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친구, 선후배에게 갑자기 전화연락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많은 분들도 알고 있지만, 갑자기 걸려온 전화는 반가움도 있지만, 동시에 부탁에 대한 부담감도 가져다 줍니다.  어제 오랫만에 걸려 온 후배의 전화도 안타깝지만, 부탁의 전화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많이 부끄럽지만, 힘든 부탁을 한다는 후배의 말로 오랫만의 통화는 이어졌습니다. 후배와 통화를 잘 마친 후 밤에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의 생각을 이번 페이퍼에 올려봅니다.

 

 孟子曰:惻隱之心,人皆有之;羞惡之心,人皆有之 ... 惻隱之心,仁也;羞惡之心,義也... 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我固有之也,弗思耳矣 측은지심은 인간이라면 예외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수오지심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측은지심은 인의 발로이며, 수오지심은 의의 발로이며,,, 인/의/예/지라 하는 것은 밖으로부터 나에게 덮어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맹자 孟子> <고자장구 告子章句 상 上 6a-5> 中 (p620) 


  맹자(孟子, BC 372 ~ BC289) 는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은 각각 인 仁과 의 義의 단서이며,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 경우에 비춰보면,후배의 딱한 처지를 들었을 때 저는 '측은지심'이, 후배 마음에는 '부끄러움(수오지심 ?)'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을수도 있기에 이것을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저를 포함한 누구나 후배처럼 어려운 처지에 몰릴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삶은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주고 받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사단'을 가지고 있어야겠지요.  '사단' 하면 우리에게는 '사단칠정논쟁 四端七情論爭'이 익숙합니다.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 ~ 1572)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 ~ 1571)에게 보낸 편지안에서 사단과 칠정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사단 四端 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넓히고 채우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단이 이 理의 발현임은 확실합니다. 칠정 七情이란 것이 타올라 더욱 번져나가서 그것을 붙들어 묶어서 중도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라면, 칠정이 기의 발현임은 또한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칠정이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애초에 사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칠정이 비록 기에 속하긴 해도 이는 분명히 저절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곧 하늘이 준 성이요, 본래부터 그러한 실체이니, 어찌 그것을 기의 발현이라 하여 사단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p479)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中


 기대승은 사단뿐 아니라 칠정 -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 모두 이 理의 발현이라 주장합니다. 이 理와 기 氣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 200여년 동안 계속된 논쟁이니만큼, 쉽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거칠게 말해서 '이'를'보편 법칙', '기'를 '보편법칙의 구체적 표현(또는 가능성)'으로 정리하면 너무 무리한 표현일까요. 

 

 '만물제동 萬物齊同'이란 만물을 기 氣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기라는 평등 위에서 만물의 차등이 성립합니다. 기라는 보편성 위에서 만물의 개별성들이 성립합니다. 기는 무이죠. 없음이 아니라 아무-것도-아님 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기의 이런 성격을 장자는 즐겨 '허 虛'로 표현합니다.(p726) <개념-뿌리들> 中


 제가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느꼈던 안타까움 역시 '기 氣'의 표현임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측은지심은 일종의 동감이겠지요. 이번에는 '동감(同感, sympathy)'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동감과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저작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의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자신의 경제학 이론을 전개합니다.

 

 타인의 환희에 동감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그리고 시기심(猜忌心)이 환희에 대한 동감을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기꺼이 그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환희의 감정에 빠져든다. 그러나 비탄(悲歎)에 공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비록 우리가 공감하는 경우에도 항상 마지 못해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비극 공연을 볼 때 우리는 그 연기가 주는 동감적 비애에 가능한 한 저항하다가, 더 이상 그 감정을 피할 수 없게 도어서야 비로소 동감한다. 그런 때에도 우리는 동석자(同席者)에게 우리의 관심을 숨기려고 애를 쓴다.(p83) <도덕감정론> 中


 그렇지만, 애덤 스미스의 동감은 '기쁨에 대한 동감'과 '슬픔에 대한 동감'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기쁨에 대한 동감은 자발적인것에 반해, 슬픔에 대한 동감은 수동적이며, 위선(僞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른 양상의 동감에 대해 독일 현상학자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 ~ 1928)는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 혼자서는 결코 자기 자신의 체험과 의지 그리고 행동과 자기의 존재에 대한 윤리적 가치들을 직접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자기의 행동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관찰자의 판단과 태도 속에 자신을 대입해보고 결국 자기 자신을 편견 없는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그리고 동감을 통해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의 증오, 분노, 흥분, 복수심에 직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안에서 자기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판단의 흐름이 생긴다는 것이다.(p37)...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양심에 대한 착각이며 사회적 암시 soziale Suggestion 때문에 스스로 느낀 가치를 은폐한 것이 아닌가?(p38)<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中


 막스 셸러는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기론 理氣論의 관점에서 본다면 셸러의 이론을 본다면, 칠정이 이의 발현이라고 본 기대승의 입장에 조금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합하면, 우리의 감정은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이성 理性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내적 지각의 작용과 그의 본질로 볼 때, 그리고 내적 작용에서 현상하는 사실 영역과 연관해서 볼 때, 각자가 동료 인간의 체험을 자신의 것과 똑같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p505)... 동일한 영혼 체험이 여러 개인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 - 두 인간이 엄밀하게 동일한 고뇌를 느낄 수 있다.(p510)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中


