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3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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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전에 이야기했듯이 제인 오스틴의 장편 여섯 편을 모두 읽겠다고 했잖아. 오늘은 그 네 번째로 <에마>를 읽고 이야기해줄게. <에마>는 책 두께가 장난이 아니구나.  700페이지가 넘으니 벽돌책의 반열에 들겠다고 하겠구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제인 오스틴의 짧은 삶이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작품을 남겼을 텐데이번 <에마>도 당시 영국의 사회상을 여성의 시각을 통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단다. 아빠의 상상력이 부족해서 머릿속에서 당시 풍경을 제대로 그릴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말이야. 혹시 이 소설도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있나 싶어 찾아보니, 예전에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영화가 있고, 최근에는 안야 테일러 조이 주연의 영화가 있더구나. 아빠의 부족한 상상력을 영화가 채워 줄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나중에 기회 되면 영화로도 봐야겠다. 책 두께가 두꺼운 만큼 할 이야기가 많으니 바로 책 이야기를 시작할게. 아참,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1815년이라고 하는구나.

주인공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에마라는 스물한 살의 아가씨야. 에마 우드하우스. 엄마는 일찍 돌아가시고, 언니 이저벨라는 존 나이틀리와 결혼해서 출가하고, 에마는 아버지와 함께 하트필드에서 살고 있었어. 에마의 어린 시절부터 16년 동안 에마를 가르친 가정교사이자 친구인 테일러가 얼마 전에 웨스턴 씨와 결혼했단다. 웨스턴 씨는 첫째 아내와 사별하고 지내다가 테일러와 결혼한 거야. 웨스턴 씨는 아들 프랭크가 있었는데 아내가 죽은 다음 어린 아들을 혼자 키우기 어려워 프랭크는 외삼촌 부부가 키워주셨단다. 프랭크는 어느덧 스물세 살이 되었어.

에마는 늘 테일러와 함께 지내서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 테일러가 결혼하고 나서 아버지와 둘이 지내다 보니, 자주 외로움을 느끼고 무료함을 느꼈단다. 사실 테일러와 웨스턴 씨의 결혼을 주선한 것은 에마였단다. 에마는 다른 사람들의 짝을 지어주는 것을 좋아했어. 테일러와 웨스턴 씨의 짝을 지어주고 그 다음은 엘튼 씨의 짝을 찾아주려고 했어. 그러면서 자신은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단다. 이 정도면 에마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대충 알겠지?

 

1.

테일러는 결혼 후에도 가끔씩 에마의 집에 찾아와 놀다가 갔단다. 하트필드에서는 자주 사교 모임을 가져서 저녁이면 이웃들이 모였단다. 당시 영국 사회는 사교 모임은 일상이었던 것 같은데, I성향의 사람들은 좀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에마는 그 사교모임에서 해리엇 스미스라는 사생아와 친하게 되었어. 해리엇이 사생아이다 보니 에마는 은근히 자신보다 낮은 신분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에마는 해리엇을 더 챙겨주려고 하고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했어. 앞서 이야기했던 엘튼 씨가 해리엇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에마는 엘튼 씨와 해리엇을 짝지어 주려고 했단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로버트 마틴이라는 사람이 해리엇에게 청혼 편지를 보낸 거야. 해리엇은 그 편지를 에마에게 보여주고 조언을 구하려고 했어. 에마는 이미 해리엇의 짝은 엘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틴의 청혼 편지라니.. 자신을 방해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에마는 해리엇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거절하도록 유도했단다. 그래서 해리엇은 마틴에게 청혼에 거절하는 편지를 썼어.

이쯤에서 조지 나이틀리라는 사람을 소개해야겠구나. 조지 나이틀리는 에마의 언니 이저벨라의 남편의 형이란다. 그러니까 에마에게는 아주버님이 되겠구나. 그렇지만 에마의 집안과도 친분이 있어 자주 집에 방분했단다. 그 조지 나이틀리가 에마가 해리엇에게 조언한 사실을 알게 되어 에마에게 화를 내며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단다. 에마의 속마음도 꿰뚫었는지 혹시 해리엇과 엘튼을 짝지어 주려고 하는 것이라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라고 덧붙였단다. 엘튼은 결혼 상대로 해리엇을 염두에 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 조지 나이틀리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엘튼을 다시 만나 그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엘튼이 해리엇을 좋아한다고 에마는 확신했단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언니 식구들이 하트필드에 방문했단다. 또 사교모임이 열렸는데 해리엇이 심한 감기가 걸려 모임에 오지 못해서 에마는 병문안을 다녀 왔단다. 사교 모임에서 에마는 엘튼을 만났는데, 엘튼은 해리엇이 감기 걸린 것을 알면서도 걱정을 별로 안 하는 것을 보고 에마는 남자들은 원래 다 그런가? 하고 생각했어. 그날 사교 모임을 지켜보던 에마의 형부 존은 에마에게 이야기하기를 엘튼이 에마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에마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 에마는 엘튼이 해리엇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웨스턴 씨 부부의 집에서 모임이 있었어. 웨스턴 씨의 아들 프랭크가 조만간 방문할 예정이라고 했다가 취소를 했는데, 에마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는 한편, 조지 나이틀리는 프랭크가 핑계를 대고 안 온 것이라고 했어. 별 거 아닌 것으로 에마와 조지는 의견 충돌로 말싸움을 하기도 했어.

