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경백자  兵經白字>는 게훤(掲暄, 1613 ~ 1695)이 저술한 병법과 관련한 책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병법과 관련한 100자 운(韻)을 제시하면서 병법과 관련한 내용을 구성한다. 상 중 하로 구성된 3권은 각각 지부(智部), 법부(法部), 연부(衍部)로 되어 있으며, 이하 세부 주제어를 제시하여 각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책의 내용이 크게 어렵지 않지만, 글을 읽다보면 다음과 같은 상반된 내용이 언급되기도 하기에 현실 적용에 어려움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법부>의 '과장하기'와 '축소시키기' 편이 그렇다.

 

 과장하기(張) : 아군의 위엄을 과장하여 적의 사기를 빼앗고 변칙적인 계책을 내어 승리를 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장되게 위세를 부려 실용적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니, 허약한 군대에게는 좋은 방법이다.(p132) <병경백자> 中

 

 축소시키기(減) : 자신의 정통(精通)하고 능숙한 능력을 감추는 것은 적군의 성대한 기세를 약화시킬 수 있으니, 오직 축소시키는 것만이 적군의 강력함을 이길 수 있고 오직 축소시키는 것만이 적군의 강력함을 가지고도 아군을 어렵게 만든다. (p134)  <병경백자> 中

 

 개별적으로는 이해되지만, 전체적으로는 서로 모순(矛盾)되는 듯한 위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병법서를 읽기 전 무엇보다도 자기 이해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를 잘 설명한 내용이 너무도 유명한 <손자병법 孫子兵法>의 다음 구절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말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적을 알지 못하고 나만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게 될 것이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게 될 것이다."(p106) <손자병법> 中

 

 따라서 용병을 아는 자는 출동해도 미혹되지 않고, [군대를] 일으켜도 막힘이 없다. 따라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는 곧 위태롭지 않으며 하늘을 알고 땅을 알면 승리는 곧 온전해질 것이다.(p257) <손자병법> 中

 

 많은 이들이 현대 기업의 경영(經營)을 전쟁에 비유하며, 병법서를 읽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현대 경영서적들이 옛 병법과 고대 전투를 사례로 다루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법서에서 제시한 수 많은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어떤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연후에 병법서를 읽더라도 크게 늦지 않을 것임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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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10: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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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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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10: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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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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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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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7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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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와 어른의 갈등

 

 어린이와 어른의 갈등은 전 인류의 역사에 걸쳐 끝없이 이어졌왔다... 어른들의 가장 분명한 죄악은 - 신체적 질병과 마찬가지로 신경질적이고 정신적인 장애 - 어린이에게 반영되어 어린이의 삶 속에서 이러한 부분들이 첫 징후로 나타났다... 죄 없는 어린이들은 오랜 세월 어른들의 실수로 인해 숙명적으로 일탈된 상태에서 발달을 진행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p181)

 

 20세기 초 지식인들이 사회 문제 원인을 어린이 교육에서 찾으면서 가정과 학교 문제가 공론화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1870 ~ 1952)는 <어린이의 비밀 Il segreto dell'infanzia>를 통해 아동 발달, 교육적 지원의 가능성과 어려움 그리고 어린이와 어른들의 관계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몬테소리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크게 부모의 임무와  어린이의 권리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는 어린이의 보호자다. 그러나 어린이의 창조주는 아니다. 부모는 마음을 열고 준비된 마음으로 매우 중대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부모는 아동의 권리를 인정하고 이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p193)... 우리는 운명적으로 우리 미래의 삶을 위해 어린이를 새롭게 보아야 한다.(p192)

 

 오랜 시간 동안 어른들의 법칙에 의해 문화가 상당히 발전해왔음에도, 어린이는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어린이는 자신의 가정에서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자원만 제공받았다. 사회는 이 부분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p194)... 이러한 사회에서 부모의 임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부모만이 자신의 자녀를 구원할 수 있고 또 구원해야 한다.(p195)

 

