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알렉스가 겪은 건 카그라스증후군으로, 1923년에 이 병증을 처음 기록한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조셉 카그라스의 이름을 따 명명한 이상증이다. 환자는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 등 가까운 사람들이 저도 모르는 새 똑같이 생긴 사기꾼으로 바꿔치기 되었다고 믿는 독특한 일탈 행동을 보인다. 환자는 대개 외관이나 행동의 사소한 차이점, 혹은 환자 자신도 잘 설명하지 못하는 특정할 수 없는 특징을 들어 사기꾼과 진짜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0)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또 일관적일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신경 구조가 제대로 기능해야 인간은 비로소 이해 가능한 세계관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기계 부품과 마찬가지로, 이 신경 구성요소도 고장 날 수 있다. 단 한 번의 사건, 즉 두부 외상이나 뇌졸중, 종양이 발생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장에서 본 환자들처럼 될 수 있다. 더욱이, 의식적 인식 능력이 손상되면 단지 나의 가족이나 친구를 알아보는 인지적 기능만 망가지는 게 아니다. 다음 장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자시 신체의 형태와 구조, 그리고 그 신체의 주인이 속한 인간이라는 종에 관한 지각을 왜곡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89)

강박 사고와 강박 행동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뇌에 관한 통제력을 잃을 수 있는지 다시금 일깨워 준다. 환자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며 짜증날 정도로 달갑지 않은 행동부터 트라우마가 될 정도로 고통스러운 행동까지 심각한 수준의 행동들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고 호소한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환자 스스로 원하는 것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마치 악덕한 선동가가 뇌 안에 들어앉아 우리 행동을 조종하는 것과 비슷하다. 신경과학 연구가 강박장애에 관한 사실들을 밝혀내 환자들의 생각과 삶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줄 날이 빠른 시일 내에 왔으면 한다.

 

(129)

성도착증의 신경과학적 논의도 쉽지 않다. 소아성애와 같은 문제 있는 성적 행동을 신경생물학적 이상의 탓으로 돌린다면 충동을 실행으로 옮긴 사람에게 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소아성애자가 자신의 행동을 뇌종양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만일 소아성애자가 자신의 행동을 뇌종양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이들은 행위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에는 더 깊은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지만, 소아성애자의 뇌가 소아성애적 행동을 일으킬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음이 밝혀진다고 해서 범죄를 저지른 인해 죄가 없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정상적 뇌 활동으로 인해 소아성애적 관심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무수한 결정을 내려야 하며 (오늘날 개인의 책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탕으로)그 모든 결정에는 도덕적 책임이 뒤따른다.

 

(148)

투쟁-도피 반응은 공포를 느끼거나 극도의 긴장을 느낄 때 심박수가 올라가고 혈압이 상승하며, 숨이 가빠지고 동공의 확장되는 등 우리가 이미 잘 아는 신체적 변화를 일으킨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즉시 행동할 수 있도록 산소가 풍부한 혈액을 근육으로 더 많이 보내고 주변 사물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동공을 확장하여 도망가든 싸우든 조치를 취하게끔 우리 몸을 대비시키기 위해서다. 동시에 현재 상황에서 에너지 쏟을 필요가 없는 과정을 억제하는 역할도 한다. 방광수 수축(싸우는 중에 오줌을 지린다고 무척 안타깝지 않겠나)이나 소화 같은 것 말이다.

 

(168)

19세기의 의사들이 환자를 속이거나 사기를 치려고 플라세보를 사용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진짜 약이 충분하지 않을 때 플라세보마저 없다면 의사가 환자에게 줄 수 있는 건 선의의 조언뿐이었다. 의사들은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보다 증상을 완화해 주리라 여겨지는 유형의 물질을 지급하는 편이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았다. 일부 추정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내과의들은 다른 모든 약을 합할 것보다 플라세보를 더 자주 사용했는데, 이 관습은 환자를 속이는 행위라는 인식으로 인한 윤리적 불편감이 퍼지게 된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169)

이와는 별개로, 비처의 발견은 임상 의학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이 발견은 플라세보 효과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는 점은 물론, 약의 효능이 상당 부분 플라세보 효과에 기인한다는 점을 암시했다. 다시 말해 가짜 약을 먹고도 나아진다고 느끼는 이유가 나아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처럼 진짜 약을 먹고 느끼는 효능의 일부 역시 약을 먹으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나머지 효능은 약의 실제 성분 덕분이다)

