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의 동기, impulse의 핵심에는 “부끄러움”이 있다 타인의 시선, 편견, 판단, 비난, 욕설, 평가, 저주 등. 이 모든 타인의 것에 대한 자기 자신의 벌거벗은, 나체화된 수치심의 실체를 직면하고자 그녀는 글을 쓴 것이다 그 느낌은 어떤 것일까?

박완서의 <박완서의 말>을 보면 박완서는 40세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녀는 소설은 자기만의 자전적 스토리에다 상상력을 부과한 그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는 듯 했다 일단 나를 그렇게 이해했고 받아들였다 자기 이야기, 스토리는 nonfiction인데, 상상력이 결합되면 faction이 될 것이고, 더하면 fiction이 될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벌거벗은 글쓰기”는 nonfiction인 셈이다 “부끄러움”을 글쓰기로 승화시킨 그녀의 매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듯 하다 그래서 그녀가 커보인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의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역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 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가려면 어떤 책을 써야 할까?”(138p)

“내게 글쓰기는 헌신이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글쓰기가 없다면, 실존은 공허하다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21p)


비천하고 가난하며 우울하고 엉망진창인 가정환경과 가정사, “내가 열 두살 때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었어” 라는 고백으로 시작하며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운 과거를 까발리는 것은 그녀의 상처에 상처를 덧대는 작업이지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정면승부이기에 그녀의 그런 일생의 용기가 진짜 크게 느껴진다 작가는 다들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다


용기있는 자만이 글을 쓸 수 있다??!!
내게도 벌거벗는 용기가 있기를. I hope so!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10-08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
쓴다고 하던데 말이죠.

암튼 특이한 작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10-09 08:05   좋아요 0 | URL
세상엔 다르디 다른 사람이 너무나 많으니 작가군도 다양하다 다양한거 아니겠습니까? 모든이로부터 자유한다는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글쓰기는 또 다르겠다 싶기도 하고 그렇네요~

cyrus 2019-10-09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상대방의 부끄러운 점을 약점으로 삼아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남들 앞에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카알벨루치 2019-10-09 08:1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자기의 약점이나 부끄러움을 공유하는것은 공감이기도 하고 관계가 더 깊어질수 있는 단계인데 그걸 역이용하는 심리가 인간에겐 있네요 도끼가 그런 이야길하는데 인용은 안할랍니다 ㅎㅎ
 
태양은 다시 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인이 아닌 청년 헤밍웨이가 쓴 작품

1 헤밍웨이가 27살에 쓴 『태양은 다시 뜬다』는 출판하자말자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27살? 도대체 그 나이에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단 말인가? 헤밍웨이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음악가였다. 『노인과 바다』에서 보여준 낚시군 산티아고의 모습에서 헤밍웨이가 첼로를 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릴적 그는 첼로를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헤밍웨이는 어릴적부터 낚시를 좋아했고, 이 작품에서도 낚시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젊을 때부터 '영문학'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당대의 문인들, 에즈라 파운드, 피츠 제랄드, 거트루드 스타인 등과 교류하면서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고 결국 이 작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폴 오스터였던가? 수많은 이들에겐 스승이 있었고, 도제식 교육과 배움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윌리엄 포크너처럼, 헤밍웨이도 대학의 시스템교육을 거절하기도 했다. 천재적 문학적 영민함은 시스템의 온실 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야생에서 자라나는 듯 하다.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학벌과 학력을 잣대로 삼는 듯하다. 과연 그 시스템에서, 그 학력의 프로필에서 천재가 탄생할 수 있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헤밍웨이는 전쟁에 참여한다. 몇 개월후 그는 다리를 다친다. 그 병상체험과 전쟁체험이 그를 더 원숙하게 만든 게 아닐까? '충격을 먹으면 성숙한다'는 일개의 우스갯소리처럼 그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삶을 배워갔던것이다. 기자출신의 작가여서 그런지 문체가 간결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2 문체 이야기가 나오니 헤밍웨이의 '빙산이론'(iceberg theory) 즉, '생략이론'(omssion theory)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본질과 중심과 핵을 숨기고 '빙산의 일각'만을보여주는 이런 문체와 글은 에즈라 파운드의 영향이거나 에즈라 파운드가 심취했던 일본 하이쿠의 영향이란 이야기도 있다. <빙산이론>에는 당연히 수많은 메타포metaphor와 상징, 은유가 등장할 수 밖에 없다. 등장인물 제이크의 성불구자 모습을 빗댄 술자리에서의 친구들과의 농담과 대화 가운데 단순함을 넘어선 수많은 상징과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 





3 헤밍웨이하면 <Lost Generation>을 빼놓을 수가 없다. 전쟁이후의 거대한 상실감은 주인공, 등장인물들의 끊임없는 방황과 방탕과 표류를 보여준다. 20대의 대한민국 청춘들의 방황처럼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끊임없이 표류하고 표류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여주인공 브렛을 들 수 있다. 한 남자와 헤어지고 이 남자, 저 남자로 옮겨다니면서 대단한 남성편력을 보여주는 청춘녀, 브렛...어디에서고 안정감을 얻지 못하는 브렛, 심지어 19살(브렛은 32살)의 젊고 매력적인 투우사 로메오에게 한 눈에 반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사랑에 올인하고, 감정에 올인하는 거기에서도 그녀의 만족은 찾아볼 수 없다. 브렛을 둘러싼 애정구도는 삼각, 사각, 이중, 삼중 그물망처럼 퍼져 있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의 심리적 안식처이자 피난처는 제이크이지만, 제이크는 성불구자이다.  

"난 마이크에게 돌아갈거야!"(332p)

그 마이크는 로메오 앞에서 술취해 생쑈(?)를 벌인 친구였건만, 과연 브렛은 마이크에게 온전한 안정감을 누릴 수 있을까? 여전히 불안하다. 그래서 lost generation인 것이다. 




