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1주를 쉬고 다시 시작된 토지 독서챌린지. 개인적으로 독서감상평보다 더 어려운 3행시 과제지만, 그래도 지난 번보다 제시어가 길지 않아 어찌어찌 끝냈다. 3행 시 과제물은 페이퍼의 마지막에 슬며시 끼워 넣으며 일단 글을 시작하자.


* 2021.09.27 ~ 10.03 SNS 미션 (10월 03일 자정까지) '한가위' 3행시를  포함한 감상평을 아래의 조건을 충족하여 신청서에 적어주셨던 개인 SNS에 남겨주세요..

 

<토지 6>을 마치는 시점에 <토지>2부가 1부와는 성격이 다소 달라졌음을 느낀다.인물들간의 대화에 '역사의식', '민족의식'이 보다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일상의 모습을 다뤘던 이전 <토지>에서는, 마치 펄 S.벅(Pearl Sydenstricker Buck, 1892~1973)이 <대지 The Good Earth>에서 왕룽 일가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최(崔)씨 가문의 흥망에 초점을 맞췄다면, 2부에서는 서희의 간도 이주와 함께 공간적 배경과 의식이 민족 차원으로 함께 넓어진 느낌이다. 이러한 이유가 <토지>를 역사소설로 분류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이처럼 2분에서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는 장면이 점차 많아지는데, 서의돈과 상현, 명빈의 대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내가 무속도 보존할 가치가 있다 한 것은 그 속 검은 왜놈들이 저희들 미신은 뒤로 감추고서 야만이야, 미개다 하는 수작을 뻔히 알기 때문이라구. 그것이 다 이 나라 문화를 깡그리 없이하자는 수작이거든. 그러니 내가 보존하자는 것은 미신을 보존하자 그거는 아니라구. 무속도 우리 백성들이 살아온 자취요 풍속이라면, 그걸 아주 싹 지워버릴 수는 없어." _ 박경리, <토지 6> , p323/482


 작품에서는 술에 취한 취객(명빈)의 주사(酒邪) 정도로 표현되지만, 담긴 내용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나라 무속신앙을 미신(迷信, superstitio)으로 취급하고 계몽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식민통치의 한 수단이었음을 생각해볼 때 생각이 멈추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총독부의 이러한 방침은 당시 총독부 촉탁이었던 무라야마 지쥰(村山 智順, 1891~1968)의 저서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귀신(鬼神)을 믿으며 행복을 기원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수동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수동성이 조선 민족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그의 논리는 결국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흐름과 맞닿아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총독부 뿐 아니라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도 주장되며, 미신타파는 근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속(巫俗)을 수동과 미신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가,


 귀신신앙의 파지 把持와 원시종교인의 무격류의 활동이야말로, 요컨대 조선민중의 인생관이 자기 이외의 힘, 불가사의한 힘의 정령에 의하여 그 생활을 좌우할 수 있다고 하는 신앙 관념에 입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외력 外力에 의하여 그 생활을 지배당한다고 하는 관념은, 결국 자기의 생활은 다른 외력과 외물의 존재에 의하여 결정되고, 그 결정된 대로 이끌려 간다고 하는 숙명관념, 운명관념의 주요한 내용을 형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p6).... 민간신앙은 민중이 품고 있는 생활의식의 표현이다... 이것의 소위 말하는 정신적, 본질적 요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개 자력갱생적 기력의 왕성함이 결여되었다는 이야기이고, 이 기력이 성하지 못하므로 전통의 힘에 속박되어 운명관, 숙명관의 인생관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까닭은 아닐까. _ 무라야마 지쥰, <조선의 점복과 예언> , p7


 생각건대 조선의 귀신은 사람에게 행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재화 災禍를 주는 일이 많아 인생에 있어서 재화의 태반은 이 귀신의 소행에 의한 것으로 보았으므로 귀신신앙은 마침내 양귀신앙이 되었다. 요컨대 조선에 있어서의 귀신신앙은 양귀로써 재화를 제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의 행복을 누리려는 소극적 생활 유지의 욕구에서 출발, 발달하여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욕구가 왕성할수록 그만큼 귀신의 활동을 왕성케 하고 있다. _무라야마 지쥰, <조선의 귀신> , p14


  이에 답은 세계적인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 ~ 1986)의 설명이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아데는 아시아의 샤마니즘 속에서 세계 문화의 혼합을 발견한다. 중앙 아시아를 비롯한 북부 지역의 애니미즘, 샤마니즘, 텡그리l( Tengrism)로 대표되는 '하늘' 숭배 의식 등이 남방 불교 문화와 혼합되면서 독특한 문화양식이 창출되었다는 것이 엘리아데의 시선이다. 특히, '텡그리'의 경우 발음의 유사성을 근거로 일부에서 '단군 檀君'과 관련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너무 길어지게 되니 다른 글에서 다루는 것으로 하고 일단 넘기자. 


 샤마니즘의 특징적인 요소는 샤만에 의한 "영신"의 체현이 아니라, 샤만의 천계상승 혹은 지하계 하강에 의해 야기되는 접신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p425)... 인도의 영향이 중앙 아시아로 미치는 과정에서, 그것을 실어다준,  말하자면 수레 역할을 한 것은 주로 불교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인도가 중앙 아시아와 북아시아에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이 영향이 중앙 아시아나 북아시아가 경험한 유일한 남방으로부터의 영향은 아니었다고 하는 점이다. 아득한 선사시대부터 남방 문화 그리고는 그 뒤로는 고대의 근동 문화가 중앙 아시아나 시베리아의 온갖 종류의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_ 미르치아 엘리아데, <샤마니즘> , p426


 우리는 아시아적 샤마니즘을, 그 원초적 바탕 이데올로기 - 인간으로 하여금 천상계 상승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천상계의 절대신에 대한 신앙 - 가 불교의 침투를 정점으로 하는 일련의 기나긴 외래 문화의 유입으로 끊임없이 변형되어온 고대의 접신술로 이해 해야 한다. 외래 문화와 함께 들어온 신비스러운 죽음이라는 개념은 조상신 및 "영신"과의 관계, "빙의"에서 단절되었던 이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들었다. _ 미르치아 엘리아데, <샤마니즘> , p430


 이처럼 알레아데의 <샤마니즘>은 명빈의 주장을 지지한다. 또한, 다른 한 편으로 '검은 왜놈들이 저희들 미신은 뒤로 감추고서 야만이야'라는 그의 말은 인도의 힌두교만큼이나 많은 가미(神)을 모시는 일본 종교의 실상을 알고 나면 조선의 무속 신앙이 비(非)과학적이라는 비난은 적어도 일본인들이 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식민지 하에서 우리의 무속을 탄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굿에 담긴 대동(大同)의 성격 때문이 아니었을까.


