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두드러진 것은 개인정보 활용 등 프라이버시 문제다. 한국은 봉쇄나 재택명령 대신 확진자와 접촉자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잠재적 감염자들을 선제적으로 검사하는 3T 방식을 택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일상생활을 보장한다는 점에서는 기본권 제한이 약하지만, 사생활의 보호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측면에서는 기본권을 크게 제약한다. 서구에서는 이 방식이 불가능했다. 추적을 위한 정보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한 요구 정도가 매우 높아서 실행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바이러스는 모두에게 재난이었지만 그 영향은 불평등했다. 특히 장애인·홈리스·이주노동자·요양원 수용자·기저질환자 등 차별받던 의료 취약계층에게는 더한 차별이 닥쳤다. 이들은 정부가 지정한 고위험군·집중관리군에 포함되지 못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이들이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정부 관리와 사망자 통계의 사각지대에서 ‘방치된 죽음’이었다.

질병의 원인을 도덕화하는 오랜 습속과 혐오를 조장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토양이 접속하자 혐오는 마치 증식숙주 속의 바이러스처럼 폭발적으로 창궐했다. 경기도와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이 2020년부터 2022년 1월까지 4회에 걸쳐 경기도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경기도 코로나19 심리방역을 위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초기에는 확진 자체와 관련이 있는 중국인, 신천지 교도, 성소수자 등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방역수칙 위반자, 백신 미접종자 등 특정 행위 관련자들에게 혐오가 가해졌다.

혐오와 비난을 줄인 것은 결국 유행의 장기화였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에서 코로나19를 둘러싼 방역정치는 정당 간 대립의 맥락 속에서 과잉정치화되었다. 한쪽에서 "세계가 감탄한 K-방역"을 자찬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세계 최악 ‘허망한 K방역’"이라는 비난으로 맞섰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수정당 지지자에 비해 권력의 억압을 훨씬 더 촉구하는 역설은 ‘방역정치의 정당정치화’라는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이들에게 K-방역의 성공은 세월호참사와 메르스사태 때 국민의 생명을 방기한 보수정권에 대한 심판임과 동시에 진보정권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증거였다. 훼손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급격한 기후위기는 채굴 분야에 투자한 이들에게 경제적 위협이 될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세계관에 투자한 이들에게는 우주론적 위협이 된다. 기후변화는 지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로, 공짜는 없다는 것, 인간이 (특히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 한쪽만 이득을 취하는 일방적인 관계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행동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굴착과 추출은 이제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튼튼한 구조물?해안도시, 고속도로, 석유굴착기 등?조차 취약하고 허약해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추출주의적 사고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뿌찐, 트럼프, ‘자유호송대’의 공통된 우주관을 감안하면, 이들이 저마다 다른 지역에 살고 다른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서로 일맥상통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독성이 덜한 향수(鄕愁)를 되찾는다고 해서 독성이 강한 향수의 힘을 물리칠 수는 없다.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는 제국주의적 침략, 우익 사이비 포퓰리즘, 그리고 기후붕괴를 동시에 야기하는 세력과 싸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싸움과 매우 흡사한 것이 그린뉴딜이다. 그린뉴딜은 현 체제에서 가장 조직적으로 버려지고 오염된 지역사회를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 저렴한 친환경주택과 좋은 학교를 짓는 등 의미있는 일을 하는, 가족을 지원하고 노조가 결성되어 있는 사업장에 투자함으로써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책이자 운동이다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 위기는 북미와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를 대체할 화석연료 기반시설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다. 그 위기는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등 우리 모두가 여전히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석유와 가스,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요동치는 시대로부터 얻어야 할 교훈은 많다. 핵무기가 무분별하게 확산되도록 내버려둘 때 어떤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한때 강대국이었던 나라들을 비난하는 근시안적 사고에 대해. 어떤 땅과 목숨은 침범하고 버려도 되고, 다른 어떤 땅과 목숨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서구 언론의 기괴한 이중잣대에 대해. 어떤 강제이주는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위기가 되고, 또 어떤 강제이주는 이주 대상국에 위기로 작용하는가에 대해.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의지에 대해. 그리고 자기 결정과 영토 보전을 위한 어떤 싸움은 영웅적인 것으로 칭송받고, 또 어떤 싸움은 테러로 치부되는 현실에 대해. 벌거벗은 역사의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국내 연안 양식장이 직면하고 있는 또다른 과제는 해양 쓰레기다. 어민들이 살고 있는 어촌 주변 바닷가에는 파도에 밀려온 플라스틱이나 양식장에서 사용하는 어구인 흰색 부표가 많다. 어쩌다 치운다고 하더라도 조류에 밀려온 다양한 해양 쓰레기가 금세 해안에 수북이 쌓인다. 도시에서 살다가 귀어한 어민들의 경우 처음에는 작업 중 나오는 쓰레기를 되가져오려고 노력하곤 한다. 그러나 바닷일의 고됨이 누적되고 시간에 쫓기게 되면 결국 바다에 그냥 버리는 쪽을 택하게 된다. 다른 어민들은 자연스럽게 버리는데 자신만 쓰레기를 되가져오는 게 혼자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쓰레기를 버리거나 방치하는 문제는 귀어 초기 어민들이 이전 세대와 갈등을 겪는 주제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출산은 죽음을 환기할 만큼 어머니와 자녀 모두의 취약성이 극대화되는 시간이고,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생명의 취약성에서 오는 불안까지 동반하는 복합적 노동일 수밖에 없다.

임대병영’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독일제국의 주택정책은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던 임대인 단체나 임대차제도를 넘어 생산과 관리 영역에도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요구하는 사회개혁가 등의 출현과 쟁명 속에서 전개된다.

주택공익성 개념과 소유권이 계속 충돌했던 서독에서는 규제와 해제가 긴장 속에 반복된다. 전후 복구시기 과거의 주택강제경제를 철폐하면서도 사회주택의 공급과 주거보조비의 확대를 통해 국가 개입의 끈을 튼튼히 잡았던 것이 보수진영의 입장이었다는 점은 ‘사회국가’ 독일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후 서독에서는 1960년대의 규제완화로 임대료가 폭등하지만 바이마르공화국 때처럼 민간부문의 건설 활성화도 이룩하지 못했고 결국 1971년에 다시 임차인보호강화법을 제정하게 된다. 동독과 서독의 이러한 사례를 보면, 좌든 우든 현실의 복잡함 앞에서 자만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헤겔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믿음의 과정을 보편성과 특수성이 통일되어 개별성으로 지향되는 과정으로 개념화하는데, 이는 부처나 그리스도라는 씨앗이 중생 즉 인간에 내재한 채 전개해서 개별적인 그 나름의 인격이 되어가는 과정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남기호의 책에는 이백년도 더 전인 그 옛날 헤겔이 이러한 개념을 만드는 과정에서 겪은 일, 즉 왕권과 그 밑에 활동하는 종교성의 감시와 의혹의 눈초리를 피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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