어느 날 사교모임 후, 엘튼은 에마를 찾아와 구애를 했단다. 형부 존의 생각이 맞았던 거야. 남자는 남자가 더 잘 보는 것 같구나. 아니면 엘튼이 에마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에마의 편견 때문에 에마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에마는 해리엇을 좋아하다가 어떻게 다시 자신을 좋아할 수 있냐면서 엘튼에게 화를 냈어. 하지만 엘튼은 해리엇을 좋아한 적 없고, 처음부터 에마를 좋아했다고 했어. 조지의 말대로 에마가 헛다리를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구나. 에마는 엘튼의 구애를 거절하고 엘튼도 화를 내며 가버렸단다. 이를 어쩐다. 해리엇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엘튼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마틴의 청혼을 거절하도록 부추긴 것도 마음에 걸렸어. 에마는 고민 끝에 해리엇을 만나 이야기를 했단다. 해리엇은 에마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담담히 받아들였단다. 에마는 그동안 괜히 해리엇에게 바람만 넣은 것 같아 미안했단다.

 

2.

또 한 사람을 소개해야겠구나. 제인 페어팩스라는 아가씨인데 에마와 동갑이었어. 에마는 제인 페어팩스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안 좋아했어. 제인은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일찍 돌아가셨어. 아버지가 은혜를 베풀어준 캠벨 씨가 어린 제인을 친자식처럼 키워주셨단다. 교육도 잘 받아서 자랐는데, 최근에는 베이츠 양 집에 머물고 있었어. 조지는 에마가 제인을 안 좋아하는 것은 열등감 때문이라고 팩폭을 날렸단다.

….

웨스턴 씨의 아들 프랭크가 마을에 방문했단다. 에마도 프랭크와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어. 에마는 선입견을 많이 갖는 편인데, 첫인상이 좋았던 프랭크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단다. 그런데 프랭크는 앞서 이야기했던 제인과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대. 에마는 속이 아프겠는데? 프랭크는 2주간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에마는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생각해 보았어. 프랭크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맞지만 자신은 결혼할 생각은 여전히 없기 때문에 그 감정은 사랑은 아니라고 단정했어.

그런 와중에 약간은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어. 에마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엘튼이 결혼했다는 소식이야. 그것도 외모도 괜찮고 경제력도 좋은 호킨스 양과 결혼했다는 소식이야. 에마가 생각하기에 엘튼이 자신에 비해 좀 과분한 여자와 결혼한 거야. 에마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신분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 같았어. 얼마 후 엘튼 부부가 사교 모임에 등장했어. 에마는 엘튼 부인인 호킨스 양을 처음 만났는데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지 좋지 않았어. 그렇게 첫인상이 좋지 않아서 그 이후 계속 안 좋은 면만 보게 되었어.

어느 날, 해리엇이 집시들에게 곤경에 빠진 적이 있는데, 프랭크가 도와주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해리엇은 에마에게 이야기하기를 독신으로 살겠다고 했어. 에마가 생각하기를 해리엇이 집시 일을 겪고 프랭크에게 빠지게 되었으나 신분 차이가 나서 그와는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독신으로 살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했어.

에마는 인성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인 것 같았어.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꼬면서 이야기하기도 했단다. 그런 모습을 본 조지는 따끔하게 에마에게 충고를 하기고 하고, 그 일로 에마가 상심해서 울기도 했단다. 이 소설에서 에마에게 따끔하게 충고하고 지적하는 사람은 조지 나이틀리뿐인데, 그것에 사랑의 다른 형태가 아닌가 싶구나. 비록 둘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들이 여럿 있었잖니

….

어느날 웨스턴 부인, 그러니까 테일러가 에마를 찾았어. 에마가 테일러를 찾아가보니 테일러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어. 프랭크가 제인과 작년 10월에 비밀 약혼한 사이라고 이야기했어. 테일러는 에마와 프랭크가 서로 좋아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이 소식을 에마에게 알려주는 것이 고통이라고 했어. 하지만 에마는 이미 몇 달 전부터 프랭크에게 관심이 없어졌다면서 괜찮다고 했어. 오히려 속으로는 해리엇에게 또 상처 줄 말을 전할 생각이 고통스러웠지. 에마가 해리엇을 찾아가니 해리엇은 그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 아무렇게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에마는 의아해했어. 해리엇이 말하길 자신이 좋아한 사람은 프랭크가 아니고 조지 나이틀리 씨라고 했어. 에마는 또 헛다리를 짚었구나. 해리엇이 이야기하기를 이번에는 조지 나이틀리 씨와 자신이 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어. 에마는 약간 충격을 받았어. 자신이 독신주의자이긴 하지만, 조지 나이틀리 씨에게 일순위는 자신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해리엇이 조지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니사실 해리엇이 조지를 마음 속에 둔 것도 어떻게 보면 자신이 해리엇을 사교 모임에 함께 해서였을 거야.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마틴의 청혼을 거절하게 만든 데서부터인가? 이제서야 가볍게 내뱉었던 자신의 언사에 대한 후회감도 들었어

..

