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북평(北平)의 국민군을 내몰고 대원수가 되었으나 결국 북벌군 장개석(蔣介石)에게 패하여 봉천(奉天)으로 가던 열차에서 한때는 동업자였던 관동군(關東軍)에 의해 폭사했는데, 패전한 장작림을 뒤쫓아 국민군이 만주로 진격해올 경우 일본은 매우 불리한 입장이므로 관동군의 고급 참모 가와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의 공작에 의해 장작림을 폭살하고 동북 삼성(三省)을 혼란에 빠뜨려 단숨에 그들은 만주를 장악한다, 그러나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1927년의 일이거니와 역시 만보산 사건을 이용하여 던진 미끼를 중국은 물지 않아 일본의 희망은 또 한 번 무너졌다(p207)... 그것이 바로 만주로 향한 진격,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군부의 관동군 스스로 봉천역 북방 팔 킬로 지점에 있는 유조구의 철도를 폭하한 뒤 장학량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면서 공격을 개시한 각본은 관동군의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와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작품이다. _ 박경리, <토지 15> , p208/594


  인실과 오가타, 오가타와 찬하가 서로 이해와 갈등을 나누는 사이 <토지 15> 속의 시간은 1930년대를 지나간다. 이 시기 이후 제국주의 일본의 행보가 극단으로 치닫기에, 그 시점이 된 1928년 장쭤린 폭살사건(황고둔 사건 皇姑屯事件)과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을 통한 만주국(滿州國) 수립(1932)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 이를 살펴보려 한다. <쇼와 육군>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1939 ~ ) 역시 이후 일본 관동군 중심의 육군이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에 대한 시발점과 압축점으로 장쭤린 폭살 사건을 해석한다.


 쇼와 육군을 검증할 때는 장쭤린 폭살 사건을 다각적으로 주시해야 한다. 그래야 이 무렵 중견 막료들이 육군 내부를 어떤 식으로 농단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장쭤린이나 장쉐량 張學良과 같은 중국 군벌에 대해 얼마나 모멸적인 태도를 취했는지 등이 명확해진다. 게다가 이 사건에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보인 억지스러운 태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이 정당화된다는 착오 등 훗날 쇼와 육군이 저지르는 잘못이 응축되어 있었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69/974


  장쭤린 폭살 사건 직전의 중국 상황은 청조(淸朝) 멸망 이후 납립했던 여러 군벌(軍閥)세력들을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북벌을 통해 제압하고, 최종적으로 동북부의 강자 장쭤린(張作霖, 1875 ~ 1928)과 결전을 벌이기 직전이었다. 이 지점에서 장쭤린과 일본의 이해관계는 충돌한다. 장쭤린이 베이징(北京)에서 결전을 피하고 랴오허강(療河) 동쪽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일본은 장쭤린의 효용가치가 없음을 파악하게 된다. 어쩌면 일본 군부는 과거 후한(後漢)의 원소(袁紹, ? ~ 202)가 관도 대전(官渡大戰, 200)에서 패한 이후의 멸망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장작림은 일본을 의지하면서 북경정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일본은 만주와 몽고에서의 특수한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장작림에 대한 지지와 지원은 계속되었다. 1928년 봉계군벌이 북벌군에게 참패하는 순간 장작림은 만주와 몽고의 특수이익을 유지하고자 하는 일본에게 이미 장애물로 전락되었다. 일본은 장작림이 동3성에서 참패하여 물러날 경우 북벌군이 관외로 군대를 내보내는 것을 가장 염려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 관동군은 장작림을 폭사시키고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동3성을 점령한다는 정책으로 급선회하였다. _ 이건일, <군벌 1>, p88/515 


 다만, 분명한 것은 장쭤린의 패전으로 전장이 동북3성이 위치한 만주로 확대되는 것을 일본은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중국 내전에 개입하여 만주지역에서의 자신들의 우위를 놓지 않으려 했지만, 이러한 요구는 국제 조약에 위배된 것이었고 장쭤린, 장제스 모두에게서 거부되기에 이른다. 위기에 몰린 일본의 선택. 그것은 장쭤린 폭살이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산둥 출병에도 불구하고 북벌군의 황허 도하를 저지하는 데 실패한 일본은 다음 책략으로 장쭤린과 장제스 양쪽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제국 정부로서는 전란이 만주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적당하고 유효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남군(북벌군)이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에 평톈군이 산하이관 이북으로 철수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남군의 만주 진입은 용납하지 않는다. 둘째, 남국과 펑톈군이 베이징-텐진 지구에서 교전하거나 양군이 함께 만주로 진입할 경우 양쪽을 모두 무장해제하겠다. _ 권성욱, <중국 군벌 전쟁> , p778/1080


 왜 일본은 장쭤린의 패배에 그토록 초조해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정치인과 군부, 군부 내에서 해군과 육군, 육군 내에서 관동군과 관동군이 아닌 비육군계의 갈등을 먼저 살펴야 한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 시대의 주역들이었던 사츠마, 조슈번의 출신 인물들이 실무에서 점차 손을 떼면서 새롭게 쇼와(昭和) 시대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때마침 1920년대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1911 ~ 1925)라 불리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경제 호황으로 일본경제 역시 이 시기에 크게 부흥하게 된다.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서 획득한 원재료를 가공하여 일본 본토에서 가공하여 수출하는 기존의 방식에 더해 만주 지역의 면화, 콩 등 자원을 활용하려는 일본의 계획은 물류정책에서도 드러난다. 한국 지역에서의 철도를 만주철도에 위탁경영함으로써 대륙과 연결을 원활하게 하려는 1927년의 <조선철도 12년 계획>는 이러한 일본의 야심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만주철도가 바로 관동군의 배후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만주지역에 대한 장제스의 북벌군 진입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으며, 일본은 이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일본의 국내사정 역시 심각했다. 금융공황은 경제계를 휩쓸었고 급속한 공업화에 과도한 군비확장으로 농촌은 피폐해졌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사회주의 물결은 드세게 일렁였다. 불경기는 수많은 실업자를 거리로 내몰았으며 노동쟁의는 격화일로, 사회풍조는 퇴폐와 환란에 흠씬 젖어가고 있었다. 정계 또한 혼란의 연속이었다_ 박경리, <토지 15> , p208/594


 관동군은 만주사변 이전만 해도 고정 사단이 없고 본국의 여러 부대가 2년 단위로 돌아가면서 파견 근무했다. 인원과 장비는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했다. 관동군의 임무가 적과의 전투보다는 철도 경비라는 지엽적인 임무였다면, 조선군이야말로 유사시 대륙으로 즉시 출동하기 위한 실전부대이자 신속 대응군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힘은 조선군보다 관동군이 더 컸다. 관동군은 군부 핵심층에서 거대한 파벌을 형성하여 발언권이 막강했다. 관동군 뒤에는 남만주의 철도사업을 담당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른바 만철 滿鐵이 있었다. _ 권성욱, <중국 군벌 전쟁> , p783/1080  


 1927년도 이후 도문선 건설 및 개량공사를 실시하였고, 1933년 9월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북선 침 동북만주지역의 교통망 정비와 나진항 이용 개발이라는 대국적 견지에서 청진 이북의 북선선(北鮮線)을 만주철도에 위탁경영하게 되었다. (p118)... (만주철도는) 1936년 6월 동북 만주 일대의 화물을 일본으로 반출될 수 있도록 북선 3항을 병합하는 의미에서 조선총독부로부터 청진~옹기 두 항을 임대받아 나진과 함께 관리, 경영하게 되었다. 북선의 위탁 철도는 일본과 북선, 만주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확충을 의미하며, 조선과 만주 지역의 각 철도 및 동해 항로를 통하여 일본의 철도와 연계 협조할 수 있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계약 내용에 특히 조선 내외의 교통 편리를 증진하고 조선의 지방 개발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취지가 기재되어 있었다. _ 센코가이, <조선교통사 1> , p119


 장쭤린 폭살 사건은 단순한 폭살 사건이 아니라, 중국 동북 지역에 대한 정책 전반이 관동군에게 넘어갔음을 잘 보여준다. 만주철도의 이익을 위해 벌인 관동군의 무모한 행동이 견제받지 못하면서 이는 일본 패전에 좋은 선례를 남긴다. 이후 중일전쟁(1937) 등으로 폭주하는 일본 육군의 움직임에 자극되어 일본 해군 또한 진주만 공격(1941)으로 막나가면서 일본제국이 종말을 맞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장쭤린 폭살 사건은 개인의 죽음이 아닌 일본 제국 멸망의 전조라 해석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나카 수상은 철도대신 오가와 헤이키치의 보고와 외무성의 보고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육군이 보내온 보고서와 의문을 가졌을 법하지만 상세하게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이 키운 육군에 대한 신뢰를 중시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중견 장교가 조슈벌에 속하는 다나카와 시리카와(에히메 현 출신이지만 다나카의 직계)를 몰아 내는, 또는 메이지 유신 전후에 태어나 러일전쟁 때의 낡은 전쟁관을 갖고 있었으며 만주에 대해서도 군사에 의한 제압에 나서지 않는 세력을 내쫓는 교묘한 싸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나카는 이러한 계략을 충분히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p87)... 장쭤린 폭살 사건을 쇼와 육군이 범한 오류의 제1막이라 한다면 만주사변은 제2막이었다. 만주사변에서는 제1막에 포함되어 있던 '실패의 교훈'이 교묘하게 되살아난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90/974


 만몽 지방에서는 원래 러시아가 동청 철도의 신징 이남 노선(만철)과 랴오둥 반도(관동주)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이 그 권익을 양도받았다. 더욱이 일본은 펑톈과 푸순 등 만철 연선 沿線의 주요 지역 행정권과 그곳에 관동군을 주둔시킬 권리(주병권) 등도 함께 획득했다. 결국 러시아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장악하고 있던 식민지의 권익을 더 크게, 비대화하여 이어받았던 셈이다(p112)... 위기감을 느낀 관동군 참모는 점과 선으로 지배하고 있는 만몽 지구(동삼성)를 일본의 뜻대로 움직이는 국가, 즉 점과 선이 아니라 면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런 의사를 관동군 내부만이 아니라 일본의 국내 정치에도 끌어들였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112/974


 만주국 건설은 만주철도의 경제적 이해와 함께 '만몽 영유론'이라는 정치적인 구상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愛新覺羅溥儀,1906 ~ 1967)는 자신을 여진 히틀러와 같은 제3제국 - 금(金), 후금(後金, 淸)을 잇는 - 의 황제로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은 이시와라 간지( 石原 莞爾, 1889 ~ 1949)의 관념의 실현에 필요한 꼭두각시에  불과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을까. 


