 종족으로 기들여 인간이 통제할 수 있으면서도 사나운 수비견으로 키워냈던 것이다. 이것들은 무게가 50킬로그램에 달하고 늑대의 큰 코를 그대로 지녔다. 길고 털이 무성한 꼬리, 몸체의 긴 털과 갈기는 개보다 늑대에 가깝다.(p32)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관련기사 : http://www.newskr.kr/news/articleView.html?idxno=5665



[그림] 토종개의 계통수 분석 결과(출처 : 한국농어촌방송)


 그렇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저자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모든 주장을 찬성하기는 어렵다. 고려 후기 왜구(倭寇)의 침략으로 많은 고려 불화(佛畵)가 일본으로 약탈당한 사실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려 측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은 극심한 폐해일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밖의 반전이 있었다. 고려에 와서 양곡이나 귀금속을 훔칠 수 없을 때면 왜구들은 사찰의 값진 물건인 불화를 약탈해갔는데, 조선이 건국한 1392년 이래 억불정책이 실시되면서 조선의 절에서 이런 사치스런 불화가 더 이상 소용에 닿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본의 사찰과 신토신사에는 1백여 점의 14세기 고려불화가 보관되기에 이른 것이다.(p206)... 한국의 사찰에서는 이런 탱화를 조심성 없이 다루기도 하고 초파일 같은 날 밖에 내다 걸거나 벽에 그대로 걸어두어 비바람이나 먼지, 향불로 인한 훼손, 도난 등 여러 가지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반면 일본의 절들은 이를 아름다운 자산으로 여겨 매우 귀하게 취급하는 것이 관례였다.(p208)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수준 높은 한국 문화재를 한국인들은 제대로 관리할 수 없으니, 약탈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일본에 남아 연구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듯한 저자의 위와 같은 말은 일제 하에 식민지 경험을 한 우리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위와 같은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고대 이집트의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는 편이 카이로 박물관으로 돌려보내지는 것보다 연구목적으로는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들이 가져간 문화재가 고국으로 반환되고 있는 현실은 문화재의 연구나 보존의 효율성보다 약탈이라는 취득방법이 부당하다는 인식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는 이러한 부분은 고려되지 않고 있기에 아쉽게 느껴진다.


 한국의 절에 무속적인 흔적이랄 수 있는 대들보 상량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절마다 있는 산신각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속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얼른 이해할 것이다.(p59)... 한국역사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종교적 타협'이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불교적 요소, 도교적인 것, 조상 숭배라는 유교적 요소가 동시에 나타난다. 오늘날의 절 건축에도, 천장 대들보에는 화려한 단청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남녀 무당들 그림이 선명히 그려져 있다.(p60)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는 위와 같이 한국미술의 특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외부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의 토대 위에서 받아들였다.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기독교의 경우를 보더라도, 서양의 기독교와는 다른 한국 기독교만의 특징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부분은 명확해진다. 이러한 '타협'을 통한 외부 문화의 수용이 한국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들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과거의 것을 잘 보존하지만 정체된 일본 사회와는 다른 문명의 특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과거를 무조건 비판하고 새로운 것만 추종하는 태도 또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은 일본에 미친 한국 문화의 영향을 미국 미술사가의 입장에서 잘 정리한 책이면서도, 한국인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느껴지는 한계가 있는 좋은 책이라 생각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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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6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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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6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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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7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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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7 1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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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기마족과 왜(倭)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옮김 / 글을읽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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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족(扶餘族)은 말을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 왔으며 창, 칼 등 월등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손쉽게 원주민을 제압하면서 규슈에서 나라 야마토 평원으로 동진(東進)해 나갔다... 이들은 군사집단이었으며 새로이 정착할 신천지를 찾아 일본에 온 것이다. 그 때문에 말을 대동해 갈 필요가 있었다. 일본에는 초기에 말이 없었다.(p38) <부여기마족과 왜>中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 ~ 1996)교수에 의하면 3세기 중국 대륙에서 선비족(鮮卑族)과 부여족의 다툼이 있었다. 여기서 밀려난 부여족이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었고, 일부가 일본열도로 건너가 정복활동을 벌이게 된다. 코벨 박사에 의하면 이러한 '부여족의 왜 정벌' 이후 일본은 비로소 중앙집권 국가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부여족의 왜 정벌은 일본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30여년 간 지속된 부여족 지배는 일본에 처음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8세기 나라(奈良)의 사가들이 한국의 왜 침입을 부정하고 반대로 왜의 한국 침입으로 바꿔서 설정한 것은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3세기 중국의 사성 <삼국지> <위지>에 "이 시기 왜에 말(馬)이 없었다"고 기록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p168) <부여기마족과 왜>中