 군도(群島)로 이루어진 일본은 오랜 기간 문화적 고립을 경험해왔으며, 그러한 고립은 정치적으로 강요된 측면도 있었다. 때문에 일본은 아주 독특하고 고유한 종교적 전통이 발전할 수 있었는데, 두 가지 주요 전통인 신도와 불교는 교리에서 대중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신도(神道)는 고대 샤머니즘 관습에서 유래한 일본 고유의 종교다... 생활종교로서 신도는 탄생, 결혼, 출산과 관련된 통과의례를 주재하고 죽음과 같이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은 멀리한다. 그러나 고인들 중 조상과 전사자들은 가미(神)로 간주한다. 가미는 또한 산, 강, 야생동물, 심지어 돌 속에도 내재한다. 신도는 주로 의식을 통한 정화의 종교지만 대중적 차원에서는 인자함과 악의를 동시에 보여주는 가미에 대한 화해, 길조와 흉조 같은 운에 대한 믿음, 그리고 다양한 주술적 종교관습을 중시한다. _ 프랭크 웨일링 외, <종교> , p80

 

 정수미의 <한국의 굿놀이>는 '굿'으로 대표되는 무속이 단순히 개인의 길융화복을 비는 성격을 넘어서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개인을 넘어서 마을, 나라 굿을 통해 만나고 어려움과 걱정. 기쁨을 나누는 현장인 '굿놀이 장(場)'은 식민지배계층에게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과학'이라는 명목으로'집합금지명령'을 행한 것이 아닐까. 물론, 무속 안에 미신적 요소 나 샤먼(무당)의 탐욕, 혹세무민 등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일제 식민 지배 계층에게는 불온 세력 척결을 위해서, 서구 기독교 선교사들의 교세 확장을 위해 우리나라 무속은 양쪽의 공격을 받아 점차 소멸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했을 때 우리에게 남겨진 명절 한가위, 추석은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제 과제 제출 시간이 된 듯하다...


: 없이 높고 푸른 

: 을 하늘을 바라보며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 로받는다.


 글을 마무리 하기 전에 <토지 6>의 다른 대목을 소개하며 마치려한다. 지난 주에는 이 상(李箱, 1910~1937)의 시(詩)와 관련된 책을 주로 읽다보니, 이 상의 <날개>를 떠올리게 되는 <토지 6>의 아래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자신이 관심이 있는 것을 본다던 말을 새삼 실감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날개는 무신 날개고?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니요. 날개가 돋쳤소. 탄탄한 날개가요. 그러니께 나는 훨훨 날아댕길라요. 구만리 장천을 훨훨 날아댕길라요. 훨훨, 훨훨-훨-훨-.' _ 박경리, <토지 6> , p383/482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_ 이 상,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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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02 20: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제잔재가 남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해 더 억압받은 거 같아요. 무속의 한 담긴 노래들 바리데기 영동할매 등등 알고보니 구구절절 재미있고 이승과저숭을 오가는 판타지*^^*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

겨울호랑이 2021-10-02 21:19   좋아요 2 | URL
일제 강점기 당시도 암울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그들이 저지른 전통과의 단절과 식민사관의 이식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의도대로 생각하고 움직여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미니님 말씀처럼 우리가 외면했던 우리 옛것에 대한 재발견이 최근 이루어지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듯 합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1-10-03 17: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 잘 쓰시는 겨울 호랑이님이지만 3행시 내공은 좀 갈고 닦으셔야 할듯요. ㅎㅎ
너무 평범하옵니다. ^^
한달동안 제가 게을렀는데 잘 지내셧죠? 굿이나 무속에 대해서는 저 자신이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잘 안보게 되는데 겨울 호랑이님 글을 통해 굿의 다른 의미들을 또 생각해보게 되네요. ^^ 남은 연휴 잘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1-10-03 17:41   좋아요 3 | URL
^^:) 그렇지 않아도 3행시 과제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ㅜㅜ 본문 쓰는 것보다 더 고민하지만 잘 안 되네요 ㅋ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연휴 되세요!
 

 본 논문에선 '삼차각'이 상대론의 주 배경인 4차원 공간상에서 물체의 물리적 위치를 초구면좌표계로 나타날 때 필요한 세 개의 각도값임을, 그리고 '육면각'이 삼차각의 적분으로 얻어지는 초입체각인 동시에 4차원상에서 한 점에서 만나는 여섯 개의 면이 이루는 각임을 주장할 것이다. 이는 신범순이 '삼차각'에 대해 "더 높은 차원"을 지향하는 공간기호학적 기호"라 지적한 것과 상통하는 바이며, 또한 앞서 언급한 권희철의 아이디어, 즉 "육면각체"가 한 꼭지점마다 여섯 개의 면이 만나는 4차원 초입방체'라는 아이디어와 일부 궤를 같이한다. 마지막으로 <삼차각설계도 - 각서1>과 <건축무한 육면각체 - AU MAGASIN DE NOUVEAUTES>에 나타난 차원 확장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11


 얼마 전 서재 이웃인 mini74님의 글 중에서 이상(李箱, 1910~1937)의 시(詩)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일부 내용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개인적으로도 다른 이상의 작품 안에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상대성이론의 내용이 담겨있다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기에 더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운동>에 담긴 상대성 이론 관련 페이퍼 :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9364036#Comment_9364036


 바로 논문을 찾아 읽고 싶었지만, 때마침 프로젝트 완료일이 맞물려 며칠이 지난 후에 겨우 논문을 읽을 수 있었고, 페이퍼를 통해 해당 내용을 정리한다.


