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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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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선택의 결과,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시야의 범위안으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결코 한 가지 물건만 보지 않는다. 언제나 물건들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타인도 우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자신 역시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p11)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존 버거(John Berger, 1926 ~ 2017)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에서 작품 제작(製作) - 감상(鑑賞) - 소비(消費)라는 예술 시장의 모습를 통해 '보는 행위'의 의미를 살펴본다. 여기에서 저자는 '본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주된 방법으로 설명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사진] 다른 방식으로 보기(출처 : https://www.bfi.org.uk/news-opinion/sight-sound-magazine/features/image-lib-john-berger-ways-seeing)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보는 행위가 말에 앞선다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 준다.(p9)...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p10)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그렇다면, 제작 단계에서 작품은 사회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을까.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는  누드(nude)라는 표현 양식 안에 숨겨진 사회의 모습을 지적한다. 예술 작품 안의 불평등한 관계는 불평등한 사회관계의 연장선상에 놓인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p76)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유럽의 누드 예술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소유자)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인식을 형성한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p75)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그렇다면, 사회(또는 문화)는 '본다'라는 행위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을까. 이는 감상 단계에서 잘 드러나는데, 작자의 의도가 관객에게 전달되며 주관성과 객관성의 혼합으로 작품 안의 표현이 사회 인식으로 바뀌게 됨을 밝힌다.


 벌거벗은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평범성이라는 요소가 개입하게 된다. 이 평범성이란 단지 우리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 되기까지 타인은 어쨌든 신비스러운 존재다.(p70)... 우리의 시선이 성기로 옮겨 가면 곧바로 그것의 형태 자체가 보는 사람을 일방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 버린다. 즉 타인의 존재는 가장 기본적인 성적 범주인 남성 혹은 여성으로 축소되거나 격상된다.(p71)... 벌거벗은 몸이 최초로 드러나는 순간, 하나의 신비감이 상실됨과 동시에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신비감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 과정은 '주관적인 것 - 객관적인 것 - 두 가지가 결합된 힘'으로 진행된다.(p71)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이와 같이 제작 단계에서는 사회가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면, 감상 단계에서는 작품이 사회 인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기에 외부요인이 추가되면서, 예술 작품은 다양화된다. 구체적으로 책에서는 유화(油畵)와 같은 기법, 광고(廣告)와 같은 수단 등이 제시되는데 이들은 자본(資本 capital)의 영향의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유화(oil painting)라는 용어는 기법 이상의 것을 가리킨다. 기름에 물감을 섞어서 그리는 기법은 일찍이 고대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템페라 기법이나 프레스코 기법으로는 묘사하기 힘든 삶의 특정한 정경을 그리기 위해 기법을 특별하게 개발하고 완성시킬 필요가 생겼을 때, 비로소 미술형식으로서의 유화가 탄생한 것이다.(p98)...자본이 사회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유화는 사물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영향을 미쳤다. 마치 모든 것이 상품이 되었기 때문에 모두 서로 교환 가능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유화는 모든 사물을 동등한 대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p102)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광고는 미래 시제로 얘기하지만, 그 미래의 달성은 끊임없이 연기된다...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p169)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이와 같은 (예술) 작품의 다양화는 우리에게 그만큼의 이미지를 제공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형성되는 관계는 '원작 - 복제품'의 관계가 된다. 소비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이들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 ~ 1940)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barkeit>의 리뷰 몫으로 넘기도록 하자.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그 사진이 사진을 찍은 사람의 무한히 많은 시각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택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비록 모든 이미지가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긴 해도, 어떤 이미지를 보고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보는 방식에 달려 있다.(p12)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현재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 떼어낸 것이다. 이제 예술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우리 주위를 둘싸고 있다. 예술 이미지는 삶의 주류에 합류했는데, 이제 예술 자체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p39) <다른 방식으로 보기> 中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이처럼 '보기'라는 행위안에 담긴 의미를 예술 작품의 제작 부터 소비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제시한다. 여러 작품 사진과 함께 제시되는 이러한 예시는 자칫 어려워질 수 있는 내용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한다. 이와 같이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우리에게 '보기'라는 행위와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하기에 한 번 읽을 좋은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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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7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7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7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5-07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고 싶은 책인데 헌책방에서 만날 수가 없네요.

