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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에 공직 사회에서 반지성주의는 주로 기업인들이 줄곧 품어온, 과학 연구소나 대학, 외교 집단 등 자신들의 세력 범위 바깥에서 활약하는 전문가들에 대한 의구심으로서 표출되었다. 극우파가 지식인들에게 드러낸 적대감은 훨씬 더 극렬하고 무차별적이었다. 이런 태도는 교육 수준이 높은 식자층이나 가문, 지위, 교양 등 모든 것에 대한 일반인들의 전형적인 혐오였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26/504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단어는 단연 '반(反)지성주의'였다. 취임사는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 것은 '반지성주의'이며 이로 인해 집단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뒤이어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로 '자유(自由)'가 35차례 강조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결국, 취임사를 거칠게 요약하면 비과학적인 반지성주의로부터 자유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면에서 '반지성주의'는 취임사에서 빌런(villain)의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하다. 자유를 위해 사라져야 할 반지성주의. 이 구도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된다. 다음은 취임사 중 일부다.


 "또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국내적으로 초저성장과 대규모 실업, 양극화의 심화와 다양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공동체의 결속력이 흔들리고 와해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진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합리주의와 지성주의입니다.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처해있는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 제20대 대통령 취임사 中


 반지성주의와 관련하여 리처드 호프스태터 (Richard Hofstadter, 1916~1970)의 <미국의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떠올리게 된다. 반지성주의에 대해 저자는 무엇이라 정의했는가.


 반지성주의 anti-intellectualism는 하나의 관념으로서는 단일한 명제 내용이 아니라 관련된 여러 명제가 중첩된 상태를 가리키며, 하나의 태도로 볼 때는 흔히 양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_ 지성이나 지식인에 대한 순수한 혐오는 보기 드물다. 그리고 역사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면, 반지성주의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한 가닥의 실이 아니라 때에 따라 강도가 변하는 다양한 원인에서 힘을 끌어내는 하나의 세력이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21/504


 저자는 반지성주의를 단일한 흐름으로 규정하기보다 '지성에 대한 다양한 양태'로 해석한다. 취임사에서 언급하듯 특정한 상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흐름으로 바라보기에 정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때문에, 저자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용어의 남용을 경계하고 있다. 다음 구절을 쉽게 정리하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에 대해 '반지성적'으로 매도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라 생각된다.


 1950년대의 정치적 혼란과 교육 논쟁을 거치면서 반지성적 anti-intellectual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자기평가에서 가장 중심적인 표현으로 부각되었다. 이 용어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우리의 일상어로 들어왔고, 지금은 못마땅한 여러 현상을 서술하는 데 흔히 사용된다. 갑자기 이 말을 의식하게 된 이들은 대개 반지성주의가 생활의 어떤 영역에서 설득력을 지닌 표현으로 여기거나, 최근의 상황에서 생겨난 말이기 때문에 조만간 압도적인 비중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20/504


  쉽게 규정하기 힘든 '반지성주의'지만,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전체 흐름에서 이는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반감'으로 정리될 수 있을 듯하다. 이로부터 저자는 미국 사회 지식인들의 소외 문제와 사회 참여 문제를 지적한다. 대중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지식인들은 권력과 결탁하거나 권력과 비판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며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때문에, 이들 사이에 격렬한 내분과 분화가 일어날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권력과의 결합을 완전히 포기한 지식인은 자신의 무력한 입장이 모종의 계몽에 유용했음을 충분히 - 지나치게 충분할 정도로 - 이해한다. 그런데 이런 지식인이 권력에 접근하고 권력과 관계되는 문제에 관여하다보면 다른 형태의 계몽이 가져다 줄 가능성을 놓칠 경우가 많다. 권력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여론을 움직여서 사회에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 반면에 권력에 결합된 지식인은 직접적으로 지식인 공동체의 사고에 따르는 형태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역할은 반드시 서로 배척하거나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다. 양측 모두 모종의 개인적/도덕적 위험이 걸려 있다. 또한 양측 모두 운을 하늘에 맡긴 개인적 선택을 보편적 규범으로 삼을 수는 없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434/504