 20세기 초 당시 아동에 대한 체벌이 일반화된 상황 속에서 몬테소리는 아동의 권리와 보호를 주장했고, 몬테소리 교육법을 보급시켰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지금 어린이들을 둘러싼 환경문제는 얼마만큼 개선되었을까? 경제적인 여건은 과거보다 나아졌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노력은 아직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우리 어린이집에서 값비싼 장난감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게 하더라도 어린이들은 장난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나를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을 통해 나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것과 가치 있는 것을 사용할 수 없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장난감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장난감이 어린이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어린이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으며, 자기 발달을 돕는 모든 것에 매혹되지만 한가한 활동에는 민감하지 않다.(p129)   

 

  아이들의 발달과 성장을 돕기 위한 부모의 노력이 값비싼 장난감보다 낫다는 몬테소리의 조언 속에서 부모들의 길을 찾게 된다. 좋은 장난감이나 옷을 사주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부모들 스스로 위안하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와 함께 요리를 하거나 - <아빠와 아들> -, 아빠와 역할을 바꿔보거나 - <내가 아빠고 아빠가 나라면> - , 함께 놀이를 하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 - <아빠랑 함께 피자 놀이를> - 을 어린이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닐까.  5월 5일 어린이 날을 맞이해서,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행복한 하루를 보내길 바라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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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5 0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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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5 0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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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5-05 02: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빠와 함께 피자놀이를‘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아이들 어릴때 아빠랑 많이 했었거든요. 책 따라서

겨울호랑이 2018-05-05 09:58   좋아요 1 | URL
^^:) 그러셨군요. 저 역시 아빠들이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야할 지 잘 모르는데, 그 방법을 잘 알려주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2018-05-05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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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5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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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5 1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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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5 14: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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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5 14: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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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6 1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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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5-05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어제보다 기온이 많이 올라간 날씨같아요.
겨울호랑이님,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5-05 16:2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날이 어제보다 더 좋네요.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연휴 되세요!^^:)

데미안 2018-05-16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어린이날,어린이는 왜 햄버거와 피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할까? 특별한 날에 부모들이나 보호자들이 생색내며 사주는 것들이 아이들 입장에서는 선물받고 대단한 것이라 생각하는 것뿐이고 어른들은 특별한 날에는 어른들 입장에서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추측되는 것을 사주는것이 결국 아이와 어른 사이의 진정한 소통을 전제로 못한 것은 아닐까 싶더군요. 저희 아이들은 연어알초밥과 쑥된장을 좋아하니까 어린이날 그런 걸 선물해줄 걸 그랬어요. ㅋㅋ

겨울호랑이 2018-05-16 22:40   좋아요 0 | URL
^^:) 아이들 입장에서는 부모의 선물을 마지못해 ‘기쁘게‘받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부모에게 아이가 옆에 있는 것 자체로 기쁠 수 있다라면, 아이들에게 부모 역시 그렇지 않을까하는 질문도 하게 됩니다. 함께 하는 시간.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겠지만, 데미안님께서 말씀하신 소통의 출발이라는 면에서도 의미있다 여겨집니다^^:)

데미안 2018-05-16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맥락인 것같아 적어 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유, 균등, 안정이 실현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한히 보카노프스키 과정을 지속시킬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수백만의 일란성 쌍생아를 생산할 수 있다. 대량생산의 원칙이 마침내 생물학에 응용된 것이다.(p13) <멋진 신세계> 中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는 올더스 헉슬리(A.L.Huxley, 1894 ~ 1963)가 그린 디스토피아(dystopia) 이야기다. 공유, 균등, 안정이 실현된 미래사회는 우리의 생각만큼 밝지만은 않다.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이 <법률 Nomoi>에서 그려낸 이상사회의 모습과 과학기술이 결합된 미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멋진 신세계> 속의 공유, 균등, 안정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희망과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공유


  "요즈음에 와서 나는 그렇게 바람둥이 노릇이 싫어졌어, 그렇게 느껴지는 때가 있는 것은 사실이야."... "우리는 모두 유희의 규칙을 지켜야 해. 결국 만인(萬人)은 만인의 소유물이니까." "옳아. 만인은 만인의 소유물이야."(p57)  <멋진 신세계> 中


