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다층성은 회고적으로 '계몽' 개념의 의미 내용을 오직 두 정신사적 뿌리들로부터 연역하려는 시도가 문제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 정신사적 뿌리들이란 첫째, 데카르트 인식론의 이념 영역, 그리고 이 인식론이 사유의 자기 확실성과 진리 인식 방법을 근거 지음.(p29)... 둘째, 종교적, 형이상학적 빛 이론들의 이념 영역. 이 영역은 "자연적인 빛 lumen naturale"이론의 근대적 변천을 걸쳐 앞에서 언급한 첫 이념 영역과 밀접하게 만난다.(p30)... 대략 1770년부터 '계몽'은 "앎의 수준"이라는 의미 변형과 연계되어 예컨대 공동체 Gemeinwesen나 민족과 같은 도덕적, 문화적 상태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해가 계속 형성되면서 '계몽'은 이후 한 공동체, 민족, 시대 또는 지리적 공간의 전형적인 정신적 능력들과 표현 형식들의 전체를, 그리고 똑같이 그러한 물질적, 기술적 숙련들과 자식들의 전체를 의미할 수 있게 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31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의 6번째 주제는 "계몽 Aufklarung"이다. 근대와 뗄 수 없는 관련있는 이 단어에 대한 의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으며, 그 의미가 확장, 변형된 역사를 지녔기에 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느껴진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을 읽다보면, 이 단어만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도 별로 없을 듯하다.


 1786년 칸트는 한 시대를 계몽하는 것을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로 본 반면에, 한 개별 인간을 계몽하는 것을 당시로선 비교적 쉬운 일로 여겼다. 실러에겐 이 관계가 정확히 정반대다. 그에게 현 시대의 계몽은 문젯거리가 아니다. 이 시대는 이미 계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리가 밝게 비추었는데도  동시대인들에게 진리 수용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147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계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코젤렉의 조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누가, 누구에 의해, 무엇을, 어떤 근거로, 어떤 수단으로, 어디로 이끄는가. 이러한 코젤렉 조언은 '빛을 만들었다 en+light'는 영어 계몽(啓蒙 enlightment)을 잘 풀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추가적으로 계몽의 주체와 계몽의 대상을 넣고, 왜 그렇게 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대마다 다른 색깔의 빛으로 표현된 '계몽'이라는 현상의 공통인자를 발견할 수 있다. 

 

참된 진리 자체가 빛으로 밝혀주고, 이로 인해 인식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 ~ 430)의 조명설(Illuminatio)의 구조 안에서, 심훈(沈熏, 1901 ~ 1936)의 소설 <상록수>에 나타난 브나로드 운동의 현상을 떠올린다면 계몽의 대강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계몽'의 의미들에서, 그리고 이 의미들로부터 전개되는 계몽 개념의 그때그때 행해지는 주제 선택과 파급 범위와 평가와 적용 방식은 누가 누구에 의해 무엇에 대해 어떤 근거에서 어떤 수단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계몽되어야"한다는 것인가라는 일반적인 물음에 그때마다 구체적으로 답변하는 것에 의존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33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에 수록된 여러 단어들 중 다수가 이르면 17세기, 늦어도  18세기 후반 이후에 변형되거나 새롭게 의미를 추가된다. 이는 독일어의 개념을 설명하는 사전의 성격 상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 ~ 1805)라는 독일의 거장들이 출현한 시기라는 점과 영국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과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9)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시기였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아마도, 이는 개념사들의 전반적인 설명이 되겠지만 적어도 '계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조금 특별한 설명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 ~ 1803)의 '계몽'인식을 살펴본다면, 그가 스파르타에 '애국심'이라는 사상을, 아테네에 '계몽'이라는 사상을 부여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르더는 헬라스의 두 도시국가가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 BC 460 ~ BC 445)은 이들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해석한다고 볼 수 있을까.


