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의 모든 관심은 전 세계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을 창출하고 공동의 재정 규율과 기준을 확립하는 데 쏠려 있었지만 글로벌 금융에 의해 야기된 불안정한 위협의 분위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럽중앙은행의 기본 취지는 다양한 보호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그 안에서 논의되는 내용들은 최소한의 투명성 요구만 충족시켜주면 공개적인 감시나 조사도 면제받을 수 있었다. 이 중앙은행이 단순히 재정정책의 수단처럼 움직이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롭게 발행하는 정부 채권을 거래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물가 안정과 고용 극대화라는 두 위임 책무(dual mandate)
를 부여받은 연준과는 다르게 유럽중앙은행은 오직 물가 안정만을 목표로 삼았다.

사실 유로존 위기의 배경에는 엄청나게 늘어난 채무가 있었지만 그 채무는 민간 부문의 채무였지 공공 부문의 채무는 아니었다. 유로존은 북대서양을 중심으로 한 경제에서 유럽 은행들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기여한 시장 주도의 신용창조 과정과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나중에야 나온 이야기지만 유럽중앙은행은 아일랜드와 스페인의 지나친 경제호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유로존 전체에서 금리를 하나로 고정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더 어려워진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상 유럽중앙은행은 금리를 낮게 설정함으로써 주변 국가들의 경제 호황을 억제하기보다는 독일 경제 부양의 필요성을 더 우선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유럽의 야망은 완전 고용을 최우선시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의 완성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거기에 "사회적 배제와 차별"에 대항해 싸우는 만큼이나 "사회정의"와 "세대간 연대"를 추구하며 동시에 "경쟁력 높은" 사회가 될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NATO와 유럽연합이 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고 눈앞의 위기를 우선 진정시키며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 지정학적 지도를 영구히 다시 그리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바로 이런 사정들이 있었다. 유럽연합과 NATO의 세력이 두 배 이상 확장되었던 건 서로 협력한 결과가 아니었으며 미국과 독일, 프랑스 정부의 개입 못지않게 동유럽이 자초한 부분도 상당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책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3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김완구 옮김 / 책세상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생명은 야생과 일치한다. 가장 활동적인 것은 가장 야생적인 것이다. 아직 인간에게 정복되지 않았지만 그 존재는 인간을 기운 나게 만든다. 끊임없이 서둘러 나아갔고 결코 노동을 그치지 않았던 사람, 즉 빠르게 성장했고 생명을 끝없이 요구했던 사람은 항상 자신이 새로운 지역이나 야생 자연 속에서 생명의 원료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원시 산림수의 포복성 줄기 위를 타고 넘을 것이다. 나에게 희망과 미래는 잔디밭이나 경작된 벌판, 즉 시내와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상되지 않고 흔들리는 습지에 있다. _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산책> , p34/172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는 <산책 walking>에서 야생(wild)과 생명(life)을 말한다. 가공되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원재료에서 그는 새로움을 발견하고,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한다. 소로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생활에서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소로는 기꺼이 콩코드 월든 호수에서의 삶을 선택한다. 이 시기에 탄생한 <월든>이 불후의 명저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과 삶이 접점을 가졌기 때문이고, ‘야생=생명‘을 말하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있는 울림으로 퍼져나간다.

이렇게 모든 자연적인 산물들에는 그것들의 최고 가치를 나타내는 휘발성의 공기 같은 무형의 성질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속되게 될 수도 없으며 사거나 팔 수도 없다. 이제까지 어떤 인간도 어떤 과일의 완벽한 맛을 향유하지 못했다. _ 헨리 데이비드 소로, <야생사과> , p86/172

<산책>은 <월든>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예찬이 담긴 짧은 에세이다. 그렇지만, 이 짧은 에세이 안에서 <월든>을 읽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소로의 자연관(自然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는 과연 자연을 사랑했을까? 그리고 그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일까?

