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여름에 미국측의 맥아더 장군이 그은 선을 따라 확정된 미•소의 한반도 분할은 좀더 영속적이었다. 양측은 한반도의 반쪽을 통치할 독재자를 각각 선정했다... 한반도 분할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들 간의 최후의 중대한 협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5년 만에 가장 큰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p686) 「민중의 세계사」중


제주 4.3 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엇갈린 시선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엇갈린 관점은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4.3의 기점으로 보는가, 아니면 1947년 3월 1일 6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3.1 사건을 기원으로 보는가로부터 시작하여 논의되어야할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제주 4.3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는 단순한 국내 정치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넓은 관점에서 시간을 두고 세계사의 관점에서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 총인구 30만명 중 약 10%가 사망한 4.3사건은 그 자체로 가슴 아픈 비극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이념을 알 리 없는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약 700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가슴 아픈 4.3 71주년을 맞아 제주 4.3 평화기념관 자료 사진을 올려봅니다.

제주도가 아픈 과거의 상처를 딛고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제주 4.3을 기억한 하루를 이렇게 흘려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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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4-04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석범작가님의 <화산도>를 언젠가는 완독해야지 하면서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는데 또 이렇게 4.3.이 지나가버렸네요.
희생자들의 한을 풀어드리위해서라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겨울호랑이 2019-04-04 11:31   좋아요 1 | URL
설해목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아직 4.3에 대해 많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예전보다 높아진 일반의 인식 속에서 바르게 자리잡을 날이 오리라 기대해 봅니다...

2019-04-05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5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5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것들이 내게 주는 모호한 기쁨 덕분에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왔는데, 나는 그 기쁨 자체에 대해서는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p31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마르셀 프루스트(Valentin Louis Georges Eugene Marcel Proust, 1871 ~ 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Du Cote de chez Swann> 를 읽었을 때 기뻤다. 매우 정적(靜的)으로 진행되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이 나에게 주는 느낌은 매우 강렬했으며, 문학 작품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오랫만이고 즐거웠다. 이번 페이어에서는 작품을 통해 받은 개인적인 인상을 중심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komplex)


 잠을 자러 올라갈 때 내 유일한 위안은 내가 침대에 누우면 엄마가 와서 키스해 주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그렇게도 좋아하는 저녁 인사가 되도록 늦게 오기를, 엄마가 아직 오지 않은 이 유예 기간이 더 연장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p3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작중 화자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전형을 보여준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의 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나타나는 시기가 남근기(Phallic stage, 출생 후 3년부터 약 6년간의 시기)임을 고려한다면, 작중 화자의 모습은 남근기 고착의 상태에서 잠재기로 들어선 듯한 느낌, 또래보다 발달이 늦은 청년의 모습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매우 어린 나이에 그 작은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대상 리비도 집중을 개발시키는데, 그것은 원래 어머니의 젖과 관련되어 있고 의존 Anlehnung 유형에 의한 대상 선택의 원형이 된다. 이 아이는 자기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써 아버지 문제를 처리한다. 일정 기간 동안 이 두 관계가 나란히 지속되다가 이 아이의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이 더 강렬하게 되고 아버지는 그 욕망에 대한 장애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부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발생한다.(p372)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자아와 이드>  中


 슬픔으로 상기된 내 모습을 보고 엄마가 양보해서 화해의 키스를 해 준다면, 이런 의식을 엉뚱하고 상식 밖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 신경에 거슬릴 것이었고, 엄마 역시 할 수만 있다면 키스에 대한 내 욕망이나 습관을 없애 주려고 애쓰셨기 때문에, 이미 방문까지 다 간 상태에서 한 번 더 키스해 달라는 내 요청을 받아 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p33)... 하지만 너무 늦었다. 아버지가 우리 앞에 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제 끝장이구나!"하고 중얼거렸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p7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프로이트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은 아버지와 '동일시'를 통해서다. 과연 화자는 이어지는 작품 속에서 초자아(Super Ego)를 확립할 수 있는지, 확립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확립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을 하나의 포인트로 접어두자.

 

 나는 어디에선가 멀어지는 이 과정을 기술한 적이 있다. 부모에 대한 대상 리비도 집중은 동일시로 바뀐다. 아버지나 부모의 권위는 자아에 유입되고, 여기서 초자아의 핵심이 형성된다. 이 초자아는 아버지의 엄격함을 넘겨받아 근친상간을 금기시하고, 부모를 향한 리비도 집중으로부터 자아를 지켜준다.(p296) <성욕에 대한 세 편의 에세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해소> 중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 손에 들린 촛불의 그림자가 올라오는 것이 보이던 계단 벽이 존재하지 않게된 지도 오래다. 내 마음속에서도 영원히 계속되리라 믿었던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새로운 것들이 세워지면서, 당시에는 예측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고통과 기쁨이 생겨났고, 그와 더불어 예전 것은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러한 시간의 가능성은 두 번 다시는 내게 생기지 않을 것이다.(p7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2. 화자가 추구하는 진실


 정신이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매번 정신은 스스로를 넘어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다. 정신이라는 탐색자는 자기 지식이 아무 소용없는 어두운 고장에서 찾아야만 한다. 찾는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창조해야 한다.(p8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책 읽기를 좋아하며, 장래 작가가 꿈꾸는 화자는 진실(眞實)을 찾기를 열망하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다. 작품 중화자가 차(茶)를 마시는 대목에서 나의 시선이 잠시 머물게 된다.


