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 10년(993) 12월 경진일에 유주(儒州 : 하북 延慶縣) 동천(東川)에서 사냥을 하고, 배천례(拜天禮)를 행하였다. 이 달에 동경유수 소항덕(蕭恒德 : 고려사에서는 蕭遜寧) 등이 고려를 정벌하였다.
통화 11년(993) 봄 정월에 임인일에 회골에서 조공하였다. 병오일에 내탕전(內帑錢)을 내서 남경의 통군사군(統軍司軍)에 하사하였다. 고려 왕 왕치(王治 : 고려 成宗)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 표문(表文)을 올리고 죄를 청하니, 조서를 내려 여진에게서 취한 압록강(鴨淥江) 동쪽 수 백리 땅을 하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_ 김위현 외, <국역 요사 상>, p242
얼마전부터 KBS에서 모처럼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을 시작하면서 원작소설인 <고려거란전쟁>와 역사서인 <고려사 高麗史> 등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진 듯하다. 성리학적 질서에 의존한 조선(朝鮮)과는 달리 동북아에서 세력균형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고려와 발해를 멸망시키고,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통해 송(宋)을 직접 위협하고, 서하(西夏)를 아울렀던 요(療)와의 30년간의 전쟁과 승리는 역사의 통쾌한 순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고려와 거란의 30년 전쟁을 그들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통화 28년(1010) 5월 병오일에 고려의 서경유수(西京留守) 강조(康肇)가 그 임금 왕송을 시해하고, 왕송의 종형 왕순(王詢 : 고려 현종)을 맘대로 세우자, 각 도에 조서를 내려 '갑병을 잘 정비하여 동정[고려 정벌]을 준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가을 8월 무신일에 평주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정묘일에 황제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한다는 사실을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알렸다.
겨울 10월 초하루 병오일에 여진에서 좋은 말 1만 필을 진상하고, 고려를 정벌할 때 참전한 것을 간청하니 허락하였다. [고려] 왕순이 사신을 보내 군대의 출정을 멈추어 줄 것을 간청하는 표문을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을유일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니 강조가 맞서 대항하였으나 패배시키자, [강조]는 동주(銅州)로 물러나 주둔하였다. 병술일에 강조는 다시 출병하였으나, 우피실상온 야율적로가 강조와 부장(副將) 이립(李立)을 사로 잡았고, [달아나는 군사들을] 수십 리를 추격하여 죽였으며, 버린 군량미, 갑옷, 무기들을 노획하였다. 무자일에 동주(銅州), 곽주(霍州), 귀주(貴州), 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신묘일에 왕순이 사신을 보내 조근을 요청하는 표문을 올리니 허락하였다. 서경(西京)을 5일 동안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성의 서쪽에 머물렀다. 고려의 예부낭중(禮部郎中) 발해 타실(陀失)이 항복하였다. 경자일에 소배압과 야율분노 등을 보내 개경을 공격하게 하여 고려 병사들을 패배시켰다. 왕순이 성을 버리고 도망을 가자 마침내 개경을 불태웠으며 청강(淸江)까지 추격하였다고 돌아왔다.
통화 29년(1011) 봄 정월 초하루 을해일에 회군하였는데, 항복한 여러 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귀주(貴州) 남쪽의 험한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여러 날 동안 큰 비가 내려 말과 낙타가 모두 지쳐서 갑옷과 무기를 대부분 버리고, 날이 개자 겨우 강을 건넜다. 기축일에 압록강에 머물렀다. 경인일에 황후와 황제(皇弟) 초국왕 야율용우가 내원성에서 황제를 맞았다. 임진일에 조서를 내려 '각 군을 해산케 하라.'고 하였다. _ 김위현 외, <국역 요사 상>, p277
<요사 療史>에서 고려거란전쟁 30년을 다룬 기록 중 가장 상세한 것은 요나라 성종(聖宗, 982~1031)이 직접 참전하고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을 참패시킨 통주전투(通州戰鬪)가 벌어진 제2차 고려거란전쟁이다. 대신 서희(徐熙, 942~998)와의 담판으로 인한 강동6주 할양과 강감찬(姜邯贊, 948~1031)의 귀주대첩 등은 간략하게 기록된 것을 보면 자국의 승리를 강조하고, 패배는 축소하는 경향은 어느 나라 역사서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상영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시대를 다뤘다는 점에서 반갑기도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국정기조와 맞물려 나온 것과 같다는 느낌을 받아 조금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반되는 감정을 갖게 되는 드라마를 보며, 다른 한 편으로 서로 다른 두 당사자들의 시각을 비교해보는 것도 나름의미있는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다...
개태 7년(1018) 12월에 소배압 등이 다하(茶河 : 삽교천)과 타하(陀河 : 청천강)에서 고려와 싸웠는데, 요나라 군대의 전세가 불리하였다. 천운군(天雲軍)과 우피실군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고, 요련장산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天雲軍詳穩) 해리(海里) 등이 모두 죽었다. _ 김위현 외, <국역 요사 상>, p300
개태 9년(1020) 5월 경오일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야율자충이 돌아왔는데, 왕순(顯宗)이 표문을 올려 요청하기를 '번국이 되어 조공하고, 고려에 머물러 있는 왕인(王人) 야율지랄리(耶律只剌里)를 돌려보내겠다.'고 하였다. 야율지랄리는 고려에 6년 동안이나 잡혀 있으면서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임아로 삼았다. 신미일에 사신을 보내 왕순의 죄를 용서하고 아울러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_ 김위현 외, <국역 요사 상>, p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