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도 없고 국가를 사유화하려는 욕망밖에 없어 보이던 정권이
물러나고, 국정 운영자로서 펼치고자 하는 뜻도 있고 실력도 있어 보이는 인물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민중의 생활 현실을 이해하는 대통령이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혹은 우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로 당선된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화석연료에
무겁게 의지하고 있는 경제를 지속가능한 구조로 바꾸는 일에 서둘러 착수하리라고 전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것은
단기간에 가능한 개혁도 아니지만, 끈기를 가지고 시간을 들여서 대중을 설득하면서 합의에 이르는 민주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실제로 성공할 수도 없는 일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시행착오와 희생도 따라야 할
것이다. 4년 뒤의 총선, 5년 뒤의 대선 일정을 늘 머릿속에
두고 있어야 하는 정치인들이 흔쾌히 선택할 수 있는 경로가 아닌 것이다.
(25)
일본은 핵 식민주의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전쟁범죄 가해자로서의 역사는 삭제한 채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비극 뒤에 숨어서 100% 원폭
피해자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다. 매년 8월이 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전 세계 반핵 활동가들이 모여들고 행사들이 열리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히로시마에
일본군 최고사령부 대본영이 있었고 나가사키에는 미쓰비시중공업 조선소가, 그 앞바다에 군함도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는 어렵다. 두 도시의 원폭 피해자들 중에는 식민지에서 끌려온 여러 국적의 무고한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조명되지 않는다.
(27)
일본은 한국과 유사한 기후조건 및 기후변화 특징을 보이고 있지만, 최근 10년간 대형산불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발생 건수 및 피해면적 또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기후변화가 극심해진 2000년 이후 오히려 산불피해는 급감하고 있다. 반대로 우리나라 산불, 특히 대형산불은 최근 들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 차이를 기후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산불을
키우는, 기후변화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것은 산림청이 얘기하지 않는 우리나라 대형산불 발생지역의 중요한 공통점에서 찾을 수 있다. 울진, 삼척, 고성, 밀양, 합천, 홍성, 안동, 강릉 등과 올해 발생한 대참사 의성과 산청 산불 등 대형산불
발생지역은 모두 소나무 우점림에서 간벌과 ‘숲가꾸기 사업’이
집중된 곳이다. 분명 기후변화가 아닌, 제도적 행정적 개입의
결과로 변형된 ‘연료조건’을 최근 잦아진 대형산불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산불이 기후위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인위적 개입의 부작용을 감추려는 수사에 불과하다.
(31)
한편, 소나무림과는 달리 활엽수림은 산불을 자연스럽게
저지하거나 완화하는 ‘방화선’ 역할을 한다. 참나무, 물푸레나무, 느티나무와
같은 활엽수는 잎과 가지에 수분 함량이 높고, 불이 잘 붙지 않으며,
불길이 옮겨붙더라도 천천히 연소된다. 이러한 특성은 산불의 확산 속도를 낮추기 때문에, 진화 인력이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 등 인위적 관리의 손길이 적은 국립공원 지역은 대형산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데, 활엽수림으로 전환되는 생태적 과정을 인위적으로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45)
반이민 반기후를 간판 정책으로 내세우는 극우정당의 부상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폐해가 기존의 세계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된 현실을 반영한다. 극우세력은
국가, 종교, 인종 같은 이데올로기의 깃발 아래 모여들지만, 그 깃발을 세우기 위해서는 화석연료로 가동되는 자본주의경제라는 지지대가 필요하다. 유럽의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및 중동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에너지 패권전쟁의 배후에는 자본주의경제와 극우 이데올로기의 위험한 밀월관계가 숨겨져 있다. 같은
맥락에서 윤석열 정부가 시도한 퇴행적인 기후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도 화석연료에 기반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와의 연관성을 물을 수 있다. 원전과 댐 건설이 최선의 기후위기 대응책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보수세력과 반이민 반기후를 표방하는 서구 극우세력을
관통하는 역사적 흐름은 무엇일까?
