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은 모든 중국인에게 거대한 문화적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1421년까지 이 도시는 명 왕조의 수도였다. 거대한 도시의 성벽은 2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해 20년 넘게 건설되었고 제국의 힘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겨진 뒤에도 도시는 훌륭한 건축물과 상인들의 품위 있는 생활양식으로 명성을 떨쳤다. 또한 난징은 1850년부터 1864년까지 피비린내나는 내전 동안 태평천국의 수도였다. 1928년 장제스에 의해 중국의 수도가 되면서 또다시 주목을 받았다. 국민당은 난징을 거대한 식민도시인 상하이에 필적하는 근대화된 도시로 탈바꿈시켰다._ 래너 미터, <중일전쟁>, p139/477


 지금 남경(南京) 함락은 시간문제 아닌가. 장개석이는 벌써 천도를 선언하고 있어. 장학량이가 작년에 공산당하고 결탁해서 장개석이를 납치한 서안사건(西安事件), 그게 멸망의 징조였던 게야. 서안사건은 노구교사건(蘆溝橋事件)의 원인이지. 일본을 상대해서 중국은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 이제는 만주가 문제아니야. 멀잖아 일본은 중국을 손아귀에 넣을 거다. 이런 판국에 조선이 독립을 해?... 손끝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갔음 갔지 조선이 독립을 해? 그 희망은 죽은 나무에 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허망한 게야. 왜놈 밑에서 못살겠다 한다면 모를까 독립을 쟁취하자, 그건 잠꼬대나 매한가지 _ 박경리, <토지 15> , p451/710


 <토지 15>의 마지막은 1937년 난징 대학살(南京大屠殺)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중일전쟁(中日戰爭) 당시 수도 난징에 진입한 일본군이 6주동안 중국군 포로들과 시민들을 향해 벌인 무차별적인 살상과 강간 행위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처참한 사건. 중화민국의 수도를 점령한 일본의 승리가 미친 영향은 컸다. 일본의 중국 점령은 마치 시간 문제처럼 보였고, 그에 비례해 조선의 독립은  멀어져간 듯 했다. 이제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살아가는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시기. 난징대학살에 대한 치열한 논의가 <토지> 4부 3권에서 이뤄진다. 사실, 일제 강점 이전 남한 대토벌 작전(南韓大討伐作戰, 1909)이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 당시의 이들의 만행을 본다면 우리에게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겠지만, 서방세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이 이러한 학살을 가능케 했는가. 


 "아무리 일본 인종이 극악무도하다 하더라도 일본인 전부가 악귀일 수는 없는 일. 군에 끌려나온 사내 모두가 짐승일 수는 없는 일. 한데 어찌하여 모두 악귀가 되고 짐승이 되었는가. 그런 만행은 다소간 정복자의 속성이라 하더라도 오만의 군대가 삼십만의 비전투원을 학살하다니, 자네들은 일본 군부의 작전이라는 생각은 아니했다 그 말인가?" _ 박경리, <토지 15> , p460/594


  "일본군은 왜 중국 대륙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내 물음에 대한 우노의 답변은 명료했다.

 "하나는 일본 육군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무엇인지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p189/974


 패잔병에게 폭행을 가하는 일본병사의 심리에는 일본병사가 중국병사 혹은 중국민중을 향해 품은 도착된 적개심이 잘 나타나 있다. 예기하지 않고 발발한 중일전면전쟁에 끌려나와 상궤를 벗어난 남경진격 난행군을 강요당해 적당주의적인 작전지도와 탄약보급 부족으로 많은 전상자를 낸 사실로부터 느끼는 분노가 군/정부나 상급 지휘관에게 향하는 대신에 항전하는 중국군과 항일적인 민중이 있으니까 "우리가 이렇게나 고생하고 있는 거야" "많은 국민이 울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도착된 적개심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더욱이 전사한 동료의 원한을 갚는다고 하는 복수심 등이 증폭되어 쉽게 중국군민을 살육하는 심리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_ 가사라하 도쿠시, <남경사건>, p128/195


 <토지>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해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1939 ~ ) 와 가사라하 도쿠시笠原十九司, 1944년 ~ )는 일본군 입장에서 학살의 문제를 바라본다. 사관학교 출신에 의해 장악된 군조직의 구조와 전투밖에 알지 못하는 그들의 안목 그리고 난징진입 직전에 이뤄진 상하이전투(1937)에서 중국군의 저항으로 큰 피해를 본 일본군의 감정이 전투 패배 후 저항할 수 없는 이들에 대해 무제한적인 폭력의 형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이 관점에서만 바라볼 수 있을까. 일본군 내부가 아닌 관점을 조금 올려보자.


