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의 철학 여행 - 소설로 읽는 철학
잭 보언 지음, 하정임 옮김, 박이문 감수 / 다른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14살 소년 이언이 꿈속에서 만난 노인과 철학적 명제를 논하고 아침 밥상머리에서 정신분석가 부모가 반론을 펼치는 소설 구성의 철학서이다. 철학을 쉽게 본 걸까, 소설을 우습게 본 걸까. 소설의 껍데기를 뒤집어 씌워도 철학은 여전히 어렵다. 너무 많은 꿈을 꾸게 된 것이 오히려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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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얼굴의 여성분이 도서관으로 들어오며 도움을 요청했다. 3층 여자 화장실에 남자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일요일 도서관에는 여자 직원만 있었으므로 도움을 요청하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3층으로 향했다. 상급자의 지시와 업무 매뉴얼을 확인하는 여직원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연신 통화중이었다. 직원의 요청에 따라 난 남자를 제지할 목적으로 화장실 입구가 보이는 계단 근처에서 기다리며 상황을 주시중이었다. 처음에는 '에이 설마, 남녀 화장실을 헷갈려서 잘못 들어간 거겠지. 미친 놈이 아니고야' 라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남자가 화장실에서 나와 '죄송하지만 잘못 들어갔어요' 라고 말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하나 하는 다소 난감한 상황도 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실수가 아닌 의도된 행동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십 여분의 시간이 지나고 통화를 마치고 오는 여직원에게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라는 말을 했고 그 순간 화장실 문이 열리며 건장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이십 대 초반의 그는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위협적일 정도로 큰 키와 축구로 단련됐음을 한 눈에도 알만큼 다부진 체격이었다. 내가 제지할 틈도 없이 내 앞에서 머리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제가 호기심에 눈이 멀어 실수를 했습니다' 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실수 여부를 떠나 범죄인 건 아시죠?' 라고 하니 무릎을 꿇으며 어리석은 호기심에 한 실수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여직원이 매뉴얼에 따라 그의 신상명세와 연락처, 화장실에 의도적으로 침입한 상황에 대하여 녹취를 진행하였다. 신체 구속의 권한이 없음을 고지한 여직원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를 돌려보내고 도서관으로 다시 내려왔다. 도서관 한쪽 구석에 조마조마하게 앉아 있던 여성분이 상황을 물으며 다가왔다. 그때서야 그 여성분의 얼굴을 찬찬히 볼 수 있었는데 두려움과 공포가 눈동자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는 당시의 상황을 듣고서야 그가 반년 가까이 스토커처럼 행동했고 오늘은 화장실까지 몰래 침입한 상황이었음을 알았다. 상황의 긴박함을 느끼고 여직원은 피해자 여성과 함께 경찰에 신고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읽은 것은 한국 출장 후 중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였다. 길지 않은 소설이라 비행 중 다 읽었는데 인상적인 글이었다. 특히 남성이 느끼는 별 것 아닌 일상과 생활이 여성에게는 공포와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상황은 놀라운 충격이었다. 당시 중국은 인터넷 검열로 다음 등 일부 사이트가 막혀있었고 한국의 상황에 별 관심도 없던 시절이라 이 소설의 평가가 어떠한지는 몇 달이 흐른 다음번 입국때 쯤이었다. 의미 있는 공론의 장이 되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인터넷은 온통 남혐, 여혐, 군대, 출산 등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남녀 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대와 출산 등의 문제는 한국에서 충분히 논의되어져야 할 사항이긴 하나 이 소설에서 어떻게 이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인터넷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동일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다수라는 상황은 더 혼란스러웠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입장의 동일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입장을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보려면 타인에 대한 상상력, 특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때서야 비로서 타인에 대한 공감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 날 처음 사건을 단순히 실수이지 않을까 하고 받아들이는 감정 자체도 혼란한 상황에 대한 부정 방어 기제의 발현일 수도 있지만 타인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에서 오는 바가 더 큰 듯 했다.   