 

(191)

명칭실어증은 대뇌피질의 여러 구역에 생긴 손상에 의해 발생한다. 특히 환자가 겪는 장애에 따라 손상 구역이 조금씩 달라진다. 동사를 잘 떠올리지 못하는 환자들은 대뇌피질의 전면부 근처에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고 명사를 떠올리는 데 문제가 있는 환자들은 측두엽 근처에 손상을 입는 경향을 보인다. 더 세세하게 구분할 수도 있는데, 측두엽에서 어떤 영역에 손상이 생기면 사물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고, 이와는 또 다른 영역에 손상이 발생하면 생물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장애가 유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297)

당신의 뇌가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면, 축하한다.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뇌와 나머지 신체 기관이 영원히 멀쩡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인간의 뇌는 경이로운 유기적 기계이지만, 모든 기계가 그러하듯 언젠가는 고장 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뇌의 모든 기능을 활용하라.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즐거움을 탐닉하고(절제하는 연습도 하고), 깊이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자. 뇌가 허락하는 모든 일을 해 보자. 그냥 하지 말고 즐겁게 하자. 우리의 뇌를, 그리고 뇌가 우리에게 빌려주는 능력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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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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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초현실 세계의 판타지 소설을 주로 쓰시는 구병모 님의 <버드 스트라이크>라는 소설을 읽었단다. 아빠가 구병모 님의 소설이 이번이 세 번째인데 소재가 판타지를 포함하고 있었단다. 소설 제목 <버드 스트라이크>는 보통 비행기가 새떼와 충돌하는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실제 새들, 아니 날개를 가지고 있는 종족인 익인(翼人) 들의 공격을 의미한단다. 소설 속 세상에서는 익인들은 고원지대에 살고 있고, 도시에 살고 있는 도시인들과 공존 또는 대립을 하며 지내고 있어. 도시를 이끌어가는 리더를 시행이라고 하는데, 3년 전 음독 사건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그 사이에 시행의 아들 휴고가 시행대리를 하고 있었어.

휴고는 여동생 탄이 있었고, 탄은 약혼자도 있었단다. 식물인간이 된 시행의 수행비서 아마라가 시행대리인 휴고의 수행비서 일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식물인간이 된 시행과 수행비서 사이에서 태어난 딸 루도 있었단다. 루는 전() 시행의 몰래 낳은 딸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와 함께 시골에 따로 살고 있다가 얼마 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도시에 와서 살게 되었어. 이 정도면 이 소설의 주요 인물 중 도시인들의 인물들은 소개한 것 같구나.

어느날 익인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시를 습격해서 난동을 부리고 돌아갔는데, 17살 비오만 인질로 잡히고 말았단다. 비오는 자신을 감시하는 이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루를 인질로 삼아 탈출에 성공했단다. 도망 가는 길에 도시와 고원 사이의 사막에 루를 내려주고 고원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루가 사막에서 정신을 잃는 바람에 익인들만 살고 있는 고원까지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단다. 익인들은 루를 보살펴주어 루가 깨어나긴 했는데, 어떻게 하면 오해를 사지 않고 도시에 데려다 줄 수 있는지 고민했단다.

비오의 쌍둥이 동생인 지요와 가하, 그리고 엄마 시와가 루를 잘 보살펴 주었단다. 루도 두려워하기보다 그곳 생활을 신기해하면서 그들과 잘 지냈단다. 고원지대의 지도자는 지장이라고 불렀는데, 고원지대의 지장도 루를 만났단다. 루는 고원지대에서 지내면서 익인들의 역사와 삶을 조금씩 알아갔단다. 예전에 익인들은 새들의 말들도 이해를 했는데, 익인들의 언어체계를 바꾼 이후는 새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어. 고원지대에서 나오는 물품들을 도시인들에게 팔기도 했어. 특히 은각마라는 신기한 새의 눈알인 은각안이 도시인들에게 인기가 많았어. 은각마가 죽은 후에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은각안은 정말 희귀했단다. 그런데 도시인들이 더 많은 은각안을 요구했어. 그러다가 보니 은각마를 일부러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고 은각마는 멸종위기에 빠지게 되었어. 이렇게 도시인과 익인들 사이의 갈등이 점점 커지고 익인들이 도시인들의 시청사를 공격하게 된 것이었단다.

