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보수가 중시하는 자유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자유만 넘쳐나는 사회가 되면, 산업혁명 때 노동자들처럼 인간다운 대우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반대로, 진보가 중시하는 평등만이 강조되어 인간의 본능인 자유가 침해당하는 수준까지 이르면, 공산주의와 가까워진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평등주의가 적절히 섞여
균형을 이루었을 때 올바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진보와 보수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두 존재하는 것이 맞다.
(11-12)
극우는 전체주의, 순혈주의, 자국중심주의, 군국주의 등의 특징을 보이며, 자민족우월주의로 타민족에 대해 배타적이다. 이런 성향들은 처절한
애국심으로 드러나면서 폭력성을 띠기도 한다. 나치즘과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가 대표적인 극우이다. 그러나 친일매국과 반공 우파들은 자국보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고, 자민족우월주의는커녕 조선을 비하하며 같은 민족인 북한에 대해 배타적이고 혐오하는 감정을 지녔기에 통일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반민족 세력이다. 세상에 이런 극우는 없다. 그렇다면
이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매국적이고, 독재를 추종하고, 반민족적이고, 자학사관에 빠져 있고, 최근에는 내란과 학살을 옹호하는 이들을 칭하는 용어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44-45)
조선이 해방을 맞이하자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은 재산을 챙겨 일본으로 도망가거나 한반도 어딘가로
잠적했다.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의 자본가들이 사라진 것이었다. 주요
산업 시설은 대부분 북한에 집중되어 있었고, 해방 직후 북한은 남한으로의 전력 송출을 끊어 버렸다. 그로 인해 남한은 전력 무방비 상태에 놓여 공장 가동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해외 공포와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하면서 남한의 인구는 급속히 증가했다.
쌀도 부족했고 생필품도 부족했다.
인플레이션은 당연했다.
굶어 죽는 사람이 발생했다.
해방 직후 남한은 세계에서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근대화되었더라면, 해방 직후
남한의 가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132)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독립운동가는 아니었지만 독립운동가의
대부분은 사회주의자들이었고, 민족주의자들이 모두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친일파의 대다수는 민족주의자였다.”
내가 만든 문장이지만 반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슬프다.
(162)
뉴라이트의 이승만 띄우기에 대해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뉴라이트가 김구를 깎아내리는 이유는 이승만을 띄우기
위해서다. 이승만 추종자들이 아무리 이승만을 띄우려 해도, 김구에게
눌려 이승만이 높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만 추종자들이 이승만에게 혈광 등 300개를 켜 대도 이승만의 얼굴에는 김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울 수밖에 없다.”
(190-191)
임시정부의 리더들은 장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카이로에 가서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통께서 일본 패망 후 한국의 독립에 대한 확약을 받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후 장제스는 카이로회담에서 루스벨트를 설득하여 한국만큼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식민지 상태였더라도 독립을 시키기로 약속을 받았다.
(217)
여운형의 독립운동에 열등의식을 느끼는 친일매국 세력들,
여운형의 통일노선에 열등의식을 느끼는 분단주의자들,
여운형의 탈이데올로기에 열등의식을 느끼는 반공주의자들,
여운형의 인간애에 열등의식을 느끼는 독재와 학살 추종자들.
이들에게 여운형은 두려움 그 자체다.
(228-229)
남한의 어떤 역사학자도 제주4.3사건을 연구하면서
김일성과의 연계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4.3봉기의 주역 김달삼이다. 김달삼은 4.3사건 초기인
1948년 제주를 탈출한 후 북한으로 올라가 4.3봉기의 과정을 알렸다. 자기가 봉기를 일으켜 놓고 그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는데 자기만 섬을 탈출하여 월북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김달삼의 이러한 행동이 4.3봉기의 정당성을 훼손한다. 다행히 제주도민 역시 김달삼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그동안 김달삼은 6.25전쟁 전 1950년 3월
강원도 정선군 ‘김달삼모가지잘린골’에서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북학에서 6.25전쟁 중에 인민군 군복을 입은 채 1950년 9월 전자했다고 기록한다.
4.3봉기를 일으킨 김달삼이 훗날 북한과 연계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4.3봉기 자체를 북한과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제주4.3사건과 광주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뻔하다. 이승만의 제주도민
학살과 전두환의 광주시민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픈 독재추종 세력의 몸부림이다.
(273)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면서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인들이 자신의 안전을 우려했듯이 친일파들
역시 독립운동가나 일반 조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일본인은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친일파는 갈 곳이 없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거나, 야반도주하여 산속으로 숨어들기도 했고, 변장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또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집에 틀어박혀 조선인 눈에 띄지 않으려 애를 썼다.
개중에는 광복을 반기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 친일파들이 있었다. 이들은 우스갯소리로 ‘8월 15일부터 태극기를 든 자들’이라고
한다.