 헤르더는 '계몽'을 '인본성'의 본질 인식이자, 그 정신적 영향들로 언급된다. 이 영향에 의해 세계 창조자인 유일신에 관한 이론이 모든 철학과 종교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헤르더)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비교하면서 애국심과 계몽에 있어 인간성의 모든 인륜 문화가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두 개의 극점을... 포착해 스파르타엔 애국심의 극점을, 아테네엔 계몽의 극점을 부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계몽'을 '국가기술'과 연관시키며 이로써 민족에 어울리는 책무에 대해 그 민족의 계몽을 생각하고 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141


 일반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한 스파르타의 견제 때문이라고 해석한 투키티네스(Thucydides, BC 465 ~ BC 400)의 분석이 일반적이지만, 투키티데스와 헤르더의 해설을 결합하여 '경제적 원인으로 발생한 전쟁이 가져온 정치적인 의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스파르타의 '애국심'이 아테네의 '계몽'을 이겼다고 볼 수 있겠다.


 23 (4) 이번 전쟁은 아테나이인들과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에우보이아 섬을 함락하고 맺은 30년 평화조약을 파기함으로써 일어났다. (5) 앞으로 어느 누구도 왜 헬라스인들 사이에 이런 큰 전쟁이 일어났는지 묻지 않도록, 나는 그들이 조약을 파기하게 된 원인과 그들의 쟁점을 먼저 기술하겠다. (6)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다._투퀴티네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 p46 

 

 그리스가 문화, 언어, 예술, 학문의 씨앗을 다른 곳으로부터 얻어왔음은 내가 보기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각, 건축, 신화, 문학 등의 몇몇 예에서 이는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모든 것에 완전히 새로운 본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남들로부터 얻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는 점, 단어의 원래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모든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그리스인들의 과업이었다는 점 - 그리스 문화에 나타난 몇몇 이념의 진보에서 이러한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다고 나는 생각한다._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 p61


 헤르더는 다른 책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에서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한 그리스 문화와 뒤를 이어받는 로마 문화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다뤄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의 패권이 스파르나, 테베로 넘어가면서 그리스 문명 자체가 쇠퇴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구조적으로 전쟁국가이면서 병영국가였던 로마가 계승한 그리스는 스파르타의 '애국심'과 군대사회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기반 위에 수립된 고대 제국 로마. 스파르타의 '애국심'은 로마 제국의 '시민 의식'의 기반이 되었고, 중세 '신앙'의 기반이 된 반면, 아테네의 '계몽'은 르네상스(Renaissance)때까지 겨울잠을 잘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인간의 능력과 노력의 방향은 장년의 나이에 도달했다. 로마인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로마 민족은 그 얼마나 높은 언덕 위에 서 있었던가! 그리고 이 언덕 위에 그 얼마나 거대한 신전을 건설했던가! 이들이 건설한 공공건물과 전투기구, 그 계획과 실행수단은 세계 전체의 콜로세움이 되었다! 로마에서 유희가 벌어졌을 때, 세 개의 대륙에 걸쳐 피가 흐르지 않는 경우가 있었던가? 이 제국의 위대하고 존엄한 국민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힘을 떨쳤던가!(p63)... 로마인들이 주둔했던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수세기에 걸친 로마의 지배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폭풍은 모든 민족이 지닌 민족적 사고방식의 가장 깊은 내실까지 휘몰아쳤다._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 p64


 물론, 이처럼 생각하는 것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닐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독일의 계몽주의가 민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보다 복잡하게 흘러간 19세기의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분명있다. 그렇지만, 이번에 수많은 사상가들의 다양하게 사용한 '계몽'이라는 의미 중 하나를 건져야 한다면, 헤르더의 개념을 가져가고 싶다. 이 정도로 '계몽'의 개념사를 일단 정리하고, 다른 연관 개념사와 관련해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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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2-13 1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계몽의 여러가지 층으로 나누는 의미를
돌이켜 생각하며
모든 사실로 증명하지 않고
추론함으로써
사유하는 정신의
큰 두가지 방법의
근원을 규명하는데
문제가
있다는거죠?

