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독서 편지가 많이 밀려 있구나. 오늘도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아. 그런데다 윤석열 탄핵 선고도 아직이고, 그들은 여전히 거짓말만 일삼는구나. 그것이라도 빨리 해결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야. 오늘도 컨디션이 안 좋아서 최대한 요점만 간단히 쓰도록 해야겠다.

오늘 소개할 책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님의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라는 책이란다. 유홍준 님의 책들은 주제가 뚜렷하단다. 대부분 우리나라 문화 유산에 관한 책이지. 그렇다 보니 일상 생활을 하면서 쓴 에세이들은 책으로 낼 생각을 안 했대. 그러다가 이번에 출판사의 제의도 있고 해서 그런 글들을 모아서 낸 책이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란다. 책 제목을 참 지은 것 같구나. <나의 ~ 답사기>는 유홍준 님의 상징적인 제목이잖니. 지은이를 보지 않아도 누가 봐도 유홍준 님의 책이라는 것을 알 거야.

첫 번째 글은 마지막 담배를 피우면서 적은 글인데, 금연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이번에는 꼭 성공하시길 바란다. 새해 들어 많은 계획들을 세우는데 흡연가들이 꼭 하는 계획이 담배를 끊는 것이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은 것 같구나. 매년 년초마다 금연 계획을 하는 이들도 있으니... 그런데 역설적으로 마크 트웨인은 담배 끊는 일이 아주 쉽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소가 지어지는구나.

=========================

(21)

금연은 정말 힘들다. 마크 트웨인은 역설적으로 말했다. “담배를 끊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나는 백 번도 넘게 끊었으니까.” 20년 전 경험에 의하건대 금연은 매정하게 결별하는 의지밖에 없다. 금연 뒤에 찾아올 기쁨을 기대하며 끊어야 한다. 이제는 아침마다 칵칵거리지 않게 되고 양치질할 때 나오는 조갯살만 한 가래도 없어질 것이다. 방에선 곰팡내가 사라질 것이고, 얼굴엔 살이 뽀송하게 오르며 피부도 맑아질 것이다.

=========================

...

 

1.

지금은 우측 통행이 상식이 되었지만, 아빠가 어렸을 때만 해도 걷는 것은 좌측 통행을 해야 한다고 했어. 자동차는 우측 통행, 사람은 좌측 통행... 그렇게 자동차와 사람의 통행 방향이 달랐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굴곡지고 아픈 역사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단다.

=========================

(77-78)

그래서 1905년에 발표한 대한제국 규정은 우측통행을 명시했다. 그런데 기찻길이 좌측통행으로 들어오면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제가 강점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아예 1921년 도로 규칙을 일본과 똑같이 좌측통행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철거된 서울 시내 전차들도 좌측으로 달렸다. 그때는 기차, 자동차, 사람 모두 영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좌측통행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나 8.15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미국식 우측통행 자동차가 거리를 누비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찻길은 우측통행이 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차량 우측통행을 규칙으로 명시하였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기존의 습관대로 좌측통행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1962년 제정된 도로교통법이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는 좌측보행이 원칙이라고 규정하면서 좌측보행이 굳어지게 되었다.

=========================

...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 그렇게 오랜 왕조의 전체를 기록으로 남긴 왕조는 전무후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 원본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처럼 외세 침략이 많았던 나라에서 원본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란다. 선조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긴 쉽지 않았을 거야.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를 보니, 국뽕이 절로 생기는 것 같구나. 이런 것은 정말 자랑스러워할 만하구나.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소프트파워가 있었구나.

=========================

(95)

1.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2.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실록이 있는 나라 중 편찬된 실록은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

3. 위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책 권수로 치면 중국 명나라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 실제 지면 글자 수는 1,600만자 정도로, 4,965만자인 <조선왕조실록> 3분의 1에 불과하다.

4.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다른 나라 실록들은 대부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조선왕조실록은 원본과 번역본을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다고 하는구나. 해당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직역을 해 놓아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을 것 같구나. 재미있게 편집된 책이나 만화 등으로 한번 쭉 읽어보면 좋겠구나.

...

이 책에는 유홍준 님의 지인에 관한 이야기들도 실려 있단다. 주로 돌아가신 다음 그들을 추모하면서 적은 글들이었어. 유홍준 님의 주례를 서 주신 리영희 선생님,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하신 백기완 선생님,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삶을 사랑하신 신영복 선생님, 그 외에 백남준, 홍세화, 이애주, 김민기 등 여러 분들을 추모하는 글들을 실었단다. 그 사람을 보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는데, 유홍준 님과 어울리신 분들을 보니 유홍준 님은 참 성공하신 분인 것 같구나. 여러 분들의 이야기 중에, 신영복 님이 남기신 말이 좋아서 발췌해 보았단다.

=========================

(256)

<더불어 숲>은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쓴 작품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대작인 데다 획에 흔들림이 없이 전혀 절필 같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삶과 사상과 예술이 이 한 작품에 담긴 것 같은 웅혼함이 있다. 더불어 숲이라 쓴 네 글자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

....

오늘은 이 정도로 짧게 마친다. 유홍준 님은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문화유산에 대한 글을 쓰실 때 글이 살아있고 신명 나는 것 같더구나. 이 책보다는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그런데 기행문이라는 시의성을 띠기도 해서 초창기 책들은 너희들이 이해 안 가는 부분도 있을 것 같지만, 우리나라 문화 유산을 이해하는데는 이만한 책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유홍준 님은 앞으로 국토박물관 순례를 두세 권 더 쓰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를 마무리하신다고 하는구나. 일생의 큰 목표를 다 이루실 때까지 건강하실 바라고, 그 이후에는 방송이나 유튜브를 통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셨으면 좋겠구나.

이상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새해로 들어서면서 나도 담배를 끊었다.