 책 본문을 통해 코벨 박사는 부여족의 일본 정벌을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저자에 의하면, <일본서기 日本書記>의 진구황후(神功皇后, 169 ~ 269)의 신라 정벌은 부여족(가야)의 왜 정복이 거꾸로 기술된 것의 이러한 역사 왜곡의 대표적 사례다.


[사진] 진구 황후(출처 : 위키백과)


 4세기의 가야가 후일 신라에 병합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역사책에 나오는 신공왕후의 원정로가 근거를 갖제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미마나(任那, 가야를 의미함)정복' 이라는 일본 역사가의 주장을 신공이 고령으로부터 남쪽으로 진격하여 백제 군사와 합류한 것으로 풀이하면 이치에 닿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p79)<부여기마족과 왜>中


 흥미로운 것은 신공의 조상이 광대한 압록강 너머 북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암시가 <일본서기>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신공이 '신라왕'을 굴복시키자 신라왕은 '아리나례(阿利那禮)강이 거꾸로 흐를 때까지' 신공에게 복속할 것을 맹세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일본서기>를 영역한 애스턴(W.G. Aston)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도모할 아무 이유가 없던 입장에서 아리나례강을 현재 북한 국경의 서쪽 절반을 가로질러 흐르는 압록강으로 생각했다.(p79)<부여기마족과 왜>中


 그렇다면, 어느 시기에 일본의 역사 왜곡이 구체화되는가. 저자는 그 시점을 백제 멸망 이후 약 10만명에 이르는 유민이 일본으로 흘러간 때로 추정한다. 도래인(渡來人)의 처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제 유민들이 왜(倭)를 일본(日本)으로 만드는 작업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백제학자들은 일본의 구비관(口碑官)들이 부르는 노래역사에 나오는 사건과 이름을 백제사에 결부시키고 일부는 가야사와 신라사까지 차용해 일본사로 바꿔치기 했다. 그들은 '일본국의 창시자'라는 신비한 영웅담을 만들어냈다. 여기엔 부여-가야의 왜 정벌에서 얻어진 구체적 이야기들을 따다 쓴 만큼 사실적인 내용이 있다. 이런 것들이 짜집기되어 일본사는 서기전 660년부터 비롯된다는, 왕실에서 만족할 만큼의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졌다.(p185) <부여기마족과 왜>中


 코벨 박사의 <부여기마족과 왜>의 내용은 이처럼 일본 문화에 미친 부여족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은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4세기 이전부터 이미 한반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다.


 초기에 왜로 이주한 사람들이 타고 간 배는 4세기 기마민족이 타고 간 배보다 작았다. 그래도 기마족들처럼 왜를 침입하려고 배에다 많은 말을 싣고 가는 모험은 하지 않았던 만큼 무사히 왜 땅에 건너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出雪)였는데, 이곳은 여러모로 신라와 관련된 곳이다.... 이들 대부분은 바람과 바다에 생활을 의지하는 어민들로, 해의 신보다는 바람의 신을 더 우러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통일국가가 되고 나서 바람의 신 스사노오를 모신 이즈모 신사가 해의 여신을 받드는 이세 신사에 밀려 지위가 두 번째로 낮아졌다는 사실은 초기 이주사에서 중요한 것이다.(p186) <부여기마족과 왜>中