 1928년 10월의 이동으로 이시하라는 관동군 참모(작전 주임)가 되었다. 도쿄에서 육군대학 강의와 목요회에서의 '연구'를 현지에서 실행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사료에 의하면 1929년 7월, 15일간의 예정으로 이뤄진 북만주 참모 여행 기간 중 이시하라는 관동군 막료와 북만주 주재 무관에 대해 만몽 영유계획의 전모를 설명하였다. 또한 1930년 3월 단계에서 만철조사과원에게도 '만몽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은 만몽을 우리가 갖는 것이다'라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만몽의 진가, 만몽 점령이 우리의 정의라는 점, 미국에 대한 지구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등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_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p121


 메이지 유신을 통해 만들어진 기틀 위에 아시아 여러 민족의 힘을 모아 서양 문명과의 충돌을 대비해야 한다는 이시하라의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만주(滿州)와 몽골(蒙古)지역에 대한 점유가 필요했고, 이러한 바탕위에 만주국이 세워지게 된다. 만주국의 성립은 만주 지역의 일본 제국 내 편입을 의미하기에 이전 체제를 느슨하게 유지해온 시데하라 외교와 장작림은 폐기되거나 제거될 필요가 있었으며, 만주지역의 풍부한 자원은 경제공황 상황에서 경제 블록화의 밑바탕이 될 예정이었다. 


 관동군 막료들은 어떠한 경위로 만몽 영유론을 꿈꾸게 되었을까? 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서 그때까지의 체제를 안정시켜온 몇 가지 전제조건이 무너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주어진 전제조건이란 무엇이었을까?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일본의 만몽권익은 조약에 기초를 둔 확고한 것이며, 신 4국 차관단 등에 의한 보증도 있으므로 누가 동삼성을 지배하든 누가 중국 정부의 중심이 되든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취하고 있던 시데하라 외교이다... 두 번째로, 장작림(張作霖)을 통한 만몽 지배의 안정성이다.... 세 번째로 총력전 시대에 일본이 직명해야 할 전쟁 준비의 어려움이다. _ 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 p83


 나는 제1차 유럽대전을 통해 전개된 자유주의로부터 통제주의로의 혁신, 즉 쇼와유신이 급진전된 것으로 본다. 쇼와유신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정으로 동아시아 각 민족의 힘을 종합적으로 발휘하여 서양 문명의 대표자와 싸울 결승전 준비를 완료하기 위함이다. 메이지유신의 주안점이 왕정복고, 혹은 폐번치현(廢藩置縣)이었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쇼와유신의 정치적 주안점은 동아연맹(東亞連盟)의 결성이다. 만주사변을 통해 그 원칙이 발견되었고 오늘애야 비로소 국가의 방침이 되려하고 있다. _ 이시와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 p77/300


 마치 우리가 메이지유신을 통해 번후(藩候)에 대한 충성을 덴노(天皇)에 대한 충성으로 되돌렸듯이, 동아연맹을 결성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투쟁이나 동아시아 각국의 대립보다 민족의 협력과 화합(協和)을 통해 동아시아 각 국가의 진정한 결합이란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때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는 만주국의 건국 정신인 민족협화의 실현이다. _ 이시와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 p78/300


 이런 구상에 대해 아버지를 잃은 군벌 장쉐량의 배일(排日)행보로 초조해진 관동군은 결국 만주사변(滿洲事變)을 통해 '만몽영유'를 현실화시키게 된다. 경제적 이권을 위해 세워진 괴뢰국가 만주국. 만주점령를 합리화하기 위해 구상된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관념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만주국에서 '민족'을 기본으로 한 근대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아울러, 만주국에서의 경제발전 모델을 이식한 조선에서의 근대산업화 모델 역시 중심부에 대한 주변부의 역할에 다름아니기에 우리는 만주국의 관념적 공허성과 제국 내 의존성을 통해 일본에 의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할 다른 하나의 자료를 추가하게 된다. 조선에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만주국에서의 오족협화, 태평양 전쟁 시기 동남아 제국에서 주장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은 이러한 관념과 같은 선에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자.


 1930년대 초 만주에서는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張學良)이 국권회복과 배일운동을 적극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의 권익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에게는 관동군 철수, 남만주철도 회수 등을, 소련에게는 북만주철도 회수 등을 주장했다.(그 뒤에 소련군이 만주리에 침입). 게다가 간도(間島)에서 '만보산사건'(1931.7.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이 벌인 유혈 충돌 사태) 등 '만몽의 위기'가 거론되자 다시 일본 내에서 강경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관동군은 중국 측이 조선인을 만주에서 추방하기 시작하자 '조선계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 지역에 파병했다. _ 서승원, <근현대 일본의 지정학적 상상력> , p87


 천진(天津)폭동을 유도하면서 교묘히 끌어낸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簿儀)를 내걸고 1932년 3월 1일 드디어 일본은 대망의 만주국 괴뢰정권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세계이 여론을 두려워하여 사변의 불확대를 성명했으나 그것은 구두선에 불과했다. 신속하기가 질풍과도 같은 관동군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일본 국민은 열렬히 만주침략을 지지하고 나섰다. _ 박경리, <토지 15> , p209/594


  평소대로라면 이시와라가 가장  열심히 다섯 민족(일본인, 조선인, 한족, 만주족, 몽골족)이 조화를 이루는 만주국 건국을 주장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p93)... 만주국은 관동군 참모들의 정치 공작에 의해 만들어진 국가였다. 그랬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일본의 괴뢰 국가로 일컬어지는데, 당시 일본의 국내 정세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새로운 국가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는 '오족협화'의 이상향으로 고취되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자원이 풍부한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개발에 공헌할 것을 강조했다. _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 p112/974


 국가 형식과 파시스트 체제의 특별한 조합은 만주국의 통치성을 특징지었다. 그것과 다른 근대국가들과의 차이는 그것이 한 민족의 정통성을 결여했다는 점이다. 통치성은 주권의 요구를 배제하지 않으며,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에 주권은 점차 민족의  담론 속에 배태되었다. 국가 권리의 기초에서 국제연맹으로부터의 인정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만주국은 더욱 중국 내셔널리즘이 내거는 심오한 (역사적) 주장들과 맞붙어야 했다. 만주국의 스토리는 - 적어도 초기의 양상에서는 - 민족을 추구하는 국가의 스토리이다. _ 프래신짓트 두아라, <주권과 순수성>, p157


 만주사변은 공황의 늪에서 헤매던 일본인들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준다. 전쟁은 유효수요를 만들어냈으며, 원재료를 공급해 줄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일본인이라는 자부심을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격렬한 투쟁에 지친 중도층에게 심어주었다. 전쟁이라는 더 큰 파괴와 혼란이 작은 혼란을 잠재우는 좋은 수단이 된다는 것, 심지어 이러한 논리가 매우 유효하다는 비극을 유효함을 우리는 2021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도 확인한다.


 만주사변은 일본 사회 내부의 대립을 첨예화시키면서도 대립과 대항의 존재를 해소하고 소거시켜 버리는 논조를 만들어 냈다. '끓는 조국애의 피, 일본에 넘쳐 흐른다!' 는 <도쿄아사히신문>(1931년 11월 18일)의 표제어였다. 또 신문에서는 '눈 내리는 광야, 포탄 속의 참호에서 모국의 생명선을 사수하는 우리 파견군 장병에 대한 국민의 감격은 날로 커져 가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위문금이 1일 평균 1,500~1,600엔, 위문 보따리는 평균 3만 개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만주사변 이후 사람들의 감정은 일거에 거국적이 되었다. 그동안의 비판적인 발언은 보이지 않고 세 조류가 정립한 상황은 급격히 유동화되었다. _ 나리타 류이치, <다이쇼 데모크라시> , p215

 

 에도의 자취를 걷어낸 동경에는 파리가 있었고, 런던 뉴욕도 있었다. 루바시카의 모스크바도 있었다. 유행이라면 무엇이든지 사회전반으로 현기증 나게 탈바꿈을 거듭하는데, 환락가, 유흥가, 연예계는 구미(歐美)를 뺨칠 만큼 개방적이며, 성냥갑이나 포스터의 나체 그림은 그들의 전통인 남녀 혼욕(混浴)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p113)... 도시 뒤켠에는 그 같은 계층이 있고 농촌에는 소작료가 밀렸다 하여 농가의 농기구에 빨간 딱지가 붙은 현실, 정쟁(政爭)이 있고 암살이 있고 쿠데타의 기도가 있고 계급투쟁/노동쟁의/여성해방의 운동이 있고, 노동자 열 명의 이십 년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을 방 하나 치장하는데 쓰는 나리킨이 있고,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일본의 얼굴일 뿐이다. 분을 바르건 성형수술을 하건, 보기 흉한 종기에는 반창고를 붙이건 잘라내 버리건 그것은 얼굴에 다름없다. 천하무적의 군비, 일본의 심장은 그것으로 뛰고 있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5> , p113/594


 사회 자체가 거대한 에고이즘의 덩어리라는 말은 맞는 말이네. 전폭적인 긍정으로 감상주의에 흐르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야. 더더구나 민족주의를 휘두르고 나가는 사람들에겐......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야. 민중에게 절망하는 것도 그러하나 큰 기대를 거는 것도 것도 어리석어. 실체를 뚫어보지 않고 하는 일은 결국 붕괴된다. _ 박경리, <토지 15> , p221/720


 <토지 15> 중반부의 배경이 된 장쭤린 폭살사건과 만주사변을 통해 우리는 제국의 정점에서 이제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일본제국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공황이라는 경제위기를 손해없이 돌파하려는 자본의 모습과 성장을 위한 고통을 피하려는 대중의 심리, 이를 덮으려는 민족주의와 파시즘이 만들어낸 거대한 움직임은 다시 전쟁이라는 이정표로 흐르고 있음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동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 루한스크주에서의 갈등과 NATO가입을 둘러싼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위협을 바라보고 있는 현시점에서 과거 역사는 또다른 시사점을 던져준다.