그렇다면 인생의 사과, 세계의 사과를 맛있게 먹으며 즐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건강한 야외의 식욕을 가져야 하는가?... 이와 같이 들판에 어울리는 사유가 있고 집에 어울리는 사유가 있다. 나는 야생 사과처럼 산책가를 위한 양식이 되는 나의 사유를 가지고 싶다. 그런데 그것을 집에서 맛본다면 맛이 있으리라고 보장하지 못할 것이다. _ 헨리 데이비드 소로, <야생사과> , p106/172

소로는 다른 에세이 <야생사과>에서는 사과의 맛을 즐기기 위해 야외의 식욕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맛있는 자신만의 사유를 갖고 싶어 자연에 있고 싶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가 말하는 ‘자연‘의 소중함은 자신에게 신선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결국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의 도구에 불과하는 것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4원인설의 방식으로 해석하자면, 자신과 인간을 목적인(目的因)로 하는 새로움을 주는 작용인(作用因)으로서의 자연을 그는 사랑한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의 이해력도 우리의 평원처럼 광범위해지고 포괄적이게 될 것이고, 우리의 지성도 우리의 천둥과 번개 그리고 우리의 강이나 산, 숲과 같이 전반에 걸쳐 더욱 대규모가 될 것이며 우리의 마음도 폭과 깊이 그리고 웅대함에 있어서 우리의 내해와 대등하게 될 것이다. 아마 여행자들에게는 우리의 얼굴에 있는, 마음을 기쁘게 하고 차분하게 하는 어떤 것,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그 어떤 것이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가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겠으며 아메리카는 어떤 이유로 발견되었겠는가? _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산책> , p30/172

만약 그렇다면, 소로가 사랑한 자연은 낭만주의적인 숭고미(崇高美)의 대상을 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날 것‘이 주는 경이와 위대함이 자신과 인류의 사상과 영감이 원천이 되는 한 자연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어린왕자>에서 사막여우가 말한 사랑 - 서로를 길들이는 것-과 소로의 자연사랑은 분명 결이 다를 것이다. 소로에게 자연은 길들여지지 않았을 때 오히려 가치를 갖는 것일테니까. 서로 길들이며 닮아가면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는 영감은 한계생산체감의 법칙(Law of Diminishing Marginal Returns)에 따라 감소할 것이기에 최적의 상태는 인간(문명)과 자연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가 아닐까. 마치 DMZ의 남북 4km의 길이에 보존된 자연을 수색대원이 간간이 수색, 매복하면서 느끼는 원시의 힘을 소로는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역사를 실현하고 예술과 문학 작품을 연구하기 위해 인류의 발자국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동쪽으로 간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취적인 기상과 모험심을 가지고 미래로 발을 들여놓듯이 서쪽으로 간다. 대서양은 우리가 그 통로 위에서 구세계Old World14)와 그 제도를 잊을 기회가 있었던 레테의 강이다. 만일 우리가 이번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지옥의 강Styx가에 도착하기 전에 아마도 인류에게 남겨진 기회가 한 번 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세 배나 더 넓은 태평양이라는 레테의 강에 있다. _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산책> , p26/172

과거 서부 개척시기 북미원주민(인디언)들을 보호구역으로 몰아넣고 결국 그들의 공동체를 파멸로 이끌었던 역사에서 보듯 이러한 격리 상태가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해석된 소로의 자연관은 위험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물론, 소로가 자연파괴를 원했다는 것도 아니고, 이런 생각도 소로의 사상 전반을 통해 다시 검증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미 소로 전문가들은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그의 사상을 정리했을 것이지만, 아직 공부가 미진한 관계로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부분은 개인적인 숙제로 남겨놓고 <산책 외>에 대한 리뷰를 갈무리한다...