 두 번째 모금을 마셨다. 첫 번째 모금이 가져다준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세 번째 모금은 두 번째 모금보다 못했다. 멈춰야 할 때다. 차의 효력이 줄어든 것 같았다. 내가 찾는 진실은 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p8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화자가 차를 마시는 모습은 한계효용(限界效用, marginal utility) 체감의 법칙의 좋은 예시가 된다.(극단적인 예시는 술을 만취할 때까지 마시고 토하는 것이겠지만.) 기왕에 법칙이 나왔으니, 앨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1842 ~ 1924)의 <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Economics >를 통해 살펴보자.

 

 효용은 욕망 또는 욕구와 상관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욕구의 다양성은 무한하지만 개별욕구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친숙하고 기본적인 인간본성의 경향은 욕구 포화의 법칙(law of sutiable wants) 또는 효용체감의 법칙으로 표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 한 재화의 총효용(재화가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모든 쾌락이나 기타 편익)은 그 재화의 보유량이 증가함에 따라 증가하지만, 보유량이 증가하는 만큼 빠르게 증가하지는 않는다. 만인 재화의 보유량이 일정한 비율로 증가한다면 그로부터 얻어지는 편익의 증가율은 체감한다.(p150)... 효용체감의 법칙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한 재화의 한계효용은 그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야잉 증가함에 따라 제감한다.(p151) <경제학 원리 1 > 中


 작품 속에서 보이는 작가의 진실 탐구는 외부에서 내면을 향하는데, 이러한 화자의 모습은 30년 전쟁(1618 ~ 1648)이 한창이던 추운 겨울날 진중에서 방법적 회의를 도출해내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 의 모습과 겹쳐진다. 화자와 데카르트,  두 사람 모두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꿈의 환영 속에 지낸다는 점과 잠에서 깨어났을 때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이후 이들의 행보는 갈린다. 마치 작품 속 두 갈림길인 메제글리즈쪽과 게르망트 쪽처럼.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pensees)은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고, 이때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정신 속에 들어온 것 중에서 내 꿈의 환영(les illusions de mes songes)보다 더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상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가당치 않은 억측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주목하고서,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p185) <방법서설> 中


 잠든 사람은 자기 주위에 시간의 실타래를, 세월과 우주의 질서를 둥글게 감고 있다. 잠에서 깨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생각해 내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위치한 지구의 지점과,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흘러간 시간을 금방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뒤섞일 수 있으며, 끊어질 수도 있다.(p19)... 이제 나는 확실히 잠에서 깨어났다. 내 몸은 마지막으로 한 바퀴 빙 돌더니, 확실성이라는 착한 천사가 내 주위 모든 것을 고정해 나를 내 방 이불 아래 갖다 눕혔고, 어둠 속에서 내 옷장, 책상, 벽난로, 길가 쪽 창문, 두 문을 대충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p2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데카르트는 확신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국 의심할 수 없는 'Cogito ergo sum'에 이르렀지만, 화자의 의심 방향은 현상(現象 · Phenomenon)으로 흐렀던 반면, 작품에서는 생각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을 통해 진실을 찾으려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시간'이다.


3. 시간(時間, Time)


 나는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상태가 무엇인지 아무런 논리적인 증거도 대지 못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이 그 앞에서 사라지는 그런 명백한 행복감과 현실감을 가져다주는 이 상태가 무엇인지를 물어보기 시작한다. 그것을 다시 나타나게 하고 싶다. 생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차의 첫 모금을 마신 순간으로 되돌아가 본다. 똑같은 상태가 보이지만 새로운 빛은 없다.(p8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시간을 되돌려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화자의 노력은 현상학(Phanomenologie)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1859 ~ 1938)의 시간에 대한 인식과 통하는 바 있다. 후설에 의하면, 시각객체는 자신의 반복적인 회상을 통해 다시 경험되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동일화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품 전반에 걸쳐 화자의 회상이 이후 작품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도 점검해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시간객체(Zeitobjekt)의 지각(Wahrnehmung)을 나는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각들의 계속(Sukzession) 속에서 두 가지 동등한 시각객체의 계속에 관한 의식은 구성된다. 나는 회상(Wiedererinnerung) 속에서만 동일한 하나의 시간대상(Zeitgegenstand)을 반복할 수 있고, 이전에 지각된 것이 그 이후에 회상된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Erinnerung) 속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그것을 지각하였다는 단적인 기억 속에서, 그리고 내가 그것을 기억하여다는 두번째 단계의 회상 속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시각객체는 동일하게 반복하여 경험할 수 있는 작용들이 된다. 객체가 일단 주어지면, 그것은 임의적으로 빈번히 다시 주어지며, 다시 관찰되고, 그런 다음 하나의 계속을 형성하는 상이한 작용들 속에서 동일화 될 수 있다.(p205) <시간의식> 中


