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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ㅣ 강만길 저작집 1
강만길 지음 / 창비 / 2018년 12월
평점 :
17세기 경제계의 뚜렷한 변화 발전은 역시 상업 분야에서 두드러지며, 이와 같은 17세기 상업계의 현저한 발전이 곧 장차 도고상업을 일어나게 할 바탕이 된 것이라 이해된다. 17세기 후반기 상업계의 발전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첫째 대외국무역의 발달, 둘째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 셋째 국내 상업계에 있어서의 상업인구의 현저한 증가 등이다. 17세기의 대외무역에서 크게 진전을 보인 것은 역시 대청(對淸)무역이었고, 그것이 종래의 개시무역(開市貿易) 중심에서 후시무역(後市貿易) 중심으로 성격이 바뀐 점에 특징이 있다 할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07
강만길(姜萬吉, 1933 ~ )은 <조선 후가 상업자본의 발달>에서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상업부문에서의 급격한 변화에 주목한다. 이전시대 벽란도(碧瀾渡)를 중심으로 활발할 해외활동을 펼치며 고려시대의 중심지였던 개경(開京)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외무역을 엄격히 제한한 정책의 변화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조선시대의 쇄국정책이 고려세력의 탄압만을 위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대외무역을 정부에서 주도하고, 관련 이권을 한성부(漢城府) 일대의 상인들이 독점하는 형태의 조선 전기 상업은 국가독점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임진(壬辰)과 병자(丙子) 양 난을 겪으며, 중앙정부 권위의 쇠퇴와 대외무역에 사(私)무역의 비중이 커지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조선왕조 초기는 민간상인의 외국무역이 일절 금지됨으로써 고려시대의 활발하였던 외국무역을 주도하던 개성상인에게 타격을 주었고, 관부수요품(官府需要品) 및 대중국관무품(對中國官貿品)의 조달권을 비롯한 각종 상업상의 특권을 서울시전상인이 장악함으로써 개성상인은 고려시대의 정부 조달상(調達商)의 위치를 상실하여 곤경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개성상인은 왕조교체로 입은 타격을 극복하기 위한 활로를 국내의 행상로(行商路) 개척에서 구하여 성공할 수 있었으며, 왕조후기에 국내외 상업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자 의주(義州)와 동래(東萊)를 연결하는 외국무역을 주도하는 한편, 행상활동을 통하여 확보한 상업조직망을 이용하여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하는 도고상업을 전개하여 자본집적에 성공해갔다. 개성상인 자본의 성장과정은 한편으로 서울시전상인 및 공인 등 특권상인(特權商人)과의 투쟁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9
이러한 상황에 더해 상평통보(常平通寶)로 대표되는 화폐 유통이 촉진되면서, 중개무역을 담당하던 상인들은 화폐를 통해 대규모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를 기반으로 상업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지배력 강화가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마치, 근대 서양에서 금융자본에 의한 산업자본 지배를 떠올리게 하는 이같은 모습 속에서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얼핏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이러한 그림자는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설명에 따르면 3층 구조 중 2층 시장경제의 발전 위에 서 있는 최상위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보다는 역(逆)피라미드 구조의 조선 후기 상업구조의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엽에 걸쳐 위정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던 전황(錢荒) 문제는 곧 이 시기에 있어서의 금속화폐의 급격한 유통으로 빚어진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기도 하였다. 17세기 말 이후 금속화폐의 유통이 일반화해가고, 특히 그것이 농촌사회에 침투해감으로써 그곳에 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p214)... 요컨대 금속화폐의 전국적 유통이 이루어져가던 초기에는 그것 때문에 부의 편중화가 촉진되었고 나아가서 나아가서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의 집적이 이루어졌으며, 이와 같은 경제적 변동이 곧 조선후가 상업계에 도고상업을 발달하게 한 바탕이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15