 

1.

익인의 주인공 비오에 대한 비밀을 하나 이야기해줄게. 비오의 아버지는 사실 도시인이었단다. 옛날에 길을 잃고 고원지대에 왔다가 비오의 어머니 시와를 만나 사랑했지만, 고향인 도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란다. 그 후에 시와는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어. 고원지대에서 도시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어. 익인들은 혈통을 중시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이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기를 낫게 하되 그 아기는 커서도 혼인을 하지 못하게 하고, 아이도 낫지 못하게 하는 계를 내리자고 했어. 그러니까 도시인과 익인 사이의 아이는 비오 하나로 끝내자는 협의를 한 것이었어. 비오는 도시인과 익인 사이의 아이라서 그런지, 다른 익인들의 비해 키는 훨씬 크고 날개는 훨씬 작았단다.

고원지대에서는 18세 되는 해에 일종의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행식 행사가 있었어. 비오를 비롯하여 세 명이 이행식을 받았어. 이행식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절벽에서 나는 행사를 하는데, 이는 용기를 심어주기 위한 행사였단다. 이행식이 끝이 난 이후에는 축제의 밤이 이어진단다.

한편 도시에는 무화라는 사설 군대가 있었어. 무화 군대의 회장은 유안이라는 사람인데 군대를 다루지만 합리적인 사람이었어. 하지만 유안의 아들 마이는 그렇지 않았단다. 마이는 이 소설의 거의 유일한 빌런으로, 고원지대의 익인들의 생체 비밀을 알아내어 군대에 이용하려고 했어. 그래서 익인들의 시신을 몰래 훔쳐오고 유골들도 수집하는 일을 벌였어. 그러다가 루를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루를 납치해 간 비오를 찾으려고 고원지대에 군대를 보냈단다. 그 핑계를 대고 살아있는 익인을 납치해 오려는 목적이 컸어. 이것은 엄연한 고원지대와 도시 사이의 계약 위반이었어. 무화 군인들과 마주친 비오의 동생 가하는 자신이 비오라고 이야기하자, 무화 군인들은 확인 절차도 없이 바로 가하를 납치해 돌아갔단다. 마이는 데리고 온 익인이 비오가 아닌 것을 알고 군대를 다시 보냈어.

그 사이 비오도 가하가 사라진 것을 알고 루와 함께 무작정 도시로 향했단다. 오는 도중 무화 군인들을 만나 공격을 당했는데 이때 루는 등에 중상을 입고 비오는 다리가 부러졌단다. 비오는 자신의 날개와 온 몸으로 루를 감싸 안아 치료를 했단다. 이것은 익인들의 능력이었어. 날개나 몸으로 다친 사람을 감싸 안으면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었거든. 그렇게 하여 루의 상처는 나았지만, 비오는 여전히 부상을 입어 날 수가 없었어 군대에 잡혀 도시로 끌려왔단다.

무화의 회장인 유안은 아들 마이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더욱이 자기 마음대로 군대를 이끌고 고원지대를 오가는 것 때문에 더 사이가 안 좋아졌단다. 유안은 마이 몰래 일단 루를 빼돌려 보살펴 주었는데, 루는 유안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비오의 아버지가 유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비오는 동생 마이를 구출하여 고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도시 사람들과 익인들은 갈등을 봉합하고 다시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난제들이 많이 쌓여 있는데 잘 해결될 수 있는지 책장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덧 책의 마지막에 다다르게 되는구나.

약간의 해피엔딩과 약간의 언해피엔딩.

아빠는 판타지 소설도 가끔 읽긴 하지만, 현실 세계를 다룬 소설을 더 즐겨 읽고 좋아한단다. 그래서 구병모 님의 소설은 아직 낯설고 익숙지 않은 것 같구나. 작년인가 영화로도 만들어진 구병모 님의 <파과>라는 소설도 아직 읽지 않았는데 그 소설도 판타지 소설이려나. 기회가 되면 그 소설도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열사의 대지라도 한밤중에는 기온이 5도까지 떨어진다.

책의 끝 문장: 지금, 내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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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또 그런 빚을 물어주는 싸움은 아니라도, 윤직원 영감은 가끔 딸 서울아씨와도 싸움을 해야 합니다. 작은손자며느리와도 싸움을 해야 하고, 방학에 돌아오는 작은손자 종학과도 싸움을 해야합니다.