 환국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이 좋았다.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이론가라는 것은 그림 공부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그의 초기 그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주변에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사철 눈과 얼음에 덮여 있을 것 같고, 색채가 빈곤할 것만 같은 러시아에서 어떻게 현란한 이런 색채를 빚어내었는지, 칸딘스키의 초기 그림을 볼 때마다 환국은 신비스러움과 동경을 느끼는 것이다. _ 박경리, <토지 15> , p121/594


 미술을 좋아하는 환국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 ~ 1944)의 색채에 빠져있다. 아마도 환국은 칸딘스키의 색에 담긴 영혼을 움직이는 힘에 경도되었을 것이다. 칸딘스키의 말처럼 예술이 내부와 외부에서의 변화를 점(點), 선(線), 면(面)로 표현하여 영혼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일본제국은 1930년대 세계 공황의 위기를 중국에서 점과 선으로 연결된 자신의 영향력을 면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지나친 욕심을 벌인 것이 칸딘스키와의 차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역시 파멸로 이른 것도 내적 필연성일지 모르겠다... 


[그림] Wassily kandinsky oben und links (출처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Wassily_kandinsky_oben_und_links.jpg)


 우리는 색들로 덮인 팔레트를 주시할 경우에 두 가지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첫째, 우리는 순수한 물리적 작용을 받아들이게 된다(p57)... 둘째, 그리하여 우리는 색을 응시했을 때에 생기는 제이의 결과, 즉 색들의 심리적인 효과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색의 심리적인 힘이 생겨나고, 이 힘은 영혼은 동요시킨다. 그리하여 첫번째의 기본적이며 물리적인 힘은 색이 영혼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p59)... 예술가들은 인간의 영혼에 진동을 일으키는 목적에 적합하도록 이렇게, 저렇게 건반을 두드리는 손과 같다. 그러므로 색의 조화는 오직 인간의 영혼을 합목적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법칙에 근거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이것은 내적 필연성의 원칙을 나타내고 있다. _ W. 칸딘스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 p62


 점(點)의 크기가 변화하면 점은 상대적인 본질 내에서의 변화도 함께 일어난다. 이 경우 점은 그 스스로로부터, 즉 그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자라나는데, 이것은 점의 집중적인 긴장을 상대적으로 감소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한편, 점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생겨나는 어떤 다른 힘이 있을 수 있다. 이 힘은 화면 속으로 박혀 들어가 있는 점에 의지하여 점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화면 위에서 그것을 어느 방향으로인지 밀어내고 있다. 이를 통해 점의 집중적인 긴장은 곧장 소멸되며, 동시에 점 자체는 생명을 잃게 되고, 따라서 이 점으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자리적인 생명을 가진, 다시 말해 그 고유한 법칙에 따르는 하나의 새로운 본질이 생겨난다. 이것이 선(線)이다. _ W. 칸딘스키, <점, 선, 면> , p46


PS. 페이퍼가 산으로 가는 것을 보면, 가끔은 내가 <토지>독서챌린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 페이퍼를 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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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02-13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분명 양질의 리뷰입니다.
언젠가 날 잡아 재독 삼독해야 할 호랑님의 글들이에요.
토지 이야기 더 써주세요^^

겨울호랑이 2022-02-13 16:2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토지 독서챌린지가 4월말까지라 아직 10여편 정도 더 써야 됩니다. 아직 한참 남았네요ㅋ 책읽는나무님 좋은 오후 되세요!

페넬로페 2022-02-13 16: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지가 인물사전까지 21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제 겨울호랑이님의 토지 읽기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그동안 책 읽으시고 거기에 관련된 이렇게 방대하고도 훌륭한 글 쓰시는 것, 너무 대단하십니다^^
보람된 완독되시길 기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2-13 16:31   좋아요 2 | URL
가끔 페이퍼를 쓰면서 너무 옆으로 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이웃분들께서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행복한 오후 되세요. 감사합니다! ^^:)

바람돌이 2022-02-13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짜 공부하는 책읽기! 저는 이런식으로 책 못읽는데 겨울호랑이님 글을 읽다보면 아 진짜 공부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건지를 배웁니다. ^^

겨울호랑이 2022-02-13 20:2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관련 내용이 나오면 찾아가다 보니 진도는 더디고 옆길로 많이 새는 것같아 사실 좋은 방법만은 아닌 듯 합니다. 이번에 전체적인 배경을 챙겼다면 다음에는 내용에 집중해서 읽으려 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
 

 "오가타상이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그 우정을 나는 믿습니다. 한데 어떻소?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당신, 천황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오가타는 당황한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듯 순간 어쩔 줄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그, 그거는, 네, 아직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요." "......" "그게 대부분 일본인들의 한계가 아닐까요?" 오가타 얼굴에 막연한 표정이 지나갔다. _ 박경리, <토지 14> , p593/708


 <토지> 독서 챌린지 28주차. 앞서 인실과 오가타의 대화에 조선과 일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실렸다면, 이번 주차 찬하와 오가타의 대화는 내용면에서 앞의 대화를 잇는다. 예정없이 명희를 만나고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반응에 쫓기듯 떠난 찬하와 오가타. 이들의 대화는 천황제(天皇制)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천황을 부정할 수 있느냐는 찬하의 질문과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오가타. 과연 천황은 일본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번 페이퍼는 이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천황의 기원은 멀리 오노 야스마로(太安萬呂, 660 ~723)의 <고사기 古事記> <천손강림 天孫降臨>편에서 찾을 수 있다.


  아메노우즈메노카미(天宇受賣命)가 가서 물으셨더니, 답하여 "저는 국신으로, 이름은 사루타비코노카미(猿田彦大神)입니다. 나와 있는 것은, 천신이신 어자(御者)가 천강하신다고 들었기 때문에, 선두에 서서 모시려고 생각하고, 마중하러 올라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아메노코야노미코토(天児屋命), 후토타마미코토(天児屋命), 아메노우즈메노미코토(天鈿女命),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石凝姥命), 타마노오야노미코토(玉祖命), 합하여 다섯 명의 부족장 신을 나누어 대동하고 천강(天降)했다...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는 "여기는 카라쿠니(韓國, 한반도)를 향하였고, 가사사노미사키를 똑바로 통해 와서, 아침 해가 바로 비치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은 참으로 좋은 땅이다."라고 말씀하시고, 대반석 위에 기둥을 굵게 세우고, 타키아마노하라에 이르게 용마루를 높이 세우고 사셨다. _ 오노야스마로, <고사기> , p310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손자 니니기노미코토가 거울(銅鏡), 옥(玉), 구나사기 검(劍) 등 3종의 신기(神器)를 가지고 고천원(高天原)으로부터 내려와 신아다도히메(神阿多都比姬)라는 여인과 결혼하면서 천황가는 시작되었고, 끊김없이 현재에 이른다. 그렇지만, 실상 천황의 권세는 오랜 역사만큼 크지 못했고, 천황은 다른 실권자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지켜봐야했던 명목상의 존재였다.. 작가는 찬하의 입을 빌려 천황을 '정신적인 힘'으로 규정하고, 실권자들에 의해 이러한 '정신적인 힘'이 맹목적으로 강요되면서 '철학이 없는 문화'로 일본 문화를 비판한다. 


 거의 대부분 천황은 권력 밖에 있었고 군주가 아니었다, 물리적인 힘을 말하는 거지요. 그러면 천황은 무엇이냐, 정신적인 힘, 여기 와서 애매해지거든요. 당신들 공격의 대상이 되며 조선의 식자들은 대개 이 문제를 거론하는데 현인신, 그 현인신으로 얽어두지만 사실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아니거든요. 그 세 가지를 때에 따라서 조금씩 필요한 만큼 치장을 해주지만요. 현재도 그렇지요. 국민들을 모조리, 정신적으로 말입니다. 천황에게 붙들어 매놨다가 물리적인 힘이 그것을 필요한 만큼 갖다 쓰고 있는 형편이 아닙니까. 대단히 불경스런 얘기지만 국민정신의 저장고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종교도 철학도 도덕도 그 어느 것이라 할 수 없는 애매한, 해서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맹목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자기 기만을 할 수밖에 없고 긴 역사 속에 국민들은 자기 기만도 깨닫지 못하게 길들여졌습니다. _ 박경리, <토지 14> , p598/708


 일본 천황이 정신적 중심이라는 것은 앞서 살펴본 <고사기>의 내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학자들은 <천손강림>을 곡령의 풍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대의 천황의 의미를 '곡식'으로 해석한다. '살아있는 곡식'으로 천황을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같은 벼농사 문명인 동남아 문명을 통해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J. G. 프레이저 (James George Frazer,1854 ~ 1941)는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에서 식물과 관련된 원시신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아마테라스오호미카미의 명을 받고 아시하라노나카쯔쿠니(葦原中國)로 천강하는 신이 아메노오시호미미노미코토(天之忍穂耳命), 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日子番能邇邇藝命)로 불리는 등 모두가 곡령의 풍요를 의미하고 있는 것은 고대의 천황이 천강하는 곡식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탄생한 신생의 니니기노미코토가 천강한다는 것은 천황의 즉위의례를 천신의 어자로 새롭게 탄생하는 것으로 여긴 고대신앙의 반영이다. _ 오노야스마로, <고사기> , p312  


