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다층성은 회고적으로 '계몽' 개념의 의미 내용을 오직 두 정신사적 뿌리들로부터 연역하려는 시도가 문제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 정신사적 뿌리들이란 첫째, 데카르트 인식론의 이념 영역, 그리고 이 인식론이 사유의 자기 확실성과 진리 인식 방법을 근거 지음.(p29)... 둘째, 종교적, 형이상학적 빛 이론들의 이념 영역. 이 영역은 "자연적인 빛 lumen naturale"이론의 근대적 변천을 걸쳐 앞에서 언급한 첫 이념 영역과 밀접하게 만난다.(p30)... 대략 1770년부터 '계몽'은 "앎의 수준"이라는 의미 변형과 연계되어 예컨대 공동체 Gemeinwesen나 민족과 같은 도덕적, 문화적 상태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해가 계속 형성되면서 '계몽'은 이후 한 공동체, 민족, 시대 또는 지리적 공간의 전형적인 정신적 능력들과 표현 형식들의 전체를, 그리고 똑같이 그러한 물질적, 기술적 숙련들과 자식들의 전체를 의미할 수 있게 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31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의 6번째 주제는 "계몽 Aufklarung"이다. 근대와 뗄 수 없는 관련있는 이 단어에 대한 의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으며, 그 의미가 확장, 변형된 역사를 지녔기에 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느껴진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을 읽다보면, 이 단어만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도 별로 없을 듯하다.


 1786년 칸트는 한 시대를 계몽하는 것을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로 본 반면에, 한 개별 인간을 계몽하는 것을 당시로선 비교적 쉬운 일로 여겼다. 실러에겐 이 관계가 정확히 정반대다. 그에게 현 시대의 계몽은 문젯거리가 아니다. 이 시대는 이미 계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리가 밝게 비추었는데도  동시대인들에게 진리 수용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147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계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코젤렉의 조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누가, 누구에 의해, 무엇을, 어떤 근거로, 어떤 수단으로, 어디로 이끄는가. 이러한 코젤렉 조언은 '빛을 만들었다 en+light'는 영어 계몽(啓蒙 enlightment)을 잘 풀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추가적으로 계몽의 주체와 계몽의 대상을 넣고, 왜 그렇게 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대마다 다른 색깔의 빛으로 표현된 '계몽'이라는 현상의 공통인자를 발견할 수 있다. 

 

참된 진리 자체가 빛으로 밝혀주고, 이로 인해 인식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 ~ 430)의 조명설(Illuminatio)의 구조 안에서, 심훈(沈熏, 1901 ~ 1936)의 소설 <상록수>에 나타난 브나로드 운동의 현상을 떠올린다면 계몽의 대강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계몽'의 의미들에서, 그리고 이 의미들로부터 전개되는 계몽 개념의 그때그때 행해지는 주제 선택과 파급 범위와 평가와 적용 방식은 누가 누구에 의해 무엇에 대해 어떤 근거에서 어떤 수단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계몽되어야"한다는 것인가라는 일반적인 물음에 그때마다 구체적으로 답변하는 것에 의존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33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에 수록된 여러 단어들 중 다수가 이르면 17세기, 늦어도  18세기 후반 이후에 변형되거나 새롭게 의미를 추가된다. 이는 독일어의 개념을 설명하는 사전의 성격 상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 ~ 1805)라는 독일의 거장들이 출현한 시기라는 점과 영국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과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9)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시기였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아마도, 이는 개념사들의 전반적인 설명이 되겠지만 적어도 '계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조금 특별한 설명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 ~ 1803)의 '계몽'인식을 살펴본다면, 그가 스파르타에 '애국심'이라는 사상을, 아테네에 '계몽'이라는 사상을 부여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르더는 헬라스의 두 도시국가가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 BC 460 ~ BC 445)은 이들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해석한다고 볼 수 있을까.


 헤르더는 '계몽'을 '인본성'의 본질 인식이자, 그 정신적 영향들로 언급된다. 이 영향에 의해 세계 창조자인 유일신에 관한 이론이 모든 철학과 종교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헤르더)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비교하면서 애국심과 계몽에 있어 인간성의 모든 인륜 문화가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두 개의 극점을... 포착해 스파르타엔 애국심의 극점을, 아테네엔 계몽의 극점을 부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계몽'을 '국가기술'과 연관시키며 이로써 민족에 어울리는 책무에 대해 그 민족의 계몽을 생각하고 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141


 일반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한 스파르타의 견제 때문이라고 해석한 투키티네스(Thucydides, BC 465 ~ BC 400)의 분석이 일반적이지만, 투키티데스와 헤르더의 해설을 결합하여 '경제적 원인으로 발생한 전쟁이 가져온 정치적인 의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스파르타의 '애국심'이 아테네의 '계몽'을 이겼다고 볼 수 있겠다.


