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관습과 어긋나는 일을 최대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그런 행동도 새로운 관습으로 정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관습을 뛰어넘는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해야만 좀 더 나은 행동 양식, 그리고 사람들이 널리 따라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관습을 창조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이런 말을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요성이 탁월한 정신적 능력을 갖춘 소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 어떤 특정인 또는 소수 사람들의 생각에 맞춰져 정형화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his own mode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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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유성 문제가 선천성에 관한 문제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유성 자체는 정당화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개념, 믿음, 능력을 날 때부터 소유하고 있는지에 관한 시간적 개념일 뿐이다. 그렇지만 선천성 범주는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상관없이 믿는 일이 정당화되는 진리들을 명확히 드러낸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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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 개정판, 원문 영어 번역문 수록 현암사 동양고전
노자 지음, 오강남 풀어 엮음 / 현암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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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19 바이러스 대확산 이전에, 우리는 항상 바쁘게 움직였다. 대부분 비슷한 시간에 일찍 집을 나와 학교나 일터로 향했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저녁쯤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이 같은 사회의 루틴을 바이러스는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제 우리는 집에서 학교 수업을 듣고, 회사 일을 한다. 움직임의 범위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어떤 방식이 각자에게 맞는지를 떠나 모두가 혼란스러운 적응기를 겪어야 했다. 백신 접종이 곧 시작된다지만 바이러스 변종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소식도 들려오니, 이 상황이 언제 마무리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할 일이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을 잠시 뒤로하고 『도덕경』을 펼쳐 읽었다. 『장자』와 함께 노장사상의 대표 격인 『도덕경』은 은유적인 책이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책이 아니라 시적이며 직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보이는 세상의 이면에서 작용하는, 오감으로 인식할 수 없는 오묘한 무언가를 포착하려 한다.

『도덕경』을 읽고 소감을 적기란 다소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이분법과 대립의 초월을 말하는 글을 두고 또 다른 이분법적 시각을 내보이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책에 풀이를 쓰고 엮은 오강남은 이 책에서 ‘『도덕경』의 사상 자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주로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 보려고 한다.’(8p)고 머리말에 썼는데, 나도 저자의 의도에 맞추어 오늘날 나의 삶과 연관 지으며 각 장을 읽어보기로 하였다.

 2장(24p)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

따라서 성인[자유인]은 무위無爲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합니다.

 처음에 이를 읽었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면 아무것도 추구하지도 말고 그저 멍이나 때리고 있으란 말인가?’ 그렇지만 계속 곱씹어 보니, 행동하면서 그러한 가치 인식 자체를 잊고서 행위를 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분별이 인위적이고 억지스러운 행위를 낳기 때문이다. 모든 평가하는 말에는 특정 기준이 내포되어 있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대상은 자연히 그 반대의 평가를 얻는다. 가령 어떤 대상에 ‘이것은 귀하다’라고 평가를 하게 되면, 그 반대 성질을 가진 대상은 자연히 ‘천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즉각적인 행위가 필요한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행동을 좋은 쪽으로 보이도록 가려서 하게 되어 부자연스러움을 낳는다.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이것은 나한테 좋은 일이야!’ 하고 생각하면, 그와 반대되는 일은 자동으로 ‘안 좋은 일’이 되고, ‘나는 지금 행복해!’라고 했을 때 그 감정이 지나가면 자연히 불행해진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정적인 만족을 위주로 하는 아타락시아를 중시하고, 스토아학파가 감정의 동요 없는 이성적 태도인 부동심을 추구하였듯 『도덕경』에서 말하는 성인은 분별을 초월하여 자연스러운 무위無爲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동으로써 세간의 관점에서 좋은 일이 생겨도 과시하지 않는다. 감정의 측면에서도 의식적으로 행불행을 구분하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감정의 측면에서의 초월을 마음 자세로써 내 삶에 적용해본다면, 복잡한 상황에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지금과 같은 코로나 대유행 시기에 그렇다. 사실 나는 때때로 마스크와 모임 제한이 없었던 코로나 대유행 이전의 일상이 그리워진다. 그러나 비록 일상에 불편함이 생겼을지라도 마음마저 행복감을 빼앗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경』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코로나 때문에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코로나가 종식되어야만 행복해질 것인데, 지금 상황을 보면 그런 일이 금방 일어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진정한 마음의 자유는 있는 그대로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할 일을 할 때 비로소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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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에서 ‘성인聖人‘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도덕경』 전체에서 약 30번 정도 사용되는 중요한 말이다. 어원적으로 귀가 밝은 사람, 귀가 밝아 보통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도 잘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성인이라고 하면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성인의 본래 뜻은 이런 윤리적 차원을 넘어, 말하자면 ‘특이한 감지 능력의 활성화‘를 통해 만물의 근원, 만물의 ‘참됨‘, 만물의 ‘그러함‘을 꿰뚫어보고 거기에 따라 자유롭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 『도덕경』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형이다.- P27