 사실,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다룬 선행 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이상 전집에도 작품에 담긴 차원(次元)의 문제에 대해 해설되고, 차원 확장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분명하게 언급된다. 물리/수학적 해석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기존연구(권영민)에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또한,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 두 연작시 내에서는 관련성을 찾지만, 전체적으로는 별개의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작품의 큰 제목은 '삼차각설계도'로 표시되어 있으며, <조선과 건축>(1931,10)에 김해경(金海卿)이라는 본명으로 발표된 <선에관한각서 1-7>이라는 일곱 편의 작품이 묶인, 일종의 연작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작품들은 모두 수학적 또는 물리학적 개념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우주 공간, 태양과 광선, 과학과 시간 등에 관한 새로운 지식들을 동원하여 인간의 존재에 관한 다양한 상념을 해체시켜 기표화한 것이 특징이다. _ 권영민, <이상 전집 1> , p272


 이 방법(데카르트 좌표계)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고, 또한 3차원에서 일반적인 n차원으로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다. 이 같은 해석기하학의 원리는 뒤에 기하 도형의 평면적 2차원적 위상을 입체적이고 공간적인 3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다양한 대수 기하학의 원리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_ 권영민, <이상 텍스트 연구>, p103


 이에 대해 오상현은 이번 연구를 통해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시를 접근하면서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각각의 연작시들을 통합하고 있다. 차별화된 접근법은 '삼차각'이라는 용어에서부터 드러난다. 기존 연구에서는 '삼차각'을 3차원에서 용어를 정의하려 했기에 부정확한 용어의 사용으로 해석해왔다.


 연작시의 내용과 의미를 이해해보기 위해 가장 먼저 선행 되어야 하는 작업 중 하나는 시에 드러난 물리학적 개념과 용어들에 대해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연작시의 제목에 나타난 용어인 "삼차각"과 "육각면체" 등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연작시 전반에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할 것이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09


 여기서 제목으로 내세운 '삼차각설계도'라는 말 가운데 '삼차각'은 수학 용어로서는 부정확한 말이다. 수학에서 말하는 '각(角)'이라는 것은 3차원 이상의 공간에서도 언제나 2차원 평면에서의 '각'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삼차각'이란 수학적 개념이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세 모서리가 만나는 각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_ 권영민, <이상 전집 1> , p272


 반면, 오상현의 연구에서는 이를 4차원에서 삼차각을 정의하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위한 근거를 이어지는 <선에관한각서 2>에서 찾는다. 1+3을 1개의 시간과 3개의 공간으로 해석하며 자신의 논증을 뒷받침한다.


선에관한각서 2

 1+3

 3+1

 3+1 1+3

 1+3 3+1

 1+3 1+3

 3+1 3+1

 3+1

 1+3... (중략)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삼차각이 4차원 공간에서의 3차원 각도값이라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학적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였다. 이를 고려할 때, '삼차각설계도'의 의미는 4차원 공간상에서의 설계도로 해석된다. 이때 이상이 설계한 4차원 공간이란, 1개의 시간축과 3개의 공간축이 결합된 4차원 시공간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16


 논문에서 저자는 '삼차각'이 4차원 공간에서의 3차원 각도값으로 정의한 후 두 연작시의 관계를 설계-건축의 프로세스로 정의한다. <삼차각설계도>가 4차원 상의 설계라면, <건축무한육면각체>는 그것의 건축과정이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설계와 건축이라는 행위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 그리고 <삼차각설계도> 발표 1년 후 <건축무한육면각체>가 발표됐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삼차각설계도>에서 설계한 대상은 '무한육면각체'이며, <건축무한육면각체>는 그것을 건축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17


 다만, 결론을 보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다중선형사상(multilinear map) 또는 텐서(tensor), 벡터(vector)를 먼저 알아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벡터, 텐서를 통한 차원 확장의 이해는 <건축무한육면각체>에서 사각형 중심 결합을 통한 차원 확장과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차원확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오상현은 '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이라는 시구에 주목한다. 삼차각의 크기는 사차원에서 최소 6개의 면이 만나 정의되는데, 시구에서는 '사각'이 4번 반복된다는 것이다. '사각 중의 사각'(편의상 띄어쓰기함)을 사각형의 중심결합으로 4번 반복을 하지만, 4번째 반복을 마지막으로 중심결합을 중단하면서 4차원 이상 고차원인 5/6차원으로의 도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리며, 이상 시의 배경이 4차원으로 한정됨을 논증한다.



[그림] 벡터공간(출처 : 위키백과)


 

민코프스키는 허수의 시간 변수를 도입하여 4차원 연속체에서의 불변량이론을 3차원 유클리드공간 연속체에서의 불변량이론과 아주 닮은 형태로 만들었다. 따라서 특수상대성이론의 4차원 텐서이론은 3차원 공간의 텐서이론과 비교할 때 실수성과 차원의 수에서만 다르다... 성분들 가운데 첨자에 4가 한 번 들어간 것들은 순허수이고, 이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실수이다. 3차 이상의 고차텐서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이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실수이다. 3차원 이상의 고차텐서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다. _아인슈타인,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 p96


 정리하면, '삼면각체'란 3차원에서의 임의의 각진 도형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n-삼면각체란 n개의 점을 가진 3차원에서의 임의의 각진 도형을 의미함을 확인할 수 있다. 동일한 논리로, 무한-삼면각체란 3차원에서 무한한 점을 가진 삼면각체이며, 3차원상의 (각질 수도, 매끈할 수도 있는) 임의의 도형을 말함을 알 수 있다.(p123)... 3차원에서는 최소 세 개의 면이 만나 이차각 크기가 정의 되어 그것이 '삼면각'이라 불리듯이, 4차원에서는 최소 6개의 면이 만나 삼차각 크기가 정의되며, 자연스럽게 그것을 '육면각'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25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의중의사각"은 무엇일까? 3차원상에서는 더이상 xy-xz-yz 사각형 결합체의 중심에 또 다른 사각형의 중심을 온전히 결합할 수 없다. 때문에 새로운 축, 즉 4차원의 축(w축)을 도입하여야하며, 여기서 논의영역이 3차원에서 4차원으로 확장된다.(p145)... 이상은 4개 평면(xy, xz, yz, xw)의 사각형 중심 결합은 활용하지 않았다. 즉, 시에서 논의하는 공간을 4차원으로 확장시키자마자 사각형 중심 결합이라는 도구의 활용을 중단하였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46