(277)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꼽았다. 그러나 신채호가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제일대사건’으로 ‘이승만의 친일파 처벌 실패’를 꼽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이승만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이승만이 독재를 했든지 6.25전쟁 때 무능의 극치를 보였든지 간에
이승만이 친일파 처벌만 제대로 했더라면 나는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모든 대립은 이승만이 친일파를 처벌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282)
영국의 브로크웨이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을 체포해야 한다. 유엔에 있는 영국 대표는 이승만을 부정하고 그의 정권을 끝내도록 요구해야 한다.”
영국의 레이놀즈 뉴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승만이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고자 했던 모든 명분을
완전한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다. 이승만이 한국을 통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만큼 유엔이 한국을 맡아야
한다.”
한국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또 다른 책임을 져야 하는 미국은 침묵을 택했지만, 영국은 침묵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희대의 자국민 학살자이다.
(322)
6.25전쟁으로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이 되었다는
주장은 다수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미국을 지구적 차원의 패권국으로 부상하게 해 준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도 제2차 세계대전도 아니고, 6.26전쟁이었다. 미국의 패권에 기여한 정도란 측면에서 보면 어떠한 사건도 6.25전쟁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 –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저비스, <한국전쟁이
냉전에 미친 영향>
6.25전쟁을 통해 미국의 세기가 시작되었음을, 다시 말해 미국이 지구적 차원이 패권국이 될 수 있었다. – 6.25전쟁
참전용사의 아들이자 대법권 마이클 펨부룩, <미국의 세계가 시작된 곳>
6.25전쟁을 통해 미국이 지구적 차원의 패권국으로
부상하고자 할 당시 필요한 체계를 구축할 있었다. – 조지위싱턴대 교수 리처드 쏜턴,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376)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은 1960~1970년대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개발과 시대 흐름을 같이했다. 특히 냉전체제 경쟁에서 자유 진영의 승리를 위한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한국인의
근면성과 성실함은 어느 국가와도 견줄 수 없다. 한국인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잘 먹고 잘산다. 더군다나 한국인은 영리하고 학구열도 높다. 여기에 부정할 수 없는
천민자본주의적인 마인드가 더해져, 남보다 잘살고 싶은 열망이 우리의 경제성정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요소들을 무시한 채, 오로지 박정희가 없었다면 우리는 가난했을
것이라는 자학적이고 피동적인 마인드를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412-413)
결국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순간으로 기억되는 서울역회군(1980.5.15)이었다.
당시 회군을 결정했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그 후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의 후신인 보수
정당에서 국회의원만 5선을 했고, 국회부의장이 되었다. 회군을 반대했던 서울대 복학생 대표 이해찬은 노무현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회군에 대한 또 다른 반대자, 당시 서울대 대의원의장 유시민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또한, 당시 경희대 학생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을 역사의 죄인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들은 광주의
죽음에 대해서 아파해야 했다.
(459)
남한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된 지 두 달 후인, 12월, 북한에서는 신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되면서 김일성이 주석에 취임했다. 남한의
박정희는 초강력 대통령이 되었고, 북한의 김일성은 갑자기 주석직을 신설하고 주석이 된 것이다. 통일 분위기가 조성된 이후 남북한 양국의 독재 권력이 오히려 강화된 것이었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서로 짜고 통일 분위기를 이용하여 자신들만의 권력을 강화한 셈이다.
(487-488)
그런데 여기에 끝판왕 보수 대통령이 등장했다. 사실
보수 대통령도 극우 대통령도 아닌, 친일매국 세력의 대통령이자 주술 대통령 윤석열이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로 윤석열정부가 북한과의 전쟁을 계획한 정황이 너무 많이 드러났다. 북한의 NLL공격을 유도했고, 평양에
무인기를 보내 국지전을 유도했다. 남한 특수부대에 북한 인민군복을 입혀 내란을 선동하는 한편, 국방부 장관은 북한의 오물풍선이 시작되는 지점을 원점 타격하라는 지시까지 했다. 이 정도면 그냥 전쟁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494-495)
다시 정리하자면,
뉴라이트는 몰역사적, 친일 반민족적, 친독재적 성격을 지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뉴라이트는 인간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한 집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뉴라이트는 일제강점기에 수탈당한 조선인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
이승만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을 오히려 빨갱이로 취급한다. 또한, 위안부 할머님들에 대한 망언을 일삼고, 세월호 유가족을 조롱하는
비인간적, 패륜적인 성향을 보인다.
뉴라이트는 정의로움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진 자들이다.
이들은 잠재적 매국노들이다.
(522)
작금의 반일 정서가 싫은 친일파들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은 천년의 적이고, 일본은 백년의 적이다.”
사실 이 말은 북한의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유언으로 했던 말이다. 신친일파와 일부 꼴통 보수들은 김정일의 말을 신줏단지 모시듯 믿고 있다. 진정한
종북이다. 최근 김정은도 이 말을 달고 산다고 한다. 이는
미국과 관계 개선을 바라는 북한 정권이 북한 주민들의 반중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와 함께 나온 말이었다. 북한이
이러한 대중외교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한편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또한, 북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 중 한 나라가 중국이라고 하니, 역시
반갑다. 언젠가 통일을 두고 중국과 대립할 수 있는 우리입장에서는 북한동포들의 중국에 대한 거부감을
싫어할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