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대패배가 겹쳐진 결과, 두 수도(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와 볼가강에 이르는 광대한 농촌 지대와 몇백만이나 되는 농부들이 집단 농장 정권에서 떨어져 나가고, 모든 공화국들이 독립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촌은 집단 농장에서 해방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농노제적 정령에서 해방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만일 침입자들이 이처럼 우둔하고 교만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독일 대제국한테 편리한 집단 농장 제도를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러시아를 식민지화하겠다는 바보 같은 구상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민중의 애국심은 그것을 억누르기에 바빴던 자들을 위해서 사용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가 러시아 공산주의 25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언젠가는 빨치산의 진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점령하의 농부들은 자기 위지로 빨치산이 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처음에는 빨치산에 빵이나 가축을 주지 않기 위해 무장했다.) _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5> 中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 ~ 2008)의 <수용소 군도 5>를 읽던 중 한 구절에 시선이 머문다. 해당 구절에서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만일 독일의 침략이 영토를 병합하는 제국주의 침략이 아니었다면, 소련은 스스로 무너질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만약, 소비에트 연방에 내재된 불만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었다면,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독일군의 비참한 패퇴는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유전을 손에 넣지 않고는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독일군의 분석도 현실적인 요청에 기반한 것이라 어느 편이 더 바람직한 전략이었을 것이라 판단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솔제니친의 생각처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적당히 물러났다고 해도, 미국이 가세한 서부전선에서 온전한 승기를 잡을수 있었을까.
역사에 '만약에' 라는 가정을 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것이기에 독일군의 동부전선에 대한 이야기는 이만 접자. 다만, 이와 비슷한 사례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도 있어 이를 옮겨본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기 마련인 것일까.
연 燕나라 신하가 왕을 해치고, 전횡을 앞세우던 시기 제 齊 선왕(宣王, BC 350 ~ BC 301)은 군대를 일으켜 신하를 죽이고, 연을 차지하였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는 <전국책 戰國策>, <사기열전 史記列傳> <맹자 孟子> 등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최근 읽고 있는 <자치통감 資治通鑑>에서 내용을 옮겨본다.
제 齊나라 사람들이 그 북방에 있는 연 燕나라를 정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어떤 사람은 과인에게 연을 빼앗지 말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과인에게 이를 빼앗으라고 합니다. 만승 萬乘의 나라가 만승의 나라를 쳐서 50일에 이를 들어버렸으니 사람의 힘으로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어서 빼앗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니, 이를 빼앗는 것이 어떻겠소?"... 맹자가 대답했다. "만승의 나라가 만승의 나라를 치는데, 단사호장 簞食壺漿으로 왕의 군대를 영접한다면,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물이나 불을 피하고자 합니다. 만약에 물은 더 깊어지고, 불은 더욱 뜨거워진다면 또한 돌아설 뿐입니다."_사마광, <자치통감 3> 中
제 선왕은 맹자(孟子, BC 372 ~ BC 289)의 말을 듣지 않고 연나라를 합병하고 약탈하게 되었지만, 제나라가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다른 나라 연합군에 의해 결국 쫓겨 나게 된다. 제나라의 굴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아 그 후에는 오히려 연나라에게 국토의 거의 대부분을 잃는 수모를 당하면서, 전국시대 3강(强) - 진 秦, 초 楚, 제 齊 - 의 위상을 잃으면서 몰락하게 된다. 만약, 제나라의 정벌이 없었다면, 진나라의 통일 대신 삼국정립 三國鼎立이 이루어졌을까. 이 역시도 모를 일이겠다. 다만, 선왕의 연 정벌이 난왕(赧王) 원년(丁未, BC 314)에 이루어진 사건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불과 40년도 안 된 시기에 뒤바뀌어진 제와 연의 운명은 참으로 얄궂다.