며느리 고씨하고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방에 있는 대복이나 삼남이와도 싸움을 해야 합니다.

맨 웃어른 되는 윤직원 영감이 그렇게 싸움을 줄창지듯 하든가 하면, 일변 경손이는 태식이와 싸움을 합니다.

서울아씨는 올케 고씨와 싸움을 하고, 친정 조카며느리들과 싸움을 하고, 경손이와 싸움을 하고, 태식이와 싸움을 하고, 친정아버지와 싸움을 합니다.

고씨는 시아버지와 싸움을 하고, 며느리들과 싸움을 하고, 시누이와 싸움을 하고, 다니러 오는 아들과 싸움을 하고 동대문 밖과 관철동의 시앗집엘 가끔 쫓아가서는 들부수고 싸움을 합니다.

그래서 싸움, 싸움, 싸움, 사뭇 이 여러 싸움을 근저당(根抵當)해놓고 씁니다. 그리고 그런 숱한 여러 싸움 가운데 오늘은 시아버지 윤직원 영감과 며느릴 고씨와의 싸움이 방금 벌어질 켯속입니다.


(241)

만일 오늘이 우리한테 새것을 가져다주지 않고 어제와 꼬옥 같은 것만 되풀이를 한다면 참으로 우리는 숨이 막히고 모두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와 같으면서도 (어제 치면서도 더 자라난) 한 다른 오늘 치를 우리한테 가져다주고,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하는 동안 인간은 늙어 백발로, 백발은 마침내 무덤으로…… 이렇게 하염없어도 인류는 하루하루 더 재미있어간답니다.


(260-261)

사람은 누구 없이 뱀을 섬뻑 만나면 대개는 깜짝 놀라 몸이 오싹해지고, 반사적으로 적의와 경계의 자세를 취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오래오랜 조상, 즉 사전(史前)인류(人類)가 파충류의 전성기대에 그들의 위협 밑에서 수백만 년을, 항상 공포와 투쟁과 경계를 하고 살아오는 동안, 그것이 어언간 한 개의 본능이 되어졌고, 그러한 조상의 피가 시방도 우리 인류의 몸에 흐르고 있는 때문이라고 말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263)

지주가 소작인에게 토지를 소작으로 주는 것은 큰 선심이요, 따라서 그들을 구제하는 적선이라는 것이 윤직원 영감의 지론이던 것입니다. 윤직원 영감의 신경으로는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논이 나의 소유라는 결정적 주장도 크지만, 소작 경쟁이 언제고 심하여, 논 한 자리를 두고서 김서방 최서방 이서방 채서방 이렇게 여럿이, 제각기 서로 얻어 부치려고 청을 대다가는 필경 그중의 한 사람에게로 권리가 떨어지고 마는데, 김서방이나 혹은 이서방이나 또는 채서방이나에게로 줄 수 있는 논을 최서방 너를 준 것은 지주 된 내 뜻이니까. 더욱이나 내가 네게 적선을 한 것이 아니냐?...... 이것이 윤직원 영감이 소작권에 의한 자선사업의 방법론입니다.


(274-275)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나고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하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그런디 이런 태평천하에 태어난 부잣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지가 떵떵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놀 부랑당패에 참섭을 헌담 말이여,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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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그들 2 한국문학을 권하다 33
김동인 지음, 구병모 추천 / 애플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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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서 김동인의 <젊은 그들> 2권을 이야기해줄게. 1권에서 주인공인 안재영이 총살당하여 죽은 것처럼 끝났지만, 읽은 이들 중에 안재영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하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안재영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 안재영을 민겸호의 집으로 보낸 명인호는 안재영의 소식을 듣고 병환 중인 몸을 이끌고 안재영이 총살당했다고 하는 현장에 가보았어.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안재영의 시신도 사라졌어.

며칠 동안 수소문 끝에 어떤 선비가 안재영의 시신을 가지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어. 명인호는 어쩌면 안재영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단다. 활민숙에도 안재영의 처형 소식을 들었어. 활민숙 사람들은 다들 놀라움과 동시에 슬픔에 빠졌단다. 활민 선생은 그제서야 인숙을 불러서 안재영의 정체를 이야기해주었단다. 안재영이 바로 이인숙의 약혼자인 명진섭이라고참으로 답답하다. 1권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인숙에게 안재영의 정체를 숨길 이유를 도저히 몰랐는데, 이제 죽었다고 하니 곧바로 정체를 알려주는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인가. 인숙은 자신이 짝사랑했던 안재영이 자신의 약혼자였다는 것에 놀라고, 그런 약혼자를 잃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지는 듯했어.