 생명의 원소를 일단 식물의 영혼이라고 해두자. 흔히 인간의 영혼이 그 몸에서 분리될 수 있는 생명의 원소라고 여겨지듯이 말이다. 모든 곡물의례는 바로 식물의 영혼에 대한 이론과 신화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모든 사자死者에 대한 의례가 인간 영혼에 대한 이론이나 신화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과 같다.(p158)...  버마의 카렌족도 농작물의 풍작을 위해서는 벼의 영혼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잘 붙잡아두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벼가 잘 자라지 않으면, 벼의 영혼 kelah이 벼에서 떠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 영혼이 다시 벼한테 돌아오지 않으면, 그해의 벼농사는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_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2> , p160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벼농사문화권에서의 애니미즘(animism)에 대해 서술한다. 벼에 깃든 정령(精靈)을 숭배하던 사회집단에서 사회분화에 따라 주술사 계층이 세력을 얻고 왕권(王權)을 확립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었다면, 일본신화에서 <천손강림>의 내용 역시 농사와 관련된 일련의 지배층이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청동문화를 바탕으로 권위를 확립하고 이후 권세를 세웠다는 표현이 아닐까. 다만, 다른 문명권에서는 이들이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형성했다면,  '신성왕가' 와 다른 별도의 세력가들이 있었음은 일본문명의 특수성이라 할 것이다. 정신적 중심점과 권력의 중심점의 차이. 마치 '두 점에서 거리의 합이 같은 점들의 집합'인 타원(Ellipse)과도 같은 일본문화의 독특한 성격은 19세기 후반 흑선(黑船)의 출현과 개항(開港)이라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변곡점에 다다른다.


 원시사회에서 기능적으로 고만고만한 자들에 의해 수행되던 직능이 점차 상이한 계층들에 분할되면서 보다 완전하게 수행되었다. 아울러 특수 노동에 의한 물질적, 비물질적 생산물이 모든 사람들에게 분배되면서 공동체 전체가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하고 이런 분화과정이 계속되면서 주술사 계급 자체가 질병을 치료하는 주술사나 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사 등의 여러 계층으로 세분화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주술사가 추장의 지위를 획득하고 나아가 신성왕神聖王으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주술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주술적 기능이 점차 퇴화하고, 대신 사제 직능 혹은 신적 직능이 나타나면서 종교가 주술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_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2> , p274 


 미 페리제독(Matthew Calbraith Perry, 1794 ~ 1858)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 세력을 회복하려던 막부(幕府)정권과 이에 대항하는 삿초 동맹(薩長同盟)세력간의 다툼에서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 ~ 1912)이 사쓰마-조슈 동맹에 손을 들며 이른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라는 개혁이 일어나게 된다. 천황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양자의 구애에서 삿초군을 선택한 천황의 결정은 일본 천황이 네팔의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와 같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적극적인 현실개입자, 또는 '천손강림' 이후 '현실강림'의 계기가 된다. 이후 천황은 일본제국의 정신적 중심에서 실제적인 권력의 중심으로 대중 앞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화려한 군주> 리뷰에서 자세히 다뤘으므로 넘기도록 하자. 


 하나의 복잡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양측 모두 천황에 대한 경외심을 부인하지 않았고, 메이지 국가의 건설자들이 그들의 작업을 끝마쳤을 무렵 모든 행위자들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천황을 보호하고 강력한 존재로 만들기를 열망했던 것으로 기억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이 투쟁에서 패한 사람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고, 승자는 천황의 깃발을 앞세워 자신들의 야망을 미화할 수 있었다. _ 마리우스 B.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 1> , p488


 1월 4일 메이지 천황은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친왕(小松宮彰仁親王, 1846 ~ 1903)을 정토대장군(征討大將軍)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금기의 절도(節刀)를 내렸다. 이것은 아키히토 친왕에게 적대하는 자는 조정의 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진작부터 전투 상대는 조정이 아니라 사쓰마 번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금기(錦旗)는 천황의 옹호자라는 정통의 자격을 사쓰마번에 주었다. 수많은 자료에서 막부군의 패배 요인으로 금기의 절대적인 효과를 들고 있다. 금기는 '관군' 삿초군의 사기를 북돋우고, 조정의 적이 될까 주저하는 막부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_도널드 킨, <메이지라는 시대 1> , p169/556 


  근대화 과정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새롭게 체제가 정비되었던 것이지만, 세계대공황 이후 변화된 국제정세와 새롭게 등장한 이익집단은 1930년대 일본 체제에 변화를 가져온다. 서구화된 제도가 정착되고, 세대가 바뀌면서 변화된 가치와 이익 추구는 일본을 군국화(軍國化)의 길로 이끌었고, 그 과정에서 전쟁으로 가는 길에 '너와 나'의 구별이 없었음을 <현대 일본을 찾아서>는 잘 보여준다. 잰슨에 따르면 일본의 전쟁 책임은 일본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1930년대의 수많은 성취는 사실 대중문화와 참여정치의 발전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군부의 득세와 지배가 근대 메이지 국가의 제도적 틀에 뿌리박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현상은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권력의 축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변화를 조절하고 중재해줄 근대국가 건설자들의 영향력이 사라졌고, 이데올로기에서 군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창안한 통치기구는 이제 나름의 동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만든 제도는 반대를 일삼는 강력한 관료와 이익집단을 탄생시켰다... '군부'가 하나로 똘똘 뭉쳐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문민' 정부의 평화주의자들이 군부의 준동에 시종일관 반대했던 것도 아니다. 다양한 집단이 제휴하여 침략을 획책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발달한 대중매체가 팽창과 전쟁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선동했다. _ 마리우스 B.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 2> , p870  


 아니면 소가[蘇我]나 후지하라[藤原] 같은 권신이 왕이나 다름없는 실권을 쥐고 있어서, 그 이상의 칭호를 필요로 했는지 모르지요. 땅은 우리가 다스릴 터이니 당신은 하나님으로 있으라, 이전에는 오오기미[大王. 大君]로 칭했거든요.(p390)...  그것저것 다 아닐 거요. 실력자라기보다 실력군(實力群)이라 해얄 겁니다. 오오기미노 헤니코소 사나메에(대군, 즉 천황 곁에서야말로 죽을지어다) 그런 사람들이겠지요. 참본(參謨本部) 중에서도 알짜, 비밀참본, 뭐가 꿈틀거리고 있는지 모를 그들 일군, 그리고 관동군(關東軍)일 게요." _ 박경리, <토지 14> , p393/708


 그렇지만, 이러한 전쟁 책임을 바라보는 일본 지식인의 입장은 조금 다른 듯하다. 대표적인 지식인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1941 ~ )의 <윤리21>에 언급된 천황제와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한 글은 일본 지식인들의 입장이 잘 표현된 글이라 여겨진다. 고진은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해 일본인 개인에게 묻기 전 제도에 물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인식을 본문에서 말한다. 이 같은 말은 얼핏 옳은 듯 하지만 전후에도 천황은 존재했고, 욱일기(旭日旗)가 해상자위대에서 버젓이 사용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고진의 말은 납득하기 어렵다. 실제 최근까지도 천황제를 유지해야한다는 일본인들의 찬성비율이 80%에 이른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고진의 말처럼 천황제도가 문제라 할지라도 - 일본인들의 전쟁 책임 문제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일본에서는 개개인이 과거를 깨닫고 반성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미묘하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먼저 최고책임자의 책임을 물은 후에야 비로소 국민 개개인의 정치적 책임이나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본인에게 과거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천황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정부는 여러 번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하고 천황 자신도 '유감'의 뜻을 표명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죄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일까요. 그것은 같은 천황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p160)... 천황 개인보다는 구조가 문제이기에 그것을 폐지하여 천황 개인을 인간적으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구조론적인 인식을 할 때 개인의 책임은 괄호에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책임'을 물을 경우에는 그 괄호를 벗겨내야 합니다._ 가라타니 고진, <윤리 21> , p162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근현대사의 흐름을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도쿠가와 체제로 가는 '죽음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공격충동이 가득했던 유기체인 메이지 시대로부터  무기질 상태인 도쿠가와 체제로의 회귀. 그것은 팽창정책에 대한 겸허한 반성으로 고진은 해석하지만, 일본의 극우화로 인해 헌법9조의 개헌 움직임이 점차 힘을 얻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를 왜곡하고 잘못된 기억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언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진 본인은 천황제에 반대할지 모르겠으나, 반성없는 일본 사회 전반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을 경계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토지>에서 천황제에 대한 생각을 묻는 찬하의 물음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메이지유신으로부터 36년 후 러일전쟁이 있었고, 그로부터 40년 후 일본은 제2차 대전으로 패전을 맞이했습니다. 메이지유신과 더불어 개시된 프로젝트는 77년 정도에서 좌절되었습니다. 전쟁 기피 반응은 단순히 메이지 이래의 전쟁 체험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좀 더 근원적으로 '도쿠가와의 평화'와 이어지고 있습니다.(p86)... 도쿠가와 체제는 오랜 전란 후에 만들어진 시스템입니다. 도쿠가와 체제란 '전후(戰後)'의 '국제(國制, constitution)'인 것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삼은 것은 다양한 금지를 통해 공격충동의 발생을 억누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의해 도쿠가와 체제에서 '무기질'적인 상태가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쿠가와의 평화'입니다. 그런데 메이지 이후에는 개국(開國)을 하고 외부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공격충동의 발생입니다. 그것이 패전과 함께 자신의 내부로 향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헌법 9조인데, 이는 동시에 '도쿠가와의 평화'에 있었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복하자면, 헌법 9조의 뿌리는 메이지유신 이후 77년 동안 일본인이 목표로 삼아온 것에 대한 총체적 회한에 있습니다. _ 가라타니 고진, <헌법의 무의식> , p87


 다시 <토지>의 찬하와 오가타의 대화로 돌아가자. 찬하의 천황제를 부인하냐는 질문은 단순한 왕조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정신의 근원을 부정하고 진정한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인가를 묻는 질문이며, 이것은 오가타에게 매우 강한 압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앞서 인실과의 대화에서는 자신의 사랑은 민족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확신에 찬 대사를 읊었던 오가타지만, 구체적으로 정신적 구심점을 타격해오는 찬하의 말에는 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은 오가타의 한계가 아니라 전후 책임지지 않는 일본의 한계임을 고진의 글 속에서 답을 찾는다. 찬하가 묻고 고진이 답한 천황제의 문제. 