 가정, 가정 - 한 남자와 주기적으로 잉태하는 한 명의 여자와 여러 가지 연령층의 소란한 아이들로 인해 시끄럽고 질식할 것같이 비좁은 몇 개의 방. 공기도 공간도 없다. 소독도 제대로 하지 않은 감옥이다. 어둠과 질병과 악취...(p49)  <멋진 신세계> 中


 '아버지'라는 말은 어린애를 낳는다는 행위의 징그러움이나 불륜스러운 어떤 것을 연상시킬 뿐 음탕하지는 않으며 단순히 천하고 춘화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똥 냄새가 나는 더러운 것이었는데(p192)... 사람을 보고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농담치곤 지나친 말이었다. 그것은 음담패설이었다.(p193)  <멋진 신세계> 中 


 <멋진 신세계> 속 미래에는 가정은 해체되고,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은 언어(言語) 상에만 존재하는 개념에 불과하다. 미래사회 속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말한 '공동 식사', '공동 양육'의 모습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가정'의 역할일 것이다. 플라톤의 이상사회에서 '가정'은 번식을 위한 필요악(必要惡)이지만, 과학 기술이 발달한 <멋진 신세계> 속의 미래에서는 더이상 가정은 필요치 않게 되었다.

 

 우리의 신랑들이 혼인 이전의 시절에 비해 조금도 다르지 않게 또는 덜하지 않게 공동 식사로 식생활을 해야만 한다고 우리가 말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는 어떤 전쟁이나 그 밖의 다른 것으로서 똑같은 영향력을 갖는 것이 인구 부족 상태에 처한 사람들의 어려움으로 해서 법제화된 것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를 겪어 보고 공동 식사를 이용하도록 강요당한 사람들에게는 이 관습이 안전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해서 여러분의 공동 식사 관행이 제도화되었습니다.(780b) <법률> 6권 中


 2. 균등


  <멋진 신세계> 속에서 균등(均等)의 개념은 '만인은 다른 만인의 소유물'이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난다. 그렇지만, 인도 카스트 제도와 같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 내에서 이들이 만한 균등은 평등(平等)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분제는 사회권력에 의해 유지되며,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 ~ 1679)가 <리바이어던 Leviathan>에서 그린 자연 상태는 엄격한 사회 권력에 의해 극복되었다.


 "만인은 다른 만인을 위해 일합니다. 그 누구라도 없어진다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엡실론 계급조차도 유용한 것입니다. 엡실론 계급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인은 다른 인간들을 위해 일합니다. 그 누구라도 없어지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p92)... 우리는 습성이 다르게 길러졌기 때문이야. 또한 우리는 처음부터 유전인자가 달라."(p93)  <멋진 신세계> 中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는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경쟁(competition)이며, 둘재는 자기 확신의 결여(diffidence)이며, 셋째는 공명심(glory)이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인간은 그들 모두를 위압하는 공통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p171) <리바이어던 1> 中


3. 안정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류의 번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의 미래에서는 알약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누구나 성인(聖人), 군자(君子)의 경지에 쉽게 오를 수 있게 된다. 누구나 격정적인 감정 대신 중용(中庸)에 이를 수 있는 미래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진다.


 억제된 충동은 넘쳐흐른다. 범람하는 것은 감정이며 격정이다. 심지어 그것은 광증이다. 그 물살의 힘과 제방의 높이와 견고성에 좌우된다. 가로막지 않은 강물은 지정한 수로를 평온하게 흘러가서 평온한 행복에 당도한다... 감정이란 욕망과 그것의 충족 사이에 게재된 시간 속에서 고개를 드는 법이다. 그 시간 간격을 단축하면 과거의 필요없는 장애는 모두 제거된다.(p57)  <멋진 신세계> 中


 분노를 진정시키고 적과 화해시키고, 인내하고 수난을 참도록 하는 소마가 있다 이말이야. 옛날에는 대단히 어려운 노력을 거치고 오랜 수양을 쌓아야 겨우 도달되는 미덕이었지, 그러나 이제 반 그램짜리 두세 알만 삼키면 그러한 수양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말일세. 이제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네.(p302)  <멋진 신세계> 中


