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두드러진 것은 개인정보 활용 등 프라이버시 문제다. 한국은 봉쇄나 재택명령 대신 확진자와 접촉자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잠재적 감염자들을 선제적으로 검사하는 3T 방식을 택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일상생활을 보장한다는 점에서는 기본권 제한이 약하지만, 사생활의 보호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측면에서는 기본권을 크게 제약한다. 서구에서는 이 방식이 불가능했다. 추적을 위한 정보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한 요구 정도가 매우 높아서 실행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바이러스는 모두에게 재난이었지만 그 영향은 불평등했다. 특히 장애인·홈리스·이주노동자·요양원 수용자·기저질환자 등 차별받던 의료 취약계층에게는 더한 차별이 닥쳤다. 이들은 정부가 지정한 고위험군·집중관리군에 포함되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이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정부 관리와 사망자 통계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된 죽음’이었다.

질병의 원인을 도덕화하는 오랜 습속과 혐오를 조장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토양이 접속하자 혐오는 마치 증식숙주 속의 바이러스처럼 폭발적으로 창궐했다. 경기도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이 2020년부터 2022년 1월까지 4회에 걸쳐 경기도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경기도 코로나19 심리방역을 위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초기에는 확진 자체와 관련이 있는 중국인, 신천지 교도, 성소수자 등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방역수칙 위반자, 백신 미접종자 등 특정 행위 관련자들에게 혐오가 가해졌다.

혐오와 비난을 줄인 것은 결국 유행의 장기화였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 코로나19를 둘러싼 방역정치는 정당 간 대립의 맥락 속에서 과잉정치화되었다. 한쪽에서 "세계가 감탄한 K-방역"을 자찬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세계 최악 ‘허망한 K방역’"이라는 비난으로 맞섰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수정당 지지자에 비해 권력의 억압을 훨씬 더 촉구하는 역설은 ‘방역정치의 정당정치화’라는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에게 K-방역의 성공은 세월호참사와 메르스사태 때 국민의 생명을 방기한 보수정권에 대한 심판임과 동시에 진보정권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증거였다. 훼손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급격한 기후위기는 채굴 분야에 투자한 이들에게 경제적 위협이 될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세계관에 투자한 이들에게는 우주론적 위협이 된다. 기후변화는 지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로, 공짜는 없다는 것, 인간이 (특히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 한쪽만 이득을 취하는 일방적인 관계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행동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굴착과 추출은 이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튼튼한 구조물?해안도시, 고속도로, 석유굴착기 등?조차 취약하고 허약해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추출주의적 사고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뿌찐, 트럼프, ‘자유호송대’의 공통된 우주관을 감안하면, 이들이 저마다 다른 지역에 살고 다른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서로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독성이 덜한 향수(鄕愁)를 되찾는다고 해서 독성이 강한 향수의 힘을 물리칠 수는 없다.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제국주의적 침략, 우익 사이비 포퓰리즘, 그리고 기후붕괴를 동시에 야기하는 세력과 싸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싸움과 매우 흡사한 것이 그린뉴딜이다. 그린뉴딜은 현 체제에서 가장 조직적으로 버려지고 오염된 지역사회를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 저렴한 친환경주택과 좋은 학교를 짓는 등 의미있는 일을 하는, 가족을 지원하고 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사업장에 투자함으로써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책이자 운동이다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는 북미와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를 대체할 화석연료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다. 그 위기는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등 우리 모두가 여전히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석유와 가스,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요동치는 시대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은 많다. 핵무기가 무분별하게 확산되도록 내버려둘 때 어떤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한때 강대국이었던 나라들을 비난하는 근시안적 사고에 대해. 어떤 땅과 목숨은 침범하고 버려도 되고, 다른 어떤 땅과 목숨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서구 언론의 기괴한 이중잣대에 대해. 어떤 강제이주는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위기가 되고, 또 어떤 강제이주는 이주 대상국에 위기로 작용하는가에 대해.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의지에 대해. 그리고 자기 결정과 영토 보전을 위한 어떤 싸움은 영웅적인 것으로 칭송받고, 또 어떤 싸움은 테러로 치부되는 현실에 대해. 벌거벗은 역사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국내 연안 양식장이 직면하고 있는 또다른 과제는 해양 쓰레기다. 어민들이 살고 있는 어촌 주변 바닷가에는 파도에 밀려온 플라스틱이나 양식장에서 사용하는 어구인 흰색 부표가 많다. 어쩌다 치운다고 하더라도 조류에 밀려온 다양한 해양 쓰레기가 금세 해안에 수북이 쌓인다. 도시에서 살다가 귀어한 어민들의 경우 처음에는 작업 중 나오는 쓰레기를 되가져오려고 노력하곤 한다. 그러나 바닷일의 고됨이 누적되고 시간에 쫓기게 되면 결국 바다에 그냥 버리는 쪽을 택하게 된다. 다른 어민들은 자연스럽게 버리는데 자신만 쓰레기를 되가져오는 게 혼자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방치하는 문제는 귀어 초기 어민들이 이전 세대와 갈등을 겪는 주제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출산은 죽음을 환기할 만큼 어머니와 자녀 모두의 취약성이 극대화되는 시간이고,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생명의 취약성에서 오는 불안까지 동반하는 복합적 노동일 수밖에 없다.