책의 끝 문장: 이제 <국토박물관 순례>를 두세 권 더 쓰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대장정을 마치려고 하니 이번에는 진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각 나라의 백자에는 자연스럽게 그 민족의 미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일찍이 일본의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도자기를 조형의 3요소인 선, 색, 형태와 비교하면서 중국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은 색채가 밝고, 한국은 선이 아름답다고 했다. 때문에 중국 도자기는 완벽한 형태미를 강조하고, 일본 도자기는 화려한 색채미를 보여주는 데 반하여 한국 도자기는 부드러운 선맛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도자기 애호가들은 중국 도자기는 멀리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보고 싶어하고, 일본 도자기는 옆에 가까이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어루만지게 싶게 한다는 것이다. 그 따뜻한 친숙감과 사랑스러운 정겨움이 조선백자의 특질이다. - P82

미족미술협의회(민미협)는 이 그림을 1989년도 달력에 실었다. 그런데 이를 이용하여 부채를 만든 인천 지역의 한 재야청년단체를 수사하던 서울시경 대공과에서 느닷없이 신학철 화백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신 화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하였다. 경찰은 어이없게도 이 그림이 북한을 찬양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해석인즉, 그림 아래쪽에서는 남한 사람들이 힘겹게 노동을 하고 있고, 위쪽에서는 북한 사람들이 푸짐한 밥그릇을 앞에 놓고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한반도 지형으로 보면 초가집은 평양의 생가를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그림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경찰의 대공적 상상력이 어처구니없음을 넘어 경이롭기만 했다. 미술비평엔 인상비평, 양식비평, 재단비평 등이 있는데 가히 ‘공안비평’이라 할 장르가 나타난 것이다.
- P176

그런데 <실천문학> 남도 답사에서 황석영 형은 3시간 만에 마이크를 내려놓고 내가 8시간 마이크를 잡으면서 나도 ‘구라’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아마도 윤재걸 시인이 한 말 같은데 백기완 선생이 라디오 시대 이야기꾼, 황석영이 흑백텔레비전 시대 이야기꾼으로 통했는데 유홍준이 컬러텔레비전 시대 이야기꾼으로 등장했다고 해서 모두 박수 치며 웃었다. 이후 방동규 선생은 끝까지 재야의 라디오로 남고 내가 백기와, 황석영과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로 꼽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도올 김용옥의 등장 이후 나는 이어령, 김용옥과 함께 세칭 ‘3대 교육 방송’으로 불리기도 했다. - P3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

인류 역사상 개인이 가장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시대, 다만 문제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허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 그럴수록 스스로를 의심한다. 아는 것이 부족해서인가? 머릿속에 정보와 지식을 더 쏟아 넣어 가득 채우면 나아지려나? 채워보고 채워보지만 그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그 답 역시 이미 알고 있다. 우리가 머리만 키웠기 때문임을 말이다.

 

(11)

그렇다면 깨달음은 어떠한가? 지금은 깨달음이 뭔가 싶은 마음이 더 클 테지만 일단 처음 듣는 단어는 아니니 대략적인 느낌을 말해보자. 당신에게 깨달음은 어디에 가까운가? 그것은 지식의 영역인가, 아니면 지혜의 영역인가? 모든 것이 그러하듯 깨달음도 이 두 가지 측면이 혼재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느낀다. 어쩐지 깨달음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실천적인 지혜일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지식을 통해 깨달음이 무엇인지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그 경계가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깨달음의 윤곽을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깨달음의 실제 의미를 깊이 이해할 수는 없다. 실천을 통해 그것의 실제 의미가 체화될 때에야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지혜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9)

사실 이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당신 영혼의 두 가지 모습이다. 모든 개인은 한 가지 빛깔의 삶을 살지 않는다. 어느 때 우리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고, 다른 때에는 진리를 향한 투사였다. 어느 때에는 세상이 명료했고, 다른 때에는 혼란스러웠다. 과거의 당신 영혼은 치기 어린 젊은이의 영혼이었고, 미래의 당신 영혼은 원숙한 노년의 영혼일 것이다.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오늘의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지금 당신의 영혼은 어떤 빛깔을 하고 있는가?

 

(49-50)

유물론과 과학이 정신적인 요소를 완벽히 배제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모순성이다. 모든 신념이 제한적인 영역에서만 언제나 무모순적일 수 있듯. 경험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유물론과 과학은 물질의 울타리 안에서 완벽히 무모순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유물론과 화학이 하나의 이념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설명하는 객관적인 진리라고 상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실상은 세계를 축소했다고 할 수 있다. 무모순성의 영광은 정신과 관련된 모든 가치를 세상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얻게 된 반쪽짜리 승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얻게 된 승리는 오늘날의 학계와 대중의 유몰론 편향 패러다임으로 작동하고 있다.

 

(94)

일상의 번잡함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자신이 그 생각 자체가 되어 그저 생각의 반복 위를 흘러가고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혹은 어쩐지 스스로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느낀다 해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한다. 원래 사람들은 생각이 많은데 나는 좀 더 많은가 보다 정도로 여기고 그 생각의 반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또 다른 이는 생각의 과다와 반복을 즐기기까지 한다. 그는 그것 자체에 빠져든다. 이처럼 오늘날의 사람들은 생각의 반복이 너무도 익숙하기에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 자체를 모른다. 생각의 반복이 멈추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그것이 고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9)

마음에서 어떤 원인에 의해 하나의 상념이 일어서면 그 즉시 마음은 그것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려는 이원적 작용을 한다. 이때의 끌어당김과 밀어냄은 개인에게 매력과 혐오의 강렬한 감점으로 체험된다. 그리고 이 강렬한 감정은 상념을 강화하고 사유를 반복하게 함으로써 결국 그 상념이 마음 안의 하나의 존재자로 일어서게 한다. 나의 마음에 드러나는 모든 존재는 끌어당김과 밀어냄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고 눌러앉아 있는 것이다.

