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스 -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도시의 역사로 보는 인류문명사
벤 윌슨 지음, 박수철 옮김, 박진빈 감수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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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서 자라서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는 시골이 싫었다. 답답했다. 무엇을 하려해도 할 수 없는 기회가 박탈된 곳이 시골이었다. 그래서 기어코 도시로 도시로 가려했다. 도시는 나에게 기회가 있는 곳이다. 그 기회는 대도시로 갈 수록 더 커진다. 수원에서 살았을 때, 나는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을 보러 갔고, 국립 중앙박물관 주변을 산책삼아 걸어보기도했다. 오페라와 콘서트를 즐길 수 있는 축복의 장소가 도시였다. 다락방 '교사와 수업 사이'의 두번째 책으로 메트로폴리스를 선택했다. 책을 받아들고 650페이지라는 두께감이 무겁게 밀려왔다. 그러나 재미 있는 책이라면 두께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벤 윌슨이 한국의 도시에 대해서 서술한 부분이 등장하면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벤 윌슨은 송도 신도시를 최첨단 도시로 소개했으며, 도시 녹지를 복원하는 훌륭한 사례로 서울의 청개천을 소개했다. 송도 신도시는 어느 가정의 수도꼭지가 잠겨있지 않은지도 파악할 수 있는 도시라며 긍정적이기 보다는 다소 어두운 미래도시를 보는 듯이 서술했다. 반면 청개천 복원에 대해서는 도시 열섬효과를 낮추는 긍정적인 성과를 거둔 사례로 소개하고 있다. 자원의 낭비를 막는 스마트한 도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전시행정의 대표적인 사례인 청채천 복원공사를 긍정적으로 소개한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청개천에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 모터를 돌려 한강물을 끌어들인다. 청개천 바닥은 흙이 아니라 돌이 깔려있다. 전형적인 인공하천이다. 이것을 어찌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도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기회의 장소라는 이미지와 함께 범죄와 공해라는 이미지가 같이 떠오른다. 도시라는 공동체는 다양한 인간들이 모여 만든 집합체이기에 기회도 있지만,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도 짙을 수밖에 없다. 벤 윌슨은 "도시에는 위생처리가 필요한 만큼 오물도 필요하다."라고 말하며 성인용품점, 도박장, 스트립쇼장 등등이 필요악임을 서술하고 있다. "도시는 유토피아인 동시에 디스토피아"이다. 그렇다면 디스토피아를 없앨 수는 없을까? 이를 없애려한다면 미국에서 제정한 금주법이 오히려 마피아 세력을 확대시킨 결과를 낳았듯이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강화시킬까?

  도시의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없애려한 도시계획이 있었다. 지금의 파리를 만든 오스만의 도시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오스만의 도시계획에 대한 평가는 서로 대립적이다. 구불구불하고 도시의 오염물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는 파리를 오스만은 방사선의 깔끔한 도시로 개혁했다. 파리의 디스토피아적 요소를 없애 지금의 아름다운 파리를 만든 오스만의 도시계획을 비판할 이유가있을까? 그런데, 시인 샤를 발레트는 오스만을 "잔인한 파괴자"라고 말했다. 파리의 조그만 산들을 없앴다. 그 산에 있었던 유적들도 같이 없어졌다. 고풍스러운 파리는 획일적인 파리로 바뀌었다. 오스만의 도시계획은 급속한 산업화 속에서 많은 유물과 공동체가 파괴된 우리의 도시들과 비슷하다. 오스만에 대한 평가는 우리의 도시팽창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연결되어있다. 오스만의 도시계획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도시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인류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도시도 많다. 그러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 도시들이 전쟁의 포화속에서도 다시 살아난다. 1945년 포로 수용소의 독일 장교는 "쾰른에는 여러번 분산 명령이 내려졌지만, 여전히 국민들은 한때 '집'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잡석 무더기로 되돌아 간다."고 했다. 자신의 도시, 삶의 터전에 대한 회귀 본능은 불가사의한 힘을 부러일으킨다. 죽음을 목도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삶의 터전인 도시로 회귀한다. 그래서 도시는 빠르게 재건된다. 

  불가능한 부활을 이룬 대표적 도시가 있다. 바르샤바가 바로 그 대표적 도시이다. 히틀러는 바르샤바를 철저히 파괴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도시 건물 하나하나를 파괴했고 사람들을 포로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런데, 생명이 위태로운 그 순간에도 바르샤바인들은 도시가 파괴될 것을 예측하고 문서를 대조하고 역사적 건물도면을 남겨두었다. 이러한 도시 재건을 할 수있는 자료를 암호화하여 외부에 반출하거나, 수도원 혹은 포로 수용소에 숨겨두었다. 전쟁이 끝나자 도시를 재건하기기 위해서 바르샤바인들은 문서, 엽서, 사진, 도면, 그림등의 모든 자료를 수집해서 그들의 바르샤바를 재건했다. 생명이 위급한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터전을 기억해두고, 전쟁이 끝나자 예전 모습대로 재건하려는 그들의 노력은 불가사의하면서도 경의감을 불러 일으킨다. 도시의 생명력은 강했다. 그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인간이었다. 