활민숙에 익명의 서찰이 날아왔는데, 그것은 사실 민영환이 보낸 것이야. 안재영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민영환에게 부탁한 것. 활민숙 소탕 예정 소식을 활민숙에 알려서 미리 피하게 했거든. 그래서 활민 선생 주도 하에 숙생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서 은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단다. 갈 곳 없는 인숙은 활민 선생의 친구 집에 머무르게 되었지. 그러나 인숙은 자신의 약혼자가 죽은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단다.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민겸호의 집에 무작정 들어갔다가 붙들려 갇히고 말았어. 민겸호에 집에 머무르고 있던 명인호가 광에 갇혀 있는 이인숙을 도망가도록 도와주었단다. 이인숙은 아직 명인호와 흥선대원군 편으로 귀순한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처음에는 놀랬지만 명인호는 자신과 안재영의 관계를 이야기해주었어. 그곳에서 도망 나온 이인숙은 명인호가 소개해준 집에 은거하며 지냈단다.

 

1.

1권에서 안재영과 사랑을 나눴던 기생 연연 생각나지? 연연도 안재영이 총을 맞고 사라졌다는 소식에 놀랬어. 그리고 안재영의 약혼녀 이인숙의 존재를 알게 되고, 명인호를 통해서 만나게 해달라고 했단다. 연연은 이인숙을 만나서 안재영을 찾는데 서로 도우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보다 질투심에 사로 잡혀 이인숙을 쌀쌀하게 대했고, 이인숙도 연연에게 반감만 생겼단다. 명인호는 이런 연연을 혼내고, 연연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는 인숙을 찾아와 깊이 사과했단다. 그리고 인숙은 연연의 집에 남장을 하고서는 숨어 지냈단다.

흥선대원군도 안재영의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듯했어. 어느날 민영환이 흥선대원군을 찾아왔단다. 민영환은 자신의 아버지 민겸호가 한 짓들에 대해 깊이 사과를 하고, 민영환 자신은 흥선대원군이 생각하는 나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진정성을 안다고 했어. 흥선대원군도 그런 민영환의 마음을 받아주었단다. 그러던 어느날 흥선대원군에게 일월(日月)생존(生存)’이라는 글씨가 써 있는 편지를 받았는데, 그 뜻을 해석해보니 ()’씨가 살아있다는 뜻으로 안재영이 살아있다는 소식이었어.

인숙은 비어 있는 활민숙을 찾았다가 기척소리에 놀랐어. 그 소리 나는 쪽을 봤을 때 안재영을 본 것 같았는데 금방 사라졌단다. 인숙은 자신이 머물던 방에 갔다가 그곳에서 일월(日月)생존(生存)’이라는 쪽지글을 보았단다. 인숙도 안재영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했단다. 인숙은 안재영의 생존 소식을 스승인 활민 선생에게 알리러 길을 떠났단다. 활민 선생을 만난 인숙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다시 상경하기로 했단다. 오는 길에 드디어 인숙과 활민 선생은 안재영을 다시 만났단다.

안재영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어. 총을 맞았지만 관통하여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고, 다행히 민겸호의 무리들은 자신을 두고 모두 돌아갔고, 그곳을 우연히 지나던 김시현이라고 하는 용한 의원에 그를 발견했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안재영을 데리고 갔고, 며칠 만에 정신이 깨어났다고 했어. 김시현의 치료로 한달 만에 완쾌하여 다시 서울로 온 것이라고 했어. 흥선대원군을 만나 인사 드리고 그 다음 스승님께 인사 드리려고 오는 길이라고 하는구나. 스승 먼저 만나야 하기 때문에 인숙과 마주쳤음에도 자리를 피했던 것인가 보구나. 이런 남자를 사랑해야 하나. ㅎㅎ 아무튼 안재영는 이제 명진섭이 되어 이인숙을 만나게 되었단다. 그리고 숙생들도 모두 다시 만났단다.

 

2.