4 이 청춘남녀들이 여행길에 오른 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이다.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하나인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안장된 전설때문에 유명해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길이고, 산티아고는 중세 때부터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기독교의 3대 순례지가 되었다. 산티아고는 '성 야고보'의 변형이고, 콤포스텔라는 '별의 들판'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제이크는 Jacob의 애칭이며, Jacob은 야곱, 야곱의 야고보와 어원이 같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제이크는 비극적인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큰 부상을 입어 성불구가 된다. 병원에서 간호하던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만 맺어질 수 없는 관계로 전락한다. lost generation은 1차 세계대전 후의 상황의 세대를 지칭하기도 지만, 더 확대시키면 전 인류를 상징하기도 한다. '잃어버린 세대', '방황하고 표류하는 세대', 절대성과 유의미와 최고선, 가치를 상실한, 삶과 죽음 사이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인류 세대를 지칭하기에 이 작품이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그 적용점이 존재하고 독자들의 사랑과 관심을 계속 받는 게 아닐까 싶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현대사회에서 삶의 모든 주체는 인간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까뮈(Albert Camus) 역시 현대사회에서 ()을 믿는 것은 현세의 아름다움에 대한 모욕이며 죄악이라고 주장하였다. 헤밍웨이는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신(God)의 부재(不在)나 죽음을 다루고 있고, 포오크너 역시 신은 아직 존재하되 너무 늙어 인간에게 더 이상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사실상 신(God)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본인의『소리와 분노』paper에서) 




5 제이크는 어쩌면 훼밍웨이의 종교에 대한 맘을 담은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랑하고 품고 용납하지만, 성불구자인 제이크....헤밍웨이는 청교도신도인 어머니의 신앙교육을 업악적으로 견디며 커왔기에, 종교는 그에게 커다란 짐이었다(이전에 헤밍웨이에 대한 나의 글을 참조하시길!). 어머니가 온전하고 경건한 신자였다면,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포용적이었더라면 그의 남편인 아버지가 권총자살로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헤밍웨이의 집안에서 아버지, 헤밍웨이, 자신, 큰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손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5명이 자살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의 가족, 집안사가 말 그대로 'lost generation'이 되버린 셈이다.




6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과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산티아고 순례길'...헤밍웨이는 끊임없이 길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 순례자의 모습이 역력하다. 노벨문학상 조차 수상한 그가, 그토록 낚시와 사냥과 투우를 즐기면서 열정적인 삶을 살며, 수많은 여인과 결혼하고 이혼을 거듭한 천재작가는 아픈 몸과 우울증으로 자신의 애장하던 엽총으로 자신을 쏴 버린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건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다시 뜨고 다시 지며, 뜬 곳으로 서둘러 돌아간다 바람은 남으로 갔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빙빙 돌고 돌아 그 가던 길로 돌아온다.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으며 강물이 비롯된 곳으로 돌아간다"(구약성경 전도서 1:4-7)




7 문득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의 유명한 대사가 떠오른다.

"스트레이 십, 스트레이 십stray sheep..."

Lost Generation은 'Stray sheep'인 셈이다. 하지만 작품의 제목은 <The Sun also Rises>인데, 제목이 너무나 희망적이었다는 생각이다. 아마 헤밍웨이가 27살의 피끓는 청춘에 탈고해낸 수작이라서 더 그런 것이 아닐까?

 

하지만, 
'태양은 다시 뜬다'...그것은 사실이고 진실임에는 틀림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9-10-02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J. D. 샐린저가 헤밍웨이의 영향을 받은 거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샐린저의 문장도 ‘빙산의 일각’ 같은 느낌이 들어요. 특히 샐린저의 단편에 있는 문장들이 그래요. ^^

카알벨루치 2019-10-02 17:56   좋아요 0 | URL
그게 일반독자의 눈에 안 보이는데. 전문가가 “빙산이론”이라 하니 그런갑다 싶고...참 문학의 샘물은 파도 파도 끝이 없나 봅니다~

소피아 2019-10-02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칭구^^

카알벨루치 2019-10-02 23:14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소피아님 즐독, 열독, 광독(?)하소서! 휴일 잘 보내세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알베르 카뮈는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이다라고 했고,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포크너를 칭찬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노벨문학시상 연설에서 마크 트웨인은 문학의 지도에 미시시피 강을 그려놓았다면, 50년 후 윌리엄 포크너는 미시시피 주를 21세기 세계문학의 랜드마크로 창조해냈다고 격찬하기도 했다. 포크너는 아무튼 범접하기 힘든 경지의 작기임에는 틀림없다.

 

 

 

 

2 나의 사견을 밝히자면,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이란 말의 의미에는 미국이란 나라는 청교도적인 세계관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뜬다의 도입부에서 구약성경의 전도서의 구절을 인용한 것 또한 헤밍웨이가 미국인, 미국작가이기 때문이다. 한국 작가가 만약 기독교적인 철학적 바탕을 깔고 소설을 썼다면, 독자들이 접근하기가 훨씬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유교적인 세계관이 본능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포크너의 은 이런 기독교적인 창조의 가치관이 배여 있다고 볼 수 있다.

 

 

 

 

3 구약성경 창세기 1:27-28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개역개정)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 최초의 인류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라고 하셨다. 인간의 자연만물의 관리자, 정복자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 정복하라는 말엔 오해의 여지가 존재한다. 모든 자연 삼라만상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말 그대로 정복자가 인간이란 느낌과 뉘앙스가 풍긴다. 하지만, 창세기의 이 구절에는 인간의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2가지의 책임이 깃들어 있다.