 

(124)

명상이라는 단어도 그러하다. 사전적으로는 어두울 명()에 생각 상()으로 어두운 가운데 생각함을 의미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어떤 이들은 명상이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생각해 명상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한다. 다른 이들은 똑같이 명상이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기에 명상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맥락에서 사용한다. 어떤 이는 명상을 실용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서 명상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반면 다른 이는 같은 이유에서 부정적으로 사용한다. 어떤 이는 명상이라는 단어를 진리와 엮어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현실 도피적인 무엇이라는 전제에서 사용하며, 또 다른 이는 오늘날의 힐링 문화가 만들어낸 상업화된 서비스의 일환이라는 측면에서 사용한다.

 

(138)

어떤가? 당신은 아, 이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하고 그것을 움켜쥐었는가? 우리는 나에게 없는 어떤 멀고 험난한 세계에서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는 나에게 없지만 노력을 통해 얻게 되는 어떤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에게 있었다. 나에게 속하고 나의 바탕이 되는 것. 이것이 자아의 본질이고, 세계를 일으키는 배경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바탕과 배경이 그러하듯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 사유와 논리로는 그 앞까지 갈 수 있지만 도달할 수 없고, 그 끝에서의 단 한 번의 체험으로 정확히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내면의 근원이자 의식의 실체이며 본질적인 자아의 모습이다. 이것이 우리가 찾던 것이다.

 

(164)

우리는 침묵을 통해 알게 된다. 이 텅 비어 있음은 크기가 없고 경계가 없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의 배경이다. 그렇기에 모든 생명 안에 깃든 의식은 몸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의식의 크기를 말할 수 없다. 작은 미물의 내면세계는 좁고, 큰 생물의 내면세계는 넓은가? 그렇지 않다. 그 반대는 어떤가? 개미는 상대적으로 작으니 외부세계가 크다 느끼고, 혹등고래는 상대적으로 크니 외부세계가 작다고 느끼는가? 그렇지는 않다. 의식은 몸의 크기나 신체 능력, 뇌의 크기, 지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199)

이것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일상과 나의 감정과 나의 선택과 나의 모든 것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제 그 이유를 안다. 끌어당김과 밀어냄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감정과 상념과 느낌과 욕망에 연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커져간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행동을 좋아하고 그 좋아함은 커져간다. 나는 내가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고 그 미움을 키워간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싫어하고 그 싫어함을 키워간다. 영원한 것은 없기에 나의 경향과 쏠림도 조금씩 변해갈 테지만, 나는 나의 행동 양식과 내면의 상태를 섬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유의미한 시간의 범위 안에서 과거와 미래의 나를 가늠해볼 수 있다.

 

(250)

세속 안에서 세속적인 마음을 줄여간다면, 현실을 살아가며 동시에 현실에 대한 마음 씀을 줄여간다면 나의 본질은 점차 선명해질 것이다. 내면을 여행하는 자. 이것이 나의 본질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행지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추억이 전부인 것처럼, 내가 이 삶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부와 성공이 아니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의식에 남을 흔적뿐이다. 그 흔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뇌를 기반으로 하는 물질적 기억과는 다를 것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일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고 회상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상처의 흔적 같은 단편적 인상일 수도 있고 혹은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우주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는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 같은 것일 수도 있다.

 

(281)

지혜로운 부모를 상상해보자. 모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지혜로운 부모도 자녀의 안녕을 바란다. 하지만 지혜로운 부모는 그들의 자녀가 안락과 편안함보다는 적절한 위기와 실패에 대면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녀가 스스로 어린아이의 모습을 깨뜨리고 어른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자아의 본질도 그러하다. 나의 깊은 의식, 수많은 삶을 살아내고 또다시 수많은 삶을 이어나갈 자, 세상을 스스로 일으키고 그것을 관조하는 자도 그러하다. 그 본질은 어른 되고자 할 것이다. 신의 어른이, 모든 의식적 존재의 어른이 되고자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신체가 아이의 옷처럼 보이게 할 만큼의 깊은 성정을 원할 것이다. 그때서야 자아의 본질은 어른답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생과 사를 관통하는 깊은 의식의 관점에서 배움과 사랑은 삶의 이유로서 부족함이 없다.

 

(339)

천천히 눈을 뜬다. 충분히 쉬었다. 침묵은 오래 지속되었다. 세상은 아직 적막하고 창문에 맺힌 물방울은 아침 햇살에 반짝인다. 시계를 본다. 이제 사랑하는 이들을 깨우고 그들을 챙긴 후 출근할 시간이다. 어제는 나도 모르게 욕심을 부리고 화를 내었으며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조금은 줄이리라. 심판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보상이나 인정 때문이 아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내가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일으킨 것도 나고 굳이 이 신체로 이 세계를 미워하지 않으리라. 이제 시간이 되었다. 몸을 일으켜 세상으로 나아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스카나의 저주받은 둘째 딸들
로리 넬슨 스필먼 지음, 신승미 옮김 / 나무옆의자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재미있는 소설 한 편을 이야기해줄게. 제목만 봤을 때 제목 속에 저주라는 단어가 있어서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인가 싶었는데, 읽어보니 밝고 유쾌한 로드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로스 넬리 스필먼이라는 미국 작가가 쓴 <토스카나의 저주받은 둘째 딸들>이라는 소설이란다. Jiny가 이 책을 보면서 둘째 딸이 아니라 둘째 딸들이라고 해서 주인공이 쌍둥이냐고 물어봤잖아. 그건 아니고 토스카나의 어떤 가문의 둘째 딸들을 의미하는 거란다. 그 집안의 대대로 내려온 세대의 모든 둘째 딸들이라고 할 수 있지. 토스카나는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의 지역이라서, 소설 속에 우리의 좋은 추억이 깃든 피렌체도 나오고, 우피치 미술관도 나와서 반갑더구나. 어떤 내용일지 바로 이야기를 해줄게.