이런 성인은 ‘무위無爲‘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무위‘ 라는 것은 『도덕경』에서, 그리고 『장자』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행동 원리다. 따라서 앞으로도 계속 등장한다. 무위란 물론 ‘행위가 없음(non-action)‘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 도식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 보라고 하는 행위, 자기 중심적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natural)너무 자발적(spontaneous)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無爲之爲‘, ‘함이 없는 함‘ 이라는 것이다.- P27

"말이 많으면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은 『도덕경』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훈이다. 일상 생활 중에 말이 많으면 그만큼 실수하기 쉽고 쓸데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 말 많은 것이 좋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도같이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는 뜻이리라.- P41

하늘과 땅은 영원한데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합니다.

나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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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1-23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끼는 책 중 하나입니다. ^^

베텔게우스 2021-01-24 00:20   좋아요 0 | URL
우왓, 그러시군요!ㅎㅎ 저도 이 책 많이 아끼게 될 것 같아요. 단편적인 구절들로만 접해보다가 처음으로 제대로 읽고있네요. 꾸밈없고 담백한 글들이 참 좋습니다 ^^
 

일반적으로 나는 특정 인식론 이론을 옹호하지 않고 우리가 논의한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대안의 반응을 독자에게 제시함으로써 중립을 지키려 했다. 그럼에도 이 책 여기저기서 어떤 연구방식에 대한 나의 선호가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첫째, 시종일관 특정 입장에 찬동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면 많은 보호막을 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 것처럼 보인다‘, ‘…로 보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라고 주장했다‘ 같은 표현을 너무 많이 쓰게 된다. 둘째, 당신은 이 논쟁들이 현재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논쟁들이며, 나와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달라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 P16

우리의 선천적 추론은 오류불가능하지 않으며, 우리가 이런 식으로 도달한 결론들을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당신은 어떤 선천적 주장을 거부하는 쪽으로 이끌릴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선천적 주장이 당신의 다른 선천적 언질들과 부정합하기 때문이거나, 모순적인 경험적 증거 때문이다.- P60

존 로크는 이 결론에 대한 논증을 제시한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본유적 지식을 소유한다면, 모든 사람에 의해 관련된 진리들이 알려질 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음이 분명하다. 많은 ‘어린애, 천치, 미개인과 성인 문맹자‘는 덕, 신, 그리고 본유적이라고 말해지는 다양한 다른 선천적 진리들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지식은 - 만일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다면 - 경험을 통해 획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강력한 논증이 아니다. 이성주의자는 많은 사람이 그러한 진리들을 명시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을 승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러한 지식을 무의식적으로 (‘암암리에‘ 라고 할 수도 있다) 소유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보편적 합의가 없다는 사실은 본유적 지식의 존재를 거부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어떤 사상가들은 그러한 진리를 표현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들의 행동은 그것들이 실제로 알려진다는 것을 드러낸다. 영화 「야생의 아이」 (L‘ Enfant Sauvage, 1969)는 늑대에 의해 길러진 실제 아이의 사례를 기초로 하고 있다. 영화의 한 부분은 그가 본유적인 도덕적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데, 비록 이것이 그가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는 경우에 따라 벽장에 갇히는 처벌을 받는다. 한 번은 잘못 행동하지 않았는데도 그에게 이런 처벌이 행해지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그는 보통 이상으로 버둥거린다. 이것은 그 아이가 대우가 정당하지 못함을 안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이것은 그가 야생에서 배울 수 없었던 어떤 것이다. 본유적 지식은 태어날 때부터 소유되는데, 올바른 종류의 교육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지식의 소유를 의식하게 되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외부로부터의 가르침은 단지 이미 거기에 있었던 것을 소생시킬 뿐이다‘ (Leibniz, 1981, 76면).
독특한 이성주의자 전략은 사고자들이 어떤 유형의 지식을 획득하려는 본유적 성향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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