 사실 그것은 일본 근대화의 문제가 아닐까. 인간 이성(理性)의 힘으로 신(神) 중심의 체제를 극복하고 새롭게 인간 중심의 체제로의 전환, 종교에서 과학으로 체제를 지탱하는 힘의 전환이 근대화(近代化)라고 한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종교를 바탕으로 이전 시대의 마술을 부활시킨 역행(易行)적인 운동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키스 토마스 (Keith Thomas, 1933 ~ )의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Religion and the Decline of Magic and Man and the Natural World>에서는 17세기에 대중적으로 일어난 정신적 변화가 전근대적인 마술(점성술, 주술) 등을 극복하는 일련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일본의 근대화는 다분히 전근대적인 요소 위에 지어진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함도 함께 깨닫게 된다.(17세기의 전반적인 변화 이전에는 16세기 문화혁명이, 15세기 르네상스의 영향이 있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도록 하자.)


 17세기에 진행된 것은 기술적 변화라기 보다 정신적 변화였다. 이 시기에 다양한 활동영역들에서 인류의 사업은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새로운 믿음이 출현했다. 빈곤을 통제하고 유랑민을 없애려 한 튜더 시대의 시도들은 지속되었고 확장되었다(p432)... 우리는 마술적 믿음들을 대체할 효과적 기술이 고안되지 않은 조건에서 그 믿음들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사람들이 이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마술을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요, 그들 종교가 초자연적 존재에게 도와달라고 빌기 전에 스스로 할 일부터 찾으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p436)... 해묵은 마술적 믿음이 쇠퇴한 것은, 도시생활이 성장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자조 이데올로기가 확산된 추세와 관련될 수 있다. _ 키스 토마스, <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3 >, p441


 일본에서 종교가 형식적인 것으로 사람들에게 밀착하지 못하는 이유, 철학과 사상이 없는 이유, 그런 것들의 영향이 약하기 때문에 아까 오가타상이 말한 대로 쾌락에 대한 관대함도 사람들 의식 속에 심어졌지만, 여하튼 그 이유는 바로 천황의 존재에 있는 겁니다. 천황에게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습니까? 천황은 실상이지 가상은 아니지 않아요? 천황은 분명히 눈앞에 있고 분명히 인간이면서, 서로 다 납득하에 신격화하고 있거든. 거기서 일본인은 딱 걸음을 멈추어버린 겁니다. _ 박경리, <토지 14> , p609/708


 찬하는 '천황제'라는 과거의 장벽 앞에 멈춰선 일본 정신과 일본 양심을 말한다. 고대 농경의 풍요을 바라던 소박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 제도는 수천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괴물이 되어 버렸다. 과거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주변을 손절하는데는 익숙한 일본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를 거부하는 일본의 모습을 <토지> 속 찬하와 오가타 대화의 짧은 몇마디에서 발견한다. 이러한 한계로부터 생겨난 사상적 빈곤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움베르트 에코의 <미의 역사>와 <추의 역사> 그리고 <전설의 땅 이야기>와 연결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칼로써 힘을 빼는데 무한한 힘이 소요되는 창조에 바칠 힘이 있겠느냐, 일본의 문화적 빈곤은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고 칼을 삼가며 치지 않고 내 나라를 지키는 데 그친 조선은 당연히 창조에 그 힘을 살렸다, 전 그렇게 보고 싶은 거예요.(p547)... 그야말로 야만적이며 그로테스크한 것을 아름답고 숭고하게, 따라서 사람에 틀림이 없는 천황이 현인신(現人神)도 될 수가 있었던 거예요. 가치전도, 전도된 진실에 순치(馴致)되어온 일본인은 비극이라는 감각도 없는 채 비극 속에 있는 겁니다. 그것은 다 약탈의 도구며 장치예요. 보다 높은 곳을 향하는 이상이나 고매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와 같은 도구 장치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당신네 나라에 사상이 없는 거지요. _ 박경리, <토지 14> , p549/708


 일본의 무사들이 칼을 갈고 어느 길모퉁이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죽일 때 조선의 선비들은 글을 읽고 먹을 갈았습니다. 상무(尙武)정신이 당신들 나라의 오늘을 있게 했다면 성인군자의 길을 닦던 조선의 선비들은 당신네들 침약을 막지 못하고 오늘의 비운을 당하게 했어요. 그러나 당신네 손들은 피에 젖어 있어요. 악(惡)의 승리지요. 승리는 악을 지고선(至高善)으로 끌어올려 놨고 야만이 문명으로 둔갑합니다. _ 박경리, <토지 14> , p54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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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조용하)도 조선사람으로서 결코 일본의 임금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소이다. 역사란 항상 기복, 운동이라 해도 좋겠습니다만 어떤 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는데요(p352)... 역사의 역학적 방향과 인간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일까요? _ 박경리, <토지 14>, p353/708


 침략하는 일본이나 짓밟히는 우리들 모두는 의지 밖에서 역사에 희롱당하거나 혜택을 받는다 그런 얘긴가요? 저(유인실)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이 말살당하느냐 안 당하느냐 그것은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 있는 거구, 친일파의 존재가 아니었던들 우리의 사정은 좀 달라져 있었을 거예요. 길은 형편에 따라 우회할 수도 있고 질러갈 수도 있겠지만 생각은 화살 가듯 곧아야 한다고 믿어요. _ 박경리, <토지 14>, p354/708


 토지문화재단 독서챌린지 27주차. 이번 주에 읽은 <토지 14>에서 아내 명희가 떠난 조용하는 유인실을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코 둘 다에게 즐거웠다 할 수 없는 대화는 우리에게 1920년대 당시 사회운동의 주소를 알려주기에 시선을 붙들기에 이번 주 페이퍼는 이를 다루려 한다. 일본 유학파 지식인으로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조용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의 본질과 다르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은 인실에게 간파당하고 그의 논지는 여지없이 논파당한다.


 사실, 허세가 강한 조용하에게 1910년대부터 점차 거세지고 있던 노동자 주도의 사회주의 사상은 매력적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유행처럼 번졌던 민족자결주의의 열풍을 대신할 새로운 사상흐름이었고, 많은 이들이 다수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지배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까지 이어지고 '인터내셔널'에 의한 세계통합이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팽배했던 시점임을 생각해본다면, 조용하의 이러한 생각들은 시대를 앞선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전형적인 편에 가까웠다.


 (1910년대 당시) 노동자당과 사회주의당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으며, 극도의 주의와 주목을 끌었다. 과거의 성장세에 근거하여, 그들의 지도자들은 승리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인민의 다수가 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p247)... 1880년대 이래로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들의 급격한 부상이 정달들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의 지지자나 구성원들에게도 흥분과 희망, 즉 자신들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불가피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_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p248


 다만, 외면적으로는 거대한 하나의 조직으로 보이는 '사회주의'였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결들과 흐름이 있었고, 이들은 각각 저마다의 전선(戰線)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이들이 서로 단결되어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의 힘으로 작동하기를 바라기는 어려웠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희망과는 달리 노동자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분화(分化)되었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점차 어두워져갔다. 형이상학적인 사회변혁의 이념은 눈 앞의 경제적, 정체적 조건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이즈음의 사회주의 운동은 보여주고 있었다. <토지>에서 이는 오가타와 인실의 다가갈 수 없는 간극으로 표현되는데, '민족'을 넘어선 '인류'를 강조하는 오가타와 '민족'을 우선시 하는 인실의 대화는 결국 이들의 사랑이 사상의 차이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함을 보여준다.


 실질적으로 노동계급을 관찰했던 사람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가 동질적인 대중이 아니었다는 점, 심지어 한 나라 안에서도 동질적이기가 힘들었다는 점에 동의했다. 사회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주도하에 구분했던 대중들 내의 분열은 너무나 커서, 이들이 어떠한 실질적인 통일된 단일 계급의식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배타적으로 남성들만이 근무했던 보일러 생산직과 영국에서 주로 여성들이 종사했던 면방직 간에, 그리고 똑같이 항구도시에 존재했지만 조선소의 노동자와 도크의 노동자 간에, 의류노동자와 건설노동자 간에 어떠한 공통점이 존재할 수 있을까? _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p249


 노동자들의 차이가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민족, 종교, 언어의 차이는 분명하게 분열을 초래했다(p251)... 계급적 경험의 힘은 대단해서 복수의 노동계급 가운데 다른 어떤 집단에 대해 느끼는 노동자들의 대안적인 정체감은 계급적 정체감을 없앤다기보다는 그것의 입지를 좁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느끼긴 했지만 특히 체코인 노동자, 폴란드인 노동자, 혹은 카톨릭 노동자로 느꼈던 것이다. _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p252


  이처럼 개인적으로 인실과 오가타, 인실과 조용하의 대화 안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분화를 발견한다. 역사법칙에 따른 필연적인 자본주의의 붕괴와 이를 대신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출현. 이러한 낙관적인 개혁의 전망 대신 현실적으로 구체화된 혁명의 모습은 민족주의를 통한 볼세비키 혁명이었다. 계급과 민족, 인종 등 모든 제약요소를 철폐하는 대신 민족주의를 통해 세력을 규합해간 공산주의 혁명. <토지>의 인실에서 공산주의 혁명가의 모습,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1885~1918)의 일면을 발견한다면 무리가 있을까. 한 걸음 나아가 이를 통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 ~ 1919)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 ~ 1932) 사이의 논쟁도 함께 소환할 수 있다.