 4세기 이전 기마민족보다 먼저 일본에 진출해 있었던 이들은 누구일까. 위의 내용에 따르면 우리에게 일본 원주민으로 알려진 아이누족보다 먼저 이주한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북한 사학자 김석형에 의해 뒷받침된다.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의 분국으로 세 그룹의 한국인 사회가 건설돼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신라와 이즈모이며 4~5세기에 들어서는 백제가 자주 거론된다. 고구려가 등장하는 것은 552년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뒤의 일이다.(p138) <부여기마족과 왜>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4세기 이전 신라에서 바람의 신을 모시던 집단이 일본 원주민을 몰아내고 일본 열도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4세기 가야로 대표되는 부여족의 일본원정이 있은 후에는 백제계가, 6세기 무렵부터는 고구려의 세력이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정리될 것이다. 그렇지만,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언제부터 한반도인들의 일본 진출이 있었는가에 대한 조망 없이, 중반부에 해당하는 부여족의 진출부터 다루고 있다. 책에서 4세기 이전 신라인들의 일본 진출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지는데, 이는 일본의 조몬 시대/야요이 시대에 고대 한인(韓人)들의 영향력은 과소 평가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부여기마족 이전 신라인들의 일본 진출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었을까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아쉽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대 한반도인들의 일본 이주사(移住史) 중 일부인 부여족의 왜 정복을, 미국인인 저자가 저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부여기마족에 의해 중앙집권국가체제를 만들고, <일본서기>의 편찬을 통해 한반도와 절연(絶連)한 일본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가. 이어지는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는 그 다음 이야기가 이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은 그 영향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책의 내용이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리뷰에서 하기로 하고, <부여기마족과 왜(倭)>의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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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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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2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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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 이들이 상호간 미친 영향에 대해 알기쉽게 정리한 지리학 입문서. 책은 자연 환경이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고 있지만,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임을 잘 보여준다. 쉽게 씌여져 잘 읽히지만, 1930년대 씌여진 책이라 시대적 한계가 있음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철도 중심의 교통 체계 설명은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지엽적인 몇몇 부분을 제외한다면 전체적인 반 룬의 통찰력은 시대를 뛰어넘는 부분이 있다. 근대화 시기 열강에 의해 수탈되고 있던 중국을 바라보며 예언처럼 던지는 그의 말은 수십 년이 지난 우리에게 더 다가오는 바가 있다. 개인적으로 재러드 다이아몬드의「총, 균, 쇠」를 읽기 전 지리 관련 지식을 쌓는다면 더 좋은 독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프랑스는 거의 10세기 동안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이 별도의 네 국경을 방어해야 했다면 프랑스는 오로지 서쪽 국경을 방어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사실이야말로 프랑스가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앞서서 고도로 중앙집권화 된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요인이 아닐까 싶다.(p170)

모두 멕시코만류가 만들어놓은 결과다. 알래스카가 59만 제곱마일의 영토에 6만의 인구를 품고 있는 반면에, 세 나라를 합쳐도 43만 제곱마일에 지나지 않는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에는 1,2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p231)

그렇다면 무엇이 원인이었을까? 나는 그 원인이 모든 예상을 뒤엎는 변덕스런 인간적 요소, 즉 모든 자연적 이점을 물리적 무능으로, 승리를 패배로, 용기를 따분하고 매우 불쾌한 운명에 대한 무덤덤한 수용으로 탈바꿈시킨 어떤 인간적 요소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p270)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향후 10년 내지 15년 사이에 무슨 일이질지 알지 못한다. 십중팔구 상황이 매우 많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련한 중국이 행렬을 따라잡기에는 첫 발걸음을 너무 늦게 뗀 탓이다. 하지만중국이 따라잡는다면? 오! 신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 우리받게 될 대가는 얼마만큼이나 될까? 도대체 얼마큼일까!(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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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24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메리크리스마스 하소서! 알라딘에서 소통하게 되어 너무 감사드리고요 늘 건강하십시오 ^^

겨울호랑이 2018-12-24 18:1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 역시 카알벨루치님을 알게 되어 행복한 한 해 였습니다. 카알벨루치님께서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munsun09 2018-12-24 18: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해도 책으로 만난 좋은 인연에 감사드리며, 내년도 좋은 책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18-12-24 18: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munsun09님과의 짧았지만 즐거운 대화로 행복한 2018년이었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되세요!^^:)

베텔게우스 2018-12-24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18-12-24 23:3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베텔게우스님께서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2018-12-25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5 0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홀든의「윌리엄 셰익스피어」를 통해 우리는 셰익스피어 작품 37개에 녹아있는 당대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필멸의 작품이 불멸의 작품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지금 숨쉬고 살아가는 지금을 우리 삶에서 의미있는 시간으로 가공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몫이리라. 여기에 곁들어진 셰익스피어 작품의 회화는 우리로 하여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 읽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기 전 배경을 이해하기 좋은 책이라 여겨진다.