 후설은 사유가 진전됨에 따라 의식의 지향적 체험 그 자체가 시간적 지속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며, 또한 체험들을 선반성적, 비대상화적으로 의식하는 [내적의식]의 차원의 발견과도 더불어 [시간의식]은 [의식의 모든 체험들 그 자체를 내적으로 의식하면서 그것들의 시간적 지속을 구성하는 가장 근원적인 의식층]으로서 파악하게 되었다. 의식 체험의 일반적 형식으로서의 시간을 구성함으로써 동시에 의식 체험과 그 상관자 쌍방을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구성의 근원적인 장이게 된다.(p208) <현상학 사전, 시간의식 時間意識> 中 


 내가 책을 읽고 있을 때 내 의식은, 내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열망에서부터 저기 정원 끝 내 눈앞 지평선 너머 보이는 곳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갖가지 상태를 동시에 펼쳤는데, 그와 같은 일종의 다채로운 스크린에서 우선 내게 가장 내밀하게 느껴진 것,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나머지 모든 것들을 지배하던 손잡이는, 바로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철학적인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이었다.(p15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한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태도에는 그 인간의 깊이 감추어진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있으며, 비록 그 태도가 예전에 그가 한 말과 연결되지 않는다 해도, 죄인 자신이 고백하지 않는 증언으로 그것을 확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감각의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이처럼 고립되고 비일관적인 기억 앞에서 우리는 이 감각들이 혹시 환상의 희생물이 아닌지를 묻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러한 태도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자주 의문으로 남는 것이다.(p22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4. 작품의 배경 : 성당 그리고 갈림길

 

 전성기 스콜라철학의 대전과 마찬가지로, 전성기 고딕 대성당은 무엇보다 '전체성'을 목표로 했으며, 그리하여 제거뿐 아니라 종합에 의해서 완벽에 가까운 최종적 해결을 지향했다.(p106)... 전성기 고딕 대성당은 모든 것에 제자리를 찾아주고 제자리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을 억누름으로써 자신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도덕적, 자연적, 역사적 지식 전체를 구현하고자 했다.(p107)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에서 여러 배경이 나오지만 인상적인 배경을 묻는다면 개인적으로 성당과 갈림길이라 여겨진다. 성당은 작품에서 의식이 넘어갈 수 없는 시간 차원의 절대 공간으로 설명된다. 작품 속에서는 여러 고딕성당이 언급되는데,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 ~ 1968)에 따르면 스콜라 철학과 고딕 건축은 '전체성'이라는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 공간에서 화자가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인식하는 대목등을 살펴보면 성당이 향후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당이 내게는 마을 나머지 부분과는 전혀 다른 그 어떤 것으로 생각되었다. 성당은 말하자면 4차원 공간을 차지하는 건물로 - 4차원이란 시간의 차원이다. - 수세기에 걸쳐 이 기둥에서 저 기둥으로, 이 제단에서 저 제단으로, 단지 몇 미터의 거리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시대들을 통해 마침내 승리자가 된 내부를 펼쳐 보였다.(p115)... 성당과 성당이 아닌 다른 모든 것 사이에는 내 정신이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어떤 경계선이 있었다.(p11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우리 눈에 보이는 성당의 모든 부분은 그 본연의 어떤 사상 탓에 다른 건물과 구별되겠지만, 그래도 성당이 자신을 의식하고 개별적이고 책임감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을 바로 종탑 덕분이었다. 바로 종탑이 성당을 대변했다.... 할머니는 종탑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기 위해 모든 두 손처럼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경사진 돌들의 그 부드러운 긴장과 열정적인 기울어짐을 두 눈으로 좇으셨는데,(p119)  첨탑의 기세와 완전히 하나가 된 할머니의 시선은 첨탑과 더불어 높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 마을의 든 일, 모든 시간, 모든 관점에 형태를 주고 완성하고 축성하는 것은 바로 생틸레르 종탑이었다.(p12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또 다른 주요 배경은 두 갈림길이다. 화자기 작품에서 서로 다른 길로 인식하고 있는 매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으로 난 길은 사실은 연결되어 있는 길로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에서는 아직 나타지 않는 이 두 배경과 이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것인지.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 삶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나란히 보내는 여러 다양한 삶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지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이 삶은 우리 안에 서서히 진행되어, 우리를 위해 의미와 양상을 변화시켜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진리 발견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이고,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채로 준비해온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 눈에 보이게 된 날에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p31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내 소년 시절을 통해 메제글리즈가 이미 더 이상 콩브레 토양과는 닮지 않은 땅의 기복 탓에 멀리 가면 갈수록 시야에서 사라지는 지평선처럼 접근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면, 게르망트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인 것으로, 그 '길'의 종점과도 같은, 적도나 극지방, 혹은 동양처럼 일종의 추상적이고 지리적인 표현이었다... 나는 그 두 길을 서로 다른 두 실체로 간주하며 오로지 정신적인 창조물에만 속하는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했다.(p23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그 외에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에는 독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은유나 고전의 내용이 많이 담겨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 작품 전체를 다 읽지 못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후에 다시 읽는다면 분명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끌리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다음의 문단에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 1527)의 <군주론 Il Principe>의 한 대목을 우리가 연상하는 것도 이런 내용의 일부일 것이다.