 

 

첫째, 개발과 계발의 책임이다. 자연 만물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창조하고, upgrade시키라는 말이다. 영어의 cultivate(경작하다, 농사짓다)란 동사에서 culture(문화)가 나왔다. 땅을 경작하는 농경생활의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에게서 문명이, 문화가 시작된다.

 

둘째, 보존의 책임이다. ‘정복하라는 의미에는 파괴시키고, 짓누르고, 억압하고, 무조건적인 군림의 의미가 다분하다. 하지만 인류가 으로부터 부여받은 정복은 보존의 책임이 존재한다. 이 말은 발전시키고, 개발시킨다는 명목하에 자연의 질서, 생태계의 뿌리까지 파괴해가는 인간의 개발은 조물주의 뜻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자연만물의 정복자라는 의미는 관리자란 의미가 더 가미되어져야 한다.

 

 

 

 

4 포크너는 에서 이런 기독교적인 철학 위에 인간의 책임을 지적한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땅을 창조하셨는지 쓰여 있습니다....인간과 그 자손들에게 땅을 이리저리 조각내 대대손손 영원히 침범할 수 없는 명의를 붙이라 하신 것이 아니라, 형제애를 바탕으로 익명하에 공동으로 땅을 보전하고 사용하라 하셨어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유일한 사용료는 연민과 겸허, 관용과 인내, 그리고 땀 흘려 식량을 얻으려는 노력 뿐이었습니다.”(103p)

 

 

하지만 인간은 자연이 주는 모든 혜택, 땅이 주는 모든 유익에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연과 땅, 환경을 파괴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불청객으로 전락하고 만다. 포크너는 여기 작품에서 숲 속의 수호신, 숲의 정령과도 같은 곰, 올드벤을 등장시킨다. 숲 속의 터줏대감처럼 든든히 지키고 있던 올드벤(), 종종 마을의 여러 이웃들의 가축과 재산에 해를 끼치는 곰이었다. 곰 사냥의 목적은 결국 성취된다. 십수년 동안 온 몸에 수십 발의 총알 자욱이 박혀있던 올드벤은 그렇게 죽는다. 포크너는 이 작품의 1, 2, 3, 5장에서 사냥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인간은 자연을 사냥하고, 사냥하고, 사냥한다. 개발하고, 개발시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다. 문득 100년 전의 일본의 인기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行人)에서 피력한 대목이 생각난다.

 

자네가 말하는 불안은 인간 전체의 불안이지. 유독 자네 혼자만 괴로워하는게 아니라고 깨달으면 그만 아닌가? 결국 그렇게 유전해나가는게 우리들 운명이니까.”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네. 앞서가기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과학이 일찍이 우리에게 멈추도록 허락한 적이 없네. 도보에서, 인력거로, 인력거에서 마차로, 마차에서 기차로, 기차에서 자동차, 그 다음엔 비행선, 그 다음엔 비행기, 아무리 가봐도 쉬게 내버려두지 않아.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참으로 두렵다네.”(327p)

 

소세키는 100여전에 이미 인간 본유의 불안을 감지한 것이다. 계속되는 문화의 upgrade로 인해 인간은 덜 불안해야 하는데, 더 불안해 한다, 더 고독해진다.

     

 

 

5 마크 맨슨의 최신작 희망버리기 기술에서 이것을 진보의 역설이라 했다.

 

사람들은 사는 게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더욱 불안해하고 더욱 자포자기한다.’(17p)

 

마크 맨슨은 설문조사 이야기를 한다. ‘1980년대 실시한 설문조사에 지난 6개월 동안 자신의 개인사를 몇 명이랑 상의했느냐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3명이었다. 2006년 다시 같은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많은 대답은 ‘0’이었다’(18p)고 한다.

 

공짜 와이파이와 침대의 안락함에 젖은 오늘날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엄청나게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21p)

    

다시 포크너의 책으로 넘어오자.

곰에게 soul이 있는가? 곰은 자연의 소울soul로 상징된다. 인간은 자연을 박해하고, 사냥하고, 단맛만 빼 먹고 방치하다가 폐기처분해버린다. 그런 문명의 본질을 포크너는 이 작품을 통해 지적한다.

 

 

 

6 포크너는 이 작품에서 두 사람(유형)의 캐릭터를 대조시킨다.

샘 파더스(아이작 매캐슬린) VS 벤 호겐벡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자, 우주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혼혈인 샘 파더스는 곰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유명을 달리한다. 반대로, 올드벤의 최후를 칼질로 목숨을 끊어간 분 호겐벡에게는 곰은, 자연은 단지 정복의 대상으로만 영점조준된다. 아이작의 할아버지, 그리고 세대의 세대들 또한 그런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분 호겐백은 다람쥐들에게 총질을 하면서 소리친다.

 

여기서 꺼져! 만지지 마! 아무것도 만지지 마! 다 내거야!‘(205p)

 

분의 모습은 파괴적인 정복자, 욕망가의 표상이 된 인간의 초상화이다. 포크너는 이런 분의 모습을 통해 개발은 실컷 하지만, 정작 보존의 책임을 망각하고, 유기하는 인류를 향해 경종을 울린 셈이다. 작품 중에 아이작 매캐슬린은 할아버지의 탐욕에 의해 일군 유산을 상속받길 거절한다. 4장은 21살이 된 아이작과 친척형 매캐슬린 에드먼즈 사이의 대화가 심오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4장에 대해 말이 많다. 사냥이야기의 이란 작품에 꼭 이야기가 필요하냐며 부류와 그 반대의 부류이다. 내가 생각건대 이 대목이 있어 작품이 더 궁극적인 가치에 도달하는 느낌이다.