 대학살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 비극의 중심에는 일본과 중국의 이념적 충돌이 있었다. 일본의 대동아주의는 190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변질되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이웃들을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고 진심 어린 착각에 사로잡혔다. 반면, 중국인들의 관념은 일본과 서양 침략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민족주의를 형성해왔다. 이러한 생각이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세계관과는 맞을 리 없었다. 서로의 인지적 부조화는 일본군이 피해자들을 한층 경멸하도록 부채질했다. _ 래너 미터, <중일전쟁>, p160/477


 나는 일본의 들난 모습을 똑똑히 보아야겠어요. 처량하면 한 대로, 갈팡질팡하면 하는 대로 실체를 보아야겠어요. 눈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그래서는 안 되겠어요. 국민 전체가 완전히 천치가 돼 있단 말입니다. 무라카미상은 자존심 따위 논할 처지도 아니라 했지만 나도 자존심 따위 논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애당초 자존심 따위는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자만심이었지요. 그 강국이라는 환상의 자만심이 우리들 생존을 위협하고 국가 민족을 존폐(存廢)의 기로까지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어째서 지엽적인 문제겠습니까. 전쟁은 창조의 아버지요 문화의 어머니라 하며 노닥거리던 그들이 이제는 전쟁은 장기(長期)의 건설, 중국 백성의 행복을 위한 것, 하고 노닥거리고 있어요. _ 박경리, <토지 15> , p640/720


 래너 미터 (Rana Mitter, 1969 ~ )의 <중일전쟁-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은 이 사건을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일본의 변질된 대동아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의 충돌이 빚어낸 참상이라는 것이 그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본다면,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위한 일련의 행위들 또한 함께 목격되어야 할 것이다.


 <도쿄니치니치신문>(1937년 12월 15일)은 <대 전승! 환희의 열풍 / 드디어 왔다! 세기의 축제일 / 12월의 도쿄 거리에 17일 빨리 "설날" / 황성은 깃발, 깃발, 깃발의 물결>이라고 보도했다... '1억 국민대망의 <남경함락 공보>를 접한 14일 아침은 동아 東亞의 암운을 완전히 쓸어버린 듯이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청명한 날씨다. 새벽을 알리는 신문 배달하는 발자국소리가 각 가정에 들릴 때,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는 오전 6시 반, 유량한 나팔소리와 함께 임시뉴스를 발표하자 전 국민은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은 "만세"를 외쳤다. 국기가 각 문은 물론 시전 市電, 시 버스에까지 휘날리고, 여기저기에서 명랑한 만세 소리, 크리스마스나 설날을 일축한 세기의 축제일은 아코의사赤?義士)가 숙원을 이룬 날처럼 도래했다.' _ 가사라하 도쿠시, <남경사건>, p120/195