얼마 후 도서관 복도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그 여성분이 가볍게 목례를 한다. 그 날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같이 인사하며 바라보니 그 날 보이던 두려움과 공포는 눈에서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디 그때의 장면들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기를 바래본다. 화장실로 들어간 남성은 경찰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모든 혐의에 대하여 자신의 어리석은 잘못임을 시인했다고 한다. 법적 처벌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법적 처벌을 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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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6-04-24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일이 있었군요. 바로 곁에서 지켜보신 잉크냄새님도 수고가 많으셨네요.

우리나라의 스토킹 범죄와 성범죄는 도를 넘었다는 아니 아예 기본적인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쩜 이런 나라가 있을까 싶기도 하구요.

제가 가장 놀랐던 건, 그 옛날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대부분 성적 쾌락에서부터 시작된 살인이었다는 부분이었어요. 정말 너무나도 다행히 과학기술의 발달로 뒤늦게라도 진범을 확인했지만, 증거 보관이 조금만 잘못 되었더라도 우리는 평생 화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 진범을 모를 뻔 했지요.

감은빛 2026-04-24 01:22   좋아요 1 | URL
흔히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라고 말하는 그 건도 명백한 성범죄가 확실한데, 너무 어이없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결정되었다고 들었어요.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밀양 여중생 성범죄 사건이 있지요. 44명의 가해자가 무려 1년동안 성폭력을 가했지만, 거의 대부분 제대로 된 처벌은 받지 못했지요. 이런 나라가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 참담한 현실입니다.

잉크냄새 2026-04-24 21:09   좋아요 0 | URL
동물학대가 인간에 대한 범죄로 이어지듯이 스토킹이나 성추행도 강력한 성범죄나 가혹한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머리만 똑똑한 판새들의 사법 판결이 어이없는 경우가 많은데 피해자의 고통보다는 가해자의 창창한(?) 앞날을 걱정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 같아요. 확실히 사법부가 성에 대해서도 너무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산 돌려차기 미친 넘은 출소 후 보복 살인을 장담하는데도 적법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것 같아 참 어이가 없더군요. 밀양 여중생 사건은 마을 전체가 은폐하고 감추려 했다는 점에서 구토가 나올 지경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국뽕이 아니라 사회의 아프고 약한 고리 먼저 생각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firefox 2026-04-24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황스러우셨겠어요. 앞으로 일하시면서 같은 일이 없으시길 바래봅니다.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잉크냄새 2026-04-24 21:11   좋아요 0 | URL
네 좀 많이 당황스럽기는 했습니다. 흔한 경우는 아니니 더 이상 볼 일은 없겟죠. ㅎㅎ 폭스님도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페넬로페 2026-04-24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반 년동안 스토킹을 당하고 그 남자가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왔으니 그 분의 트라우마가 상당히 클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위험했을수도 있는데 도와주신 잉크냄새님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저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왜 젊은 남성들이 그렇게 김지영을 싫어했는지를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ㅠㅠ
어떠한 것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적 상황이 너무 안쓰러울 지경입니다.

잉크냄새 2026-04-24 21:23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분을 도서관에서 다시 봤을 때 그 분이 받았을 트라우마가 먼저 떠오르더군요. 잘 극복하길 바래야요.

<82년생 김지영>은 글에서 언급했듯이 저도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설득시켜 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건 잘 모르겠고 우리도 힘들어˝ 하며 대결 구도를 만들어 간 게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마힐 2026-04-25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노출되고 있는 위험을 여성 혼자 지고 다닌다는 것이 너무나 가혹하네요. 남자인 저도 어떨 땐 조마조마한 순간이 살면서 가끔 느끼는데 여성분들은 평범한 일상에서조차 조바심으로 살아야 한다니, 참으로 먹먹해지네요. 그저 단지 나와 내 주변이 좀 더 밝아지길 마음 낼 뿐입니다. 잉크냄새님 같은 분이 계셔서 그 도서관도 밝으리라 믿습니다.