첫줄 읽고 또 읽고 댓글부터 씁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1-02-13 12:27   좋아요 3 | URL
초딩님께서는 이미 책을 읽으신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코젤렉의 글의 의미를 잘 짚으셨다 여겨집니다. 조금 부연하자면 근대 이후 여러 의미로 사용된 ‘계몽‘의 뿌리를 앞서 말한 두 영역에서 찾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많은 부분을 설명하지만, 초딩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 또한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필요한만큼, 상황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코젤렉의 생각 또한 현상학의 틀을 사용하기에 전부를 설명하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초딩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2-13 14:34   좋아요 2 | URL
일제 시대 때의 브나르도 운동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측면은 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그 타협이 굴종으로 보이기도하고,
너무 오래지속했던 조선의 양반체제의 붕괴를 사회주의 운동으로 그리고 평등을 위한 신분타파 운동으로 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현상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고 ㅜㅜ 사실 현재에서는 화자의 색이 입혀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해도
현재의 우리도 현재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회고한다는 것은 반성과 긍정적인 미래를 위함이라는 관점에서보면
얻을 것을 취한다는 입장이 도움이 될 것 같구요.
그렇다 해도 긍정 또한 편향되면, 진실을 보지 못하니 비판의 냉정한 눈을 유지해야할 것이고요. 또 그러기 위해서는 편협하지 않기 위해 많이 알고 열려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코젤렉 읽어 보고 싶은데 우아 씨리즈가 많네요. 마음을 비우고 언급하신 계몽만 봐도 좋겠다 생각합니다.
:-) 사유를 자극하는 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2-13 14:57   좋아요 1 | URL
1919년 3.1 만세항쟁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독립투쟁 방식 중 하나가 교육을 통한 자각운동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투쟁을 생각하면 후손들을 생각했던 선조들의 사랑이 느껴져 뭉클해집니다. 브나로드 운동도 이러한 교육투쟁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실을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교육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결실을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초딩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동물철학 - 발췌 - 지만지 고전선집 316 지만지 천줄읽기
장 바티스트 드 라마르크 지음, 이정희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생명의 진정한 요소를 규명하고자 한다면, 생명은 그것이 영위되는 모든 신체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를 취한다면 생명의 존재에 실재로 핵심적인 요소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조직화 계획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_ 라마르크, <동물 철학>,p140

장 바티스트 드 라마르크(Jean-Baptiste de Lamarck, 1744 ~ 1829)은 <동물철학 Philosophie Zoologique>을 통해 생명의 본질이 신체 내에 있음을 강조한다. DNA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시절에 생명 존재의 핵심 요소에 대한 라마르크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비록,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용불용설(用不用說 Lamarckism)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라마르크의 뛰어난 통찰이 갖는 의의는 줄지 않을 것이다...

습성에 의해 변화가 이루어지기에 충분할 만큼 기관을 사용하여 얻어진 모든 변화는 수정 과정에서 이들 종의 생식에 전체적으로 일조하는 개체에 공통적인 경우 세대에 걸쳐 연속적으로 보존된다. 결국 이 변화는 실제로 그것이 형성되는 경로에 의해 획득되지 않고도 세대를 이어 동일한 환경을 따르는 모든 개체에 그와 같이 전파되고 전달된다... 어떠한 결함이나 형태의 특이성이 획득되어 나타날 때, 만일 이 경우 두 개체가 언제나 함께 결합된다면, 이들은 동일한 특이성을 생성하게 될 것이며, 또한 후속 세대는 그와 같은 결합으로 한정되며, 따라서 특이하게 구분된 인종(race)이 형성될 것이다. _ 라마르크, <동물 철학>,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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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난 대패배가 겹쳐진 결과, 두 수도(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볼가강에 이르는 광대한 농촌 지대와 몇백만이나 되는 농부들이 집단 농장 정권에서 떨어져 나가고, 모든 공화국들이 독립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촌은 집단 농장에서 해방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농노제적 정령에서 해방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침입자들이 이처럼 우둔하고 교만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독일 대제국한테 편리한 집단 농장 제도를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러시아를 식민지화하겠다는 바보 같은 구상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민중의 애국심은 그것을 억누르기에 바빴던 자들을 위해서 사용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가 러시아 공산주의 25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언젠가는 빨치산의 진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점령하의 농부들은 자기 위지로 빨치산이 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처음에는 빨치산에 빵이나 가축을 주지 않기 위해 무장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의 <수용소 군도 5>를 읽던 중 한 구절에 시선이 머문다. 해당 구절에서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만일 독일의 침략이 영토를 병합하는 제국주의 침략이 아니었다면, 소련은 스스로 무너질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만약, 소비에트 연방에 내재된 불만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었다면,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독일군의 비참한 패퇴는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유전을 손에 넣지 않고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독일군의 분석도 현실적인 요청에 기반한 것이라 어느 편이 더 바람직한 전략이었을 것이라 판단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솔제니친의 생각처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적당히 물러났다고 해도, 미국이 가세한 서부전선에서 온전한 승기를 잡을수 있었을까. 