2019-05-07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7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7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7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5-07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 좋은 책이었습니다.
미술 보기도 이데올로기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 책이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5-07 23:42   좋아요 2 | URL
정말 그렇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작품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간결하게 설명한 좋은 책임을 저 역시 느꼈습니다. 아울러 존 버거라는 작가에 대한 관심도 커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5-07 23:50   좋아요 1 | URL
그래서 드는 생각인데요, 파시즘처럼 이데올로기가 없는 현상 이해가 과연 세상에 존재조차 가능한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19-05-07 23:53   좋아요 1 | URL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로서는 더 고민이 필요한 문제라 여겨집니다.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먼저 답을 얻으시고 공유 부탁드립니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 문명과 문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
외르크 피쉬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안삼환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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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후의 경향들은 프랑스어의 경우와 같다. ‘문명‘은 ‘문화‘의 특히 고도로 발달된 형태로서 둘은 동의어로 사용되며, 이 용법은 모든 사회과학에서 그야말로 보편적으로 전파된다.(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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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말 이후 도시의 부유층 사이에 어린이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감정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어린이들의 생명을 지키려는 단호한 의지였다.(p404)... 순환적인 생명 주기에 대한 인식은 서서히 인간 존재에 대한 직선적이고 다면적인 사고로 대체되었다.(p407) <사생활의 역사 3> 中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 1914 ~ 1984)는 <아동의 탄생 L'enfant et la vie familiale sous l'ancien regime>과 <사생활의 역사 3 Histoire de la vie prive'e: de la Renaissance aux Lumie'res>을 통해 이전과는 달리 서양에서의 '어린이'라는 개념이 근대에서 태어났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중세(中世 Middle age) 이전까지 아이들에 대한 생각은 어떠했을까.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자기 삶을 실제로 살 수 없는 생명의 전달자에 불과했다. 삶의 유일한 의무란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삶과 인간의 몸에 대한 이런 사고 체계에 의하면, 어린이는 가계도를 이루는 새 가지이자 시간을 초월하여 세세대대 이어진 거대한 집단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어린이는 적어도 부모에게 속하는 것만큼이나 가계에도 속했다. 이런 면에서 어린이는 '공적' 존재였다.(p401) <사생활의 역사 3> 中


 중세까지 개인 삶의 목적이 후손을 얻는데 있었기에, 어린이는 '성인 이전의 미숙한 존재'였다. 때문에,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교육(敎育 education)'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중세 이전의 교육이 가정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이루어졌다면, 근대의 교육은 학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가족과 학교는 함께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아이들을 분리시켰다. 학교는 이제까지는 방만했던 아동기를 점점 더 엄격해진 규율 체제 속에 가두었다. 이 규율 체제는 18 ~ 19세기에 아동기를 완전히 기숙사에 감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p648)... 근대의 가족은 공동체 생활로부터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대부분의 시간과 관심사를 박탈했다. 그것은 사생활과 정체성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주었다. 가족 구성원들은 감성, 습관 그리고 생활양식에 의해 결합되었다.(p649) <아동의 탄생> 中


 아리에스는 <아동의 탄생>에서 근대에 어린이의 개념이 태어나게 된 이유를 건강과 위생 그리고 교육에 대한 관심 증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들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 비어트리스 웹과 시드니 웹(Beatrice Webb, Sidney Webb)은 <산업민주주의 Industrial Democracy>에서 공교육이 강조된 이유를 경제 측면에서 보다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제조 공정은, 가능한 한 그 대부분이, 오로지 하나의 특수한 업무만을 할 수 있는 소년의 능력으로도 할 수 있도록 세분된다.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일은 하나의 새로운 불만이다... 그들의 불평은, 그러한 자녀가 어떤 숙련 직업을 배우지 않고, 매년 지극히 단순한 업무만을 계속하고, 그들이 성인 노동자의 보통 임금을 요구하기 시작하자마자 그들의 더욱 젋은 형제들에게 이롭게 해고되는 것을 볼 때, 더욱 커지게 된다. 이러한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교육적 봉사 연합의 요구를 포기한 노동 조합은, 단순한 소년 노동의 제한을 강제하고자 시도해왔다.(p244) <산업민주주의 2> 中