 우리는 그때 프랑수아즈가 아주머니의 악담이나 의심, 노여움을 두려워하며 살아오는 동안, 그녀의 마음속에는 우리가 증오라고 착각했던, 어떤 존경과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진정한 여주인이자 여군주인 그 신비롭고 전능한 제왕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p26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中

 

 양자를 모두 갖추기는 힘들어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사람들이 두려움을 받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고, 변덕스럽고, 거짓말하고 기만하려 하며, 위험은 피하고자 하고 이득엔 탐욕스럽다는 것이 타당한 일반 원칙이기 때문이다.(p109)... 두려움을 받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사랑받는 것이 나은지에 관한 질문으로 되돌아와서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향에 따라 사랑을 하지만 군주의 의향에 따라 무서움을 느끼게 만들 수 있으므로, 명민한 군주는 다른 사람들이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제어하는 것 위에 국가 운영의 토대를 놓아야 한다.(p112) <군주론> 中


 이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은 모호하면서도 많은 것을 담고 있기에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소설이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가진 작가를 꿈꾸는 화자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내용을 진행하지만, 작품 속에 여러 의미가 감춰져 있기에 보다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읽으면서 머리를 맴돌던 음악 두 곡을 담아본다. 다소 신비스런 분위기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분위기의  Enigma의 <Return to innocence>가 작품이 주는 이미지라면, 작품을 읽는 동안 내가 받은 느낌은 The Cranberries의 <Dreams>였다. 두 곡을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의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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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4-02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랜베리스의 <드림> 넘 좋죠. ^^

겨울호랑이 2019-04-03 06:09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영화 「중경삼림」의 「몽중인」버젼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크랜베리스 음색이 더 시원하게느껴집니다^^:)

카알벨루치 2019-04-03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hot한 페이퍼입니다 눈돌아갑니다 👏👏👏

겨울호랑이 2019-04-03 12:0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대단한 작품임을 뒤늦게나마 알게되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4-03 12:03   좋아요 1 | URL
그 책의 진가와 찬사는 대학때 들었는데, 아직도....hot은 HOT의 핫입니다 ㅋ 울 막내동생이 중딩때 HOT춤공연을 학교무대에서 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이 댓글을 이전 페이퍼에 써야하는데...ㅎㅎ 요즘 독서도 쉬고 있는 농땡이 왔다 갑니다 ㅋㅋ

겨울호랑이 2019-04-03 12:06   좋아요 1 | URL
동생분이 추신 곡목에서 강하게 「캔디」의 느낌이 옵니다. ㅋ 카알벨루치님 맛있는 점심 드세요!

카알벨루치 2019-04-03 13:06   좋아요 1 | URL
캔디 맞습니다 ㅎㅎ즐건 하루 되시길!

AgalmA 2019-04-10 0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정주행이시군요ㅎb
읽기 어려운 책을 더 읽기 어렵게 해석하고 계신 듯합니다ㅎㅎ;
겨울호랑이님의 독서 내공이기에 가능한 멋진 리뷰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4-10 07:29   좋아요 2 | URL
^^:) 즐겁게 읽긴 했는데, 모호한 지점이 있어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다 보니 좀 어렵게 되었습니다.ㅋ 아직은 안개낀 듯 흐릇하지만, 차츰 읽어가다보면 점차 개이겠지요.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4-10 08:29   좋아요 2 | URL
고래등 쌈에 🦐 등 터지는 소리~우지직ㅋㅋ

겨울호랑이 2019-04-10 08:44   좋아요 2 | URL
에고... 카알벨루치님 무슨 말씀을. 저는 프랑크톤이랍니다.ㅋㅋ

카알벨루치 2019-04-10 09:01   좋아요 2 | URL
전 새우, 겨호님과 아갈마님은 고래! 전 어쩜 고래밥일지도~ㅎㅎㅎ

AgalmA 2019-04-14 17:34   좋아요 1 | URL
고래? 새우? 겨울호랑이님은 그렇다치고 제가요? 당최 매치가 안 되어서 뭐라 드릴 말씀이;;;;;;;;
 

건물에서 처음으로 하늘에 맞닿는 지붕.
「한국의 지붕, 선」에서는 지붕에 담겨 있는 의미를 발견한다. 지붕 너머 하늘과 멀리 보이는 산에서 도가의 자연미를, 중첩된 처마의 모습에서 유교의 위계 질서를 찾는다.

