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광개토대왕비(碑)와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많은 32자.
이에 대해 19세기 말 일본학자들은 "백제와 신라는 이전부터 고구려의 속신으로서 조공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조선반도에 침입하여 백제를 쳐부수고 또한 신라를 토벌하여 그 두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며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는다. 여기에 대해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 ~ 1950)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위에서 1) '래(來)'는 '오다'라는 뜻의 동사가 아니라 '~ 이래'처럼 특정 시점으로부터 현재까지로 시간을 제한하는 허사(虛辭) 성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실질적인 동사는 '도(渡)'라는 점, 그리고 2) 뒤의 '以爲臣民'은 '以(此)臣民'에서 대상을 나타내는 목적어 '此'가 생략된 형태인데 3)이 문장의 대주어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므로 그 토벌의 대상인 왜나 백제는 상식적으로 '以爲臣民'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_ 정인보, <조선사 연구 下> , p896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위당은 해당 문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백잔(백제)과 신라는 이전에는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 이래로 바다를 건너오기에 (대왕은) 백잔과 왜구를 쳐부수고 신라로 하여금 이들을 신민으로 삼게 하였다. _ 정인보, <조선사 연구 下> , p895
아직까지도 광개토대왕비의 해당 문구와 관련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결국 문제는 숨겨진 주어의 문제인 듯하다. 우리 말의 특성상 주어는 명시적으로 표현되기보다 암묵적으로 문장 내에서 해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실증사학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논란 아닌 논란이 되버린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국민의 힘과 윤석열 대통령의 저열한 '주어 없음'의 해명을 바라보게 된다. 명확하지 않은 표현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놓고 자신의 본의가 아니라는 식의 해명 속에서 일제 식민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을 발견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들이 벌이고 있는 현대사의 왜곡을 생각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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