 볼셰비즘은 사회주의 전통의 틀을 깨면서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숙명론을 뒤흔들었다. 이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의 불가피한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필연적인 출구가 아니었다. 그 대신 혁명을 만들어야만 했다. 단순히 역사법칙의 객관적인 결과가 아닌 까닭에 혁명을 위해서는 창의적인 정치행동이 필요했다(p292)... 1917~1923년에 민족과 계급에 관한 서로 경쟁하는 주장들이 차르의 옛 영토에서 이러한 혁명의 동학을 형성했다. 이것은 어느 하나의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을 배제하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었다. 민족의 유대에 대한 호소는 계급적대를 억누르거나 중요성을 깎아내리면서 노동계급의 정치학을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가 주도하는 광범위한 연합에 결합시킴으로써 사회주의자의 이탈을 사실상 가로막았다. 그러나 좌파 역시 발전하는 민족주의의 틀 내에서 차별적인 강령을 제공함으로써 스스로 민족연합의 지도부를 자임할 수 있었다. 아무튼 좌파는 좀더 온건하고 수세적인 방식으로 노동계급을 비롯한 민중의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었다. _ 제프 일리,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좌파의 역사> , p303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성장'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는 결코 위기 요소를 약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의 '적응 수단'이라 규정한 현상들 - 카르텔, 신용 체계,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달, 노동자 계급의 지위 상승-이 결코 자본주의의 위기를 완화시킬 수 없다고 파악한다... 노동조합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 격화된 자본 간의 경쟁은 노동자에게 더 큰 어려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법적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에 더 높은 벽을 세우고 있다. 따라서 혁명, 즉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_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p133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다음의 인실의 대화가 더 잘 이해된다.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라는 조용하의 물음에 대해, 당신같은 무늬만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에게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대신, 민족의 대한 의견을 밝히는 인실의 대화 속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분화와 함께 공산주의자로서 인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민족'을 중심으로한 사회혁명의 성격을 공산주의가 갖고 있었기에, 1930년대 무장독립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흐름이라 하겠다.


 일본이 우리 땅을 강점하여 내 민족을 핍박하고 착취하는 데 대하여 반대하는 것을 사회주의라 한다면 저는 사회주의자겠지요. 조선은 지금 정권 운운할 처지도 아니며 국토는 잃고 민족이 말살되어가는 형편인데 반일이면 되는 거지, 기치를 선명히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고 생존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우가 비단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간에만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기업과 노동자의 경우에도 생존을 외치고 권리를 주장하면 이런 경우 사회주의자라는 못을 박기도 하더군요. _ 박경리, <토지 14>, p344/708


 그건 남성 여성의 구별에서 제기되는 것이기보다 인간성의 문제가 아닐까요? 약자니까 나보다 약한 자가 있어주기를 바라는 심리, 일종의 잔인성이라 할까요? 부당한 독재자나 암우한 군주가 살생을 일삼는 것도 바로 그 심리 때문일 거예요. 비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사이에도, 일본을 보세요. 그 나라 유산이라곤 칼 쓰는 것밖에 없지 않아요? 참으로 열등감이 치열한 민족이네요. 그네들이 일등국민 일등국민 하기 위해, 일등국민이 되기 위해 그들은 끝없이 살육을 계속할 거예요.  나는 그들이 사람을 어떻게 살해했는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_ 박경리, <토지 14>, p359/708


 다만, 이러한 지식인들의 시대 인식이 공산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는 그들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었겠지만, 그것이 민중들의 인식과 직결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부분이라는 것도 <토지>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의 법칙을 말하는 지식인들의 논리에 대해 소지감의 독백은 역사의 법칙 역시 또하나의 작위이며 기만임을 비판하는 민중의식을 대표한다.


 혁명이란 무엇이냐. 애국하는 겐가, 애족하는 겐가. 하긴 요즘엔 애국을 생략하는 축도 있고 민족을 인간으로 대치하는 축도 있긴 있더라만 결국 공평하자는 거다. 고루 나누어 먹자는 거다. 그게 바로 정의 아닌가.(p27)... 실패한 자는 정의를 환상한 자였느니, 희생된 자는 정의의 사슬로 발목을 묶였던 수많은 백성이었고, 성공한 자는 정의를 칼끝에 꽂고 그것을 무기로 삼는 자였느니라. 하항, 그러면 역사는 무엇이냐. 역사란 정의를 날조한 문서다._ 박경리, <토지 14>, p28/712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오가타와 조용하, 그리고 이들 모두를 비판하는 민족주의 공산주의자 인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비판하는 소지감. 이들의 대화와 생각은 당시 시대상을 잘 녹여내면서 우리에게 생동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사회주의 운동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와 전혀 상관없을 듯 하지만, 최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기사는 100년 전과는 다른 이유로 쇠퇴해가는 좌파 운동의 이유를 짚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다름 의미있는 작업이 될 듯하다. 이에 대한 내용과 사회주의에 대한 더 깊은 내용은 다른 페이퍼에서 다루도록 하고 독서 챌린지 페이퍼는 여기서 갈무리하자...


 어떤 것이 물러나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독차지한다. 전쟁 직후 5% 미만이었던 고학력자 비율이 오늘날 유럽과 미국에서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고학력자들은 선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미 기득권층인 그들은, 정치적 승리를 위한 연대가 절실하지 않다... 1950~1960년대에는 부유층과 고학력자들이 우파에, 빈곤층과 저학력자들이 좌파를 지지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전문직업인이나 기업 간부들이 좌파에 투표한다. 이들은 부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해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을, 종종 반대방향으로 이끈다. _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2.1월호> <좌파는 왜 패배하는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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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23 16: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토지 뒷부분에 가면 이런 당대 사회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았던게 기억나네요. 아마도 당시의 격변하는 시대가 이런 논의를 도저히 뒷편으로 밀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다만 책이 지식인 세대로 축을 옮겨가면서 토지의 앞부분이 가지고 있던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묘사는 약해진듯했습니다. 어쩌면 당대 지식이들의 세계 인식이 그만큼 얄팍했다는 반영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토지를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다시 읽는듯한 느낌입니다. ^^

겨울호랑이 2022-01-23 19:50   좋아요 4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서희가 진주를 배경으로 한 시점부터 이전과는 사뭇 다른 작품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변화는 4부가 쓰여진 시점이 80년대 군사정권 하의 상황이었다는 점과도 연관있지 않나 생각해 봤습니다.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시대정신을 박경리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일요일 저녁 잘 마무리지으세요! ^^:)
 


 밀폐해버린 것, 그것들은 모순이며 회의이며 욕망, 또한 절망이기도 했었다. 그것은 혈기였으며 자기 추구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지순한 것, 방종 뒤켠에 숨겨진 맑은 것, 진실이었을 것이다. 끝도 시작도 없었으며 풀지도 맺지도 못하는 몸부림과 쓰라렸던 것. 그러나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적당한 곳에서 매듭짓고 적당한 곳에서 풀어버리고...... 그것들이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듯이 사람도 생명을 향한 비밀이 있겠으나, 그게 바로 방편일 수는 없다. 방편은 오히려 인위요 섭리에 반(反)한 것일 수도 있다. _ 박경리, <토지 13> , p416/596


 <토지> 독서챌린지 26주차. 이번 주 읽은 <토지 13>에서는 이혼을 둘러싼 조용하와 임명희의 대립이 그려진다. 동생 찬하와 아내를 부정한 관계로 엮어 내며, 이들을 괴롭히던 즐거움을 바라던 용하는 오히려 이혼(離婚)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하고 만다. 용하에게 명희는 일시적 장난감이 아닌 지속적인 장난감이라는 면에서 놓쳐서는 안 될 존재였지만, 명희는 용하의 음모를 통해 '박제되어 버린 학'이 아닌 창공으로 날아오를 백조로 새롭게 자신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에서 헨릭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1906)의 <인형의 집 Et Dukkehjem>을 떠올리게 된다.  


 지체만 얕았다 뿐이지 기품 있는 용모에 지적 분위기, 멍청하다 싶을 만큼 집착하는 것이 없었으며 약간 살풍경하고 무관심한 듯, 그런 감성은 이기적이며 싫증내기를 잘하는 용하 같은 성격에는 새로운 매력으로써 지속되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물질적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욕망이 강한 여자를 용하는 싫어했다. 밀착해오는 여자는 일시적 장난감으로서 끝내버린다. 홍성숙이 그런 예에 속한다. _ 박경리, <토지 13> , p597/724


 '나는 생각을 잃어버린, 다리도 목도 다 부러져버린 인형일까? 현실 같지가 않아. 누가 내 손가락 하나를 부러뜨려버린다 해도 아플 것 같지가 않아. 피도 흐르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사람일까? 저기 저 계속하여 끝없이 주절대는 사내도 사람일까? 점심을 가져가는 농부의 아낙, 가래질을 하는 농부, 그들보다 천배만배 불행한 나와 저 사나이. 왜 화가 나지 않지? 나는 지금 모욕감도 없다! 구경꾼을 넘어서서 난 이제 송장이 되었나?' _ 박경리, <토지 13> , p603/724


 <인형의 집>의 노라가 빌린 돈에 대한 채무로 인해 '인형'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다면, <토지>의 명희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용하를 통해 '인형'임을 알게 된다. 비록, 두 인물 모두 자신이 '인형'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도달하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전자가 외부에서 주어진 충격을 계기로 자신의 삶 전반을 돌아본다면, 후자는 가정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곪아온 상처가 가정 내부의 폭발로 터졌다 것을 다른 지점이다.