잉크냄새 2026-04-26 09:26   좋아요 1 | URL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일상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하여 여러가지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학창시절 추억처럼 떠올리는 좋아하는 여학생을 몰래 따라가 집을 알아내었던 것들조차 그녀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였을 수 있다는 생각에 참 마음이 착잡해지던 기억이 나네요.
 
미세 좌절의 시대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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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세상은 그 기울기는 급격히 줄었으나 우상향으로 조금씩 흘러가고 있다.거대 담론이라는 굵직한 흐름 속에 돋보기를 대어 보면 작은 톱니바퀴들처럼 부침을 거듭하는 미세한 삶들이 올망졸망 분주하다.‘인생 참 계획대로 안 되네‘라고 아우성치는 삶의 외침을 작가는 미세 좌절이라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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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6-04-18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열독했던 책 중 하나죠. 참 글을 잘 쓰는 작가라고 여겨 그의 책을 몇 권 샀지요.^^

잉크냄새 2026-04-18 21:12   좋아요 0 | URL
네, 이 분 글이 좋아요. 기자 생활의 경험인지 전 소설보다는 르뽀 형태의 글이 더 좋더군요.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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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다 보면 유독 겉도는 느낌의 시가 있다. '이 시가 과연 이 작가의 시가 맞나?' 싶은 다소 생뚱맞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청춘의 이별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우울한 어조로 노래한 시인 기형도의 시가 그러하다.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의 마지막 시로 <엄마 걱정>이 실려 있다. 그가 짧은 생애지만 시인으로 활동한 중간 정도인 1985년에 쓰여진 시인데 시집의 마지막에 겉도는 듯한 느낌으로 실려 있다. 겉돈다 하여 완전히 다른 분위기는 아니다. 여전히 가난한 풍경이지만 백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고 해야 할까. 1989년 3월 종로의 파고다 극장에서 생을 마감한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막처럼 올라가던 <엄마 걱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이 마지막 시에서 전해졌다.   


< AI로 생성해보았다. 한글을 이미지 처리하는 건 한계가 있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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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26-04-10 0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기형도 시인의 시, 엄마 걱정을 보니
오래 전에 자주 불렀던 <찔레꽃>이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저에게 종교가 되었습니다.^^

잉크냄새 2026-04-10 20:11   좋아요 1 | URL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섬집 아기> 2절이 있는 줄 얼마전에야 알았습니다. 엄마라는 단어는 어머니보다 정겹습니다.

니르바나 2026-04-10 20:53   좋아요 1 | URL
섬집 아기, 저는 아주 오래 전 젊은 박인희씨의 노래로 듣습니다.
리처드 용재 오닐의 비올라 연주도 좋구요.^^

잉크냄새 2026-04-10 21:12   좋아요 1 | URL
한 번 찾아 들어봐야겠네요. 노래 <찔레꽃>은 언제고 듣기만 해도 가슴먹먹하고 눈물이 나려 합니다.

페크pek0501 2026-04-18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분이고 제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입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감상했어요.^^