  도시의 삶에 젖어 있으면서도 인생의 말년은 시골에서 보내고 싶다. 그러나 나이가들수록 병들어가는 몸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큰병원 가까이에 살아야하기에 그 소망은 소망에 그칠 수밖에 없다. 도시는 디스토피아이면서 유토피아이기에 도시를 떠나고 싶지만 도시를 떠날 수없다. 전원생활이 아름다워보이는 것은 도시를 떠날 수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기에 더욱 아름다워보일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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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가까운 프랑스 이만큼 가까운 시리즈
박단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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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화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라는 책을 통해서 프랑스를 알았다. 그후로 프랑스의 교육을 소개한 책들을 읽으며, 자유, 평등, 우애라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이 사회 곳곳에 스며든 이상적인 나라로 프랑스를 인식했다. 우리의 현실이 고단할수록 프랑스는 이상적인 나라로 다가왔다. 군사정권시기 프랑스로 망명했던 홍세화가 보기에 프랑스는 자유로운 이상형의 나라였다. 주입식교육, 입시교육이 판을 치는 대한민국의 교사에게는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프랑스의 교육이 이상적인 교육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코로나19 펜데믹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나라에 비해서 결코 뒤쳐지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을 몸으로 체감했다. 그럼,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프랑스도 달리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 역사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어느 학자는 중세시기 위그 카페 왕조에서 찾기도하고, 어느 학자는 프랑크왕국에서 찾기도한다. 또 어떤 사람은 로마와 맞서사원 골족의 베르생 제토릭스에서 찾는다. 베르생 제토릭스를 모델로 만든 만화가 '아스테릭스'이다. 프랑스인들의 역사는 시작부터 논쟁꺼리다. 

  그러나, 우리에게 프랑스 역사의 진정한 시작은 프랑스 대혁명이다. 그 이전의 프랑스 역사는 보통의 주변 나라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은 프랑스만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주변 여러 나라는 물론이고,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이념은 아직도 지구촌 사회가 도달해야할 과제이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이 잘 구현된 나라 일까? 내가 읽은 책들에서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이 녹아있는 나라였다. 똘레랑스의 나라이며, 모든 프랑스인들이 바캉스를 갈 수 있도록 국가가 신경써주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들여다본 프랑스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이념이 현실에 잘 반영된 나라이기 보다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서 보다 치열하게 전진하는 나라였다. 

  프랑스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중에서 프랑스가 당면한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히잡 사건'이다. 학교에서 히잡을 썼다는 이유로 학생을 퇴학시킨 것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에 뿌리내린 "정교분리 원칙"을 예외없이 적용해야한다는 주장과 "똘레랑스" 정신을 발휘해야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저자 박단은 학교에서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를 제기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프랑스에서 "똘레랑스 정신"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무슬림의 폭동과 자생적 IS 조직원들이 벌인 테러사건 이후, 프랑스는 피부색과 종교의 차이에 똘레랑스를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 아니, 그 이전부터 무슬림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곪아 터진 것이다. 종교와 피부색의 장벽에 프랑스의 삼색기는 가로막혀있었다. 그들이 피부색의 장벽을 넘지 못한다면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프랑스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것이 1944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몰랐을 것이다. 정식 의회를 거쳐서 참정권이 여성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 법률 명령에 의해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공화주의자들에게 여성은 가톨릭 신부의 영향을 받아 왕당파를 지지할 염려가 있는 어리석은 존재들이었다. 진보적 인사라해서 모든 분야에서 진보적이지는 않다. 혁명중에서 가장 힘든 혁명은 자신을 혁명하는 일이다. 혁명하기 가장 힘든 분야는 생활속 혁명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정치적 혁명이라면, 지금의 프랑스는 생활속 혁명을 해야한다. 생활속 혁명은 일회성 혁명이 아니라, 지속적인 혁명이어야한다. 그래서 생활 속 혁명이 힘든 것이다 

  프랑스의 역사 속에도 흑역사가 있다. 나치에 협력한 비시 프랑스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전쟁의 재앙에서 프랑스를 구했다며 패탱이 이끈 비시 프랑스를 농민과 부르주아는 지지했었다. 그렇게 된다면, 프랑스는 전범국가가 된다. 그에 비해서 드골이 이끈 자유 프랑스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면 프랑스는 승전국이된다. 역사는 기록하는자의 것이고,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자신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는 가는 프랑스의 오늘을 결정하고, 미래의 방향을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가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구현할 자격이 있는 국가인지, 아닌지도 결정지을 것이다. 


  '이만큼 가까운 프랑스'라는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나와 같이 프랑스에 대한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만 있는 사람에게는 프랑스에 대한 균형잡힌 지식을 알려주는 소중한 책이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도 바로잡아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와 조선과의 만남이다. 보통 병인박해로 인해서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것은 프랑스와의 첫만남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만남은 헌종시기까지 올라간다. 기해박해 시기에 조선은 프랑스 신부 3면을 처형했다. 이에 대해서 프랑스는 군함 2척을 이끌고 조선에 왔으나, 한강입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 새만금 근처 고군산도에서 강풍과 암초로 난파당한다. 만약 1846년 프랑스군과 조선정부의 만남이 이뤄졌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일본에 의해서 강제 개항되지 않고, 프랑스에 의해서 개항을 이뤘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세도정치의 모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조선은 현명한 대응을 했을까? 일본보다 먼저 개항해서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ps. 프랑스 역사에서 관직매매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절대왕정 시기, 왕실은 관직매매를 통해서 왕실제정을 확충하고 대영주 귀족을 견제할 수 있었단다. 우리 역사에서 관직 매매는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국사의 상식을 가지고 프랑스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특정 국가의 사례가 타국에서는 예외적인 사례 일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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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스페인 이야기 37 - 천의 얼굴을 가진 이베리아 반도의 뜨거운 심장
이강혁 지음 / 지식프레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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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가를 거닐다가 스페인에 관한 책을 골랐다. 프랑스와 영국에 관한 책에 비해서 스페인에 관한 책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스페인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적은 나로서는 산책하듯이 스페인을 거닐 수 있는 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스페인 이야기 37'을 선택했다. 스페인은 어떤 나라일까?


  스페인은 모순이 가득한 나라이다. 첫째, 하나의 나라이 면서 4개의 언어가 공식언어가 존재한다. 카탈루냐, 바슼, 갈리시아, 카스티야라는 4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하나의 나라라니... 그럼 우리가 스페인어라고 부르는 언어는 도대체 어떤 언어라는 말인가! 보통 스페인어도 카스티아어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1국가 1민족 1언얼르 당연시하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생소하고 놀라운 일이다. 우리의 당연함이 타인에게는 생소함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더올린다. 