 다시 제 경우로 돌아와서, 제가 후배에게 느꼈던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은 어린 시절을 친하게 지냈기에 별다른 어려움없이 그의 감정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때문에, 스미스의 말처럼 후배의 기쁨을 슬픔보다 더 공감한다는 말보다는 셸러의 설명이 더 공감됩니다.(심한 경우, 후배가 로또에 당첨되었다면 배가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후배의 감정에 동감을 했다면, 그 이면에 사회적인 영향이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에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90 ~ BC 415)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우스로부터 염치와 정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짐승들보다 약해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전문기술적인 기술은 그들에게 양식을 위해서는 충분한 도움이 되었지만 짐승들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부족했지요.(322b)... 인간은 시민적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서로에게 부정의하게 처신했고, 결국 다시 흩어져서는 죽임을 당했지요. 그래서 제우스는, 우리 종족 전체가 멸종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헤르메스를 보내어 인간에게 염치 aidos 와 정의 dike를 가져다 주게하였지요. 나라의 질서와 우정의 결속이 그들을 함께 모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322c)... 시민적 덕은 전부 정의와 분별을 거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요, 이 경우에는 모든 사람을 다 용인해 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고요. 이 덕에는 모두가 참여해야 하며, 안 그러면 나라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겁니다.(323a) <프로타고라스> 中 


 프로타고라스가 창작 신화를 통해 설명한 염치 aidos와 정의 dike는 사회를 구성하는 덕목입니다. 여기에서 염치는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오만 hybris의 반대말로서,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염치는 절제, 겸손 등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프로타코라스의 염치, 절제와 맹자의 측은지심, 수오지심에서 통하는 바를 발견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이 나라(국가) 또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덕목이라는 점입니다.


 동서양 모두에서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 속에서 인간의  본성(本性)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문화유전자에 의해 매개된 것은 아닐런지. 이에 대해서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 )가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개념을 제시하고, <확장된 표현형 The Extended Phenotype>의 표현을 빌려봅니다.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에게도 이름이 필요한데, 그 이름으로는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명사가 적당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를 '밈 meme'으로 줄이고자 한다...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등이 있다.(p322) <이기적 유전자> 中


 밈은 일정한 구조를 지니며 정보를 저장하고자 뇌가 사용하는 물리적 매개체 어떤 것에든 실현된다. 뇌가 시냅스를 연결하는 유형으로 정보를 저장한다면, 원리상 밈은 시냅스 구조의 일정 유형으로서 현미경으로 확인 가능하다... 표현형 효과는 뇌에 있는 밈이 밖으로, 눈에 보이게 발현된 것이다. 표현형 효과는 다른 개체가 가진 감각기관으로 지각 가능하고, 이를 수용하는 개체의 뇌에 스스로를 각인해 수용하는 뇌에 원리 밈의 사본을 새겨넣는다. 그리하여 밈의 새로운 사본은 표현형 효과를 널리 전파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해당 밈 자체의 더 많은 사본은 다른 뇌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p214) <확장된 표현형> 中


 도킨스의 표현이 맞다면, 우리는 왜 문화유전자(밈)을 통해서 이들을 전달하고 있을까요. 여기, 동감하지 못하는 경우와 동감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중 지혜서인 <욥기.에서는 욥이 결백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한마디로 동감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성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네들은 언제까지 나를 슬프게 하고 언제까지 나를 말로 짓부수려나? 자네들은 임미 열 번이나 나를 모욕하고 괴롭히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구려. 내가 참으로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잘못은 내 잘못일세. 자네들은 참으로 내게 허세를 부리며 내 수치를 밝히려는가?(욥 19 : 2 ~ 5)


 동감하지 못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독자들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좋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욥기> 전반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심정적으로 매몰차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반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리어 왕 King Lear>에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처지에 동감하는 코딜이어의 대사 속에서 독자 역시 진한 슬픔과 함께 다소의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운면의 불행에 우리 모두가 나약한 모습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해도, 휘날리는 백발이 

그들의 동정심을 일으켰을 텐데, 이 얼굴로 

사나운 비바람을 마주하셨다는 말입니까? 

두려움을 일으키는 암울한 천둥소리에 맞서면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빠르게 교차하는 번개가 

내리치는 속에서? 이렇게 몇 올 남지 않은 맨머리로 

불쌍한 척후병처럼 경계를 섰나요? 그런 험한 밤에는

나를 물었던 적의 개라 할지라도 따뜻한 난롯가에

두었을 겁니다. 불쌍한 아버지, 당신께서는 

돼지들과 부랑자들과 일행이 되어 썩은 지푸라기를 덮고

오두막에서 쓸쓸히 지내셨군요. 아, 슬프다 슬퍼! (p202) <리어왕 4막 7장> 中


Had you not been their father, these white flakes 

Did challenge pity of them. Was this a face

To be opposed against the warring winds?

To stand against the deep dread-bolted thunder

In the most terrible and nimble stroke

Of quick cross lightning? To watch - poor perdu! -

With this thin helm? Mine enemy's meanest dog,

Though hee had bit me, should have stood that night

Against my fire. And wast thou fain, poor father,

To hovel thee with swine and rogues forlorn

In short and musty straw? Alack, alack!(p260) <King Lear Act4, scene7 28 ~ 38>


 때문에, 우리는 불안한 미래를 살면서 '최소한 사람이라면~'이라고 생각하는 덕목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간의 작은 위로 속에서 힘을 내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필요했기 때문에 '동감'이 우리 내면에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랫만에 걸려온 후배의 전화.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서 느꼈던 동감(同感)이라는 문제에 대해 두서없이 생각해봤습니다. 덕분에, 페이퍼가 너무 길어졌네요.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PS. 하얗게 불태웠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19-03-30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겨울 호랑이님, 존경스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3-30 23:37   좋아요 1 | URL
에고. 과찬이십니다. 생각난 것을 붙이다보니 글이 길어졌고 주제가 다소 산만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2019-03-31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