우리 전통의 진, 선, 미가 구현된 공간으로서 지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라 여겨진다.

공리적 이유로 한 공간 안에서 다른 계급이 공동 생활을 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계급의 위계가 밀집하게 관계를 가지며 농축적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붕은 다시 이것을 한눈에 파악하게 해주는 매개였다. 지붕은 각 채가 갖는 높낮이와 스케일의 차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매개이다. 특히 멀리서 여러 채가 군집된 전체 구성을 읽어낼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런 작용을 통해 지붕은 유교 건축에서 위계 질서를 표현하는 사회미를 획득했다(p93)

장미보다 더 직접적으로 자연을 모방한 것이 산 닮기이다. 지붕은 이것을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매개이다. 지붕을 통해 산의 볼록한 외관 형상을 모방한다. 주로 초가의 둥근 지붕을 통해서이다. 지푸라기나 너와 같은 자연 재료라도 사용하게 되면 자연미는 분명해진다. 기와 지붕에서는 박공이 이 역할을 한다. 건물은 자연을 닮게 되어 있다. 한국의 자연은 나지막한 동산들이 겹겹이 중첩되는 환경을 만들어 놓았다.한국의 전통 건축은 이런 자연 환경을 닮았다. 지붕은 산을 닮는다.(p123)

장식은 선·면·색·형상의 복합 작용의 결과이다. 인문의 의미로서의 장식은 사회 생활 속에서 등급의 차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각종 미적치장을 의미한다. 인문 장식은 자연미로서의 천문 장식을 번안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문 장식은 사회미의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 사회의 위계와등급은 자연 현상을 좋은 결과라는 것이 주역적 세계관의 핵심이다.(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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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3-31 1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붕이 계급을 표현한다는 해석이군요.
지붕은 남방 한계 고도를 표현하는 줄 알았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3-31 19:21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제가 읽기로는 작가는 인문 문명의 상징인 건축물에서 지붕은 아래에서 쳐다보면서 지붕과 외부와의 경계에서는 도가적인 자연미를, 지붕 아래 건축물은 인문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건축물을 보호하는 지붕의 속성을 생각했을 때,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 등을 중첩된 처마 등을 통해 해석하는 내용이 담긴 책입니다. 얇은 책이라 처마의 과학적인 의미는 이 책에서는 담기지 않았습니다^^:)

2019-04-01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상쾌한 일요일 아침입니다. 조금은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피아노로 바흐를 듣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굴드의 연주곡을 올려봅니다. 마침 얼마 전부터 연의가 이모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어서일까요. 피아노에 더 관심이 가게 되네요. 3월 마지막 주말입니다. 이웃분들 모두 좋은 날 되세요!


 2차 대전 직후 잠시 바흐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신음악학이 대두하면서 모든 음악가들은 바흐음악을 피오노로 연주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하프시코드(harosichord)의 여왕으로 군림한 반다 란도브스카(Wanda Landowska)를 선두로 하프시코드주자들이 전성기를 맞았다.피아노로 바흐음악을 연주하던 시대는 사라졌다.(p633)... 그러다 1955년 글렌 굴드(Glenn Gould)가 등장했다. 1955년에 나온 전설적인 그의 첫 번째 음반 골드베르그 변주곡(Goldberg Variations)은 많은 음악가드에게는 참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 연주는 개성, 품위, 새로운 아이디어, 생기 있는 리듬, 빠른 템포 그리고 견고한 테크닉, 이 모든 것을 겸비한 것으로서 바흐연주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고, 권위가 있었다.(p634)... 그의 음악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그것이라고 믿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그 연주에는 선적으로 흐르는 흐름이 있다. 굴드는 다성부를 분류, 각 성부의 경중에 차증을 두고 각 성부가 서로 대조를 이룬 채, 동시에 나란히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비상한 능력을 지녔다. 연주를 다 듣고 나면 과연 이 골드베르그 변주곡이 얼마나 정통성이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p635) <위대한 피아니스트> 中


*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양장 합본)> (나남, 2008)이라 페이지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굴드는 삼차원의 영역에서 작업을 했다. 하나의 프레이징에서 표현된 것(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의 첫 부분)은 선과 색채의 관점이 아닌. 공간 속에서의 기하학과 시간의 곡선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페달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음은 연장되지 않고 건반에서 손을 떼기가 무섭게 소멸되지만, 대신 공간 속에 각인된다. 또 이 공간, 층, 깊이에 대한 인식이 시간의 작용으로 은폐되거나 변질되는 일도 없다.(p124)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中


