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안내판 뒤쪽으로 내 뼈를 옮기는 자는 저주받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폭풍>을 마지막 작품으로 완성하고 셰익스피어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616년 몸져누웠다. 그의 생애와 함께 흘러왔던 모든 것, 그가 이룩했던 모든 것이 절대적 단절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이 먼 미래까지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한번 쓰고 고치는 법이 없었던 창작과 달리, 고칠 때마다 새로 작성한 유서가 무려 134통이나 되었다.


(107)

로마인들이 배스를 건설한 것은 기원후 60년이었으니, 그들의 열정은 거의 2천 년의 세월을 건너와 나를 불가항력적인 감탄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로마제국은 대략 기원전 50년부터 5세기 동안 브리튼을 지배했다. 그들이 로마의 군대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산과 들과 강을 피로 물들였다. 브리튼인들은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로마제국은 제 앞가림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샘의 족장들은 제각기 왕국을 건설하여, 브리튼에 일곱 개의 왕국이 생겨났다. 이른바 앵글로 색슨 7왕국이다. 브리튼 사람들이 로마에 구원을 요청한 것을 보면, 그들은 로마제국에 대해 공포와 존경이 뒤섞인 양가적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169)

괴테는 셰익스피어의 언어적 특성, 즉 외적 감각에 호소하기보다는 내적 감각에 호소하는 상상력을 높이 평가했다.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우리의 내적 감각을 향해 말한다. 이것을 통해, 상상의 그림 세계가 활성화되며, 완벽한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덧붙일 수 없다. 정확하게 여기에 모든 것이 우리 눈앞에 일어나는 환상의 바탕이 놓인다.”


(200)

로미오는 자신을 순례자로, 줄리엣을 성자로 비유하며 손을 잡고 입을 맞춘다. 그렇지만 그가 사용하는 종교적 이미지들은 말 그대로 베일일 뿐이고, 이들의 행동과 말에는 자연적 세계관이 더 깊이 침투해 있다. 이 세계관으로 보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그들의 욕망은 자연의 의지 또는 본성일 뿐이다.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던 이 세계관은 심리적 층위와 제도 및 관습적 층위 사이의 충돌을 조장하며 등장인물들의 말투에 역설과 모순을 주입한다.


(238)

전쟁 속의 사랑을 이만큼 사실적으로 다룬 작품이 또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두 남녀의 사랑을 참담한 역사적 현실 속에 던져두고 냉정하게 관찰했다. 이러한 태도는 비극이라는 미학적 전형까지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의 투철한 현실주의와 빛나는 실험 정신이 런던의 극장가에서 환영받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대중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난파될 수밖에 없는 사랑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327)

테리 이글턴의 말을 들어보자.

셰익스피어의 대담한 말장난, 비유와 생략은 의문을 불러일으킬 만큼 위협적이다. 사회적 안정에 대한 그의 신념은 발화되는 바로 그 언어에 의해 위협받는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에게는 글쓰기의 행위 자체가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불화하는 인식론(또는 지식이론)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몹시 당혹스러운 딜레마이며, 셰익스피어의 연극 대다수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전략들을 이해하는 데 바쳐졌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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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22
찰스 디킨스 지음,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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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지난 편지에 이어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권을 이야기해줄게. 주인공 핍은 익명의 후원자로부터 유산을 받고 신사수업을 받기 위해 런던에서 지내고 있었잖아. 핍의 첫사랑이자 짝사랑 에스텔라가 외국에서 돌아왔는데, 런던에 온다는 연락이 와서 핍은 잔뜩 들 떠 있었단다. 에스텔라는 미스 해비셤의 지시로 리치먼드에 있는 브랜들리 모녀와 함께 지내기로 했대. 런던에서 핍과 에스텔라는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 핍의 기대와 달리 그들의 관계는 사랑 측면에서 진척이 없었단다. 에스텔라는 핍에게 리치먼드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고, 핍은 에스텔라를 리치먼드까지 데려다 주었단다.

핍은 이제 런던에서의 신사다운 생활에 적응해 갔는데, 문제는 돈이 자꾸 들어간다는 거야. 막대한 유산이 있기 때문에, 핍은 일단 돈이 부족하면 빚을 졌단다. 그러다 보니 슬금슬금 빚도 불어났지. 핍은 친구들과 <작은 숲>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허버트도 그 모임의 회원이었어. <작은 숲>의 회원들 중에 드러믈이라는 친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어.

어느날 고향에서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어.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누나의 부고 소식이었어. 핍은 큰 충격에 빠졌고, 장례식장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에 왔단다. 장례식을 마치고 홀로 남은 매형 조 가저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단다.