또 한번의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어. 어느 날 조지 나이틀리가 방문하여 에마에게 고백을 했단다. 예상된 결말이었지만 그래도 이제서야 퍼즐이 제대로 맞춰진 것 같구나. 에마는 조지의 고백을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 해리엇이 걱정되었단다. 해리엇에게 일단 편지로 자신과 조지의 소식을 알리고, 해리엇이 슬픔을 잊게 하려고 런던에서 이저벨라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기로 했어. 그리고 얼마 후 해리엇으로부터 소식이 왔어. 해리엇이 로버트 마틴과 결혼한다는 소식이었어. 멀리 돌아왔지만 해리엇과 마틴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에마는 이제서야 마지막 단추가 제대로 채워진 기분을 느꼈을 거야.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에마는 완벽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면서 성장해가는 모습이 더 친근해 보이더구나.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들, 사랑하는 모습들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것 같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미인이지 총명하지 부유하지 거기에다 안락한 가정에 낙천적인 성격까지 갖춘 에마 우드하우스는 인생의 여러 복을 한 몸에 타고난 듯했고, 실제로 세상에 나와 스물한 해 가까이 살도록 걱정거리랄 것이 거의 없었다.

책의 끝 문장: 그러나 이런 결함들에도 혼례식을 지켜본 작은 무리의 진정한 친구들의 소망과 희망, 확신, 예언은 이 결혼의 완벽한 행복으로 완전히 실현되었다.


완전한 진실에 접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드문, 아주 드문 일이다. 뭔가 약간의 위장이나 약간의 오해가 개입되지 않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렇지만 이번처럼 행동에 대해서 오해했을지언정 감정에 대해서는 오해하지 않은 그런 경우라면, 오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이틀리 씨가 아무리 에마가 가슴으로 후회하고 있다고 여긴들, 또 그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고 여긴들 에마의 실제 마음보다 더하지는 않았다. - P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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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나는 앞에서 우리를 버리고 간 아버지가 홀연히 찾아와 고무공을 사준 것을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때 얼마나 아버지가 그리웠는지. 하지만 나를 꼭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이미 아버지를, 아버지의 사랑을 포기한 상태였다. 단 한 사람, 어머니만을 믿고 의지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머니마저 나를 버리고 간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유곽의 기생으로 팔려 한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어머니는 나의 행복을 위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그저 고달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팔아버리려고 한 것이 틀림없다.

 

(121-122)

이웃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던져놓고 근처 들판에서 놀곤 했다. 내가 집에 돌아와 마당 청소 등을 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누구누구야, 하며 서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가위바위보를 하거나 토라지거나 화내거나 울거나 웃거나 하는 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려왔다. 뜰 앞 울타리 사이를 비집고 보면 여자아이 남자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한데 모여 오비가 땅에 끌리는 줄도 모르고 뛰어놀았다. 잡거나 잡히거나 하는 모습이 잘 보였다. 얼마나 즐거울까. 얼마나 자유로울까.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가난뱅이가 부러웠다. “우리 집은 말이야. 가난뱅이들과는 격이 달라. 아이를 밖에 내팽개쳐둘 순 없어.”라고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했고, 고상한 교육방침에 따라 집에 갇혀 있는 내 자신이 불쌍했다. 그리고 할머니의 말이 단지 나를 노예처럼 부리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욱 슬퍼졌다.

 

(185-186)

아아, 기차여! 7년 전 너는 나를 속이고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고통과 시련 속에 나를 혼자 두고 갔다. 그동안 너는 몇백 번 몇천 번 나를 지나쳐 갔다. 늘 곁눈으로 흘끗 보며 말없이 지나쳤다.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너는 나를 데리러 왔구나! 너는 나를 잊지 않았구나. 아아. 어디든 데려가주렴! 얼른, 얼른! 그저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렴!’

 

(262)

나의 불행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조선에서, 하마마쓰에서, 나는 줄곧 학대당했다. 나는 자신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모든 과거에 감사한다. 나의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에게도, 외삼촌에게도, 이모에게도. 아니, 내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는 곳마다 모든 환경 속에서 학대받을 만큼 학대받은 나의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집에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격,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벌써 열입곱 살이 되었다.

