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를 위하여 - 작가 츠바이크, 프로이트를 말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양진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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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평전인줄 알았던 <프로이트를 위하여>라는 책이란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설도 재미있게 잘 쓰지만 그동안 아빠가 읽은 평전도 모두 괜찮았단다. 이번에 읽은 책은 제목 <프로이트를 위하여>에서 알 수 있듯이 전대미문의 학자 지그문크  프로이트에 관한 책이란다. 기대를 잔뜩 하고 책을 펼쳤는데, 그 동안의 평전과는 좀 다른 구성이었단다. 프로이트 평전은 1부에만 구성되어 있고, 2부는 프로이트와 츠바이크가 주고 받은 편지들로 구성되어 있고, 3부는 츠바이크가 여기저기 기록한 프로이트에 관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더구나. 더욱이 1부는 츠바이크의 다른 책 <정신에 의한 치유>라는 책의 3부를 발췌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그러니까 이 책은 다른 책, 츠바이크의 기록 등을 짜깁기하여 편집된 것 같았어. 아빠가 가장 싫어하는 편집 방식이로구나.

츠바이크가 이런 편집을 좋아했으려나? 그래서 <정신에 의한 치유>라는 책을 검색해 보았는데 우리나라 서점에서는 검색이 안되더구나. 혹시 다른 책제목으로 출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다 검색해서 확인을 보니 우리나라에서 2000년에 출간된 <정신의 탐험가들>이라는 책인 것 같더구나. 이 책의 차례를 보니 3부의 제목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더구나. <프로이트를 위하여>라는 책의 이런 짜깁기 편집은 외국의 출판사에서 한 것으로 그대로 번역 출간한 것인지,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슈테판 프로이트의 팬으로는 실망스러운 편집이로구나. <프로이트의 위하여> 3부에 나오는 기록도 다른 책 <어제의 세계> 등에 실린 글인데 <어제의 세계>는 아빠도 가지고 있는 책이란다. 유독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은 여러 출판사의 중복, 짜깁기 출간이 잦은 것 같더구나. 프로이트에 대해 궁금하고, 그런 궁금증을 츠바이크가 해결해 준다는 생각으로 기대를 잔뜩 하고 책을 펼쳤는데, 이런 짜깁기 편집으로 실망을 하고 말았단다.

 

1.

실망스러운 편집은 편집이지만, 1부 프로이트에 관한 츠바이크이 글은 다른 책에서도 볼 수 있는 츠바이크의 흡입력 있고 묵직한 필력을 엿볼 수 있었단다.

책의 시작은 의 의미로 시작하여 병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법의 변천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어. 원시시대와 고대 의학을 거쳐 현대 의학까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현대 의학은 많은 의료 장비를 이용하여 치료를 하지만 장비의 도움 없이 영적 치료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단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라는 논문에서 신경증이 성적인 억압에서 기인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기존의 학자들과 달리 억압이라는 것은 숨기지 말고 밖으로 내놓아야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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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옛 방법이 은폐하려 애쓰던 그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라고 요구했다. 모르는 체하지 말고 확인하라는 것이다. 돌아가지 말고 들어가라는 것이다. 눈 돌리지 말고 깊이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외투를 입히지 말고 벌거벗기라는 것이다. 충동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틀어쥘 수 있다. 악마의 심연에서 충동을 끌어내 거리낌 없이 마주하는 사람만이 그것을 길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의학은 미학이나 문헌학 못지않게 도덕이나 수치심과는 상관이 없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간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침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세기가 얼버무리고 싶어 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억압과 무의식에 대한 자기 인식과 자기 고백의 문제를 시대의 한복판에 던져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억압된 근본적 갈등을 위선에서 학문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수많은 개인들뿐 아니라 도덕병에 걸린 그 시대 전체를 치료하는 일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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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트는 조수, 비서, 조교도 없이 평생 혼자 분석하고 연구했다는구나. 무엇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했대. 그런 규칙적인 생활 때문인지 평생 건강하게 지냈다는구나. 그리고 그런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 남을 의식하는 글쓰기가 아닌, 단지 결과의 산출물로만 생각한 글쓰기였기 때문에 글들이 무미건조하고, 냉정하고, 창백한 글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구나. 선동하거나 선전하는 내용은 없지만 엄격한 조형력 있는 글들이라는구나.

프로이트의 의대 시절, 심리학도 신체기관을 연구하면 알게 되는 생리학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했대. 그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최면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있다고 해서 파리에 가서 그들과 교류도 했다는구나. 그리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심리라는 것이 신체가 아닌 심리적, 초심리적 원인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몇 달 뒤 빈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했대. 그 일로 빈의 다른 학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정규 교수가 될 수 없었지만, 프로이트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지.

프로이트는 최면을 이용하여 치료하는 브로이어와 공통 연구도 했는데, 프로이트는 이때부터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단다. 당시 무의식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하기여 의식도 아니고 그 내면에 깔려 있는 무의식을 연구할 생각은 프로이트와 같은 천재들만의 영역이었지. 무의식의 핵심은 꿈이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꿈을 꾸는 이유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꿈을 분석하면 당사자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다고 했단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꿈도 의식으로 조작하여 본심을 숨기는 경우가 있다는구나. 하지만 어린이들의 꿈은 자신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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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25)

