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쾌적한 사회의 불쾌함 - 건강하고 청결하며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왜 병들어가는가
구마시로 도루 지음, 이정미 옮김 / 생각지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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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남성 역시 나이가 들수록 생식 능력이 떨어지고 갖가지 돌연변이를 가진 정자의 비율이 높아진다.

육아에 드는 비용과 위험이 커지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적령기가 고작 10년 남짓밖에 되지 않으니 육아를 시작하지 않는, 아니 시작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속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도쿄의 젊은이들은 자본주의와 사회계약의 논리가 생활 속에 깊숙이 배어 있어, 그 논리에 따라 곰곰이 판단해본 끝에 자신은 그 위험과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결론내린 것뿐이다. 결코 부조리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저출생・고령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도쿄의 매우 낮은 합계특수출생률이 그야말로 ‘파멸적’일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와 사회계약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 그 논리에 기반한 육아관 속에서 비용과 위험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해 출산을 회피하는 이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셈이며, 이는 현대 사회의 통념과 습관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일 뿐이다.

위험과 비용을 이유로 현대인이 육아를 꺼리는 합리적인 판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합리성이 우리를 육아와 아이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 동물의 일종인 인간의 본래적 존재 양상을 심각하게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설사 그 소외가 오늘날의 통념과 습관 기준에서는 지극히 ‘옳은 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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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접점이 있는 것에는 쉽게 익숙해지지만, 접점이 사라진 것에는 금세 소원해진다.

건강이 보편적 가치로서 점점 더 환대받는 반면, 질병과 죽음이 일상과 분리되어간다면 우리는 병과 죽음을 내 삶의 일부로 인식하기 어렵다. 질병과 죽음이 비일상적인 것이 되면 우리는 점점 건강이라는 보편적 가치만을 좇으며 살게 된다. 반면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병과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든 체험이 되어 건강을 추구하는 행위는 마침내 강박으로 변하고 만다. 지나치게 건강에 치우친 이런 생사관​(병과 죽음이 일상과 분리된 상황에서 이를 생사관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는 의문이지만)은 건강할 때는 행복하고 쾌적한 가치관처럼 보이지만, 병이나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의 방식을 취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세기에 발견되어 20세기 내내 발전을 거듭해온 ‘건강’은 본래 통계적・생물학적 자료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 개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흡연, 고혈압, 고콜레스테롤혈증 등이 건강위험인자인 것은 맞지만, 이를 ‘선과 악’의 가치 기준으로 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건강을 널리 전파하고 있는 의료진은 이 점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건강에는 ‘건강미’라는 가치와 부르주아적 상승 지향성이 내포되어 있다. 건강은 소비와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타인과 나를 차별화하고,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키기 위한 상징으로서 기능한다. 병과 죽음이 일상에서 분리되고 경제적 관점에서 건강이 중시되는 사회에서는, 건강이 보편적 가치이자 선한 행위로서 우리의 통념과 습관 속에 깊이 뿌리내릴 수밖에 없다.

요즘에는 건강에 좋다고 하면 앞다투어 몰려들고 그런 식품이나 물건에는 높은 가격이 붙는다. 보드리야르가 갈파한 대로, 건강한 생활과 육체는 고급으로 인정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건강위험인자로 여겨지는 식품과 물건에 대한 불안과 혐오는 더욱 심화되었고, 건강을 잃기 쉬운 습관과 행동에 대해서는 부도덕한 감정마저 품게 되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비흡연자들이 자신들의 건강권을 내세우며 흡연구역 분리를 요구한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사회는 실제로 그 방향으로 움직였고, 흡연구역은 점점 분리되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이전 시대와 비교하면 믿기 어려울 만큼 흡연구역이 철저히 분리된 지금도 담배에 대한 혐오는 악화일로다. 흡연자가 내뱉는 숨 속 미량의 담배 냄새에도 다들 기겁을 하며 피한다. 건강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어긋난다는 명분 아래, 담뱃세도 순식간에 껑충 뛰어올랐다.

담배만이 아니다. 여러 건강위험인자들이 의료진의 선전 활동에 힘입어 차례로 봉쇄되고, 기피되고, 때로는 단속되기까지 한다. 미성년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일, 예를 들면 아이들끼리 어른이 없는 장소에서 노는 일도 금지되고 있다.

‘불건강 = 악’이라는 인식은 현대 사회에 널리 퍼진 통념일 뿐, 인류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결코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불건강한 삶이 반드시 어리석은 것도 아니며, 불건강한 선택이 항상 후회를 낳는 것도 아니다.