 

(331)

사회주의는 나에게 특별히 새로운 것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오면서 느낀 감정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줄 뿐이었다. 나는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을 가진 자로부터 혹사당하고 괴롭힘을 받았으며 들볶였고 억압당했다. 또한 자유를 빼앗겼으며 착취당하고 지배당했다. 이런 나는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해 항상 마음 속 깊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동시에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동정했다. 조선의 할머니 집 아인 고 씨를 동정했던 것도, 불쌍한 개마저 동지처럼 느꼈던 것도, 그 외에 이수기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할머니 주위에서 일어난 많은 일에서 억압당하고 고통받고 착취당하는 불쌍한 조선인에 대해 한없이 동정했던 것도 이러한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던 반항심과 동정심은 순식간에 사회주의 사상에 의해 불이 붙어버렸다.

 

(360)

실제로 당시의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 열정을 갖던 당시 나는 고학을 해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고학을 하더라도 훌륭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훌륭하다고 대접받는 사람만큼 별 볼 일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한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373)

나는 당신 가슴속에서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을 발견했어요. 당신과 함께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해요.”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나는 하찮은 사람이오. 나는 그저 죽을 수 없어 살고 있는 사람이오.”

그는 이렇게 다소 냉소적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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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범우 사르비아 총서 301
이미륵 지음, 전혜린 옮김 / 범우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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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예전에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읽다가 이미륵이라는 분에 대한 짧은 내용을 읽었단다. 이미륵이라고 하면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의 지은이로만 알고 있어서 소설가인줄만 알았어. 그런데 그 분은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다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수배 명단에 오르게 되고 고향으로 도망갔다가 독일로 유학을 가셨고 결국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독일에서 삶을 마감하셨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어. 짧은 이야기인데 너무 가슴 아프더구나. 이미륵이라는 분에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책을 살펴보았는데 오래 전에 출간된 <이미륵 평전>이 한 권 있었단다. 책이 오래되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작년에 <이미륵 평전> 개정판이 나왔단다. 그래서 얼마 전에 그 책을 샀단다.

<이미륵 평전>을 읽으려고 펼쳤다가 그에 앞서 먼저 이미륵 님의 대표작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어. 아빠가 분명 몇 년 전에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책을 사둔 기억이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더구나. 책더미를 한참 뒤지고 나서야 겨우 찾아내어 읽었단다. 범우사에서 출간한 책인데, 아빠가 살 때는 몰랐지만, 지은이 이미륵 뿐만 아니라 옮긴이도 유명하신 분이구나. 전혜린. 전혜린 님은 1950년대 서울대 법대 재학 중 독일로 유학을 가서 뮌헨대학교에서 독문과를 전공했다는구나. 그 때 이미륵 님의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책을 번역하여 1959년 여원사라는 출판사에서 초판이 나왔다고 하는구나. 전혜린은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이미륵과 친분이 두터웠던 분들을 알게 되었고, <압록강은 흐른다>를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많아서 번역을 하셨다고 하더구나. 독일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 돌아와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시고 여러 독일 문학작품을 번역하고, 자신의 작품도 쓰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31살 어린 나이에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등졌다고 하는구나. 안타깝구나. 지은이 이미륵 님에 대해서는 아빠가 조만간에 <이미륵 평전> 독서 편지에서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할게.

 

1.

이미륵 님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망명 시절 독일어로 쓴 작품으로 우리나라를 독일 사람들에게 알려준 책으로 독일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는구나. <압록강은 흐른다>는 지은이 이미륵 님의 자전적 소설이란다. 오랜 시절부터 독일에 정착하기까지의 긴 여정이 따뜻한 동화 같은 문체로 이야기를 해준단다. 그래서 이 책은 어른뿐만 아니라 어린이들도 읽을 수 있는 책이란다.

….

어린 시절 주인공 나(미륵)은 사촌이자 친구인 수암과 줄곧 함께 했단다. 수암은 숙부의 아들이었으나 숙부가 일찍 돌아가셔서 미륵의 집에서 함께 지냈어. 미륵과 수암은 함께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어. 미륵은 누이만 셋이고, 수암은 누이만 둘이어서 미륵과 수암은 더 친해질 수 있었단다. 미륵과 수암은 장난꾸러기여서 아버지가 숨겨 놓은 약을 몰래 먹었는데 알고 보니 독약이어서 수암이 거의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어. 그리고 글씨 공부에 쓰는 종이로 연을 만들다가 걸려 회초리를 맞은 적도 있어. 그렇게 미륵과 수암은 어린 시절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개구쟁이 짓도 하면서 추억을 쌓아갔단다. 어느날 고모부가 돌아가시고 고모와 고종사촌 칠성이가 미륵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어. 그 때부터는 미륵, 수암, 칠성이 함께 놀았지만, 고모와 칠성은 얼마 안 있다가 이사를 가셨단다.