 

1.

200여 년 전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트레비피아노 마을이라는 곳에 필로미나 폰타나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동생 마리아를 좋아하게 되면서 화를 내면서 폰타나 집안의 둘째 딸들에 저주를 내린다고 이야기를 했어. 우연인지 몰라도 그 이후 200년 가깝게 폰타나 가문의 둘째 딸들은 진정한 사랑도 만나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했다고 하는구나.

그런 폰타나 가문의 둘째 딸 에밀리아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란다. 뉴욕에서 외할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빵집을 운영하고 있었어. 둘째 딸의 저주를 알고 있지만 단지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에밀리아. 어느덧 29살이 되어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자, 저주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야. 에밀리아의 엄마는 2살 때 돌아가셨고, 에밀리아의 언니는 첫째 딸답게 벌써 결혼하여 아이가 둘이나 있었단다.

어느 날 인연을 끊고 지내던 이모 할머니 파올리나로부터 편지가 왔단다. 파올리나의 고향 이탈리아에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어. 파올리나는 에밀리아의 외할머니 로사의 여동생으로 폰타나 집안의 둘째 딸로 평생을 독신으로 사셨단다. 하지만 젊었을 때 로사의 딸을 훔쳐서 달아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로사는 파올리나와 인연을 끊고 살았다고 했어. 그래서 에밀리아도 파올리나 할머니와는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단다. 어떤 내막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몰랐어. 이모 할머니의 이런 제안을 이야기하자 외할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안 된다고 했어. 그래서 에밀리아도 이모 할머니에게 어렵다고 편지를 보냈단다. 하지만 이모 할머니는 계속 설득을 하고, 경비도 모두 대준다고 했고, 그곳에 가서 둘째 딸의 저주를 풀자고 이야기를 했단다. 결국 에밀리아는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어. 이모 할머니는 이번 여행에 에밀리아의 사촌인 루시아나(역시 둘째 딸)도 함께 간다고 했단다. 루시아나는 21살로 괴팍한 성격의 아가씨이고, 둘째 딸의 저주를 풀기 위해 자유연애를 하는 그런 아가씨였어. 에밀리아와도 그리 친하지 않았지. 결국 셋은 외할머니 로사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모 할머니의 여든 살 생일 기념으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단다.

 

2.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베니스를 거쳐 피렌체에 갔고, 그리고 토스카나에 있는 파올리나 할머니가 자랐던 옛집도 방문했단다. 이모 할머니는 1980년대 애플 주식을 샀었는데 그게 대박이 나서 경제적으로는 아주 넉넉했단다. 자신의 고향집도 사들여 정비를 했고, 지금은 가브리엘이라는 사람이 여관으로 꾸며 사업을 하고 있었어.

파올리나는 틈틈이 자신의 옛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어렸을 때는 언니 로사와 무척 사이가 좋았어. 1959년 로사는 알베르토라는 남자와 약혼한 상태였는데 알베르토가 결혼해서 미국에서 살자고 했단다. 알베르토는 자리 잡기 위해 먼저 미국에 갔어. 먼 이국 땅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로사는 무척 두려웠어. 어떻게든 동생 파올리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어. 미국에 있는 알베르토의 삼촌인가 하는 사람과 결혼을 주선했고, 파올리나의 아버지는 허락을 하여 파올리나도 강제로 결혼하게 되어 미국에 가는 신세가 되었어.

파올리나의 애칭이 포피거든, 지금부터는 그냥 포피라고 할게. 포피는 그런 애정 없는 결혼은 싫다고 했는데, 로사가 설득하여 일단 미국에 가서 결혼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어. 그렇게 해서 포리도 미국에 가기로 했단다. 미국에 가기 전에 우피치 미술관에서 일하였는데, 그때 그곳에서 만난 동독 청년 리코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집에서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몰래 사랑을 했지만 들키고 말았어. 그래서 포피는 리코와 함께 도망을 갔어. 이탈리아 남쪽 나폴리 인근의 라벨로라는 곳까지 가서 둘은 비밀 결혼을 했단다. 행복한 삶을 이어가나 싶었는데, 운명은 그들의 행복을 시기했어.

동독에 계신 리코의 아버지가 쓰러지셨고, 그로 인해 집안 사정이 무척 어려워졌다고 했어. 리코의 아버지는 정비소를 했는데, 그 일을 대신할 사람은 리코밖에 없었어. 동독이라는 나라를 혹시 들어봤니? 세계 2차 대전이 이후 독일은 전쟁 책임을 이유로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졌고, 동독은 소련연방에 속한 공산국가였단다. 그래도 당시에는 어느 정도 오고 갈 수 있었어. 리코는 집에 가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후에 다시 오겠다고 했단다. 그러나 리코의 집안 사정도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아 쉽게 돌아올 수 없었어. 거기다가 국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어.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더 심해졌고, 독일 내에서도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지기까지 했어. 동독 내에서 서방 국가로 나오기가 쉽지 않았단다. 리코는 편지를 통해 이런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59년 뒤 여든 번째 생일에 그들이 비밀 결혼식을 올린 라벨로의 성당에서 만나자고 했단다. … 59년 뒤면 너무 뒤로 잡은 것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그 당시 59년 뒤면 나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를 텐데 말이야. 아무튼 그런 약속이 있어서 포피는 여든 살 생일에 맞춰 라벨로에 오려고 했던 거야. 그런데 그것보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된 다음에 리코를 찾아볼 수는 없었을까? 낭만 없는 아빠는 그런 생각이 드는구나.

….

 

3.