우리가 자랑했던 소위 지식이라는 것의 대부분이 우리에게서 실제적인 무지의 장점을 빼앗아 가는, 그저 우리가 어떤 것을 안다는 자부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소위 지식이란 종종 우리의 적극적인 무지이고, 무지란 소극적인 지식이다. _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산책> , p46/172

야생 사과에 대한 나의 경험에서 볼 때, 나는 문명인이 거부하는 많은 종류의 음식을 미개인이 선호하는 이유가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한다. 미개인은 야외에서 사는 인간의 미각을 가지고 있다. 야생 과일을 음미하는 것은 미개의 또는 야생적인 미각을 가지는 것이다. _ 헨리 데이비드 소로, <야생사과> , p104/172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2-11-09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1-09 20:4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날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아요. 저녁시간 따뜻하게 보내세요! ^^:)

이하라 2022-11-09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 되세요.^^

겨울호랑이 2022-11-09 20:50   좋아요 1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

모나리자 2022-11-09 15: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겨울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2-11-09 20:50   좋아요 1 | URL
모나리자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

거리의화가 2022-11-09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상 축하드려요*^^*
소로의 자연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는데 덕분에 저도 체크해갑니다.

겨울호랑이 2022-11-09 20:52   좋아요 1 | URL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월든>과 <시민의 불복종>에 담긴 소로 사상이 짧은 글 안에 담겨 있는 좋은 독서시간이었습니다. 평안한 밤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11-09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2-11-09 21:00   좋아요 0 | URL
thkang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저녁, 풍요로운 한 주 되세요! ^^:)

마루☆ 2022-11-09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에 뽑히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겨울호랑이님의 감동이 고스란히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11-09 22:49   좋아요 1 | URL
마루님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보내세요! ^^:)

강나루 2022-11-10 0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서정을 축하드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1-10 07:45   좋아요 1 | URL
강나루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그는 그저 믿을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최선의 행복은 툰더텐트론크 남작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제2의 행복은 퀴네공드 양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제3의 행복은 그녀를 매일 볼 수 있는 것이고, 제4의 행복은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철학자인 팡글로스 선생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퀴네공드는 과학적 호기심이 많았기 때문에 숨죽이고 실험을 지켜보았다. 여러 번 반복된 실험을 관찰한 덕택에 그녀는 박사의 충족 이유(充足 理由)와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동요되었다. 그녀 자신도 팡글로스처럼 학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녀 자신은 캉디드의 충족 이유가 될 수 있고, 캉디드 또한 그녀의 충족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팡글로스는 형이상학적, 신학적 우주론을 강의하였다. 그는 다음 같은 사실을 멋지게 증명해 보였다. 즉 원인 없는 결과란 없으며,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며, 남작 각하의 성은 이 세계의 성 중에서 가장 멋진 성이며, 남작 부인은 가장 좋은 남작 부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이란 가장 좋은 목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일례로 코는 안경을 얹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안경을 씁니다. 다리는 양말을 신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양말을 신습니다. 돌은 원래 성을 짓는 석재로 쓰이기 위해 생성되었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지요. 모든 것은 최선의 결과를 향한 필연적 과정으로 얽혀 있습니다. 저는 필연적으로 퀴네공드 양의 집에서 쫓겨나야 했고, 몽둥이찜질을 당해야 했으며, 또 돈을 벌 때까지 구걸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필연입니다.」

이 말에 팡글로스는 한결 더 공손하게 대답했다.
「각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인간의 타락과 저주는 최선의 세계에 필연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자 포리가 말했다.
「그럼 선생은 자유 의지를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외람된 말씀이오나 자유 의지는 절대적 필연과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유로운 것은 그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의지란…….」

팡글로스가 여기까지 얘기하였을 때 포리는 〈포르토〉인지 〈오포르토〉인지 하는 포도주를 따르고 있는 호위무사에게 고갯짓을 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삼국지 6- 정사 비교 고증 완역판
나관중 지음, 모종강 정리, 송도진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4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22년 10월 17일에 저장

삼국지 5- 정사 비교 고증 완역판
나관중 지음, 모종강 정리, 송도진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4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2년 10월 17일에 저장

삼국지 4- 정사 비교 고증 완역판
나관중 지음, 모종강 정리, 송도진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4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22년 10월 17일에 저장

삼국지 3- 정사 비교 고증 완역판
나관중 지음, 모종강 정리, 송도진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4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6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22년 10월 17일에 저장