 이러한 논의 끝에 내려진 저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마치 3D프린터에서 출력물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쌓이는 모습(stacking prints)처럼 작가 이상은 자신이 작품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담고자 하지만, 차원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것에서 느끼는 절망과 대안이 두 작품에 표현되었다는 것이 논문의 내용이다. 그 절망은 결핵에 걸린 환자 이상, 식민지 지식으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작가 이상의 한계에서 오는 것일수도 있겠지만, 시간(time)을 넘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절망이기도 할 것이다. 빛 조차도 광속(光速)이상의 속도를 내지 못하기에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1930년대의 '현재'에서 그가 느낀 절망은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된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육면각체'란 4차원에서의 임의의 각진 도형을 말하는 것이며, '무한육면각체'란 4차원에서의 임의의 도형을 말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인정할 경우, 이상이 언급한 '무한육면각체'란 4차원 시공간에서의 임의의 도형(즉, 3차원 물체의 시간에 따른 움직임을 4차원 시공간에서 본 것)을 말하는 것이며,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의미는 3차원 물체의 시간에 따른 변화까지 4차원 시공간에서 설계하고 건축함이라 볼 수 있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20


 건축가는 3차원 물체를 설계하고 건축하지만, 3차원 공간에 직접 설계를 진행할 수는 없다(절망). 대신 2차원 도면에 설계를 진행하고, 거기에 3차원 정보를 담기 위해 여러 투상도와 정보를 기입하여 2차원 도면의 한계를 극복한다. _ 오상현 외, <이상 시의 4차원 시공간 설계 및 건축>, p128


 이처럼 오상현의 이번 연구는 육면각체가 일반적인 인식차원인 3차원이 아닌 4차원에서의 개념이라는 용어정의를 통해 개별 연작시로 받아들여지던 <삼차각설계도>와 <건축무한육면각체>가 실은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논문의 내용은 여기까지이지만, 이상 연구에 있어 이들 작품 뿐 아니라 그의 작품(또는 삶) 전체가 연계성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과 그의 난해한 시가 실은 치밀하게 설계된 의도적인 작품임을 밝혔다는 점에서 분명 뜻깊은 논문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연작시 <선에 관한 각서 1~7>은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의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결국은 시각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그 시상의 결말에 도달한다(p120)... 이상은 먼저 인간의 감각 가운데 시각은 빛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삶의 모든 과정이 빛을 통한 시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인식도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며, 모든 사물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름이라는 것이 결국 시각의 표현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_ 권영민, <이상 텍스트 연구>, p121


 이번 이상관련 논문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피라미드 설계자' 이상을 생각하게 된다.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꾼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피라미드 내부를 복잡하게 설계한 이들. 그들처럼 작가 이상 역시 자신의 내면 깊은 생각을 곳곳에 숨겨놓은 암호처럼 숨겨 놓은 것은 아닐런지. 그의 삶이 채 30년이 안 된 짧은 시기였지만, 한문(漢文) 파자(破字)에 능하고 많은 작품이 일본어로 씌여졌으며, 공학적 지식이 담긴 작품이 많기에 접근하기에 쉽지는 않지만, 드물게 '가슴'이 아닌 '머리'를 노래한 시인 이상의 매력은 90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음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재밌는 주제를 던져주신 미니님께 감사드리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논문원문을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KCI 논문 URL을 첨부한다. 본문에서 보다 충실한 저자의 설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754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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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01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무심코 던진 돌이 이렇게 멋진 다이아몬드가 돼서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짜 열독했지만 1/10쯤 뭔가 이해한거 같습니다. 겨울호렁이님 하옇튼 멋지십니다*^^* 하지만 이상이 시에서 담고자 했다는 시간을 넘어서지 못하는 본연의 한계 지식인으로서 식민지국민으로서 또 개인의 삶에서 느꼈을 한계와 절망 등에 대해선 뭔가 어렴풋이 알듯말듯, 겨울호랑이님덕분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1-10-01 19:35   좋아요 2 | URL
에고 과찬이십니다. 제가 미니님 덕분에 모처럼 즐겁게 이상 시집을 읽었네요. 좋은 화두를 던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만, 제가 부족해서 더 쉽게 풀이하는데는 한계가 있는 부분은 좀 아쉽네요... 좋은 저녁 되세요!^^:)

mini74 2021-10-01 21:22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호랑이님. 남편 아이도 포기한 접니다 ㅎㅎ 이정도 알아들은건 다 겨울호렁이님 글솜씨니 가능한 것. 제가 모자란 게 아니라 울 남편과 아이가 친절하지 않았음을 알게 됐습니다 ㅎㅎ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1-10-01 21:41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미니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
 


 무엇을 거절당했으며 무엇을 희망했었는가. 혼인을 거절하고 혼인을 희망했었다. 단순히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지순한 것을 거절당한 것은 이 편이며 거절한 것은 그 편이 아니었던가? 길상의 두려움은 서희에 대한 자기의식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는 데 있었다. _ 박경리, <토지 6>, P112/482


  박경리(朴景利, 1926 ~ 2008)의 <토지 6>는 길상과 서희의 어색한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서희가 상현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배우자로 길상을 생각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김훈장 등 주변인은 물론 결혼 당사자인 길상마저 이를 거부할 정도로 서희의 결혼 결정은 적지 않은 파장을 용정에 가져왔다. 무엇이 문제일까.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그러나 길상은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p20).... 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그것 이외 어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_ 박경리, <토지 6>, P21/620


 결혼(結婚)을 하려는 또는 피하려는 길상과 서희의 생각은 다르다. 서희를 사랑하기에 되려 거리를 두는 길상과 자신의 야망을 위해 결혼을 결심한 서희.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된다(그래서 부부의 날이 5월 21일이라고 한다)는 결혼이기에 생각이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하겠지만, 이들의 결혼은 두 사람의 생각 차이 외에도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래서, 이번 페이퍼에서는 앨런 맥팔레인 (Alan Macfarlane, 1941 ~ )의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Marriage and Love in England 1300~1840>의 도움을 빌려 결혼과 사랑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인류학자 로버트 로우이(Lowie)에 의하면 대부분의 인류사회에 있어서 결혼을 성사시키고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관습적 견해이다. 원시부족뿐 아니라 서구의 몇몇 사회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낭만적 사랑은 무색해진다. 낭만적 사랑이 없을 수는 없으나,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사안에서 로맨스는 중요치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179