오래 전 천도도인이 큰 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던 임오년 유월이 되었어. 임오년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역사적 사건 없니? ‘임오로 시작하는 조선말 역사적 사건. 그래,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이야. 임오년 유월 드디어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고 궁궐을 접수했단다. 숙생들도 참여해서 그들에게 힘을 실었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궁에 들어갔어. 왕비는 어느새 도망을 갔고, 흥선대원군은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단다. 왕비는 이때 충주로 도망가 지냈는데, 왕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단다. 비밀리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얼마 안 있어 청나라 군대가 서울에 입성하게 되었어. 우리나라의 문제를 외세를 끌어들여 해결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반국가적인 생각이니..

결국 청나라 군대에 의해 임오군란은 진압이 되고, 흥선대원군은 63세 나이에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단다. 뒤늦게 안재영이 청나라 군을 쫓아가보았지만, 이미 흥선대원군을 실은 배는 인천을 떠나 청나라로 향했단다. 희망을 잃어버린 안재영은 다시 활민숙으로 왔어. 그곳에는 활민 선생과 다른 숙생들이 모두 독주를 먹고 자결해 있었단다. 꼭 그렇게 죽음을 선택했어야 할까. 살아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그 사이에 인숙은 충주에 가서 왕비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왔는데, 인숙도 활민숙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하게 되었어. 재영은 인숙에게 다른 숙생들처럼 자결하자고 했고, 인숙도 재영의 뜻에 따르기로 했단다. 둘은 서로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인 만큼 조용히 단 둘이 혼인식을 올리고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면서 이 소설은 끝이 났단다.

아빠가 기대했던 결말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구나. 소설의 제목은 <젊은 그들>인데 소설의 결말은 제목과 달리 비극으로 끝을 맺었어. 우리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젊은 그들처럼 무너진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는 나이였는데 말이야.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꿈꾸었던 것은 어차피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한 번의 실패로 그렇게 쉽게 목숨을 버리다니, 아빠로서는 이해불가로구나. 아빠가 1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결말도 이 소설의 설정이 다소 과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 것이란다. 옛소설이지만 재미는 있게 읽었다만, 공감할 수 없는 설정들이 많았단 소설이었어.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재영이를 범의 굴로 보낸 날 밤 인호는 밤새도록 재영이를 기다렸다.

책의 끝 문장: 그 두 개의 시체를 실은 어선은 다시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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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3)

대엽을 무기로 고사리는 폐름기말의 대멸종을 버티며 중생대를 자신의 시대로 맞을 준비를 한다. 더불어 고사리류는 엄청난 진화방산을 해낸다. 커다란 잎으로 광합성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키운 덕분이다. 마치 영국이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생산으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것처럼 고사리는 고생대 말과 중생대 초의 식물계의 패권을 차지한다.


(30)

그런데 은행나무는 생물분류상 은행문 은행목 은행과 은행속 은행종일뿐 아니라 놀랍게도 은행문에 속하는 유일한 생명이다. 그의 가까운 형제들은 2 7천만 년 전 페름기에 처음 발견되었는데 중생대를 거쳐 번성하다가 신생대가 되자 모두 멸종해버리고 은행나무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신생대 이후 은행나무의 형제들은 화석으로도, 살아 있는 개체로도 보이지 않는다.


(43)

중생대 전반을 거쳐 확연한 지상 생태계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겉씨식물의 경우 가장 살기 좋은 곳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았을 것이고 그곳에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데 굳이 꽃을 피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점점 높은 산 위로 올라간 식물이다 건조한 지역으로 이동한 식물들은 살기 위한 시간과 진화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들은 좀 더 효율적으로 번식을 해야 했고 하나의 꽃가루도 하찮게 여기지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짧은 우기에, 혹은 짧은 여름에 재빠르게 번식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애써 수정한 씨앗이 이런 건조하고 추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투쟁의 결과가 꽃이고 배젖이다.