 그렇지만, 호프스태터에 의하면 지식인들의 분화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다원성과 받아들이는 관용에 의해 파국적인 결과를 막을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열린 마음과 관대함이며, 이를 위해 개인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전체 결론이다. 결국, 호프스태터에 의하면 지식인 내부의 갈등과 외부(대중)과의 불화를 봉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솔직함과 열린 태도에 기초한 논쟁과 토론이며 이를 위해 자유가 기초되어야 한다. 이제 다시 취임사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취임사에서 이러한 구도의 앞뒤가 바뀌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비판자들 중에서도 정신적으로 자신들의 사회 바깥에서 그런 상황을 엄격하게 직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있으며, 그들은 인원수나 자유로운 정도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세력이 될 것이다. 양측 간에 논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향후에도 있을 것이며, 또 지식인 공동체 내부에서는 권력과 비판의 양 세계를 아우를 만한 능력을 갖춘 지성이 탄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식인 사회는 서로 반감과 위화감을 지닌 세력으로 분열되는 위기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러 면에서 병을 앓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의 건전함은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다원성과 이 요소들이 서로 관여할 수 있는 자유에 있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435/504


 과거의 자유로운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장점 중 하나는 다양한 스타일의 지적인 삶을 인정한 점이다. 그 덕분에 다양한 유형의 지식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열정과 반항심에 의해 이름을 얻은 지식인도 있지만, 우아하고 화려한 지식인도, 검소하고 엄격한 지식인도 있다. 현명하고 복잡한 지식인도, 인내심 강하고 총명한 지식인도, 특별한 관찰력과 인내력을 지닌 지식인도 있다. 어쨌든 다양한 장점을 이해하려면 솔직함과 관대한 정신이 필요하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437/504


 취임사에서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자유가 보장되어 지식인 내부와 외부가 솔직하게 공론의 장에서 토론을 한다면 집단지성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도출되지 않을까. 오히려 자신과 반대되는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규정하고 배격하는 태도야말로 반지성적인 행태는 아닐런지. 호프스태터가 지적한 미국사회의 반지성주의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던 시점이 바로 극우사상인 '매카시즘McCarthyism)'이 바로 활개를 치던 시점임을 생각해 본다면 누가 '반지성주의' 집단이며, 반지성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모두가 본래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된 듯하다. 아마, 이 점 때문에 취임사 해독이 어려웠던 것 같다...


 미국에서 비판적 지성이 처참할 정도로 경시되고 있다는 우려를 일깨운 것은 무엇보다도 매카시즘이었다. 물론 매카시가 끊임없이 비난을 퍼부은 대상은 지식인만이 아니었지만 지식인은 늘 표적이 되었고, 지식인을 사냥할 때 그의 추종자들은 특히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_ 리처드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 p17/504


PS. 이제 겨우 취임 2일 째인데 그 사이 참 많은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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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5-11 22: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지성주의 주장은 지성주의를 지상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라 오히려 더 불편합니다. ㅠㅠ
지성주의보다 감성주의 혹은 감각주의를 전 더 선호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11 22:41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반지성주의‘는 ‘지성주의‘에 기반한 것으로, ‘지성‘을 중심에 둔 ‘지성주의‘는 지성과 과학에 근거한 ‘자유지선주의‘와도 연계점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또한 경계해야할 점이 있어 보입니다. 그 점에서 다양한 가치에 대한 존중은 단순히 지성주의를 위한 기초일 뿐 아니라, 다양성을 위한 전제라 여겨집니다. 아쉽게도 취임사에서는 다양성과 통합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지성, 과학, 자유 등만 언급되어 18세기 계몽군주 대관식 연설문을 읽는 줄 알았습니다...

2022-05-11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11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22-05-11 2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자신과 반대되는,,,, 이 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변희재 말대로 자기를 지지하는 세력 믿고 저러는 거라 생각해요.

겨울호랑이 2022-05-11 22:39   좋아요 2 | URL
반지성주의를 비판하면서 복숭아가지와 살풀이를 행사의 일부로 반영하는 행태를 보면...... 참 할 말이 없어집니다... 덕분에, 변희재, 정규재가 반대 진영으로부터 재조명되는 것을 보면 의도치 않은 통합을 이룬 측면도 있어 보이긴 합니다...

기억의집 2022-05-11 22:45   좋아요 3 | URL
전 오죽하면 변희재 책 사서 읽을까도 생각중입니다. 진보 유투버들도 시원스럽게 말 못하는데 변희재 너무 시원하게 말해서 좋아요. 진영이 다른 사람이라 생각은 많이 달라도 요즘 유튭 나와서 말하는 들어보면 제가 미디어에 갇혀 저 사람을 잘 못 판단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귀신 쫒겠다고 복숭아 가지 가져와 무당들이 든 거라면서요. 이게 대한민국의 수준이죠. 뭐.