PS. 어린 시절 피아노는 남자가 연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진도를 체르니 40번에서 멈췄습니다만, 진짜 멋있는 남자는 자신의 악기를 하나 정도 다룰 줄 알아야한다는 진리를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의가 피아노를 즐기되 다룰 줄 아는 악기가 노래방 탬버린 수준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만약 소질이 아빠를 닮았다면 이마저도 쉽지 않은 과제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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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3-31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체르니 40번 우아!!!! 대단하십니다 전...코드만 튕기는 수준인데 그래도 밴드활동을 했지요 무식한게 용감하다고! 기타는 치는데 참 그것도 너무 방대하네요 음악은 바다같이 깊고 넓네요 고 김진영 철학자의 ‘아침에 피아노를 듣는다’는 건 살아있음을 느끼는 또 하나의 표시(sign)로 받아들이던 대목이 생각납니다 피아노...우아!👏👏👏

겨울호랑이 2019-03-31 10:14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이야말로 정말 왕성한 활동력을 보유하고 계시는군요. 축구에 밴드에... 진정으로 문무를 겸비하신 애국자이십니다. 저의 현실은 그저 ‘한 때 체르니를 쳤던 탬버린치는 야옹이 집사‘입니다.ㅋㅋ

카알벨루치 2019-03-31 10:26   좋아요 1 | URL
고딩때 밴드했죠 지금은 다 과거지사 입니다 ㅋㅋ

겨울호랑이 2019-03-31 10:33   좋아요 0 | URL
^^:) 카알벨루치님의 다양한 경험이 폭넓은 독서로 나타남을 느낍니다. 예전 제가 알던 HOT열혈팬이 HOT 해체 당시 제게 한 말이 생각나네요. ˝HOT는 해체하지 않고 내 가슴속에 남아있어요.˝ 별 관계는 없지만 카알벨루치님 말씀을 들으니 갑자기 떠오릅니다. 카알벨루치님 가족분들과 함께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2019-03-31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01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9-03-31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아노를 치셨다니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음치에 박치라 ㅠㅠ

굴드에 대한 책을 좀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흔적을 남겨두었더라고요.
˝손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노에 속해 있었다. 그가 건반 위로 쓰러질 듯 몸을 숙인 모습을 보면, 그는 마치 자신과 음악 사이에 더 이상 피아노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며 피아노 속에 자신을 지우고 융해시켜 버리려는 것 같다. ‘피아노 앞에 앉은 글렌 굴드‘가 아니고,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인 것이다.˝ (76쪽,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CD는 55년판, 81년판 해서 두개나 가지고 있습니다만, 좋아하는 것과 수준은 달라서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3-31 20:52   좋아요 2 | URL
아닙니다. 어머니께 등떠밀려 억지로 배웠던 것이었습니다. 저도 지금은 손가락이 굳어서 치지를 못합니다. ㅜㅜ 말씀하신 대목이 와닿습니다. 피아노에게 귀속말을 속삭이듯이 고개를 건반에 붙이고 연주하는 굴드의 모습을 잘 묘사한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굴드 CD를 2장이나 가지고 계신 것을 보면 우향님께서는 클래식 애호가시군요!^^:)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친구, 선후배에게 갑자기 전화연락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많은 분들도 알고 있지만, 갑자기 걸려온 전화는 반가움도 있지만, 동시에 부탁에 대한 부담감도 가져다 줍니다.  어제 오랫만에 걸려 온 후배의 전화도 안타깝지만, 부탁의 전화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많이 부끄럽지만, 힘든 부탁을 한다는 후배의 말로 오랫만의 통화는 이어졌습니다. 후배와 통화를 잘 마친 후 밤에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의 생각을 이번 페이퍼에 올려봅니다.

 

 孟子曰:惻隱之心,人皆有之;羞惡之心,人皆有之 ... 惻隱之心,仁也;羞惡之心,義也... 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我固有之也,弗思耳矣 측은지심은 인간이라면 예외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수오지심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측은지심은 인의 발로이며, 수오지심은 의의 발로이며,,, 인/의/예/지라 하는 것은 밖으로부터 나에게 덮어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맹자 孟子> <고자장구 告子章句 상 上 6a-5> 中 (p620) 