헬메르 : 당신은 아내의 도리 그대로 나를 사랑했어. 통찰력이 부족해서 수단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지. 하지만 당신이 스스로 제대로 행동하지 못한다고 내가 당신을 덜 사랑할 것 같아?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아. 나에게 기대면 내가 당신에게 충고를 해 주고 인도하겠어. _ 헨릭 입센, <인형의 집> , p88/112


노라 : 그래요. 재미있었을 뿐이죠.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게 친절했어요. 하지만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나는 당신이 나를 데리고 노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면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토르발,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어요._ 헨릭 입센, <인형의 집> , p91/112


 이러한 이별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한 인식 문제는 노라의 남편 헬메르와 명의의 남편 용하가 이별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헬메르는 이별 직전의 대화가 채무와 관련된 문제에서 시작되었기에 노라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 모른다. 반면, 용하는 이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싶지는 않지만 알기에 명희를 파멸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닐런지. 결국, 용하는 명희를 능욕하며 마지막 잔도(棧道)를 스스로 불태우고 만다. 이런 면에서 헬메르-노라의 관계보다 용하-명의의 관계가 더 파멸적이다.


 결코 저자세도 아니었다. 손이 떨렸던 것은 분노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조용하는 명희를 철저하게 부숴버리고 망가뜨리고 싶은 분노와 증오의 불을 태우고 있었다.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는 이를 갈았다. 집 앞에서 잡는 팔을 뿌리치며 명희가 대문을 밀고 모습을 감추었을 때는 살기마저 느꼈던 것이다. 그는 결코 단념하지 않으리라 맹세를 했다. 그러나 한밤중이면 문득 명희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곤 했다. 얼음장 같은 여자 옆에서 조용하는 지금 한밤중에 생각하곤 했던 그 절망을 되씹는 것이다. 단념을 하고 싶기도 했다. 끝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포기를 하나. 그럴 수는 없다. 속수무책으로 끝낼 수는 없다. 낯가죽이라도 벗겨놔야지.(p585)... 능욕! 능욕, 스스로 목숨을 끊을 그런 힘조차 빼앗긴 능욕이었다. 철저하게 무자비하고 백정의 손에 달린 한 마리 가엾은 짐승같이 도살, 분명 그것은 육체를 통한 영혼의 도살이었다.(p607) _ 박경리, <토지 13> , p607/724


노라 : 우리가 함께 사는 생활이 진정한 결혼이 될 수 있다면 되겠죠. 잘 있어요.(현관문으로 나간다.)

헬메르 : (문 옆의 의자에 주저않아 머리를 손으로 감싼다.) 노라! 노라! (주위를 둘러보고 일어난다.) 아무도 없군. 그녀는 이제 없어. _ 헨릭 입센, <인형의 집> , p100/112


 작품 안에서 노라와 명희는 모두 가출(家出)을 통해 가정과의 관계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렇지만, 가출이 기존 관계의 청산이 아닌, 기존 관계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이 가출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열강의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일본의 욕망은 아시아라는 기존 체제를 벗어나려 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나아감이고 탈출이다. 노라와 명의의 나아감과 일본의 탈출은 무엇이 달랐을까. 문제는 그들의 나아감이 그들이 형서했던 기존 세계를 자신의 나아감을 위한 연료탱크로 활용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만일, <인형의 집> 노라가 집을 나가기 전에 집 명의와 통장의 잔고를 자신 명의의 계좌로 이체시켜 놓았다면, 이 작품의 장르는 아마도 범죄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며 유럽체제로 편승하면서 벌인 모습은 이와 다르지 않게 보인다. 다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선택을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변할 지 모른다. 근대화된 경제 시스템과 천황제에 기반한 봉건전인 정치시스템. 전근대와 근대에 걸쳐진 이들의 갈등은 유럽제국과는 또다른 양상으로, 그리고 더 긴급하게 다가왔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았을까.  


 일본의 사회구조는 최상층에서는 가장 고도로 합리화된 독점자본이 우뚝 솟아 있지만, 그 저변에는 봉건시대와 거의 다름이 없는 생산양식을 지닌 영세농과 또한 거의 대부분 가족노동에 의존하고 있는 가내공업이 서로 비집고 늘어서 있었습니다. 최고도의 기술과 가장 원시적인 기술이 중첩적으로 산업구조 속에 병존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봉건적 절대주의의 지배,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의 독점화의 진전이 결코 서로 모순하지 않고서 상호 보완해주는 관계에 있다는 것, 그것이 일본 파시즘 운동에서의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운명을 결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_ 마루야마 마사오,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 p124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 이후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근대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봉건제 - 천황제로 대표되는 - 와의 모순속에서 이 모순이 드러나지 않도록 '밀폐'하려는 일종의 '방편'이 제국주의 침략이었다는 점을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결국 '탈아입구'로 표현되는 일본의 가출은 끊임없는 '과거 부정'과 '과거 지우기' 그러면서도 '과거 수탈'에 근거한 것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용되었던 것이 바로 일본의 '내선일체(內鮮一體)'에 근거한 민족이론이라 여겨진다.


 인간의 총체는 인류가 아닌가. 민족은 부분이다. 인간의 비극은 인류의 비극이요 민족의 비극도 인류의 비극이다. 개인이건 민족이건 생존을 저해하고 압박하는 것은 죄악이며, 근본적으로 부조리다.(p661)... 흔히들 국가와 국가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엔 휴머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하지. 그 말은 국가나 민족을 업고서 저지르는 도둑질이나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하여 사람들은 얼굴없는 하수인, 동물적인 광란에도 수치심 죄의식이 없게 된다. 군중은 강력하지만 군중 속의 개인들은 무책임하고 방종하다. 권력이 그것을 조종할 때 권력은 인간의 부정적인 면 포악한 속성을 식지(食指)가 움직이는 곳으로 풀어주고 사냥해온 물소의 고기 한 점 던져주면서 국수주의의, 애국 애족의 이리를 만드는 거지. _ 박경리, <토지 13> , p663/724


 다른 한 편으로 '내선일체'의 민족주의 속에서 어네스트 겔너(Ernest Gellner, 1925~1995)의 민족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내지(內地)의 근대화를 위한 사상기반으로 중심부-주변부를 아우룰 수 있는 사상 기반으로 '내선일체'가 이후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 등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는 겔너의 민족주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한 스미스(Anthony D. Smith, 1939~ )의 민족주의는 과거 전통과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의 일종을 민족주의라는 점에서 결을 조금 달리한다. 겔너와 스미스의 민족주의 차이는 거칠게 일본 제국주의와 이에 대항하는 독립투쟁의 민족주의의 차이로 여겨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넘기자.


 겔너에게 민족주의는 근대 산업사회의 문화이다. 즉 서구에서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성공한 근대화가 마치 해일과도 같이 전 지구를 불균등하게 휩쓰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민족주의이고, 그 민족주의의 핵심 내용은 근대 산업사회가 필요로 하는 언어문화(linguistic culture)로 설명된다....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이전에는 저급한 문화들(low cultures)이 주민의 다수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주민 전체의 삶을 차지하고 있던 사회에 고급문화(a high culture)를 전반적으로 부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학교가 주선하고 국가교육기관이 감독하는 이디엄(idiom, 언어)의 확산, 즉 상당히 정확한 관료제적, 기술적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조건에 맞게 기호 체계화된 이디엄의 전반적인 확신을 의미한다. _ 김인중, <민족주의와 역사> , p749/927


 이번 주 <토지> 독서 챌린지를 통해 가정의 속박을 거부한 근대화 시대의 두 여성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가정을 욕망을 밀폐시키고자 하는 일종의 방편이라고 본다면 비근대적인 요소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이의 연장선상에서 과거 전통을 떨쳐버리고 근대화를 향한 일본의 제국주의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부정과 새로운 곳으로의 나아감. 이것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명희와 노라, 그리고 탈아입구를 통해 생각하게 된다. 


ps. 내부의 모순을 밖으로 표출하려는 일본의 다음 시선이 만주(滿州)로 향할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중일전쟁(中日戰爭) 때 함께 다루는 것으로 계획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일본은 지급 급해 있거든, 중국이 통일되어 물론 아직은 국공 간의 도저히 용해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일단은 내란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한다면 중국은 일본에 비하여 두말할 것도 없이 대국 아닌가. 공포지. 특히 공산당의 집권을 무서워한 것은 바로 시장을 잃는다, 그것과 직결이 되는데 그럴 경우 일본은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되어 순식간에 쭈그러들어. 해서 그들은 만주를 두고 염치 좋게 일본의 생명선(生命線)이라 외쳐대는데 그들의 현실이 그런 것만은 사실이거든, 초조해하고 서둘러대는 건 조금도 무리가 아니야. _ 박경리, <토지 13> , p574/724


  1904~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러시아를 대체하여 이 지역의 지배적 외세가 되어 특히 1910년 조선의 합병 뒤, 그리고 1차대전 중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파워의 공백에서 이권과 영향을 증대시켰다.(p104)... 농업은 1898년과 1908년 사이에 두 배로 증가한 인구의 요구로, 그리고 대두 수출의 지속적인 수요로 촉진되었다. 20세기 초 만주 수출의 80%나 차지한 대두(大豆)와 그 추출물들은 세계 대두생산의 59%를 점하며, 1920년대 말까지 계속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대체로 수출지역이 일본이었지만, 후일 유럽의 축산 사료시장도 확보했다... 만주 경제의 성장으로 이 지역에 대한 중국 본토와 일본의 이권들도 증대되었다. 1903년에서 1928년까지 만주의 대 중국 무역은 3.5%에서 32.5%로 늘었지만, 상당량의 것은 일본 무역이었다. 1931년에 여전히 만주는 주로 농업경제였지만, 소비재 생산을 위한 공업생산의 성장도 있었다. _ 프래신짓트 두아라, <주권과 순수성>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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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1-16 1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세요.
토지가 총 22권이라고 하던데
절반 넘으셨습니다.
정말 대단하고 부럽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1-16 20: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 혼자 읽으면 도중에 그만둘 듯하여 독서챌린지에 참여하여 하드캐리 당하다보니 밀려밀려 여까지 왔네요 ^^:)
 