포피와 에밀리아, 루시아나는 베니스, 피렌체, 토스카나, 나폴리를 거쳐 포피와 리코가 결혼을 하고 짧지만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냈던 라벨로에 도착했단다. 이 여행을 하면서 에밀리아와 루시아나도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고, 그로 한해 한 단계 더 성장하는 모습들도 보여주었지. 특히 루시아나는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서, 둘째 딸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는 불안함을 완전히 떨쳐낼 수도 있었어. 역시 여행은 자신을 알게 모르게 성장시키는 좋은 선생님이지. 그리고 에밀리아와 루시아나는 우연히 포피 할머니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여행을 하면서 포피 할머니와 정을 쌓았는데, 포피 할머니의 불치병은 그들을 더욱 찐한 관계로 만들었단다.

….

그리고 50여 년 전 리코와 했던 약속. 포피와 리코가 비밀 결혼식을 올렸던 라벨로의 성당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그 약속. 포피와 에밀리아, 루시아나는 포피의 여든 번째 생일날, 라벨로의 성당에서 기다렸단다. 에밀리아는 리코가 나타날 가능성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기대를 했단다. 리코가 올 수도 있다는 기대포피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그를 만났으면 하는 기대하지만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리코는 오지 않았어. 마지막 희망이 그렇게 사라지는 것인지….

다음날 비행기 타기 전에 포피 할머니가 신혼생활을 했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단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이…. 리코의 손자였던 거야. 리코의 손자가 말하길, 몇 년 전에 리코 할아버지가 그 집을 사셨다는 거야. 그런데 리코에게 손자가 있었다면 동독에 가서 결혼을 했는가 보구나. 동독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리코도 어쩔 수 없었겠지. 리코의 아내는 몇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어. 그 이후에 리코는 이탈리아로 오셨다고 했단다.

그런데, 돈 많았던 포피는 자신의 고향집은 사들였으면서, 더 좋은 추억이 깃든 자신의 신혼집을 살 생각을 못했을까. 아니면 너무 낭만적이시라 리코와 약속했던 여든 살이 될 때까지는 라벨로에 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가. 일찍 그 신혼집을 사려고 했다면 리코를 만날 수 있을 텐데그 집에 리코는 없고, 리코의 손자가 있어서 혹시 리코가 죽었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이내 리코는 지금 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했어. 나이를 들면 병원이 일상이 되는 것이 서글프구나. 포피 일행은 리코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서 리코를 만났단다.

드디어… 60년 만에…. 리코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서 포피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리코는 눈을 떴고, 포피를 만난 이후 하루가 다르게 회복하셨단다. 이게 다 사랑의 힘 아니겠니포피 할머니는 진정한 사랑을 만남으로써, 토스카나의 둘째 딸들의 저주도 싹 날려버리셨단다. 포피는 리코와 라벨로에서 지내시기로 하고, 에밀리아와 루시나아는 집으로 돌아왔단다. 에밀리아는 그동안 포피 할머니가 이야기 준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포피 할머니가 자신의 외할머니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 그래서 다시 이탈리아로 가서 포피 할머니를 만났단다. 포피 할머니는 리코가 동독으로 떠난 이후의 뒷이야기를 해주었단다.

….

리코가 동독에 돌아가고 얼마 후, 포피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 혼자 출산을 할 수 없으니, 언니 로사에서 도움을 청했고, 로사는 라벨로에 와서 포피를 보살펴 주었단다. 포피는 딸을 낳았고 이름을 요하나라고 했어.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사생아를 키우기는 쉽지 않았대. 그래서 로사는 포피에게 미국으로 가자고 했어. 하지만 사생아는 미국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일단 로사의 아이인 척 하고 미국행 배를 탔단다. 그 당시 로사도 임신을 했었는데 그만 안타깝게도 유산을 하고 말았어..

로사는 유산 소식을 알베르토가 알게 되면 자신을 버릴까 두려워했어. 그래서 로사는 미국에서 가서 알베르토를 만난 이후에도 계속 포피의 딸 요하나를 자신의 딸인 것처럼 행동했어. 포피는 억울하고 화가 났지. 언니가 계속 자신의 딸처럼 행동하고 딸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하자, 포피는 어느날 딸을 데리고 언니를 떠났단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워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단다. 그때부터 로사는 포피와 연을 끊고 지낸 거야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훔쳐 달았다고 이야기를 하고알베르토가 진실을 알면 자신을 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너무 컸다지만, 그것으로 동생과 인연을 끊다니너무 무리한 선택인 것 같구나.

포피 할머니에게 들은 진실은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었듯이 그 전에 알고 있던 내용은 진실과 전혀 다른 것이었어. 포피가 언니의 딸을 훔쳤던 것이 아니고, 포피는 자신의 딸을 언니에게 빼앗겼던 거야. 진짜 외할머니를 만나게 된 에밀리아는 이탈리아에서 포피 할머니와 리코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단다.

포피 할머니는 11개월 후에 돌아가셨는데, 남편과 손녀와 지낸 그 11개월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아닐까 싶구나. 에밀리아는 그 이후에는 이탈리아에서 리코 할아버지, 그러니까 자신의 외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포피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로 했고, 자신 또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해피 엔딩으로 소설은 끝을 맺었단다.

….

한 편의 로드무비를 본 것 같았단다. 이탈리아의 곳곳을 여행하는 포피 할머니와 두 손녀의 장면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구나. 누군가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려고 할 때 이미 소설이 시놉시스 역할을 충분히 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 소설의 지은이 로리 넬슨 스필먼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볼까 생각했는데 평점들이 좋지는 않구나. 귀가 얇은 아빠가 읽을 책도 잔뜩 밀려 있는 와중에 평점 낮은 책 읽기는 좀 망설여지는구나…^^ 앞으로 나올 신간에 기대를 해봐야겠구나. 그러면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옛날 옛적에 이탈리아 트레스피아노 마을에 얼굴도 심성도 별로인 필로미나 폰타나라는 소녀가 살았다.

책의 끝 문장: “나는 당신을 선택할게요.”



