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실패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전통 사회와 현대사회의 본질적인 차이에 대해 놀라운 발견을 했다. 전통 사회의 경우,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생계 수단의 진로가 신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개인적인 성취에 대한 기대가 적었기 때문에 실패의 순간이 닥쳐도 괴로움의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좌절이 한 인간으로서의 가치 전체에 대해 내려지는 평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완벽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불운한 일이 일어나도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꿇고 하늘에 애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뒤르켐은 현대사회가 스스로 실패를 인정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잔혹한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낙오자들은 더 이상 불운 탓을 할 수 없으며, 내세에서 구원받으리라는 희망도 품을 수 없었다. 마치 책임질 사람은 오로지 한 명뿐이고 적절한 대응도 하나뿐인 듯 말이다. 현대성에 대한 중요한 고발장이라 할 수 있는 책에서 뒤르켐이 밝힌 것처럼, 현대 사회의 자살률은 전통 사회의 열 배에 이른다. 현대인은 성공에 더 많이 열광할 뿐만 아니라 실패할 경우 훨씬 쉽게 목숨을 끊는 경향이 있다. - P15
이론적으로 사람이 세상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던 마지막 시기는 1450년경이었다. 우리는 정말 많이 알면서도 참으로 적게 이해한다. - P17
6—오두막
현대 지성사를 이끈 수많은 인물이 세상에서 고립된 곳으로 물러나 은둔함으로써 혼돈과 거리를 두었던 것, 그리고 그곳에서 혼돈을 이해하고자 시도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니체는 스위스 알프스의 오두막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 피오르의 오두막으로, 하이데거는 ‘검은 숲‘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쓴 글은 전형적이지 않을지 모르나, 그들 내면의 혼란에는 전형적인 측면이 있었다. 앞으로도 우리가 오두막에 살 일은 없겠지만, 우리에게도 오두막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날카롭게 감지하고 있다. - P18
7—감성
우리는 계속해서 웃으라는,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즐겁게 지내라는, 휴일에는 환호성을 지르라는, 살아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런 요구가 없어도 이미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데 말이다. 현대는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권리인 울적할 권리를, 비생산적일 권리를, 퉁명스러울 권리를, 혼란스러워할 권리를 박탈했다. 행복이 표준 상태여야 한다는 주장이야말로 현대가 우리에게 저지른 핵심적인 부당 행위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현대 미국이 압도적인 악당을 만들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언급한 치어리더의 우두머리 격인 악당은 바로 월트 디즈니다. - P19
하지만 소비라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인류가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정확히 구별하는 데 유난히 서툴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번성하는 데 꼭 필요한 것과 겉보기에는 매혹적이되 사실 알고 보면 자신을 해치거나 손상시킬지 모르는 것 사이의 차이를 제대로 식별하는 데 이례적으로 형편없다는 사실은 소크라테스 이래 철학의 근본 원리였다. - P30
우리는 소비의 주된 문제점을 (흥정에 실패한다거나 하는) 가격의 측면이라는 틀에 넣어 바라보지만, 오류는 더 근본적인 데 있을지 모른다. 성공적인 지출은 우리가 획득한 것과 느끼는 방식 사이의 내밀한 연결고리를 파악하는 데 달려 있다. 우리가 쓸모없는 제품(이는 에클레어일 수도, 주택이나 신발, 교육일 수도 있다)을 고르는 까닭은 자신의 본성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불완전한 소비자로 나아가는 이유는 삶의 다른 많은 영역에서 실수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다. 즉 우리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훈련받지 못한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 P30
하지만 심오한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가 무엇에 돈을 쓰는가는 중요하다. 수십억 소비자의 선택이 모여 사회의 성격과 삶의 유형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더 나은 종류의 수요와 더 나쁜 종류의 수요라는 것이 존재한다. 총기에 대한 수요는 교육에 대한 수요보다 덜 ‘바람직한‘ 것이다. 건강식에 대한 수요는 옥수수시럽을 듬뿍 뿌린 디저트에 대한 수요보다 ‘더 나은‘ 것이다. - P38
사실, 렘브란트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듯, 우리는 결점 많고 연약한 이들을 가장 깊이 사랑하게 된다. - P48
현대 광고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늘 긍정적인 메시지만 전달하려고 하고, 슬프거나 우울한 느낌을 주는 광고를 거부하는 것이다.