저자는<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에서 18세기 이후 조선상업을 사상(私商)의 성장과 함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둘러싼 사상도고(私商都賈)와 관상도고(官商都賈)의 대립 속에서 각각 자본의 축적과 경쟁의 모습을 발견하지만, 시작부터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던 조선과 봉건제라는 지방분권의 전통을 가진 서양과는 시장경제의 출발점부터 달랐던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금난전권(禁亂廛權)은 시전이 가진 본래적인 특권적 도고상업을 벌임으로써 시전상인의 자본규모가 확대되어갔고, 이 때문에 도시 상업계 내에서의 상인과 수공업자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낳게 된 것이었으니, 상업자본에 의한 수공업자, 즉 공장(工匠)의 압박 내지 지배 현상이 발전하였던 것이다(p20)... 시장이 공장의 원료와 제품을 매점하는 수단으로는 정부가 허가하는 금난전권이 최대한으로 이용되었고, 따라서 이 시기의 시전과 공장 사이에는 특정 상품, 즉 원료와 가공품의 전매권을 둘러싼 치열한 분규가 일어나고 있었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1
18세기 이후부터는 서울시전상인과 공인(貢人) 등 특권상인층의 도고상업체제에 강력히 저항하면서 사상인층의 도고상업이 성장해가고 있었는데, 개성상인은 국내 상업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사상도고(私商都賈)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상인층의 하나였으며, 또한 이와 같은 도고상업을 통하여 상업자본은 집적되어갔던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49
중세 왕-제후 간의 느슨한 (수평관계에 가까운) 수직관계에서 제후들은 지역상인들을 육성하고 그들과의 결탁이 필요했던 유럽과는 달리, 고려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중앙의 통제를 받았던 조선시대에서 상업의 역사는'경쟁에서 독점'으로 가면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이 아니라, 독점권을 두고 벌이는 정치력의 다툼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해운의 경강상인과 육상의 개경상인과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만상(灣商)과 동래상인(東萊商人)은 하나의 독점권 또는 네트워크 권력으로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새로운 패권세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실체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경강상인의 미곡매점상업은 서울 시내 양곡의 가장 중요한 공급원인 강상미를 매점하고, 서울 시내의 곡가를 앙등시킴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 방법이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지방에 흉년이 들어 미귀(米貴) 상태가 되면, 그들이 이미 비축해두었던 강상미 혹은 공가미 등을 지방으로 운반 판매하여 취리(取利)하기도 하였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06
이 시기 개성상인 개인의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의 종류와 그 수입량을 짐막할 수 있지만, 한편 중국무역에 종사하던 개성상인이 '홍경래란'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사정도 아울러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개성인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 반이조성(反李朝性)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본성장도와 그것에 따르는 정치적 관심도 등이 바탕이 된 것이라 할 수 있겠고, 또한 조선왕조의 중앙정부 및 그것과 결탁되어 있는 서울시전에 대하여 항상 대립된 위치에 있던 그들이 반중앙정부군, 즉 홍경래군과 결탁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55
개성상인과 의주상인의 관계, 개성상인과 동래상인의 관계로 미루어보면, 개성상인은 국내의 각 상품생산지를 그 조직적인 상업망을 통하여 파악하는 한편, 의주상인과 동래상인을 조종하여 대중국무역과 대일본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 두 외국무역을 연결시킴으로써 국제간의 중개무역을 전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59
이처럼 조선 후기 상업에 있었던 일련의 변화를 정치의 관점에서 해석했을 때 조선 후기 농업부문에서의 대규모 유민의 증가와 몰락 양반의 증가가 노동력 공급의 증가와 함께 생산성의 증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소상인들의 활동에는 큰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는 현상과 충돌없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李榮薰, 1951 ~ )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이러한 점을 파고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이에 대해서는 향후 책의 리뷰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하고 일단 미루자.
