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건축이 없어져도 식민지 건축이 존재했던 사실은 엄연하게 남아 있고 연구에 끝은 없는 것이다. 야외에 전시된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를 보았을 때 그것을 한층 강하게 느꼈고 끝나지 않은 연구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실감했다.

당시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서구 여러 국가의 협조와 인정으로 이루어진바, 일본의 지배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홍콩, 상하이, 톈진 등 서구 국가가 지배하는 동아시아 지역에 건립된 건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자신의 지배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로 지배에 필요한 시설을 정비하는 것이 유효했다.

이 같은 양식의 지붕을 가진 건물이 출현했다는 것은 대만총독부 청사나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볼 수 있는 서양 건축 규범을 따르는 건물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만주사변 이후에 유럽과 일본 사이에 생긴 동아시아 지배 구조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만주사변 이전에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는 유럽과의 협조와 인정을 통한 것이었고, 유럽의 지배틀에 편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지배 능력이 문제시되었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 서양 건축 규범의 건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유럽의 동아시아 지배틀에서 벗어난 일본은 타국에 능력을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동아시아에서 유럽의 건축과 비견될 건축을 할 이유도 없어졌다.

재료 면에서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 벽돌이 주재료가 되어 벽돌 구조 건축이 널리 사용된 상황은 서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조적 구조가 드물었지만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벽돌의 내화 성능, 저렴한 가격, 재래의 벽돌 제조 기술 등의 요인 덕분에 보편적인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과 서구의 콜로니얼 건축은 달랐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일본의 지배 지역에서는 일본의 전통 건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 중국 동북 지방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근처의 열강 지배지, 특히 중국 각지의 조계지나 조차지에서 콜로니얼 건축의 존재를 의식하고 세워졌다. 다롄의원이나 창춘 야마토 호텔을 비롯한 만철이 지은 일련의 건물이 그 전형이고, 종주국 일본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건축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지배지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성립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건축은 유럽의 콜로니얼 건축과 같았으나, 일본의 전통 건축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점은 달랐다.

건축을 예로 살펴볼 때, 일본의 지배지는 일본이라는 본국 아래 예속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접해 있던 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일본 제국이라는 틀보다 넓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동아시아라는 틀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 지역에 세워진 건물을 보거나 정보를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건축가들이 건축에 관한 당시의 최첨단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일부이긴 하나 일본의 식민지 건축이 세계 건축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이 인근 지역과의 관계 속에서 경우에 따라서 세계적인 규모로 자리매김되게 하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건축의 보편성과 선진성은 건축가·건축기술자, 도급업자 등 사람, 건축 재료, 건축에 관한 최첨단 정보의 확보와 이동으로 유익한 정보를 적확하게 손을 넣을 수 있어서 가능했던 측면이 강하다. 사람·물건·정보는 일본 국내와 개별 지배 지역 사이를, 그리고 대만·조선·중국 동북 지방 등 지배지 사이를 이동했다.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지배지 서로 간 이동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포틀랜드 시멘트처럼 일본의 식민지·지배 지역 밖으로 수출되거나 세계의 건축 정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 배경에 일본에 의한 정치적·군사적 지배가 있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으나, 이동을 가능하게 한 방법과 공간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동의 방법으로는 항로와 철도를 들 수 있다.

식민지 건축이 일본의 지배를 상징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식민지 건축의 숙명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식민지 건축은 파괴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철거된 식민지 건축은 적었고 적극적으로 파괴된 것은 각지의 신사와 충령탑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상황이 섞여 있었다. 하나는 식민지 건축인 기존의 건물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해방 후의 사회 현실, 또 하나는 식민지 건축을 새로운 정권이 사용함으로써 권력의 이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가 발전하자 식민지 건축에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사적 건축의 하나로서 식민지 건축의 문화적 가치 또는 사회적·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특히 재개발에 돌입한 도시의 자산으로 활용한다는 움직임이었다.

식민지 건축을 둘러싼 어제와 오늘의 움직임을 보면 지배의 유물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민지 건축을 말살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식민지 건축이 지배를 상징하는 이상 그것의 말살은 일제의 지배 사실을 역사상에서 없애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부재 일부는 충청남도 천안시의 독립기념관에서 야외 설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는데, 이는 일제 지배의 사실을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식민지 건축을 마주하는 것은 지배국과 그 국민에게, 즉 일본과 일본인에게 지배를 바로 보게 하는 것이다. 식민지 건축을 계속 사용하는 것은 과거 피지배 국가와 국민에게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 씨앗이다. 식민지 건축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 교육의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역사 인식을 둘러싼 동아시아 국가들의 다툼도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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