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특히 미국이 논의 초기에 한국이 반드시 서명 및 비준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에 주목하고, 이것이 영국과 일본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한국 배제로 낙착되는 까닭을 다음 과제로 남겼다.

영국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국)을 수립하자 이와 유대를 전제로 정책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한국 참가에 대해 미국과 의견이 같지 않았다. 한국은 1945년 이전에 일본 영토의 일부였고, 해방 후에도 주권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951년 1월부터 덜레스는 두 가지 이유를 들면서 한국의 참가를 허용한다는 주장을 거듭 밝혔다. 첫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함께 항일전선에 참가하였다는 것, 둘째는 현재 공산군과 싸우고 있는 한국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1951년 4월 23일,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도쿄를 방문한 덜레스에게 제시한 〈한국과의 평화조약
Korea and Peace Treaty
〉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일본정부의 의견으로 제시되었다. 요시다 시게루는 만약 한국이 서명국이 되면 100만 명에 달하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재산권과 배상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덧붙였다. 그는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까지 열강들 사이의 식민지 경쟁에서 조장된 비밀협약의 무법과 불법의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 모든 조약은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것을 전제로 법전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개인의 학설로 존재하던 국제법을 공법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로티우스 정신’의 표방은 열강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국제정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을 앞두고 미국정부가 한국을 서명국으로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따지지 않은 상태에서 침략행위를 범한 자를 우대하는 조약이 되고 말았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묻는 조약이 아니라 냉전체제에 대한 대응전략 차원에서 ‘일본 구하기’ 조약이 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냉전체제 논리와 제국주의 의식이 동거하는 결과가 되었고, 그 불합리한 관계는 이후로도 동북아시아 국제정세 불안정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국제연합의 이름으로 "21세기 그로티우스 법 정신"의 구현 차원에서 새로운 노력이 기울여져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사태를 끌어가는 것은 경제도 안보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역사다. 특히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및 전시 지배하의 강제ㆍ노예 노동의 역사에 대한 상반된 이해가 오늘날 진행중인 "역사문제"를 반복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일본과 한국 간의 "역사문제"의 영토적 요소와 관련해, 미국 관리들이 일본 점령통치 기간(1945~1952)에 내린 결정들이 오늘날까지 문제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알다시피 샌프란시스코 체제
the San Francisco System
는 두 가지 사태 전개를 토대로 구축됐다. ①연합국에 의한 일본제국의 완전 해체, ②미국 점령하의 일본정부가 A급 전범자 25명에 대한 유죄평결을 포함해 극동전범재판의 판결에 승복하는 것이 그것이다.

일본 관리들은 일본이 한국에 건넨 돈은 어떤 형식이건 모두 법적인 보상 또는 배상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했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분명한 태도를 취했는데?일본 관리들의 우려에 대해서도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협상의 일부로 일본이 제공한 기금 약 8천만 달러를 오직 특정 산업분야에만 쓰고, 강제동원 노동자들과 "위안부"(일본군 성노예)처럼 개인 배상을 요구한 일제 치하의 한국인 희생자들을 위해 쓰지 않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동시에 일본은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미지급 임금을 전용해 착복하고 그 일부를 일본제국의 희생자들을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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