 역사에 '만약에' 라는 가정을 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기에 독일군의 동부전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 접자. 다만, 이와 비슷한 사례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도 있어 이를 옮겨본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기 마련인 것일까.


 연 燕나라 신하가 왕을 해치고, 전횡을 앞세우던 시기 제 齊 선왕(宣王, BC 350 ~ BC 301)은 군대를 일으켜 신하를 죽이고, 연을 차지하였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는 <전국책 戰國策>, <사기열전 史記列傳> <맹자 孟子> 등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최근 읽고 있는 <자치통감 資治通鑑>에서 내용을 옮겨본다. 



 

제 齊나라 사람들이 그 북방에 있는 연 燕나라를 정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어떤 사람은 과인에게 연을 빼앗지 말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과인에게 이를 빼앗으라고 합니다. 만승 萬乘의 나라가 만승의 나라를 쳐서 50일에 이를 들어버렸으니 사람의 힘으로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어서 빼앗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니, 이를 빼앗는 것이 어떻겠소?"... 맹자가 대답했다. "만승의 나라가 만승의 나라를 치는데, 단사호장 簞食壺漿으로 왕의 군대를 영접한다면,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물이나 불을 피하고자 합니다. 만약에 물은 더 깊어지고, 불은 더욱 뜨거워진다면 또한 돌아설 뿐입니다."_사마광, <자치통감 3> 中


 제 선왕은 맹자(孟子, BC 372 ~ BC 289)의 말을 듣지 않고 연나라를 합병하고 약탈하게 되었지만, 제나라가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다른 나라 연합군에 의해 결국 쫓겨 나게 된다. 제나라의 굴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아 그 후에는 오히려 연나라에게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잃는 수모를 당하면서, 전국시대 3강(强) - 진 秦, 초 楚, 제 齊 - 의 위상을 잃으면서 몰락하게 된다. 만약, 제나라의 정벌이 없었다면, 진나라의 통일 대신 삼국정립 三國鼎立이 이루어졌을까. 이 역시도 모를 일이겠다. 다만, 선왕의 연 정벌이 난왕(赧王) 원년(丁未, BC 314)에 이루어진 사건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불과 40년도 안 된 시기에 뒤바뀌어진 제와 연의 운명은 참으로 얄궂다. 


 난왕 36년(壬午, BC 279), 연인 燕人들이 안평 安平(산동성 임치현의 동쪽)을 공격하였는데, 임치 臨淄의 시연 市掾으로 하여금 모두 쇠망으로 수레의 축을 싸도록 하였다. 성(安平城)이 무너지게 되자 사람들이 다투어 문으로 나가니 모두 수레의 축이 잘리고 수레가 부서져서 연에게 잡힌 바 되었지만 다만 전단의 종인들은 수레의 축을 쇠로 감싼 것 때문에 벗어나 드디어 즉묵 卽墨(산동성 즉묵현)으로 달아났다. 이때 제의 땅은 모두 연에 귀속하게 되었지만, 다만 거 莒, 즉묵만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데..._사마광, <자치통감 4> 中


 다시 시대를 바꾸어 보자.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의 동부전선이 전격적의 전형이었다면,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동남아시아 전선, 대중국 전선 또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만약, 일본제국이 동남아 전선에서 제국주의의 해방군으로 만족하고, 돌아갔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이 역시 의미없는 가정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극히 최근까지(그리고 지금도) 동남아시아 지역에 이어지고 있는 친일(親日)정서는 보다 더 깊어졌을 것이라는 사실.  


