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계속하게 만든 국제적인 국가체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적군 진영은 북조선과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뒤에 숨은 소련으로 구성됐다. 미국 진영의 선봉에 선 것은 주한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대만의 중화민국 국민당군이었다. 사령부와 미군의 주력부대들은 그 전략 및 병참기지들과 함께 일본과 오키나와에 배치돼 있었다. 일본 자위대는 명목상으로는 그 전쟁의 미군 진영 잠재전력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고, 그 통합성과 안전을 보장했다. 이 체제 내에서 일본은 미군의 주요 후방 지원자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나의 예비적인 결론은, 일대일로와 아시아ㆍ태평양 질서는 그 둘이 딱히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며, 각기 매우 다른 원칙과 제도 위에 구축돼 있는 것이어서, 일대일로를 전통적인 앵글로-아메리카의 지정학 렌즈를 통해서 바라볼 경우 잘못된 이해, 또는 분쟁까지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냉전 이후 한때 (인터넷을 비롯한) 기술과 글로벌 통신 및 경제적 융합을 통해 정복당한 것으로 생각됐던 ‘공간(space)’이 글로벌 정치무대에 핵심적인 문제로 복귀했다. 이 복귀는 냉전시대 이후의 민족분쟁 증가를 비롯해 동아시아와 동유럽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지역들에서 일어난 영토분쟁, 글로벌 테러리즘의 위협 등 현실세계의 많은 사건들로 인해 촉발됐다. 지정학은 군사 요소, 기술 그리고 지역과 글로벌 경쟁 속에서 공간과 영토를 넘나드는 다른 힘의 형태들의 전략적 응용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일대일로는 느슨한 투자 및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이며, 유라시아경제동맹은 조약을 토대로 한 경제동맹이다. 그리고 인도ㆍ태평양은 기본적으로 전략적으로 인도를 끌어들이기 위해(하지만 동맹은 아니다) 전후의 미국동맹체제를 좀 더 서쪽으로 투사한 전략구역(strategic zone)이다. 요컨대 인도ㆍ태평양은 중국의 발흥에 대처하기 위해 설계된 미국 주도 하의 아시아ㆍ태평양 동맹체제의 지리적 확장이다.
얼핏 보기에 아시아ㆍ태평양과 유라시아/일대일로 지형 간의 대조는 머핸에서 매킨더와 스파이크먼에 이르는 전통적 지정학의 고전적 충돌이 다시 등장하는 듯하다. 즉, 해양세력 대 육지세력, ‘주변부’ 대 ‘중심부’의 충돌이다. 하지만 그들 간에 경쟁을 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래야만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유럽과 아시아는 지금 글로벌 명목GDP의 61.93%, 구매력지수평가의 실질GDP의 69.41%를 차지하고 있다.111 유라시아가 내부적으로 통합될수록 전후 미국의 우위를 뒷받침해준 범대서양과 범태평양 관계들은 상대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 지역질서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였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1950년 한국전쟁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국공내전이 서막이었다면 한국전쟁은 제2막이었고, 대일 평화조약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졌다. 즉 중국의 공산화(1949), 한국전쟁(1950),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은 끊이지 않는 사슬처럼 서로 연결되고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중국ㆍ한국ㆍ일본을 관통하는 지역질서를 창출했다. 핵심은 냉전의 주변부였던 동북아시아에서 국공내전과 한국전쟁이라는 열전을 통해 냉전이 전면화된 것을 의미했다.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은 전후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정의한 기본 조약이었으며, 한국전쟁 중 급속히 추진, 체결된 데 그 기본적 특징이 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연합국의 점령상태를 종식하고, 미국ㆍ영국 등 연합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였으며, 전후 일본의 영토가 결정되었다. (일본) 제국과 (서방의) 제국은 평화를 회복했지만, 제국과 식민지, 점령지 간의 평화는 회복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가장 부정적인 유산은 전쟁책임에 관한 문제다. 조약문에는 왜 ‘평화’를 회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부재했다. 1947년 이탈리아 강화조약에서 연합국은 ‘3국 동맹’으로 구성된 ‘추축국’의 일원인 파시스트 정권하의 이탈리아가 침략전쟁을 개시했다는 점을 분명히 명시했다. 이 조약에서는 추축국에서 탈퇴한 이탈리아에 대해 분명한 전쟁책임이 조약문에 명시된 반면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는 전쟁 책임이 물어지지 않았다.

전쟁의 책임은 도쿄재판에서 소수의 전범들에게 돌려졌고, 평화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국제(법)적 규정과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다. 전후 일본은 (*전쟁에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천황제가 폐지되거나 천황이 바뀌지도 않았으며, 도쿄전범재판과 연합국 사령부의 점령으로 사실상 면책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일본국민들은 전쟁책임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인식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은 평화를 회복했으나,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새로운 일본이 아닌 침략국가의 변용이었으며, 일본국민들에게는 불행했던 과거와 절연할 수 있는 공식적ㆍ국제적 기회가 상실되어 버렸다. 전후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과 다양한 과거사 분쟁을 벌이게 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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