 

1.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핍은 이제 성인이 되었어. 후견인 재거스는 후원자의 약속에 따라 핍에게 일 년에 500달러를 지급하였단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긴 핍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허버트를 남몰래 돕기로 했단다. 허버트는 취업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핍이 돈을 써서 취업을 하게 된 것이란다. 핍은 가끔 리치먼드에 가서 에스텔라를 만나는데, 어느날 에스텔라는 미스 해비셤의 새티스 하우스에 데려다 달라고 하여 핍과 에스텔라는 함께 새티스 하우에 갔단다. 에스텔라는 자신이 미스 해비셤에 의해 억압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불만을 미스 해비셤에게 이야기했어.  해비셤이 에스텔라를 입양한 이유는 에스텔라가 불쌍해서 아니었어. 에스텔라의 미모를 이용하여 남자를 유혹하고 그들을 걷어차게 해서 자신을 위해 남자들에게 대리 복수를 해주기 위해서였어. 에스텔라는 미스 해비셤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만, 미스 해비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억압된 생활을 해야만 했던 거야. 에스텔라는 이것이 불만이었지. 반면 미스 해비셤은 에스텔라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불만이었어. 둘은 언쟁을 벌이기도 했지.

핍은 다시 런던으로 왔어. 어느날 낯선 남자가 찾아왔단다. 자세히 보니 그 낯선 남자는 어린 시절에 자신이 도와주었던 탈옥수였던 거야. 핍은 깜짝 놀란 것과 동시에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에 그를 보고 두려움을 느꼈단다. 그런데 그가 이야기하기를 자신이 핍을 신사로 만들어준 후원자라는 거야. 그러면서 그 근거들을 이야기하는데, 후원자가 아니면 모르는 내용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후원자가 맞았단다. 지금까지 자신의 익명의 후원자가 미스 해비셤이라고 생각했는데, 핍의 후원자는 탈옥수 매그위치였던 거야.

핍은 큰 충격을 받았단다. 어린 시절 자신을 협박하고 두려움에 떨게 했던 죄수가 자신의 후원자였다니. 매그위치는 죄값을 다 치렀다고 했지만, 그는 유형지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몸이었단다. 유형지를 벗어난 지금 또 다른 죄를 저지른 것이야. 매그위치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목숨 바쳐 번 돈을 핍에게 후원한 것이야. 그는 자신이 신사가 되지 못한 것이 서러워 자신이 번 돈으로 다른 사람을 신사로 만들기로 마음 먹은 것이었어. 핍은 죄수의 돈을 받아 썼다는 것에 심적으로 괴로워했어. 일단 매그위치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지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어. 허버트가 집으로 돌아와서 핍은 매그위치에 존재에 대해 숨길 수 없었어. 매그위치는 핍과 허버트에게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했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핍은 마음에 큰 동요를 느끼고 한 단계 성장하게 된단다.

 

2.

매그위치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부터 불우하게 살아왔어. 돈을 벌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했어. 성인이 되어서 콤피슨이라는 신사를 만나서 함께 사업을 했는데, 알고 보니 콤피슨은 사기꾼이었어. 콤피슨의 사기행각이 들통이 나서 콤피슨과 매그위치는 함께 재판을 받게 되었어. 그런데 콤피슨는 신사 신분이라는 이유로 금방 풀려났고 매그위치는 종신형을 살게 되었어. 이 때 알게 된 변호사가 재거스였기 때문에 매그위치가 나중에 핍에게 돈을 후원하기로 했을 때 재거스 변호사에게 부탁을 한 거야. 콤피슨의 사기 행각은 한둘이 아니야. 미스 해비셤의 결혼식장에 오지 않았던 신랑도 바로 콤피슨이었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핍은 심한 동요를 했어. 자신은 신사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신사라고 해서 도덕적인 사람과 같은 말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 자신이 아는 신사 중에도 드러믈과 콤피슨 같은 사람은 못된 사람들이었거든. 그에 반해 신사는 아니지만 매그위치나 자신의 매형 조 가저리는 마음씨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었거든. 신사의 기준이 도덕적인 품성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진정한 신사는 조와 매그위치 같은 사람이니까 말이야.

핍은 새티스하우스에 가서 미스 해비셤에게 왜 자신의 후원자인 척 했냐고 물어보니.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어. 핍과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라고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하네. 한편 핍의 애정 전선에도 문제가 생겼어. 핍은 자신의 후원자가 미스 해비셤이라고 생각했고, 미스 해비셤이 양녀인 에스텔라를 자신의 짝으로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에스텔라가 지금은 차갑게 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짝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자신의 후원자가 미스 해비셤이 아니니, 에스텔라와 결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 핍은 에스텔라를 만나 사랑 고백을 했지만 에스텔라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단다. 에스텔라는 벤틀리 드러믈과 결혼하겠다고 했어. 핍이 생각하기에 드러믈은 돈만 많지, 완전 속물이었기 때문에 에스텔라의 이런 발언에 대해 크게 화를 했단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결국 드러믈과 결혼하게 된단다. 사랑은 늘 어렵지.

매그위치의 지난 이야기를 들은 핍은 동정심이 생겨서 그를 도와주기로 했어. 사실은 핍이 매그위치로부터 더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그에 대한 조그마한 보답이라고 해야겠지. 매그위치는 따로 방을 얻었고 핍은 매그위치를 자주 찾아갔단다.