"지도는 넣어두렴." 포피가 제안한다. "베니스는 미로 같은 곳이야. 방향을 절대 못 찾을 거야. 내가 늘 말하듯이, 길을 잃은 것 같거나 혼란스러우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돼. 마음이야말로 가장 믿음직스러운 길잡이란다." - P153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루시는 나에게 동정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쥐고 흔드는 캐럴 숙모와 할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딱 매트가 말한 대로, 할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어서 내 간절한 바람을 다 억누르고 할머니 뜻대로 가는 나를 생각한다. 루시의 말이 맞을까? 루시나 나나 우리가 누군가의 애정을, 그 사랑을 완전히 믿지 못하면서도 언젠가 얻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해, 물불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이든 해왔던 것일까? - P180

"그래." 포피가 대답한다. 하지만 반대 방향을 응시하고 있다. 포피의 시선을 따라가니 리코가 연주하던 장소인 넵투누스 분수가 있다. 팔각형 분수대 중앙에 대리석으로 만든 넵투누스 조각상이 우뚝 서 있고, 그 주위를 웃고 있는 사티로스들과 청동으로 된 강의 신들과 물에서 솟구친 대리석 해마들이 둘러싸고 있다. 긴 세월 동안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은 도시로 돌아온 기분이 얼마나 묘할까. 이곳은 16세기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고, 포피가 리코와 손을 잡고 광장을 거닐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도시의 모든 조각상과 모든 분수가 포피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상기시킬 것이다. - P269

나는 카프레스 샌드위치-껍질이 바싹한 빵에 신선한 모차렐라, 즙이 많은 토마토, 바질을 올린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은 후에 조심스럽게 포피에게 낮잠을 권한다. 포피는 낮잠이라는 발상 자체가 터무니없는 듯 불끈한다. "공원에 앉아 있을 수 있는데 왜 침대에 누워 있겠니?" 포피의 목소리는 확연히 티가 날 정도로 쉬어 있다. "자연이 최고의 치료제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P2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4)

미군들은 월남사람들을 이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했다. 그러나 이라는 비칭은 월남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은 원래 미국에 사는 중국인들을 천시해 생겨난 것이었고, 그 비하의 지칭에는 아시아 황색인종 전체를 업신여기는 의미가 포괄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군들은 한국군은 연합군으로 자기네와 같다고 애써 구분하면서 월남인들만 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이상재는 그 얍삽한 수작이 오히려 역겹고 기분 상했다. 그건 단순히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백인들은 아시아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간주한다는 글을 일찍이 읽었기 때문이다. 황인종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취급해 버리는 백인들의 그 대책 없는 오만과 우월감, 그에 대한 반감이 이상재는 월남에 와서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미군들이 더럽고 냄새난다고 해서 월남사람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6.25 때 한국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했던 것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86)

상층부 몇 명이 북쪽에 가고, 노동당에 입당을 하고, 거액의 돈을 받아가지고 내려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악명 높은 중정의 고문수사에 의한 조작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개된 재판을 하게 되면 조작이 폭로되고 말 텐데 그럴 수가 있을까. 더구나 한두 명이 연루된 사건도 아니고 70명이 넘게 구속된 대사건을 가지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보다 더 어리석고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그런 행위가 온몸에 휘발유 뒤집어 쓰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위험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자신들이 추구했던 운동이 김일성 정권을 편드는 것이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남쪽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동시에 직시하고 해결해 나아가는 것이 사회혁신이며, 진정한 통일운동의 길이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상층부에서는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인가? 자금이 필요해서? 그건 전혀 말이 안 된다. 돈이 없으면 운동을 중단해야지 돈 때문에 운동의 순수한 목적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게 아니면 상층부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의식과 목적을 가지고 조직원들을 속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악질적인 흉계고, 속은 자들의 순수한 무참하게 짓밟혔을 뿐이다.

 

(150)

전태일은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러나 근로감독관은 이야기 들을 자세를 전혀 갖추지 않은 채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훅 내뿜으며 책상 옆구리에 붙여둔 빈 의자가 있는데도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저어, 저희들이 일하는 봉제공장들은 작업환경부터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도록 형편없이 나쁩니다. 먼저, 천장 높이가 1.5미터밖에 안 되어 모두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해야 합니다. 원래는 3미터 높이였는데 사장들이 임대료를 줄이고 돈을 많이 벌려고 절반을 막아 2층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그런 공장들은 대개 8평 정도고, 평균 32명씩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비좁은 공장이 복도로 통하는 문 외에는 세 벽이 모두 막혀 있어 통풍이 전혀 안 될 뿐만 아니라 환기장치도 일절 없다는 사실입니다. 감독관님, 봉제공장은 모두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통풍도 안 되고 환기장치도 전혀 없으니 원단에서 풍기는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며, 옷감을 재단하고 옷들을 만들면서 끝없이 일어나는 실밥먼지는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대로 공장 안에 갇혀 있어서 공장 안은 언제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침침합니다. 공원들은 그 먼지를 다 마시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지가 많이 나는 옷감일 때는 서너 시간만 일해도 먼지가 앉아 머리가 허옇게 되고, 도시락을 펴놓고 첫숟가락을 넘기기도 전에 밥에 먼지가 허옇게 내려앉아 먼지밥을 먹는 실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먼저구덩이에서 날마다 14시간씩 일을 하다 보니 기관지염, 진폐증, 폐결핵, 각종 눈병들이……”

 

(160)