 웹 부부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 투입의 증가로 낮은 숙련도의 노동자 투입이 가능하면서, 산업화 시대에 성인남자의 노동을 여성의 노동으로, 여성의 노동을 보다 어린 자녀의 노동이 대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투입되는 노동의 가격, 임금(賃金 wage)이 낮아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자녀들이 자신의 노동을 대체하며 단순노동자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보던 노동자들은 노동 생산성을 높이려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자의 임금수준 유지와 함께 다음 세대의 노동 질(質) 향상 수단으로 아동 노동의 금지와 아동 의무 교육를 추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교육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면서 근대 사회의 특징이 더 명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사진] 공장에서 노동하는 어린이들(출처 :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img_pg.aspx?CNTN_CD=IE001293115&atcd=A0001546930)



 부모들이 새로운 교육 제도를 지지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다. 새로운 교육의 성공 비결은 꾸준히 성장하던 개인주의적 욕구에 전적으로 부합하면서 정신을 연마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가족의 범주 내에서 어린이의 '개인화'는 어린이에게 부과되었던 공적인 교육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었다.(p415) <사생활의 역사 3> 中


 산업화 또는 근대화를 통해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세대 구성원들은 가족의 일부가 아닌 개인(個人)으로서 자신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근대사회에서 개인주의(individualism)의 등장과 함께 어린이 역시 개인으로서 자리잡게 되면서, 이른바 '아동'의 개념이 태어났다는 것이 아리에스의 설명이다. 다만, 이 부분에서 마을 공동체의 붕괴와 함께 여성의 지위 약화가 뒤따라온 것은 또다른 근대화의 비극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교육 체제의 성공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교육 체제와 교육 개념, 그리고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근대 초의 가장 커다란 사건은 다시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p646)... 교육에 대한 이처럼 새로운 관심은 점점 사회 중심부에 자리잡아 갔고, 교육을 완전히 변모시켰다. 가족은 단순히 재산과 이름을 전하기 위한 사적 기능만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p647) <아동의 탄생> 中


 사실상 아기의 출산과 양육이 서로 분리되면서 순환적 생명 주기 속에서의 여성의 위치와 여성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그때까지는 매우 긴밀하게 결합했던 상호 보완적인 이 두 기능의 분리로 말미암아 여성은 단순한 재생산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여성에게서 단지 수태와 임신 그리고 출산의 역할만을 기대했다.(p412) <사생활의 역사 3> 中


 이처럼 아리에스의 <아동의 탄생> <사생활의 역사>는 어린이의 개념이 사회의 변화에서 나온 부산물이었음을 밝힌다. 그렇지만, 급속한 사회 변화에 따라 19세기에는 어린이는 가족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았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가족의 중심으로 그 중요도가 급속하게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화의 수단으로 활용되던 교육 역시 가정의 중심이 된 어린이들의 능력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엘렌 케이(Ellen K.S. Key, 1849 ~ 1926)의 <어린이의 세기 Das Jahrhundert des Kindes>와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1870 ~ 1952)의 <어린이의 비밀 Il Segreto dell'infanzia>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학교가 공통으로 지향하는 유일한 목적은 다음과 같다. 즉 '붉은 피와 맑은 눈, 넓은 가슴을 지닌 신체적/정신적으로 강하고 기민한 존재, 자신감과 온유함으로 채워진 존재, 미적 형상들에 대한 깨어 있는 시각과 신비스러운 것이 스며들도록 갈망하는 영혼, 이런 경이로운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을 감싸 안은 심장을 지닌 존재'를 양성하는 것이다.(p164) <어린이의 세기> 中


 개성적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 태아와 어린이가 인간의 창조자, 즉 인간의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린이의 창조자라는 말은 완전히 옳은 말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건축가는 어린이다. 어린이가 인간의 아버지다.(p55) <어린이의 비밀> 中