어느날 미스 해비셤의 호출이 있었어. 미스 해비셤은 이제라도 핍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겠다고 했어. 핍이 돌아간 이후 미스 해비셤은 그제서야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를 했고, 에스텔라에게 한 짓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후회를 했단다. 먼지 쌓인 결혼 장식들도 없애려고 했던 것인지 그만 집에 불이 나고 말았어. 돌아가는 길에 새티스 하우스에 난 불을 본 핍은 다시 돌아와서 미스 해비셤을 구출했단다. 하지만 미스 해비셤은 중상을 입었고, 핍도 양쪽 손에 화상을 입었단다.

….

오래된 이야기들이지만 핍은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 조각난 이야기들을 짜맞추어보니 엄청난 진실을 알게 되었단다. 에스텔라의 아버지는 바로 매그위치였고, 어머니는 재거스 씨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인이었어. 하지만 본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서로 죽은 줄만 알고 있었어.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재거스 씨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지만, 재거스 씨는 그 사실을 지금 안다고 해서 좋을 것이 없다면서 당사자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매그위치는 유형지를 벗어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핍과 허버트는 매그위치를 몰래 해외로 빼돌릴 궁리를 했단다. 그런데 매그위치의 철천지 원수인 콤피슨이 나타났어. 콤피슨은 경찰들을 데리고 매그위치를 쫓고 있었어. 그러다가 콤피슨과 매그위치가 결투를 하게 되었고, 콤피슨은 물에 빠져 죽었고 매그위치는 증기선에 부딪혀 중상을 입고 말았어. 재판에 넘긴 매그위치는 사형 선고를 받고 재산 몰수를 당했어. 그리고 매그위치는 중상 입은 것이 점점 심해져서 죽고 말았단다. 죽기 전에 핍은 매그위치에게 딸의 존재를 이야기했단다. 매그위치가 죽고 나서 핍도 병이 생겨 앓았단다. 조가 런던에 와서 간호해주었어. 조의 간호로 핍은 완쾌할 수 있었고, 핍은 허버트와 함께 이집트로 가서 사업을 했단다.

11년이 흐르고 오랜만에 핍은 고향에 돌아왔단다. 조는 예전에 식모로 집안일을 봐주던 비디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었어. 핍은 새티스 하우스를 찾아가 보았어. 폐허가 된 새티스 하우스에서 우연히 에스텔라를 만났단다. 에스텔라는 남편과 사별해서 아이와 둘이 지낸단다 했어. 어쩌면 핍은 에스텔라와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친구로 남기로 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핍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신사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았을 것 같구나. 핍은 조와 매그위치와 같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살지 않았을까 싶구나. 핍과 에스텔라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현실이나 소설 속이나 쉽지 않구나. 이 책은 두 권으로 두께가 만만치 않지만, 고전 답지 않게 이야기가 술술 잘 읽힌단다. 나중에 너희들이 여유가 있다면 꼭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재미도 있고, 생각할 거리도 있고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덴마크에 도착한 우리는 그 나라의 국왕과 왕비가 부엌 식탁 위에 놓인 안락의자에 높이 올라앉아 어전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책의 끝 문장: 그리고 걷혀 가는 그 안개가 내게 보여 준 교교한 달빛이 광활하게 펼쳐지며 뻗어 나가는 모습 속에서, 나는 그녀와의 그 어떤 이별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내가 살았던 삶은 불행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산맥의 수많은 산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고산처럼 그 모든 걱정거리들을 지배하듯 굽어보고 있던 한 가지 걱정거리는 내 시야에서 결코 사라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새로운 원인지 아직은 생겨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가 발각되었다는 공포감이 새롭게 찾아오는 바람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고, 밤이 되어 허버트가 귀가하는 발소리가 평소보다 더 빨라지면 두려움에 떨면서 혹시 그가 나쁜 소식이라는 날개를 달고 오는 건 아닌지 잔뜩 귀 기울이며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이라든가 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그보다 더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계속 그대로 돌며 지속되었다.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고, 끊임없이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에 빠져 사는 선고를 받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나는 보트의 노를 저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안간힘을 다해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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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민주화하는 흉내라도 내야 유신 잔당도 희망이 있지. 18년 동안 지반을 뚫을 만큼 깊은 뿌리를 내렸겠지만 역사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야. 오늘 공화당이 계엄령 철폐안 통과에 동의하기로 한 것만 봐도 역사의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 수 있어. 계엄령이 철폐되고 자유선거가 실시되면 이제 군인들의 천하도 끝이라. 온 나라를 핫둘핫둘 구령에 맞춰 움직이려던 군인들은 이제 산중 막사로 돌아가고, 이제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민간인이 민간인을 지도자로 뽑는 진정한 민주의 시대가 열리는 거지. 그동안 거적때기로 엉성하게 가려놓은 죄상들이 백일하에 드러나면, 아마 이 땅에 발붙이고 살기는 어려울걸. 그걸 김종필이 모르지 않을 텐데도 울며 겨자 먹기로 저렇게 신민당이 제안한 법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니 얼마나 통쾌한가? 이것이 바로 역사의 힘이라. 해일을 수도꼭지로 막을 수 있겠나? 아무리 간교하고 뿌리가 깊어도 이번에는 버티기 어려울 거라. 비록 거리로 뛰쳐나가지는 않지만 최루탄 냄새도 꽃 내음 같고 시위의 함성이 사랑 노래로 들리는 것이 내 심경이다.”