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1시간이면 혼자서 59분을 얘기합니다. 깨알지식을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 조언 듣지 않습니다. 원로들 말에도 '나를 가르치려 드냐'며 화부터 냅니다. 옛일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 대변인을 역임한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10월 5일 페이스북에 올린 저격글. 5년 치하로 그친 항우의 초나라에 비유하며 "누군가의 얼굴이 바로 떠오른다"라고 말해. 주어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다들 누구인지 아는 분위기. 함께 일했던 동료의 생생한 '피어 리뷰'. _ <시사 In VOL.787> p6


 <시사 인> '말말말' 코너에 실린 내용 하나에 시선이 머문다. 이미 2주 전 널리 알려진 뉴스이긴 하지만, 전(前) 대변인이 남긴 글을 직접 보니 새롭게 보인다. 5년만에 자신의 초(楚)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폐주(廢主) 항우(項羽, BCE 232~202). 밑바닥에서 일어나 한나라의 왕(王)이 되었다는 점은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 BCE 145~86)도 인정하지만, 항우의 마지막에 대한 평가는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날카로운 평가 안에서 항우에 비유된 인물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태사공은 평한다... 항우는 자신이 세운 공을 자랑하면서[功致辭] 자신의 지혜만을 앞세운 채 옛일을 거울로 삼지 않았다. 패왕의 공업을 이야기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경영하고자 한 것이 그렇다. 5년 만에 마침내 나라를 패망케 만들고, 자신의 몸이 동성에서 찢겨 죽을 때까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았다.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끝내 호언하기를,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결코 내가 용병을 잘못한 탓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 어찌 황당한 일이 아닌가!_ 사마천 <사기본기> <항우본기> , p377


 항우패망 직전 부인에게 불러준 시詩는 끝까지 몰락의 원인을 몰랐던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는 듯하다. 스스로를 '역발산 기개세力拔山 氣蓋世'로 칭하며 끝까지 하늘을 원망하는 항우.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는 주유(周瑜, CE 175~210)가 하늘을 원망하며 "하늘은 왜 주유를 낳고 제갈량을 또 낳았는가(旣生瑜 何生亮)"하는 원망이 실려있지만, 두 원망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전자의 원망에는 황당함을, 후자의 원망에는 영화 <아마데우스 Amadeus>에 드러나는 천재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를 바라보는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 대한 공감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두 인물의 인물됨과 행적에 근거한 것이겠지만.


 항우는 한밤중에 일어나 장중帳中에서 술을 마셨다. 항우에게 우虞라는 미인이 있었다. 극히 총애해 늘 데리고 다녔다. 또 추騅라는 준마가 있었다. 그는 늘 이 말을 타고 다녔다. 항우가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스스로 시를 지어 노래했다.


力拔山兮氣蓋世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 덮을 만해

時不利兮騅不逝 시운이 불리하니 추騅도 나아가지 않는다

騅不逝兮可奈何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좋은가

虞兮虞兮奈若何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하란 말인가


 항우가 여러 번 읊조리자 우미인이 화답했다. 항우의 뺨에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좌우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_ 사마천 <사기본기> <항우본기> , p369


 항우의 〈해하가 垓下歌〉를 읽으면서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끝까지 질주한 한 인물과 주변의 비극을 생각하게 된다. 초패왕 항우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의제(楚 義帝)를 보필했다면, 이러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이런 가정 자체가 항우 그리고 '유사항우'에게는 무리겠지만. 전대변인의 글을 읽으며 떠오른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시를 마지막으로 글을 갈무리한다... 


(우문술 등이) 압록강을 건너 추격하였는데,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피로케 하고자 싸움마다 문득 패하니, [우문]술 등은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다 이겻다. 이미 여러 번 이긴 것을 믿고 또 중의(衆議)에 몰려, 마침내 동쪽으로 진격하여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까지 30리 되는 지점에서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 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策究天文 신통스런 계책은 천문(天文)을 뚫었고, 

妙算窮地理 묘한 계산은 지리(地理)를 다했도다. 

戰勝功旣高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知足願云止 만족한 줄 알아 그만 두시지! _ 김부식 외, <삼국사기><열전 4 을지문덕> , p744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10-18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8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