겨울호랑이 2022-05-11 22:50   좋아요 2 | URL
모두의 생각이 다 같을 수도 없지만, 완전히 다를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각자의 생각이 다른 것이겠지요. 이러한 다름이 때론 답답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새로운 길을 보여줄 수도 있기에 상대의 생각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요즘 들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신임 대통령이 많은 깨우침을 주는 듯 합니다. 문제는 수업료가 매우 비쌀 것 같다는 점이긴 합니다만...

레삭매냐 2022-05-12 1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지성주의는 ˝무지나 무식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 아니˝며 ˝알기를 적극적
으로 거부하는˝ 자라고 탁월히 정의했다.

어느 기사에서 본 건데, 반지성주의에
대한 정말 탁월한 정의가 아닐까 싶습
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2 11:44   좋아요 3 | URL
그렇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도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이 언급되는데, ‘진화론‘이라는 과학의 새로운 변화에 대한 종교계의 거부 역시 반지성주의의 일환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연장선상에서 20세기 중반 냉전체제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새로운 변화를 느끼지 못하면서 반지성주의를 언급하는 제20대 대통령 취임사는 참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꿈찾는여행자 2022-05-12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쏙 드는 서평입니다...100퍼 동감합니다..ㅜ ㅠ

겨울호랑이 2022-05-12 22:46   좋아요 0 | URL
꿈찾는여행조님 감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지금의 현실이 참 서글프네요...
 

가이아나(르펜 60.7%, 마크롱 39%), 과들루프(르펜 69.6%, 마크롱 30%) 마르티닉(르펜 60.9%, 마크롱39.1%), 5년 전에는 정반대로 마크롱이 64%, 르펜이 36%이었다. 이번 선거는 금융자본가들과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마크롱에 대한 절대 저지 세력과 서민과 소외층을 타깃으로한 극우 마린 르펜에 대한 절대 지지세력 간의 대결이었다. 주류 언론과 주요 정당, 심지어 노조연맹과  연예계, 스포츠계 스타 500명이 합세해 마린 르펜을 절대악으로 지목했으나, 해외령 주민들은 그들의 주적을 마크롱으로 본 것이다. 본토에서의 선택은 조금 다를 테지만, 해외령에서 멜랑송을 찍었던 표의 대부분은 르펜에게 갔다. ‘인종주의자‘로 악명 높은 르펜에게 인종차별의  주 대상이던 해외령 주민들의 표가 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가장 취약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극좌에서 극우로 넘어가는 의식 전환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은 한국의 대선 결과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저소득층이 난민, 외국인, 젠더, 경제정책 등에서 극우화성향을 보이는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준 것은, 어쩌면 국제정치의 흐름에 부응하는 셈이다. 프랑스에서처럼 유력한 극좌와 극우 후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외계층이 우경화하는 현상은 기존 좌파 정당이나 진보 정당, 중도정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P10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던 유권자의 상당수(24%)도 결국불복하는 프랑스 후보에게 투표했다. 최고 득표자 당선 투표 방식에서 삼자 구도가 연출되면 세 진영 중 한 진영은 2차 투표에 진출하지 못한다. 멜랑을 지지하는 집단은 경제와 사회 체제의 대립에서는 마크롱과 대치되고, 문화와 국가 정체의 대립에서는 르펜과 대치된다.  이런 격차 때문에 1차 투표 이후 공약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낳았고, 멜랑송을 지지했던 유권자의 상당수가 두 최종 후보 어느 쪽에도 표를 던지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당선 후보는 소수 진영 혹은 소수의  유권자 지지만을 기반으로 선출되는 셈이다.  세 개 진영으로 나뉜 프랑스의 대선 형국에서는 패자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기 때문이다. 40년 전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이 규합하고자 했던 ‘프랑스인 3명 중 2명‘은 요원한 일이 됐고, 이제는 프랑스인 3명 중 1명‘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이런 정치 지형에서 마크롱은 선거에서는 이길 수 있었지만, 과연 정권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 P49