(255)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는 없을 거라고?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지? 그동안 권력은 군부의 손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어. 권력자에게나 국민에게나 독재는 지겹도록 신은 낡은 구두 같은 거란 말이야. 반면 민주는 한 번도 신어본 적이 없는 새 구두지. 언제까지나 낡은 구두를 신고 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장은 새 구두보다 편안해. 군부는, 우리에게 다시 헌 구두를 내밀면서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신을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신으라고 말할 거야. 지금 민주의 희망을 꺾고 다시 군부독재의 시절로 돌아가도록 강압한다면 사람들은 새 구두를 빼앗긴 것에 분노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새 구두를 신고 발뒤꿈치가 쓸리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도할 테지.


(259)

선배의 눈빛을 보자마자 못마땅해하는 거 알 수 있었어요. 사실 나, 선배의 그런 눈빛 때문에 선생님이 되려는 꿈도 접고, 평생 구겨진 바지만 입고 살겠다고 결심했던 적도 있었어요. 기억나요? 영등포의 인쇄소에 선전 문건 초안을 받아 들고 갔던 날, 내가 면바지를 다려 입고 왔다고 선배는 화를 냈잖아요. ‘도대체 정신이 있는 얘야? 아까 다섯 시 전에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지금 도대체 몇 시야? 다들 양치질도 못하고 며칠씩 날밤을 새우며 작업을 하는데 너는 집에 가서 바지나 다려 입고 왔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었지요.”


(262)

지금도 나는 가끔 그런 질문을 해요. 사람들의 피가 담벼락을 적시고 하수구로 흐르는 그날이 온다면, 나는 과연 거리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주변에 동지들도 없으니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더욱 내밀한 나 자신의 응답에 귀 기울일 수 있지요. 나는 교사다. 교사가 교단에 서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거리의 핏물을 외면한들 아무도 나를 욕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 놓고 대답해보아라, 하지만 나의 내면은 벙어리가 되었는지 대답을 하지 않네요. 눈을 꾹 감고 붉은 땀만 흘리는 돌부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네요. 하루라도 나의 갈 길을 확신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의심 없이, 두려움 없이, 흔들림 없이, 광화문 앞의 해치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온몸에 휘감고 담대하게 내가 걸어야 할 길을 갈 수 있다면 말이에요.


(337)

문득, 지금 아버지가 나에게 한 말들도 아버지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버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절대적인 권위가 오늘날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힘이 되지 못하고, 아버지가 애써 생각해낸 위로의 말이 엄마의 병을 낫게 하지도 못하고,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믿었던 할머니가 저렇게 한심한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책임지지 못하고, 아버지가 한 번도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끔찍한 무력함일 것 같았다.


(349-350)

어른들은 어른들의 방식으로 살아간단다. 네 힘으로 당장 고칠 수는 없어. 중요한 건 네게 나중에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잘하는 거야. 언젠가 박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하지만 그 말씀은 지금 해답이 될 수 없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지만 어른들은 어른들의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커서 할 일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벌써 중요한 시간이 코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 네 식구가 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손수건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그곳에 선생님이 영상이 맺히기를 기도하며 멀리 있는 선생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선생님과 나의 영혼이 어디론가 서로 통하고 있으리라고 믿는 것, 먼 곳에서라도 나의 외침을 들은 선생님이 답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믿는 것,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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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21
찰스 디킨스 지음, 류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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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고전 소설 하나 이야기할게. 너무나 유명한 작가 찰스 디킨스의 너무나 유명한 작품 <위대한 유산>이라는 책이란다. 고전 소설들은 너무나 유명해서 작가와 제목들은 알고 있는데, 정작 읽어본 것은 많지 않는 것 같아. 아빠도 가끔씩 고전 소설을 읽고는 하지만 읽지 않은 책들이 훨씬 많단다. 예전에는 고전 소설이라고 하면 시대도 다르고 공간도 달라서 진입장벽이 높다고만 생각했거든. 그런데, 하나둘 찾아 읽다 보니 의외로 재미있는 고전 소설들이 많더구나. 하기야 지금은 고전 소설이지만 당대에는 베스트셀러였을 테니 재미없지 않고서야 베스트셀러가 되기 어려웠겠지. 그래서 예전보다는 고전소설에 대한 진입장벽이 많이 낮아진 것 같다.