잉크냄새 2026-04-18 21:11   좋아요 0 | URL
아, 시인이다 라는 느낌의 비쥬얼을 가지신 분이신데,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안타깝죠. 그래도 그의 시는 항상 우리 주위를 맴돕니다.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인생>을 보면 결혼식 날 평샤의 남편이 동료들과 거리를 행진하며 주위를 둘러싼 동네 하객들에게 담배와 사탕을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뿐 아니라 아직 전통 혼례 방식이 남아있는 여러 마을에서 예식이 거행되는 건물 앞에 작은 탁자를 펼쳐 놓고 그 위에 담배와 껌과 사탕을 쟁반이나 종이컵에 담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풍경을 종종 보곤 했다.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문을 나선 그 날 언덕 위 장족 전통 가옥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다. 풍악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고 사람들이 분주히 드나들던 그 집 앞에서 마침 담배가 똑 떨어졌다. 리탕理塘은 중국에서 사람이 거주하는 가장 높은 고도인 4200m의 장족 마을이다. 담배 가게를 가려면 한참 숨을 헐떡이며 올라온 언덕을 다시 내려갔다 와야 했다. 염치 불구하고 두 손 합장하며 "꽁시꽁시恭喜恭喜 (축하해요)"를 외치고 쟁반에 담긴 담배 몇 까치를 들고 나와 담배를 물고 다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탁자에 앉아 있던 노인과 몇 마디 주고 받은 후 나에게 험악한 얼굴로 성큼 성큼 다가왔다. "당신 중국인이냐?" "아니, 한국인이야" 중국어로 답변을 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리탕은 티벳 독립 운동 기간 저항이 가장 심했던 도시이다. 티벳 승려의 분신이 빈번히 행하여진 곳이었고 승려중 리탕 출신이 가장 많았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팽배한 지역이었다. 중국인과 외관상 구분이 쉽지 않은 한국인과 일본인에 대하여 종종 실수로 폭력이 발생하기도 했다. 중심 도로는 CCTV로 가득 했고 몇 십 미터마다 공안을 가득 태운 버스가 도로를 점유하고 있었다. 몇 마디 더 나눈 후 중국인이 아님을 확인한 청년들은 조금 전 굳게 경직된 얼굴이 언제냐 싶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경계심을 풀었다. 결혼식에 참석할 것을 권하는 그들의 요청을 점잖게 거절하니 거의 끌다시피 하여 건물 이층으로 올라갔다.


<잔치집 입구에는 사탕과 담배와 껌이 주로 올라간다>


장족의 결혼식은 삼일간 계속 된다. 그날이 며칠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아직 축하연의 열기가 식지 않은 듯 장족 음악과 웃음 소리가 가득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층은 대략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과 손님을 접대하는 대형 홀, 그리고 신랑 신부가 축하 손님을 맞이하는 별도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부엌에는 신부측 어머님을 중심으로 동네 아낙들이 모여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전통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커먼 그을음이 세월을 과시하듯 벽면에 도배되어 있었고 창을 통과한 한 줄기 햇살이 음식 연기와 먼지의 춤사위로 아늑했다. 천장에는 그을음으로 훈제된 라로우腊肉가 걸려 있었다. 손님 음식이 부족하면 큰 실례가 되기라도 하듯 음식은 층층이 쌓였다. 으레 부엌에서의 한담이 그렇듯 홀로 부엌을 방문한 이방인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놀림의 대상이 되었는데 동생을 먼저 시집 보내는 언니의 상대방으로 웃음소리와 함께 한참 동안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신랑 신부가 하객을 맞이하는 신방은 결혼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들락거렸는데 폐백실과 비슷한 용도로 보였다. 외지인인 나에게는 직접 대면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아마 부정을 탄다는 미신적 의미가 있지 않나 싶었다. 대형 홀에는 기다란 탁자가 가로 세로 몇 줄로 자리 잡고 있었고 양탄자가 깔린 낮은 의자가 양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탁자에는 티벳 전통 음식이 가득했고 막걸리 창과 뚝바 같은 전통 술이 놓여있었다. 시커멓게 그을린 주전자에는 수유차가 끈적거리는 버터맛을 풍기며 흘러 넘쳤다. 다소 어울리지 않는 1.5리터 코카콜라와 500미리 환타가 쌩뚱맞은 얼굴로 자리해 있었다. 한 무리의 여인들이 일어나 테이블마다 돌며 축하 노래를 불러 제끼고 노래가 끝나면 다들 잔을 들고 축배를 들었다. 여인들이 한 바퀴 돌고 나면 남성들이 그 뒤를 이어받았다. '고산에서의 음주는 자살이야' 라고 다짐하고 수유차酥油茶를 마시며 최대한 술을 자제했으나 이미 거나하게 술에 취한 건장한 장족들의 강압에 한 잔 두 잔 잔술에 취하여 갔다.  