프로이트는 꿈이 우리의 심리적 균형을 안정시키는 데 필수적임을 처음으로 입증한다. 꿈은 우리 감정 능력의 밸브이다. 우리의 작은 세속적 육신 속에는 정말이지 너무도 막강한 욕만, 헤아릴 수 없는 괘락욕과 생존 본능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소원 가운데, 평범한 사람들이 옹졸하게 꽉 짜인 일상 속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몇 개나 되겠는가? 우리들 중 누구도 자신의 쾌락의지를 천분의 일도 실현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룰 수도 없는 한없는 욕망이 더없이 궁색한 소액 연금 생활자, 임금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의 가슴속에 밀려드는 것이다. 저마다의 마음속에 못된 욕망들이 음란하게 들끓는다. 지배권이 부재하는 권력의지, 억눌리고 비겁하게 일그러진 무정부주의적 욕구, 감춰진 허영심, 열정, 질투 등. 날이면 날마다 수많은 여자들이 지나다니며 저마다 순간적인 정욕을 도발하고, 이루어지지 못한 그 모든 소망과 소유욕은 똬리를 튼 채 독사처럼 틀어박혀 혀를 날름거르며 새벽종이 우릴 때부터 밤이 깊어질 때까지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다. 밤마다 꿈이 이 모든 응어리진 소원들에 배출구를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영혼은 그런 대기압 아래에서 폭발하거나, 갑자기 흉악한 난동이라도 부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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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이트는 심리학이 성과 관련이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다는구나. 성에 대한 의식은 아무래도 사춘기 이후에 형성되다 보니 사춘기 이후 연령에 대해서만 분석을 하다가 아기 때부터 관련이 있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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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58)

프로이트는 깨달았다. 성 의식은 사춘기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갑자기 몸 안에 주입되는-대체 그것이 어디로부터 올 수 있다는 말인가?-것이 아니라, 오히려-모든 강단 심리학보다 천 배는 더 심리학적인 언어가 이미 오래전부터 대단히 구체적으로 표현해주었듯이-영글다 만 인간 속에서 성 충동이 그저깨어날뿐이라는 사실, 따라서 성 충동은 잠든 채로(말하자면 잠복 상태로) 오래전부터 어린이의 신체 속에서 현존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유아가 걷기 전에 걸을 수 있는 잠재력을 두 다리에 지니고 있듯이, 말할 수 있기 전에 언어 욕구를 지니고 있듯이, 성욕도-목전에 맞는 행동에 대해서는 짐작도 못 하면서-유아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유아는-결정적 표현!-자신의 성욕에 관해 안다. 그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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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학문이 쉽지 않다 보니, 아빠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너희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 같구나. 양해 바란다. 1부 프로이트 평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츠바이크가 프로이트의 업적에 대해서 정리해 준 부분이 있는데, 짧지만 핵심적인 내용이 잘 담겨 있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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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현재 우리는 프로이트 덕분에 처음으로 개인의 중요성을, 모든 인간 영혼의 대체 불가능한 일회적 가치를 새롭고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유럽에서 예술, 연구, 생명과학의 모든 영역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찬성하든 반대하든 프로이트의 사상 체계로부터, 그의 견해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창조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외부인은 모든 영역에서 삶의 중심부-인간적인 것-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작업이 의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철학이든 교과서적 의미에서 엄밀하게 규칙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전문가들이 망설이는 동안, 개별성과 궁극적 가치에 관해 추밀 고문관과 학자들이 열심히 싸우는 동안, 프로이트의 이론은 이미 오래전에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참된 것으로 입증되었다. 괴테가 잊을 수 없는 말로 우리에게 새겨놓은 창조적 의미에서 참된 것으로 입증된 것이다. ”결실이 있는 것만이 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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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2부에서는 츠바이크와 프로이트가 서로 주고 받은 편지와 엽서들이 실려 있는데, 1908년부터 프로이트가 죽기 직전인 1939년까지의 편지와 엽서라고 하는구나.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상대방의 편지를 읽는 프로이트와 츠바이크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어. 둘은 서로 존경하는 모습이 편지 속에서 느껴지더구나. 츠바이크는 새로운 책이 나오면 꼭 프로이트에게 보내주고 프로이트는 답장을 쓰면서 그 책들에 대한 감상을 적어 보기도 했단다. 뿐만 아니라 당대 유명한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도스토엡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리뷰가 인상적이어서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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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2)

당신이 빠짐없이 알고 있는, 그의 작품이 지닌 거의 모든 특성들은 그 자신의 특성에 기인하며, 우리에게는 특이한 것이지만 러시아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심리 구조입니다. 사실 성적 기질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것을 더 상세히 설명해야 하겠지요. 우선 그것은 학대하고 맟설게 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정신분석 없이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스스로 각 인물들과 각 문장들을 통해 정신분석을 하고 있으므로, 정신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카라마조프 씨네 사람들>이 도스토엡스키의 가장 개인적인 문제인 아버지 살해를 다루며 범행과  무의식적 악의에 관한 정신분석적 원리를 그 근거를 삼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또한 그가 표현한 기이한 성애는 충동적 발정이거나 승화된 연민입니다. 자신의 영웅들이 사랑할 때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미워하는지 등에 관한 회의[=양가감정]는 그의 심리학이 어떤 독특한 토양에서 자라났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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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정도로 해야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짜깁기 편집한 책이라서 실망했는데, 그래도 츠바이크와 프로이트의 편지를 읽으면서 그 실망감을 다소 해소한 것 같구나. 이 책 1부에 보면 츠바이트가 프로이트를 한 줄로 평한 글이 있는데, 그 글을 소개하며 오늘 편지를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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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니체가 망치를 들고 철학을 했다면, 프로이트는 평생 메스를 들고 철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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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은 건강이요, 부자연스러운 것은 질병이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그의 관을 영국 땅에 묻었을 때, 우리는 조국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그곳에 바쳤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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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43-44)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 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 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119)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세상에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121)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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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냉전의 예고편이었다. 20세기의 모든 이념이 충돌해 참혹한 비극을 일으켰다. 독일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프랑코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고, 소련 스탈린은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결성한 반파시즘 국제여단에 무기와 자금을 제공했다. 프랑코는 1939 3월 마드리드와 발렌시아를 점령해 공화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3만여 명의 정치적 반대자를 처형했다. 수십만 명의 공화주의자들이 가족과 함께 페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를 탈출했다. 내전에서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의 수가 50만 명이 넘었다.