 교육 전체가 그와 같은 것들과 관련해서 알맞은 법률을 갖추고 있으며, 이에 더해 관리들의 시선은 다른 데를 응시하지 않고, 언제나 바로 젋은이들을 지켜보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하고많은 인간적인 다른 욕망들에 대해 적도(適度)를 지키는지를 말입니다...누가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겠으며, 무슨 처방을 써서 이들 각자에게 이와 같은 위험을 피할 길을 찾아 주게 되겠습니까? 도무지 쉽지가 않습니다.(836a) <법률> 8권 中


  플라톤은 <법률> 속에서 교육은 '혼(魂)'을 최선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역할과 함께 사회화(社會化)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멋진 신세계> 속에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교육의 역할은 사회화로 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6월의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벌거벗은 6,7백 명의 어린 소년들이 금속성의 소리를 지르며 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공놀이도 하고 두서넛씩 짝을 지어 꽃밭 속에서 조용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p40)... 그러나 그들의 미소에는 어딘가 아랫사람을 봐주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견습생들 역시 이러한 어린이들의 유희를 졸업한 지가 얼마되지 않았으므로 다소의 경멸감 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란 불가능했다.(p41) <멋진 신세계> 中


  세 살과 네 살, 다섯 살 그리고 더 나아가 여섯 살까지도 아이들의 혼의 성향에는 놀이들이 필요하게 할 것입니다.(793e)... 이 나이 또래의, 곧 세 살에서 여섯 살까지의 아이들은 마을마다의 신전들에 모여야 합니다. 각 마을 사람들의 아이들이 같은 곳에 함께 모이는 겁니다.(794a) <법률 제7권> 中


 진지해야할 일을 위해서는 놀이(paidia)까지도 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소년 소녀들이 합창가무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규칙(logos)에 따라 그리고 그럼직한 구실들을 갖는 때에, 저마다 건전한 상태의 부끄러움을 갖는 한도 내에서, 이들 남녀가 알몸 상태를 서로 보기도 하고 보여 주게도 하는 겁니다.(771e ~ 772a)  <법률 제6권> 中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낸 공유, 균등, 안정의 사회는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작품 전반에 깔린 짙은 어두움은 미래의 사회가 전체주의(全體主의)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발달한 과학기술과 전체가 강조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의 희망과 긍정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디스토피아에서 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 역시<멋진 신세계>를 통해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늙음'이 존재하지 않는 미래 사회에서 '노인'은 기피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노인의 눈은 움푹 패인 눈자위 속에서 아직도 특이할 정도로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노인의 눈은 한참 동안 레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처럼 표정도 놀람도 없는 눈초리였다. 그러고는 굽은 등을 한 채, 노인은 그들 옆을 엉금엉금 지나쳐서 사라져버렸다. "무서워요." 레니나가 속삭였다. "끔찍해요. 이런 곳엔 오지 말았어야 되는 건데."(p139)  <멋진 신세계> 中  


 그렇지만,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 '늙음'을 똑바로 바라본 결과 깨달음을 얻게 된 이를 알고 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BC 624 ? ~ BC 544 ?)다. 석가모니는 노인을 보면서 생노병사(生老病死)에 대해 고민하고 출가(出家)하여 훗날 해탈(解脫)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신들은 왕의 계획을 방해하여 싯다르타로 하여금 인간의 고통을 목격하게 만든다. 처음 싯다르타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늙은이를 만나고, 다음 날에는 "깡마르고 창백한 열에 들뜬 병자"를 만나며, 세 번째로는 묘지에 실려가는 시체를 본다. 한 시종은 왕자에게 누구든지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자는 평온하고 고요한 걸식 수행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모습에서 종교가 인간의 비참한 조건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큰 위로를 얻는다.(p104)... 그리고 그 장소까지 그를 이끌어주었던 신들과도 작별을 고했다. 그 이후부터 붓다의 신화적 생애 안에서 신들은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는 초자연적 존재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세계종교사상사 2> 中


 <멋진 신세계> 속에서 그려진 미래사회는 과학기술이 발달된 계급사회, 전체주의 사회다. 현대 과학의 발전과 최근 극우(極右)성향 정치인의 등장을 보면서 불길한 예언의 실현되는 것인가 하는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 그렇지만, '늙음'을 온전히 받아들여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게 된 석가모니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확인하게 된다. 