임대병영’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독일제국의 주택정책은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던 임대인 단체나 임대차제도를 넘어 생산과 관리 영역에도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요구하는 사회개혁가 등의 출현과 쟁명 속에서 전개된다.

주택공익성 개념과 소유권이 계속 충돌했던 서독에서는 규제와 해제가 긴장 속에 반복된다. 전후 복구시기 과거의 주택강제경제를 철폐하면서도 사회주택의 공급과 주거보조비의 확대를 통해 국가 개입의 끈을 튼튼히 잡았던 것이 보수진영의 입장이었다는 점은 ‘사회국가’ 독일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후 서독에서는 1960년대의 규제완화로 임대료가 폭등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 때처럼 민간부문의 건설 활성화도 이룩하지 못했고 결국 1971년에 다시 임차인보호강화법을 제정하게 된다. 동독과 서독의 이러한 사례를 보면, 좌든 우든 현실의 복잡함 앞에서 자만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헤겔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믿음의 과정을 보편성과 특수성이 통일되어 개별성으로 지향되는 과정으로 개념화하는데, 이는 부처나 그리스도라는 씨앗이 중생 즉 인간에 내재한 채 전개해서 개별적인 그 나름의 인격이 되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남기호의 책에는 이백년도 더 전인 그 옛날 헤겔이 이러한 개념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일, 즉 왕권과 그 밑에 활동하는 종교성의 감시와 의혹의 눈초리를 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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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나 욕망이 사라지면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갈 가치를 못 느낀다. 지배권과 완전한 소유권을 우리가 갖는 것은 여성들에게는 무한히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충실성과 지조에 완전히 항복하고 난 뒤라면 이제 그녀들이 얼마간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충실성과 지조라는 덕성은 드물고 어려운 것이다.

플라톤은 모든 종류의 사랑에서 용이함과 조급함은 방어하는 쪽에게 금기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게 경솔하게 통째로 급격히 항복하는 것은 탐식의 기미로서 여성들이 온갖 기교로 감춰야 하는 것이다. 고르고 절도 있게 베푸는 호의를 통해 여성들은 우리의 욕망을 더 잘 이끌어 가며 자기들의 것은 감추는 것이다. 그녀들은 우리 앞에서 늘 달아날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요란하게 활활 타던 불길이 한순간에 죽은 듯 얼어붙고 불씨마저 꺼지는 것이 나는 늘 놀랍다. 이런 욕망은 꽃피는 저 아름다운 젊음에 속해야 마땅한 것이다. 어찌 되는지 보려면 그 욕망을 믿고 당신 안에 있는 이 지칠 줄 모르고 충만하며 한결같고 담대한 열정을 북돋아 보라. 그대는 얼떨떨한 상태로 길을 헤매게 되리라.

이 점에서 내가 남들의 기질로부터 멀어질수록 나는 나 자신의 것에 가까워진다. 결국 이 거래에서 나는 완전히 몰입하지는 않았다. 거기서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나를 잊지는 않았던 것이다. 나는 자연이 준 저 얼마 안 되는 분별력과 신중함을 온전히 보존해, 여자들과 나를 위해 썼다.