  둘째, 다양함 속에서 획일성을 추구하는 나라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로마인, 게르만족, 무슬림이 쳐들어왔다. 레콩키스타를 통해서 로마 카톨릭 세력이 재정복을 완성하고 나서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이벨리아 반도가 로마 카톨릭으로 획일화 되기 시작했다. 신항로를 개척하며 밖으로 나아가는 스페인이 내부에서는 획일성을 추구하는 모순된 일이 벌어졌다. 종교와 민족이 다른 스페인 사람들을 로마 가톨릭으로 묶으려했으나, 결국, 로마 가톨릭을 선택하고 부유함을 포기하는 꼴이 되었다. 하느님은 사랑을 이야기했으나, 스페인은 성인 '산티아고'의 이름을 외치며 신대륙에서 인디오를 학살하는 군대의 사기를 높였다. 

  셋째, 승리하는 시대와 패배하는 시대의 교차점 펠리페 2세! 스페인 절대왕정을 이끌었던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쇠락의 주점이라는 사실이 모순적이지 않은가?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패배하면서 그 이전을 칼롤로스 1세, 펠리페2세의 '승리하는 스페인'이라하고, 그 이후 합스브르크 왕가 시대를 패배하는 스페인이라고 한다. 무리한 영국 침공과 무리한 로마 가톨릭 정책으로 해가지지 않는 제국 스페인은 쇠락하고 있었다. 특히 유대인을 비롯한 이슬람인들을 추방하고 종교 재판으로 화형에 처하면서 금융과 상업 및 제국 통치에 필수 인력들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외화내빈의 스페인! 내실을 다지지 않고 화려함만을 추구하는 그들은 결국 패배하는 시대를 맞이한다. 그것도 너무도 빨리.....

  넷째, 유럽이라는 선진지역에 위치하지만, 1975년까지 프랑코라는 독재자에 의해서 통치된 나라이다. 독재자 프랑코는 마드리드가 위치한 카스티야지방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했지만, 바로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 지방은 탄압을 했다. 이것은 카탈루냐 지방이 분리 독립을 외치는 씨앗이되었다. 국민을 갈라치기하는 모습은 박정희와 신군부가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영남을 발전시키면서도 호남을 소외시킨 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에 특혜를 주었던 독재자 프랑코! 그는 로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천국에 갔을까?


  스페인에 대한 기초 지식이 부족한 나와 같은 사람에게 무척 유용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스페인이 친밀해졌다. 코로나 19 펜데믹이 끝나면 가보고 싶은 나라이다. 그런데, 이 책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현재 남부의 도시 카디스는 페니키아인이, 동부의 도시 카르타헤는 카르타고인이 건설했다."(89쪽)라고 적어 놓았는데,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도시국가가 카르타고이다. 그렇기에 페니키아와 카르타고를 분리해서 서술할 필요가 없다. 저자에게 직접 물어볼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다. 저자가 대전에 스페인어 교사로 있다니, 기회가 된다면 만나서 스페인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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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품격 - 작은 섬나라 영국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박지향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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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라고 해서, S대를 나왔다고 해서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노예의 눈으로 강대국을 위한 변명을 하는 학자들을 우리는 많이 본다. 나의 대학시절이 생각난다. 부족한 서양사에 대한 지식을 마음껏 충전하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서양 근대사'를 수강했다. 영국에서 학위를 한 교수님이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을 교재로 서양 근대사 수업을 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자유무역과 서구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영국을 무던히도 사랑했다. 동양에서는 자본주의의 싹이 보이지 않을 때 영국에서 시작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세계를 선도했다는 내용의 강의가 무척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동양에서도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고 항변하자, 그 교수는 쌩뚱맞은 답변을 했다. "그렇다면 상투틀고 살아야지." 정말, 어이없는 답변이었다. 그런데, 대학에서 만난 서양사 교수와 너무도 닮은 견해를 가진 학자의 책을 만났다. '제국의 품격'이라는 책을 읽으며 대학시절 나를 무척 불편하게 했던 그 교수가 생각났다. '제국의 품격'이라는 책은 어떤 책이길레 나의 불편함이 그리도 켰을까?


1. 영국이 강대국이 되기 위해 벌인 비도덕적인 일에 눈감다.

  대학시절, 같이 '서양근대사' 수업을 같이 들었던 타과생이 교수에게 질문을 했다. "왜? 서양에서는 도덕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지 않나요?"라는 타과생의 질문에, 그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나는 아편전쟁을 비롯해서 영국이 저지른 비도덕적인 전쟁을 열거하면서 비도덕적인 서양 제국주의의 모습을 직면하도록 했다. 그 교수는 귀찮다는듯,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답변을하지 않았다. 