(59-60)

딱정벌레부터 한 번 살펴보자. 곤충 중에서도 가장 많은 종수를 차지하는 딱정벌레목의 곤충은 현재 알려진 수만 35만여 종이다. 이는 곤충 전체로 봤을 때는 40%, 동물계 전체를 봤을 때 25% 가량을 차지하는 수치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종까지 염두에 두면 약 500~800만여 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방아벌레, 잎벌레, 바구미, 풍뎅이, 곰보벌레, 물방개, 물진드기, 물맴이, 딱정벌레 등 다양한 곤충들이 딱정벌레목에 속한다. 두 번째로 종류가 많은 나비목에는 약 18만 종, 세 번째로 다양한 종수를 자랑하는 벌목에는 약 15만 종이 기록되어 있어 이들 셋이 종을 합치면 전체 곤충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96)

이로써 피부는 기체 교환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를 내려놓게 되었다. 단순한 세포막이었던 시절부터 가져왔던 임무가 사라지자 피부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역할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단단한 각질이 생겨 피부를 감싸기 시작했으며, 털이나 깃털이 나면서 외부의 온도변화로부터 몸 내부를 보호하는 역할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어떤 피부에는 땀샘이 만들어지면서 보다 능동적으로 외부의 온도변화에 대응했다.


(130)

바다에 살기 시작한 이후 고래의 조상은 점점 덩치가 커진다. 가장 큰 이유는 체온 때문이다. 바닷물은 공기보다 체온을 빨리 뺏어간다. 체온을 보존하는 것이 바다에서 살기로 결정하는 순간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특히 고래는 어떠한 조건에서도 항상 일정한 체온을 유지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포유동물, 즉 정온동물이었다. 몸 전체에 두꺼운 피하지방을 둘러 체온은 유지하는 것은 불가결한 선택이었고, 이로 인해 덩치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커진 덩치는 부피 대비 표면적을 줄여 체온이 손실을 방지해주었다. 추운 극지방에 사는 생물들이 덩치가 커진 것도 같은 이유다. 바닷속에서 사는 시간이 많은 펭귄이나 물개, 바다사자 같은 생물들도 육지의 친척들에 비해 덩치가 크고 피하지방층이 두렵다.


(136)

처음에는 물속까지 들어갈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점점 건조해지는 환경에서 육식동물이건 초식동물이건 먹이를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한 선택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초식동물은 덩치가 더 크고 무리를 잘 지어 다니는 동물들이 얼마 남지 않은 식물들을 휩쓸고 가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었을 것이고, 육식동물은 먹이로 삼을 초식동물이 줄어드니 경쟁이 더 치열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던 동물들이 바다에 다다랐고, 썰물 때 물이 빠진 갯벌이나 모래사장에서 물때를 못 맞춰 발이 묶인 물고기를 먹거나 조개를 깨먹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초식 동물은 바닷가에서 소금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는 염생식물을 처음 먹어 봤을지도 모른다. 육식동물이건 초식동물이건 그렇게 조금씩 물속의 먹이를 먹으며 물속 먹이 사냥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168)

날개를 만들기까지의 고된 과정을 생각하면 이들이 스스로 원해서 날개를 가졌을 가능성은 없다. 드넓은 대지 위에 자신의 몸 하나 편안하게 누일 곳이 없었던 생명, 가는 잠이 들다가도 풀숲을 뒤척이는 작은 기척에 화들짝 놀라 큰 눈을 굴리며 사방을 살피던 생명, 먹이를 구하러 다니다가 천적의 냄새에 쪼르르 도망가던 생명. 이런 생명들이 나무를 타고 나무 위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이 새의 비상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234)

뱀은 몸이 가늘고 길다. 이런 몸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허파도 대단히 좁고 길게 진화해 왔다. 많은 종류의 뱀에서 왼쪽 폐는 퇴화되어버리기까지 했다. 땅속으로 들어가니 사지도 소용이 없었다. 뱀의 앞발과 뒷발은 조금씩 퇴화되어 줄어들다가 마침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네 다리가 사라지고 난 뒤 대신 긴 척추를 얻었다. 수백 개에서 많게는 천 개가 넘는 척추가 뱀들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기어 다니고, 땅속을 헤집고 다닐 수 있는 힘이다.


(237-238)

뱀이건 도마뱀이건 땅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지상의 생태계에서 자신이 누리던 역할과 지위를 빼앗겼기 때문일 것이다. 벌레를 잡아먹자니 포유류의 선조들이 훨씬 더 빠르게 사냥을 해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다른 작은 동물을 잡아먹고 살지니 지배파충류에서 진화한 공룔 중 덩치가 비교적 작은 이들에게 밀려난다. 변온동물이라 밤에는 움직이기가 힘들고 낮에는 다른 동물과의 경쟁이 버겁다. 그래서 갈 수 밖에 없었던 곳이 바로 흙 속이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포식자를 피해 땅속으로 숨어, 흙 속을 헤매는 다른 벌레를 먹으며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252)