찰스 디킨스는 참 많은 소설들을 쓰고, 그의 소설들을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단다. 대표작이라고 손꼽을 만한 작품들이 많은데, 아빠는 이번에 <위대한 유산>이라는 소설을 읽었단다. <위대한 유산>아라고 하면 오랜 전에 기네스 펠트로우와 에단 호크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했는데, 아빠는 그 영화는 보지 못했단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줄거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읽기 시작해서 더 좋았단다. 그래서 반전을 즐길 수 있었지. <위대한 유산>은 유명한 작품답게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했단다. 아빠는 열린책들에서 두 권으로 출간한 책으로 읽었어. 오늘은 먼저 <위대한 유산> --권을 이야기해줄게.

 

1.

주인공인 필립 피립. 어렸을 때부터 핍이라고 불렀어. 핍은 어렸을 때 부모님과 다섯 형제를 잃고 20살 차이가 나는 누나와 매형 조 가저리가 키우다시피 했어. 누나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일찍 잃고 어린 동생 핍을 키워서 그런지 생활력 좋은 여장부 스타일이었단다. 매형 조 가저리는 대장장이로 덩치는 엄청 크지만, 순박하고 착한 성품의 사람으로 핍을 친자식처럼 잘 대해주었단다. 어렸을 때 핍은 어느날 족쇄를 차고 감옥을 도망친 탈옥수를 만났는데, 그 탈옥수가 겁을 주면서 아무도 몰래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협박을 했단다. 어린 핍은 무서워서 아무도 몰래 먹을 것을 몰래 숨겨서 그 탈옥수를 가져다 주었어.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도 않았는데, 누나 몰래 먹을 것을 몰래 훔쳐서 탈옥수에 갖다 준 것에 대해 어린 핍은 죄책감을 갖고 누나한테 들통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지. 더욱이 그 음식들을 누나가 초대한 사람들의 오찬에 쓰일 음식이었거든..

그런데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왔어. 탈옥수들을 잡으러 가는데 수갑이 고장이 나서 수리를 요청했어. 대장장이 조 가저리가 그 수갑을 수리해 주었고, 사람들은 점심식사보다 탈옥수 잡는 것이 더 궁금해서 군인들을 쫓아갔단다. 다행히 핍이 음식을 빼간 것은 들통나지 않게 되었어군인들이 탈옥수들을 발견했을 때, 탈옥수 둘은 서로 싸우고 있었단다. 서로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가 싸우다가 쫓아온 군인들에게 잡히고 만 거야.. 덤 앰 더머 같기도 하구나.

1년이 지나고 조 가저리의 숙부 펌블추크의 소개로 핍은 미스 해비셤의 저택에서 일을 하게 되었어. 일이라고 하지만 미스 해비셤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그런 일이었단다. 미스 해비셤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구나. 미스 해비셤이라고 하지만 나이는 지극한 노인이었고, 물려받은 저택에서 혼자 지냈어. 저택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지저분했어. 미스 해비셤은 오래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거실도 결혼식장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시간이 오래되어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어. 어떤 사연이 있던 것일까. 그건 좀 있다 이야기해줄게.

미스 해비셤의 저택 이름은 새티스 하우스였단다. 새티스 하우스에 도착하니 핍과 같은 또래의 에스텔라라는 소녀가 핍을 안내해 주었단다. 에스텔라는 핍을 무시하는 듯 했고 약간 쌀쌀하게 대했어. 미스 해비셤의 첫인상은 병색이 완연해 보였고 마치 시체 같은 모습이었어. 미스 해비셤은 핍에게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보는 앞에서 놀라고 했는데, 혼자 할만한 것이 없다고 하니 에스텔라를 불러 함께 놀라고 했어. 그래서 핍과 에스텔라는 카드 놀이를 했단다. 에스텔라와 미스 해비셤은 무슨 사이인지 잘 몰랐단다. 핍은 6일 뒤에 또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왔단다. 집에 오자 펌블추크와 누나의 질문 공세를 했고 핍은 대부분 거짓으로 대답했단다. 나중에 조 가저리에게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상세히 해주었어.

두 번째 방문세티스 하우스에는 낯선 손님들이 많았어. 핍은 미스 해비셤이 방안을 걷는 것을 도와주었어. 얼마 후 에스텔라는 손님들을 방으로 데리고 왔는데, 손님들은 모두 미스 해리셤의 친척들이었어. 그날은 미스 해비셤의 생일이었는데, 친척들은 생일 축하보다 미스 해비셤의 재산에 관심이 있어서 온 것이었어. 나중에 해비셤이 죽고 나면 그의 재산들을 상속받을 생각으로 왔던 거야. 친척들은 모두 가고, 저택을 둘러보면 핍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낯선 어린 신사를 만났어. 그런데 그 낯선 어린 신사가 핍에게 결투를 걸어와 싸웠는데, 핍이 이겼고, 어린 신사는 상처를 있었어. 소심했던 핍은 또 이것 때문에 한참을 걱정했단다. 핍에 대충 어떤 성격인지 알겠지?