  '제국의 품격'에는 영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저지른 잘못을 직시하고 있지 않다. 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섬나라 영국은 자본이 많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시절, 영국의 가장 큰 산업을 꼽으라면, 단연 해적질을 들 수 있다. 1579년 스페인 보물선을 약탈해서 26톤의 은괴를 약탈했으며, 보물선의 선장이 은괴를 빼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기 위해서 영국의 해적 드레이크는 보물선 선장에게 약탈품 목록을 써주기까지 했다. 저자는 이를 '영국 신사다운 해적'이라고 표현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신사의 나라가 아니라, 해적의 나라가 어울릴 것이다. 타국의 보물을 훔쳐 부를 쌓고, 해적질을 잘한 드레이크에게 기사작위를 주었고, 심지어는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쳐들어오자, 드레이크가 영국해군을 이끌고 무적함대에 맞서싸운다. 해적과 한몸이되거 도적질로 성장한 나라가 영국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적질을 저자는 비판했어야하지 않을까? 그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영국을 비난하지 않는다. 스페인도 아메리카 원주민을 착취해서 부를 쌓았기에 떳떳하지는 않다. 그렇다하더라도 도둑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도 엄연한 도둑질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면직물 산업에서 시작되었다. 실을 뽑고, 이 실로 면직물을 만드는 과정에 기술혁신이 이뤄지면서 산업은 혁명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기술혁신을 이룬 영국인들의 놀라운 힘을 칭찬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영국의 기술혁신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대해서 침묵한다면 우리는 약소국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영국산 면직물보다 더 좋은 면직물이 있었다. 바로 인도산 면직물이다. 무굴제국의 황제가 공주에게 살결이 다 비치는 옷을 입었다고 나무라자, 공주는 옷감을 세겹이나 둘렀다고 변명했다. 그정도로 영국산 면직물은 품질이 좋았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질좋은 면직물을 짜내는 영국 직공들의 엄지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손가락이 잘려나간 직공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붕괴했다. 간디가 붕괴해버린 인도의 면직물 산업을 다시 일으키려 스스로 물레를 돌려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도를 침략하는 영국에 타격을 주면서 인도의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인도인이 필요한 옷감을 스스로 생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서술해야만 한쪽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제국의 품격'에는 영국의 기술혁신을 찬양하는 내용은 있었도, 인도의 면직물 산업을 붕괴시켜 영국의 소비시장으로 만들려 잔인한 짓을한 영국 동인도회사의 만행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진실을 적지 않는 것도 진실을 왜곡하는 일임을 우리는 잘알고 있다. 

  영국이 신사의 나라이기 보다는 깡패의 나라였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아편전쟁'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타국에 아편을 판매하고, 이를 단속하는 청나라에게 우수한 무기로 위협하며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킨 영국 신사의 행위는 절대 신사적이지 않다. 물론, 도덕적이지도 않다. 만약, 약소민족으로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우리역사를 몸으로 알고 있는 학자라면, 대영제국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책에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영국과 중국이 맺은 통상조약은 영국에게만 독점적 특권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로 향한 개방 경제 체제의 일환이었다."-132쪽


  아편을 단속하는 청나라의 정당한 행위를 트집잡아 일으킨 전쟁에 대한 비판은 없고, 오히려 영국이 중국을 개방 경제 체제로 이끌어냈다는 찬양은 나의 눈을 의심케했다. 철저히 제국주의 영국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면, 철저히 제국주의 일본의 시각에서도 역사를 바라보지는 않을지 걱정이 밀려왔다. 


2.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는 정당한가?

  우리의 관점에서 인도를 이해하면 인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인도는 그들을 200년간 식민지배한 영국과도 웃으며 헤어진 나라이다. 일찍이 완벽히 통일된 인도가 성립된 것은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으며 민족적 각성이 일어나면서 하나의 인도인이라는 관념이 생성되었다. 한반도에서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고 오랫 동안 중앙집권적 국가 속에서 살아온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인도에서 일어나는 근본적 차이가 여기에 있다. 민간인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397명이 죽고 1200명이 다친 암리차르 학살 사건 (Amritsar massacre) 을 저지른 영국에게서 독립하고서도 영연방에 남아있는 인도가 우리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대영제국 하의 자치를 주장하는 인도의 민족주의자과 일제 강점기 일제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자치를 주장한 이광수와 같은 친일파를 비교하면 인도와 한국의 역사인식에 극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도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와 다르다하여도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은 것이 행복할리 없다. 이것은 세계 모든 약소민족의 공통된 역사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일제 36년이라는 혹독한 식민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인도의 역사를 서술한다면 영국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는 인도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해야하지않을까? 

  '제국의 품격'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을 철저히 부서버린다. 우리가 세계사교과서에서 배운 세포이 항쟁(1857년 ~ 1858년)을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반란"으로도 불릴 수 있고, "항쟁" 혹은 '제1차 독립전쟁"으로도 불릴 수 있다. 한국인 교수가 쓴 '제국의 품격'이라는 책에서는 어떤 용어를 사용했을까? 놀랍게도 "반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하면서 저지른 잔혹한 일들에 대해서는 일체 서술하지 않고, 영국의 식민지배로 인도가 근대화되었다는 내용의 서술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인도인들의 말을 인용하며 인도인들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고마워하고 있다는 서술을 강조해서한다. 그렇게 영국이 인도에 잔인한 식민지배를 하지 않았다면 왜? 세포이항쟁이 일어났는지 묻고 싶다. 피식민지인들에게는 그 어떤 제국주의 국가도 선한 존재일 수 없다. 

  저자 박지향은 인도인이 왜? 세포이 항쟁을 일으켰는지를 먼저 서술하기 보다는 영국 군인과 가족이 죽임을 당한 칸푸르 사건을 먼저 서술하며 여자와 아이를 학살한 세포이들의 잔인함을 서술한다. 이러한 서술은 암리차르 학살 사건을 서술하면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세포이들이 잔인하고 야만적이기에 그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알맞은 서술방식이다. 여기에서 더 나가서 박지향은 친절하게 영국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서술을 한다. 


  "영국인들이 느꼈던 공포심의 상당 부분은 그들이 사적으로 잘 알고 지냈을 뿐아니라 절대적으로 신뢰하던 원주민들이 어느날 아침에 갑자기 돌변하여 몇 시간 전만해도 자신들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던 아이들의 부모들을 난도질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228쪽


  박지향의 서술을 따라간다면 인도인들은 영국인들 앞에서는 상냥하지만 가슴에 칼을 숨기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글을 뒤집어 읽어보면, 종교에 심취하고 온순한 성격의 인도인이 영국인들 앞에서 굴종하며 가슴속에 비수를 품을 수 밖에 없는 영국의 간악한 식민지배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서술이기도하다. 자신들의 땅을 침범하여 자신들의 부를 빼앗고, 그들의 힘에 굴종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인도인들의 분노가 세포이 항쟁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를 박지향은 알지도, 서술하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세포이 항쟁에 대한 평가도 박하게 한다. 