 일장기 앞에서 기미가요가 제창될 때, 거기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발성하는 힘이 있는 동시에, 제창한다고 하는 실천을 통해서 이 힘이 '일본인'이라는 공동성을 연출해 나가는 동력으로 배양되는 것이다. 이런 힘의 결집은 기미가요 가사의 의미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함께 제창한다고 하는 실천의 산물이다(p142).... 이렇게 상기된 기억은 새로운 공동성을 창출할 것이다. 기억에 근거한 이런 노래야말로 섬노래라는 이름에 부합할는지 모르겠다. 섬노래란 음계나 리듬으로 환원해서 설명되어서는 안된다. 함께 소리내어 부른다는 실천에 의해서 상기되는 기억으로서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바로 함께 부르고 듣는다는 실천적 관계가 영위되는 장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할 터이다. _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 p143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 1957~) 의 <전장의 기억>은 기미가요(君が代)가, 정확하게는 기미가요의 제창이 전장으로 나가는 이들에게 고취하는 공동체의식에 주목한다. 일찌기 메이지 시대 국가의례를 통해 신흥강국의 이미지를 자국민들에게 각인시켰던 전례의 연장선상에서 소와 시대에 일어난 난징함락은 전승일로서 일본인들을 단결시켰음을 우리는 <화려한 군주>에서 이미 확인했다. 떠오르는 태양의 제국(Rising Sun)의 이미지는 이제 깃발로 형상화되었고, 이들의 진격은 이미지의 실현이 된다. 강한 공동체 의식으로 결합된 이들이 자기 동료의 죽음과 부상을, 그리고 자신에 대한 처지를 내부가 아닌 외부로 돌려 일어난 폭력. 그것은 난징학살의 성격을 설명한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화로 인해 효율적으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피를 맛본 군중이 이제는 통제선을 넘어섰다는 데 있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 한양(漢陽)을 점령하고 협상하려던 일본군의 생각이 선조(宣祖, 1552~1608)의 발빠른 몽진으로 틀어졌듯, 중일전쟁에서도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빠른 난징 포기로 인해 전황이 일본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된다. 더구나, 선택된 정보의 제공으로 승리에 도취된 국민의 전쟁요구로 이제는 멈출 수 없는 전쟁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 일본육군. 이러한 일본육군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본 해군의 작품이 진주만 공격(Attack on Pearl Harbor, 1941)로 이루어진 점을 생각해본다면, 난징 시민의 피로 행해진 예식으로 악(惡)을 성공적으로 소환시켰으나, 이 악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결국 악에 몸을 빼앗겨 죽음으로 이른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최후라 하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더 제기된다. 그 악은 어디에서 왔는가?


 남경 함락 후 전선의 확대가 불가피해진 일본은 내심 당황하고 혼란에 빠진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띄운 것이 화평이라는 기구(氣球)였고 미국과 영국에 중재해줄 것을 은근히 요망했다.(p641)... 비연맹국(非聯盟國)이라는 이유로 일본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 총회는 중국의 일본 침략 제소(提訴)를 받아들여 9개국 조약체결국회의(條約締結國會議)에 안건을 내놓는 등, 소련처럼 직접적인 군사원조는 아니했으나 분명히 중국 편에서 방자한 일본에 치를 떠는 영미를 믿을 수 없었던 일본은 중재 역할을 독일에게 가져가는데 문제는 상대, 장개석이 응할 수 있는 한계였다. 그것은 원상복귀 이외는 없었다. 갖은 지랄을 다 한 일본의 모든 행동이 도로(徒勞)로 끝나는 그 조건이나마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의 사정, 그러나 그들이 첫째 봉착한 것은 정부나 군부 이상으로 전쟁열에 들떠 있는 국민에게 뭐라할 것인가, 총동원하여 전쟁의 열기로 몰아붙여놓은 국민들을 납득시킬 방법이 있는가. 남경함락 후 전승에 취한 국민들은 날이면 날마다 일장기행렬, 등불행렬로 법석을 떨고 있었으니, 그러는 동안 각 파의 반목과 대립은 오기를 자극하고 고조시키면서 화평조건은 차츰 강경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랬다. _ 박경리, <토지 15> , p642/720


 남경 거리에 피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수십만의 원혼이 통곡하며 방황하는 모습이 보일 듯도 한데 심장에 철판을 깐 일본 정부는 도탄에 빠진 인민의 괴로움을 국민정부가 무시한다 하며 전가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남경 함락이 있은 지 한 달 가량이 지난 1938년 정월 16일, 실은 성명이 발표되는 그 시각에도 남경에서는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15> , p644/720


 일본군의 학살로 실체화된 악은 외부에서 온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재된 것일까?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Ein Bericht von der Banalitat des Bosen>에서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도출해 내지만, 그 평범성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아이히만)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었다면 유죄라고 인정했을까? 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틀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p77)...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_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p349