 

 

 

 

7 앞에서 헤밍웨이 이야길 했는데, 그 작품 태양은 다시 뜬다의 첫 장에 실린 구약성경의 전도서 1:3-6이 박혀 있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여기 보면, 인간의 세대는 유한하지만, 땅은 영원하다고 이야기한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땅은 죽지 않는다. 사양화 되거나 황폐해지긴 하겠지만. 허나 사람은 죽는다. 세대의 반복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땅을 소유하고자 한다. 과연 인간이 땅을 소유할 수 있을까?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땅을 소유할 수 있느냐 말이다.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과연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소유물의 실체나 물건이나 유형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돈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큰 저택이나 집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냥 백년 안팎의 시간과 내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만 소유하고 떠나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흘러가는 것Flow...flow...flow   

    

 

8 미투운동이 대두되면서 권력의 갑질에 대해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많다. 갑질? 정말 무서운 것이다.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인간은 자연을 향해 권력의 자리에 군림하여 자연이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고 갑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개발(계발)보존의 쌍두마차가 제대로 달려야만 인간과 자연이란 이 우주공동체는 더 조화로울 수 있지 않을까? 공존공생(共存共生), 동거동락(同居同樂)의 처지에서 인류는 오히려 자연에게 갑질하는 권력의 횡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윌리엄 포크너는 이 작품을 통해 곰에게 갑질하는, 자연에게 갑질하는 인류의 초상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9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 읽히기가 힘든 이유는 아마도 포크너의 글이 스토리의 줄기만을 가지고 치고 나가는 스타일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의 기억, 회상, 과거, 현재...등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포크너의 영어 작품을 번역할 때 상당한 고충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결국 번역의 기준을 의미전달을 중시한 번역’(213p)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포크너의 글이 주는 매력이 번역과정에 다소 거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만큼 포크너의 언어가 대단하는 말이다. 이래서 text는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인데. 영어실력도 실력이지만, 게으름 탓에 작품이라도 읽은 것이 어디냐며 스스로 위로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지를 관광하면서 일체의 메모나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같으면 인증샷을 얼마나 남기려고 애쓰는가? 우리는 마치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찍고, 찍고, 찍고...하지만, 하루키는 다르다. 하루키는 집으로 돌아와 여행지에서 받은 느낌, 잔상들을 떠올리면서 후기식으로 글을 적는다고 한다. 오로지 자기의 감정, 그 때의 느낌을 오롯이 기억에 의존하여 여행일지, 여행일기를 쓰는 셈이다.

 

내가 이 책, 역사의 쓸모를 다 읽고 데스크에 앉아 내 마음에 가라앉은 것은 무엇일까? 하루키식으로 한번 돌아볼까? 기억의 잔상을 추적해 본다.

 

 

 

 

2

먼저, 최태성이란 저자의 매력을 들고 싶다. 무슨 임용시험, 자격시험, 공무원 시험은 이제 나하고는 거리가 있게 되었다. 그만큼 나이를 먹은 셈이다. 최태성이란 이름만 들어본 나는, 이 책의 뚜껑을 열면서 아하!’라는 감탄사를 연발케했다. 다소 대중적인 설민석보다 더 감동적인 역사 쌤이 있구나 싶었다. 설민석의 삼국지 1,2를 읽으면서 재미있고 흥미가 있었다. 중간에 삽화도 있고, 부연 설명도 괜찮았다. 이미 10권짜리 이문열의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나로서도 <삼국지>는 여전히 흥미로운 소재이다. 나는 결혼 전에 이문열의 삼국지를 아내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물론, 아내는 아직 독서중이다. ㅎㅎ

 

 

   

 

3

설민석의 삼국지 1,2는 말 그대로, 삼국지 입문서로는 굿이다. 이현세의 <만화삼국지>도 너무 재미있게 보았는데, 설민석의 삼국지 1,2는 만화보다 쉽다고 하겠다. 쉽다는 말은 그만큼 압축되고 간단하고 수월하게 읽힌다는 말씀이다. 10권짜리 삼국지를 재독하려고 했을 때, 인상적인 대목이 어디 있던가 싶어 뒤적여 본다.

 

유비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길에 만난 한 허름한 노인이 이런 말을 날린다.

 

말이 많으면 마음이 빈다

 

, 어떻게 이런 심금 울리는 대사를 칠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더 볼까?

 

 

유비가 또 다른 스승을 찾지 않고 집으로 가니 어머니가 왜 이리 일찍 왔느냐고 하자, 유비가 대꾸한 말이다.

 

글이 모자라서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이 외에도 삼국지 군데군데 박혀 있는 주옥같은 명문장과 아포리즘은 가슴에 와 박힌다. 20대에 친구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술잔이 넘치는 것을 보면서 술 잔이 넘친다는 것은 정이 넘친다는 뜻이라며 삼국지의 이야기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삼국지는 그만큼 수많은 보화들이 가득 찬 고전(古典)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설민석의 삼국지에서는 이런 맛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 

유비가 제갈공명을 찾아가는 대목이다. 제갈공명을 인재로 사용하려고 벼르고 벼르지만, 제갈공명이 만날 기회를 주질 않는다. 공명보다 스무 살이 어른인 유비의 공들이는 모습에 아우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토로한다. 또 다시 입이 튀어 나온 관우와 장비의 반응에도 아랑곳 없이 와룡산으로 향하는 유비였다. 고을에 도착한 유비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자고 한다.

 

여기서부터 걸어가자. 성의를 보여야지.”

아니 누가 본다고 벌써 그러시오? 여기서 그 집까지 가려면 거리가 얼만데?”

하늘이 보고 땅이 보질 않느냐? 진정한 성의란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거다.”(설민석의 삼국지 1, 311p)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다른 이가 알아주는 것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는, 자기 자신이 알아주는게,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게 가장 최선이 되어야 한다는 대목이 나의 정곡을 찔렀다. 이 감동은 도대체 어쩔거냐?