  "이 사건을 인도민족운동의 효시로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20세기에 몇몇 인도인이 그렇게 믿고자했지만 세포이 반란은 결코 독립을 위한 국민적 투쟁이 아니었다."-227쪽


  전국적으로 일어난 세포이 항쟁은 무굴제국의 황제를 구심점으로 본격적인 반영운동을 하려하였다. 그러나 무굴제국 황제는 인도인의 구심점이 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영국의 최신식 무기에 세포이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박지향은 인도의 토호국이 영국편에서 세포이를 진압한 사실을 근거로 세포이 항쟁은 '인도 민족 운동의 효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직 완벽한 '인도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기에 박지향의 주장이 일면 타당해 보기이기도하지만, 세포이 항쟁이 '효시'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하찮은 운동은 아니다. 영국의 용병이 영국이 지급한 총을 들고 영국과 맞서 싸웠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에게 민족적 자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지향은 철저히 영국인들의 시각에서 인도를 바라보느라, 인도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지 못하고 있다. 박노자가 '제국의 품격'이라는 책이 나온 것을 한탄한 이유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식민지배의 경험이 있는 나라에서 제국주의 국가를 찬양하는 책이 출판되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박지향은 인도 독립운동의 상징인 간디도 비판한다. 간디가 근대적 산업과 근대 국민국가와 서양 문명을 거부하고, 근대적 기술을 비판했다는 것이 박지향의 간디 비판 근거이다. 특히 간디가 근대적 기술을 비판하면서도 '사진을 가장 많이 찍힌 당대정치가'라고 간디를 비판한 부분은 코미디로 느껴졌다. 마치 영국이 저지른 부도덕한 전쟁을 비판하자, "그럼, 상투틀고 다녀야지"라고 말한 K교수가 떠올랐다. 간디가 사진을 찍은 것도 아니고, 기자들에게 사진이 찍힌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박지향의 간디비판은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박지향은 한발자국 더 나가서 인도가 힌두-이슬람으로 분리 독립한 것도 간디의 책임인듯 서술했다. 특히 간디가 힌두-이슬람 무력 충돌을 막지 못했다면 그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한다.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서 단식하다가 힌두 극단주의자에 의해서 목숨을 잃은 그를 비판하는 장면은, 분단을 막기 위해서 38선을 넘으며 통일 조국을 만들려 노력하다가, 친일파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백범 김구를 비판하는 뉴라이트 세력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박지향, 그녀에게 일제 식민지배는 어떻게 평가될까?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한 것과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배한 것을 오버랩시키며 식민지배를 축복으로 여길까?


3. 영국의 식민지배를 찬양하다!!

  '덜나쁜 제국주의'는 있을까? 이 질문은 '덜 나쁜 강간범'은 있을까?라는 질문과 비슷한 질문이다. 국토를 유린하고 식민지인을 노예처럼 부리는 그들을 '더 나쁜 제국주의자'와 '덜 나쁜 제국주의자'로 나누는 것 자체가 영국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저자 박지향은 "영국은 확실히 '가장 덜 나쁜 제국'이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박지향은 영국인들은 두개의 사명이 있다고 설명하다. 첫째는 인간이 사용하도록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복한 과실을 '영구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공유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영국은 탁월한 과학 기술로 무장하고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또한 의회 민주주의, 자유 선거, 기독교 윤리, 법치, 자유주의 경제체제, 집회와 표현의 자유라는 탁월한 시스템과 가치는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원주민 사회에 뿌리 내렸다고 단언한다. 박지향이 '제국의 유산,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이라는 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대영제국의 식민지배를 따라가다보면 우리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박지향은 21세기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지배를 찬양하는 '영비어천가'를 쓰고 있다. 강자의 폭력을 미화시키며 약자의 신음소리에 철저히 귀를 닫는 박지향의 무책임한 역사 서술에 깊은 한숨이 나온다. 

  영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 노스차일드와 아랍의 하심가문에게 팔았다.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의 편을 들어준다면 유대인에게도 아랍인에게도 자신의 국가를 팔레스타인에서 건국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약속을 영국이 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했다. 그결과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겨났으며, 오늘도 이스라엘 군이 팔레스타인의 집에 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있다. 이것이 '덜 나쁜 제국'의 모습인가? 인도가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독립한 것도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종교 분리 정책 때문이다. 인도에서 힌두인과 이슬람인을 등록하게 만들었다. 인도인들이 하나로 뭉쳐 영국에 대항한 세포이 항쟁처럼, 영국은 제2의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분할하여 통치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인도는 힌두의 인도와 이슬람의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했다. 그과정에서 수 백만의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지금도 인도와 파키스탄은 무력 대결을 하고 있다. 이것이 '덜 나쁜 제국'의 모습인가? 이밖에도 영국의 식민지배 유산으로 인해서 고통 받는 약소국들이 많다. 그들이 박지향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나 보다. 영국이 흘린 떡고물을 보면서 영국이 빼앗아간 떡은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식민지가 되어야만 한다면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이 가장 났다."(323쪽)라는 글을 책에 쓰기보다는 "누군가의 식민지가 되기 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자"고 말하자.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고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면,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영어를 할 수 있었다며 아쉬워하는 노예근성을 가진자들을 바라보며 느꼈던 한심함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느낀다. 이 땅의 역사학자는 다음 세대에게 식민지 노예 근성을 학습시기기 보다는 자립과 자주 정신, 독립정신을 일깨워주어야하지 않을까? 박지향에게 묻고 싶다. 