행복한 시간만 있을 줄 알았던 어린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시고 말았어. 중병을 앓고 회복하신 아버지는 예전만큼의 기력이 없으셔서 서당을 그만 두셨단다. 문중회의를 했는데 수암은 계속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해서 수암의 가족들은 서당이 있는 마을로 이사를 갔단다. 수암과 헤어져 혼자된 미륵은 아버지에게 간간이 한시와 역사 공부를 했단다. 나이가 좀 더 먹고 나서는 술 교육도 받았단다.

 

2.

미륵은 얼마 후 근처 신식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기 시작했어. 신식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기존에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과는 많이 달랐어. 수학, 의술, 천문학 등 처음 접하는 학문들이 많았어. 그러다 보니 무척 어려워했단다. 집에 오면 학교에서 배운 것에 대해 아버지가 질문을 하셨어. 그렇게 질문하시면서 아버지도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시는 것이었어. 특히 천문학에 관심이 많으셨어.

===================

(89)

“언제든 하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 조심스럽게 들어라. 그것은 아주 높은 학문이다.”

“제가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영혼은 언제나 맑아야 한다.”

===================

신식 학교에서 사귀기 된 친구로부터 <링컨>이라는 책을 빌려 읽었는데 이 책은 미륵보다 아버지가 더 열심히 읽으셨단다.

….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은 좋지 않았어. 경술국치로 인해 조선이라는 나라는 일본에 합병되고 말았어.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병에 걸리시고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그래도 미륵은 신식학교를 계속 다녔는데 내용이 점점 어려워졌어. 어머니한테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더니 어머니는 그만 다니라고 해서 학업을 중단했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는 아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시곤 했단다. 학교를 그만 두고 4년 동안 송림 마을이라는 곳에서 지냈단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운 유럽에 대한 동경이 점점 커져갔고 어느 날은 자신의 꿈을 실천에 옮겼단다. 무작정 유럽에 가려고 나섰다가 역무원에게 유럽에 가려면 여권 등 서류도 필요하고 돈도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단다.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다시 공부하기로 했어. 의학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가족과 헤어져 서울로 가야 했기 때문에 망설였는데 이번에도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주셨단다. 그래서 의학 전문 학교를 가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단다. 미륵이 열심히 공부한 것도 있지만 신식 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책을 빌려주고 자신들이 공부한 내용을 알려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단다. 그렇게 서울에 있는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어.

그 학교에서 새로 사귀게 된 약원이라는 친구와 함께 공부했어. 세상은 미륵을 얌전히 공부하게만 두지 않았단다. 미륵이 의학전문학교 3학년이던 1919 3 1일 만세 운동이 일어났어. 약원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단다.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어머니는 미륵이 어렸을 때부터 동경하던 유럽으로 가라고 하셨어. 세월이 빨리 흐르니, 곧 만날 수 있을 거라면서 걱정하지 말고 떠나라고 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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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1)

어머니는 오랫동안 잠자코 걷다가 말하였다.

“너는 자주 낙심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충실히 너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너를 무척 믿고 있단다. 용기를 내라! 너는 쉽사리 국경을 넘을 것이고, 또 결국에는 유럽에 갈 것이다. 이 에미 걱정은 말아라.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겠다. 세월은 그처럼 빨리 가니,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 마라.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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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고향을 떠나 미륵은 압록강 강변까지 가서 사공들의 도움을 받아 몰래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도착하게 된단다. 그리고 심양과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유럽에 유학 가려는 다른 학생들을 만나 준비했어. 그들 중에는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봉근도 있었어. 안봉근은 이미 프랑스에 다녀왔는데 이번에 다시 간다고 했어. 안봉근은 미륵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단다. 유럽에 가는 유학생들은 상하이를 떠나 사이공, 싱가포르, 지부티에 들렀다가 홍해와 지중해를 거쳐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을 했단다.

그곳에 도착한 후에 미륵은 안봉근의 도움으로 독일의 작은 도시에 있는 독일인의 집에 머물 수 있게 되었어. 독일에 도착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니 고향 생각이 많이 났어. 특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지. 편지를 썼으나 회신은 없어서 답답했어. 그러다가 5개월 뒤 큰 누나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지난 가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도 담겨 있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세월이 빨리 흘러가니 곧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결말인 것 같구나.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아는 이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보고 싶은 가족들을 볼 수 없는 낯선 타지에서 삶.. 상상만 해도 무척 힘든 생활일 것 같구나.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압록강은 흐른다>의 뒷이야기인 2부도 있었는데 지은이 이미륵의 타계 후 그의 서재에는 몇 장 남아있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전혜린 님이 이 책을 옮기고 난 이후 이미륵 님의 글들이 더 발굴되었는지,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면 이미륵 님의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책이 있더구나. 지금은 품절이 되어 살 수가 없는데 중고책이라도 알아봐야겠구나.

….