 2차 세계대전 중 약 3년8개월에 걸친 일본의 점령은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동남아시아 사회에 여러모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서구 식민지배를 일시에 종식하고, '대 大동아시아 공영권',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 같은 인종주의적 수사와 함께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백인불패 白人不敗 신화를 불식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이란 특수한 환경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일본군정에 동원되고, 전례 없는 혹독한 체험을 하는 동안 전반적으로 반식민주의 정서가 크게 고양되었다. 그결과 전후 강력한 재식민지화를 계획하던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예상치 못한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_소병국, <동남아시아사>, p441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는 <쇼와 육군>에서, 마리우스 B. 잰슨 (Marius B. Jansen, 1922 ~ 2000)은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 저자들은 일본제국군의 문제를 실용주의적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대 정신의 상실에서 찾는다. 만약 일본이 직접적인 침략이 아닌 문화제국주의를 통한 간접지배를 펼쳤다면, 우리는 일본에 지금보다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더 종속된 관계로 묶여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른바 폭력을 반대한다는 일본 지식인들이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이후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면 역사의 흐름이 꼭 그렇게 흘렀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겠지만....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군사력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그 착각을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시기의 군인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심리를 낳았다. 결국 군사는 국가의 위신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유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셈이다.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p136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무르익어 가던 시절 활동가들이 얻은 괄목할 만한 지적, 정치적 경험은 다름 아닌 일본 사회가 서양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점이라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p535)... 진정한 진보로 이어질 이성적인 계획에 눈을 뜨면서 폭력적인 수단을 버렸던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들과, 입으로는 그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이성에 등을 돌리고 근거 없고 시대착오적인 미신의 불합리로 자신의 조국을 내모는 허망한 시도를 하면서 폭력에 호소한 후세의 아류들의 차이점을 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_ 마리우스 B. 잰슨,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p575


 마지막으로, 정치 사상으로 가지는 공자(孔子, BC 551 ~ BC 479)의 인(仁), 맹자의  의(義)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도덕사상으로 진부하게 다가오는 사상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정명(正名)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누가 그것을 쉽게 비판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큰 무력을 찾기 힘들 것이라는 점에서 <중용 中庸>에서 말한 강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수용소 군도> 에서 묘사된 지옥도(地獄道)와 같은 삶 속에서 나온 작가의 작은 세상 이야기를 통해 여러 생각을 해본다. 이제 다시 <수용소 군도>안으로 들어가야겠다...


 10장 章. 故君子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그러므로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흐르지 않으니, 아~ 그러한 강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가운데 우뚝 서서 치우침이 없으니, 아~ 그러한 강 强함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있어도 궁색한 시절에 품었던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니, 아! 그러한 강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없어도 평소에 지녔던 절개를 죽음이 이를지언정 변치 아니 하니, 아~ 그러한 강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_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 역주>,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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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2-09 16: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에 읽은 이와나미 신서 <독소전쟁>
을 보니, 히틀러의 대소전쟁은 이미 시작부터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뚜렷한 전쟁의 목표가 없었다. 폰 클루게와
구데리안의 중부집단군이 개전과 동시에 그
야말로 동부전선을 휩쓸면서 적도 모스크바
를 함락시켰어야 했는데, 쓸데 없이 키예프
공략전을 시도하면서 소련을 초반에 압도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먹었지요.

다음해인 1942년에 모스크바 공략 대신 선택
한 우크라이나의 곡창과 카프카즈의 석유를
노리고 출발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는
결국 독일 전쟁기계 베어마흐트의 몰락의 단초
를 제공했죠.

사실 독일 베어마흐트를 저지한 건 서유럽의
영미군이 주도한 제2전선이 아니라 스탈린이
이끄는 붉은군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솔제니친이 지적한 대로,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한 우크라이나 민중들의 불만을 잘 활용했다면
소련이 붕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가정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1-02-09 21:36   좋아요 4 | URL
레삭매냐님의 말씀처럼 독일군이 전격적으로 모스크바로 진군을 했다면, 제2의 나폴레옹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서부전선에서 적을 대서양 너머로 확실히 격퇴한 후에 동부전선으로 전선을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러기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변수가 있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모두에서 적을 맞이하는 상황에 놓였고, 더 안 좋았던 것은 양쪽 전선이 독일본토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긴 병참선이 요구되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전쟁 초기 지나치게 큰 승리를 거둔 것이 독일의 발목을 잡았다는 아이러니도 있습니다만....대충 몇 가지만 추려도 역사 속에서 고려해야할 변수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많은 변수가 맞물려 만들어낸 역사의 흐름이 과연 몇 개의 가정이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scott 2021-02-09 2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말에 동감 우크라이나를 지켰어야 했어요 소련에 곡식 저장고, 흑해 요새를 지켰어야 했는데 ,,,문제는 교묘했던 소련이 우크라이나 곳곳에 비밀 경찰들을 심어놔서 ,,,,