자아, 그럼 내 말 똑똑히 들어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분명히 사람이야. 그리고 이 세상 사람은 그 누구나 다 똑같이 평등해. 사람이면 모두가 다 공평하게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 것처럼 말이야. 사람은 모두 평등하니까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를 가지고 있어. 이게 무슨 말인고 하면 말야. 우리 공원들도 일반 직장인들처럼 하루 여덟 시간 일하고 제대로 봉급받고, 야근을 하게 되면 야근수당을 따로 받고 해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법이 만들어져 있어. 그건 나라가 만든 법인데, 그 법 이름이 바로 근로기준법이야. 그런데 그 법이 정확하게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 공원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기계처럼 뼛골 빠지게 혹사당하면서도 거지꼴을 못 면하고 살고 있는 거야. 그런데 왜 그 법이 안 지켜질까? 사장들이 돈 많이 벌 욕심으로 안 지키기 때문이라고? 그거 맞는 말이야. 그러나 그건 정확한 답이 아니야. 사장들의 잘못은 3분의 1밖에 없어. 그 법이 제대로 확실하게 지켜지게 하려면 사장들 말고 또 책임져야 할 데가 두 군데가 더 있다 그런 말이야. 자아, 이 대목에서 내 말 똑똑히 들어. 그 두 군데 중에 한 군데가 나라에서 만든 법을 제대로 잘 지키나, 안 지키나 감독해야 하는 공무원들이야. 그럼 나머지 한 군데는 어디지?”

전태일은 두 공원 아가씨를 응시했다.

 

(283-284)

원병균은 여러 가지 정황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말을 잃고 있었다. 산비탈은 45도가 족히 될 만큼 경사가 심했다. 그런 급경사에 단층짜리 주택도 아니고 5층이나 되는 아파트를 세운 것이다. 최신 장비나 최신 기술이 있더라도 신경 쓰고 조심해야 할 난공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모든 자재들을 등짐으로 져올리고, 콘크리트 반죽도 삽으로 적당적당 해치우는 형편에 그런 난공사를 한 것이다. 땅값 비싼 서울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평지보다 몇 배 더 강하고 튼튼하게 공사를 하도록 규정을 정하고, 감시했어야 한다. 그러나 산동네마다 솟아오르는 시민 아파트들이 너무 졸속이고 날림이라는 비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르도자시장은 그런 우려와 비판을 그야말로 불도저처럼 깔아뭉개며 일을 몰아붙여 왔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또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읽었단다. 이번에는 신간으로 나온 그의 에세이 모음집이야. 아빠가 슈테판 츠바이크 책을 이야기할 때마다 이야기를 해서 아빠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좋아하는 건 이제 다 알겠지? 신간 코너의 그의 책이 나와서 예전에 나온 책이 재출간된 것인가 봤더니 그의 미공개 에세이를 모아서 출간한 것이라고 하는구나. 제목은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이고, 부제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이라고 적혀 있단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유대인이었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를 피해 브라질로 망명을 갔고, 우울증에 걸려 그 곳에서 아내와 동반자살을 했다고 했잖아.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망명 간 브라질에서 쓴 글들이라고 하는구나. 암울한 시절, 모국을 떠나 먼 타국에서의 망명 생활. 나치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면서 모국으로 돌아갈 희망이 점점 꺾이는 어려운 시절에 쓴 글들이란다. 그의 글들을 모아 이 책을 출간한 이들이 제목을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로 뽑은 이유가 당시 그의 상황을 고려했던 것 같구나.

이 책에 실린 <이 어두운 시절에>라는 에세이가 있는데, 그 에세이의 내용에서 책 제목을 뽑은 것 같더구나.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잘 모르고 있던 것이 어두운 시절에 그것의 가치를 알 수 있다는 취지로 글을 썼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했어. 평상시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가치 있는 줄 몰랐는데, 계엄 사태, 내란 사태를 겪고 보니 민주주의란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되었잖니.

====================

(118)

우리는 밝은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듯, 삶의 신성한 가치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망각하고, 삶이 평온할 때는 삶의 가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

 

1.

우리는 많은 걱정을 하면 살곤 한단다. 걱정에 대한 격언들이 참 많은데 대부분이 걱정은 쓸데 없다는 내용으로 그 격언들을 공감하게 된단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살다 보면 또다시 걱정은 마음 한 켠에 쌓여 간단다. 이 책에서 안톤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걱정 없이 사는 기술을 이야기를 한단다. 핵심은 돈을 멀리하고 사람을 가까이하라는 것이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많으면 걱정이 줄어들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욕심은 커지면 커질수록 더 커지게 되는 법이지.. 그래도 우리 사회 시스템이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보니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구나. 그 시절 브라질에서나 가능하겠지? 이런 핑계 같은 생각도 들었어. 하지만, 사랑을 위해 일한다는 점은 마음에 새겨야지.

====================

(16-17)

사람들이 얼마나 특별히 그를 존경하는지 알아보려면 거리에서 안톤을 잠시만 지켜보면 된다. 모두가 그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모두가 그와 악수를 나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정말로 교과서적으로 신을 믿는 삶, 그 위대한 삶의 비밀을 핏속에 가진 자의 힘을 나는 안톤에게서 명확히 보았다. 확실히 가장 가난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하는, 낡은 코트 차림에 이 단순하고 걱정 없는 남자는 자기 땅을 순시하는 지주처럼 여유롭고 다정하게 동네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누구의 집에든 들어갈 수 있었고 어떤 자리에든 앉을 수 있었으며, 오직 최소한의 것만 원했기에 그에게는 모든 것이 허락되었다. 나는 안톤이 가진 힘의 비밀을 곧바로 이해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일했기에 모두가 그를 존경했다.

====================

이 책에서는 돈에 대한 이야기가 또 나오는데 슈테판 츠바이크 또한 돈을 멀리하지는 못한다면서 돈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원치는 않는다고 했어. 그래, 바로 이 자세돈을 너무 멀리하지도 않고 돈에 너무 집착하지도 않는 중용의 자세를 취하고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집중하는 것.

====================

(44)

그 후로 내가 돈을 무시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터다. 돈이 줄 수 있는 즐거움과 자극을 나는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모든 방문객에게 하듯이, 나는 돈에도 모든 문을 활짝 열어둔다. 하지만 돈은 방문객 그 이상은 아니다. 나는 돈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지울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우리는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잊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

 

2.