  대학시절, 서양근대사를 수강하며, K교수와 잦은 마찰을 겪었다. 나중에는 K교수가 나를 교수실로 불렀다. 서양사 교수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성공한 혁명으로 설명하기에 '문화대혁명은 실패한 운동으로 결론이 났는데 무슨 근거로 성공했다고 하십니까?'라고 질문한 나를 교수실로 부른 것이다. K교수는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논리적으로 대기 보다는, 자신을 타교수와 같이 대해달라고 했다. 타교수님은 전공에 대한 열정과 심오한 학문적 깊이가 느껴지는 분들이다. 그러나 K교수는 그러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영국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에 반대하는 주장에 철저히 귀를 닫고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했다. 토론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 공부한 K교수가 학부생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교수실로 학부생을 불러 자신을 타교수와 같은 급으로 대해달라는 어리석은 주장에 측은지심이 발동했다. 

  박지향은 대학에서 만난 K교수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제국의 품격'에서 영국의 긍정적인 면만을 서술한 이유를 서문에 "이 책은 굳이 영국의 단점을 들추려하지 않았다. '''' 이 태도는 요즘 생긴 새로운 습관이다. ..... 우선 긍정적인 면을 보고 싶다."(7쪽)라고 서술했다. 나이가 들어 심각한 보수화가 진행되었다는 고백으로 읽힌다. 강자의 장점만을 보고, 약자의 고통은 보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K교수에게 느꼈던 측은함이 느껴진다.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외눈박이 물고기가 떠오른다. 그녀가 서문에 "정년 후 한동안은 쉬고 .... 다시 책을 쓰고 싶어지면, 그땐 영국에 대한 부정적인 책을 한번 써볼까?(7쪽)" 라고 쓴 것 처럼 대영제국의 어두운면을 서술해주길 바란다. 그래야만, 외눈박이 물고기는 두개의 눈으로 온전히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ps.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있다. 영국은 16세기 왕과 신민들 사이에 일종의 '정치 계약'에 의한 관계라는 의식이 생겨났으며, 이는 홉스의 사회계약설로 이어진다. 중세 봉건제도가 "쌍무적 계약관계'이며, 홉스와 로크는 "사회계약설"을 주장했다. "계약"이라는 관념은 서구 문화의 핵심이며, 동양의 관념과는 많이 다른 그들의 문화라는 생각이든다. 

   대헌장은 1215년 만들어진 후, 16세기 까지 30차례에 걸쳐 재확인되었고 보완 발전되었다. "대헌장의 인생에는 공백기가 없었다."라는 말이 실감난다. 처음은 초라했지만, 끝은 창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른 대헌장의 인생에 공백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재산권","계약"이라는 개념이 영국을 발달시켰다. 자유무역과 안정된 의회제도, 우수한 해군력이 더해져 대영제국이 성립했다. 이점이 영국이 돋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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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BS CLASS ⓔ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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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공기의 사랑"!! 이보다 적정 사랑을 잘 표한한 말이 있을까? 사랑이 고픈 이에게 한 공기의 사랑은 가장 최적의 사랑이다. 한공기의 사랑마저 받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며 방황한다. 한 공기를 넘어 두공기, 세공기,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을 준다면 이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된다. 저자 강신주는 철학 강의를 하면서 철학의 원래 뜻이 '지에 대한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이중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수차례의 강연과 그의 저서를 통해서 강조해왔다. 이제 그 결정판이 나왔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이 바로 그 책이다. 불교철학을 기반으로 김선우 시인의 시 8편을 캐스팅해서 강신주만의 설명을 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학교 현장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사랑'이 부족해서, '사랑'이 너무 넘쳐서 발생하는 학교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교사 다락방 "독서와 수업 사이"에서 이 책을 첫번째 읽을 책으로 선정한 이유이다. 그럼, 한공기의 사랑을 맛보러 가보자.

 

1. 사랑의 매는 존재할까?

일체개고(一切皆苦)! 사람은 태어났기에 고통을 겪는다. 삶이 곧 고통이라는 이 말은 불교를 염세주의적, 비관주의적 종교로 착각하기 만들기 좋은 단어이다. 저자 강신주는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처럼, 고통 뒤에 행복을 배운다고 말한다. 한 공기의 밥을 먹으면 배고픔이 사라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고파진다. 배고픔의 고통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한 공기의 밥을 먹는다. 한 공기의 밥은 잠시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할뿐, 영원히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수많은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어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고통을 완화하면서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한 공기의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듯이 말이다.

현실은 행복과 사랑으로 넘쳐나는 천국이라 호도하지 말자! 현실을 냉정하게 보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희망과 사랑을 품자! 싯다르타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고통의 현실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그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우리는 공감이라한다. 저자 강신주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이이라면 '사랑의 매'라는 논리를 들이대며 폭력을 합리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폭력에 익숙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개발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주변에는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그리고 그 폭력을 합리화하는 논리에 나 자신도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다. 동료 교사의 고통을, 학생들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낀다면 폭력을 합리화하는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존재할 수 없다.

()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행복과 자비와 웃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 학교 현장에서 진정한 교육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감수성에서 출발해야한다는 화두를 던진다.

 

2. 지는 꽃은 가치가 없을까?

학생들 중에는 유독 청소를 싫어하는 녀석이 있다.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 ? 청소해요?"라고 묻는 학생에게 나는 말한다. "너는 어차피 배고플 텐데 왜? 밥을 먹니?" 그렇다. 우리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교에서는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표현한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소멸하는 법이다. 모든 것이 소멸하기에 모든 일은 부질없는 것이라 말한다면, 이는 지나친 염세주의이다. 변하기에, 영원하기에 우리는 지금 이순간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저자 강신주는 '조화''생화'를 예로 든다. 생화가 우리의 현실이라면, 조화는 이상화된 천국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천국을 좋아한다. 천국이라는 논리에 매몰되어 오늘을 천국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당신은 조화와 생화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조화보다는 생화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라는 말이 있다. 참다운 불교의 진리를 담고 있는 우리 속담이다. 지극한 행복만이 있어 지지 않는 꽃만이 존재하는 천국보다는 힘겹게 꽃망울이 터지더니 활짝 핀 꽃이 행복하게 하늘거리는 현실이 좋다. 그리고는 이내 꽃이 떨어진다. 떨어질 꽃이기에 지금 활짝핀 지금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애절해 보인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해야한다.