세 번째 방문. 이번에는 어린 신사는 보이지 않았어.. 미스 해비셤은 조 가저리와 함께 오라고 했는데, 미스 해비셤은 그 동안 핍의 보수로 25달러를 주면서 이제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 25달러는 가저리 부부에게는 엄청 큰 돈이었단다. 이후 핍은 조의 대장간에서 도제로 일하게 되었어. 그래도 핍은 가끔 미스 해비셤의 안부를 물으러 새티스 하우스에 갔는데, 아마 핍이 짝사랑하는 에스텔라를 보러 간 것 같았지. 그런데 어느날 에스텔라가 보이질 않았는데, 알아보니 에스텔라는 외국에 있는 숙녀학교에 갔고, 지금은 다른 친척인 세라 포켓이라는 사람이 미스 해비셤을 보살피고 있었단다.

 

2.

어느날 괴한의 공격으로 누나가 머리를 크게 다쳤어.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어. 비디라는 사람이 보살펴주게 되었어. 그래서 핍은 비디와 친구가 되었고, 자신의 비밀이었던 에스텔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비디에게 이야기를 했어.

4년이 흘렀단다. 어느날 변호사 재거스 씨가 찾아왔어. 어떤 익명의 후원자가 핍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겨 주기로 했다면서 말이야. 그리고 유산뿐만 아니라 생활비나 신사 수업에 필요한 경비도 지원해 준다고 했어. 그런데 누가 주는지 물어보지도 말고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도 겉으로 말하지 말고 신사 수업을 받으라고 했단다. 핍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변호가 재거스 씨가 후견인을 맡기로 했어. 익명이라고 했지만, 주변에 알고 있는 부자라고는 미스 해비셤뿐이고, 미스 해비셤과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익명의 후원자는 당연히 미스 해비셤이라고 생각했어.

핍은 조의 도제 생활을 그만두고 신사수업을 위해서 런던으로 가게 되었단다. 핍은 런던으로 가기 전에 미스 해비셤을 찾아가 런던으로 떠난다고 인사를 했어. 그녀가 후원자이기 때문에 인사를 하러 갔던 것이지만 모른 척하라는 약속 때문에 미스 해비셤에게 인사만 하고 나왔단다. 런던에서 재거스 변호사를 만나서 런던의 임시 거처를 소개받았어. 그곳은 허버트 포켓이라는 미스 해비셤의 친적집이었는데, 알고 보니 허버트 포켓은 몇 년 전 새티스 하우스에서 자신과 결투를 했던 어린 신사였어. 둘은 그 결투를 잊은 듯 금방 친해졌단다. 그리고 허버트를 통해서 미스 해비셤과 에스텔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

미스 해비셤의 아버지는 엄청 부자였는데 미스 해비셤은 무남독녀였단다. 미스 해비셤의 어버지가 바람 피워 낳은 혼외자가 있었는데, 말썽만 부리고 해서 그에게는 유산을 거의 주지 않고, 미스 해비셤이 재산 대부분을 상속 받은 거야. 미스 해비셤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결혼을 하기로 했는데, 결혼식 당일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단다. 사기꾼이었던 거야. 하지만 미스 해비셤은 그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 결혼식날 장식했던 그대로 손대지 않고 두었고, 시계도 그날 멈춰진 채 오늘날까지 이어졌단다. 미스 해비셤도 그날 이후 외출도 안하고 집에서만 지냈던 거야. 그리고 에스텔라는 입양아로 들이게 된 거지.

핍은 해머스미스에 있는 미스 해비셤의 친척인 메슈 포켓의 집에서 머물면서 메슈 포켓에게 신사 수업을 받았단다. 이렇듯 런던에서 생활이나 신사 수업을 모두 미스 해비셤의 친척들과 연루되다 보니, 익명의 후원자는 미스 해비셤이 확실했다고 생각했지. 후견인인 재거스 씨의 사무실에 자주 들렀는데, 그곳 사무실 직원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허버트 등 새로 사귄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냈단다. 어느날 조 가저리가 방문했는데, 핍의 마음 속에 어느덧 자신은 다른 신분의 사람이라는 생각의 뿌리가 내리고 있었어. 조의 방문을 그리 반기지 않았어. 조도 핍에게 거리를 두고 핍에게 신사분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했어. 그리고 에스텔라가 돌아왔다는 소식도 전해주었어. 핍은 얼마 후 미스 해비셤의 새티스 하우스를 방문했단다. 안부 인사차 들렀다고 했지만, 사실은 에스텔라를 보러 온 것이었지. 에스텔라는 더 성숙해졌고, 더 예뻐졌단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여전히 핍을 좀 차갑게 대했지.