<보통 3일 동안 축제가 이어진다>


건물 일층은 보통 사람이 거주하는 용도는 아닌 듯 했다. 공간의 구획이 명확하던 이층과 달리 일층은 건물을 지지하는 커다란 기둥 외에는 텅 빈 공간이었다. 다만 잔칫날 만큼은 동네 아낙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티벳 전통춤을 추고 있었다. 올라갈 때도 빙글 빙글 돌아가던 춤은 어둑어둑 어둠이 깔려 내려올 때까지 계속 되었다. 오전에 끌려 들어가 해가 뉘억뉘억 넘어갈 때 이층에서 내려왔는데 팔을 잡아 이끄는 장족 여인들에 이끌려 춤사위에 합류했다. 춤사위는 삶의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춤이었다. 어깨춤이 절로 나오듯 그들의 습관처럼 몸에 벤 자연스런 춤이었다. 움직임이 많고 동작이 커 우리 춤사위보다 훨씬 동적이었다. 장족 마을에서는 식사를 마친 저녁 나절 이미 어두워진 광장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는 일이 일상이었다. 지나온 여러 마을에서 이미 본 일상적 풍경이어서 금방 춤사위에 합류했다. 춤도 빙글, 머리도 빙글, 카메라도 빙글, 오직 빙글빙글만 존재하는 아주 편안하고 흥겨운 기분이었다. 한참을 빙글거리며 돌아가다 기억이 끊어졌다. 문득 기억나는 것은 흰 물감 묻은 붓을 휘둘러 별자리마저 취하여 빙글거리던 은하수와 노랫가락 흥얼거리며 고도 4200미터의 마을을 헉헉거리며 걸어 내려오던 기분 좋은 취기였다.



<사진을 찍을 즈음에는 이미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 사진도 다 흔들린다>







<무희만큼의 동작은 아니지만 저녁 어스름이 짙어질 무렵 장족 마을 광장에는 약속이나 한 듯 사람들이 몰려와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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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4-02 2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영화 <인생>도 수작이라고 말씀해주셔서 챙겨봤었는데, 펑샤 결혼식 장면이 떠오르네요. 글 읽는 동안 <걸어서 세계속으로> 보는 기분이었어요. 취기가 슬쩍 느껴지는 사진까지! ㅎㅎ
낯선 곳에서의 경계와 환대가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들이 생생하게 전해지네요. (빙글빙글)

잉크냄새 2026-04-03 19:50   좋아요 1 | URL
중국 결혼식 장면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인생>의 그 길거리 풍경이 먼저 떠오르더군요.
낯선 곳에 가면 말씀하신 경계와 환대의 줄타기가 묘한 긴장감과 짜릿함을 동반합니다. 익숙지 않은 여행의 묘미죠. 그들 표정은 숨길 수 없는 감정이 금방 드러납니다. 경직된 얼굴이 금방 활짝 이를 드러내고 웃을 때의 극적 변화란.....ㅎㅎ

Forgettable. 2026-04-02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라오스의 어느 마을에서 노래방기계의 bgm과 함께 춤추고 취하던 기억이 떠오르는 글이네요.
인도에서 만난 티벳 막걸리 창도 아주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떠오르구요.. 모모인가.. 만두도 맛있던데 냠냠

잉크냄새 2026-04-03 19:53   좋아요 1 | URL
우린 역시나 춤의 DNA를 품은 민족입니다. 생각없이 취하고 춤추던 그때가 그립네요.
막걸리 창은 포카라에서 처음 마셨는데 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탄광 광부가 쓰는 랜턴 쓰고 마시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카스피 2026-04-03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족이 티벳인을 가리키는 말인지 처음 알았습니다.중국에서는 공식적으로 58개의 소수민족(조선족 포함)이 있는데 과거에는 분리 독립등 여러 정치적인 사유로 나름 58개 소수 민족에 대한 자치권과 문화적 독립성을 인정했는데 요즘은 모두 중국 동화정책으로 과거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박탈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나 다른 소수 민족들과 달리 티벳은 과거 왕조시절부터 복속국이었지만 라마불교가 원이나 청같은 한족이 아니 왕실에서 우대를 받아서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었는데 1950년대 중공이 티벳을 침공하면서 강제적으로 병합해 지금도 티벳인들의 독립 의지가 상당히 강하다고 하더군요.
그나저나 잉크냄새님은 참 좋은 곳을 많이 여행 다니신것 같아 매우 부럽습니다.

