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사는 데 뜻이 있는 거요. 부귀영화야말로 헛된 꿈이오."

 "실패한 사람의 자기 위안 아닌가요?" "나는 가끔 거지가 부러울 때가 있소. 그들은 자유인이니까." "정말 자유인일까요?" "아암, 자유인이지요. 그들에게는 집착할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한 끼 걱정만 하면 되니까."

 "그들은 가진 자보다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무형유형으로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유는 저당 잡히게 마련이니까, 내 얘기가 틀렸단 말인가요?"

 "그래도 모든 사람은 유형무형은 많은 것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은 미망(迷妄)에 빠져서 고통스러워하지." _ 박경리, <토지 19> , p197/634


  <토지> 독서챌린지 37주차. 이번 주 독서챌린지 주제는 ''내가 만약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이지만, 이에 앞서 이번 주에 읽은 책 내용을 먼저 정리해보자. <토지 19>에서는 윤국과 양현의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찬하와 오가타가 아들 쇼지를 데리고 만주로 여행을 간다. 그 중에서 영광과 유인배와의 대화, 찬하와 오가타와의 대화 중에서 공통된 소재가 있는데 바로 '자유 自由'다. 이들이 말한 자유가 무엇일까? 나라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 중에서도 경제적인 자유일까, 정치적인 자유일까 등등. 


 용무가 없는 여행이란 항상 그러한 것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탈출이다. 그러나 배를 탔을 때나 기차를 탔을 때는 그것이 탈출이기보다 유리(遊離)현상으로 나타난다. 탈출하는 대지를 잃기 때문에 개체에 응결되는 자각과 동시에 운명과의 수직선을 그리며 불확실한 의식의 세계는 확대된다. 그것은 죽음의 행로가 이러할지 모른다는 쓸쓸함이며, 자유의 개념이란 결국 개체에 대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_ 박경리, <토지 19> , p290/634


 <토지>에서 언급된 자유가 '일체의 구속이 없음'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라면, 이들은 정말 '자유' 자체를 원했을까, 아니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원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거지는 가진 것이 없기에 오히려 구속받지 않을 수 있었던 반면, 찬하와 오가타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속박될 수 밖에 없다는 역설. <토지>에서 말하듯 자유란 절대적인 상태가 아닌 관계에 대한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에 대해 에리히 프롬 또한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은 <자유로부터의 도피 Escape From Freedom>에서  더 큰 자유가 오히려 사회에 대한 더 강한 결합으로 이끌기에 결과적으로 자신을 얽매이는 것으로 해석한다.  프롬의 결론에 따르면 마치 망망대해에서 갈증에 못 이겨 마신 바닷물이 더 큰 갈증을 불러오듯,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가 더 큰 강압으로 돌아오게 된다. 사회로부터의 분리불안이 사회의 간섭을 희망한다면,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의 <자유론 On Liberty>은 자유를 위한 사회의 간섭을 정당화한다.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이뤄지는 사회의 간섭과 강제는 아이러니 하지만,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이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_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p25/226


 인간의 개체화 과정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방금 말한 의미에서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때까지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던 기본적인 관계를 단절당하면, 이 불균형 때문에 자유는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자유는 의심과 동일해지고, 의미와 방향을 잃은 삶과 동일해진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이나 세계와의 관계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더라도 불안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면, 자유에서 벗어나 그 관계 속으로 도피하거나 복종으로 도피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생겨난다. _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 p34/226


 자신을 노예로 파는 것은 자유를 포기한다는 말이다. 한번 이렇게 하고 나면 나중에 다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 결과 이는 자신을 팔아버리는 행위도 허용해주는 원리, 즉 자유의 목적을 자기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자유 상태에 있을 때 누리는 이점을 향유할 수 없다. 자유의 원칙이 자유롭지 않을 자유 free not to be free까지 허용하지는 않는다. 자유를 포기할 자유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 원칙은 우리가 자유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자유를 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의 자유는 함부로 누리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원칙 안에서 각 개인은 행위자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_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선집> <자유론> , p408/962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 1909~1997)의 설명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벌린의 설명에 따르면, 소극적인 의미의 자유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는 '당위'가 된다. 자신의 자유뿐 아니라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 이러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유의 기원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계몽시대의 '도구적 이성'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이사야 벌린 Isaiah Berlin의 정의에 따르면, 소극적 자유란 '타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각자가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이며, 이에 비해 적극적 자유란 '합리적으로 결정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개인의 상태나 능력'을 뜻한다. 그는 자유의 근본적인 의미는 타인들에 의한 사슬로부터, 감금으로부터, 노예 상태로부터의 자유에 있으며, 그 나머지는 이런 의미의 확장이거나 은유일 뿐이라고 본다.... 벌린이 적극적 자유를 문제 삼는 이유는, 그것이 함축하는 '이성에 따른 자기 지배 혹은 자기실현'의 의미가 자유를 이해하는데 혼란을 초래하고 나아가 자유를 억압하는 명분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성의 주체로서의 '자기'의 범주를 국가나 민족 공동체로 확장하게 되면, '자유롭기 위한 강제'의 역설이 '참된'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_ 문지영, <자유> , p116/252