대규모 정기시(定期市, fair)의 형성을 통해 사람과 물자가 교류되고, 이를 바탕으로 도시가 발달하며 산업의 발달로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점차 독점화되는 과정으로 진행된 유럽과는 달리, 경제적 중심지와 정치적 중심지가 일치되는 고려시대 이래 우리의 특수성은 권력투쟁적 경쟁의 모습을 띄었고, 조금이라도 승산을 높이기 위해 집중화의 양태를 띄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조선 후기 상업의 변화를 끊임없는 권력 분화를 통해 성장한 서양의 자본주의의 발전에 대응시키려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생각건대, 이 시기는 분산되어 있던 소생산자 중심의 생산계에 도고상업(都賈商業) 등으로 가치액이 증대된 상업자본이 침투하여 채무관계와 생산자재의 대여관계 및 합자관계 등을 통하여 점차 소생산자층을 예속시킴으로써 임금노동자화하고 있던 시기였다. 또 한편 주로 자연품만을 매매하던 상인이 상품경제의 발달, 자본규모의 확대, 도시의 발달 등으로 가공품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그것을 스스로 제조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제조와 판매를 겸하고 있던 소생산자층을 흡수하고, 대상인의 예하에서 분산된 소생산자로부터의 상품수집자 혹은 대상인 상품의 소비자에의 산매자(散賣者)의 위치에 있던 소상인층까지도 이제 점차 직접생산자로 전환시키면서 대상인에 대한 예속도를 높여가던 시기였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56
일반적으로 봉건사회 말기와 근대사회 초기의 상업계는 한때 자기모순적 상황 속에 빠지게 된다. 즉 이 시기에는 농촌 중심의 소생산지와 도시의 교역이 활발해지고 또 대외무역도 폭넓게 이루어져서 상업계 전반에서 현저한 발전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업계의 발전은 한편으로 부등가(不等價) 교환의 소지를 무너뜨리며 개별자본 간의 심한 경쟁을 유발하여 이 시기의 상업은 양도 이윤에만 의존하는 차원에서 탈피하지 않는 이상, 그것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 자체의 기반을 침식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여건 밑에서 상업자본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그것에 일정한 이익을 제공하는 대신 상업특권을 획득하며, 이 특권을 무기로 하여 소상품생산자를 시장으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었으니, 시전 설치 지역에 있어서의 금난전권의 가혹한 적용이 그것이었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23
비록, 조선 후기 상업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변화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라 여겨진다. 홍경래의 난(洪景來亂, 1811~1812)에 개성상인의 개입에서 보듯, 조선 후기에 일어난 수많은 민란의 배후에는 이들 개성상인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와 함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천주교 세력과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동학의 세력 확산에도 관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의 경우 오랜 기간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추측이 전혀 근거없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은 자본의 축적을 통해 '자본의 시대'가 아닌 '혁명의 시대'를 위한 준비였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근대(Moden)'이라고 부르는 시대에서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민혁명 등의 요소가 순차적으로 등장해서 작동해야한다는 역사적 필연주의에서 벗어나는 시각을 가진다면, 자본의 축적 대신 새로운 사상의 제시를 통한 계몽시대의 구현을 위한 자생적 근대화 노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를 검증하기 위한 연구는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되어야겠고, 평범한 일반 독자의 한 의견이라 무게감있는 주장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가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꽃피우는 것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리뷰를 갈무리한다...