아빠가 이 책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이야기를 하면 좋겠는데, 독서편지는 늘 밀려 있고, 요즘에 바쁘다 보니 시간이 부족하구나. 지금도 잘 시간이 지나서 이 정도 마무리해야겠구나. 조만간에 <이미륵 평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압록강은 흐른다>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또 있지 않을까 싶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수암-이것은 나와 함께 자라난 내 사촌 형의이름이다.

책의 끝 문장: 지난 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셨다는 사연이었다.

 


우리는 산신령과 죽어버린 동무에게 술 대신 한잔씩의 물을 바쳐 죽은 짐승의 넋이 편히 쉬기를 빌고, 해질 무렵에 시체를 묻었다. 호박 크기만한 무덤이 다 만들어졌을 때, 나는 무척 슬픔을 느꼈다. 거북은 오랜 생명을 가지며 수천 년이나 산다고 한다. 그러나 희귀한 동물이 우리 집에서 죽었을 때에는 아마 좋은 것을 뜻하지는 않으리라. - P66

"그렇지, 원님께서 몸소 나와서 그렇게 무기도 없이 적에게 대했더라면 그야 옳았을 것이야말고. 아마 다른 원님 같았더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원님은 무척 겁쟁이였거든. 유감스럽게도 그건 원님이 아니라 그 손자였더란 말이야. 바로 김삿갓이란 거야. 그렇고말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지? 그렇지만 참으로 원님의 손자였다는 거야. ‘적군을 물리치자!’고 그는 조부에게 요구했으나 조부는 들은 체도 않고 적군에게 항복해버렸지 그만...... 그러므로 적군은 계속해서 딴 고을을 무찔렀고 김삿갓은 임금에게 충성하였으므로 조부와 적대하여 도모하지 않고 그만 걸인과 방랑의 시인이 되어버렸지." - P82

"과거를 너무 생각지 마라."
끝으로 어머니는 말하였다.
"네가 자주 말한 것처럼 시대가 변하였다. 과거는 새 문화에 앞서 갔다. 새 문화는 자주 분수를 모른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든지 그것이 생소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야 하며, 또 언제나 온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 P178

그런 고귀한 한방 의원은 병자의 신체를 거의 만지지조차 않았다. 그들은 등을 두드리지도 않았고, 내부 기관을 청진하지도 않았다. 다만 병자의 얼굴을 보았고 병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스레 듣고는 맥을 짚었다. 그러고는 처방을 썼고 처방에 따라 조수가 약을 곧 준비하였다. 조제실에는 모든 필요한 약초며 뿌리며 구근이 보관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환약이며 고약이며 즙을 의원의 감시 아래 만들 수 있게 해 두었다. 병자에게는 그 외 아무 일도 없었다. X-레이는 물론, 수술, 주사도 한방 의원은 몰랐다. 다만 특정한 병에만 여러 곳에 침을 놓았다. 이런 곳은 생명선 위에 있어야 했고 그 방해가 병이 된다고 했다. - P195

"너는 너무 말이 없고 너무 많이 생각한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침묵은 오래된 동방에서는 아직도 미덕으로 인정되나, 서방에서는 그렇지가 않아. 여기선 그게 비사교성의 표시로, 심지어는 거만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언제나 이야기하는 데에 섞여 같이 대화를 나누어라. 무엇에 관한 이야기든 간에. 날씨나 기후나 또는 음식이나 옷에 이르기까지. 다른 사람과 사교하는 동안에는, 땅에서 살고 있는 이상엔 언제나 철학적인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는 없단다. 유럽 사람도 땅위에서 살고 있으며 즐겨 세상 이야기를 한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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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226)

훗날, 동이는 우물가에서 들었던 울음소리가 실은 귀신의 소리가 아니라 아코디언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아코디언이 전해주는 소리에 늘 슬픔과 분노만 담겨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거기엔 수많은 사연과 감정이 뒤엉키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동이는 연주를 통해 그 이야기를 다시 세상에 풀어놓았다. 아코디언을 치는 동안, 슬픔과 고통은 깊은 깨달음으로 정화되고 안개처럼 뿌옇게 가려졌던 진실은 거울처럼 선명해졌다. 그렇게 동이는 글자가 아닌 소리를 통해 벽 너머의 세상으로 통하는 길을 더듬더듬 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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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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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얼마 전에 김애란 님의 <안녕이라 말했어>라는 책을 이야기 해주었잖니. 그 책을 읽고 김애란 님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잖아. 그래서 김애란 님의 또 다른 대표작 중에 하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란 책을 읽었단다. 이 책은 2년 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님 때문에 유명해지기도 한 책이란다. 한강 님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인터뷰를 할 때 읽고 있는 책이라면서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책을 이야기했었거든. 그리고 이 책은 2024년 동료 소설가들이 뽑은 올해의 책이기도 하단다.