 

    

 

4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대중적인 설민석과는 또 다른 최태성의 깊이와 식견이 여기서 드러난다. 교사로 재직중에 웬 학원에서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연봉으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저자는 고민했다고 한다. 당연히 고민해야지. 안 그런가?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 그에게 선택의 길을 제시한 역사의 인물은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이었다고 한다.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예순여섯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40p)

 

저자는 역사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진단하고 선택을 내렸다. 그는 그 화려한 제의를 거절했다.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가치에 주사위를 던진 셈이다. 이 이야기가 심쿵했다. ‘최태성이란 저자가 솔직히 그냥 보이지 않았다.

 

 

 

5

둘째의 매력은, E.H.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란 이야기를 했다. 저자는 강의만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라, ‘역사적 사고를 하는 주체라는 점. 바로 역사적 사고란 단어가 기억에 남는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인기가 좋아서 연임 이후에 3선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위의 수많은 이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양한다. 거절한다.

 

정계를 떠나고자 하는 내 선택이 주의와 분별의 잣대를 비추어 바람직할 뿐 아니라 애국심의 잣대에 비추어서도 그릇되지 아니한 선택이라 믿는다.”(58p)

 

초대 대통령으로서 좋은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박정희 대통령은? , 대통령을 다 닮아가는 한국인인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기득권과 안전장치를 내려놓은 이들이 드물다.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 사람보다 욕심이 더 많은가? 아니다. 인간은 원래 욕심의 동물이고,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역사 속의 소수의 인물들은 우리를 더 부끄럽게 만든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보이지 않는, 드러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나라가 기울어가는 망국의 조짐을 보고서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압록강을 건넌다. 이회영 가족이 조선 땅을 떠난 이유는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도모하지 않겠다’(219p)는 가족회의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도왔다. 지금 시세로 따지면, 이회영의 재산은 헐값으로 매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600억 원이 넘었다. 만주 땅에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학교를 짓고,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투사들을 지원했다. 또한 형제들이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액수의 자산이 3년 만에 바닥이 나버린다. 가족들 모두가 강냉이죽도 마음껏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이회영의 가슴에는 오로지 식민지 해방의 꿈이 있었던 것이다.

    

 

6

역사적 사고

쓸모 없는 것,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라...쓸모 없어 보이는 것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너무나 다른 색깔의 야사집과 같은 <삼국유사>가 과연 정말 쓸모없는, 쓰잘데기 없는 기록인가? 그렇지 않다.

 

역사는 기록으로 승부한다. 저자는 쓰잘데기 없는 시시콜콜한 <조선왕조실록>이 남아있기에 지금도 TV와 드라마, 영화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인간의 삶, 인간의 역사는 버릴 것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나라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 기록화된다면, 과연 그것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을까? 그런 생각까지 뻗어간다. 내 자식들은 아비의 기록을 대하는 것에 의미가 없지 않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쓰잘데기 없는 1인의 기록이 역사라고 회자된다면? 역사는 기록이 있기에, 과거와 현재가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고, 남편을 먼저 보낸 한 여인의 피맺힌 절규의 글이 19984월 안동에서 발견된다. 무려 400년 전인 1586년에 쓰인 편지였다.

 

당신 늘 나에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중략)

당신을 향한 마음,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도 끝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115p)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길 바라>라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제목처럼, ‘별 것 아닌 것이, 별 것 아닌 것이 아니더라는이야기이다.

 

 

 

7

나의 쓸모, 인생의 쓸모, 역사의 쓸모...

쓸데없어 보이는 내 인생의 쓸모를 역사적 선분 위에서 한번 생각해 준 작가에게 감사하고 싶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9-22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 씨의 책들은 너무 가벼워서 패스
하렵니다.

정사 삼국지가 아니라 소설 연의라는
걸 밝혀 주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소설이 역사를 대체하게 되었네요.

유비를 너무 빠ㄹ... 아니 추켜 세워서
2류 군벌을 한황실 부흥에 나선 춘추
대의를 받드는 영웅으로 격상시킨 게
바로 소설가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
라고나 할가요.

그런 점에서 설 씨의 책과 일맥상통하
니 그렇게 비판적일 필요가 없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카알벨루치 2019-09-22 21:39   좋아요 1 | URL
설민석은 역사를 대중화시킨 한 사람 정도로 알아두면 되겠습니다 픽션인지 팩션인지 팩트인지는 언제나 독자의 몫인데 독자가 그걸 분별한 능력이 있어야한다는 전제가 깔리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 딜레마이기도 하고 원전을 대하지 못한 초보독서가에겐 흥미유발을 시킨다는 부분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syo 2019-09-22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몇 권을 후루룩 엮어 내는 글은 정말 어떻게 하는 건지를 모르겠단 말이지요..... 호랑이님이나 사이러스님이나 카알님이나 참 부럽다.

카알벨루치 2019-09-22 21:40   좋아요 0 | URL
쓰다보니 그렇게 되는거지요 다 자기 스탈이 있으니 ^^어여 몸부터 회복시키세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9-09-23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쓸모>를 사 두고서 못 읽었습니다. 오늘부터 읽기 시작하렵니다. ㅋ
저는 정비석의 <삼국지>를 읽었습니다. 다른 건 10권인데 이건 총 6권짜리라서 선택했죠.
너무 오래전에 읽은 거라 주옥 같은 아포리즘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땐 줄거리에 치중해서 읽었던 건지...