 '비록 인류의 도덕과 행복이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지 내다보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자만에 빠져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인류의 도덕과 행복은 자연과학의 발전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것이며, 또한 역으로 인류의 도덕과 행복이 과학의 성공에 일익을 담당하리라는 확신에 찬 희망을 품어도 좋을 것이다.'(p550) <호모 데우스> 中


 <멋진 신세계> 속에서 <호모 데우스>에서 말한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것이 <멋진 신세계>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보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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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4 0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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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4 08: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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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5-04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기독교적 유물론‘이 제게 또 다른 난제인데요.
지젝은 불교적 명상은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수단이어서, 가장 평화적인 것부터 가장 파괴적인 것까지 다양한 사회정치적 쓰임을 가질 수 있음˝(그의 책 <꼭두각시, 난장이,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으로 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히려 이용만 될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말하죠. 차라리 그에 대립되는 기독교적 사랑의 ˝비관용˝이 존재 질서 내부의 차이와 간극을 받아 들여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폭력적이지만 혁명적인 힘이 된다 하는데.....제가 뭉텅그려 표현하고 있어 오도될까 걱정되는데요.
겨울호랑이님이 <세계종교사상사2>에서 인용하신 거(˝그는 초자연적 존재의 도움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때문에 이 말을 꺼내 본 거였습니다.
지젝도 ˝기독교적 유물론˝ 견지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거든요.
˝내가 나 자신을 신성한 축복과 동일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오로지 신으로부터 분리라는 무한한 고통을 경험할 때에야 나는, 신 그 자신(십자가 위의 예수)과 경험을 공유한다.˝

겨울호랑이 2018-05-04 13:23   좋아요 1 | URL
제가 지젝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을 전제로 AgalmA님께서 말씀한 부분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지젝이 말한 ‘불교적 명상‘이라는 것은 수행자의 수준에 따라 깨달음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으로 ‘기독교적 사랑‘을 말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마치 우리가 낯선 곳에서 가서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는 것은 그것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최저한의 기대 수준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이용하듯이요.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 그리고, 기독교의 ‘선-악‘의 이분법적인 대립 속에서, 내재적으로 혁명에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응축시킬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지젝이 말한 부분은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부분 중에서 자신은 ‘인성‘에 대해서 공감을 한다는 내용으로 이해가 됩니다...

AgalmA 2018-05-04 13:33   좋아요 2 | URL
지젝은 불교의 관용과 포용을 좀 비겁? 소극적?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지젝이 표방하는 공산주의, 프롤리타리아의 단결 등에서도 볼 수 있듯 외부적인 혁명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사람이니 불교의 니르바나 같은 건 개인에서 그친다고 보는 거겠죠. 마르크스가 못 이룬 프롤레타리아 단결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니 만족스럽지 못할 만도 하지요.

겨울호랑이 2018-05-04 14:26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처럼 지젝은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동양 문화권에서는 <대학>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서처럼 개인의 변화로부터 사회적 변화까지 끌어낼 수 있다고 보기에, 지젝의 말을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겠지요...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 내게 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p32) 이상(李箱, 1910 ~ 1937) <거울>中


 이상의 시(詩) 속에서 '거울'은 분열된 자아로서 표현된다. '거울 속의 나'는 자신과 닮았지만,소리가 없는 세상이기에 자신과 교감할 수 없는 대상이다. 때문에, 대칭(對稱)적 위치에 있는 '거울 속의 나'를 통해 자기 발견을 할 수는 있지만 분명 거리감있는 다른 존재임이 작품속에서 드러난다. 