  맹자(孟子, BC 372 ~ BC289) 는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은 각각 인 仁과 의 義의 단서이며,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 경우에 비춰보면,후배의 딱한 처지를 들었을 때 저는 '측은지심'이, 후배 마음에는 '부끄러움(수오지심 ?)'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을수도 있기에 이것을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저를 포함한 누구나 후배처럼 어려운 처지에 몰릴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삶은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주고 받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사단'을 가지고 있어야겠지요.  '사단' 하면 우리에게는 '사단칠정논쟁 四端七情論爭'이 익숙합니다.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 ~ 1572)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 ~ 1571)에게 보낸 편지안에서 사단과 칠정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사단 四端 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넓히고 채우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단이 이 理의 발현임은 확실합니다. 칠정 七情이란 것이 타올라 더욱 번져나가서 그것을 붙들어 묶어서 중도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라면, 칠정이 기의 발현임은 또한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칠정이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애초에 사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칠정이 비록 기에 속하긴 해도 이는 분명히 저절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곧 하늘이 준 성이요, 본래부터 그러한 실체이니, 어찌 그것을 기의 발현이라 하여 사단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p479)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中


 기대승은 사단뿐 아니라 칠정 -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 모두 이 理의 발현이라 주장합니다. 이 理와 기 氣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 200여년 동안 계속된 논쟁이니만큼, 쉽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거칠게 말해서 '이'를'보편 법칙', '기'를 '보편법칙의 구체적 표현(또는 가능성)'으로 정리하면 너무 무리한 표현일까요. 

 

 '만물제동 萬物齊同'이란 만물을 기 氣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기라는 평등 위에서 만물의 차등이 성립합니다. 기라는 보편성 위에서 만물의 개별성들이 성립합니다. 기는 무이죠. 없음이 아니라 아무-것도-아님 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기의 이런 성격을 장자는 즐겨 '허 虛'로 표현합니다.(p726) <개념-뿌리들> 中


 제가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느꼈던 안타까움 역시 '기 氣'의 표현임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측은지심은 일종의 동감이겠지요. 이번에는 '동감(同感, sympathy)'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동감과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저작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의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자신의 경제학 이론을 전개합니다.

 

 타인의 환희에 동감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그리고 시기심(猜忌心)이 환희에 대한 동감을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기꺼이 그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환희의 감정에 빠져든다. 그러나 비탄(悲歎)에 공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비록 우리가 공감하는 경우에도 항상 마지 못해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비극 공연을 볼 때 우리는 그 연기가 주는 동감적 비애에 가능한 한 저항하다가, 더 이상 그 감정을 피할 수 없게 도어서야 비로소 동감한다. 그런 때에도 우리는 동석자(同席者)에게 우리의 관심을 숨기려고 애를 쓴다.(p83) <도덕감정론> 中


 그렇지만, 애덤 스미스의 동감은 '기쁨에 대한 동감'과 '슬픔에 대한 동감'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기쁨에 대한 동감은 자발적인것에 반해, 슬픔에 대한 동감은 수동적이며, 위선(僞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른 양상의 동감에 대해 독일 현상학자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 ~ 1928)는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 혼자서는 결코 자기 자신의 체험과 의지 그리고 행동과 자기의 존재에 대한 윤리적 가치들을 직접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자기의 행동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관찰자의 판단과 태도 속에 자신을 대입해보고 결국 자기 자신을 편견 없는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그리고 동감을 통해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의 증오, 분노, 흥분, 복수심에 직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안에서 자기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판단의 흐름이 생긴다는 것이다.(p37)...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양심에 대한 착각이며 사회적 암시 soziale Suggestion 때문에 스스로 느낀 가치를 은폐한 것이 아닌가?(p38)<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中


 막스 셸러는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기론 理氣論의 관점에서 본다면 셸러의 이론을 본다면, 칠정이 이의 발현이라고 본 기대승의 입장에 조금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합하면, 우리의 감정은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이성 理性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내적 지각의 작용과 그의 본질로 볼 때, 그리고 내적 작용에서 현상하는 사실 영역과 연관해서 볼 때, 각자가 동료 인간의 체험을 자신의 것과 똑같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p505)... 동일한 영혼 체험이 여러 개인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 - 두 인간이 엄밀하게 동일한 고뇌를 느낄 수 있다.(p510)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中


 다시 제 경우로 돌아와서, 제가 후배에게 느꼈던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은 어린 시절을 친하게 지냈기에 별다른 어려움없이 그의 감정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때문에, 스미스의 말처럼 후배의 기쁨을 슬픔보다 더 공감한다는 말보다는 셸러의 설명이 더 공감됩니다.(심한 경우, 후배가 로또에 당첨되었다면 배가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후배의 감정에 동감을 했다면, 그 이면에 사회적인 영향이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에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90 ~ BC 415)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우스로부터 염치와 정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짐승들보다 약해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전문기술적인 기술은 그들에게 양식을 위해서는 충분한 도움이 되었지만 짐승들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부족했지요.(322b)... 인간은 시민적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서로에게 부정의하게 처신했고, 결국 다시 흩어져서는 죽임을 당했지요. 그래서 제우스는, 우리 종족 전체가 멸종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헤르메스를 보내어 인간에게 염치 aidos 와 정의 dike를 가져다 주게하였지요. 나라의 질서와 우정의 결속이 그들을 함께 모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322c)... 시민적 덕은 전부 정의와 분별을 거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요, 이 경우에는 모든 사람을 다 용인해 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고요. 이 덕에는 모두가 참여해야 하며, 안 그러면 나라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겁니다.(323a) <프로타고라스> 中 


 프로타고라스가 창작 신화를 통해 설명한 염치 aidos와 정의 dike는 사회를 구성하는 덕목입니다. 여기에서 염치는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오만 hybris의 반대말로서,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염치는 절제, 겸손 등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프로타코라스의 염치, 절제와 맹자의 측은지심, 수오지심에서 통하는 바를 발견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이 나라(국가) 또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덕목이라는 점입니다.


