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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자 선언 - 99%의 풍요를 위한 자본주의 경제를 열다
요한 노르베리 지음, 김종현 옮김 / 유노북스 / 2025년 8월
평점 :
세계를 연구하면서 오히려 시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엘리트만이 시민으로서 자유로운 선택권을 보호받으며 가장 강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야말로 권력층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자유 시장과 사유 재산에 기반한 자발적 계약이 바로 그 핵심이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유는 자본가들이 항상 선하게 행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때 자유 경쟁과 선택의 기회가 그들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 '시작하며'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요한 노르베리는 경제역사학자로 <월스트리트저널>, <리즌>, <스펙데이터> 등 당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스웨덴, 영국, 미국 등에서 자본주의를 주제로 다루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국제경제, 세계화, 자본주의 등을 주제로 다룬 다수의 책들을 집필했다.
총 아홉 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자본주의자 vs 비자본주의자, 성장 vs 재분배, 파이 키우기 vs 제로섬, 억만장자 vs 우리, 거인들 vs 도전자들, 정부 주도 vs 시장 주도, 중국 vs 세계, 환경 vs 성장, 자본주의 vs 인간성 등을 주제로 풍요와 성장을 위한 미래를 제안한다.
자본주의로 인해 나타나는 병폐로 흔히 부의 독점과 빈부 격차의 심화, 그리고 지구촌 환경 오염 등 여러 문제점들이 그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시스템들이 대두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 추세다.
자본주의자를 선언한 이유
실패한 자본주의라는 기억이 잊혀질 즈음,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들은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이들은 보호주의,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 경직된 규제, 과도한 세금 같은 비합리적인 정책들을 시도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이는 경제 성장의 동력을 짓누를 뿐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장 취약한 계층이 떠안게 되고, 세계 경제 자체를 위협한다. 현재 자행되고 있는 무식한 트럼프의 경제 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난 20년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지구촌은 충격적인 팬데믹과 전쟁을 겪어야 했다. 아이로니하게도 이 20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였다. 극빈층은 70% 감소, 즉 매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13만 8,000명이 빈곤에서 탈출했기에 압도적인 성과임에 분명하다. 이같은 발전은 확산되어야 한다. 바로 저자가 자본주의자를 선언한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가능케 했나?
경제가 급성장한 시기와 장소를 확인해보면, 1,800년 동안 전 세계 평균 소득의 변화가 거의 없다가 200년 전 경제가 가장 자유로운 국가였던 영국에서 변화가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산업 혁명의 시작으로 영국의 극심한 빈곤률이 절반으로 감소했던 것이다. 그 뒤를 서유럽과 미국이 뒤따라 자유로운 경제 체제를 갖추었다. 이후 세계는 산업화된 국가와 개발 도상국,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로 나뉘었다.
이후 곧 동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이 기존의 세계관을 뒤흔들면서 자본주의의 성공 사례가 서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그러자 “몇몇 개발 도상국이 세계 시장에 진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이들이 너무 작아서 무시할 만한 수준이기 때문이다.”라는 내러티브가 등장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정반대의 주장을 듣는다.
“개발 도상국이 성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들이 너무 커서 가능했을 뿐이다.”
한 개인이 한 국가를 망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넬슨 만델라의 민주화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후임 음베키 정부하에서 인플레이션이 안정되고 정부부채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경제 성장률은 5%에 도달했었다. 그러나, 이후 좌파 세력을 이끌던 주마가 권력을 잡고 '신자유주의' 모델을 반대하며,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는 변화를 초래했다. 투자보다는 소비와 부패에 공공지출을 쏟아부었다. 주마와 그 측근들은 국내 총생산의 약 20%를 빼돌렸던 것이다.
계속되는 정전 사태와 기반 시설의 붕괴로 인해 경제는 결국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경제 성장이 너무 더디다고 불평하는 독재자는 마치 수확을 기다릴 인내심이 없는 농부와 같다. 그는 사람들에게 씨앗을 배불리 먹도록 허용하며 인기를 얻지만, 결국 남은 씨앗이 줄어들어 다음 계절에는 먹을 것이 더욱 부족해진다. 다른 사람들의 수확이 바닥날 때까지 소비하는 것이다. 마거릿 대처가 말했듯이 남의 것을 모두 써 버리면 더는 지속할 수 없게 된다. 포퓰리스트들이 나라를 망치는 스타일은 대체로 이러하다. 나라 곳간을 물쓰듯 마구 무지몽매한 국민들에게 뿌리면서 오직 유권자의 득표에만 올인하는 동안 나라 기둥은 썩어 무너지게 된다.
시장 경제를 계획할 수 있는가?