 국가에 봉사하는 '관직'의 의무에 합당하게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 일컫고, 반면 그런 관직의 의무에서 벗어나 단지 '식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개진하는 것을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 일컫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성의 '사적' 사용은 도구적 이성을 가리킨다. 그런 경우 공동체의 구성원은 '단지 수동적 태도만 취하게 하는 기계적 장치'의 일부로 기능하며, 이성 사용의 보편타당성 여부를 따져서는 안 되고 국가의 명령과 관직의 의무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반면 이성의 '공적' 사용에서는 생각과 표현의 자유가 전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다._임마누엘 칸트 외, <계몽이란 무엇인가> , 해제, p25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을  

'근대화(近代化)'라는 명목으로 국가 단위에서 이성(理性)을 강요했을 때 발생하는 도구적 이성의 문제. 이것은 근대화(Modernization)에서 비롯한 현대사회의 문제점이 아닐까. 현대사회의 불안과 소외, 이것을 <토지 19>에서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토지> 초반부에서 목매달아 죽은 여인의 원혼이 서린 나뭇가지가 병에 효험이 있더라는 전근대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면,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사회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현대사회의 문제로 대체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서희로 대표되는 1세대 남짓의 시간 동안 발생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 사회의 필요가 아닌, 외부의 필요에 의해 강제된 것이기에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없었음도 당연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며, 작품 속 인물들을 다시 들여다 보자. 내가 만약 소설 속 인물이었다면?


 이성의 광기는 오늘날의 이성을 특징짓는 명백한 기형성을 훨씬 능가한다. 이성은 인간을 통해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세계의 질병에 대해 반성해야만 자신의 합리성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한 자기 비판 속에서 이성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진리의 원칙을 고수하고 그 밖의 어떠한 동기도 지향하지 않음으로써 동시에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된다. 자연 지배는 인간 지배로 전환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성의 자연성은 지배하려는 경향 속에 내재되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역설적으로 이성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따라서 이성은 화해의 도구가 되는 경우에만 동시에 도구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진보와 퇴보라는 방향의 변화는 철학이 어떻게 정의되어왔는지를 반영한다. _ 막스 호르크하이머, <도구적 이성 비판> , p218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자유의 상실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선택권마저도 더 이상 시민으로서의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보호 권력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문제들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세 가지 불안 요인으로 종합된다. 첫 번째 두려움은 삶의 의미의 상실, 즉 도덕적 지평들의 실종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는 만연하는 도구적 이성 앞에서 소멸하는 삶의 목표들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유/자결권의 상실에 관한 것이다. _ 찰스 테일러 , <불안한 현대사회> , p32/294


 <토지 19>의 시대적 배경은 1940년 초중반이다. 급격한 사회 변화와 함께 전쟁이라는 한계 상황. 이러한 이중고 앞에서 등장인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처해나간다. 남매로 자란 윤국과 양현에게 결혼을 강요하는 서희, 친구의 아들을 입양해 키우고 이 사실을 아들에게 알리지 않는 찬하. 이들의 모습이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들에게 다른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가까운 이들과 헤어지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을 서희와 찬하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기에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후 전개되는 <토지>의 내용을 알고 작품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다. <토지 19> 안에서 이야기되는 '자유'라는 근대 이데올로기와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함께 생각하며, 작품 속 인물들의 선택을 이해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자유'와 관련해서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AD 354~430)는 '자유의지'를 선(善)과 악(惡)을 판단할 수 있는 중간선으로 생각한다. 다만,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이기에 절대선에 이르기 위해서 인간이 따라야 하는 것이 '신의 길'임을 함께 말한다.  또한, 노자(老子, Laozi, BC571 ?~?)는 무위(無爲)를 통해 '도(道)'를 따를 것을 이야기한다. 이들 모두가 '분리'가 아닌 '따름'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지향한다면, '분리'를 통해 억압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근대의 '자유'는 어쩌면 우리를 더 큰 강제로 이끄는 다른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으로부터의(from ) 자유(freedom)'가 아닌 어떤 상태로의 자연스러운 귀의를 통한 궁극적인 자유가 우리에게 더 큰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닐런지...


 48. 누구든지 넉넉한 정도 이상으로 바라면 물욕이다. 이러한 물욕은 곧 탐욕이고 탐욕은 곧 부정한 의지이다. 그러므로 부정한 의지야말로 모든 악의 원인이다. 만약 그것이 자연본성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자연본성을 보존해 줄 것이고 자연본성에 해로울 리 없으며, 따라서 부정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모든 악의 뿌리가 자연본성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고, 이 말로도 자연 사물들을 (나쁘다고) 공격하려는 사람들을 논박하기는 충분하다고 본다(p370)... 52. 그러니까 사람이 무지해서, 올바로 행할 것을 선택하는 자유의지를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육의 습관이 저항하기 때문에 죽음의 유산의 광폭한 위력이 어떤 면에서 천성적으로 뿌리를 내려 사람이 무엇을 해야 올바로 행함인 줄은 알고 그렇게 하기 원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할 능력이 없거나 한다. _아우구스티누스, <자유의지론> , p377


 도를 따름으로써 성인-군주는 이원성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뚜렷이 구분되는 측면들과 계기들은 서로를 해치려고 싸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호 주고받음을 통해 협력한다. 이것은 유익한(그리고 리드미컬한) 효력의 교환으로 이어진다. 이 효력(德)은 군주에 의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에서 펼쳐지고 공동체에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에 점점 커지는 "위신(德)"의 형태로 "그에게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조차도 그가 주었던 것을 얻는 것이다. 도와 그것의 효력인 덕은 가장 넓은 차원에서는 세상 전체에 "작용하고" 있다. _ 한스-게오르크 묄러, <도덕경의 철학> , p70/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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