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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 코벨의 한국문화 2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옮김 / 글을읽다 / 2008년 6월
평점 :
불교(佛敎)는 백제가 신라, 고구려와 맞서 싸울 때 왜를 동맹국으로 가깝게 해두려는 일종의 유인책에서 왜국에 전파한 것이다. 실제로 660년 백제가 망하게 됐을 때 왜는 구원군과 선박을 보냈지만 그것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이때 10만 명의 백제 상류계급이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이들의 도래는 일본에서 불교미술이 꽃피는 계기가 됐다. 백제 불교건축과 예술을 통해 일본에 불교문명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p42)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은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 ~ 1996)박사의 <부여기마족과 왜(倭)>에 이은 두 번째 한국문화 관련 책으로, 불교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고대 백제(百濟)시대부터 고려(高麗), 조선(朝鮮)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미친 한국 문화의 영향을 미술사 관점에서 보여준다.
[사진] 고려불화(출처 : <대고려국보전> 호암갤러리)
이 고려불화 <양유관세음도>는 '우타오쯔가 그린 당나라 것'으로 꼬리표를 달고 있을 때 봤던 것보다 지금이 더 찬란해 보였다... 관세음의 얼굴, 옷, 보석장식 등에 구사된 고난도의 기법은 그 시대에 유행했던 고려청자의 힘든 과정인 상감기법과도 통한다. 관세음이 걸치고 있는 사라의 투명함을 사실처럼 드러낸 것이나, 거미줄처럼 섬세한 흰 비단에 짜인 금빛 작은 무늬를 그려낸 솜씨는 정말 압도적인 것이었다.(p252)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일반인들은 접하기 힘든 일본에 소재한 작품,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감상할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일본에 남은 한국 미술>을 통해 인상적인 대목은 일본에 미친 한국의 영향을 여러 방면에서 다각도로 조명하려는 저자의 노력이다. 7세기 불교미술품인 호류지의 옥충주자(玉蟲廚子)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저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근거로 내세운다.
[사진] 호류지의 옥충주자(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06584658056795227/)
마지막 3단계를 나타내는 아래쪽 그림은 석가모니가 굶주린 암호랑이와 그 새끼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주어 먹힘으로써 짐승에게도 보시를 하는 불교 계율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의 호랑이 그림은 이 짐승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솜씨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다!' 호랑이 비슷한 살쾡이조차도 일본에는 없었다. 이로써 일본인이 그렸을 가능성은 배제된다.(p116)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또한, 일본 신사를 지키고 있는 코마이누 상(像)을 통해 이들 개가 일본 원산이 아닌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품종임을 지적한 저자의 설명은 최근 이루어진 토종개의 유전자 분석 결과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이처럼, 책 전반에 걸쳐 단순한 사실 주장이 아닌 근거를 통해 일본에 미친 한국 문화 영향이 강조되기에 저자의 설명은 보다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일본의 모든 신사는 예외없이 두 마리 코마이누 高麗犬, 고구려 개가 지킨다. 코마 高麗라는 말은 고구려를 지칭해 흔히 쓰인다.(p29)... 코마이누는 시베리아 늑대와 개의 혼혈이다. 고구려의 두뇌들이 그런 새 육종을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늑대를 개의 종족으로 기들여 인간이 통제할 수 있으면서도 사나운 수비견으로 키워냈던 것이다. 이것들은 무게가 50킬로그램에 달하고 늑대의 큰 코를 그대로 지녔다. 길고 털이 무성한 꼬리, 몸체의 긴 털과 갈기는 개보다 늑대에 가깝다.(p32)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관련기사 : http://www.newskr.kr/news/articleView.html?idxno=5665
[그림] 토종개의 계통수 분석 결과(출처 : 한국농어촌방송)
그렇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저자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모든 주장을 찬성하기는 어렵다. 고려 후기 왜구(倭寇)의 침략으로 많은 고려 불화(佛畵)가 일본으로 약탈당한 사실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려 측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은 극심한 폐해일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밖의 반전이 있었다. 고려에 와서 양곡이나 귀금속을 훔칠 수 없을 때면 왜구들은 사찰의 값진 물건인 불화를 약탈해갔는데, 조선이 건국한 1392년 이래 억불정책이 실시되면서 조선의 절에서 이런 사치스런 불화가 더 이상 소용에 닿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본의 사찰과 신토신사에는 1백여 점의 14세기 고려불화가 보관되기에 이른 것이다.(p206)... 한국의 사찰에서는 이런 탱화를 조심성 없이 다루기도 하고 초파일 같은 날 밖에 내다 걸거나 벽에 그대로 걸어두어 비바람이나 먼지, 향불로 인한 훼손, 도난 등 여러 가지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반면 일본의 절들은 이를 아름다운 자산으로 여겨 매우 귀하게 취급하는 것이 관례였다.(p208)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수준 높은 한국 문화재를 한국인들은 제대로 관리할 수 없으니, 약탈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일본에 남아 연구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듯한 저자의 위와 같은 말은 일제 하에 식민지 경험을 한 우리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위와 같은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고대 이집트의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는 편이 카이로 박물관으로 돌려보내지는 것보다 연구목적으로는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들이 가져간 문화재가 고국으로 반환되고 있는 현실은 문화재의 연구나 보존의 효율성보다 약탈이라는 취득방법이 부당하다는 인식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는 이러한 부분은 고려되지 않고 있기에 아쉽게 느껴진다.
한국의 절에 무속적인 흔적이랄 수 있는 대들보 상량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절마다 있는 산신각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속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얼른 이해할 것이다.(p59)... 한국역사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종교적 타협'이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불교적 요소, 도교적인 것, 조상 숭배라는 유교적 요소가 동시에 나타난다. 오늘날의 절 건축에도, 천장 대들보에는 화려한 단청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남녀 무당들 그림이 선명히 그려져 있다.(p60)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는 위와 같이 한국미술의 특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외부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의 토대 위에서 받아들였다.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기독교의 경우를 보더라도, 서양의 기독교와는 다른 한국 기독교만의 특징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부분은 명확해진다. 이러한 '타협'을 통한 외부 문화의 수용이 한국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들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과거의 것을 잘 보존하지만 정체된 일본 사회와는 다른 문명의 특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과거를 무조건 비판하고 새로운 것만 추종하는 태도 또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은 일본에 미친 한국 문화의 영향을 미국 미술사가의 입장에서 잘 정리한 책이면서도, 한국인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느껴지는 한계가 있는 좋은 책이라 생각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