카버의 <대성당>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을 읽었는데 표제작인 ‘대성당‘만큼 좋았습니다.
하루키, 역사란 무엇인가 등 모두 제가 알고 있는 책 이야기라서 댓글을 안 남길 수가 없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9-23 23:15   좋아요 1 | URL
<삼국지>를 재독할려고 했을때 좋은 내용을 타이핑하면서 읽다가 중도에 하차했는데 ....그렇게 읽으니 음미할 꺼리가 더 있는 듯 합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세상엔 좋은 책이 왜 그리 많대요 ㅎㅎ

coolcat329 2019-09-23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설민석의 책은 초딩 아이를 위해 샀는데 푹 빠져서 너무 재밌게 읽더군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9-09-23 23:16   좋아요 1 | URL
그냥 제겐 <역사의 쓸모>란 책이 너무 좋았네요 빌려 읽고 선물도 하고 했는데 다시 한권 사서 집에 구비해놓을 작정입니다 ^^

coolcat329 2019-09-24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야겠어요:)

이혜자 2019-09-29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 잘 읽고 갑니다~
깊이있는 독서들을 하시는 님들의 댓글에 리스펙 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9-29 13:35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 댓글도 감사드립니다 ^^

하하호호 2019-10-02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글 읽고서 <역사의 쓸모>를 샀습니다. 제 인생에서도 쓸모를 찾고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10-04 00:32   좋아요 0 | URL
후회하시지 않을겁니다 최태성작가한테 제한테 오히려 감사해야하겠네요 ㅎㅎ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가네코 후미코 지음, 장현주 옮김 / 더스토리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열을 아는가?

   영화 <박열>이 세상에 나오면서, 숨겨진 독립운동가였던 그에 대한 정보가 세상에 조금 드러난 셈이다. 이 책은 박열의 부인이자, 연인이었던 가네코 후미코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 책을 보고서, 박열과의 스토리가 궁금해서 영화를 찾아 보았다. 이 책은 박열과 만나기 전까지의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영화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굉장히 밝게 나온다. 긍정적이며 당차고 용감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만을 본다면, 가네코 후미코의 아픔과 상처를 갸늠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읽어본다면, 그녀가 왜 그렇게 밝아졌는지, 용감해졌는지, 씩씩해졌는지 이해와 공감을 할 수 있다. 그가 만난 연인, 박열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를 읽고서 엄청난 충격과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인력거를 끄는 박열에게 소위 말하자면, 대시(?)를 하게 된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1903년에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 1905년에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다>(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했다. 박열은 일본인들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나쓰메 소세키의 이 작품의 제목을 패러디해서 지은 듯 하다. 가네코 후미코가 왜 이 시에 꽂혔을까?

 

나는 그 시를 읽었다. 이 얼마나 힘있는 시인가. 한 줄 한 줄 내 마음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시를 다 읽고 나자 황홀한 지경이었다. 가슴에서 피가 요동쳤다. 어떤 강한 감동이 나의 생명을 고양시키는 듯 했다.’(302p)

 

그의 수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조선에 있을 때 나는 개와 나를 항상 연결해서 생각했다. 개와 내가 똑같이 학대당하고 똑같이 구박당하는 가장 가련한 형제처럼 여겨졌다.’(171p)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시에 꽂힐 수 밖에 없는 후미코였다. 당시 조선인들은 일본인에게 그런 대우를 받지 않았던가! 후미코는 일본인이었지만, 그의 인생 자체가 그런 대우를 받았기에 박열의 시에, 박열에게 자신의 인생을 올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적자

아이가 태어났는데,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가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네코 후미코는 이른바 무적자인 셈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학교도 부탁에 부탁으로 겨우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지지리도 가난한 현실은 그녀의 문자, 학교, 배움에 대한 열정을 언제나 방해했다.

 

노트 한권과 연필 한 자루를 사 줄 때까지 2,3일이나 학교를 쉬어야만 했다.’(38p)

 

무적자라는 것을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땅을 떠나 친할머니와 함께 바다를 건넌 후에 알게 되었다.

 

넌 말이야, 설마 잊지는 않았겠지. 넌 무적자였어. 무적자는 말이야. 잘 들어. 무적자란 태어났어도 태어나지 않은 거야. 그러니까 학교에 갈 수도 없지. 가도 다른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만 당해. 그런 널 내가 불쌍히 여겨 입적해준 거야.”(91p)

 

가네코의 친할머니의 입에 나온 말이었다. 상속녀로 데리고 간다고 했지만, 결국은 식모살이만 7년 동안 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려 보낸다.

 

하지만 내가 무적자였던 게 내 죄인가. 나는 내가 무적자였던 것도 몰랐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만 알고 있었고 그 책임도 두 사람이 져야 한다. 그런데, 학교는 내게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나를 멸시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는 거라곤 내가 태어났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아무리 친할머니가 태어났어도 태어나지 않은 거라고 말해도 나는 태어나서 살아 있다.’(92p)

 

절친 타미가 죽어가면서 가네코에게 남긴 유품까지도 친할머니란 작자는 이와시타 집안의 후계자로 정해진 사다코에게 줘버린다. 12-13살 어린이는 한창 놀 나이지만 친할머니는 가네코의 모든 자유와 시간을 억압하고 박탈해버린다. 어떻게 학교는 보내줬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왜 그렇게 억지로 데려가는 거죠? 당신은 아이가 중요한가요, 옷이 중요한가요? 아이는 옷 때문에 있는 게 아니에요. 아이를 위해 옷이 있는거죠. 그렇게 더럽혀서는 안 되는 옷이라면 함부로 입어도 되는 옷을 입히면 되잖아요. 어른은 자신의 체면이나 수고만을 위해 아이를 희생시키고 있어요. 어른은, 특히 어머니는 아이를 위험에서 지키고 아이의 천성을 살려주는 게 일입니다. 아이의 자유를 빼앗고 아이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무서운 죄악이에요. 아이를 자유롭게 놀게 해 주세요. 자유롭게 자연에서 노는 일은 자연이 아이에게 준 유일한 특권이에요. 그렇게 했을 때 아이들은 무럭무럭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거예요.”(119p)

 

 

한 끼도 먹지 못한 가네코, 그 소녀의 딱한 사정을 익히 아는 이웃집의 조선인 아줌마가 보리밥이라도 주려고 했지만, 가네코는 거절하고야 만다. 할머니와 집안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조선인의 집에서 밥이나 얻어 먹고 다니는 거지는 우리 집에 둘 수 없어.”(131p)

 

낮에 놀만큼 놀고 이제 날이 저물어 갈 곳이 없으니까 돌아와서 용서를 빌고 우는 소리를 늘어놓는 게 네 특기냐. 뭐야, 밥 한 그릇이라도 너한테 주는 집이 있었니? 우리도 마찬가지야. 너한테 줄 밥은 없어.....”(132p)

 

그 어린 소녀가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그녀는 결심한다.