 '거울'은 빛의 반사에 의하여 사물의 영상을 만들어낸다. 시적 화자는 거울 속의 영상을 대상으로 현실적 존재로서의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대립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나'의 이중성은 자아의 분열 또는 대립의 의미로 해석된다.(p35) 

 

 사실, '거울'의 자기발견으로서의 역할이 이상의 작품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시간을 올라가 동양 고전인 <대학 大學>에서도 거울의 자기 성찰도구로서 기능이 표현되고 있다.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탕지반명왈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탕임금께서 쓰신 제기용의 성스러운 대야의 밑바닥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진실로 날로 새로워져라! 날로 날로 새로워져라! 또 날로 새로워져라!"(p289) <대학, 학기 한글역주> 中


 직접적으로 거울이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대야'가 자신의 모습을 비추면서 돌아보는 기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야=거울'이라고 본다해도 큰 무리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거울의 자기 대칭성은 공간적으로 여러 문화권에서도 공통적으로 자기 인식, 자기 발견,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入口)를 표현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Mirror 거울


 거울은 진리, 자기 인식, 지헤, 정신, '우주의 거울'로서의 영혼, 초자연적이고 신적(神的)인 지성의 반영, 신의 진리의 밝게 빛나는 표면, 태양과 달과 별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최고의 지知를 상징한다. 거울에 비친 영상은 현현(顯現) 세계(현세)이자, 인간의 자기 인식이다. 거울은 태양의 원반, 천공, 빛으로서 태양에 속하며, 동시에 밝은 빛을 내는 달빛이라는 의미에서 달에도 속한다. 거울은 마력을 가지며, 거꾸로 전도된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사원이나 묘지에 걸린 거울 표면을 아래로 향하게 하는 까닭은 '빛의 축'을 세워 영혼의 상승로로 삼기 위함이다.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中


   이처럼, 인류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거울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문학 작품 속에서 이러한 거울의 역할은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  1832 ~ 1898)의 <거울나라의 앨리스  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lice Found There>에서 잘 표현되는 것 같다. 주인공 앨리스는 다음의 말을 던진 후 거울 저편의 세상으로 건너가게 된다.


 "거울 속의 집에서 살면 어떨 것 같아, 키티?... 우리 거실 문을 활짝 열어두면 거울 속 집의 복도가 살짝 보인단다. 우리 복도랑 무척 비슷하지. 하지만 저 너머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어. 아, 키티야, 우리가 거울 속 집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분명히 저 안에는 무척 아름다운 것들이 있을거야! 그래, 키티, 저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유리가 아주 얇은 천처럼 부드러워서 우리가 통과할 수 있다고 상상을 하는 거야. 어머나, 거울이 안개 같은 것처럼 변하잖아!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아."(p208) <거울나라의 앨리스> 中


 <거울>에서 '나'는 거울 속의 자신을 통해 닮은 듯 다른 자아의 모습을 확인하고 섭섭함을 느꼈지만,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거울 너머의 세상에 대해 꿈과 희망을 가지고 결국 그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넘어갈 수 없는 현실에 낙담하는 어른은 분열로서 끝나게되지만, 동심(童心)을 가지고 희망을 바라보는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다는 뜻은 아닐런지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서 생각해본다.



 오늘은 근로자의 날. 노동절이었습니다. 

 회사에 나가지 않아 집에서 쉬는 날이었지만, 선생님인 아내는 출근하는 날이었기에 아이를 데리고 둘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울렛 한 편에 설치된 한 기계를 통해 연의는 잠시 동안 '공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공주 옷을 입은 거울 안의 연의와 거울 밖의 연의는 분명 다르지만, 그 표정만큼은 하나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같은 거울을 보고 또 다른 행복한 자신을 발견하거나, 불행한 자신을 발견하거나 그것은 관점의 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저는 거울 저편을 볼 수 없었습니다. 동전을 추가로 넣지 않아서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생각을 한 날이었습니다. 이웃분들 모두 하루 잘 마무리 하세요!


PS. 선생님은 근로자가 아니라 스승이라는 사실을 저와 아내는 매년 '근로자의 날'에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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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5-01 21: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 근로자가 아닌 스승으로 보는 것은 노동을 폄하하는 것 아닌지 은근히 우려됩니다. ㅠ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오해 여지가 있어 덧붙이면, 노동을 신성 시 하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노동은 절대 신성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에선요...ㅎㅎ
하여튼, 근로자의 날 이란 명칭은 하루빨리 노동자의 날로 바꾸어야 합니다.ㅋㅋ
‘근로’... 근면하게 일하는 것이 당위인 듯 한 개념이 넘 맘에 들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날 하루 종일 출근하여 일한 게 분해서 이리 말이 길어진 듯 합니다. 죄송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8-05-01 21:54   좋아요 3 | URL
요즘 선생님 또는 교사들은 노동자 대접도, 스승 대접도 못 받는 ‘주변인‘이 된 듯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특정인으로 보는 시각을 우리 모두 경계해야 겠지요^^:)