(31)


MAN에서 파악한 스페인의 역사를 요약해 본다. 역사를 몰라도 마드리드를 즐기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알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베리아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최초의 인간 집단 이베로부족은 3,600여 년 전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거나 해변을 걸어서 들어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철기를 들고 남하한 셀따(켈트) 족이 이베로 부족과 결합해 오늘의 스페인 사람과 관련이 있는 셀띠베로(celtibero) 부족을 형성했다. 페니키아와 그리스 상인들이 찾아와 기술과 문화를 전해주었으며, 로마와 아프리카의 카르타고가 처절한 싸움을 벌인 끝에 로마 군대가 주요 지역을 점령했다. 라틴어로 이스빠니아라고 했던 이베리아반도는 기독교 세계에 포섭되었고 가스띠까, 까달루냐, 갈라시아 등 상이한 언어를 쓰는 열러 문화권이 무너진 5세기 이후에는 게르만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토착민과 손잡고 똘레도에 왕국을 세웠다.


(40)

나는 MAN에서 이런 충고를 들었다. ‘스페인이 무엇인지 묻지 마.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의 모든 도시에서 네가 보고 겪고 마주치는 것을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스페인 땅에 있는 모든 것, 스페인 사람이 가진 모든 것, 그게 스페인이거든.’


(67)

나는 어둠의 그림들을 전쟁을 참상을 묘사한 판화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였다. 인간 본성에 대한 절망과 세상에 대한 환멸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극소수 권력자들이 종교의 권위로 인간을 억압하고 세속의 권력으로 민중을 착취하며 국가의 대의를 앞세워 대학살을 저지른 시대였다. 괴물이 깨어난 시대를 살았던 그는 괴물을 다시 잠재우려면 잠들어버린 인간의 이성이 눈을 떠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을 담은 그림으로 타인의 이성을 깨우려 했다. ‘어둠의 그림들을 보면서 예술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예술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무엇이라 하든, 괴물이 인간을 잡아먹었던 그 시대에 고야 같은 예술가 한 사람도 없었다면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97-99)

마드리드가 어떤 도시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스페인의 수도이지만 제일 잘사는 도시도 아니고 가장 아름다운 도시 또한 아니다. 하지만 이 도시가 무엇을 바라면서 어디로 나아가려 하는지는 분명했다. 총칼 앞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수호했던 정치인의 이름을 국제공항에 걸었다. 폭력이 난무한 시대에 인간의 이성을 깨웠던 예술가를 잊지 않았다. 실패했지만 옳은 길을 가려 했던 지도자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128)

바르셀로나 사람들한테 1714년은 우리의 1592년이나 1910년에 해당한다. 마드리드 편에서 펠리페 5세가 전쟁을 벌인 끝에 스페인 왕위 계승권을 지켰다고 했다. 전쟁의 발단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였던 카를로스 2세한테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영토가 갈가리  찢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한 그는 스페인 왕국의 통합을 유지한다는 조건을 걸고 프랑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 공작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해 스페인 왕 펠리페 5세로 옹립했다. 그러자 빈의 합스부르크 왕실과 독일 바이에른 왕실이 저마다의 연고를 내세워 스페인의 왕위가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했다. 1701년 전쟁이 터지자, 해외 식민지 소유권과 노예무역 해상권을 두고 스페인과 대립하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끼어들었다. 중세 내내 벌어졌던 유럽 왕족과 귀족들의 영토쟁탈권이 스페인 땅에서 벌어진 것이다.


(167)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종교에도 명암이 있다. 종교는 삶의 도덕적 기초를 제공하며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이타 행동을 격려한다. 그러나 종교는 또한 사람의 생각을 옭아매어 권력자가 민중을 착취하는 도구로 쓰인다.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증오하고 죽이도록 부추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인간 집단에 종교가 있다. 어떤 진화적 이익이 있기에 호모 사피엔스는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일까? 철학자와 생물학자들의 여러 설명을 들어보았지만, 확실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종교 없이도 우리가 도덕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신앙심 없이도 이타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구원이나 다음 생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도 삶에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229)

리스본 대성당은 작고 소박했다. 초라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낡았다. 대주교가 있어서 간단히 대성당이라고 하는 그 집은 12세기 중반 레콩스키스타 직후 지었으니 리스본에서 제일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건축 기술이나 국력으로는 그보다 크고 화려한 성당은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지진이 잦은 곳이라 자주 수리했고 수리할  때마다 유행하는 교회 건축양식을 덧붙였기 때문에 어떤 스타일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건물은 로마네스크, 예배당 회랑은 고딕, 실내장식은 로코코 스타일이었다는데 대지진에 다 부서져 불타버렸다. 대성당은 두 가지가 특이했다. 첫째, 군사요새 같은 외관은 레콩키스타 시대의 전투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둘째, 중앙 설교대 위 넓은 공간에 성가대 나무 의자를 놓았다. 특별히 볼만한 게 없다는 걸 알았지만 가톨릭 국가의 수도를 방문한 여행자로서 예의를 지키려고 들렀다.


(246)

페소아의 정신은 외모보다 더 특이했다. 연금술, 신비주의, 마법, 비밀결사, 점성술에 심취했고, 셰익스피어와 나폴레옹 같은 역사 인물의 별자리 운세 모음집을 만들었으며, 바이런 스타일의 영국 낭만주의부터 보들레르가 대표하는 프랑스 상징주의와 엘리어트의 모더니즘까지 온갖 문예사조를 섭렵했다. 1935년 가을 복통과 고열 증세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그는 영어로 된 책 네 권과 포르투갈어책 한 권밖에 출간하지 않았지만, 엄청난 양의 원고와 스케치를 남겼다. 포르투갈 국립국서관은 나무 트렁크에 들어 있었던 원고를 시민들에게 공개했고, 정부는 페소아의 관을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옮겼다.


