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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기마족과 왜(倭)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옮김 / 글을읽다 / 2006년 11월
평점 :
부여족(扶餘族)은 말을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 왔으며 창, 칼 등 월등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손쉽게 원주민을 제압하면서 규슈에서 나라 야마토 평원으로 동진(東進)해 나갔다... 이들은 군사집단이었으며 새로이 정착할 신천지를 찾아 일본에 온 것이다. 그 때문에 말을 대동해 갈 필요가 있었다. 일본에는 초기에 말이 없었다.(p38) <부여기마족과 왜>中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 ~ 1996)교수에 의하면 3세기 중국 대륙에서 선비족(鮮卑族)과 부여족의 다툼이 있었다. 여기서 밀려난 부여족이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었고, 일부가 일본열도로 건너가 정복활동을 벌이게 된다. 코벨 박사에 의하면 이러한 '부여족의 왜 정벌' 이후 일본은 비로소 중앙집권 국가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부여족의 왜 정벌은 일본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30여년 간 지속된 부여족 지배는 일본에 처음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8세기 나라(奈良)의 사가들이 한국의 왜 침입을 부정하고 반대로 왜의 한국 침입으로 바꿔서 설정한 것은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3세기 중국의 사성 <삼국지> <위지>에 "이 시기 왜에 말(馬)이 없었다"고 기록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p168) <부여기마족과 왜>中
책 본문을 통해 코벨 박사는 부여족의 일본 정벌을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저자에 의하면, <일본서기 日本書記>의 진구황후(神功皇后, 169 ~ 269)의 신라 정벌은 부여족(가야)의 왜 정복이 거꾸로 기술된 것의 이러한 역사 왜곡의 대표적 사례다.
[사진] 진구 황후(출처 : 위키백과)
4세기의 가야가 후일 신라에 병합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역사책에 나오는 신공왕후의 원정로가 근거를 갖제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미마나(任那, 가야를 의미함)정복' 이라는 일본 역사가의 주장을 신공이 고령으로부터 남쪽으로 진격하여 백제 군사와 합류한 것으로 풀이하면 이치에 닿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p79)<부여기마족과 왜>中
흥미로운 것은 신공의 조상이 광대한 압록강 너머 북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암시가 <일본서기>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신공이 '신라왕'을 굴복시키자 신라왕은 '아리나례(阿利那禮)강이 거꾸로 흐를 때까지' 신공에게 복속할 것을 맹세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일본서기>를 영역한 애스턴(W.G. Aston)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도모할 아무 이유가 없던 입장에서 아리나례강을 현재 북한 국경의 서쪽 절반을 가로질러 흐르는 압록강으로 생각했다.(p79)<부여기마족과 왜>中
그렇다면, 어느 시기에 일본의 역사 왜곡이 구체화되는가. 저자는 그 시점을 백제 멸망 이후 약 10만명에 이르는 유민이 일본으로 흘러간 때로 추정한다. 도래인(渡來人)의 처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제 유민들이 왜(倭)를 일본(日本)으로 만드는 작업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백제학자들은 일본의 구비관(口碑官)들이 부르는 노래역사에 나오는 사건과 이름을 백제사에 결부시키고 일부는 가야사와 신라사까지 차용해 일본사로 바꿔치기 했다. 그들은 '일본국의 창시자'라는 신비한 영웅담을 만들어냈다. 여기엔 부여-가야의 왜 정벌에서 얻어진 구체적 이야기들을 따다 쓴 만큼 사실적인 내용이 있다. 이런 것들이 짜집기되어 일본사는 서기전 660년부터 비롯된다는, 왕실에서 만족할 만큼의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졌다.(p185) <부여기마족과 왜>中
코벨 박사의 <부여기마족과 왜>의 내용은 이처럼 일본 문화에 미친 부여족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은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4세기 이전부터 이미 한반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다.
초기에 왜로 이주한 사람들이 타고 간 배는 4세기 기마민족이 타고 간 배보다 작았다. 그래도 기마족들처럼 왜를 침입하려고 배에다 많은 말을 싣고 가는 모험은 하지 않았던 만큼 무사히 왜 땅에 건너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出雪)였는데, 이곳은 여러모로 신라와 관련된 곳이다.... 이들 대부분은 바람과 바다에 생활을 의지하는 어민들로, 해의 신보다는 바람의 신을 더 우러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통일국가가 되고 나서 바람의 신 스사노오를 모신 이즈모 신사가 해의 여신을 받드는 이세 신사에 밀려 지위가 두 번째로 낮아졌다는 사실은 초기 이주사에서 중요한 것이다.(p186) <부여기마족과 왜>中
4세기 이전 기마민족보다 먼저 일본에 진출해 있었던 이들은 누구일까. 위의 내용에 따르면 우리에게 일본 원주민으로 알려진 아이누족보다 먼저 이주한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북한 사학자 김석형에 의해 뒷받침된다.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의 분국으로 세 그룹의 한국인 사회가 건설돼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신라와 이즈모이며 4~5세기에 들어서는 백제가 자주 거론된다. 고구려가 등장하는 것은 552년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뒤의 일이다.(p138) <부여기마족과 왜>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4세기 이전 신라에서 바람의 신을 모시던 집단이 일본 원주민을 몰아내고 일본 열도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4세기 가야로 대표되는 부여족의 일본원정이 있은 후에는 백제계가, 6세기 무렵부터는 고구려의 세력이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정리될 것이다. 그렇지만,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언제부터 한반도인들의 일본 진출이 있었는가에 대한 조망 없이, 중반부에 해당하는 부여족의 진출부터 다루고 있다. 책에서 4세기 이전 신라인들의 일본 진출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지는데, 이는 일본의 조몬 시대/야요이 시대에 고대 한인(韓人)들의 영향력은 과소 평가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부여기마족 이전 신라인들의 일본 진출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었을까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아쉽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대 한반도인들의 일본 이주사(移住史) 중 일부인 부여족의 왜 정복을, 미국인인 저자가 저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부여기마족에 의해 중앙집권국가체제를 만들고, <일본서기>의 편찬을 통해 한반도와 절연(絶連)한 일본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가. 이어지는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는 그 다음 이야기가 이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은 그 영향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책의 내용이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리뷰에서 하기로 하고, <부여기마족과 왜(倭)>의 리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