 저자 앨런 맥팔레인은 대부분 인류 사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결혼에 '사랑'이라는 감정 요인이 거의 관여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로부터 오늘날에는 보편화된 '낭만적 사랑'에 기초한 '연애결혼'은 오직 잉글랜드, 미국 등 영미(英美)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특성을 저자는 '맬서스주의적 결혼체제'라고 부르며,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에서 잉글랜드의 근대성과 연관짓는다. 이런 면에서 '개인의 감정'에 기반한 결혼은 근대적 양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녀들이 가족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구실을 제공해 준다. 자녀들은 '사랑'을 위해 결혼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부관계를 부모형제에 대한 유대보다도 최우선에 둔다. 따라서 아프리카에서는 '연애결혼(love marriage)'은 가족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이동시키는 이데올로기적 발판을 제공함으로써 자녀들이 부모세대를 떠나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사회적으로 상승이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변동은 위로 향하는 부의 흐름에서 아래로 향하는 부의 흐름으로 전환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또한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라 남편-아내의 관계를 가장 중요한 심리사회적 유대관계로 분리시키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182

 사실, 맥팔레인이 본문에서 지적한 '부모'는 단순하게 혈연적 부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속한 집단, 관습의 총체이며, 결혼 당사자가 이러한 관습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사자 의사'를 존중하는 제도가 우선 정착될 필요가 있었다.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결혼 당사자의 의견에 우선권을 준 이 같은 제도가 과연 산업화의 노동자 공급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는 별도의 페이퍼로 미루도록 하고, 여기서는 1910년대 간도 지역 서희-길상의 결혼 속에서 매우 서구적인 생각이 담겼다는 정도를 담자. 


 부르주아들이 즐겨 쓰는 결혼 전략은 소개에 의한 결혼이었다. '중매장이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 역할을 했는데, 대개 좋은 집안의 친지인 노처녀들로서 나무랄 데 없는 평판을 지니고 있어 모두에게 신뢰를 주는 인물이어야 했다. 이들은 서로 조건이 어울려 보이는 젊은이들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부모, 자크 샤스트네의 부모, 에드메 르노댕의 아저씨 부부는 이처럼 소개를 받아 결혼했다. _ 필립 아리에스 외, <사생활의 역사 4> , p350


  미래의 배우자를 고르는 몇 가지 기준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한 가지 조건이 탁월하면 다른 불리한 점은 무시될 수 있었다. 결혼 체제에서 가장 흥미로운 특징은 아마도 재산과 혈통 사이의 용이한 교환이었다.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교환이 극도로 어려웠다. 예컨대, 낮은 카스트의 재산 많은 청년이 브라만의 가난한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부유한 유산계급(bourgeois) 청년은 귀족 신분과의 결혼에 장벽을 느꼈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241


 우리보다 앞서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하는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도 신분을 뛰어넘는 결혼은 매우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대였다. 이 시대에 이제 막 신분제가 철폐된 조선 사회에서 서희의 결정이 가져온 충격이 컸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순결한 사랑'을 지키고자 결혼을 거부한 길상의 결정까지 함께 놓고 생각한다면 어느 시대 못지 않게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고, 평등하게 바라보는 근대화된 시대상을 그리게 된다. 서희의 결혼 목적만 빼놓고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사회에서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생산, 즉 자손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중요성이 있다(p219)... 결혼은 남녀 간에 견해차이가 있었고, 그와 동시에 가문의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p223)... 반려자를 얻는 이상적 결혼, 우정으로서의 결혼은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이상인데, 기독교적 이상이 제시하는 결혼의 세 번째 존재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상호교제, 도움 그리고 위로였다.' _ 앨런 맥팔레인, <잉글랜드에서의 결혼과 사랑> , p229


 

그렇지만, 가문과 자신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는 몽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 에드몽 당테스와 같은 서희의 모습을 본다면,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라 관습에 누구보다도 철저한 결정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신분, 재산 등을 고려하지 않는 서희의 모습에서 냉혹한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anism)에 충실한 인간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같은 서희의 면모가 길상으로 하여금 서희를 사랑하면서도 거리를 둘 수밖에 만들었던 것은 아닐런지.  결국, 이렇게 끝나는 듯하던 이들의 관계지만 용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닥친 불의의 사고로 극적으로 맺어지는 것을 보면서, 사고를 통해 이들이 '거리'를 분명 느끼면서도 결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비록, 그 운명이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하겠지만.


 푼수 없이 지껄인 길상이나 체모 잃고 울어버린 서희, 푼수 없었다고 느끼는 이상, 체모 잃었다고 느끼는 이상, 이들 사이에는 엄연한 거리가 있는 거고 거리를 의식하면 할수록 멍울은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은 더 깊은 고뇌를 안고 돌아가는 것이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때론 절망이, 때론 희망이 교차하는 마음은 끝없이 방황하면서. 그러나 이들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그것은 용정을 향해 달리던 마차가 어떻게 되어 그랬던지 뒤집힌 사건이다. _ 박경리, <토지 6>, P159/482


 이번 주에 읽은 <토지 6>에서의 결혼을 둘러싼 서희와 길상의 미묘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충실한 근대적 사고를 길상에게서 발견하는 한편, '가문'을 지키기 위해 신분의 차이는 신경쓰지 않는 보수(保守)주의적인 서희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이 결혼으로 온전히 봉합되지 않았음을 길상의 귀마동(歸馬洞)에서의 환상에서 확인하게 된다. '꿈'이라는 환상을 통해 길상은 자신의 미래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부르다흐는 꿈-생활의 특성을 다음과 같은 명제로 요약한다. <꿈의 본질적 특징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1) 지각 능력이 공상의 산물을 감각 인상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정신의 주관적 활동이 객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2) 수면은 자아의 권능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잠이 들면서 일종의 수동적 상태가 된다.... 자면서 보는 형상들은 자아의 권능이 중지된 결과 생겨난 것들이다. _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 p48/505



 말 한 필은 서쪽에서 돌아오고 다른 한 필은 동쪽에서 돌아오는 게요, 실은 그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말이 돌아오는 거지만, 한데 사내와 여인은 옛날의 그들은 아니오. 아니거든. 머리칼은 햇볕에 타서 삼올 모양으로 누렇게 뜨고 얼굴에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굵은 주름, 거미줄 같은 잔주름, 이빨은 빠져서 양 볼이 꺼지고 파파할멈 할아범의 모습들이오. 허나 그보다 슬픈 것은 사내와 여인이 서로를 알지 못하며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일이었소. 그네들은 타인이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요. 제가끔 자기 갈 길을 탄식하는 게지."_ 박경리, <토지 6>, P173/482


PS. <토지>를 읽다보면 길상이 환상에 빠지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만약,  무당이 이런 길상을 보면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도 길상은 스님이 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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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내가 소설 속에 잠시 등장할 수 있다면 소설 속 인물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토지 5>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주어진 주말 미션은 소설 속의 인물에게 조언을 하는 과제다. 누구에게 어떤 조언을 해야 하나. 그보다 내가 소설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 역시 한 명의 인물로 육화(肉化)될 필요가 있었기에,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가 중요했다. '행인3' 역할로는 어떤 조언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소설 시간 밖의 존재가 소설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일. 그것을 먼저 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명한 사례의 한 인물을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마니피캇(Magnificat).