  제임스 도즈의 <악한 사람들 -중일전쟁 전범들을 인터뷰하다 Evil Men>는 악을 외부에서 온 것이라는 태도와 그들 내부에 내재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 모두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외부에서 온 것이라는 관점은 문제를 시스템으로 치환해 가해자들을 인간적인 연민으로만 바라볼 수 있으며, 행위에 대한 미움과 증오를 희석시켜 결국은 반성과 성찰없는 상태로 이끌 수 있다. 반면, 악을 그들 내부에 내재된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가해자들을 '악마화'하는 것이다. 가해자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몰아가는 이러한 시선 또한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켜 반성의 여지를 없게 만드는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외상적 사건을 이해하려 하는 것은 외상적 사건의 가해자들을 이해하려하는 것과 같다. 즉 그들을 신비화된 괴물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유사한 역설로 악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가해자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있는 사람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도덕적 모욕이며, 가해자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개념화화기를 거부하는 것도 도덕적 모욕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그들을 악마로 만들어야 하지만 동시에 악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악마로 취급하면 안 되는데, 악마화하는 것은 곧 그들이 악마적인 특징들을 공유한다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의 인간성 전체를 묵살해버리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요구를 응징에 대한 요구와 구별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분개가 극단에 치우쳐 타인을 도덕적으로 거부하게 되면 증오와 구별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이는 위험한 정치적 결과 뿐 아니라 깊은 내면적 결과 또한 초래한다. 타자를 악마화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 그리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에 전념하게 된다. 게다가 악마화하기는 악의 다름에 대한 시각을 조장해서 화해 가능성 뿐만 아니라 방지 가능성까지 차단해버린다. 악이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거나,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다고 생각되면 악을 꾸준히 발생시키는 매우 평범한 상황적, 구조적 특징을 확인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악을 타자화하면 결국 타자를 악으로 만들게 된다. _ 제임스 도즈, <악한 사람들> , p44/239


 악의 타자성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면 중요한 철학적 구별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어떤 행동은 이해 불가능하며 우리의 본성과 이질적이라는 느낌은 '단지' 느낌이 아니다... 게다가 악의 타자성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면 증오 역시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상실이다. _ 제임스 도즈, <악한 사람들> , p45/239


 이와 같이 어려운 악을 바라봐야 하는 관점의 선택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저마다 다른 결론에 이르겠지만, 제프리 버튼 러셀(Jeffrey Burton Russell, 1937 ~ )의  '악'에 대한 정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악마란 호전적인 힘이 인간적으로 또는 신적으로 구체화된 것이고, 이러한 호전적인 힘이 우리 의식의 밖에서 지각된 것이다. 이러한 힘 - 우리 스스로는 이러한 힘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듯하다 - 은 외경, 불안, 두려움, 공포와 같은 종교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악마는 신들만큼이나 종교적인 의미를 상당히 드러낸다(p37)... 악마란 기묘하고 한물간 존재가 아니라 인간 정신 안에, 또는 인간 정신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영원한 힘이 표출된 것이다... 악마는 이 세상이 겪는 고통 속에 진정으로 살아있다. 그리고 이러한 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악이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고, 그 각각의 악은 무자비한 고통을 가하면서도 진정으로 살아 있다. _ 제프리 버튼 러셀, <데블 The Devil> , p40


 러셀의 정의에 따르면 악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자리한다. 아렌트가 밝혀낸 '악의 평범성' 또한 이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전쟁 가해자들 또한 한 명의 인간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 명의 인간이 갖는 수많은 가능태(可能態)로 악은 실현 이전에 내재해 있지만, 이같은 가능태가 개인의 욕망과 이데올로기의 실현이라는 휘발유를 뒤집어 쓴 상태에서 전쟁과 같은 발화점을 만났을 때 가능태는 '악마'라는 현실태(現實態)로 구현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문제는 이 발화점이 개인마다, 사회마다 다르다는 점은 아닐런지...