 

내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친할머니와 고모는 나에 대해 뭐라고 할까. 어머니와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까. 어떤 거짓말을 해도 나는 이미 그렇지 않아요라고 해명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죽어서는 안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와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복수해야 한다. 그렇다. 죽어서는 안 된다.’(137p)

 

 

 

조선에서의 7년의 식모살이

조금이라도 빨리 그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기차에서 나는 어서 나를 조선에서 다른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어디든 일각이라도 빨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실은 데려다달라고 할 곳은 없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나는 고슈의 시골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곳이 나의 진정한 휴식처는 아니었다. 마을을 보고 큰 외삼촌을 보자, 한층 우울해졌다.’(161p)

 

나는 조선생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불평을 하기가 싫었고 해봤자 믿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64p)

 

나는 이 책을 읽을 즈음에 나쓰메 소세키의 책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소세키의 일생 또한 파란만장했다. 그런데, 가네코 후미코의 불행한 가정사는 더 했다. 소세키는 그래도 후미코 보다는 더 잘 먹지 않았을까 싶었다.

 

 

 

콩가루 집안에서 콩가루가 되어가는 후미코

가난에 찌든 환경도 문제였지만(요즈음은 화장실에 휴지를 쓰지만, 당시에는 종이가 귀해 대나무 쪼갠 것이나 나뭇가지를 젓가락 정도의 길이를 잘라 사용후 시냇물에 씻어 재사용했다고 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부모도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여성편력이 뛰어났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남성편력이 탁월했다.

 

어머니는 여러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고 동거했는데, 내가 조선에 간 후에도 역시 같은 일을 반복한 듯했다...내 어머니는 어디서 굴러먹은 개뼈다귀인지 모르는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서 있는 대로 고생한 끝에 이 남자 저 남자 전전하다가 돌아왔다. 그런 어머니에게 아무런 문제 없는 집에서 혼담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당연히 어머니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무슨 사정이 있는 사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그러나 분에 넘치게도 어머니는 그런 곳에서는 견딜 수 없다며 뛰쳐나왔다. 결국 어머니는 그렇게 참을성 없는 여자였다.’(166p)

 

그래도 의지했던 남동생이 있었지만, 남동생 나카무라()와도 헤어지게 된다. 여동생 하루코와도 헤어진다. 더 웃긴 사실은 아버지의 연인이, 바로 이모였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하건만, 이모와 놀아나는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어머니는 딸의 행복(?)을 위해 유곽을 팔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제대로 되지 않기도 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말한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나요? 당신들의 사랑은 본능적인 모성애가 있는 동안만 지속될 뿐, 나중에는 완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척하지 않나요?라고. 그리고 우리 엄마처럼 진실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버리고 가면서, 갔다가 싫으면 다시 돌아와서 아이가 돌봐주기를 바라는 뻔뻔스러움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있지 않나요?”(71p)

 

후미코의 아버지는 후미코를 막내 외삼촌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아무리 숟가락 하나의 부담을 던다고 하더라도 이런 막장 드라마는 아니지 않는가!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버지는 나를 노예로 막내 외삼촌에게 판 것이다. 참으로 나에 대한 모욕이다. 아니,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불문에 들어간 막내 외삼촌 역시 이 얼마나 더러운 짐승인가...막내 외삼촌은 처녀의 육체를 탐하는 동물적인 욕망 때문에, 그렇다. 그저 그 동물적인 욕망 때문에 나를 사려고 한 것이다...치요 씨와 사귀며 정을 통하면서, 또 한편으로 나를 노리개로 삼으려 한 것이다...’(180-181p)

 

 

 

콩가루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17살의 봄, 가네코 후미코는 내일 도쿄로 가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 가족을 떠난다. 수중에 기차삯을 포함해 겨우 10엔이 있었다. 아버지란 작자는 우산 하나도 준비해주지 않았다.

 

안녕, 아버지여, 이모여, 남동생이여, 외할머니여, 지금까지 나와의 관계를 맺은 모든 것이여, 안녕, 안녕, 이제야말로 우리가 헤어질 때가 온 것이다.’(218p)

 

 

 

도쿄에서의 변화

도쿄에서 신문팔이, 가루비누,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을 하면서 어렵게 공부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그녀는 조선인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사회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처음에 온통 희망으로 불탔던 나는 고학을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도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훌륭한 인간일수록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것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어야만 한다. 나는 나 자신이어야 한다.

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도 많은 남자들의 노리개로 살아왔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해야만 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런데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 그것을 알아내어 실천하고 싶다.’(304-305p)

 

 

 

박열을 만나다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 열을 만난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반려자, 동지를 만나고 동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옥중에서 혼인신고를 한다. 일본 법정에서 조선인 의복을 입고 재판을 받는다. 일본인인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조선인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 그녀의 삶과 인생스토리를 알지 못한다면 함부로 비난하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박열>에서 취조하는 장면이다. 일본 천황 폭탄 테러의 계획에 대해 심문하는 장면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시종일관 박열과 모든 것을 함께 하려는 발언을 한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자 하는 그녀의 열정이 드러난다. 후미코가 검사에게 박열은 뭐라고 하던가요?’라고 질문하자, 검사는 박열의 말을 쪽지에 적은대로  전해준다.