 23 (4) 이번 전쟁은 아테나이인들과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에우보이아 섬을 함락하고 맺은 30년 평화조약을 파기함으로써 일어났다. (5) 앞으로 어느 누구도 왜 헬라스인들 사이에 이런 큰 전쟁이 일어났는지 묻지 않도록, 나는 그들이 조약을 파기하게 된 원인과 그들의 쟁점을 먼저 기술하겠다. (6)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다._투퀴티네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 p46 

 

 그리스가 문화, 언어, 예술, 학문의 씨앗을 다른 곳으로부터 얻어왔음은 내가 보기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각, 건축, 신화, 문학 등의 몇몇 예에서 이는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모든 것에 완전히 새로운 본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남들로부터 얻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는 점, 단어의 원래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모든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그리스인들의 과업이었다는 점 - 그리스 문화에 나타난 몇몇 이념의 진보에서 이러한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다고 나는 생각한다._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 p61


 헤르더는 다른 책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에서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한 그리스 문화와 뒤를 이어받는 로마 문화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다뤄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의 패권이 스파르나, 테베로 넘어가면서 그리스 문명 자체가 쇠퇴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구조적으로 전쟁국가이면서 병영국가였던 로마가 계승한 그리스는 스파르타의 '애국심'과 군대사회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기반 위에 수립된 고대 제국 로마. 스파르타의 '애국심'은 로마 제국의 '시민 의식'의 기반이 되었고, 중세 '신앙'의 기반이 된 반면, 아테네의 '계몽'은 르네상스(Renaissance)때까지 겨울잠을 잘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인간의 능력과 노력의 방향은 장년의 나이에 도달했다. 로마인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로마 민족은 그 얼마나 높은 언덕 위에 서 있었던가! 그리고 이 언덕 위에 그 얼마나 거대한 신전을 건설했던가! 이들이 건설한 공공건물과 전투기구, 그 계획과 실행수단은 세계 전체의 콜로세움이 되었다! 로마에서 유희가 벌어졌을 때, 세 개의 대륙에 걸쳐 피가 흐르지 않는 경우가 있었던가? 이 제국의 위대하고 존엄한 국민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힘을 떨쳤던가!(p63)... 로마인들이 주둔했던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수세기에 걸친 로마의 지배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폭풍은 모든 민족이 지닌 민족적 사고방식의 가장 깊은 내실까지 휘몰아쳤다._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 p64


 물론, 이처럼 생각하는 것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닐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독일의 계몽주의가 민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보다 복잡하게 흘러간 19세기의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분명있다. 그렇지만, 이번에 수많은 사상가들의 다양하게 사용한 '계몽'이라는 의미 중 하나를 건져야 한다면, 헤르더의 개념을 가져가고 싶다. 이 정도로 '계몽'의 개념사를 일단 정리하고, 다른 연관 개념사와 관련해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02-13 1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계몽의 여러가지 층으로 나누는 의미를
돌이켜 생각하며
모든 사실로 증명하지 않고
추론함으로써
사유하는 정신의
큰 두가지 방법의
근원을 규명하는데
문제가
있다는거죠?

첫줄 읽고 또 읽고 댓글부터 씁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1-02-13 12:27   좋아요 3 | URL
초딩님께서는 이미 책을 읽으신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코젤렉의 글의 의미를 잘 짚으셨다 여겨집니다. 조금 부연하자면 근대 이후 여러 의미로 사용된 ‘계몽‘의 뿌리를 앞서 말한 두 영역에서 찾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많은 부분을 설명하지만, 초딩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 또한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필요한만큼, 상황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코젤렉의 생각 또한 현상학의 틀을 사용하기에 전부를 설명하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초딩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2-13 14:34   좋아요 2 | URL
일제 시대 때의 브나르도 운동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측면은 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그 타협이 굴종으로 보이기도하고,
너무 오래지속했던 조선의 양반체제의 붕괴를 사회주의 운동으로 그리고 평등을 위한 신분타파 운동으로 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현상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고 ㅜㅜ 사실 현재에서는 화자의 색이 입혀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해도
현재의 우리도 현재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회고한다는 것은 반성과 긍정적인 미래를 위함이라는 관점에서보면
얻을 것을 취한다는 입장이 도움이 될 것 같구요.
그렇다 해도 긍정 또한 편향되면, 진실을 보지 못하니 비판의 냉정한 눈을 유지해야할 것이고요. 또 그러기 위해서는 편협하지 않기 위해 많이 알고 열려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코젤렉 읽어 보고 싶은데 우아 씨리즈가 많네요. 마음을 비우고 언급하신 계몽만 봐도 좋겠다 생각합니다.
:-) 사유를 자극하는 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2-13 14:57   좋아요 1 | URL
1919년 3.1 만세항쟁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독립투쟁 방식 중 하나가 교육을 통한 자각운동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투쟁을 생각하면 후손들을 생각했던 선조들의 사랑이 느껴져 뭉클해집니다. 브나로드 운동도 이러한 교육투쟁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실을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교육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결실을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초딩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