 인간이란 종이 한 장 차이라구. 모두가 그래! 잔혹행위, 침략, 도륙, 세계사는 그런 것들로 하여 피에 물들여져 있는 거라구. 방어와 공격은 숙명, 그건 인간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수렁이라구. 집단의식과 자유주의는 영원히 승부 없는 줄당기기란 말이야. 흥, 소속감도 본능이요, 자유 지향도 본능이다! 그래 다아 본능이다! 본능! 인간이라고 뽐낼 것 하나 없다구. 그래 맞어. 바로 뽐내는 그 특성 때문에 인간이요, 그 특성 때문에 인간은 죄악의 진구렁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_ 박경리, <토지 15> , p576/594 


 일상은 전장을 준비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장은 전장을 준비한 일상의 의미세계를 변화시켜 가는 모멘트로도 충만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전장에서 일상으로 (p38)... 전장 동원이 분명 죽음으로의 동원인 이상, 전장은 '자기 나라 속의 난민'을 창출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동원은 의식과 정체성이 아니라 규율의 문제이며 신체적 실천의 문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변용은 신체적 문제이며 차츰 의식의 문제, 의미의 문제로 이행한다. 무의식 속에 습관화되어 익숙해져 버린 실천이 전장에서의 신체의 변용에 이를 때, 지금까지 말할 수 없었던 임계영역이 이번에는 말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머피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자신 속에서 '외계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장 동원이 완수되려면 이 '외계인'의 말(잡음)은 봉쇄되어야 한다... 전장 동원은 '외계인'의 말을 봉쇄하고 '자기 나라 속의 난민'을 내부의 적으로 죽임으로써만 수행되는 것이다. _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 p40


 인간이란 궁극적으론 이기주의니까 남보다 내가 잘살아야겠다는 욕망을 부정할 순 없어. 그러니까 충용무쌍한, 천황의 적자(赤子)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국가의 이익,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약탈과 살상, 그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니 찬양을 한다 하더라도, 아니지 아니 창조의 아버지 문화의 어머니라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자고로 전쟁이란 영웅들을 창출해낸 것만큼은 틀림없고오. _ 박경리, <토지 15> , p601/720


 난징학살 이후 중일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전쟁이 가열된 전쟁은 더 큰 자원의 소모를 가져오고 체제는 총력전(總力戰) 체제로 넘어간다. 여기에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Pacific War 1941)까지 일어나면서 동원을 위한 독려는 더욱 확대되는데 여기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바로 직전까지 타자(他子)였던 이들이 전선(戰線)의 확대로 공영권(共榮圈)안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이 시점의 한국인들에게는 선택이 주어진다. 친일과 반일이라는 파란 약과 빨간 약을. 개인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은 이때로부터 잉태되었다고 해석하다면 지나친 것일까....


 "오래가야 일본이 안 망하겠습니까? "중국이 손을 드는데도?" "남경을 내어주었다 해서 일본이 다 지배한 것도 아니고 중국인 전부가 항복한 것도 아니지요. 이미 장기전으로 들어갔고."(p514)... "장차 조선사람들은 어찌 될 것인지." "전쟁에 내몰겠지요." "그렇다면 조선사람들 씨가 안 마르겠냐?"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사람에게 무장을 시킨다는 것은 일본으로서 상당히 위험한 일이지요. 또 그런 만큼 일본은 다급해진 것이고 약화되었다 할 수도 있을 겁니다." _ 박경리, <토지 15> , p515/710


 <토지 15>의 마지막 난징대학살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30만명의 무고한 사람이 학살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의 보도가 가져온 외교적 파장은 전후 알려진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의 영향과는 또다른 부분이었다. 이 사건과 함께 생각해본 '악의 평범성'과 역사적 의미는 작품 속의 의미와는 별도로 작품 밖의 독자에게 다가온다...


PS. <토지>에서 서희 일행이 간도에서 돌아오는 3부 이후는 이전 1, 2부와는 분명 다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1,2부에서는 악의 화신이 조준구라는 개인이었다면, 개인의 복수가 거의 마무리된 3,4부에서 악은 일본 제국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때문에, 이전에는 개인 심리가 작품 내에 깊이 있게 묘사된다면, 3부 이후에는 사회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인물의 대사에 드러난 심리 대신 사회 분위기에 묻어난 시대 정신. 이같은 변화가 <토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깔딱고개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이번 주 독서챌린지 글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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