(287)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목표로 설정한 유럽의 권력자들은 책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과 교황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더 큰 부와 더 위력적인 무기와 더 강력한 권력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교회를 짓던 돈으로 도서관을 만들었다. 성서를 제작하던 정성으로 책을 모았다. 구원을 기도했던 절박함으로 교육과 학문 연구를 진흥했다. 신학을 과학으로 대체하고 책을 신의 자리에 올린 것이다. 주앙 5세도 그런 왕이었으니 도서관에 이름을 남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는가.


(307)

여행지에서 무엇을 하는 게 좋은지는 각자의 취향에 달렸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객관적으로 더 고상하다든가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책을 서점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책이 총포와 같았던시대는 지나갔다. 총포처럼 위력 있는 것은 새롭고 유용한 지식과 정보이지 문자 텍스트를 인쇄한 종이책이 아니다. 세상은 인터넷과 검색엔진의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섰다. 책은 지성의 상징이 아니며 숭배할 대상 또한 아니다. 책을 쓰는 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온 나는 책을 전성기가 지난 전통 미디어로 여긴다. 서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는 통념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좋다.


(336-337)

술을 마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법화할 수가 없는 마약이다. 어차피 마실 거라면 품격 있게 마시는 게 좋다. 음식과 궁합을 맞추고 철학과 문학의 향기를 입히면 최선이다. 와인은 그렇게 하기에 딱 맞는 술이다. 나도 그날 오후의 햇살에 잔을 비추어 보면서 포트와인을 마셨다. 내 인생에 제일 많이 마신 날이었지만 긴 시간 동안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우버를 불러 숙소를 돌아오는데 운전사의 영어가 심상치 않아 물어보았더니 미국 사람이었다. 농구 관련 일로 뽀르투에 왔다가 너무 좋아서 눌러앉았고 뽀르투 여인과 혼인했으며 자녀도 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왜 다들 미국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364-365)

한 가지 더, 중세와  근대 역사의 영향도 있었을 수 있다. 정복 전쟁을 일삼았던 포르투갈 왕국은 대항해 시대의 짧은 전성기를 지나 유럽의 변방 국가로 되돌아왔다. 공화주의 혁명을 이룬 뒤에는 살라자르의 장기독재를 겪었다. 그런 역사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을 다해 이웃과 싸우면서 남을 정복했지만,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고 남은 것도 없다. 이기는 것보다는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좋다. 이웃을 적으로 삼기보다는 서로 기댈 수 있는 친구로 만드는 게 낫지 않겠는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붐비는 거리에서도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친구나 사업 파트너를 만나면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충분히 들으면서 오래 이야기를 나눈다. 이방인에게도 경계하고 의심하는 표정이 아니라 여유롭게 환대하는 미소를 선사한다. 리스본과 뽀르투 사람들한테서 나는 그런 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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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갈까마귀 캐드펠 수사 시리즈 12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손성경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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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또 캐드펠 수사 시리즈란다. 어느덧 12권이네. 올해 안에 21권까지 완료하는 것이 아빠의 독서 계획 중 하나란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 12권의 제목은 <어둠 속의 갈까마귀>란다.

12권의 이야기는 1141 12 1일부터 시작돼. 지난 11권의 이야기가 1141 8월이었으니, 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난 다음 이야기지. 1141 12, 잉글랜드에서 내전이 일어난 지 어느덧 4년이 되었단다. 이 내전을 다시 짧게 이야기하자면, 헨리 왕이 아들 없이 죽자 후계자 1순위인 그의 딸 모드 황후가 잉글랜드로 돌아왔어. 당시 모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황후였기 때문에모드 황후라고 불렸단다. 그런데 모드 황후는 잉글랜드에 오고 나서 오만하게 행동하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개인적인 원한을 복수하는 등 런던 시민들의 민심을 잃고 말았어. 그러자 잉글랜드의 일부 귀족 세력을 중심으로 모드 황후를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헨리 왕의 조카인 스티븐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지. 그렇게 스티븐 왕 진영과 모드 황후 진영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그게 어느덧 4년째에 들어선 거란다. 얼마 전까지 스티븐 왕은 모드 황후의 포로로 잡혀 있었는데, 최근 탈출에 성공해 대책 회의를 열게 되었어. 슈롭셔 행정관인 휴 베링어도 그 대책 회의에 참석했어.

...

한편 슈루즈베리의 성 페드로와 성 바오로 수도원의 라둘푸스 원장님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헨리 주교가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났고, 수도원은 로버트 부원장이 업무를 대리하기로 했단다. 그리고 라둘푸스 원장님은 얼마 전 수도원 구역의 교구 신부 역할을 하던 애덤 신부님이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후임 신부를 뽑아야 하는 상황이었어.

며칠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갔던 라둘푸스 원장님은 세 명의 낯선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단다. 그리고 회의 결과를 수도원 식구들에게 전달해 주었지. 회의 결과, 교회는 다시 스티븐 왕을 따르기로 했다고 해. '다시'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헨리 주교가 상황에 따라 모드 황후 편에 서기도 하고 스티븐 왕 편에 서기도 했기 때문이란다. 헨리 주교는 일 년 동안 두 번이나 지지 진영을 바꿨기에, 라둘푸스 원장님은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직책상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 이번에 데리고 온 세 명 중 한 명은 헨리 주교가 추천한 후임 교구 신부 '에일노스'라는 사람으로, 36살의 강인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단다. 나머지 두 명은 에일노스 신부의 가정부인 디오타와 그녀의 조카인 베넷이었어. 베넷은 캐드펠 수사의 채소밭에서 일하기로 했어. 베넷은 채소밭에서 열심히 일하긴 했지만, 곧 자기 길을 찾아 떠나겠다고 캐드펠 수사에게 이야기했단다.