봉건사회 말엽의 상업부활기 및 상업자본 집적기에는 상인자본이 수공업자와 소비자 대중 사이를 격리시키고 그사이에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하며 나아가서 수공업자를 지배하는 것이었지만, 서울시전의 경우 공장과 소비자를 격리시키는 방편을 금난전권에 의한 공장 원료의 매점(買占)에서 구하고 있다. 금난전권은 일반적으로 '어용(御用)시전이 가진 본래적인 전매(專賣)특권'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그것은 왕조후기의 상업발전을 배경으로 한 관상도고(官商都賈)의 자본집적의 방편으로서의 특권적 매점상업권(買占商業權)이라는 데서 그 경제사적 의미를 구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시전상인이 공장과 도시소비자 사이를 격리시키는 방편으로서 금난전특권을 이용하고 있음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176
유교사회로서의 조선왕조 사회는 근본적으로 상업에 대한 말업관(내지 천업관(觀)이 고정관념화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해소하고 상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또 종래 전통사회체제 내에서의 천민적(賤民的)이고 유리민적(流離民的)인 상인층에 대신하여 근대적 상인인으로서의 자질 높은 새로운 상인층의 형성을 위해서는 몰락양반층의상업계 투신이 바랄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_ 강만길, <조선 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 p260
18세기 이후 개성상인이 인삼의 재배와 홍삼 가공업을 경영하게 되는데, 이것은 외국무역과 국내의 도고상업을 통하여 형성 성장한 개성 상인 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해가는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경강상인 자본의 조선도고 경영과 함께 문호개방 이전 조선사회 토착자본의 경제사적 수준과 그 존재양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P19
조선왕조 상업사상(商業史上)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한마디로 도고상업시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7세기 이후의 상업, 즉 우리가 ‘상업부흥기‘라 생각하고자 하는 시기 이후의 상업은, 관상이라 지칭할 수 있는 상인이나 사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상인의 경우를 막론하고, 당시의 사람들이 도고상업이라 부르던 매점상업 형태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 P22
유수원의 이론에 따르면, 비시전계 상인의 활동을 철저히 억제하고 시전상인의 독점매매권을 확보하되, 일물일전 원칙을 지양하여 동종상품을 매매하는 몇 개의 시전을 두고 그들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을 인정함으로써 소비자와 생산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된 것이며, 동종시전들이 결탁해 그 독점적 지위를 유지 강화하기 위하여 고율가격(高率價格)의 확보 또는 가격의 부당한 인상을 통해 일으키는 폐단은 아직 고려되고 있지 않으며, 또 시전의 지나친 금난전권 행사 때문에 소생산자층의 생산이 위축되고 도시 소상인층의 활로가 막히는 문제는 중요시되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 P46
요컨대, 조선왕조의 초기부터 곡물운반 분야에 있어서의 사선 운반이 활발히 발달하였고, 특히 왕조의 후기로 넘어오면서 경강 사선에 의한 곡물운수업은 더욱 활발하였다. 17~18세기 이후에 이르러서 경강선인은 삼남지방의 정부 세곡 및 관료귀족층의 소작료 운반의 대부분을 청부하였고, 이로써 그들은 실질적으로 전국에서 가장 대규모적인 운수업자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 P96
요컨대, 조선왕조 후기에 있어서 개성이 인삼의 인공 재배와 그것의 홍삼으로의 가공업의 중심지가 된 것은, 그곳의 토양과 기후가 인삼재배에 적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인삼이 인공으로 재배되기 전부터 개성상인들이 인삼의 국내외 상업의 주도권을 가지고 그것으로 상업자본을 집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개성상인이 인삼무역과 도고상업을 통하여 집적한 자본이 인삼의 재배와 가공업에 투입된 것이었다. - P171
조선후기 사회의 상업사적 특징은, 이 시기에 매점상업, 특권상업 등이 발달하고 그것을 통하여 상업자본이 집적되며, 집적된 상업자본이 생산부문에 침투하여 그것을 지배해가는 점에 있지만, 시전상업계에 있어서도 특권상업체제가 발달하고 그 때문에 시전자본이 증대하였으며 그 결과 시전자본이 원료 매점, 상품 매점, 공장 고용 등을 통하여 수공업자들을 압박 내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개 18세기 후반기부터는 이와 같은 시전상업계의 특권체제가 해소되어가는 반도고(反都賈)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니, 이 반도고 세력의 중요한 요인의 하나 속에는 도시 수공업자의 저항력이 포함되어 있었다. - P201
도시 내의 일반 상인이 도고권에 저촉받지 않고 자유로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정책, 즉 통공정책의 실시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791년(정조 15)의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신해통공의 주창자는 당시의 좌의정 채제공이었다. 그는 시전도고로 인한 폐단으로 첫째 모든 일상생필품의 전매화로 인한 소상품생산자, 소상인층 및 소비자층의 피해, 둘째 극심한 물가고, 셋째 유통질서의 문란 등을 들고, 이것이 모두 도고를 금하면 해소될 것이라 하고,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을 폐지하고 육의전 이외 시전의 도고권도 폐지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 문제는 정부에서 신중한 토의를 거듭한 후 그대로 채택되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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