사랑을 섬길 때, 철학은 그저 육체의 요구를 채워 주기만 하지 영혼까지 동요시키지는 않는 대상을 택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영혼은 이것을 자기 일로 만들지 말고 그저 육체를 따르고 거들어 주기만 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랑이란 상호 관계와 호응을 필요로 하는 교제이다. 우리가 얻게 되는 다른 쾌락들은 다양한 성격의 보상을 통해 고마움을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똑같은 종류의 화폐로만 지불이 된다.
C
사실 이 즐거움에서는 내가 느끼는 쾌감보다 내가 일으킨 쾌감이 더 달콤하게 내 상상력을 간지럽힌다.
B
그런데 자기는 조금도 주지 않으면서 쾌감을 받기만 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도량이 없는 자이다.

판결의 권위는 판관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판받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상급자를 세우는 것은 상급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급자를 위해서이며, 의사는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공직이든 모든 전문 직업이 그러한 것처럼 그 목적을 자기 너머의 무엇엔가에 둔다. "어떤 기예도 그 자신을 목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키케로)

왕의 덕성은 다른 무엇보다 정의로움에 있다. 그리고 정의로움을 이루는 온갖 부분 중에서도 후덕함에 수반되는 정의야말로 왕들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정의로움은 다른 이를 매개로 행사하는 데 비해 이것만은 특별히 자신들의 직분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공간과 시간의 무한한 광대함을 우리가 명상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떤 쪽으로든 뛰어들고 뻗어나가는 정신은 사방으로 걸어 나가면서 그의 행보를 멈추게 하는 어떤 한계도 만나지 못할 것이니, 이 무한 속에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존재형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키케로 텍스트의 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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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특히 미국이 논의 초기에 한국이 반드시 서명 및 비준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에 주목하고, 이것이 영국과 일본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한국 배제로 낙착되는 까닭을 다음 과제로 남겼다.

영국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을 수립하자 이와 유대를 전제로 정책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한국 참가에 대해 미국과 의견이 같지 않았다. 한국은 1945년 이전에 일본 영토의 일부였고, 해방 후에도 주권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51년 1월부터 덜레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면서 한국의 참가를 허용한다는 주장을 거듭 밝혔다. 첫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함께 항일전선에 참가하였다는 것, 둘째는 현재 공산군과 싸우고 있는 한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1951년 4월 23일,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도쿄를 방문한 덜레스에게 제시한 〈한국과의 평화조약
Korea and Peace Treaty
〉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일본정부의 의견으로 제시되었다. 요시다 시게루는 만약 한국이 서명국이 되면 100만 명에 달하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재산권과 배상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덧붙였다. 그는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까지 열강들 사이의 식민지 경쟁에서 조장된 비밀협약의 무법과 불법의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 모든 조약은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것을 전제로 법전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개인의 학설로 존재하던 국제법을 공법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로티우스 정신’의 표방은 열강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국제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을 앞두고 미국정부가 한국을 서명국으로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침략행위를 범한 자를 우대하는 조약이 되고 말았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묻는 조약이 아니라 냉전체제에 대한 대응전략 차원에서 ‘일본 구하기’ 조약이 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냉전체제 논리와 제국주의 의식이 동거하는 결과가 되었고, 그 불합리한 관계는 이후로도 동북아시아 국제정세 불안정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21세기 그로티우스 법 정신"의 구현 차원에서 새로운 노력이 기울여져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사태를 끌어가는 것은 경제도 안보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역사다. 특히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및 전시 지배하의 강제ㆍ노예 노동의 역사에 대한 상반된 이해가 오늘날 진행중인 "역사문제"를 반복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일본과 한국 간의 "역사문제"의 영토적 요소와 관련해, 미국 관리들이 일본 점령통치 기간(1945~1952)에 내린 결정들이 오늘날까지 문제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알다시피 샌프란시스코 체제
the San Francisco System
는 두 가지 사태 전개를 토대로 구축됐다. ①연합국에 의한 일본제국의 완전 해체, ②미국 점령하의 일본정부가 A급 전범자 25명에 대한 유죄평결을 포함해 극동전범재판의 판결에 승복하는 것이 그것이다.