 

1.

새로운 교구 신부 에일노스는 기존의 애덤 신부님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단다. 엄격한 규율로 교구와 신자들을 관리했어. 규율을 어긴 아이들에게 매질을 서슴지 않았고, 이웃과의 땅 분쟁으로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어. 어떤 문란한 처녀가 고해성사를 하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가 하면, 아픈 아기를 데리고 온 신자에게 자신의 기도 시간이라며 외면해 아기가 죽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단다.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는 냉철한 신부라고 할 수 있지. 이렇게 되자 라둘푸스 원장님이 에일노스 신부를 불러 면담을 했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원장님이 하나하나 지적하자, 에일노스 신부는 자신은 규율대로 했을 뿐이라며 꼬박꼬박 반박했단다.

...

한편 수도원 근처에 큰 영지를 가지고 있는 랠프 기퍼드라는 영주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새넌이라는 의붓딸이 있었어. 에일노스 신부의 가정부인 디오타가 랠프에게 비밀 편지를 전달하자 랠프가 불편한 기색을 보인 일이 있었는데, 둘 사이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단다. 새넌은 베넷에게 관심이 있었는지, 캐드펠 수사를 만나러 온다는 핑계로 수도원에 와서 베넷에게 말을 걸곤 했어. 그런데 정작 베넷은 그녀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지. 베넷은 오히려 캐드펠 수사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단다. 하지만 그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이가 되었어. 크리스마스가 다가와 밤샘 미사가 열렸을 때, 베넷과 새넌은 몰래 빠져 나와 캐드펠 수사의 오두막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했단다.

...

캐드펠 수사는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어디론가 급히 가는 에일노스 신부를 보았어. 망토 모양의 사제복을 입고 뛰어가는 모습이 마치 갈까마귀 같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어둠 속의 갈까마귀>인가 보구나. 그런데 다음 날 디오타가 부원장님을 찾아와 에일노스 신부가 실종되었다고 말했어. 디오타는 이마와 손을 다친 상태였는데, 밤새 신부님을 찾아 다니다 빙판길에 미끄러져 넘어졌다고 했지. 캐드펠 수사가 어젯밤 신부님이 어디론가 급히 가는 것을 목격했기에, 수도사들은 그 장소부터 수색을 시작했단다. 그리고 에일노스 신부는 안타깝게도 저수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지. 검시 결과 누군가 에일노스의 머리 뒤쪽을 가격한 후 물에 빠뜨려 죽인 것 같다고 했어. 에일노스 신부가 살해당했지만, 교구 주민 중 그를 애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단다. 오히려 속으로 기뻐하기까지 했지. 그러니까 평상시에 사람들에게 잘해야 하는 거란다.

...

며칠 뒤 휴 베링어가 돌아와 캐드펠 수사와 함께 에일노스 사건을 맡게 되었어. 그리고 휴 베링어는 또 하나의 사건을 맡았다고 했어. 바로 캐드펠 수사 시리즈 2<시체 한 구가 더 있다>에 등장했던 토럴드의 친구이자 모드 황후의 첩자인 '니니언 버카일레'라는 도망자를 찾는 일이었어. 휴 베링어가 니니언 버카일레에 대해 이야기하자, 캐드펠 수사는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깨달았단다. 베넷이 한두 차례 말실수를 했던 것과 그의 행동들이 떠올랐거든. 바로 베넷이 니니언이었던 거야! 캐드펠이 베넷을 불러오자, 그는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단다. 자신은 모드 황후의 군대에 합류하려던 참이었고, 이모로 알려진 디오타는 사실 유모이며 자신의 도피를 돕고 있다고 했지. 앞서 디오타가 랠프 영주에게 전달한 비밀 편지 역시 모드 황후와 관련된 내용이었던 거란다.

 

 

휴 베링어는 니니언을 에일노스 살인 사건의 용의선상에 놓았어. 물론 교구 주민들도 일단 의심을 했단다. 워낙 에일노스가 교구 주민들에게 원한 사는 일을 많이 했잖니. 새넌은 니니언을 숨겨주었고, 캐드펠 수사도 지금 상황에서는 니니언이 숨어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새넌이 니니언을 숨겨주는 것을 도와주었고, 니니언을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묻지도 않았어.

그리고 캐드펠은 우연히 죽은 에일노스의 찢어진 모자를 얻게 되고,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을까 생각하고 범행장소를 다시 조사했단다. 에일노스 신부의 사라진 지팡이도 찾아보려고 했어. 범행장소 근처에 방앗간이 있어 그곳에 갔는데 그곳에서 숨어있는 니니언을 만났단다. 좀 허술하게 숨어 있는 것 같구나.

니니언은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밝히겠다고 했어. 젊은 패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구나. 니니언이 그렇게 자신 있어 하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캐드펠은 니니언이 알고 있는 것을 물어보았어. 니니언은 그날 랠프와 방앗간에서 몰래 만나기로 했는데, 랠프는 안 오고 에일노스가 왔다고 했어. 그래서 몰래 방앗간을 떠났는데 그 곳에서 다른 젊은 남자를 보았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 젊은 남자가 범인?