잉크냄새 2026-04-03 20:04   좋아요 0 | URL
한글 발음 장족은 중국에서 두개의 소수 민족으로 나뉩니다. 티벳의 중국 표현인 시짱(西藏)의 주요 민족인 짱주(藏族)와 중국에서 한족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좡주(壮族)입니다.
제가 근무할때에는 만주족만 고유 언어에 대한 교육이 통제되었는데 얼마전 소수 민족 언어에 대한 교육을 통제한다는 뉴스를 저도 본 기억이 나네요.
여행은,,,저 스스로에게도 소중하고 풍요로운 기억입니다.

마힐 2026-04-03 2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졸지에 반 강제로 하객이 되셨군요. ㅎㅎ 신랑신부에게 홍빠오는 주셨나요. ㅎㅎ

잉크냄새 2026-04-04 09:34   좋아요 1 | URL
앗, 그러고 보니 홍빠오 건넨 기억이 없네요. 아마 폐백실에서 주지 않았나 싶은데 그 곳은 제가 들어갈 수 없던 곳이라....ㅎㅎ

책읽는나무 2026-04-04 0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국여행의 단짠단짠 그런 맛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위험했던 순간. 그리고 흥겨운 순간.
결혼식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인식하기에 저리도 흥겹게 3일 밤낮으로 축제를 이루는 걸까요?
그들의 전통문화가 참 신기합니다.
암튼 신선한 여행의 경험이 되셨겠습니다.^^

잉크냄새 2026-04-04 09:39   좋아요 1 | URL
사실 위험이라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고 살짝 긴장했다고 할까요. 혼자 여행의 장점이 이렇게 뜻하지 않은 각종 이벤트와 마주칠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죠.ㅎㅎ
소수 민족 전통 문화의 공통점이라면 결국 공동체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3일간의 축제도 가정,친지,마을로 이어지는 공동체에 대한 의례의 흔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한번 가면 다시 보기 힘든 작별의 장이죠.

차트랑 2026-04-04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잉크냄새님,
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장족의 장을 감출장(藏)을 쓴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장족무(藏族舞)를 시현하시는 분들의 발 동작은 우리와 다른듯 한데,
팔동작과 그 곡선, 그리고 상체의 움직임은 우리의 전통무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군요.

우리 전통무 팔의 곡선은 정말 남다르고 우아하죠.
이 모습을 장족무에서 발견합니다.
장족, 왠지 친근감 상승하네요~!

님아,
또 가시려거든,
그땐 혼자일랑 가지를 마오~!!





잉크냄새 2026-04-04 20:05   좋아요 1 | URL
아, 우리 춤사위와 유사성이 있나 보군요. 아니, 차트랑님, 음악에 이어 춤까지 조예가 깊으시다니....

실제 무희분들 말고 마을분들 저녁 나절 광장에 모여 춤추는 걸 보면 무희보다는 동작이 훨씬 작긴 합니다. 그래도 그런 문화 자체가 흥겹고 정이 많이 갑니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풍경일지도 모르겠네요.

감은빛 2026-04-04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잉크냄새님 글에는 늘 긴장감이 넘치네요. 쪼는 맛이라고 할까? 그런 맛이 있어요.

오전에 끌려들어가 해가 넘어갈 때까지 계셨다니, 그것도 신기하네요. 춤추는 모습을 찍은 사진은 취했어도, 조금은 흔들렸어도 참 잘 찍은 사진이다 싶어요. 춤추는 모습 영상도 잘 봤어요. 저처럼 춤을 못추는 사람은 여러번 같은 춤을 보아도 따라 추지는 못 했을 것 같아요.

잉크냄새 2026-04-04 19:49   좋아요 0 | URL
아 그럼 다음에는 더 쫄깃쫄깃한 여행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장족춤을 자세히 보시면 대부분 유사한 동작의 반복입니다. 술만 조금 드시면 금방 따라 출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