어디 비단 벌거숭이두더쥐뿐일까, 무족영원도, 뱀도, 두더지를 비롯한 포유류도 흙 속으로, 땅속으로 들어간 모든 생명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독한 과정을 겼었다. 팔다리를 없애고, 눈이 멀고, 모습을 완전히 바꾸는 긴 세월에 걸친 진화를 버텨내고 이겨냈다. 그 결과로 땅속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냈다. 기껏해야 선충이나 지렁이 정도가 최상위 포식자였던 지하세계에 새로운 생태계를 구성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와 자연의 경계를 넘어간 생물들에 의해 지구는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생태계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257)

익숙한 환경과 삶에서 내몰린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인간의 선조 역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미 나무를 타기에 적합하게 진화한 앞발로는 초원에서 사족보행을 할 수 없었다. 우리의 숲 친척인 고릴라와 침팬지 등은 손등은 땅에 대며 걷는 이른바 손등걷기를 한다. 손등걷기는 숲에서 잠시 걷는 것에는 괜찮을지 모르나 초원에서 천적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을 때 걷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무를 타기에 적합한 손으로 오랜 기간 초원을 걷기가 힘든 일이었다.


(259)

이들은 강가로도 갔다. 강바닥에 묻혀 있는 조개를 파내어 먹었다. 손에 쥔 돌을 내리쳐 조개의 껍데기를 부수고 알멩이를 먹었다. 바닷가에서도 마찬가지로 조개를 먹었다. 무리를 짓기 시작한 후에는 다행히 웬만한 포식자들은 가까이 접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류의 선조들은 하루 종일 힘들게 먹이를 찾아 헤매야만 했다. 숲 속에선 손만 뻗으면 있던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헤매야만 했다. 숲 속에선 손만 뻗으면 있던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이젠 발품을 팔아 강가로 가야했고, 숲으로 잠깐 들어갔다가도 잽싸게 나무 열매를 따고는 숲 속 원숭이 떼를 피해 도망쳐야 했고, 사자 무리를 만나도 도망을 쳐야 했다. 숲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험한 날들이었다. 밤이 되어도 안식은 없었다. 숲에서는 밤마다 나무 위에 모여 포식자를 피할 수 있었지만 허허벌판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야행성 포식자를 피해 선잠을 자야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될 때까지 먹이를 구해 사방을 돌아다니고, 포식자들을 피해 다니는 삶이 계속되었다.


(267)

이런 인간의 탈출은 기존의 생태계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이 개척한 곳마다 기존의 생태계는 배제된다. 농경지를 일구면 그 곳에 살던 식물들이 사라지고, 식물과 함께 살던 동물과 균도 함께 사라진다. 도시를 세우면 숲이 사라지고 숲과 함께하던 동물들이 사라진다. 도로를 놓으면 도로 양쪽으로 자유롭게 오가던 동물들은 고립된다. 항구를 만들면 그 주변의 생태계가 파괴된다. 인간의 영역이 확장될수록 기존에 존재하던 지구 생태계는 줄어든다. 인간의 탈출은 이제 인간의 공습이 되었고, 한정된 지구에서 생태계는 지구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 최초로 영역이 축소되기 시작한 것이다.


(273)

생태계 내에 강력한 경쟁자가 생기면 경쟁에 진 생물종은 생태계의 경계까지 쫓기고 되고 그 곳에서 새로운 생태계로 자리를 옮기든가, 아니면 종 자체가 사라지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나 강력한 경쟁자인 인간의 등장은 생태계의 모든 종들을 경계로 몰아붙이는 것도 모자라, 모든 생태계를 파괴해 나가며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기회까지 차단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생물들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멸종해 나가고 있다. 지난 역사 속의 5대 멸종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멸종이었던 폐름기 대멸종보다도 더 빠르게 생명종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번성하는 종은 인간이 선택한 몇몇 가죽과 식물, 그리고 인간의 도시에서 살도록 진화한 특정한 생물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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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20 0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구라는 푸른 행성을 지배하려는 인간 종은 더불어 함께 살기 보다는 다른 종을 거의 모두 파멸로 몰아가는 형세입니다. 이 벌을 어떻게 다 갚을 수 있을까요?ㅠㅠ

bookholic 2025-12-22 22:57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우리의 터전이 이렇게 망가지는 것을 그냥 볼 수밖에 없다니..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