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라는 용어는 통시대적인 용어가 아니라 우리 역사의 특정한 시기(기간)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일본(정부)의 정책에 동조하거나 협력한 이들은 전근대에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에 협력한 조선인들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않았다. 통상 학계나 친일파 청산 관련 법령에서 규정하는 "구한말 이래 일제의 국권침탈과 식민 지배와 일제의 대외 침략에 적극 협력한 부류"가 곧 이 책에서 다루는 친일파다. _ 변은진, 박한용, 이용창,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조선귀족, 중추원, 친일단체(1910~1937)를 중심으로>, p20/588
제78주년 광복절. 지난 해부터 3.1절, 광복절 등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전부터 기념일의 의미를 훼손하는 극우집단의 소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공공의 장(場)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은 참 견디기 어렵게 만든다. 오늘도 대통령은 광복절에서 광복보다는 건국, 좌익척결, 일본과의 우호,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경축사를 했다. 또 다시 참담해지는 마음.
[관련기사]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사 특이점https://www.huffington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212073
광복절을 맞아 뉴스타파에서 예전에 만든 <친일과 망각>을 다시 본다. 자신의 현재를 지키기 위해 과거를 잊기를 강요하고, 광복 대신에 건국을, 독립 대신에 반공을 보다 높이 외치는 이들. 시간이 흘러 기억하는 이들도 사라지고, 친일파 대신 친일파 후손들이 부와 권력을 넘겨받은 지금 우리가 친일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지나간 과거에 발목 잡히지 말고, 현재 화합을 이뤄야 한다는 이들의 목소리가 얼핏 타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친일과 망각>은 우리에게 친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나는 과거문제를 잊기 위해서라도 이걸 묻기 위해서라도 나는 과거 문제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정리하는 그런 이리 빨리 됐으면 좋겠어요.'
<뉴스타파 -민국 100년 특집>의 윤경로 친일 인명사전 편찬 위원장의 말은 우리가 왜 친일을 기억해야 하는가를 잘 알려주는 문장이라 여겨진다. 일신의 안녕을 위해 가야할 길을 가지 않은 자와 힘든 길인 줄 알면서도 가야할 길을 간 이들을 살피고 이를 통해 미래에 우리가 가야할 길을 가는 것. 이것이 진정한 광복절의 의미가 아닐까. 그러지 못한 것은 적시에 정리되어야 할 것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는 반민특위에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니라 여겨진다.
친일파는 그저 단지 일본과 친한 이들이 아니라, 일제의 흉포한 식민통치에 부역하고 민족을 배반한 자들이다. 청산되지 못한 세력의 계보에 속해 제국의 군인, 경찰, 밀정, 낭인들이 저지른 발길질과 뺨 때리기 정치를 칭송하기에 친일파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이들은 모두 그런 의미에서의 '친일파'다. 기꺼이 제국의 신민이 된 자들이며, 그 체제를 온몸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친일행위자들만이 아니라, 이들을 옹호하고 이들이 만들어놓은 기득권을 고스란히 쥐고 지금도 그 반역의 역사를 이어나가려는 자들은 모두 다 '친일파'다. '친일파'는 따라서 '역사적 개념'이며 '정치적 개념'이자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소멸되어야 할 세력의 '실명'(實名)이다. _ 오익환외,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 p28/284
일제의 요구는 시기마다 달랐고, 친일파 또한 이러한 요구에 맞춰 각 시기마다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 영향도 각각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합병' 이후 일제가 '매국'을 요구할 리 없다. 이때부터는 식민통치에 대한 협력이 본질적인 요구이며, 친일파는 여기에 보조를 맞추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전쟁협력행위가 일제의 핵심 요구였고 여기에 맞춰 친일파들은 내선일체·황국신민화를 부르짖으며 전쟁협력행위에 복무했다. 나라를 팔아넘기라는 요구에는 매국이, 식민통치에 협력하라는 요구에는 직업형 친일이, 전쟁에 조선인들을 동원시키라는 요구에는 전쟁협력형 친일이 각각 대응된다. 매국과 전쟁협력 가운데 어느 것이 죄가 무거운가 하는 식의 법률적 접근은 역사적 현상인 친일문제를 제대로 해명하는 데 부적절할 수 있다. 결국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의 변화 과정과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친일파들의 행위를 검토해야 한다. _ 변은진, 박한용, 이용창,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조선귀족, 중추원, 친일단체(1910~1937)를 중심으로>, p390/588
이 모든 사태의 기점(起點)에 바로 반민족적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反民特委)의 와해가 놓여 있다. 1949년 6월 6일, 그날이 우리 역사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이날을 우리는 모두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반역의 역사가 당시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이라는 자의 명령으로 시작된 날이며, 이후 우리 현대사의 무수한 희생과 굴곡,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왜곡된 역사의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_ 오익환외,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 p28/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