아빠는 <안녕이라 말했어>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소설도 재미있게 읽었단다. 제목을 잘 지으시는 것 같아. <이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제목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의 담임 선생님이 학기초에 학생들에게 자기 소개를 시킬 때는 쓰는 방법이란다. 자신에 대해 다섯 가지를 이야기하라고 하면서 그 중에 하나는 거짓말을 하라고 하고 그걸 나머지 학생들이 맞춰보게 하는 거야. 이렇게 게임 식으로 자기 소개를 하면 다들 더 집중하게 되고 서로를 더 알게 될 것 같구나. 참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이 소설을 읽은 현직에 계신 선생님들은 현장에서 써먹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1.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안지우, 김소리, 오채운이라고 하는 세 명의 고등학생이란다. Jiny도 고등학생이니 이 소설에 더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구나.

안지우. 지우는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인데 아버지는 오래 전에 소식이 끊기고, 엄마와 단 둘이 살았는데 몇 년 전부터는 엄마의 애인인 선호 아저씨와도 함께 살았어. 그러다가 엄마가 뇌암에 걸리셔서 투병 중이었어. 그런데 친구들과 놀러 가셨다가 실족사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실족사이긴 하지만 자살인 것 같기도 했단다. 그 이후로는 엄마의 애인인 선호 아저씨와 함께 지냈단다. 학교에서는 늘 투명인간처럼 지내 제대로 된 친구도 하나 없었어. 방학이 되고 나서 지우는 편지 한 장 남겨두고 돈 벌러 집을 떠났어. 숙식을 제공하는 노가다 현장에서 일하기로 했어.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지. 자신이 키우고 있던 레드아이 아머드 스킨크라는 종의 도마뱀이야. 그 도마뱀의 이름은 용식이었어. 지우는 중학교 때부터 인터넷에서 용식이의 성장 일기를 용식 일기라는 만화를 그려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어. 그래서 지우는 그림 그리는데 소질도 있었고, 레드아이 아머드 스킨크에 대한 독특한 소재 때문에 지우의 이 블로그는 방문객이 많았단다. 최근에는 <내가 본 것>이라는 만화 시리지를 그려서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2회까지 올렸단다. 반응도 괜찮았단다. 그런데 노가다를 시작하면서 업로드를 거의 하지 못하게 되었어. 레드아이 아머드 스킨크라는 것을 아빠는 처음 들어봐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음징그러우면서도 귀엽게 생겼더구나. 아빠한테 길러보라고 하면 거절하겠지만 말이랴^^ 지우가 집을 떠나 일을 하러 가면서 용식이를 누구한테 맡길까 고민하다가 엄마의 장례식장에 유일하게 찾아온 같은 반 친구 김소리한테 부탁해 보기로 했어.

….

김소리. 지우와 같은 반 여학생으로 역시 고등학교 2학년이란다. 암에 걸린 엄마가 있었어. 엄마는 살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열심히 항암치료를 받으셨는데 2년 전 항암 치료를 받으러 가는 길에 그만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그래서 소리는 아버지와 단 둘이 지냈단다. 소리는 미대를 준비하고 있었어. 그런데 소리는 중학교 때부터 자신이 이상한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어. 자신이 손으로 만진 대상이 흐릿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었어. 그런 대상은 얼마 후 죽게 되는 거야. 동물인 경우도 있었고, 사람인 경우도 있는데 세 번이나 그런 경험을 하고 나서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매일 아침 일어나면 엄마의 손을 만져서 확인해보았단다. 엄마는 흐릿하게 보인 적이 없었는데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그래서 더 충격이 컸었어.

어느 날 지우가 방안 동안 자신의 레드아이 아머드 스킨크를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소리는 알겠다면서 용식을 보살펴주기 시작했단다. 또 어느 날 학교운동장에서 길 잃은 개 한 마리를 만났어. 아무 생각 없이 앞발을 만졌는데 그 개가 흐릿하게 보여서 깜짝 놀랐단다. 건강해 보이는 개였고 흐릿하게 보이는 경험을 너무나 오랜만에 해서 놀랬던 거야. 개의 목줄에 주인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서 전화를 했어. 주인이 학교운동장에 왔는데 알고 보니 같은 반 오채운이였어. 소리는 채운에게 그 개와 즐거운 시간을 많이 가져주라는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단다.

오채운. 채운은 전학생이었어.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축구를 했는데 작년에 다리를 다쳐서 축구를 그만 두게 되었어. 채운도 그리 평범한 가정은 아니었단다. 채운의 아버지는 가정폭력범이었어. 술만 취하면 칼을 휘두르고 엄마를 위협하곤 했어. 그날도 아버지는 칼을 휘둘렀고, 잘못하면 엄마가 다치겠다는 생각에 채운은 아버지를 말리면서 몸싸움이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아버지가 칼에 찔려 있는 거야. 채운의 엄마는 채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것은 엄마가 한 짓이라고 이야기를 했어. 절대로 진실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다짐을 시키고, 경찰에 신고를 했단다.