겨울호랑이 2021-02-09 21:39   좋아요 3 | URL
1941년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여기고 실제로 환영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타지 못했던 것은 독일 패착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만, 생각보다 동부전선이 빠르게 확대되었고, 동절기에 대한 독일군의 대비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생각해 본다면, 현지 민심까지 고려하지 못했던 독일군의 행태도 서툴렀다고 비판만 하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참 어렵네요^^:)

청아 2021-02-09 17: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사 귀엽네요! (할 수 있는 얘기가 이것뿐ㅠ) 찜해놓고 몇번읽어봐야 이해될듯! 도올님 글은 기본지식이 없인 힘들던데 겨울호랑이님은 프루스트는 물론 어려운 책도 척척~♡♡항상 놀랍습니다.(계속 따라 읽다보면 저도 언젠가?^^;;) 위 두분도 대단하심👍👍🧐!!

겨울호랑이 2021-02-09 21:41   좋아요 4 | URL
아닙니다. 제게 어려운 책을 미미님께서는 쉽게 읽으시는 것을 보면 어려운 책은 배경지식의 차이에서 오는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또, 제가 읽은 책을 제가 온전하게 이해한 것도 아닌 것을 보면 우리 모두가 같이 배워가는 이웃이라는 생각입니다. 미미님 감사합니다.^^:)

파이버 2021-02-09 20: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로필 사진 보석십자수인가요? 너무 귀엽습니다!♡ 다가오는 설 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1-02-09 21:43   좋아요 4 | URL
아, 프로필 사진은 연의와 함께 만든 톡톡블럭 - 헬로키티편 - 입니다. 요즘 연의가 레고 프렌즈와 톡톡블럭에 빠져 있어서 부품을 찾아 세팅하는 업무 중입니다. 파이버님께서도 행복한 설 연휴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choimos 2021-02-17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틀러의 소비예트 침공은 역사적 필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태인 박멸을 외쳤던 히틀러와 나찌스트들이 유태인의 최대 거주지역인 우크라이나을 침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독일 폴란드의 유태인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지역의 아쉬케나지 포그롬 유태인이 박해를 피해서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유태인 최대거주 지역을 침공해서 유태인을 박멸한다는 것은 히틀러와 나찌스트에겐 필연이었습니다. 솔줴니쯴의 < 200년을 함꼐>이라는 유태인 문제를 다룬 두권의 큰 책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솔제니쯴은 상당한 극우적 입장을 가진 슬라브 민족주의자란 점을 안다면 그의 주장에서 편견과 극단적인 가정을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www.ozon.ru/context/detail/id/223375496/

겨울호랑이 2021-02-17 18:40   좋아요 0 | URL
우크라이나에 그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군요. choimos님 말씀처럼 히틀러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략적 목적 이외에 정치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면, 더욱 그들의 승리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choimos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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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8 - 개혁과 (종교)개혁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8
아이케 볼가스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백승종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본래 '개혁 Reform'은 '혁명 Revolution'의 반대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19세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가, 사회 및 공동체 생활 전반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결과적으로 '개혁'은 적응, 일신, 변화를 뜻하는 모든 대상에 적용되었다.(p118)... 놀랍도록 짧은 기간 내에 이미 식고 말아서, "오늘날 개혁은 이미 부정적 개념"이 되어버렸다. 그 대립개념으로 잡은 것은 '반反개혁 Gegenreform'이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8>,p120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8 : 개혁과 (종교)개혁>에서는 '개혁'이라는 개념이 남용되면서 본래의 의미를 잃었음이 지적된다. 그렇지만, 오늘날 '개혁'이 본래의 개념을 잃어버리게 된 원인이 그것에만 있을까.

2세기 중엽부터 성聖과 속俗의 모든 영역에서 'reformare'의 개념은 이중적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 분명했다. 첫째, 그것은 부패한 현재의 모범적인 규준이 되는 과거 상태로의 회귀였다. 둘째, 그것은 과거의 모범과는 무관한 변화를 뜻했다. 두 번째 의미의 개념은 신학적으로 구원사의 전통에 뿌리박은 것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라는 이상을 향한 변화였다. 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8>,p20

'개혁'의 지향 안에 이미 상대적인 '과거'와 '미래'의 모순된 방향성이 내재한다면, 단어 안에 순환적 세계관과 직선적 세계관이 충돌하는 것이기에 개념의 붕괴는 필연적인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개혁'의 의미상실은 단어가 갖는 태생적 한계에서 원인을 찾아야할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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