다만, 영국 저자의 세익스피어에 대한 감싸기식 해석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겨진다. 대표적으로 「베니스의 상인」을 통해 드러난 셰익스피어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보다 긍정적으로 묘사한 저자의 관점은 책을 읽으며 우리가 유념해야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틀림없이 그는 또한 자신의 전원적 유토피 아사람들이 "황금의 세계에서 그들이 그러했듯이 무심하게 세월을 흘려보내는 곳- 인 아든 숲‘ 의 이름을 끌어들임《뜻대로 하세요》 1막 1장)으로써, 애덤 역을 맡은 것만큼 이나 즐거운 마음으로 어머니의 고향에 영광을 돌리고 또 행복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회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줄리어스 시저》의 저변을 감싸고 있는 들끓는 듯한 시민사회의불안한 기운은 1599년 여름 런던의 불안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베니스의 상인》은 유태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이비 기독교도들의 잘못된 도덕적 가치관을 비판하기 위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유태인에 대한 당시 영국 사회의 인종적 편협성을 그대로 반영하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샤일록을 묘사함으로써 셰익스피어는 유태인이 받고 있는 수난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그들에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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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1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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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또 한 축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든 축일 가운데 가장 거룩하고 놀라운 축일입니다. 그날을 모든 축일의 머리요 어머니라고 불러도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무슨 축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태어나신 바로 그날 입니다.... 그런즉, 한 근원에서 여러 강물이 시작되듯이,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이 모든 축일이 비롯합니다.(p98)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AD 349 ~ 407)<교부들의 성경 주해 : 신약성경4> 中


 크리스마스(Christmas)는 우리에게 기독교의 명절로만 여겨지고 있다. 물론, 크리스마스가 기독교에서 성탄절(聖誕節)로 큰 축일임은 분명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동지(冬至)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막연하게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동지를 맞아 크리스마스와 동지와의 관계에 대해 <아시모프의 바이블>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성탄 축일이 12월 25일로 확실히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목자들이 심한 추위 속에서 그리고 어쩌면 한껏 쌓인 눈 속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무슨 근거로?... 중요한 것은 루가와 마태오가 어떤 방식으로도 성탄일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12월 25일인가? 그 해답은 천문학과 로마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p364)<아시모프의 바이블 : 신약, 로마의 바람을 타고 세계로 가다>中


 우리에게 SF 작가로도 유명한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1992)는 자신이 저술한 성경 해설서에서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명을 위와 같이 시작한다. 그를 따라가기 전 먼저 우리는 고대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동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 새해는 봄에 시작하는 것이 더 좋을 텐데 어째서 추울 때 시작하는지 그 까닭을 말씀해 주십시오.(150)... 그러나 그분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다음 두 행으로 요약해서 말했습니다. "동지는 묵은 태양이 새 태양으로 바뀌는 날이라 태양도 한 해도 똑같이 그때 시작되는 것이라오."(163) <로마의 축제들 제1권>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BC 43 ~ AD 17)는 <로마의 축제들 Fasti> 속에서 야누스(Janus)의 입으로 위와 같이 동지에 대해 말한다. 한 해의 시작이 동지로부터 시작된다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고대 로마에서 동지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아쉽게 <로마의 축제들>은 1월부터 6월까지의 축제를 설명하기에, 동지에 행해지는 로마 축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아시모프의 바이블>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동지는 '태양의 탄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을 기념하는 큰 명절이었다. 로마 시대에는 3일 동안(나중에는 7일 동안)동지를 축하했다. 이 축일은 옛 로마의 농경신인 '사투르누스 Saturn'를 기리는 뜻으로 '사투르날리아 Saturnalia'라고 불렀다. 사투르날리아에는 죽음을 유예받고 되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축일답게 그야말로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축제와 잔치와 노래와 선물 주고받기를 위해 모든 공사(公事)가 중단되었다.(p365) <아시모프의 바이블 : 신약, 로마의 바람을 타고 세계로 가다>中