난왕 36년(壬午, BC 279), 연인 燕人들이 안평 安平(산동성 임치현의 동쪽)을 공격하였는데, 임치 臨淄의 시연 市掾으로 하여금 모두 쇠망으로 수레의 축을 싸도록 하였다. 성(安平城)이 무너지게 되자 사람들이 다투어 문으로 나가니 모두 수레의 축이 잘리고 수레가 부서져서 연에게 잡힌 바 되었지만 다만 전단의 종인들은 수레의 축을 쇠로 감싼 것 때문에 벗어나 드디어 즉묵 卽墨(산동성 즉묵현)으로 달아났다. 이때 제의 땅은 모두 연에 귀속하게 되었지만, 다만 거 莒, 즉묵만 아직 떨어지지 않았는데..._사마광, <자치통감 4> 中
다시 시대를 바꾸어 보자.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의 동부전선이 전격적의 전형이었다면,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동남아시아 전선, 대중국 전선 또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만약, 일본제국이 동남아 전선에서 제국주의의 해방군으로 만족하고, 돌아갔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이 역시 의미없는 가정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극히 최근까지(그리고 지금도) 동남아시아 지역에 이어지고 있는 친일(親日)정서는 보다 더 깊어졌을 것이라는 사실.
2차 세계대전 중 약 3년8개월에 걸친 일본의 점령은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동남아시아 사회에 여러모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서구 식민지배를 일시에 종식하고, '대 大동아시아 공영권',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 같은 인종주의적 수사와 함께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백인불패 白人不敗 신화를 불식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이란 특수한 환경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일본군정에 동원되고, 전례 없는 혹독한 체험을 하는 동안 전반적으로 반식민주의 정서가 크게 고양되었다. 그결과 전후 강력한 재식민지화를 계획하던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예상치 못한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_소병국, <동남아시아사>, p441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는 <쇼와 육군>에서, 마리우스 B. 잰슨 (Marius B. Jansen, 1922 ~ 2000)은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 저자들은 일본제국군의 문제를 실용주의적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대 정신의 상실에서 찾는다. 만약 일본이 직접적인 침략이 아닌 문화제국주의를 통한 간접지배를 펼쳤다면, 우리는 일본에 지금보다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더 종속된 관계로 묶여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른바 폭력을 반대한다는 일본 지식인들이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이후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하는 모순된 행동을 보면 역사의 흐름이 꼭 그렇게 흘렀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겠지만....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군사력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그 착각을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시기의 군인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심리를 낳았다. 결국 군사는 국가의 위신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유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셈이다.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p136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무르익어 가던 시절 활동가들이 얻은 괄목할 만한 지적, 정치적 경험은 다름 아닌 일본 사회가 서양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점이라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p535)... 진정한 진보로 이어질 이성적인 계획에 눈을 뜨면서 폭력적인 수단을 버렸던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들과, 입으로는 그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이성에 등을 돌리고 근거 없고 시대착오적인 미신의 불합리로 자신의 조국을 내모는 허망한 시도를 하면서 폭력에 호소한 후세의 아류들의 차이점을 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_ 마리우스 B. 잰슨,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p575
마지막으로, 정치 사상으로 가지는 공자(孔子, BC 551 ~ BC 479)의 인(仁), 맹자의 의(義)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도덕사상으로 진부하게 다가오는 사상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정명(正名)의 이름으로 행해질 때 누가 그것을 쉽게 비판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큰 무력을 찾기 힘들 것이라는 점에서 <중용 中庸>에서 말한 강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수용소 군도> 에서 묘사된 지옥도(地獄道)와 같은 삶 속에서 나온 작가의 작은 세상 이야기를 통해 여러 생각을 해본다. 이제 다시 <수용소 군도>안으로 들어가야겠다...
10장 章. 故君子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그러므로 군자는 화합하면서도 흐르지 않으니, 아~ 그러한 강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가운데 우뚝 서서 치우침이 없으니, 아~ 그러한 강 强함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있어도 궁색한 시절에 품었던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니, 아! 그러한 강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나라에 도가 없어도 평소에 지녔던 절개를 죽음이 이를지언정 변치 아니 하니, 아~ 그러한 강 强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로다! _도올 김용옥, <중용 한글 역주>, p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