삶이라는 상태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커다란 슬픔이나 상실을 겪지 않고 보내는 날이 거의 없다. 세상 모든 게 근본적으로 슬픔에 괴로워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가려면 많은 특권을 누리거나 시야가 좁디좁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광고는 마치 활기, 평온, 낙관주의가 일반적인 상태인 듯, 우리는 항상 오해받지도 않고 좌절하지도 않으며 죽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반가이 인사를 건넨다. 광고 작업은 물건 구입으로 해결되지 않는 영혼의 침체 상태에 대한 두려움을 전제로 한다. 마치 도취한 행복감 외에 다른 마음 상태를 인지하는 게 상업 사회 전체를 한순간에 붕괴시키기라도 하는 듯 군다. 하지만 이런 성마른 감정과 태도는 우리가 슬플 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우리의 기분에 공감해 주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즐겁게 해주거나 빠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를 느끼지 않고 품위 있는 삶 속에서도 슬픔, 고독, 혼란이 자리 잡을 적법한 자리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크게 감사하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 P51
따라서 물질적 대상이 성취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우리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노력과 이해가 중요하다. 안정은 특정 목적지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노천탕에 몸을 담근다고 해서 찾아오지 않는다. 오랫동안 묻혀 있던 불안의 희미한 근원을 시간을 들여 끈기 있게 탐구함으로써 얻을 수있다. 마찬가지로, 우정이란 특정 상표의 청량음료에서 마술처럼 출현하지 않는다. 우정은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그 누군가의 주변에 머물며 담대하게 약점을 드러내고, 그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해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요구한다. 화목한 가족은 새 시계를 획득한다고 해서 완성되지 않는다. 사춘기의 수많은 시련 앞에서 발휘할 수 있는 인내심, 그리고 일시적으로는 긴장과 비난을 수반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적절한 선을 그을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 P64
역사에서는 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신중하게 그러모은 최악의 사건에 규칙적으로 노출된 적은 지금껏 없었다. 매일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공포의 강물에 몸을 적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문은 여간해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별난 가능성을 열심히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이 이 행성을 디스토피아적 늪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쳤다. 그곳은 낯선 사람들이 끊임없이 여학생을 유괴하여 토막을 내는 곳이었고, 아기들이 밤마다 납치되는 곳이었으며, 물이 불어난 싸늘한 강에 기차들이 노상 떨어지는 곳이었고, 모든 간호사가 소아성애자이며 모든 정부 관리자가 사기꾼인 곳이었다. 그리하여 신뢰하거나 희망을 품거나 휴식하거나 영감을 얻는 것 따위가 터무니없는 일이 되어버린 장소로 여기도록 가르친 것이다.
신문은 사건을 보다 명확히 살펴볼 계몽의 도구인 척했지만, 결국은 실제 삶의 모습을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신문은 대부분 사람이 친절하다는 사실을, 기차는 대부분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정부에서도 감동적이고 훌륭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날들은 조용히 별일 없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대서양 횡단 케이블, 기자회견, 해외 지국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문은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사람, 기술, 그리고 정부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그리하여 매일 뉴스를 접할 방법은 없었지만 자신의 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현실을 그려낼 줄 알았던 중세 시대의 문맹 농부보다도 더 아는 게 적은 상태가 되었다. - P71
신문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이에 대한 가장 현명한 조치가 현대 사회에서는 일어날 확률이 낮을뿐더러 마치 금기처럼 들리는 조치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조치란 바로 귀를 막는 것, 하다못해 좀 덜 듣는 것이다. 온갖 불법행위와 무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재무부 관리들의 사진에다 대고 호응 없는 연설을 계속 해대지 않는 것, 철도 노선의 전화로 인해 다음에 벌어질 일이 무엇일지 자꾸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과 그 외의 다른 수많은 문제들이 중요하긴 할 테다. 하지만 신문이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사실 이런 문제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는 정부의 혼란을 정리해야 하고, 경제에 대한 거창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하며, 도로 공사 계획이 지연되는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은 아니다. 운명은 우리에게 다른 모습의 부담을 지운다. 우리의 책임은 덜 칭송받고 덜 돋보이는 곳에 있다. 우리의 책임은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필사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고자 하는 아이, 자신의 역할을 혼란스러워하는 동료, 그리고 불안정하고 좀체 알수 없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 그러므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알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더 중요하면서도 자기 가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다른 문제들이 응당 가져야 할 중요성을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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