이 책에서는 당대 유명한 미술가인 로댕과 만남을 적은 글도 실려 있단다. 지인을 통해 슈테판 츠바이크는 로댕을 만났단다. 로댕에게 집중력이란손님으로 온 슈테판 츠바이크가 있는지는 모른 채 작업에 몰두하여 무아지경에 빠질 정도의 집중력.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겠지만, 로댕을 훌륭한 조각가로 만든 것은 이런 열정과 집중력이 아닐까 싶구나. 주의 산만한 아빠로서는 정말 불가능한 집중력이로구나.

====================

(74-75)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30, 한 시간, 한 시간 반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었고, 나는 그런 모습에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자기가 초대한 손님이 뒤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고, 낮인지 밤인지조차 몰랐으며, 시간도 장소도 잊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작품과 그 너머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더 높고 더 진실한 형태만 응시했다. 그의 육중한 몸이 가볍게 움직였고, 어떤 깨달음이 흡사 술에 취한 듯한 그의 존재를 감쌌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천지창조 첫날의 신처럼 홀로 창조 작업에 전념했다. 시간과 공간과 세상을 그토록 완벽하게 잊을 수 있다니, 젊은 나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큰 충격이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세상의 모든 예술과 성과의 궁극적 비밀을 확실히 이해했다. 그것은 바로 집중이었다. 크든 작든 어떤 작업이든, 수행하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너무 자주 수백 가지 사소한 일에 분산되고 쪼개지는 의지를 진정으로 원하는 한 한 가지에 집중하는 영혼의 결단이 있어야만, 오직 그런 결단력으로만 진정으로 일할 수 있다. 손님에 대한 무례일 수도 있지만, 그는 나를 완전히 잊었고, 그렇게 나는 없는 사람처럼 위대한 대가 뒤에 숨을 죽이고 주변의 대리석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한 시간에, 나는 지금까지 내게 없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완벽을 향한 의지로 모든 것을 잊는 열정! 크든 작든 자기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 다른 마법은 없다. 나는 그 한 시간에 이것을 깨달았다.

====================

….

슈테판 츠바이크를 망명하게 만들고, 우울증에 빠지게 만들고 결국 자살하게 만든 히틀러라는 작자. 그는 광기가 그 이전에 소설 속의 주인공과 아주 흡사하다고 하더구나.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로부터 20여 년 후 실제에 그런 일어 벌어졌을 때 더 놀랐을 것 같구나. 그 소설을 쓴 소설가 블라스코 이바녜스는 그 소설을 통해서 독일 국민 속 마음을 대변하려고 했던 것일까? 광기의 소설은 광기의 현실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지옥이 되었구나.

====================

(130-131)

오늘날 히틀러가 전 세계에 강요하려는 이 모든 계획은, 너무나 진짜 같은 허구의 인물, 하르트로트에 의해 고안되었다. 우리는 세계 지배의 꿈이 독일 국민의 무의식 속에 이미 늘 존재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히틀러는 그것을 발명하지 않았다. 블라스코 이바녜스가 25년 전에 하르트로트의 입을 빌려 예언했던 것이 그의 광기를 통해 실현되었을 뿐이다. 고립된 몇몇의 개인이 사악한 꿈에 불가했던 것이 이제는 수백만의 소망이 되었고 세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요소가 되었다. 플라스코 이바녜스의 소설은, 작가가 정치학 교수보다 당대와 미래를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더 보여주었다

====================

이 책은 150페이지도 안 되는 얇은 책으로 금방 읽을 수 있지만, 담겨 있는 글들은 커다란 메시지를 남겨 묵직함마저 들었단다. 책을 덮으면서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생각이 들었어. 바쁘지만 않다면 책을 필사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단다. 하지만 읽어야 할 책들, 독서 편지로 써야 할 책들이 밀려 있어 필사할 시간은 없을 것 같구나. 나중에 너희들도 커서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좋아했으면 좋겠구나.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구인 돈을 주체적으로 피하는 기술, 그리고 단 한 명의 적도 만들고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기술, 매우 어려운 이 두 가지 기술을 내게 보여준 사람이 있다.

책의 끝 문장: 오로지 폭력만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자유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종종 완톤을 생각한다. 그토록 큰 도움을 내게 준 사람은 거의 없었기에 항상 고마운 마음이 든다. 때때로 사소하고 어리석은 돈 걱정이 들 때면 나는 당장 단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아 늘 여유롭고 태평하게 살 수 있는 이 남자를 떠올린다. 허름한 옷차람의 그를 여러 차례 보았다. 그는 늘 한결같이 쾌활하고 태평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를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교도소도 돈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고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돕는 이 청년처럼 들어가 산다면, 부조리가 반복되어 ‘사회 문제’가 되는 우리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도 어쩌면 해결될지 모른다. - P22

그 중요한 순간에 그를 저버리고 만 것은 공감 부족이나 무관심, 못된 의도가 아니었다. 가장 필요할 때 올바른 말을 못하게 막는 것은 많은 경우 용기 부족인 것 같다.
패배나 굴욕의 수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잘 알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작품 첫 번째 충동의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P32

자연의 의지는 연속성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어떤 중단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람들 일부가 무참히 파괴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끈기 있게 인내하며 일상생활을 이어나가길 요구한다. 우리가 때때로 시대에 무관심해 보인다면, 그것은 자기 피조물의 고통에 무관심한 자연의 잘못이다. 그리고 무너져가는 세계의 폐허를 재생 계속 노려보는 대신 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할 때 뒤로서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 - P60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한다 - P61

그는 자살하기 직전이 1942년 초 브라질 페트로폴리스에서 자신을 방문한 동료 이민자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장 무의미한 파괴가 벌어지고 있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을 알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숨을 쉬고 자고 먹을 수 있겠습니까? 창작은 뭔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장 악의적인 파괴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뭔가를 만들 수 있겠어요!"
- P1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