혁명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바꾸었고, 하늘과 땅을 진동시켰다. 개인의 개념에도 변화가다. 혁명의 결과로서 민중과 박애가 생겨났다. 민중은 혁명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실 민중의 대부분은 비주류였다. 주변인, 동부, 노동자, 내의 제조업자, 방랑자 등과 같은 부류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이들이 민중으로 인정받게 됐다. 그들이 무대를 장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공화국이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아찔한 일이었다. 모든 기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만약 문맹인도 지식인과 똑같이 발언하고 전문가와 다름없이 행동할 권리가 있다면, 만약 바보도 어엿한 국가의 일원이라면, 우리는 더는 민중을 어린애, 무책임한 자, 말썽꾼으로 여기지 않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정의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의 위계질서까지도, 즉, 봉건제도의 종말이다. 이제 이성은 왕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두운 세계, 꿈틀대는 욕망,  환상 세계의 탈주자에게는 더이상 민중을 억누를 수 있는 동물적인 힘이 없다. 해방이든 또는 내밀한 야만성의 수용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사육제의  승리는 오래기억될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곧 시민이다. 실패한 인간의 내면과 외면, 여성, 광인,  통제할 수 없는 자부질서한 영역의 그림자까지도. - P88

선거결과에 따라 20대 여성과 남성 둘 중 한 진영이 승리하고, 다른 한 쪽은 씁쓸하게 질 수 밖에 없었다. 인구의 약 절반을 패배자로 만드는 이 구도 자체가 위험했다.  이는 어느 진영이 더 정의로운지와  별개로 사회분열과  갈등의 문제다. 이 갈등은 여진이 되어, 우리 사회는  계속 남아있는갈등에 소모될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이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 격인 윤석열 당시 후보가 새 정권의 수장이 됐으니, 여진이 제대로 수습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대통령이시니, 손수 격화된 갈등을 봉합해주십사‘라고 요구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그에게 선거운동당시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가련하게도 말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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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5-12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다른 곳들도 아니고,
프랑스 해외령에서 르펜이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너무나 충격
적이네요.

기아나-과들루프-마르티니크...
프랑스 사람들 중에 소수 중의 소수
자인 이들이 자신을 대표할 사람으로
르펜에게 표를 던졌군요. 그야말로
하이퍼 리얼리스틱한 상황이네요.

필리핀에서도 독재자의 아들이 대통
으로 당선되었다는 뉴스를 듣고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시간이 너무 흘러 젊은이들이 당시
돈으로 10조원이나 해먹은 최악의
독재자의 아들을...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기괴한
정치적 현상을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12 11:48   좋아요 1 | URL
프랑스 대선에서는 마크롱이 당선되었지만, 5년 전보다는 표 차이가 많은 줄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극우세력이 신장되었다는 반증이겠지요. 경제가 어렵고 힘들어졌을 때, 가지지 못한 자들이 그나마 가진 것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극우세력에 동조하는 흐름은 코로나19를 통해 더 가속화된 듯 합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금리인상, 러-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세계경제의 위축 현상은 여기에 기름을 붓겠지요...
 

그 어느 조직보다 생존 본능, 조직보호 본능이 큰 곳이 검찰이에요. 하나의 유기체로서 전체 구성원들이 조직의 보호와 방어를 위해 볼트 너트 역할을 하죠.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절대로 하지 않으려는 검찰의 태도 이면에는 먼저 시인하면 뒤집어쓴다는 생각이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물론 우리나라 재판 시스템에서 판사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 더 크기는 해요. 하지만 판사는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죠. 자기가 먼저 수사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나라의 검찰은 수사권이나 기소권도 독점하고, 형 집행도 하고, 법령 해석도 하죠. 본연의 권한, 즉 수사지휘나 공소유지 차원에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 이상으로, 범죄정보 수집이라는 명목으로 일종의 변형된 사찰까지 담당하죠. 권한이 무한정으로 넓어져 있는 상황이에요.

스스로 자기들이 국가의 중추라고 생각하고, 엘리트 의식도 상당하고, 이 조직의 영속성에 대해 외부인이 언급하면 심하게 반발하면서도 실제로 자기들이 내세울 만한 인물도 자랑할 만한 사건도 없고, 반성도 못한다… 이게 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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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 한 권에 담은 문재인 대통령 주요 연설문집
문재인 지음, 대통령 비서실 엮음 / 김영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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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산하(再造山河).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표현으로 많이 회자된 용어다. 이제 며칠 후면 문재인 정부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는 시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남긴 여러 공과(功過) 역시 지나간 역사에 새겨질 것이며,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은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시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행의 시간으로 기억되겠지. 분노의 감정이 조금 더 컸기에 정권은 재창출되지 못했고, 지난 시간은 안타까움과 분노의 감정들을 각각 절반의 사람들에게 심어준 듯하다.