겨울호랑이 2018-05-02 06:47   좋아요 3 | URL
에고... 북다이제스터님께서는 바쁜 하루를 보내셨군요...ㅜㅜ 하루빨리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고 국경일로 지정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8-05-01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1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5-02 13: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 언제 겨울호랑이님 뵈면 동전을 손에 꼭 쥐어드리겠습니다;ㅋ;)...거울 저편에서 뭘 보실지 궁금하기도 하고요ㅋ

겨울호랑이 2018-05-02 13:33   좋아요 2 | URL
^^:) 이런... 저는 공주옷을 입고 싶지 않지만, AgalmA님께서 정 그러시면... 3,000원. 500원 동전 6개 감사합니다 ㅋㅋ

2018-05-03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3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3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18-05-04 1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뀐 프로필 사진 속 연의, 많이 자란 것 같아요. 처음 보았던 연의의 귀여운 이미지를 떠올리면 말이에요.
어린이날이 내일이네요. 온전하게 연의를 위한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5-04 11:24   좋아요 1 | URL
^^:) 자목련님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나무처럼 빨리 자란다는 것을 요즘 느낍니다. 아이들의 꿈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해 보는 요즘입니다. 자목련님께서도 즐거운 연휴 되세요!
 
한국통사 - 국망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거울 규장각 대우 새로 읽는 우리 고전 2
박은식 지음, 김태웅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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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금 망국의 처참함이 한민족보다 더 심한 것이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은 망망하고 쇠잔한 숨길은 깜빡깜빡 희미하여 아픔을 울부짖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을 스스로 그칠 수가 없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가 있으나 역사는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p27) <한국통사> 中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은 <한국통사>를 통해 한국 근대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정신을 보존할 수 있다면 다시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한국통사>에서 말하는 나라의 정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라의 혼과 백


 역사가 보존된다는 것은 나라의 혼(魂)이 보존된다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최대이며 최고의 나라를 들어 논한다면, 중국의 혼은 문학에 의탁하였고, 돌궐의 혼은 종교에 의탁하였다. 이는 혼이 강한 나라이다. 선비, 거란, 몽고와 같은 나라는 바야흐로 번성할 때는 능히 큰 땅을 정복하여 위엄을 천하에 떨쳤지만, 무력이 한 번 쇠약해지자 나라의 수명도 다하게 되었다. 이는 백(魄)이 강한 나라이다. 대개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선함(船艦), 기계(器械) 등은 백에 속하는 것으로, 혼의 됨됨은 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 것이다. 오호라! 한국의 백은 이미 죽었으나, 이른바 혼이란 것은 남아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p310) <한국통사> 中


 사람이 죽으면 '백'은 땅으로 돌아가고, '혼'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나라 역시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특히, '혼'이 '백'보다 더 중요하기에, 우리가 역사를 통해 '혼'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부흥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한국통사>에서 역사의 아픔을 기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 민족 모두가 우리 조상의 피로써 골육을 삼고 우리 조상의 혼으로 영각(靈覺)을 삼고 있으며, 우리 조상은 신성한 교화가 있고 신성한 정법(政法)이 있고, 신성한 문사(文事)와 무공(武功)이 있으니. 우리 민족이 다른 것에서 구함이 옳겠는가. 무릇 우리 형제는 서로 생각하고 늘 잊지 말며 형체와 정신을 전멸시키지 말 것을 구구히 바란다.(p27)  <한국통사> 中


 아픈 역사의 시작


 과연, 이러한 아픈 역사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저자는 이러한 시원(始原)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의 배움이 부족한 것에서 찾고 있다.