 동서양 모두에서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 속에서 인간의  본성(本性)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문화유전자에 의해 매개된 것은 아닐런지. 이에 대해서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 )가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개념을 제시하고, <확장된 표현형 The Extended Phenotype>의 표현을 빌려봅니다.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에게도 이름이 필요한데, 그 이름으로는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명사가 적당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를 '밈 meme'으로 줄이고자 한다...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등이 있다.(p322) <이기적 유전자> 中


 밈은 일정한 구조를 지니며 정보를 저장하고자 뇌가 사용하는 물리적 매개체 어떤 것에든 실현된다. 뇌가 시냅스를 연결하는 유형으로 정보를 저장한다면, 원리상 밈은 시냅스 구조의 일정 유형으로서 현미경으로 확인 가능하다... 표현형 효과는 뇌에 있는 밈이 밖으로, 눈에 보이게 발현된 것이다. 표현형 효과는 다른 개체가 가진 감각기관으로 지각 가능하고, 이를 수용하는 개체의 뇌에 스스로를 각인해 수용하는 뇌에 원리 밈의 사본을 새겨넣는다. 그리하여 밈의 새로운 사본은 표현형 효과를 널리 전파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해당 밈 자체의 더 많은 사본은 다른 뇌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p214) <확장된 표현형> 中


 도킨스의 표현이 맞다면, 우리는 왜 문화유전자(밈)을 통해서 이들을 전달하고 있을까요. 여기, 동감하지 못하는 경우와 동감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중 지혜서인 <욥기.에서는 욥이 결백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한마디로 동감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성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네들은 언제까지 나를 슬프게 하고 언제까지 나를 말로 짓부수려나? 자네들은 임미 열 번이나 나를 모욕하고 괴롭히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구려. 내가 참으로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잘못은 내 잘못일세. 자네들은 참으로 내게 허세를 부리며 내 수치를 밝히려는가?(욥 19 : 2 ~ 5)


 동감하지 못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독자들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좋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욥기> 전반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심정적으로 매몰차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반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리어 왕 King Lear>에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처지에 동감하는 코딜이어의 대사 속에서 독자 역시 진한 슬픔과 함께 다소의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운면의 불행에 우리 모두가 나약한 모습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해도, 휘날리는 백발이 

그들의 동정심을 일으켰을 텐데, 이 얼굴로 

사나운 비바람을 마주하셨다는 말입니까? 

두려움을 일으키는 암울한 천둥소리에 맞서면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빠르게 교차하는 번개가 

내리치는 속에서? 이렇게 몇 올 남지 않은 맨머리로 

불쌍한 척후병처럼 경계를 섰나요? 그런 험한 밤에는

나를 물었던 적의 개라 할지라도 따뜻한 난롯가에

두었을 겁니다. 불쌍한 아버지, 당신께서는 

돼지들과 부랑자들과 일행이 되어 썩은 지푸라기를 덮고

오두막에서 쓸쓸히 지내셨군요. 아, 슬프다 슬퍼! (p202) <리어왕 4막 7장> 中


Had you not been their father, these white flakes 

Did challenge pity of them. Was this a face

To be opposed against the warring winds?

To stand against the deep dread-bolted thunder

In the most terrible and nimble stroke

Of quick cross lightning? To watch - poor perdu! -

With this thin helm? Mine enemy's meanest dog,

Though hee had bit me, should have stood that night

Against my fire. And wast thou fain, poor father,

To hovel thee with swine and rogues forlorn

In short and musty straw? Alack, alack!(p260) <King Lear Act4, scene7 28 ~ 38>


 때문에, 우리는 불안한 미래를 살면서 '최소한 사람이라면~'이라고 생각하는 덕목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간의 작은 위로 속에서 힘을 내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필요했기 때문에 '동감'이 우리 내면에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랫만에 걸려온 후배의 전화.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서 느꼈던 동감(同感)이라는 문제에 대해 두서없이 생각해봤습니다. 덕분에, 페이퍼가 너무 길어졌네요.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PS. 하얗게 불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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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3-30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겨울 호랑이님, 존경스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3-30 23:37   좋아요 1 | URL
에고. 과찬이십니다. 생각난 것을 붙이다보니 글이 길어졌고 주제가 다소 산만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2019-03-31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