니니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캐드펠은 에일노스 신부의 지팡이를 찾았는데 그 지팡이에 여자의 머리카락이 있었어. 그 머리카락은 디오타의 머리카락 같았어. 그래서 캐드펠은 디오타를 찾아가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다시 물어보았단다. 디오타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지. 그날 밤에 에일노스 신부가 디오타를 찾아와 니니언을 찾는다고 했어. 아무래도 에일노스 신부가 니니언이 도망 중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아., 디오타는 에일노스 신부가 니니언을 찾는 것을 막기 위해 방해하려다가  에일노스 신부가 휘두른 지팡이에 머리를 맞았다고 했어.

디오타는 이후 에일노스 신부로부터 도망갔다고 했어. 니니언이 방앗간에서 에일노스 신부를 봤다는 증언과 일치하는구나. 그리고 캐드펠 수사가 에일노스가 급히 뛰어가는 것을 본 것은 에일노스가 니니언을 찾으러 가던 길이었던 거야. , 그럼 에일노스가 죽은 밤 에일노스가 만난 사람은 디오타, 니니언, 니니언이 본 젊은 남자로 좁혀지는구나. 아무래도 니니언이 본 젊은 남자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일 것 같구나.

 

2.

캐드펠은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은 휴 베링어에게 이야기했어. 휴 베링어도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이야기해주었어. 그날 밤 방앗간을 지나가는 또 한 사람을 봤다는 거야. 그 사람은 빵장수 조던이라는 사람이야. 특히 조던은 엘리노스와 시비가 붙기도 했던 사람이야. 앞서 니니언이 방앗간에서 나서면서 본 사람이 조던인 것 같구나. 하지만 조던은 엘리노스 또는 니니언과 관련 없는 일로 그곳에 지나고 있었어. 사실 조던은 그날 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고 귀가하던 길이었어. 그래서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용의자 선상에 오르게 되었지.

휴 베링어는 그를 이용해서 범인을 잡아보려고 했어. 에일노스의 장례식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던을 범인으로 체포하려는 계획이었어. 그러면 양심 있는 진범이라면 자백할 것이라고 기대를 한 거야. 휴 베링어는 좀 순진한 면이 있는 것 같구나. 그렇게 순순히 범인이 나타날까? 한편 마을에서는 디오타가 에일노스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어. 그 소문을 들은 니니언은 디오카가 걱정되어 장례식장에 두건으로 얼굴을 숨기고 참석했단다. 장례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휴 베링어는 양해를 구하며 살인자로 조던을 호명하며 체포하려고 했어. 조던은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을 하면서 장례식장은 혼란스러워졌어. 그때 교회지기로 오랫동안 일했던 컨릭이 나서서 조던은 범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단다. 휴 베링어는 자신의 작전이 성공하나 싶었지. 그렇다면 컨릭이 범인?

컨릭은 그날 밤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단다. 에일노스는 어떤 여자를 지팡이로 때렸다고 했어. 여자가 에일노스의 지팡이를 붙잡고 저항했다고 했어. 에일노스는 그 여자의 손으로부터 지팡이를 빼내려고 했고, 여자는 지팡이를 놓치고 도망을 갔다고 했어. 디오타의 증언과도 일치하니까 그 여자는 디오타일 것 같구나. 갑자기 여자가 지팡이를 놓치자 에일노스가 잡아당기던 힘 때문에 뒤로 튕겨져 갔는데 그곳에 얼마 전 잘리고 남은 거칠고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있었어. 에일노스는 그 날카로운 잘려진 나뭇가지에 뒤통수를 강하게 부딪치면서 저수지에 빠졌다고 했어. 컨릭은 그 장면을 보고 저수지로 달려가서 빠진 에일노스를 봤다고 했어. 하지만 컨릭은 에일노스를 그냥 두었다고 했어. 에일노스 신부가 도움을 청한 사람들을 그냥 두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하느님이 에일노스 신부를 살려주고 싶으면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대. 정말 현명한 판단인 것 같구나.

아무도 컨릭의 행동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없었단다. 하느님이 살려주고 싶으면 살려줄 것이라고 했으니 누가 그 말에 딴지를 걸겠니. 컨릭의 이야기를 듣고 캐드펠 수사는 저수지 주변에 있는 나무에 가보았어. 컨릭이 이야기한 것처럼 잘려진 나뭇가지가 있었고, 그 나뭇가지에 끼어 있는 에일노스 모자의 털실을 발견할 수 있었어. 컨릭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였단다. 그렇게 12권의 이야기가 끝이 났단다.

….

사람이 평상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그런 이야기였단다. 주는 대로 돌려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이야기 등 사람 간의 관계에 관한 동서양 할 것 없이 많은 속담과 금언들이 있단다. 아빠는 이 나이가 되어도 인간 관계는 참 어렵다고 생각한단다. 너희들도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겠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사람들이 모두 내 마음에 들 수는 없단다. 하지만 사람마다 장점이 하나 이상씩은 있는 것 같더구나. 굳이 척을 지며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싫어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속으로만 싫어하고 겉으로는 최소한의 친절로만 대해도 상대도 너희들에게 미소를 띠며 이야기할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아빠가 이야기한 것이 정답은 또 아니니 사람 사이가 어려운 것 같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12 1, 총회에 참석한 라둘푸스 수도원장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는, 수사들이 제시한 온갖 사소한 안건들을 서둘러 처리했다.

책의 끝 문장: 한 번도 서로를 본 적이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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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이랑 지음 / 이야기장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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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이야기할 책은 책제목이 눈에 띠어 알게 된 책이란다. 좀 과격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엄마와 딸들의 미친년의 역사>. 지은이는 이랑이라는 분인데 아빠는 처음 보는 사람이야. 지은이 소개를 읽어보니, 이랑이라는 분은 가수이기도 하고, 영화연출을 전공하여 뮤직비디오, 단편영화, 웹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는구나.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인가 보구나. 아빠도 너희들과 최신 가요를 가끔 듣는데, 이랑이라는 분은 기억에 없구나. 음악 장르가 포크라서 우리가 듣는 음악과 좀 거리가 있던 것 같구나.