[사진] 경주 척화비(斥和碑)[출처 : 위키 백과]


 무릇 그 자리는 할 만했고, 재주도 할 만 했으며, 시운 또한 할 만했는데, 꼭 필요한 것은 배움이었다.  옛날과 지금을 두루 통하고 안과 밖을 관찰할 만한 학식으로 그 힘센 팔을 걷어붙이고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여 문명 열강과 같이 바다와 육지로 함께 달리며 여유로워야 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배움이 없어 국내를 다스리는 데는 사사로운 지혜를 임의로 사용하여 움직임이 많고 거동이 지나쳤으며, 국외를 대하는 데는 배척을 주장으로 삼아 문을 닫고 스스로 소경이 되었다. 마침내 변란이 매우 가까운 데서 발생하여 화가 나라에 미쳤으니 반도 중흥의 기운도 기어코 회복되지 못하였다. 아! 애석하도다. 아픈 역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p57) <한국통사> 中


 세계 혁명사의 경험


 지도자가 배움이 부족하여 스스로 외부와 단절하고 고립의 길을 택한 결과로 근대 이후 우리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인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통해  불행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점진적이며 꾸준한 개혁이 필요함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을 기술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김옥균(金玉均, 1851 ~ 1894)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이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급진개혁을 추구하였으나, 결국 3일 천하로 막 내리게 된 갑신정변. 이의 실패 원인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이런 거사야말로 비록 폭발적이고 열렬한 행사라고 말할지라도 실은 하늘의 때[天時]를 따라야 하고, 인심에 응해야 하며, 점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하고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각종 기관을 차례대로 설치하거나 종교를 좇아 인심을 끌어내든가 혹은 학설로 말미암아 솔선하여 주장하거나 언론으로 인심을 고취한다든다, 문자로 정치의 이치[政理]을 발휘해서 공중(公衆)의 사상이 점차 여기로 기울게 해야 한다. 그 후에 정치 방면에 들어가 맹렬히 급격한 수단을 사용하되, 찬성하는 자가 많아지고 반대하는 자가 적어졌을 때 새로운 정치를 세워야 아무런 방해물이 없게 된다. 비록 하루 동안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실은 수십 년의 오랜 시일을 미리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계 혁명사의 경험이다.(p126) <한국통사> 中  


 급진적인 개혁보다 지속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은 여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당시 독립당(獨立黨)을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지점에서도 드러난다. 


 무릇 사람의 작업도 늘 마음에 두고 오래 지나도 게을리하지 아니하며 면밀히 힘을 기울이는 자는 비록 약할지라도 반드시 성공을 거둘 수 있으나,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성사시키겠다고 하여 미친 듯이 뛰어 달리는 자는 비록 강할지라도 반드시 패한다. 하물며 독립당은 본래 강력한 힘도 없는데 빨리 성사하려 함에 있어서랴.(p196) <한국통사> 中  


 결국, 저자는 지도자의 배움이 부족한 것에서 시작된 우리 역사의 불행을 바로 보고, 이러한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후손들로 하여금 우리의 혼(魂)을 잘 보존할 것을 강조하고 이를 일깨우기 위해 <한국통사>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픈 역사를 돌아봐야하는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는 우리의 혼을 바로 세울 수 없는 것일까?


 고통의 의미


 살다보면, 몸이 아플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료를 받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혹시 내게 잘못된 생활 습관은 없는지, 내가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살피는 시간을 갖는 것이 진정한 고통의 의미라 생각된다.


 <한국통사>에서 통(痛)은 '아픔'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라의 고통 역시 몸의 고통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 후에야 아플 통(痛)이 통할 통(通)으로 바뀌어,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며,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끝나는 지점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 혼은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는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반성과 꾸준한 준비에서 나옴을 우리는 최근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한국통사>를 다시 돌아봐야 하는 이유라 여겨진다. 


[사진]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출처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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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1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ookholic 2018-05-01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痛‘자는 발붙일 없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18-05-01 11:25   좋아요 0 | URL
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이상의 아픔은 없어야 겠지요...

AgalmA 2018-05-02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혼을 바로 세우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민족이나 국가에 일치시키는 건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되기 쉽죠. 이게 현대에서 큰 문제점이기도 하고요. 경제적 이득을 꾀하면서 국가주의를 앞세우는 많은 나라들 보십시오. 민주주의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죠.

겨울호랑이 2018-05-02 13:55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민족이나 국가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개인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되어간 수많은 사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지요... 부분과 전체의 조화. 쉽지 않은 과제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