아파마데나! '올바른 자각' 혹은 '올바른 지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래, 영원하지 않기에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바라고 소중하게 간직하자! 작년에도 나는 학생들과 일 년을 함께 보냈다. 올해도 학생들과 일 년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내년에도 학생들과 함께 일 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작년의 학생과 올해의 학생은 다르다. 올해의 학생과 내년의 학생은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만난 학생은 내생에 유일한 올해 나의 제자들이다. 이들과 만나는 올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이 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자!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아모르 파티", 이 순간을 잡으라는 뜻의 "카르페디엠"이라는 단어가 우리 가슴속에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도 우리 세상의 유한함과 모든 것은 영원함이 없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은 우리에게 두 번 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오늘 만나는 모든 이는 소중하다.

 

3. 교칙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할까?

'제법무아(諸法無我)'! 사물에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 이 개념을 강신주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일화로 설명한다. 추운 겨울 혜림사에 단하스님이 묵게 되었다. 너무도 추워 단하스님은 목불을 도끼로 쪼개어 땔감으로 만들었다. 단하스님이 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본 혜림사 스님은 화를 냈다. 그러자 단하스님은 "이 부처에 사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고 태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혜림사 스님은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는가?"라고 내뱉었다. 그렇다. 목불은 나무일뿐 부처가 아니다. 목불에는 '자성'이 없다. 사물에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듯이, 우리에게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 단지 수많은 인연들이 얽혀서 이루어진 관계일 뿐이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고, 아들에게는 아들에게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 그렇다면, 학생에게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는 학생을 위해서 만든 것이 학교의 교칙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을 위해서 만든 교칙이 본래 의도를 벗어나 학생이 교칙을 위해서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여학생의 교복 치마에 치맛주름이 있느냐? 없느냐? 가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교칙은 학생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치맛주름을 없애는 것은 교칙을 위반하는 일이라고 단속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치맛주름을 없애는 것은 교복변형을 금지시키는 교칙을 위반했으니, 학생부장이 아침부터 열심히 여학생을 지도해야했다. 그런데, 학생에게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면, 교칙에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으며, 교복에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교칙도 교복도 학생을 위해서 존재해야지, 학생이 교칙과 교복을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되지 않은가? 교복 변형이 문제라면, 불편한 교복을 후드티와 같은 학생이 편하게 입고 다닐 수 있는 옷으로 변경하면 되지 않을까? 실재로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입는 후드티를 교복으로 정해서 학생들에게 박수를 받은 사례가 있다.

여기서 나는 전율을 느낀다. '제법무아'라는 단어는 우리 교육현장의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혁명적 사상을 담고 있었다.

 

4. 진리를 깨달은 싯다르타는 행복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은 바보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세상의 근심 걱정도 알지 못하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먹을 것이 자신의 입에 들어오면 마냥 행복한 바보가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모든 진리를 깨달은 싯다르타는 행복했을까?

나의 질문에 저자 강신주는 원효 스님을 소환한다. 원효는 고요한 마음을 '진여문'이라고 부르고 요동치는 마음을 '생멸문'이라 부른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혹은 내부의 욕망에 의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생멸문'이라고 한다면, 모든 갈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한 물과 같은 마음을 '진여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원효는 생멸문을 두개로 나눈다. 미숙한 생멸문과 성숙한 생멸문이 그것이다. 미숙한 생멸문은 나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생기는 생멸문이다. 이에 반해서 성숙한 생멸문은 타인의 고통 때문에 생기는 생멸문이다. 내부의 욕망과 집착으로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생멸문을 거쳐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고통 받는 중생들을 보며 나뭇잎에도 파문이 이는 잔잔한 물처럼 마음에 큰 파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진여문에 제대로 도달한 싯다르타는 다시 생멸문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스스로 파계승의 길을 선택하고 속세로 나아간 것이다.

교사 생활을 하다보면, 고고한 것처럼 보이는 교사가 너무도 험한 일을 많이 당한다고 절망할 때가 많다. 전두엽이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않고, 변연계가 지나치게 흥분해 있는 충동적인 고등학생을 상대하다보니, 논리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지중지 키운 자녀를 교사가 혼냈다고 막말을 해대는 막무가내식의 학부모도 보았다. 그럴 때마다. 속세의 때를 벗어 던지고 산사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속세의 때가 싫어 산사를 찾는다면 싯다르타는 아마도 나를 혼낼 것이다. 강신주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부처는 타인의 고통에 너무나 아파하고 타인을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이다." 참다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중생을 외면할 수 없다. 속세의 때가 없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깨달았다면 다시 속세로 나와야한다. 참다운 깨달음의 방법은 때가 가득한 속세에서 깨닫고 부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신주는 말한다. "자비가 아니라면 불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화이트헤드나 들뢰즈와 같은 서양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형이상학에 만족하지만, 불교는 인연, 연기 등의 이론적 틀로 "자비"를 실천하라 말한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가!

 

5. 나쁜 인연에 대처하는 법은?

교사 생활을 하다보면, 유난히도 나를 괴롭게 만드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다. 다음해에는 그들과 만나기 싫기에 그 학생들과 함께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강신주는 나쁜 인연을 만나면 다시 수평선 너머로 배를 몰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나쁜 인연에 길들여진 존재는 나쁜 인연에 안주하게 된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쉽게 길들여진다. 나도 나를 괴롭히는 인연을 쉽게 단절해버렸다.