(57)
윤석열이 0.7% 차이로 근소하게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필자는 도쿄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지지율이 낮은 윤석열
정권이 향후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선 세 가지 방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첫째, 야권 및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세력에 대한 양보와 타협, 둘째, 정치적 능력이 있는 인물을 기용하여 중간층을 포섭, 셋째, 이재명 민주당 대표, 문재인 전 대통령 등 야당 및 반대세력에 대한
일관된 탄압이다. 그러나 모두 실패할 것이며, 결국 북풍
또는 북한을 상대로 국지전을 일으키는 외환 방식에 의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것 말고는 선택권이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63)
윤석열과 기시다 정권의 정치적 밀월관계는 캠프데이비드 공동선언(2023년 8월 18일)을 통해서, 한일 및 한미일의 포괄적 군사동맹 강화와 대중국 포위망
구축에 한국과 일본이 선봉에 서는 것으로 이어졌다. 미국일변도를 주장해온 아베의 외교 노선은 인도태평양전략과
캠프데이비드 공동선언을 통해서 동남아시아, 대만해협, 한반도에서
3개국 군사력의 동시 운용을 가능케 함으로써,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격화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12.3 내란 회환 사태는 한미일 군사협력의
토대 위해서, 한반도에서 국지전이 일어나면 미국과 일본이 언제든 적극적으로 개입, 지지해줄 것이라는 확신 위에서 준비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89)
지난 헌정의 회복, 지난 민주주의의 수호에 멈출
수 없다. 되돌아가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 새롭게 세우는 것이다. 극우세력의 든든한 온상이 되고 있는 불평등, 혐오, 차별, 분단사회의 모순을 넘어서 민주공화국을 구축하는 것이 내란을
종식시키는 일이다. 사회대개혁은 긴 여정이 될 것이다. 내란청산특별법
제정, 내란행위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설치는 필요한 최소한의 일이다. 결선투표제, 국민소환제, 연동형 비례대표제 확대, 주권자 참여형 헌법개정 등 분명한 정치개혁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종전 선언, 평화협정 체결,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고, 국가보안법 등 분단체제의 악법 개폐(改廢)도 대전환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광장의 이름으로, 전체 주권자의 요구로 끊임없이 제도정치권을 추동, 견인해야 할 것이다. 평등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한 차별금지법, 생명안전기본법 제정, 1,100만 비정규직 악법을 개폐하고 노조법 2,3조 개정 등 민생, 노동, 인권, 법안 제정을 미루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모으고 높여야 한다.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특별법(가칭, 한강특별법)을 제정하여 문화, 예술의 힘이 진정한 자산이 되는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도록 만인이 힘써야 할 것이다.
(106)
정보통신기술이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소통의 창구도 넓혀서 민주주의가 강화될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망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기술이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있고 빅테크 기업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커진 오늘날, 그런 기대나 가능성을 내비치며
낙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사회가 양극단으로 분열되고, 사람들이 삭자 저마다의 정보감옥에 갇혀서 갈수록 객관적인 현실로부터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고, 급기야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법, 제도를 완전히 불신하는 지경에
이른 현 세태의 원인으로 디지털기술(소셜미디어)이 지목되고
있는 상황이다.
(147)
장점마을에서 확인되었던 것처럼, 지역주민들의 삶과
안전은 법령이나 단체장, 사업자의 선의에만 기대어서는 지킬 수 없다.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지역 고유의 현실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조례는 자치단체의 법이다. 비록 법령보다 하위에 있기는 하지만 조례를
잘 활용한다면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사전에 상당하게 차단할 수 있다. 조례에 의해 구성된
거버넌스가 지역주민의 역량으로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
(152)
어린이날
- 김성규
나이가 어릴수록
엄마가 없으면 슬프고
나이가 늙을수록
엄마가 없으면 외롭다
(171-172)
올해 초 소셜미디어 제국 메타(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왓츠앱 등을 소유한 소셜미디어 그룹)는 ‘제3자 팩트체킹’ 프로그램을 폐지한다는 발표를 전격적으로 감행했다. ‘팩트체킹’의 폐지는 트럼프가 오랫동안 메타의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는
“이제 표현의 자유로 돌아갈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트럼프에게
굴종했다. ‘표현의 자유’는 트럼프가 소셜미디어의 ‘팩트체킹’ 기능을 비난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내세운 논리였다. 많은 언론에서는 이번 투항을 두고 트럼프를 위한 저커버그의 선물이라고 묘사했다. 이로써 그렇지 않아도 가짜뉴스와 허위정보의 온상이었던 소셜미디어는 이제 허위와 혐오가 판치는 ‘오물통’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메타의 투항은 기술기업이 정치권력의 위압에 굴종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소셜미디어가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사회적 매체가 아니라 영리가 최우선인 매체임을 분명하게 드러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222)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파면했다. 이 문장은 가슴
아프다. 왜 주어가 ‘국민’이
아닌가 하는 마음의 저항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이 일으킨 내란을 맨손으로 막아내고 탄핵으로 이끈 것은
국민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모르는 이 없다. 광장정치의 힘을 보여준 쾌거였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파면 결정은 판사들의 손에 달린 일이었다. 나는
탄핵 판결을 들으면서 국민의 한 명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짜증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허탈감, 새로운 정치를 만들고 싶은 열망과 그놈이 그놈이라는 걸 확인했을 때의 절망감이 공존한다.
(226)
헌법은 이 나라 정치가 광장의 찬 바닥에서 인민의 분노의 힘에 의해서 바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공간에서 토론과 협의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근본 토대이다. 지금과
같은 대의정치제제로는 불평등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청와대와 여의도 엘리트 정치인들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기득권 계급의 이해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녕 새로운 정치체제를 향해서
물길을 바꾸고자 한다면, 주권자 국민들은 탄핵 이후 국면에서 또다시 기득권 세력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담론에 낚이지 말아야 한다. ‘보수 대 진보’가 아니라 ‘기득권층 대 국민’이라는 프레임으로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의 정당한 주인은 주권자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