여기까지가 <위대한 유산> --권의 대략적인 이야기란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고전이지만 술술 재미있게 잘 읽혔단다. –-권에서는 핍에 과연 에스텔라와 잘 될지 궁금하고, 이 소설의 제목을 왜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으로 지었는지 단서가 나오는지 궁금해하면서 -권 책을 덮었단다.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내 아버지의 성은 피립이고 내 이름은 필립인데, 유아 시절 내 혀는 둘 다 핍이라고 발음했지 그보다 더 길거나 더 분명하게 발음할 수 없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러고 나서 우리는 서로 간에 속내를 터놓았다는 사실로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으며, 촛불을 끄고 난롯불을 보충하고 문을 잠근 뒤 웝슬 씨와 덴마크를 찾아 길을 나섰다.

 


그날은 내게 기억할 만한 날이었다. 내게 큰 변화를 만들어 준 날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건 어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생에서 하루를 선택하여 삭제한다고 상상해 보고, 그러고 난 후 그 인생항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라.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글 읽기를 멈추고 쇠로 만들어졌던 황금으로 만들어졌건 가시로 만들어졌건 꽃으로 만들어졌건 간에, 당신을 얽어매고 있는 긴 사슬이 만약 그 제일 첫 번째 연결 고리가 어떤 기억할 만한 날 맨 처음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당신을 꽁꽁 얽어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 보라.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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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초등학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까지,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냈다고 제 몫을 다 해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까지도 우리는 한 가지 대답만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보내야 한다. ‘앞으로 살면서 무얼 해 먹고 살 것인지’, 그것을 알아내는 데 그 아까운 학창시절을 다 보낸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인생의 초반에는 부모님의 선택으로 내 모든 인생이 돌아간다. 공립유치원으로 보낼까, 영어유치원으로 보낼까? 학교는 발레를 보낼까? 아니면 중국어나 영어학원다 우리에게 좋은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선택들이다. 우리는 그냥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하나도 모른 채.

 

(21-22)

나는 계속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가족에게 짐이 된다는 이유로,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역사상 교육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역사상 가장 낮은 임금을 받고 역사상 가장 많은 카페인을 섭취할 뿐만 아니라 역사상 가장 불안정하고 우울하고 콤플렉스가 많은 세대라는 이유로, 살짝 정신이 나간 채로 새벽 3 27분이 되면 이력서를 여기저기 보내기 시작했다.

 

(95)

사랑이 우리의 인격을 강화시키듯 증오도 우리를 강인하게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누군가를 미워하면 더 나쁜 사람이 된다. 모든 감각이 살아나면서 사소한 부분들을 감지하는 재능도 예리해지고, 감정도 솟구친다. 일종의 활홀경인 셈이다. 증오 덕분에 나는 악에 대한 무한한 재능을 발견했다. 나의 관찰력은 날이 갈수록 더 날카로워졌으며, 나의 말은 대량 살상 무기로 둔갑했다. 원하지 않아도 증오심은 사람을 변하게 했다. 예전에는 내 감정 제어기가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갔지만 이제는 먹통이 되어버렸다. 비난이나 트집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옥상에 숨어서 홀로 바나나를 먹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대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자꾸 참고 넘기다보면 안에서 뒤틀린 것들이 살갗 밑에서 욱신거리게 된다. 하지만 계속 대응하지 않기로 한다. 그 사람과 똑 같은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사실 될 수도 있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겠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223)

그렇기는 하지만, 누구든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스물여섯 살이 되어 있으면 자신이 젊음을 잃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스물여섯 살부터는 카나리아제도 주민 전용 승차권을 살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카나리아 주민이 될 수 없다는 뜻인가? 젊음과 주민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인가? 나는 아직 28유로로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스물여섯 살이 되는 순간 35유로를 내야 한다. 하여간 왜 청년할인은 있는데 성인 할인은 없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내 또래들 대부분이 갈 곳이 없어 부모님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 빌어먹을 경제적 상황에 사회적인 젊음은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끝난다니, 말이 되는가? 하긴 휘발유 가격이 올라도 자기는 항상 20유로어치만 넓으니 상관없다는 멍청이도 있으니까.

 

(229-230)

우리는 정말 거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어.” 나는 청중 두 명을 향해 말을 쏟아냈다. “누가 깔리든 말든 바퀴는 절대 멈추지 않아. 나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있어. 내가 바퀴에 깔리면 누군가 나를 대체하겠지. 우리가 미쳐버릴 때까지, 심지어 자본주의가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고 우리를 세뇌할 때까지 자본주의는 우리를 피폐하고 만들고 우리의 생명까지 빨아먹는 아주 병든 시스템이라고.”

 

(246)

할머니집의 벽은 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초반의 많은 이야기를 간직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몇몇 기억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흑역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에피소드, 사춘기 때의 경멸과 오만함을 떨쳐버리는 잊는 방법을 익혔다. 손님이 올 때마다 축 처지던 내 어깨도 지워버렸다. 문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할머니가 머리를 어떻게 빗었는지, 할머니 몸에서 어떤 향이 났는지, 옷차림은 어땠는지까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냐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할머니하면 얼굴 생김새,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 많이 우시던 모습, , 커피를 무척 좋아하시던 모습만 생각난다.