아무튼, 이 책의 독특하고 과격한 제목으로 눈에 띠어 책 소개와 책 리뷰를 읽어보았는데, 아빠와 좀 다른 영역에서 생활하고 다른 사고 방식으로 생활하시는 분이라 흥미가 더 가서 읽게 되었단다. 특히 이 책을 읽고 쓴 리뷰 중에 이 책이 상당히 솔직하게 쓴 책이고 그것이 큰 장점이라는 식의 평이 있었어. 사실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의 속마음을 좀 숨기거나 각색해서 쓰는 것이 사람 마음인데, 글을 그렇게 솔직하게 썼다면 진실된 에세이를 읽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참고로 지은이 이랑은 가명처럼 보이지만 본명이라고 하는구나.

 

1.

, 그러면 책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지은이 이랑은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이긴 하지만 이전에도 책도 여러 권 쓰신 작가이기도 해. 2019년에도 자신의 가족에 대한 에세이를 준비하다가 범위를 줄여서 자신과 엄마와 언니의 기록을 쓰려고 했대. 그런데 2021년 겨울 갑자기 언니가 자살을 했다는구나. 매일 함께 살던 가족의 자살은 정말 아픈 기억과 상처로 마음 속에 남을 것 같구나. 지은이도 언니의 자살 이후의 글들은 고통과 아픔 속에서 글을 써야 했다. 그 고통과 아픔 때문에 글도 천천히 쓸 수밖에 없었다는구나. 이런 고통과 아픔의 내용이다 보니 책을 출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하다가 출간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책으로 출간했다는구나. 책도 우리나라보다 일본과 대만에서 먼저 번역출간 되었고, 그 이후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다고 하는구나. 좀 독특한 출간 이력을 가지고 있구나.

….

먼저 자신의 가족을 소개했어. 지은이의 가족은 지은이와 부모님과 언니와 남동생 이렇게 다섯 명이었어. 자신의 집안은 대대로 가족 폭력이 비일비재했던 집안이라서, 자신과 언니와 남동생은 그런 폭력적인 가족의 대를 끊자면서 비혼 선언을 했다는구나. 부잣집 딸인 엄마가 오빠의 친구의 아버지와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게 된 사연은 이렇대. 엄마가 젊은 시절에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집에서는 엄마를 미친 년으로 취급을 했대. 오빠가 자신의 친구에게 그런 엄마를 구제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엄마는 그런 내막도 모르고 지금의 아버지와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했어.

결혼 후에도 엄마의 우울증 증세는 가끔씩 있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혼자 산에 올라가서 소리 지르고 오기도 하셨대. 그런데 그렇게 혼자 산에 갔다가 강간 당할 뻔한 일이 있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산에 가지 못하는 엄마는 집의 옷장에서 소리를 지르곤 했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하셨어. 지은이의 엄마가 그렇게 우울증이 있었던 것은 가족 환경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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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물든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 엄마 김경형의미친년 인생은 엄마 탓이 아니다. 엄마 탓은 아니지만 엄마가 미친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잔혹한 굴레 속에서 나 또한 미친년으로 자라났다. 그나마 나는 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낼 수 있는 미친년이라 다행이다. 하지만 나뿐 아니라 엄마의 미친년 역사도 무척 소중하기에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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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폭력적이라고 했다는구나. 지은이 이랑도 우울증을 보이는 엄마와 폭력적인 아버지의 가정환경이라서 그런지 고등학교는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봤다고 했어. 언니 이슬은 그래도 모범적인 생활을 해서 특수 학교 교수로 일하고 있었어. 그리고 취미로 친구들과 댄스팀 드웨즈퀸즈를 만들어 활동도 했어.

….

이 책이 엄마와 딸들의 이야기이니까 엄마와 자신의 이야기 말고 언니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어. 언니는 일명 장녀병에 걸린 사람이었어. 외할머니가 계셨는데, 외할머니는 100억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었는데, 이 재산을 죽은 아들의 아내, 그러니까 며느리와 손자에게 모두 빼앗기고 말았대. 외할머니가 편찮으실 때 간병하는 것은 엄마와 장녀인 이슬이었고 병원비도 언니가 꼬박꼬박 냈다고 했어. 하지만 이 비용이 만만치 않다 보니, 언니는 100억 상속을 받은 외숙모의 자식들, 그러니까 사촌들에게 같이 지불하자는 메일을 보내려고 했어.. 하지만 소심한 언니는 이 메일을 써 놓기만 하고 몇 번을 다듬고 수정하였는데, 결국 보내지 못했단다. 지은이는 언니의 자살의 원인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힘을 소진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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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언니는 가족이 싫다고 10대 때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내가, 부럽고 미웠을까.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을 돌보느라 정신없던 언니에게 나는 수차례그만두라고 말을 했다. 언니는 그때마다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이 필요하다며 울었다. 언니가 필요로 했던 가족은 아마 건강한 가족이었겠지만, 우리가 가진 가족은 너무 허약했고 결핍투성이였다. 언니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느라 자기 힘을 다 소진해버렸다. 나는 언니의 죽음이자살이라기보다 힘이 다 빠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죽음은 뭐라고 부를까. 소진사(消盡死)? 가끔 그렇게 가진 힘을 다 소진하고 죽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다. 평생 남을 위해 살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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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은이 주변에는 삶을 일찍 고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어. 2016년에는 친구 M이 성형수술 후유증으로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고, 2017년에는 친구 D가 간암 말기를 선고를 받고 2020년에 삶을 마감하였고, 2021 12월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언니가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단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잇단 죽음으로 지은이도 힘들고 때론 자신도 죽음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지은이에게도 죽음의 그림자도 드리웠단다. 2021년 자궁경부암을 선고 받고 치료를 받았다고 했단다. 그리고 2023년에는 갑자기 두 눈이 잘 보이지 않았대. 혹시 뇌종양은 아닐까 걱정해서 병원에 갔는데 원추각막이라는 병인데, 이 원추각막이라는 병도 희귀 질환으로, 완치는 어렵고, 진행을 늦출 수만 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눈 수술을 세 번이다 했대. 그리고 공황 장애로 자신도 모르게 쓰러지기도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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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땅에 발을 붙이고, 정신과 몸을 붙여내고야 만다. 반면에 나는 너무 오랫동안 머리만으로 산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몸을 놓고 살았다. 감정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방법이 대체 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겪는 공황은 머리의 파업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으로 한계를 느끼니 몸 전체를 셧다운시켜서 몸도 머리도 멈추게 해버리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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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던 지은이에게 큰 힘이 되었던 반려묘 준이치가 있었어. 그런데 그 준이치도 2025 2월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구나. 지은이 주변에 죽음이 있어서 혹시 지은이가 힘들거나 아플 때 자살을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지은이는 죽음이 자연스럽게 찾아올 때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책을 마무리했단다. 그래, 지은이의 다재다능한 재주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아빠보다 젊은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이상하기도 하지만, 오래오래 건강했으면 좋겠구나. 그래서 더 좋은 글과 좋은 음악들을 들려주면 좋겠구나.