만일 현대인이 진정으로 자유롭다면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다 죽는 삶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런 인생을 단순히 ‘어리석을 수 있는 권리’라는 말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또한 건강이 인생의 주인인 양 행세하고 우리의 행동과 통념을 전적으로 지배해서도 안 되며, 나아가 타인의 행동과 선택을 비난하고 멸시하기 위한 대의명분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건강위험인자라는 개념이 사회 구석구석에 퍼지고 건강이 현대 사회의 보편적 가치의 왕좌에 오름으로써 우리가 놓치기 쉬운 가능성과 선택지, 나아가서는 잃어버린 자유도 분명히 존재하지 않을까?

여기서 내가 말한 ‘잃어버린 자유’란 건강을 해칠 위험이 있더라도 그 위험을 감수하고 선택할 자유, 즉 오늘날의 보편적 가치에 비추어보면 ‘악’으로 간주되는 것들까지 포함한다. 물론 간접흡연과 같이 타인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자유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그 당연함의 수준과 정도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쇼와 시대에는 진짜 도둑과 사기꾼만이 아니라 일반인 중에서도 훔칠 수 있으면 훔치는 사람, 주운 물건을 슬쩍하는 사람, 물건의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부르는 사람 등 법 준수 의식이 내면화되지 않은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미성년자들이 저지르는 절도와 사기, 폭력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폭력 행위나 법을 어기는 일이 무용담처럼 회자되기도 했다. 당시 경찰의 단속 범위는 지금보다 좁았고 감시카메라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경찰서에 불려 다녔고 경찰이 적발하는 사건은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이었다. 또한 범죄자로 적발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크고 작은 불법 행위자들이 흩어져 있었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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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끝장
금동현 외 지음, 조일남 외 엮음 / 디깅룸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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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글쎄...
하지만 시의적절하다.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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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대인은 건강에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건강을 둘러싼 온갖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극단적으로는 건강이 인생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된 사람도 많다. 그들의 인생은 건강에 잠식되어 있는 셈이다. 이 정도로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건강을 챙기는 일을 인간의 의무로 여기는 사람은 적지 않다. 검진을 받을 때마다 의사에게 지시를 받고, 각종 미디어에서도 ‘건강하라’는 메시지가 쏟아지는 사회에서 건강에 등을 돌리고 살기란 쉽지 않다. 현대인은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기를 바랄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어디서나 평균수명까지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현대에는 인간이 ‘쉽게 태어나지 않는 존재’가 되었지만, ‘쉽게 죽는 존재’라는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고, 일상 속에서 이를 의식하기 어려워졌을 뿐이다. 여전히 현대인도 질병이나 사고로 허무하게 죽는다. 그러나 병원과 시설이 인간의 생사와 질병을 철저히 격리하고, 건강이라는 가치가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하면서 우리는 마치 건강하기만 하면 절대 죽지 않는다고 믿으며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살아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친구, 연인, 지인으로 선택받아야만 하게 되었다. 내가 만나는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상대 역시 자신이 만나는 상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지는 알 수 없다. 자유로운 인간관계란,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와는 만나지 않을 자유 또한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통념을 바탕으로 행동하고 인간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당장은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살면서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고립되면, 사회관계자본 So­ci­al Ca­pi­tal19을 잃을 뿐 아니라 개인의 의무와 도덕을 지키지 못했다는 상처와 열등감, 죄책감을 느낀다.

분명 우리는 과거의 부자유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통념과 그 통념에 반했을 때 느끼는 열등감과 죄책감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한 불안을 달래기 위해 인간 시장에서 승리하려는 이들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업로드에 여념이 없다. 겉치장에 불과한 SNS 게시물 속에서 그 불안이 비쳐 보이더라도 말이다.

SNS의 인프라, 나아가서는 인터넷의 모든 인프라는 자유로운 사고와 토론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특정 생각과 신념을 더욱 강화하거나, 특정 행동을 더욱 부추기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 결과, 이러한 인프라에 의존한 채 인터넷을 사용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극단적인 생각과 신념이 세상의 상식이자 정의라고 굳게 믿는 이들이 생겨나고, 대중매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정치적 타협이나 논의가 불가능해진 분열된 사회가 펼쳐지고 있다.

이토록 부자유한 인터넷 환경 속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의지로 생각하고 사물을 인식하며,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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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아침, 당연한 저녁, 당연한 내일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허망해요. 이게 끝이라니,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신이 있다면 이래선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는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근데 한편으로 신이 없다면 그게 더 허망할 것 같기도 하네요. 고작 이런 식으로 인생이 끝났는데, 아무것도 없고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건지, 냉담한 존재인지, 불공평한 존재인지…… 답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요? 저스티스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요?"

평소 같으면 억지로 추임새라도 넣었을 텐데 오늘은 유독 힘들었기에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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