[그림] 마니피캇(출처 : 위키백과)

 

 천사는 마리아에게로 가서 "기뻐하소서, 은총을 받은 이여. 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몹시 당황하며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그는 크게 되어 지극히 높은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_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루카복음> (1:26 ~ 32), p284


 <교부들의 성경주해>에서 수도승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 '시간 밖의 존재가 시간 안으로 들어온 신비'라고 말하는데, 소설 밖의 독자가 소설 안으로 진입하는 사건 역시 이러한 신비에 부합하지 않을까. 기꺼이 천사 가브리엘(Gabrielus)의 캐릭터를 가져온다. 인물과 역할을 선정했으니, 이제는 두 개의 과제가 남는다. 누구한테 나타날 것인가와 무슨 예언을 할 것인가.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그러나 길상은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p20).... 시초부터 야망의 수단이 아닌 길상과의 결합은 가능할 수 없었다. 적어도 길상과의 결합에 그것 이외 어떤 구실로 서희는 자신을 설득시킬 수 있었겠는가. _ 박경리, <토지 6>, P21/620


 소설 내용 상 길상과 서희가 이제 곧 맺어지는 시점에 이르렀기에 처음에는 길상 또는 서희에게 조언을 생각했었다. 이들의 미래를 보여주면서 결혼을 만류하는 조언.  구체적으로 나중에 너희 둘이 결혼해서 둘이 경영하는 길서상회가 돈을 많이 벌게 되지만, 서희는 간도에서 진주로 내려가고 길상은 독립운동하면서 틈이 생길 예정이다,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또, 길상에게는 너는 나중에 관음탱화(觀音幀畵)를 그려야 하고, 독립운동도 할 사람이 처자식을 어찌 돌볼 것인가라는 조언을, 서희에게는 너는 결혼보다는 조씨 가문에 대한 복수가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느냐, 결혼을 수단으로 생각하면 배우자가 불행해진다. 그럼 서로 겉돌게 되니 잘 생각해라... 이런 조언을 하려다 보니 가브리엘이 아니라, 맥베스의 세 노파/세 유령 이 되버린 듯 한다. 불행한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 괜히 서희를 자극해서 더 폭주할 수 도 있을 듯하고, 내가 아니더라도 이번 주 길상과 서희는 다른 챌린저로부터 많은 조언을 받을 것 같아서 이들에게 조언하는 마음은 거둔다.


맥베스 [마녀들에게] 말해라. 너희는 누구인가?

마녀1 맥베스 만세! 글래미스 성주 만세!

마녀2 맥베스 만세! 코더의 성주 만세!

마녀3 맥베스 만세! 훗날 왕이 되리라. _ 세익스피어, <맥베스>, 1막 3장, 645


유령1 맥베스, 맥베스, 맥베스, 맥더프를 조심하라. 파이프를 조심하라. 이상이다.

유령2 잔인하고 용감하고 담대하라. 인간의 힘을 우습게 알라. 여자 몸이 낳은 자는 맥베스를 해하지 못하리라.

유령3 사자의 용기를 지키고 오만하며, 누가 안달하는지 누가 속이 상하는지 반역자가 어디 있는지 걱정을 마라. 맥베스는 절대로 패하지 않으리라. 울창한 버넘 숲이 던시네인 산으로 그에게 맞서 오기 전엔. _ 세익스피어, <맥베스>, 4막 1장, 665


 다음으로 마음에 끌리는 인물은 월선이다. <토지> 전체에서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안쓰러운 여인. 그렇지만,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주는 이가 있기에 결코 불행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여인. <토지> 전체에서 마니피캇과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월선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월선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월선이 이곳으로 옮긴 것은 병이 무거워지면서 국밥장사를 할 수 없게 된 때문이다. 월선은 자기 병이 그렇게 중병이 아니며 장사 안 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회복될 수 있는 것이라고 우겼다. 그것이 다 홍이 때문이라는 것은 뻔한 일.(p156)... 영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에도 여러 번 보내었고 월선이 치명적 병을 앓고 있으며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_ 박경리, <토지 8>, p158/654


 의사가 왔어도 병자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진통제를 쓰는 것, 보혈주사를 놓아주는 것이외 다른 방법이 있을 순 없었지만 의사가 다녀간 후면 월선은 반드시 홍이를 찾았다. 고통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 용이에 대해선 일절 말이 없었다. _ 박경리, <토지 8>, p372/654


 방으로 들어간 용이는 월선을 내려다본다. 그 모습을 월선은 눈이 부신 듯 올려다 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임자,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p378)...  시신이 놓인 방에서 물러 나려다 홍이 뒤쫓아왔다. "옴마!" 가슴 위에 모아놓은 뼈뿐인 손을 잡고 다시. "옴마!" 홍이 계속하여 옴마! 옴마! 부르며 방에서 뛰쳐나간다. _ 박경리, <토지 8>, p379/654


 아무래도 머지 않아 월선은 손을 쓸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죽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수태고지(Annunciation)에서는 생명의 탄생을 예언하지만, 여기서는 죽음을 예언한다는 것이 사뭇 마음에 걸리지만 수태고지 이후 시메온/한나 예언자의 고통에 대한 예언이 이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월선에게는 평안한 죽음을 약속하며 마음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듯하다.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아기 어머니 마리아를 향하여 말했다. "두고 보시오. 이 아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이 넘어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며 또 그는 배척당하는 표징이 됩니다. 당신의 영혼을 칼이 꿰뚫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심중의 생각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_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루카복음> (2:34 ~ 36), p293


