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여서 좋은 직업 - 두 언어로 살아가는 번역가의 삶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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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희 번역가의 에세이는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를 시작으로 세 번째로 읽은 책이다. 번역가의 일상과 번역에 대한 유익한 정보와 에피소드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글을 얼마나 재미있게 잘 쓰셨는지. 술술 넘어간다. 번역하는 일은 보통의 독서와 달리 더 세심한 읽기이며 작품과 작가와의 교감의 농도가 더 진할 것 같다. 그렇게 작품 속에서 교감했던 원저자와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얼마나 설레는 일일까. 무엇보다도 부러웠던 것은 500쪽 가까운 두꺼운 책 번역을 마치고 딸 정하를 만날 겸 도쿄로 날아가 작품 속에 나오는 스위츠를 사 먹으며 여행했던 에피소드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는 유명한 광고 문구가 떠오르고 내가 여행하는 것처럼 기쁘고 설레는 장면이었다. 두 모녀에게도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단다. 이 부분에서는 찡한 감동이 일었다.

 



무슨 일이든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것이다. 번역하는 일도 그렇지 않을까. 오랜 시간 몰두할 수 있는 정신력과 인내력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더구나 혼자서 하는 일이니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견뎌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을 30년 넘게 오로지 한 길을 가면서 인정받는 번역가가 되었다는 것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비결이 있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읽어나갔지만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책을 읽고, 책을 번역하는 게 직업이다. 동종 업계의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연중무휴였다.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도 바로 노트북을 펴고 앉았다. 마감에 쫓겨서도 아니고, 생활비를 벌어야지 하는 압박감에서도 아니었다. 긴 세월 하다 보니 그냥 그게 직업인 동시에 취미 생활로 굳어졌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만큼이나 재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번역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P176)

 



외국어 번역을 해야 하니 책 한 권 뚝딱 읽을 수 있는 실력이면 된단다. 그다음으로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 중요하다. 돈을 많이 벌긴 어렵지만, 경력이 책이 되어 쌓이는 좋은 직업이라고 했다. 사실 번역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칠 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일반적인 계산방식으로는 계산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권남희 번역가의 말처럼 그저 좋아서 하다 보니 취미가 되었고 직업이 되어 전문가가 되는 이런 과정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가가 비결이라면 비결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연중무휴라니. 여행도 가야 하고 놀고 싶기도 할 텐데 어떻게 그렇게 일만 하며 살 수 있을까. 전에 어떤 유튜브 채널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매사에 무엇이든 숙제가 아니라 축제처럼 즐길 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한때는 절실했을 때도 있었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취미처럼 하다 보니 30년 베테랑 번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힘들겠다 싶을 만큼 번역은 그의 인생 자체라고 생각되었다.

 



아무리 취미처럼 하는 일이라도 그에 대한 대가가 따르지 않는다면 계속하기 힘들 것이다. 번역을 하고 난 다음 그 수입 즉, 번역료는 어떻게 책정되는 것일까. 보통 매절 계약이 유리하다고 한다. 원고지 장당 얼마의 작업료를 뜻한다. 다른 번역가의 책에서도 단골처럼 나오는 주제는 번역료를 제때 주지 않아서 마음 고생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그런 출판사와는 다시는 일 안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도 나온다. 하지만 감정 문제, 돈 문제를 떠나서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 때가 있는데 그후로는 출판사와의 관계가 잘 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번역료를 받아내기 위해서 꾀를 내어 시도했다는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재미있으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든다. 어느 업계든 수고한 대가를 제때 정확하게 정산하여 일하는 사람의 의욕을 꺾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랜 세월 동안 한길을 걸으며 딸 정하를 키우며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한 모습도 보기 좋았다. 번역가를 로망으로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많은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내가 작게 느껴졌다. 이렇게 늦었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오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런 걱정 하기 전에 그냥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한 가지라도 해 보자고 나를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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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한 작가라고 해서 모두 다 글을 뛰어나게 잘 쓰는 문장가는아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분명한 메시지는 전달한다. 이들의 글은교양인이나 문학 비평가를 겨냥한 글이 아니다. 사촌이나 농사꾼,
직장 동료, 이웃, 자영업자, 그리고 투표권이 있는 아무개에게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쓴 글이다. 평범한 사람을 대상으로 설명하는 글을 쓰려면 스토리텔링 기술과 명료성,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는 능력 등 다양한 재능이 필요하다.  - P41

좋은 글은 누구보다 그 글을 쓴 작가를 놀라게 한다. 그런 예로나는 레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가장 좋아한다. 톨스토이는 처음에 간통을 규탄하는 소설을 쓸 계획을 세우고, 간통을 저지른 비호감 주인공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써나가면서 주인공 안나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됐고 결국 안나를 사랑하게 됐다. 그리고 100년 후 그의 독자들도 안나와 사랑에 빠졌다.
공감은 경멸을 사랑으로 바꾼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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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7-25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2쪽의 내용을 저도 알고 있었어요. 워낙 유명한 얘기여서요.
만약 불륜을 비판하는 소설을 썼더라면 명작이 되지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소설에선 약자가 안나, 거든요. 작가는 약자의 편에 서야 하는 거죠. 오히려 사회적 체면, 명예 등 때문에 이혼을 해 주지 않는 남편, 안나가 아들을 만날 수 없게 만든 안나의 남편이 비판의 대상이 되지요.
 