경제 성장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다. 유럽의 식민 지배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 독재자들이 농민들에게 강제로 현대적 생산 방식을 도입시켰을 때도 경제는 성장했다. 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성장이 아니다. 경제 성장은 사람들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창출함으로써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일반적인 규칙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일반적인 규칙은 간단하다. 한 나라가 부유할수록 사람들은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며, 거의 모든 삶의 질 지표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보인다. 물론 경제 성장은 자연을 착취하는 강력한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부유한 나라일수록 환경을 보호하고 피해를 복구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그 나라가 이를 우선순위로 삼기로 결정하는 순간 문제 해결 능력 또한 강해진다.
이는 우리가 어떤 가치를 중시하든 경제가 더 빠르게 성장하는 사회를 선호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미래에 어떤 위기나 재난이 닥치든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지식, 더 발전된 기술력을 갖춘 상태에서 이를 맞이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이전에 해결한 문제들이 또 다른 예기치 못한 문제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일자리를 뺏겼는가?
2000년대 첫 10년 동안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는 560만 개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는 생산량 감소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생산량은 증가했다. 즉 일자리가 감소한 이유는 공장이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빼앗긴 것은 중국이나 멕시코가 아니라 작업 현장에 투입된 산업용 로봇에 의한 것이다.
만약 1950~1960년대가 서구 노동 시장의 황금기였다면, 왜 그 시대에 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때의 경험을 ‘더러움, 피로, 지루함, 망가진 몸, 탈진한 정신’으로 기억할까? 노동자들이 그렇게까지 자녀들에게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하려고 애쓴 이유는 그들이 다른 종류의 직업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의 한 철강 노동자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이곳에 들어오면 나갈 수 있을지조차 모른다. 설령 나간다고 해도 팔 하나나 눈, 다리를 잃을 수도 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133쪽)
심지어 러스트 벨트의 삶을 묘사한 <힐빌리의 노래>에서도 2025년 미국 부통령으로 취임한 J.D. 밴스는 자신과 친구들이 성장하면서 한 가지 공통적으로 동의했던 점을 이렇게 언급했다. "그 누구도 블루칼라 직업을 갖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론 예외도 있다. 1950년대 디트로이트 자동차 산업의 노동자는 마치 꿈의 직업을 가졌던 것처럼 보인다.
부자는 노동자를 착취해서 돈을 버는 도둑인가?
자본주의에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몇 십년 동안 상위 1%가 대부분의 부를 차지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뒤쳐졌다. 왜 자본가들은 그렇게 많은 부를 가져야 하는가? 그들은 직접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유시장에서 이윤이 발생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진보 성향의 민주당원인 버니 샌더스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인정했다. 그의 발언이다.
"그렇다. 나는 백만장자다. 나는 베스트셀러를 썼다. 당신도 베스트셀러를 쓰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놀랍도록 유리한 시스템이다. 기업가는 빚을 지고, 집을 담보로 잡고, 친구와 가족을 등한시하며 밤낮없이 노력한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성공한다 해도 그가 가져가는 것은 고작 2.2%에 불과하다. 반면 우리는 소파에 누워 영화를 보면서도 나머지 98%를 가져간다. 더 낮은 가격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그만큼 구매력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형태의 불평등이다. 기업가들이 더 큰 이윤을 창출할수록 우리가 가져가는 98%의 가치도 커진다. 수십억 달러 규모의 이윤 중 2.2%만 차지하더라도 새로운 잉그바르 캄프라드,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희망은 수많은 사람에게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환경이 먼저인가, 성장이 먼저인가?
어느 것이 먼저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성장을 멈추면 과연 환경 문제도 해결되는가'를 고심해봐야 할 것이다. 성장이 지속될수록 산업현장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양의 증가로 인한 지구 온난화의 가속화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결과를 줄이려면 대대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
만약 탈성장을 선택한다면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아니다. 이는 기후를 인간에게 더 위험하게 바꿀 수 있다. 기후 변화에 적응하려면 또다른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에 비해 건강에 미치는 피해를 훨씬 효과적으로 줄인다.
국제재난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기후 관련 재해(가뭄, 홍수, 산불, 폭풍 등)로 사망할 확률은 1950년대 이후 90% 이상 감소했다. 이는 자연재해의 빈도가 감소해서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와 기술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이후 성장률을 0%로 유지했다면 이산화탄소는 덜 증가했겠지만, 매년 약 50만 명이 기후 재해로 목숨을 더 잃었을 것이다.
부유해질수록 환경을 더 잘 지킬 수 있다. 돈이 있으면 돈 이외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번영은 우리의 선호를 바꾼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지역 환경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게 되고, 상품이 어떻게 생산됐는지를 고민하게 되며, 또 서해안의 환경을 보호할 정치인을 선택한다. 부유한 경제는 친환경 기술의 연구개발에 자원을 투입할 수 있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쪽은
개인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국가다
이밖에도 저자는 자본주의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독점 시장을 파고들 시장이 남아 있는가?, 혁신과 성장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패권 경쟁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등을 화두로 삼아 이에 대한 해답을 재미나게 펼쳐나간다. 총 쉰 일곱 개의 이야기 모두를 만나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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