일본 관리들은 일본이 한국에 건넨 돈은 어떤 형식이건 모두 법적인 보상 또는 배상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분명한 태도를 취했는데?일본 관리들의 우려에 대해서도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협상의 일부로 일본이 제공한 기금 약 8천만 달러를 오직 특정 산업분야에만 쓰고, 강제동원 노동자들과 "위안부"(일본군 성노예)처럼 개인 배상을 요구한 일제 치하의 한국인 희생자들을 위해 쓰지 않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동시에 일본은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미지급 임금을 전용해 착복하고 그 일부를 일본제국의 희생자들을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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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계속하게 만든 국제적인 국가체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적군 진영은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뒤에 숨은 소련으로 구성됐다. 미국 진영의 선봉에 선 것은 주한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대만의 중화민국 국민당군이었다. 사령부와 미군의 주력부대들은 그 전략 및 병참기지들과 함께 일본과 오키나와에 배치돼 있었다. 일본 자위대는 명목상으로는 그 전쟁의 미군 진영 잠재전력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고, 그 통합성과 안전을 보장했다. 이 체제 내에서 일본은 미군의 주요 후방 지원자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나의 예비적인 결론은, 일대일로와 아시아ㆍ태평양 질서는 그 둘이 딱히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며, 각기 매우 다른 원칙과 제도 위에 구축돼 있는 것이어서, 일대일로를 전통적인 앵글로-아메리카의 지정학 렌즈를 통해서 바라볼 경우 잘못된 이해, 또는 분쟁까지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냉전 이후 한때 (인터넷을 비롯한) 기술과 글로벌 통신 및 경제적 융합을 통해 정복당한 것으로 생각됐던 ‘공간(space)’이 글로벌 정치무대에 핵심적인 문제로 복귀했다. 이 복귀는 냉전시대 이후의 민족분쟁 증가를 비롯해 동아시아와 동유럽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지역들에서 일어난 영토분쟁, 글로벌 테러리즘의 위협 등 현실세계의 많은 사건들로 인해 촉발됐다. 지정학은 군사 요소, 기술 그리고 지역과 글로벌 경쟁 속에서 공간과 영토를 넘나드는 다른 힘의 형태들의 전략적 응용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일대일로는 느슨한 투자 및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이며, 유라시아경제동맹은 조약을 토대로 한 경제동맹이다. 그리고 인도ㆍ태평양은 기본적으로 전략적으로 인도를 끌어들이기 위해(하지만 동맹은 아니다) 전후의 미국동맹체제를 좀 더 서쪽으로 투사한 전략구역(strategic zone)이다. 요컨대 인도ㆍ태평양은 중국의 발흥에 대처하기 위해 설계된 미국 주도 하의 아시아ㆍ태평양 동맹체제의 지리적 확장이다.
얼핏 보기에 아시아ㆍ태평양과 유라시아/일대일로 지형 간의 대조는 머핸에서 매킨더와 스파이크먼에 이르는 전통적 지정학의 고전적 충돌이 다시 등장하는 듯하다. 즉, 해양세력 대 육지세력, ‘주변부’ 대 ‘중심부’의 충돌이다. 하지만 그들 간에 경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래야만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유럽과 아시아는 지금 글로벌 명목GDP의 61.93%, 구매력지수평가의 실질GDP의 69.41%를 차지하고 있다.111 유라시아가 내부적으로 통합될수록 전후 미국의 우위를 뒷받침해준 범대서양과 범태평양 관계들은 상대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 지역질서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였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1950년 한국전쟁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국공내전이 서막이었다면 한국전쟁은 제2막이었고, 대일 평화조약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졌다. 즉 중국의 공산화(1949), 한국전쟁(1950),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은 끊이지 않는 사슬처럼 서로 연결되고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중국ㆍ한국ㆍ일본을 관통하는 지역질서를 창출했다. 핵심은 냉전의 주변부였던 동북아시아에서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이라는 열전을 통해 냉전이 전면화된 것을 의미했다.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전후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정의한 기본 조약이었으며, 한국전쟁 중 급속히 추진, 체결된 데 그 기본적 특징이 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연합국의 점령상태를 종식하고, 미국ㆍ영국 등 연합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전후 일본의 영토가 결정되었다. (일본) 제국과 (서방의) 제국은 평화를 회복했지만, 제국과 식민지, 점령지 간의 평화는 회복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가장 부정적인 유산은 전쟁책임에 관한 문제다. 조약문에는 왜 ‘평화’를 회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부재했다. 1947년 이탈리아 강화조약에서 연합국은 ‘3국 동맹’으로 구성된 ‘추축국’의 일원인 파시스트 정권하의 이탈리아가 침략전쟁을 개시했다는 점을 분명히 명시했다. 이 조약에서는 추축국에서 탈퇴한 이탈리아에 대해 분명한 전쟁책임이 조약문에 명시된 반면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는 전쟁 책임이 물어지지 않았다.