그렇게 엄마는 채운 대신 3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아버지는 의식 불명 상태로 요양원에 있었어. 그래서 채운은 반려견 뭉치와 함께 이모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단다. 그런데 이모의 집안 사정도 그리 넉넉하지 않아서 눈치가 보였단다. 자신 뿐만 아니라 개까지 데리고 왔으니 말이야. 채운의 사촌 선이는 뭉치를 좋아했고, 자주 산책도 시켜주었어. 그런데 어느 날 선이가 뭉치를 잃어버렸어. 정신 없이 찾다가 뭉치를 데리고 있다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갔더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같은 반 친구 소리였단다. 그런데 소리가 울고 있었어. 채운은 소리에게 왜 우냐고 물어보니 보고 있는 만화 때문이라고 했단다. 사실은 뭉치의 발을 만졌다가 흐릿하게 보여서 울었던 것이거든. 채운은 그것도 모르고 소리의 말을 믿었단다.

어떤 만화를 보고 우나 궁금해서 소리가 보고 있는 만화를 얼핏 봤는데 <내가 본 것>이라는 만화였어. 채운은 나중에 집에 와서 <내가 본 것>을 검색해 봐서 확인해 보니 그 이야기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았어. 조금씩 각색은 되어 있지만 아버지가 칼에 찔린 그날 밤에 대한 이야기를 각색해서 만화로 그려져 있었어. 도대체 누가? 그날 경찰들이 와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을 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었을 거야. 좀 더 읽어보니 만화를 그린 아이는 채운이 예전에 식구들과 자주 가던 갈비집에 있는 아이이고, 그 아이는 자신의 반에 있는 안지우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 채운은 지우가 진실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

 

2.

채운은 의식 불명인 아버지가 최근에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오히려 아버지가 깨어날까 봐 걱정했단다. 그런데 얼마 후 뭉치가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어. 뭉치를 찾아주었던 날 소리가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어. 마치 뭉치가 죽을 것처럼 좋은 시간 많이 가져주라고 했던 말. 그때도 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뭉치가 죽고 나자. 소리가 했던 말이 더 이상하게 생각했던 거야. 채운은 소리를 찾아가 그날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물어보았어. 소리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단다. 자신에게 이상한 능력이 있다고 말이야. 그러자 채운은 소리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손을 잡아 달라고 부탁했어.

소리는 채운이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실까 봐 걱정이 되어 물어본 것이라고 생각했어. 소리는 채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함께 채운의 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에 갔어. 소리는 채운의 아버지의 손을 잡아 보고 곧 회복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런데 그 말이 채운이 듣기 좋으라고 한 따뜻한 거짓말인 것 같았단다. 채운은 사실은 반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을 텐데얼마 후 오채운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단다.

소리도 뜻밖에 사고를 맞이했단다. 보살피던 지우의 도마뱀 용식이가 죽고 만 거야. 레드아이 아머드 스킨크라는 종이 원래 관리하기 힘든 동물이긴 했지만 지우가 이야기한 대로 잘 보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용식의 뜻밖의 죽음은 소리에게도 충격이었단다. 그리고 지우에게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 지 몰랐어. 고민하다가 지우에게 연락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단다. 지우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소리에게 급하게 돌아오려고 빨간 신호등인데 길을 건너려다가 지우를 피한 오토바이가 넘어졌어. 오토바이 주인과 시비가 붙은 지우는 파출소까지 갔다가 보호자에게 연락하라는 경찰에 말에 지우는 선호아저씨에게 연락을 했어. 그래서 파출소에 선호아저씨가 오시고 나서야 지우는 훈방 조치되었어.

선호아저씨의 화물차를 타고 집에 오면서 자신과 엄마 사이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우와 선호 아저씨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공통점이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아픔을 서로 감싸줄 수 있는 사이이기도 하고그 파출소 일로 둘은 좀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고 아픔으로 감싸주고 좀더 의지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리고 지우는 소리와 채운에게서도 연락을 받았는데, 그건 최근에 업로드한 <내가 본 것>를 보고 연락한 것일 거야. 그 마지막 회를 보고 채운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인 것 같았어.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지금까지 지우와 소리와 채운은 자신의 아픔을 혼자 이겨내려고 했다면 이제부터는 서로 아픔을 위로해주는 진정한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싶구나.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소설을 맺어져서 좋았단다.

….

누구나 말하지 못할 상처들이 있을 것이야. 그 상처에 마음 아파하지만 남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 극복하려고 노력하곤 하지. 누군가 그 아픔을 알지만 아는 척하지 않으면서 에둘러 공감해주고 위로를 해준다면 그 상처는 많이 아물 것 같구나. 뒤늦게 김애란 님의 소설들을 알게 된 아빠는 김애란 님의 다른 소설들을 찾아 나서야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지우는 K시 한 파출소의 의자에 보호자를 기다렸다.

책의 끝 문장: 평소에 연필을 쥐는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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