안네는 안락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 걸인의 삶을 이해하는지 궁금해하며 이런 희망을 전했다. "모두가 적당한 때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당장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간다면 얼 - P37

마나 멋질까요." 그리고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도 제안했다.
"당신이 줘야 하는 걸 주세요. 우리는 언제나 뭔가를 줄 수 있어요.
아주 작은 친절한 행동 하나라도 말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세상에는 방과 재물, 돈과 아름다움이 넘칩니다. 신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충분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으니까요.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당장 그것을 좀 더 공평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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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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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작가의 산문집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은 지 12년 만에 이 소설을 읽었다. 내가 힘든 시절에 읽었던 책이고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가족사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이야기라 뭉클하고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당시에 메모한 노트를 들춰 보았다. 작가의 글에서는 어둡고, 쓸쓸하고, 배고프고, 그립고, 외롭고, 억울하고등등 이런 느낌이 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또 농촌에 살면서 느끼는 소박함이나 자연 속에서 얻는 충만한 행복감도 들어있다는 나름의 감상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나를 감동케 했던 말은 작가는 깨끗하고 환한 방에서는 탄생하지 않는다, 습하고 어둡고 쓸쓸한 그런 방이 작가의 영혼으로 태어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했던 말이다. 이 말은 나에게 엄청난 용기를 주었다. 나도 언젠가는 작가가 될 것이라고 희망을 품었고... 작가가 되었다. 정말 신기하다. 사설이 길었다. 공선옥 작가의 소설을 이제야 접한 것을 반성한다.

 



이 작품은 80년 광주, 청춘들의 아픈 이야기이며 우리 시대의 슬픈 역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수선화 멤버 진만이, 승규, 만영이, 태용이, 승희, 정신이, 화자 해금이, 경애, 수경이, 이렇게 아홉 명이 펼치는 아픈 스무 살 시절 이야기다. 한창 젊음을 발산하고 꿈과 열정으로 모든 걸 태워버릴 수 있는 나이에 그들 앞에 닥친 상황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곧 두려움으로 바뀐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 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P76)

 



수경이가 하는 말이다. 이 글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해금이는 매사에 좀 무디고 집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했다. 경애를 따라 성당에 갔다가 의도하지 않게 수선화 멤버가 되고, 지금이 계엄령 상황에 있다는 것도 늦게야 알아차린다. 유일한 친구 경애를 잃은 뒤 수경이는 크게 상심하고 몸져누웠다.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너만 난리냐고. 아픈 수경이 문병을 온 친구들에게 수경이 엄마는 냉대하고 쫓아내다시피 한다. 결국, 경애의 뒤를 이어 수경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승희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죽음, 아빠 없는 아이를 낳고, 가슴 떨리는 사랑의 감정을 경험하는 등 여러 사건이 그들을 에워싼다. 해금이와 친구들은 절망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우정을 나누고 민중을 압박하는 시국에 대항한다. 해금이도 이 분위기에 동요되고 자각하고 행동을 취한다.

 



빛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는 거, 아름다움은 슬픔에서 나온다는 거, 모든 행복은 고통 뒤에 온다는 거. 진짜 빛이 있고 진짜 아름다움이 있고 진짜 행복이 있다면 말야.”(p199)

 



모든 오만한 자들이, 모든 무뢰배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까지, 견디고 견뎌서, 그 견디는 힘으로 우리가 아름다워지자고, 왜냐하면 모든 추함은 모든 아름다움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에서 출발한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에, 동물적 본능의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 때문이라고, 동물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의 과정이야말로 진보의 역사라고, (중략) 오늘, 저 무뢰배의 오만이 횡행할 수 있는 이 야만의 구조, 이 동물적 상황을 나는 견뎌야 한다. 저항하기 위해 견딜 것, 아름다워지기 위해 지금은 견딜 것.(P241)

 



그러나, 모든 좋은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행복이, 우리의 청춘이, 우리의 인생이, 우리 인생의 모든 환한 것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이 세상에 슬픔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으므로, 슬픔은 생겨나는 것이다. (p248~249)

 



중학생 시절 어느 날, 둥근 철모를 쓴 군인들 무리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간 적 있다. 그 후 몇 년이 흘러 직장인이 되고 나서 그 현장에서 명령을 수행한 적 있다는 남자 직원의 말을 듣고 섬뜩한 적 있다. 그 날 군인들은... 그래서 그랬구나. 권력을 앞세워 방송과 언론을 차단하고 무고한 시민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권력 앞에서는 희생이 따라야만 하는 걸까. 무거운 마음 지울 길 없었다. 작가는 진솔한 체험을 바탕으로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표현하며 작품 활동을 해 왔다. 이 책의 제목은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제목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중에서