    

후미꼬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질문하면 그녀의 감정이 상할 수도 있으니 그녀의 주체적인 판단에 맡긴다.’(영화 대사 중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후미코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아는 박열이 그녀의 인격과 성격을 배려해서 말한 부분이다. 이 말에 후미코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배여나온다.

 

저 사람은 마치 집 없는 들개 같아요. 그런데 왜 저렇게 도도하죠? 마치 태도가 왕자 같아요.’(308p)

 

그 사람 안에 작용하는 것은 무엇일까? 저렇게 힘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고 싶었다....그렇다. 내가 찾고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 그것은 분명 그 사람 안에 존재한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가지고 있다.’(309p)

 

이런 후미코가 박열을 처음 만난다.

 

나는 당신 안에서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어요. 당신과 함께 일할 수 있었으면 해요.”

 

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죠.”(315p)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더요. 내가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같이 살아요. 그때는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게요. 결코 당신을 병 따위로 힘들게 하지 않을 거예요. 죽는다면 같이 죽어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요.”(320p)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는 여기까지이다. ‘박과 나의 동거 생활에 대한 기록 외에 다른 것은 쓸 자유가 없었다고 후미코는 말한다.

 

 

 

23살의 꽃이 지다

1926727, 가네코 후미코는 우쓰노미아 형무소에서 스물셋의 한 여름에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31년 후미코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은 지 5, 그녀가 죽은 7월에 형무소에서 4년 동안 썼던 수기가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는 바로 가네코 후미코의 형무소에서 수기로 기록한 자서전이다.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일본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든다. 일본 정부는 대지진에 대한 수습과 대책을 마련하기 보다 희생양을 찾기에 바빴다. 그 희생양이 바로 조센징이었다. 이때 표면적으로 드러난 숫자는 6천명의 조선인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 와중에 천황 암살 시도 혐의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도 검거된다. 19263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3.1운동 트라우마가 있는 일본인들은 독립운동가의 사형집행의 후폭풍이 또한 거세어질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천황의 자비, 은혜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함께 죽기를 갈망했던 두 사람의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또한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의 원인을 자살이라고 보편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보면 의문점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그 유명한 박 열과 후미코의 사진

  이 사진은 박 열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내줄 유작이 될 뻔한 사진이었다. 내가 이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도발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려 100여년 전이었는데, 이런 포즈로 사진을 찍다니 말이다. 하지만,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스토리와 박열의 영화를 감상하고 난 후 느끼는 감정은 남다르다. 그 두 사람의 화양연화’, 인생의 정점이 바로 이 사진을 찍을 때가 아니었나 싶다.

 

 

 

Epilogue...박 열의 뒷 이야기

21세에 투옥된 박 열은 222개월의 최장기 수감기록을 세우면서 44세의 나이에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라이프스토리를 들여다 본 형무소 소장은 수많은 조선 동포들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연설을 했다. 이날 그는 자신의 아들을 박열의 양자로 바쳤고, 이름 또한 박정진으로 개명했다. 박열은 후에 월북하여 1974년 평양에서 72세에 죽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9-11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열 영화의 영어 제목이 <식민지에서 온 무정부
주의자>네요.

일정 시대에 형무소에서 22년을 살고 나왔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그나저나 메리 추석~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9-11 17:59   좋아요 0 | URL
happy 추석 되시길 삼가 바랍니다 ㅎㅎㅎㅎ

서니데이 2019-09-11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알벨루치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카알벨루치 2019-09-11 20:51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님두 건강하시고 맛난거 많이 드세욧!^^

stella.K 2019-09-11 1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 <박열>은 봤는데 영화가 뭔가 모르게 아쉽더군요.
영화에서 후미코를 알고 그녀에 관한 책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 책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일제 시대는 그 시대 권력자들에게나 좋았지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나라에 이주해 온 일본인들이
꼭 행복했던 건 아니더군요.
특히 일제 말과 해방 이후엔 우리나라 사람들이 분노에 차서
그들도 못지 않게 힘든 세월을 살았더라구요.
물론 우리 민족이 당한 것에 비하면 덜할지 모르겠지만.

카알벨루치 2019-09-11 20:50   좋아요 0 | URL
이 책은 후미코의 옥중수기인데 후미코의 친할머니 쪽이 너무 하더군요 책읽고 영화보니 마음이 더 짠했습니다 명절 잘 보내세요 스텔라님^^

단발머리 2019-09-15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열도 박열이지만 정말 후미코의 삶은 너무 파란만장하네요. 그 시대에, 버림받은 여성으로 얼마나 살기 힘들었을까.... ㅠㅠ
카알벨루치 페이퍼로 일본인과 한국인 아웃사이더들의 사랑이 완전히 다른 코드로 읽히네요.
잘 읽고 갑니다!!
이제 교회 가야죠, 명절 지나 주일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9-15 09:48   좋아요 0 | URL
한일관계가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 공교롭게도 제가 일본작가의 책들을 읽게 되다니...ㅎㅎ예배 잘 드리고 오셔요~

공쟝쟝 2019-09-27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네코후미코 너무 좋아하는 인물인데 이렇게 벨루치님 포스팅으로 보니 너무 방갑! 저는 평전 읽었는 데 수기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9-27 21:04   좋아요 1 | URL
가네코 후미코 생각하면 맘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도 박열 만나 잠시라도 행복했으니 다행인듯 하지만 인생 너무 짧게 살다가 가서 더 안타깝고 그랬답니다 영화에서 나온 수기가 이 책이랍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