 이와 같이, 고대 로마에서 동지는 한 해의 시작이었고, 어둠에서 빛이 탄생한 큰 명절이었다. 동지가 가지는 위와 같은 이미지는 어두운 세상을 구원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의 이미지와도 잘 맞았지만, 결정적으로 신앙(信仰)의 확산, 복음의 전파라는 현실적인 필요가 '크리스마스=동지'가 되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로마 시대의 처음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는 페르시아에 뿌리를 둔 태양 숭배의 한 형태인 미트라 신앙 Mithraism과 경쟁해야 했다. 미트라 신앙에서 동지는 당연히 큰 명절이었고, AD 274년에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12월 25일을 태양탄생일로 지정했다.... 지도자들의 판단에 따라, 그리스도교는 교회의 기본교리에 배치되지 않는 선에서 이교도 풍습에 순응했다.... 성탄일이 그렇게 정해지자, 개종자들은 몸에 밴 사투르날리아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고도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태양 Sun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Son을 기쁘게 영접하기만 하면 되었다.(p366) <아시모프의 바이블 : 신약, 로마의 바람을 타고 세계로 가다>中


 결국, 우리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일반 대중들의 속(俗)에서의 즐거움과 교회 교리의 성(聖)이 결합된 결과물임을 확인하게 된다. 동시에, 이교도 풍습에 대한 배척이 아닌 포용이 초기 기독교 확산에 긍정요인이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지가 유럽이나 중동(中東) 아시아만의 명절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우리 전통 문화에서도 동지는 매우 중요한 명절이었고,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동지를 '다음해가 되는 날(亞歲)', 또는 '작은 설'이라 해서 크게 축하하는 풍속이 있었다. 궁중에서는 이 날을 원단(元旦)과 함께 으뜸되는 축일로 여겨 군신과 왕세자가 모여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으며, 해마다 중국에 예물을 갖추어 동지사(冬至使)를 파견하였다. 또 지방에 있는 관원들은 국왕에게 전문(笺文)을 올려 진하(陳賀)하였다... 그 밖에 고려, 조선 초기의 동짓날에는 어려운 백성들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출처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가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을 따라 청나라를 방문해서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을 만나고 청나라 문물에 눈을 뜨게 된 계기도 동지사 파견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동지사 파견을 통해 이루어진 인적 교류와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은 비록 옹심이 넣은 단팥죽 먹는 날 정도로 알려진 동지이지만,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는 이들도 기쁜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모습을 통해 여전히 동지는 우리에게 의미있는 명절임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일년 중 가장 밤이 긴 이 날을 지내고 이제는 낮이 길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찬 마음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동지 날 깊은 밤, 크리스마스와 새해에 2019년에 대한 희망을 품으며 이번 글을 갈무리한다.


PS. 크리스마스가 동지라면, 교회력에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일은 하지(夏至)에 해당하는 6월 24일이다. 이는 예수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임신 개월을 고려하여 계산한 결과이지만, 교회에서는 이 역시 의미가 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 : 30)'의 구절처럼 하지 이후 점점 짧아지는 해는 교회에서 바라보는 세례자 요한의 존재를 잘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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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3 0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3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wasulemono 2018-12-23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12-23 08:58   좋아요 1 | URL
wasulemono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

oren 2018-12-23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어제 오전에 산책을 겸해 정발산 아래에 있는 여래사(如來寺)라는 절에 갔다가 수많은 인파를 보고 깜짝 놀랬더랬습니다. 웬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절로 모여드는지, 법당에 올라가 봤더니 오백은 족히 넘을 듯하고, 천 명 가까이 될 지도 모르는 엄청난 인파의 사람들이 그곳을 뺴곡히 채우고 예불을 올리고 있더군요. 절을 찾을 때마다 너무나 한가하고 고요한 모습만 봐온 터라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더군요. ‘이건 마치 크리스마스를 앞둔 교회를 빼닮았군.‘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하고 아무한테나 물었더니, ‘오늘이 동지잖아요. 일년 중 큰 행사날이지요.˝ 하더군요. 동지가 불교에서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날인 줄도 어제 처음 알았는데, 바로 그 동지가 크리스마스와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까지 겨울호랑이 님 덕분에 자세히 알게 되니, 동지가 꽤나 흥미로운 날이구나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12-23 14:26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불교에서도 동지가 중요한 날이었군요. 저도 oren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문화권마다 크고 작은 명절이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그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oren님, 포근하고 행복한 일요일 오후 되세요!

2018-12-23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3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