 



그 시의 일부다. 이 책 주인공들이 살아내야 했던 가장 예뻤을 때잔혹했던 스무 살의 삶과 절묘하게 닮았다. 이 아픈 역사를 젊은 시절에는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30년 만에 썼다고 한다. 거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이고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빌어다 쓴 것인데 이 역사를 모르는 어린 작가는 작가님 상상력이 대단하시네요.” 라고 해서 놀랐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공선옥 작가는 2000년대 용산이 80년 광주라고 했단다. 시대는 흘렀고 세상은 좋아졌지만, 아직도 어딘가에 폭력은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또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작가이고 싶다라고. 불편한 책을 멀리하려는 독자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 같아 뜨끔했다. 다양한 층의 독자가 읽고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행복한 작가와 행복한 독자만 있는 세상은 오히려 비극에 가깝다. 독자를 행복하게만 만드는 글은 설탕처럼 해롭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불화가 있어야 한다. 내 글을 읽고 불편한 사람이 있는 편이 작가로서 행복하다.”

(출처: 채널예스-80년 광주, 아픈 청춘들의 이야기를 사반세기 만에 그리다 - 소설가 공선옥

반세기를 가슴에만 품어둔 이야기가 소설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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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23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저도 읽었는데 독후감을 올리지 않았네요. ㅎㅎㅎ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공선옥 짱!

모나리자 2024-07-23 16:47   좋아요 1 | URL
아, 읽으셨군요! Falstaff 님, 워낙 다독하시는 분 같은데 댓글과 공감 감사합니다!!
맞아요. 글 잘 쓰시는 작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우기 사회 문제를 소재로 끌어내어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어서요...
장마로 습하고 더운 날이 계속되네요.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한 여름 나시길 바랄게요.^^

2024-07-25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가 그늘에서만 살던 번역가가 작가가 되어 세상에 나오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백댄서를 하던 김종민이 앞으로 나와서 코요태가 되고 예능인이 된 것처럼. 그러나 김종민이 다시백댄서를 하는 일은 없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번역가란직업을 사랑하며 원서와 사전과 고군분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145

「번역에 살고 죽고』가 출간됐을 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많은 메일이 왔다. 인터뷰는 당연한 것이고, 졸업한 이후소식이 끊긴 중, 고등학교 동창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하더니 통번역 대학원이나 대학의 강연 요청도 들어왔다.
요청받는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주제넘게 나섰다가 가문의 수치가 될지도 모른다. - P149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더불어 사는 세상이니 하는 말에서 자유로워지자, 지구의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 나이를 먹어서 뻔뻔해진 것인지해탈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소한 사람의 도리를하고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세상을 왕따시키며 살고 있다. 물론 외롭다. 외롭지만, 편하다. 편하지만, 찜찜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잠자리에 들며 혼자 반문하지만, 다음 날 해가 뜨면 또 찜찜하지만 편한 외로움을 선택하고 있다. 아, 이렇게 고운 독거노인이 돼가는 건가.
- P169

책을 읽고, 책을 번역하는 게 직업이다. 동종 업계의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연중무휴였다.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도 바로 노트북을 펴고 앉았다. 마감에 쫓겨서도 아니고, 생활비를 벌어야지하는 압박감에서도 아니었다. 긴 세월 하다 보니 그냥 그게 직업인 동시에 취미 생활로 굳어졌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만큼이나 재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번역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 P176

화사한 봄날에 긴자 역에서 브릭스퀘어광장의 에쉬레까지 걸어가서 스위츠를 사 먹은 기억이얼마나, 얼마나 좋았던지. 정하랑 "우리 살다가 언제 제일행복했더라?" 하는 얘기를 나눌 때면 둘 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뽑는 것이 그날이다. 어느 날, 야후 재팬에서우연히 본 살인범의 기사가 모녀의 최고로 행복한 날로이어지는 드라마가 되다니. 삶은 그래서 모든 순간이 복선일지도 모른다. - P185

구체적인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분은 "너는 나다니는 직업이 좋다. 기자를 하면 딱 안성맞춤이야"라고 했다.
좋은 미래도 나쁜 미래도 딱히 얘기하는 것도 없고 귀에걸면 귀걸이식의 점사 몇 마디 하고 끝이었다. 이미 ‘나다니는 직업, 기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날 점은 꽝이었다.

그러나 나다니는 걸 싫어하고, 부끄럼도 많이 타고, 전화 기피증이 있는 내게 기자는 시켜줘도 못 할 직업이긴했다. 그곳에 다녀온 몇 달 뒤 나는 번역을 시작하게 됐고,
평생 나다니지 않는 직업을 갖게 됐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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