 

(309-310)

어느 날 스스로를 하나의 회사라고 간주해버린다. 당신의 인생 드라마에선 당신이 최고경영책임자이자 최고운영책임자이자 최고재무책임자다. 그러니 당신은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항상 느끼며 인생에서 단 1분이라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면 안 되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 돈을 아끼고, 당신의 재능을 더 잘 이용하고, 업무를 다양화하고, 모든 면에서 결과를 최적화해야 한다. 이 모든 게 의미하는지, 당신이 인생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다. 당신이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당신을 내쫓겠다고 위협할 직원도 없으니까. 그저 당신은 샤워를 마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그 나이에 마땅히 이루었어야 할 모든 것들, 친구들과 달리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 때문에 스스로를 조금씩 갉아먹게 될 뿐이다. 그러다 귀에서 시계가 재깍재깍 소리를 내는 게 느껴지겠지.

 

(361)

어김없이 돌아온 쓰레기 같은 월요일, 이메일로 충분히 대신할 수 있는 거지 같은 아침 미팅. 회사생활은 이 두 가지의 반복이었다. 그 와중에 복숭아색 정장을 입은 마카레나는 내 머리를 드럼세탁기처럼 핑핑 돌게 했고, 내가 거짓말할 걸 알면서도 멍청한 질문만 던졌다. 모두가 진실을 요구하면서, 막상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면 그 진실을 넘기지 못해 캑캑대는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이건 너무 쓰고, 너무 짜잖아. 설탕을 한번 넣어봐하며 진실을 가장한 거짓을 원했다. 여기서 계속 일하려면 내가 얼마나 더 당신에게 비굴하게 굴어야 하느냐고 마카레나에게 묻고 싶었다.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으니까.

 

(392-393)

예전에 셀리아 비얄로보스가 텔레비전에서 젊은이들은 지금 당장 노후를 위해 저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세대가 공적연금을 제대로 받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적어도 한 달에 2유로, 즉 커피 한 잔이나 담배 한 갑 살 돈을 아껴 저축하라는 얘기였다. 그 충고를 듣자마자 그녀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진정한 재테크의 천재이자 캔디크러시 게임의 달인이시여, 왜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걸까요? 제가 지금부터 매달 2유로씩 저축하면, 65세나 68세가 되었을 때 엄청난 갑부가 되어 연금이 아예 필요 없겠죠?”라고. 언제 은퇴할지 누가 알겠는가. 몇 달 후엔 은퇴 연령이 70세로 늘어날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은퇴한다고 해도 완전히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슈퍼마켓 계산원이나 주방 보조, 배달앱 기사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셀리아와 함께 토크쇼에 참석한 이들 중 단 한 명도 그녀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우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왜 집을 사고 가정을 이루지 않으냐고 비아냥거리는 꼰대들이다. 베이비 붐세대 놈들, 너네랑 사정이 다르다고.

 

(402-403)

단골 바에 갔다가 술 취한 놈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 화장실에서 나가고 싶으니 비켜달라고 말하지 못했을 뿐인데, 그런 일 때문에 그 가게에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뿐인데, 왜 내가 여자들은 꼭 단체로 화장실에 가더라하는 같잖은 농담을 들어야 할까?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자기 욕망을 채우고는 나를 우물이나 도랑 혹은 그가 나를 발견했던 곳에 버릴까봐 불안해하지 않고, 이른아침에 음악을 들으며 조깅할 권리는 나한테는 없는 걸까? “엄마, 걱정 마. 지금 집이야하며 엄마를 안심시키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까?

 

(412-413)

좋은 남자들은 여자 말에 토를 달거나 여자를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자가 거실의 소파와 테이블 사이를 빗자루로 쓸 때 발을 들어준다. 식기세척기 안에 있는 접시를 정리하기도 한다. 가끔 저녁식사를 준비할 때도 있다. 그들은 여자를 자기들 밑에 있는 존재를 여기지 않는다. 결코 여자를 해치지 않을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회사 임원 열 한 명 중 아홉 명이 남자인 이유를 숙고하진 않는다. 그들은 인생에서 얻은 모든 기회가 자기가 필사적으로 일한 결과고, 여자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 건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나는 그들을 싫어하진 않는다. 그냥 그런 남자들을 보면 지긋지긋하다. 선의가 반드시 미덕과 장점이 되지는 않으니까.

 

(447)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가족, 예를 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삼촌이나 할머니가 돌아가시더라도, 내가 심한 우울증에 걸리더라도, 몸이 아프더라도, 계속 일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우리의 삶은 무슨 일이 있어도 노동만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듯이 흘러간다. 사람보다, 다른 것들보다 일이 더 중요한 셈이다. 가장 두려운 점은 내가 다른 것들을 우선시하며 노동을 그만둘 경우, 나를 대체할 사람은 차고 넘친다는 것이며, 나 또한 그걸 알고 주저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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