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로 널리 알려진 빅터 플랭클(Victor E. Frankl, 1905 ~ 1997)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The Will to Meaning : Foundations ans Applications of Logotherapy>에서 자신의 이론인 로고테라피 Logotherapy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의지 意志 와 삶의 의미 意味, 그리고 이들의 관계라 생각된다.

 

 로고테라피의 인간에 대한 개념은 다음 세 개의 기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자유 의지 freedom of will,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will to meaning, 그리고 삶의 의미 meaning of life이다.(p34)... 인간의 의지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의지이다. 인간의 자유는 어떤 조건을 피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그가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 그것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p35)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빅터 플랭클에 의하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상황을 바꿀 정도의 힘을 갖지 못한 불완전한 것이다. 의지를 통해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의 대응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절망시킬 정도의 어려운 상황에 닥쳤을 때 의지만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의지를 가진 이들이 무너지는 과정이 잘 묘사되고 있다. 반면,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낸 저자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3의 원리란 의지의 자유와 함께 의미, 즉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삶의 의미 - 인간이 찾으려고 노력해 왔던 바로 그 의미가 있다는 것과 인간에게는 이 의미를 성취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p11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우리가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자신을 통합시킬 것을 주문한다. 세상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지어 이원론(二元論, dualism)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종합적으로 바라봤을 때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 자신을 조망할 수 있게 된다. 변증법의 합(合)의 단계가 여기서도 요구되는 것이고, 이것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짓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인간을 생물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에 투사를 하면 그 결과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하나는 그 결과가 생물적인 유기체 biological organism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기제 psychological mechanism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신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아무리 서로 모순된다 하더라도 차원적 인간론의 견지에서 본다면 이 모순이 더 이상 인간의 통일성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p46)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신체적, 정신적 현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그 수준을 초월해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새로운 차원이란 순수 지성 noetic에 입각한 차원, 생물적인 차원이나 심리적 차원과는 구별되는 noological 차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차원이다.(p37)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이렇게 인간이 통합적으로 자신을 고양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부산물로 얻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행복, 자아 실현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빅터 플랭클에 따르면 이들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쾌락을 추구한 에피쿠로스(Epicuros, BC 341 ~ BC 271)와 반대 위치에 서 있는 저자의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쾌락을 목표로 하면 할수록 더욱 그 목표로부터 빗나가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행복의 추구' 그 자체가 그것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순리적으로 쾌락은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의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목표의 달성을 통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결과라는 것이다. 목표의 성취가 행복을 느낄 이유를 만들어낸다.(p58)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자아 실현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제일 우선시 되는 의지도 아니다. 자아 실현 자체에 목표를 두게 되면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적인 특성과 모순을 이루게 된다. 행복과 마찬가지로 자아 실현도 하나의 결과, 즉 의미를 성취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p64)... 나는 자아 실현을 '삶의 의도성에 의해 얻어지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p65)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나는 맛의 즐거움, 사랑의 쾌락, 듣는 즐거움,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서 생기는 즐거운 감정들을 모두 제외한다면, 선 agatbon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름다움과 탁월함 arete 등은 우리에게 쾌락을 제공할 때 가치를 지닌다. 이들이 쾌락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p40) <쾌락> 中 - 인생의 목적에 관하여 -


 에피쿠로스 학파의 창시자인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으며, 쾌락을 주는 것은 좋은 것(善)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렇지만, 빅터 플랭클에 의하면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능력이 없는 존재다. 인간이 가진 의지의 힘이란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만 가능하기 때문에, 행복의 추구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행복을 동기의 목표로 삼으면 필연적으로 그것을 관심의 목표로 삼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해야 할 이유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고, 그러면 행복 그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만다.(p59)... 행복과 쾌락은 모두 성취의 대체물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쾌락 원리가 권력에의 추구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것이다.(p6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행복과 쾌락을 추구한 에피쿠로스의 주장대로라면, 고통과 시련은 우리가 피해야할 악 惡이다. 오직, 행복과 쾌락이 아타락시아 ataraxia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선이라면 우리는 이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렇지만, 빅터 플랭클의 삶의 의미는 시련을 통해서도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한 단계 도약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궁극적인 의미는 더 이상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영역에서가 아니라 실존적인 영역에서, 우리의 존재를 넘어선 믿음을 통해 포착할 수 있다.(p228)... 낮은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높은 차원에서는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p23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그렇다면, 빅터 플랭클이 말하는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가 말한 의미는 '가치중립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발견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의미는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그것 자체로는 중립적인 것들에 우리가 투사시킨 어떤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런 중립성의 견지에서 현실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투사되어 있는 하나의 스크린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p97)...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p99)... 의미란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어떤 사람에 의해서, 그런 질문을 수반하고 대답을 요구하는 상황에 의해서 그렇게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바로 그것이다.(p101) <삶의 의미를 찾아서> 中


 <삶의 의미를 찾아서> 내용 전체를 통해서 저자는  한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믿음'을 강조한다. 믿음을 통해 하나된 자신을 바라봤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 속에서 우리는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 ~ 1855)가 말한 불안의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불안을 통해서 개인이 신앙을 지향하도록 교육 받을 때, 불안은 바로 그 자신이 낳는 것을 뿌리뽑을 것이다. 불안은 운명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바로 개인이 운명을 신뢰하기를 원할 때, 불안은 일변하여 운명을 없앤다. 왜냐하면 운명은 불안처럼 그리고 불안은 가능성처럼 마녀의 편지 Hexenbrief, magic picture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운명과의 관계에서 스스로에 의해서 그렇게 변형되지 않을 때, 그는 항상 그 어떤 유한성도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변증법적 앙금을 남길 것이다.(p404) <불안의 개념> 中


 키에르케고르가 불안의 의미를 개인 신앙의 고양 高揚에서 찾고 있듯이, 우리 삶의 불확실성을 믿음의 차원으로 극복하자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전편 <죽음의 수용소에서>보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독자들은 딱딱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렇지만, 저자의 체험이 어떻게 이론으로 녹아들어갔는가를 생각하면서 읽는다면 나름의 재미를 느끼며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떠오른 생명파 시인 청마 유치환(柳致環, 1908 ~ 1967)의 시 詩를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운명 運命에 대하여 (2연)


 운명 運命이란 산 山처럼 엄숙하게 생긴 것은 아니다. 낙엽 落葉같이 흔하고 값 없어 거리에 굴르는 그 어느 하나를 주워 네 것이라 하여도 매 마창가지 - 외롭고 슬프고 의지 없게 마련이거늘 오늘 너보다 더욱 크낙한 것의 당차한 조락 凋落의 계절에서 너는 마땅히 배아 胚芽를 갖지 못한 무수한 낙엽 落葉의 그 한 이파리임을 깨쳐야 할 것이다.(p142) <청마시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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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8-04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어요.
시원하고 즐거운 일들 가득한 주말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겨울호랑이님, 기분 좋은 토요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8-04 19:40   좋아요 1 | URL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있네요. 다음 주만 넘기면 더위가 가시리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북다이제스터 2018-08-04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무더운 날씬엔 책 어디서 읽으세요?^^

겨울호랑이 2018-08-04 21:52   좋아요 1 | URL
저는 집에서 주로 읽습니다. 손에 익은 책을 보는게 좋아서요 ㅋ 북다이제스터님께서는 시원한 도서관을 가시나요?^^:)

2018-08-05 0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5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