전쟁의 책임은 도쿄재판에서 소수의 전범들에게 돌려졌고, 평화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국제(법)적 규정과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다. 전후 일본은 (*전쟁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천황제가 폐지되거나 천황이 바뀌지도 않았으며, 도쿄전범재판과 연합국 사령부의 점령으로 사실상 면책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일본국민들은 전쟁책임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평화를 회복했으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새로운 일본이 아닌 침략국가의 변용이었으며, 일본국민들에게는 불행했던 과거와 절연할 수 있는 공식적ㆍ국제적 기회가 상실되어 버렸다. 전후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과 다양한 과거사 분쟁을 벌이게 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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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주도세력의 유교적 엘리트의식과 촛불대항쟁의 수평적 연대의식을 대비할 수 있다면, 전자가 유교 전통의 비민주적 잔재에 해당하고 후자는 동학으로 매개된 유교적 요소의 긍정적 위력으로 보는 시각도 가능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란 꾸준히 투쟁해서 획득해야 하는 가치였다는 점, 그런 투쟁의 역사가 낳은 강렬한 주체성 등이 개벽의 사상사와 연결되는 지점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 촛불대항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언급해야하는 것이 뉴미디어입니다. 촛불혁명은 미디어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나라 전체가 식민화되고 제국주의 침탈을 심각하게 겪었던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의 상실감은 엄청났을 겁니다. 중국 역시 국권에 대한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나라 전체가 넘어가지는 않았거든요. 한국인의 국권과 자아정체성이 파괴된 경험이 더 심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주적 자아, 대동(大同)의 ‘나’에 대한 갈망이 강해졌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민주화라는 정치체제의 전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민주적 삶의 양식’을 향한 일반 시민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 속에서 발견되고 경험되는데, 이때 개벽이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시민적 화두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죠.

김지하의 삶에 대해 우리가 던지는 첫번째 질문은 어쩌다 그가 투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나 하는 것인데, 그는 자기 ‘행동’이 어떤 조직이나 이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필연성에 따른 개인적 열정의 산물이었다고 대답한다.(『회고록 2』 341면) 즉, "언제나 조직 밖의 활동가"(같은 책 42면)라는 자의식이 그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그는 역사적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는 순간에도 "역사와는 반대되면서, 그럼에도 역사로 돌아가는 (…) 내면적 카오스의 생성의 시간"을 막연하지만 생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중요한 사실은 김지하 시의 출발점에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땅’이자 ‘반란과 형벌의 고장’으로서의 고향 전라도에 대한 운명적인 연대가 깊게 깔려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목격했던 좌우대립의 참혹함뿐만 아니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일본제국 군대에 의한 동학군 학살과 남한대토벌의 역사도 그에게는 무심할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나의 영적 혈통의 핵심에 있는 동학의 기억은 단순히 어렸을 때의 집안의 전설이 아니라 스무살이 넘은 나에게 하나의 살아 있는 현실"(같은 책 387면)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근본적인 것은 양자의 생생하고도 유기적인 결합, 즉 박제품 상태의 판소리 형식을 현실비판의 살아 있는 무기로 힘차게 살려낸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김지하 고유의 진정한 성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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