 

그런데, 교사라는 직업은 반전의 연속이다.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학생과 학부모가 다음해에, 혹은 2~3년이 지나서 감사를 표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너무도 말썽을 부렸던 녀석들이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학교를 찾아온다. 그러면서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나에게 감사를 표한다. 유난히도 속을 섞였던 녀석들이 많은 해일수록, 그해 졸업생 중에서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녀석들이 많다. 나쁜 인연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좋은 인연으로 성숙하는 경우가 교육 현장에서는 꾀나 있다.

싯다르타는 극단의 영원성이나 불변성에 빠지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편의 극단적 순간성에도 빠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지금 이 인연이 나쁜 인연이라고 혹은 좋은 인연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지금 힘든 인연이라면 일단은 그 인연과 관계를 잘 마무리 짓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자. 그러나 나에게 힘든 인연이 성숙하여 좋은 인연으로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극단에 치우치기 쉬운 것이 우리의 인생사이다. 싯다르타는 그 극단을 경계했다. 성숙한다는 것은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6.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

학생을 상담하다보면, 진로를 두고 부모와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녀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가 이뤄주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모는 자녀를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시기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홀로서고 싶은 학생과 자녀를 자신이 못한 일을 대신해주는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모 사이의 갈등은 첨예하게 대립되다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때로는 실업계 학교로 가기 위해서 교칙을 어겨 징계를 받는 경우도 보았다.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돌봄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라캉이 말했듯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부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동일시한다. 그래서 우리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인으로 살기 힘들다. 자신의 삶을 살겠다며 부모와 대립하며, 때로는 퇴학을 선택하는 학생들은 하나의 인격체로 홀로서기를 선택한 존재들이다.

15년 전 D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징계위원회에 참석해서 눈물 흘리는 학부모의 모습이 안타까워 문제 학생에게 물었다. ? ? 문제를 일으키냐고……. 어머니가 불쌍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자신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온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퇴학당하겠다고 말했다. 놀란 나는 학생의 어머니와 면담하며, 실업계로의 전학을 권했다. 그것이 어머님과 학생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말했다. 어머님은 울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실업계로 전학을 보내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후, 학생은 퇴학을 당했다. 그 후로 3년여가 흘렀다. 그해 졸업식이 끝나고 홀가분히 집으로 오는데, 전화를 받았다. 그때 그녀석의 어머니였다. 선생님과 식사를 같이하고 싶다는 것이다. 녀석은 D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실업계에 진학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실업계 전형으로 대학에도 했다고 한다. 나의 조언이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마운 마음에 전화를 한 것이다. 그 녀석은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많은 길을 돌아가야 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고 있는 녀석이 대견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들이 사실은 타인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네가 서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다!! 임제스님의 법문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도 주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7. 아끼는 사람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끼는 사람을 아끼는 방법을 강신주는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동물처럼 보는 연습을 반복하자."라는 강신주의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반려동물에게서 우리는 많은 기대나 보은을 원하지 않는다. 맛있게 사료를 먹고, 나를 위해서 웃음만 지어주길 기대한다. 때로는 집안에 똥을 누워도 탓하지 않는다. 특별한 보은을 바라지 않기에 반려동물 때문에 고통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무수히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학원을 보내고, 좋은 성적을 요구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를 한다. 이러한 사랑이라는 요구에서 불행이 시작된다. 이러한 사랑은 집착이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부모가 아닌,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아바타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강신주는 "아끼는 사람을 반려동물처럼 보는 연습"을 하도록 했나보다.

사랑한다면, 아낀다면, 우리는 건강한 사랑의 방법을 배워야한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존재이다. 더욱이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사랑은 절대적이다. 농작물이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듯이,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강신주의 표현대로 "아끼는 사람에 대해 우리 자신이 '한공기의 연'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을 채우지 못한다면, 아끼는 사람의 행복은 우리로 인해 파괴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이 힘든 가 보다. 학생이 자라기 위해서는 학생과 연을 이루고 있는 무수한 존재들이 건강한 만남을 이뤄야한다. 교사는 그 인연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제자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는 나약한 존재가 교사이다.

 

교사 생활을 하기전, '사랑'이라는 뻔한 단어에 환멸을 느꼈다. 너무도 교과서적인 단어이며, 교사를 혹사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무수히 많은 학생들과 무수히 많은 학부모를 만나면서 모든 문제는 '사랑'에서 발생하여 '사랑'으로 해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와 교사의 사랑이 잘못된 방법으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며, 부모와 교사의 건강한 사랑이 사태를 해결하기도 한다.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학생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병아리들이다. 그러하기에 강신주 자자의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은 우리들에게 참다운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게 해준다. 심오한 불교 철학을 기반으로 참다운 사랑의 방법을 알려준 저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학교 현장의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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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5-01 2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의 정성 가득 담긴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교직에서 치열하게 아이들을 사랑하시느라 애쓰시는 모습이 느껴지네요~ 저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강나루 2021-05-01 21:17   좋아요 3 | URL
책읽은 감상을 두서없이 적은 것인데, 칭찬을 해주시니 쑥스럽네요....
감사합니다.^^

scott 2021-06-04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교육 현장에 강나루님 같으신 분!이
계신 것만으로도 뭉클한 감동이 ^ㅅ^

강나루 2021-06-04 21:28   좋아요 1 | URL
과찬이십니다.
저는 평범한 교사일 뿐입니다.
scott님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06-04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축하드립니다^^

강나루 2021-06-04 21:2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4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불금 되세요~~~

강나루 2021-06-05 04:4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초딩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bookholic 2021-06-05 0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시원하고 즐거운 주말.... 하지만 천천히 지나가시길...^^

강나루 2021-06-05 05:56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bookholic 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1-06-05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강나루 2021-06-05 11:13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해요
이하라님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