 근대화와 산업화가 가져온 변화를 통해 태어난 '어린이'. 어른의 예비 단계가 아닌 그 자체로 가정과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지만, 사회 약자인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 여겨진다. 어린이 날을 맞아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자신의 꿈을 찾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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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9-05-07 0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대 교육이 단순히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사회조직에 순응하는 존재로 만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족과 학교는 함께 어른들의 세계로부터 아이들을 분리시켰다. 학교는 이제까지는 방만했던 아동기를 점점 더 엄격해진 규율 체제 속에 가두었다.‘
‘ 부모들이 새로운 교육 제도를 지지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에 있었다. 새로운 교육의 성공 비결은 꾸준히 성장하던 개인주의적 욕구에 전적으로 부합하면서 정신을 연마시켰기 때문이다.‘


겨울호랑이 2019-05-07 08:35   좋아요 1 | URL
저 역시 이번 기회를 통해 제가 단편적으로 생각해왔던 사건의 배경에는 여러 사정들이 한데 어울어져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이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위험성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회의하고 공부를 해야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우향님 감사합니다!

2019-05-07 0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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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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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3: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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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4: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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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5: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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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5: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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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0-09-30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약 아이들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바란다면 캠퍼스를 바꿔야 한다고 떠들면서 다니던 시절이 생각나는 글입니다. 예전에 살던 곳 근처에 대학교가 있었습니다. 광장을 지나 작은 야산을 품고 있어서 고즈넉하고, 개미들이 바스락 대면서 열을 지어 이동하는 모습을 차근히 바라보다, 적어도 다섯 가지의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캠퍼스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보이는 곳이 아이들이 자라는 학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과 초중등학교의 배움터가 바뀌면, 별과 바람과 죽음과 삶이 고스란히 보이는 장소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될 쯤에는 뭔가 다른 시도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를 상상하곤 했습니다. 문득 감사의 시절 기운에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9-30 22:16   좋아요 0 | URL
어쩌면 시대에 따라 아이들에 대한 인식과 사회적 지위가 바뀌는 상황이 비극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른들의 필요에 따라 바뀌는 일시적인 정책이 아닌 모두가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대 위에 아이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초원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연휴 되세요~
 
어린이의 비밀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마리아 몬테소리 지음, 구경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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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태아인 어린이는 본질적으로 정신 발달에 있어서 인간의 형성 법칙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린이의 감춰진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어린이의 정신은 감춰진 인간을 해방시켜야 하는 어린이 속에 존재한다. 이것이 교육의 가장 우선적이고 긴박한 임무다.(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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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9-05-05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잘 알면서도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인 것 같아요.^^
오늘 또 되새기고 갑니다.

겨울호랑이 2019-05-05 12:26   좋아요 1 | URL
정말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다름을 저 역시 절감합니다. 매번 반성하고 돌아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외에 없는 듯합니다. 북프리쿠키님 자녀분과 행복한 어린이날 보내세요! ^^:)

2019-05-07 1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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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4: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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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5: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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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5: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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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세기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엘렌 케이 지음, 정혜영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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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의 부족 때문에 자주 어린이와 부모 사이에 깊은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오류가 생긴다(p122)... 어린이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놀이와 활동, 휴식에 대한 심리학 공부는 단지 적은 수의 자녀들을 돌보는 부모에게만 가능한 일이다.(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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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5-06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서 말하는 ‘적은 수의 자녀’가 구체적으로 몇 명을 뜻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자녀 수가 많은 부모는 자녀를 위한 심리학 공부를 할 수 없는 것인가요? ㅎㅎㅎㅎ

겨울호랑이 2019-05-06 09:08   좋아요 1 | URL
원문 중 일부를 발췌해서 뜻이 가려졌는데, 전체 문단에서저자의 뜻은 유치원 등 공공교육 담당자들이 책임지는 아이 수보다 부모가 담당하는 아이 수가 적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저자는 책에서 강조합니다 .^^:)

2019-05-07 1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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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4: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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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7 15: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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