마음이 아프지만, 이제 부족했던 부분들을 깊이 성찰하고 보완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때라 여겨진다. 책을 읽은 시점이 때마침 예수 부활을 축하하는 부활절임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사순시기가 시작하는 느낌을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다음에는 연설문에 담긴 희망이 모든 이들의 일상에 뿌리내리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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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의 평화는 점진적·단계적 통일과정의 진전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너무 급속하고 전면적인 통일을 추구해도 평화에 위협이 되지만, 통일을 제쳐두고 평화만을 이야기한다고 평화가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지담론의 현실성을 높이기 위해 평화담론과 결합할 필요성은 많은 이들이 인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재정조달을 위해 상당한 수준의 국방비 감축이 필요하리라는 계산에 멈추어서는 불충분하다.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이를 빌미로 수구세력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복지확대를 위한 정치적 동력이 생기기 어렵다는 사실에까지 미쳐야 하는 것이다.

남북이 함께하는 2013년체제라면 당연히 6·15공동선언과 더불어 9·19공동성명도 복원된 상태를 뜻할 것인바, 이는 경제적 상호의존과 교류·협력이 꾸준히 증대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역협력을 한층 긴밀하고 원활하게 만들 것이다.

눈앞의 과제로는 원전의 안전성 문제가 있다. 이는 기술적인 능력뿐 아니라 관계기관의 신뢰성과 책임성 그리고 정보의 투명한 공개 등 민주주의 및 공정·공평 원칙과 직결된 문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평화의제와의 연결이 각별한데, 북과의 대결 추구가 어느 모로 보나 위험천만이지만 좁은 땅에 그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지어놓고 군사력이 좀 앞섰다고 일전불사를 외쳐대는 이들의 무모함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런 것이 제대로 문제삼아지지 않은 까닭은 무엇인가? 정부가 ‘배 째라’고 버티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고 이 땅의 자칭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진정으로 합리적이고 원칙있는 보수주의자가 드문 것이 또 하나의 이유지만, 국민들이 아무튼 북측 체제가 나쁜 체제고 북측 당국이 우리 정부보다 훨씬 나쁜 집단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인식 자체가 타당하다고 해도 남녘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이 북측의 소행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이런 엉터리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에게 향상은 없다.

분단체제는 남북이 서로 적대적이고 단절된 사회이면서도 동일한 ‘체제’라고 말할 만큼 쌍방 기득권세력이 공생관계에 있고 양쪽이 나쁜 점을 서로 닮아가며 재생산되는 구조다. 동시에 엄밀한 의미의 사회체제는 아니고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국지적 현실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애당초 남북분단을 주도한 현존 세계체제의 패권국을 포함해 수많은 외세가 개입해서 굴러가는 다소 느슨한 의미의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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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렇게 나라가 온통 난장판인데도 우선 내 먹을 것 있고 내 집값이나 좀 올라주면 나머지는 알 바 없다거나, 이 나라에 대해 그렇게 말이 많을 거면 이북에 가서 살지 그러느냐고 하면서 지내다보면, 각자의 마음마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황폐한 심전(心田)에서 독재정치와 불공정사회가 자라나고, 자칫하면 짐승 대신에 인간이 대량 살처분되는 전쟁이 터지거나 대규모 재해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87년체제의 기본적 한계는 무엇이었을까요? 여러가지 해석이 있겠습니다만 저는 민주화의 성취가 어디까지나 한반도 남녘에 국한된 성취였고 따라서 1953년 휴전 이후 굳어진 분단체제를 흔들기는 했을지언정 ‘53년체제’의 틀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존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것을 구성하는 국민국가들의 배타적이고 이론상 대등한 ‘주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국가가 패권국가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정부상태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중기적으로도 북의 급변사태를 방지하려는 중국의 의지와 능력에 큰 변동이 없을 터인데다, 지금은 내부적으로 비교적 질서정연한 승계작업이 진행되는 모양새이고, 중국뿐 아니라 미국, 러시아, 일본이 모두 행여나 순탄한 진행이 안될까봐 일제히 ‘안정 최우선’을 부르짖고 나오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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