유튜브에서 이랑의 음악을 찾아봐서 들었는데, 아빠 스타일의 음악은 아니지만 개성 넘치는 음악이더구나. 지은이 이랑 님이 좋아하는 인간상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부분이 있는데, 그 인간상이 아빠 마음에도 들더구나.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은 해보고 싶구나. 이 나이에 그 동안의 성격과 성품이 바뀌기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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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206)

나는 자신의 약함을 아는 인간을 좋아한다. 약함을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탐구하는 인간이 좋다. 살아나가는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 좋다. 살아갈 방법을 무언가에 의탁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려는 인간이 좋다. 자신의 방법을 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좋다. 더 탁월한 방법으로 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좋다. 겪기 않은 이야기로 끝없이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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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글의 분위기라든가, 자신의 허물과 개인사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명랑한 은둔자>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의 지은이 캐럴라인 냅이 떠오르더구나. 아빠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나중에 너희들이 커서 시간이 날 때 두 분의 책을 한번 비교해서 읽어봐도 좋을 듯.. 지은이 이랑의 삶에 응원을 보내며 오늘 독서 편지를 마치련다. 이랑 님의 다른 책들도 한번 찾아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사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책의 끝 문장: 잘 자.

 



내 감정들에 이미 정해진 간단한 이름들이 있다는 것을 진작 배웠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까.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이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나는 ‘나만의 이름 짓기’를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걸까. 이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걸 몰라서, 모든 것에 새로운 이름을 짓고 싶어하는 지금의 내가 된 걸까.
이미 만들어져 있는 말을 이리저리 조합해, 원래 있던 것과 새로 나타난 모든 것에 이름을 짓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 P22

온 가족 구성원이 화가 많고 예민한 우리집에선 언제나 고성방가가 끊이질 않았다. 동시에 예술적 기질도 많아서 엄마 아빠는 시를 쓰고 노래를 하고, 동생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하고, 언니는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그리고는 또 박 터지게 싸우다 한 번씩, 한 명씩 부엌에서 칼을 쥐고 나와 휘둘렀다. 어떻게 보면 스펙터클, 어떻게 보면 지옥 같은 광경이 자주 펼쳐졌다. 장례식상에서마저 댄스 공연을 하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욕하고 소리지르며 싸운 것까지도 전부 괴롭고 웃긴 우리 가족의 풍경이었다. 귀신이 된 언니가 그 모습을 봤다면 다들 미쳤다며 껄껄 웃을 것 같았다. - P80

언니는 가족이 싫다고 10대 때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내가, 부럽고 미웠을까.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동생을 돌보느라 정신없던 언니에게 나는 수차례 ‘그만두라’고 말을 했다. 언니는 그때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이 필요하다’며 울었다. 언니가 필요로 했던 가족은 아마 건강한 가족이었겠지만, 우리가 가진 가족은 너무 허약했고 결핍투성이였다. 언니는 그들에게 힘을 보태느라 자기 힘을 다 소진해버렸다. 나는 언니의 죽음이 ‘자살’이라기보다 힘이 다 빠져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죽음은 뭐라고 부를까. 소진사(消盡死)? 가끔 그렇게 가진 힘을 다 소진하고 죽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다. 평생 남을 위해 살던 사람들. - P110

깊은 사랑과 냉철한 이성과 오래된 우울감이 함께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언니에게 말하고 싶다. 사랑받지 못해서, 사랑을 모른다고 서로 말하던 우리 두 자매였는데, 언니가 떠난 뒤에 나는 강렬하게 원하는 것이 생겼음을. 그래서 무척 아프고 괴롭지만 굉장한 것을 배우고 있음을 언니에게 꼭 말하고 싶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으로 어쩐지 언니에게 전해질 거라고 느낀다. - P149

(204-205)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정신과 몸은 사실 하나였다. 영혼, 정신, 마음이라고 불리는 그것들 모두가 결국 ‘몸’ 자체였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찰나의 순간으로 결정되는 부재를 감당할 수 없어서 온몸으로 영혼의 실재를 기도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닿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의 부재와 나의 외로움을 달래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들의 몸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내 몸을 가지고 그들의 기억과 함께 살고 있다. 내가 살아 있고, 기억하는 동안 내 세계에 그들은 함께 있다. (다만 영혼이나 유령으로서가 아니라 기억으로서.)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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