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주도세력의 유교적 엘리트의식과 촛불대항쟁의 수평적 연대의식을 대비할 수 있다면, 전자가 유교 전통의 비민주적 잔재에 해당하고 후자는 동학으로 매개된 유교적 요소의 긍정적 위력으로 보는 시각도 가능하겠습니다.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란 꾸준히 투쟁해서 획득해야 하는 가치였다는 점, 그런 투쟁의 역사가 낳은 강렬한 주체성 등이 개벽의 사상사와 연결되는 지점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 촛불대항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언급해야하는 것이 뉴미디어입니다. 촛불혁명은 미디어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나라 전체가 식민화되고 제국주의 침탈을 심각하게 겪었던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의 상실감은 엄청났을 겁니다. 중국 역시 국권에 대한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나라 전체가 넘어가지는 않았거든요. 한국인의 국권과 자아정체성이 파괴된 경험이 더 심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주적 자아, 대동(大同)의 ‘나’에 대한 갈망이 강해졌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민주화라는 정치체제의 전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민주적 삶의 양식’을 향한 일반 시민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 속에서 발견되고 경험되는데, 이때 개벽이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시민적 화두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죠.

김지하의 삶에 대해 우리가 던지는 첫번째 질문은 어쩌다 그가 투사의 길로 들어서게 됐나 하는 것인데, 그는 자기 ‘행동’이 어떤 조직이나 이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의 필연성에 따른 개인적 열정의 산물이었다고 대답한다.(『회고록 2』 341면) 즉, "언제나 조직 밖의 활동가"(같은 책 42면)라는 자의식이 그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그는 역사적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는 순간에도 "역사와는 반대되면서, 그럼에도 역사로 돌아가는 (…) 내면적 카오스의 생성의 시간"을 막연하지만 생득적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중요한 사실은 김지하 시의 출발점에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땅’이자 ‘반란과 형벌의 고장’으로서의 고향 전라도에 대한 운명적인 연대가 깊게 깔려 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목격했던 좌우대립의 참혹함뿐만 아니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일본제국 군대에 의한 동학군 학살과 남한대토벌의 역사도 그에게는 무심할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나의 영적 혈통의 핵심에 있는 동학의 기억은 단순히 어렸을 때의 집안의 전설이 아니라 스무살이 넘은 나에게 하나의 살아 있는 현실"(같은 책 387면)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근본적인 것은 양자의 생생하고도 유기적인 결합, 즉 박제품 상태의 판소리 형식을 현실비판의 살아 있는 무기로 힘차게 살려낸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김지하 고유의 진정한 성취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