 비록 치료하기 힘든 병에 걸려 고생하지만, 주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투병 생활을 하고 곁엔 마음으로 따르는 아들 홍이가 지켜주며, 임종 순간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용이가 돌아와 곁에서 삶을 마무리 한다는 이야기. 결코 죽음의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언제나 모든 것을 포용하는 듯한 월선은 어떤 이야기를 듣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월선의 모습은 내게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복음사가는 예수 탄생 예고의 장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등장시키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천사는 또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뜻모를 말로 정숙한 마리아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암브로시우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이 기적적인 출생에 대해 마리아가 아니라 가브리엘이 마리아 앞에서 두려워해야 마땅하다(테오파네스) _ 아서 A. 저스트2세, <교부들의 성경주해> <루카복음서>, p68


 독서챌린지 과제로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새삼스럽게 월선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면 참 가슴아프면서도 곁을 지켜주고 싶은 인물. 이제 얼마 뒤면 월선의 죽음이라는 정해진 소설 속의 시간은 다가오겠지. 책을 몇 번을 읽더라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 순간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한편으로는 행복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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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9-12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겨울호랑이님 토지가 재독이세요?? 줄거리 다 아시네용~ㅎㅎ
저도 길상이와 서희 결혼은 반대입니다. 부부로서 행복하지 않은 거 같아요. 그리고 제 맘 속 최고 인물도 월선이에요~!!^^

겨울호랑이 2021-09-12 06:58   좋아요 1 | URL
이번에 토지 독서 챌린지 신청하고 급하게 선행학습을 했어요 ㅋ 대강의 줄거리를 파악하고 챌린지 기간 중 세세히 문장을 들여다 보는 중입니다. 붕붕툐툐님 말씀을 들으니 제 조언이 지지를 받는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겨지네요^^:)
 

 

맷돌 밑부분에 쳐놓은 거미줄에서는 바야흐로 무서운 사투가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모기 모양이나 모기보다는 한결 완강하고 정력적으로 생긴 날벌레와 그 날벌레보다 작은 거미 한 마리와의 싸움이었다. 파득거리는 벌레의 날래에서 무시무시하게 큰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길상은 물 묻은 손을 뻗쳐 거미줄을 확 젖혔다. 거미는 몸을 움츠리고 가사상태를 위장하면서 다리 두 개를 뻗쳐 벌레는 잡고 놓질 않는다. 두 개의 다리는 흡반이 달린 문어 다리 같았다. 순간적으로 견딜 수 없는 증오심에서 길상은 거미를 문들어 죽이고 말았다. _ 박경리, <토지 5> , p336/670 


 토지 독서챌린지. <토지 5>에서 서희와 그를 따르는 평사리 사람들은 용정에 정착한다. 서희는 자신의 수완을 발휘해서 많은 재산을 쌓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점차 안정적으로 정착해간다. 서희와 함께 하는 길상 역시 집안일을 돌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상이 본문에서 펼쳐진다. <토지 5> 중 일부를 읽은 이번 주 독서에서는 길상이 세수하면서 우연히 보게 된 거미와 날벌레의 싸움 장면에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필사적으로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미와 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날벌레. 먹지 않으면 죽고 반대로 먹히면 죽는 치열한 삶(生)의 현장을 길상은 그야말로 하늘(天)이 되어 지켜본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큼은 길상이 하느님 또는 '신의 대리인'에 다름아니다.  


 중국 문자 가운데 이른바 하늘(天)에는 다섯 의미가 있다. 첫째, 물질지천(物質之天) 즉 땅과 상대적인 하늘이다. 둘째, 주재지천(主宰之天) 즉 소위 황천상제(皇天上帝)로서 인격적인 하늘이다. 셋째, 운명지천(運命之天) 즉 우리 삶 가운데 어찌 할 도리가 없는 대상을 지칭한 것이다. 넷째, 자연지천(自然之天) 즉 자연의 운행을 지칭한 것이다. 다섯째, 의리지천(義理之天) 즉 우주의 최고 원리를 지칭한다. _ 풍우란, <중국철학사(상)> , p61


 펑유란(馮友蘭, 1894 ~ 1990)의 <중국철학사 中國哲學史>에 나오는 천(天)의 의미는 소설의 인물들 각자에게 다르게 다가온다. 거미의 생사를 좌우한 길상은 주재지천의 하늘을, 거미에게 다가운 갑작스러운 죽음의 손길은 운명지천의 하늘일 것이며, 거미와 운명의 싸움을 한 날벌레는 자연지천의 하늘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의리지천을 느꼈을까... 


 신변에 위기를 느꼈음에도 먹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거미는 그만큼 기아선상에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굶주린 것에게서 먹이를 빼앗고 죽이기까지 했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처사였더란 말인가. 비를 바라보면서 길상은 생각한다. 이런 경우 자신의 손길이 벌레에게 있어서 하느님이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심판은 과연 옳았던가? 인간의 경우에도. _ 박경리, <토지 5> , p336/670


 이러한 상황에서 길상은 자신의 행동이 과연 올바른 행동이었는지를 돌아본다. 문단의 마지막 문장처럼 이번 페이퍼에서는 길상의 생각을 인간의 경우에 적용시켜 보려 한다. 날벌레를 구하려는 길상의 행동이 '측은지심 惻隱之心' 이라는 인간 본성 - 사단(四端) - 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이러한 판단이 거미에게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대상일 수 있을 것인가. 인류의 보편적 원칙이라는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회의 원칙이 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법칙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거미는 인간이 아니므로 적용대상이 아닐수도 있겠지만, 길상의 생각 속에서 벌레는 의인화가 되어 있기에 적용시켜 본다.) 물론,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와 같이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답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순수한 이론적 원칙들을 [자명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는 순수한 실천 법칙들을 의식할 수 있다."(KpV, A53=V30) 선의 이념을 가진 이성적 존재자는 선험적으로 도덕법칙을 의식하며, 이런 도덕법칙들의 최고 원칙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된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KpV, 7 : A54=V30)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GMS:4, 421) _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p370


 