 의병장의 목을 쳤을 때 흐르는 그 끈끈적한 피를 당신들 벚꽃이나 하라키리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한일합병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결하였소. 특히 늙은 유생들은 목매어 죽고 절식해 죽고 우물에 빠져 죽고 당신들이 볼 적에 결코 아름다운 죽음은 아닐 것이오. 그러나 그것에는, 네, 죽음의 참뜻이 있다고 나는 보는 거요. 죽움이란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것, 끔찍하고 추악한 것, 당신은 영혼 속의 신성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리얼리스트라는 말을 했었소. 그러나 재차 말하거니와 죽음은 꽃이 아니며 아름다운 것도 아니며 바로 현실, 주어진 현실을 넘어가는 일이오. _ 박경리, <토지 13> , p264/714


 <토지 13>에서 조찬하는 일본과 조선의 문화 차이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을 보여준다. 조찬하가 바라본 양국의 문화 차이는 그 지리적 거리보다 멀었다. 낭만주의적인 일본문화와 현실적인 조선문화. 서로 다른  양국의 문화 차이에 대해 조찬하는 여러 예를 들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일본과 조선의 관점 차이는 정신세계의 차이를 대표한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는 공통적으로 할복(割腹)으로 표현되는 죽음의 모습에서 일본인들의 특징을 발견하는데, 특히 이나조의 <무사도>에서는 할복을 통해 명예를 지키려는 사무라이들의 낭만주의적인 죽음이 그려진다. 죽음의 미학이다. 


 현대 일본인이 자기 자신에게 행하는 가장 극단적인 공격행위는 자살이다. 그들의 신조에 따르면, 자살은 적절한 방법으로 행한다면 자신의 오명을 씻고 죽은 후 평판을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에서는 자살을 죄악 시하여 절망에 자포자기하여 굴복한 것으로 치부하지만, 자살을 존경하는 일본인에게는 명확한 목적을 지니고 행하는 훌륭한 행위가 된다. 자살이 이름에 대한 기리에서 당연히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장 훌륭한 행동 방식이 되는 경우도 있다.(p317)... 무사에게 하라키리(服切)가 허락되는 것은, 죄를 추궁당하여 명예가 떨어진 프로이센 장교에게 때때로 비밀리에 권총 자살이 허락되는 것과 같다. 일본의 사무라이도 마찬가지로, 그런 사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단지 수단의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_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 p319/590


 독자 여러분은 이제 할복이 단순히 목숨을 끊는 행위가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할복은 법률과 예법상의 제도였다. 중세 시대부터 시작된 그것은 무사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잘못을 바로잡고, 수치심을 벗고, 친구에게 사죄하고, 자신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법률 상의 처벌로서 명령되었을 때는 장중한 의식 속에서 집행되었다. 할복은 세련된 자살 방식이어서 냉정한 감정과 침착한 태도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실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복은 특히 무사에게만 어울리는 법도였다. _ 니토베 이나조, <일본의 무사도> , p141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더럽혀진 명예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할복을 사용했고,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졌다면,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힘이 떨어져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자결(自決)을 선택했다. 때문에, 아름다움보다는 안타까움을 주위에 남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주변을 일깨우려는 마음이 찬하가 말한 리얼리스트의 죽음이 아닐까.


 전자의 죽음이 주변으로부터 상처받은 자신을 보호하기위한 죽음이라면, 후자의 죽음은 자신을 위한 죽음이 아닌 현실을 넘으려는 마지막 노력일 것이다. 이러한 선비 정신은 <매천야록 梅泉野錄>의 저자 황현(黃玹, 1855~1910)이 남긴 절명시(絶命詩)에 잘 드러난다.


융희 4년 8월 3일에 군청에서 마을로 합방령이 반포되자 진사 황현은 그날 밤 아편을 먹고 이튿날 운명했다. 시 네 수를 남겼다. 


亂離滾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幾合捐生却末然(기합연생각말연)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내)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어지러운 세상 부대끼면서 흰머리가 되기까지

몇 번이나 목숨을 버리려 했지만 여태 그러지 못했구나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어

가물거리는 촛불만 푸른 하늘을 비추네


妖氣掩翳帝星移(요기엄예제성이)

九闕沈沈晝漏遲(구궐침침주루지)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부유)

琳琅一紙淚千絲(임랑일지루천사)


요사스런 기운이 가려 임금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져 햇살도 더디 드네

조칙도 이제는 다시 있을 수 없어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가닥을 모두 적시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 보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會無支廈半椽功(회무지하반연공)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부시충)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當時愧不躡陳東(당시괴불섭진동)


내 일찍이 나라를 버티는 데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으니

겨우 인(仁)을 이루었을 뿐 충(忠)을 이루진 못했구나

겨우 윤곡(尹穀)을 따른 데서 그칠 뿐

진동(陳東을 못 넘어선 게 부끄럽기만 하구나 _ 황 현, <매천야록> , p458


<토지 13>에서 조찬하는 일본문화와 조선문화의 차이를 계속 설명해 나간다. 직선의 일본문화와 곡선의 조선문화. 이러한 정신이 표현된 건물들의 차이 등. 조찬하가 내린 일본에 대한 평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자기(瓷器)에 대한 설명이 인상 깊게 남는 것은 찬하의 대화 속에서 한 권의 책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피조물, 사람 손에 의한 피조물엔 생명감이 넘쳐 있고 생명체를 보다 많이 수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이 완벽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 즉 생명이 있다는 얘깁니다. 청자나 백자 특히 백자 항아리는 빛깔과 선의 융합에서 생동하기도 하고 정밀(靜謐)을 느끼기도 하는데 어떤 경우든 살아 있다는 것, 생명력 그것을 자로 재어보고 가루를 내어 분석하고 해보았자, 사람을 놓고 해부해보아도 사람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결론과 마찬가지, 결국 생명은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런 창조의 능력은 조물주에 접근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로 보아야겠습니다. _ 박경리, <토지 13> , p248/596


 정동주의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은 조선 막사발이 일본에서 이도차완(井戶茶碗))으로 다이묘(大名)들의 최고급 사치품으로 받아들여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조선 서민이 사용했던 그릇으로 알려진 막사발이 사실은 절에서 사용되던 식기였으며, 그 안에는 깊은 신앙심이 자리하고 있음을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은 알려준다. 깊은 신앙심과 경건한 마음을 담은 그릇인 조선 막사발과 이를 자신들의 허영과 권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 일본영주들의 이도차완. 막사발과 이도차완이라는 같은 자기의 다른 용도는 조선과 일본의 문화 차이를 현실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일본 무사들에게 16세기는 권력과 조직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번영의 세기였다. 새로운 힘의 원천은 차문화(茶文化)에서 비롯되었다. 시대적 조류로서 일본 사회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던 차문화를 바라보던 무사들은 차문화가 지닌 새롭고 놀라운 많은 가능성들을 신속하게 받아들였다. (p35)... 이도차완(井戶茶碗)과 농차(濃茶)가 무사계급의 차문화를 이끄는 두 축으로 자리잡은 것은 센노 리큐에 의해 집대성된 와비차의 영향이었다. 와비차는 외면의 겉치레와 탐욕적인 광채, 권위적인 넓고 큰 공간보다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내면화와 고용한 정신세계를 중시했다. 화려한 것을 억제하고 물질적, 향락적으로 변질되려는 일본 차도를 혁신시켰다. 부족함과 진중함, 청순함과 질박함을 존중하는 차도였다. _ 정동주,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 , p39


 이도차완은 오랜 연원을 지닌 승려들의 법물(法物)로서 만다라의 법에 따라 제작된 불교미술품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속의 생활잡기가 아니다. 이도차완은 조선시대 어느 수행자의 기도로 빚어진 만다라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그리운 스승, 위대한 스승 석가모니의 마음에 닿고자 하는 불멸의 존경심이 빚어낸 작품이다. 가마의 불 속에서 그려진 흙의 마음이자 흙 속에서 걸어나온 부처의 미소다. 연원과 외양, 색깔과 그 분위기.....  이도차완을 둘러싼 모든 정황은 그것이 절간의 발우였음을 웅변하고 있다. _ 정동주, <조선 막사발 천년의 비밀> , p267 


 조찬하의 분석처럼 오랜 정신세계의 풍요로움이 조선의 근대화를 늦췄고, 결핍이 일본의 근대화를 앞당겨 물질세계에서 일본이 조선을 앞섰다면,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서 조찬하는 물질문명의 역전된 결핍과 잉여의 관계는 다시 뒤집을 수 있다고 보았을까. 아쉽게도 <토지13>에서는 더 이상의 논의는 진행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정신문명의 결핍이 가져온 물질문명의 한계가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를 일본의 사례 속에서 발견하기에, 조찬하의 말이 더 깊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일본 민족의 단순성은 그 단순함 때문에 색채에 있어서나 선에 있어서 선이라기보다 선이 행방불명된 개칠의 상태인데 단순함에서 오는 욕구일까요? 조선 민족의 복잡성 그것 때문에 반대로 색채나 선에 있어서 대담한 생략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생략이란 근원을 찾아서 불필요한 것을 쳐내버린다 그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생명을 찾는다는 것이지요.(p250)... 복잡하면 쳐내고 단순하면 덧붙인다는, ...... 바꾸어서 말하자면 결핍과 잉여상태, 저는 얘기의 결론을 지어야겠습니다. 결핍이 오늘 일본을 강국으로 만들었고 잉여상태로 하여 조선은 망했다. _ 박경리, <토지 13> , p251/596


 당신네 군국주의는 로맨티시즘으로 무장돼 있소. 로맨티시즘은 허윕니다. 당신의 천황이 현인신(現人神)인 것처럼. _ 박경리, <토지 13> , p26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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