이러한 보편적 법칙의 현실 적용과 관련하여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1821 ~ 1881)의 <죄와 벌>을 떠올리게 된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알료나 이바노브나(전당포 여주인) 살해는 다분히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살해가 더 큰 효용(效用,Utility)을 가져온다면, 그 살해를 긍정할 수 있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이론과 주장은 스스로를 '주재지천'의 하늘에 앉힌다. 얼핏 논리적으로 보여지는 그의 이론이지만, 그의 이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 수 없다면 우리 모두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에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 생명에 대한 근원적 존중 때문일까. 각자 나름의 논리가 있지만, 서로 부딪치는 논리에서 우리는 우리가 갖는 '정의(正義)'라는 개념이 흔들림을 느낀다. 이처럼 흔들리는 가치관 속에서 보편적인 행동원칙을 찾아 행동하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빼앗은 돈의 도움을 받아 훗날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 작은 범죄 하나가 수천 가지의 선한 일로 보상될 수는 없는 걸까? 한 사람의 생명 덕분에 수천 명의 삶이 파멸과 분열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고, 한 사람의 죽음과 수백 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인데, 이건 간단한 계산 아닌가! 그 허약하고 어리석고 사악한 노파의 삶이 사회 전체의 무게에 비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그 노파의 삶은 바퀴벌레와 이(蝨)의 삶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어떠면 그보다 더 못하다고도 할 수 있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_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상)>, p161/680


 그래, 바로 맞아! 그게 인간의 법칙이야...... 법칙, 소냐! 바로 그래......! 그리고 난 알아, 소냐. 머리와 정신이 견고하고 강한 사람이라야만 사람들의 주권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더 많이 용기를 내어 일을 감행하는 사람만이 사람들 눈에는 옳아 보이는 것야. 보다 많은 것을 무시하는 자만이 그들의 입법자가 되고, 더 많은 일을 해치울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보다도 옳은 사람이 되는 거야!  _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하>, p351/838

 

다른 한 편으로, 라스꼴리니꼬프의 살해는 역설적으로 탐욕의 화신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정화(淨化)시키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라르(Rene Girard, 1923 ~ 2015)의 <폭력과 성스러움 La Violence et le Sacre> 에 표현되듯 '살해'라는 폭력을 통해 '탐욕의 화신'이 '불쌍한 전당포 여주인'으로 전환되는 신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자세히 다루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알료나 역시 자신은 성실하게 삶을 살았을 뿐이라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정도만 짚도록 하자.


 수많은 제의 속에서 희생은, 때로는 아주 무시하지 않는 한 느껴지기 마련인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 때로는 그 반대로 아주 심한 위험에 처하지 않고서는 저지를 수 없는 일종의 <죄악>으로, 이처럼 상반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희생물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왜냐하면 그 희생물이 성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희생물은 죽임을 장하지 않으면 성스럽게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양가성 ambivalence>이라는 이름을 받을 만한 순환논리가 들어 있다. _ 르네 지라르, <폭력과 성스러움> , p10 


 라스꼴리니코프의 정의(正義)와 알료나의 성실함/생활력이라는 가치가 충돌하는 <죄와 벌>이라는 한정된 사회에서 우리는 어느 가치에 더 우선권을 주어야 할 것인가.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한 가치와 이해당사자가 충돌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접점을 찾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논리를 알기쉽게 설명한 고병권의 <다시 자본을 읽자>를 통해 살펴보자. 


 '옳음 대 옳음' , '권리 대 권리'의 충돌이라는 겁니다. 둘 다 '노모스'(nomos)를 갖추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이율배반'(Antinomie)이 생겨납니다. 대립하는 주장인데 둘 다 옳으니까요. 이런 모순에서는 논리, 즉 로고스가 더는 기능할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에는 '힘'이 재판관으로 들어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_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 p210/284


 고병권이 해설한 <자본론 Das Kapital>의 논리 중 하나는 이율배반의 상황에서 둘 다 옳다고 했을 때 힘의 논리가 들어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리바이어던, 사회계약이 출현했다고 보면 되겠다. 더 나가면 원래 출발점인 <토지 5>에서 가출해서 이번 페이퍼에서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테니 이만 멈추는 것으로 하되, <자본>을 관통하는 '착취'의 개념이 '모순'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까지만 담도록 하자. '필요노동'이라는 공통된 개념에 대해 '이윤율'과  '잉여가치율'이라는 상반된 해석에서 오는 차이. 이것이 <자본> 전체를 관통하는 '착취'의 시작이며,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의 일부로,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씨앗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내가 '모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설'입니다. 앞서 이율배반, 즉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이 모두 옳은' 상황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주장이 상반된 옳음을 동시에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역설(paradox)' 입니다. 하나의 견해(doxa)에서 반대 방향 내지 다른 방향(para-)이 생겨나는 것이죠. _ 고병권, <다시 자본을 읽자> , p212/284


 '필요노동' 부분이 자본가에게 '필요한' 이유는 자본주의라는 독특한 사회형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본이 가능하려면 노동자의 존속이 '필요'합니다. 노동력이 재생산되지 않으면 잉여가치는 불가능하니까요. 따라서 자본이 가능하기 위한 토대로서 그것은 필수죠... 노동자에게 '필요'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노동시간, 즉 노동일 전체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이때 필요노동에 해당하는 부분은 역사적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한' 부분입니다. _ 고병권, <생명을 짜 넣는 노동> , p224/309


 <토지 5> 안에서 무심코 거미를 죽이고 고민에 빠진 길상의 옆에 앉아 같은 고민을 하게 된다... 이와 함께, 이러한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들을 가진 이들이 각자의 종교를 가지고 기도를 올릴 때 이를 들어야 하는 하느님의 입장은 참 대략 난감할 듯하다. 이를 잘 표현한 영화 <브루스 올 마이티  Bruce Almighty>를 떠올리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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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4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4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9-04 2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토지의 한구절에서 몇 권의 책을 떠올리시며 페이퍼를 쓰신 건지! 그저 감탄에 입만 쩍 벌어지네요!! 저도 신의 입장이라면 곤란할 때가 많겠다 싶어요~ 신기하게 저도 토지 읽으면서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을 많이 했는데 길상이 옆에 앉아 생각하셨다니 다 느낌이 비슷한가 싶네요!^^

겨울호랑이 2021-09-04 23:04   좋아요 1 | URL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거리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 내게 의미 있는 이는 얼마나 되는지.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의미 없는 구절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한 구절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장편인 <토지>를 읽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는데, 아무래도 많은 구절이 지나가서일까요. 더 다양한 관점을 찾게 되는 것 같아 좋네요. 붕붕툐툐님 말씀을 들으니 보편적 이성보다는 보편적 감성이 더 쉽게 공감되는 것 같아요. 붕붕툐툐님 평안한 밤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